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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의 서양사 현장르포 - 승자의 조건, 패자의 교훈(21)] 제국 로마의 ‘3대 국제도시’ 터키 안티오크 

이슬람 모스크에 성 바울로의 무덤이? 

로마·오스만·프랑스 지배 거쳤지만 ‘문명의 충돌’ 없이 공존
21세기 대한민국 국회에선 여전히 사상검증 두고 힘겨루기


▎터키-시리아 접경지대에 위치한 로마의 고대 도시 안타키아(로마 명 ‘안티오크’) 시내 모습. 도시를 가로지르는 오론테스 강을 따라 30㎞가량 나가면 지중해와 맞닿는다.
"Ich bin ein Berliner(나는 베를린 시민이다).”

1963년 6월 26일, 독일 방문 때 이뤄진 미국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명연설 중 한 구절이다. 동서로 갈린 베를린 장벽을 뒤로 한 채 이뤄진 이 날 연설을 보기 위해 베를린 시민 12만 명이 몰렸다. 당시의 끓어오르는 분위기가 흑백 영상을 통해서도 확연히 느껴진다.

케네디는 “나는 베를린 시민이다”라는 말에 앞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2000년 전, ‘나는 로마 시민이다’라는 말이 가장 큰 자랑거리였다. 오늘 자유세계에 있어서는 ‘나는 베를린 시민이다’라는 말이야말로 최고의 자랑거리다.”

1960년대 케네디는 ‘자유민주주의의 화신’ 그 자체였다. 46살 젊은 대통령의 희망찬 세계관과 풍요에 기초한 미국식 미래가 패전국 독일, 나아가 유럽과 자유세계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960년대는 냉전의 최절정기다. “나는 베를린 시민이다”라는 말은 동서로 갈라진 베를린의 현실을 이해하고, 자유 베를린을 끝까지 지켜나갈 것이란 의미로 해석됐다. 독일의 베를린이 아니라, 미국과 세계를 지키는 자유의 핵(核)으로서의 베를린이다.

케네디 명연설에서 주목할 부분은 2000년 전 자랑거리로 통하던 “나는 로마의 시민이다”라는 말이다. 케네디는 당시 연설에서, “나는 로마 시민이다”란 말의 원어인 라틴어 ‘CivisRomanus Sum(키비스 로마누스 섬)’을 또박또박 발음했다. 이는 2000여 년 전 문화·문명의 선구자, 로마의 ‘시민의식’을 압축한 구절에 해당한다. 한국으로 치면 ‘명문가 몇 대 손’을 뛰어넘을, 자존과 뿌리의 출발점이 ‘CivisRomanus Sum’란 말속에 투영돼 있다.

“나는 로마 시민이다”라는 말은 그저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의 구성원’이라는 뜻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로마 시민=대제국 로마가 끝까지 지켜줄 개인’을 의미한다. 아무리 볼품없는 개인이라도 일단 ‘로마 시민’으로 인정받을 경우, 대제국 로마가 끝까지 보호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대단한 대제국이라도 나의 희생만을 강요할 경우 멀어지게 된다. 대제국이 가진 엄청난 파워와 더불어, 구성원 개개인을 끝까지 지켜준다는 것이 대제국의 진짜 권위다. 로마가 크고 강력해질수록, 시민 개개인도 함께 성장해나갈 수 있다.

기독교 신자라면, 사도 바울로가 왜 일찍부터 기독교 포교에 나설 수 있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답은 로마 시민권이다. 유대인이지만,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진 인물이 바울로다. 군인용 천막을 만들어 재산을 축적한 부자 아버지 덕분이다.

키케로의 “나는 로마 시민이다”


▎1963년 6월 26일 독일 서베를린의 루돌프 빌데 광장에서 존 F. 케네디 당시 미국 대통령이 연설하고 있다. / 사진:존 F. 케네디 대통령 박물관
사도 바울로는 평생을 통틀어 예수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열두 제자에 포함되지 않는 인물이다. 오히려 막 탄생한 기독교를 탄압했던 ‘유대교 홍위병’이 바울로의 원래 모습이다. 유대교 율법학자 바울로는, 21세기 극단의 이슬람 원리주의자에 비견될 존재다. 그러나 꿈에 예수가 나타나 포교 계시를 내리면서부터 기독교 수호자로 180도 변한다. 예수의 열두 제자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속도에다 조직력을 통해 기독교를 전파한다. 기독교의 근본 교리나 의식의 대부분은 가톨릭의 베드로가 아닌, 그리스정교 바울로에 의해 창조됐다.

당시 로마 시민권자는 여행의 자유가 허용됐다. 로마 시민만이 판단하는 로마법에 의해 보호되는, 로마의 기득권자다. 따라서 포교활동을 하다가 현지에서 재판을 받을 일도 없다. 노예나 속주 시민일 경우 로마 군인의 개인적 판단에 따라 처형될 수도 있던 시대였다. 로마 시민이 주도하는, 로마법만이 바울로를 심판할 수 있다. 상층 지도부를 제외할 경우, 대부분의 로마 군인은 시민권과 무관했다. 21세기 미국에서도 볼 수 있지만, 시민권을 얻기 위해서는 생사를 넘나드는 전선에서 무려 25년간 군인으로 일해야만 했다. 정치적·사회적으로 볼 때, “나는 로마 시민이다”라는 말이 어떤 의미일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의 철학자이자 정치가 키케로는 “나는 로마 시민이다”라는 말을 유명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기원전 70년 부패 관련 재판정에 던져진 키케로의 말이다. 당시 부패 사범으로 지목된 인물은 가이우스 베레스(Gaius Verres)다. 시칠리아 총독으로 재임할 당시 행한 부정부패가 죄목이다. 키케로는 로마에 의해 부패 담당 검사로 지목돼 재판에 나선다. 베레스는 자신의 재산과 인맥을 총동원해 변호에 나선다.

엎치락뒤치락하던 재판은 36살 나이의 키케로가 제시한 증거 하나로 최종 결정된다. 로마 시민이었던 부하를 로마법이 아닌 베레스 자의로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한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나는 로마 시민이다”라는 말은 십자가에 처형된 로마 시민을 거론하던 중 나온 명구다. 로마 시민에게는 그 어떤 이유에서도 십자가 처형이 내려지지 않는다. 베드로는 예수가 그러했듯이, 십자가에 처형된다. 감히 예수와 같은 모습으로 죽을 수 없다면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처형됐다. 같은 순교자지만, 바울로는 결코 십자가에서 처형되지 않았다. 로마 시민권자이기 때문이다.

키케로는 생전에 원로원으로부터 ‘조국의 아버지(Pater Patriae)’로 추앙된 인물이다. 로마의 정신세계와 이후 중세 르네상스 계몽시대 동안 서방 윤리철학을 지배한 시대정신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로마를 그리스 정신문화와 연결한 인물도 키케로다.

베레스 재판은 키케로를 로마 상층부로 연결해준 데뷔 무대였다. “나는 로마 시민이다”라는 말이 키케로 명성의 출발점인 셈이다. 베레스의 비리에 국한된 것만이 아닌, 로마 정신의 우수성과 로마인의 자부심을 상징하는 메타포라 볼 수 있다. 바울로가 그러했듯이, 키케로도 로마 시민이었기에 ‘철학적·정치적·역사적’ 흔적을 뚜렷이 남겼다고 볼 수 있다. 로마 시민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업적이다.

지난 7월 이래 터키 안타키아(Antakya)에 머물고 있다. 지중해 동쪽 끝에 들어선 도시다. 안타키아는 고대 도시 안티오크(Antioch)의 터키 지명이다. 기독교 신자라면 ‘안디옥’으로 통하는 곳이기도 하다. 바다에서 30㎞ 떨어진 내륙이지만, 산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 도시로서 일찍이 몸집을 키웠다. 안티오크는 2000여 년 전, 로마·알렉산드리아에 필적하는 대제국 로마의 3대 도시 중 하나로 꼽혔을 정도로 규모가 상당했다.

사도 바울로의 포교 거점 ‘안디옥’


▎사도 바울로가 이스라엘 밖 기독교 포교 본부로 삼았던 안티오크의 석굴 교회. 전면의 장식은 12~13세기 십자군 때 만들어졌다. / 사진:유민호 객원기자
필자에게는 안타키아보다는 안티오크라는 지명이 가슴에 더 와 닿는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 대한 필자의 관심 때문일 것이다. 안타키아, 즉 안티오크에 들리기 전 주목한 인물은 철학자 키케로와 사도 바울로다. 키케로와 바울로 모두 안티오크와 인연을 맺은 인물이다.

키케로는 기원전 106년에 태어났다. 바울로는 출생연도가 확실치 않지만, 대략 서기 5년일 것으로 추정된다. 키케로가 바울로보다 100년 앞서 활동한 셈이다. 키케로와 안티오크의 관계는 군사적 부문에 집중된다. 당시 지중해 동편 안티오크 지역은 해적의 소굴이었다. 해적 퇴치와 페르시아 이민족으로부터의 안티오크 방어가 키케로의 업적이다.

사도 바울로와 안티오크의 관계는 초기 교회에 있다. 지금도 있지만, 바울로가 만든 이스라엘 밖 초기 교회가 안티오크 외곽 산 중턱에 들어서 있다. 화재와 지진으로 인해 붕괴-보수-개조가 되풀이된 곳이지만, 최근엔 러시아의 도움으로 재건된 상태다. 잔뜩 기대하고 들렀지만, 2000여 년 전의 흔적은 거의 없다. 특별히 제작된 교회라기보다, 바울로 이전에 신전으로 사용된 동굴을 재활용한 듯한 공간이다. 교회 뒤쪽 절벽에는 고대 당시의 활용됐을 석굴 무덤도 군데군데 남아있다. 추측건대, 바울로 교회가 세워지기 수천 년 전부터 주목받은 땅이다. 고대 신전에서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정기(精氣)가 표류한다.

안티오크는 기독교 신자라면 한 번쯤은 반드시 들어야 할 성지(聖地)에 해당한다. 기독교 신자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크리스티아노스(Christianos)’란 말 자체가 탄생한 곳이 안티오크 바울로 교회다. 기름을 부은 자, 즉 메시아(Messiah)를 의미하는 그리스어가 ‘크리스트(Christ)’다. 기독교 신자, 즉 크리스티아노스는 메시아 크리스트를 따르는 사람이란 의미다.

원래 기독교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출발했다. 유대인의 요구로 십자가형에 처했지만, 예수 자신도 유대인이다. 유대인은 특유의 율법·관행·습관에 매달리는 민족이다. 예를 들어 율법에 따를 경우, 유대인은 비유대인과 함께 예배나 식사를 해서도 안 된다. 남녀 분리는 기본이고, 교회에 간다고 해도 비유대인과는 별도로 참가할 수 있다. 따라서 유대인이 아닐 경우 기독교를 믿기 어려웠다. 예수는 믿지만, 제단 아래 신자들 간의 벽은 허물어지 않았다. 바울로는 그 같은 구별과 차별을 폐지한다. 유대교-비유대교 사이의 선을 허물고, 기독교를 세계의 종교로 만든 인물이 바로 바울로다.

“나는 안티오크 시민이다.”

안티오크에 들어선 순간 접한 말이다. 호텔 직원이 현지 상황을 설명하던 중 무심결에 던진 말이다. 공간적 의미의 거주민이란 의미만이 아닌, ‘특별한’ 문화·문명권에 대한 소속감을 표현한 말로 느껴졌다. 당연하지만, 자부심이 넘친다. 흥미롭게도, 이후 안티오크 곳곳에서 만난 현지인들로부터도 비슷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과연 ‘안티오크 시민’이란 말은 어떤 공통분모를 가진 걸까? 키케로와 바울로의 도시로서만이 아닌, 인구 21만 명의 고대도시에 밴 ‘안티오크 시민’의 평균 정서가 궁금했다.

‘안티오크 인심’ 바탕은 종교 포용성


▎안티오크의 한 거리에서 예수의 그림 옆으로 히잡을 두른 무슬림 여성들이 지나가고 있다. / 사진:안티오크의 한 거리에서 예수의 그림 옆으로 히잡을 두른 무슬림 여성들이 지나가고 있다.
구석구석 살피던 중 두 가지 측면이 인상 깊게 느껴졌다. 첫째는 평화와 배려다. 터키인 자체가 평화롭고 친절하지만, 안티오크 시민은 한층 각별하다. 코로나 전염병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필자 말곤 안티오크를 찾은 아시아인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바이러스 발생지 중국에서 온 사람으로 볼 수도 있으련만, 너무도 친절하게 대해준다. 어디를 가도 함께 사진을 찍자고 다가온다. 음식·차·아이스크림에 이르기까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대접하고 싶어 한다. 말도 안 통하지만, 웃음과 배려를 통해 인간의 정을 잇는다.

2020년 안티오크의 주된 구성원은 터키인과 아랍인이다. 각각 절반씩 차지한다. 아랍인이란 시리아·이라크·리비아 출신자를 말한다. 따라서 터키어와 함께 아랍어도 거의 공용어로 통한다. 이스탄불을 비롯한 에게 해 도시들에서는 보기 어려운, 아랍어 간판도 일상적이다. 음식도 숯을 이용한 아랍식 요리가 주류다. 시리아와 국경을 접하기 때문이지만, 시리아 난민도 안티오크 주변에 넘친다. 아랍인에 대한 차별이 있을 법하지만, 안티오크 밖에서 온 터키인을 제외할 경우 거의 없다고 한다. 어려운 상황에다,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지 못한 환경이지만, 지역민 모두가 공존·공영하는 곳이 안티오크다.

안티오크는 원래 시리아 역사와 맺어진 땅이다.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의 아시아 원정 때 본격 개발된 이래, 로마 비잔틴에 이어 십자군, 이슬람, 심지어 몽골도 거쳐 간 곳이다. 1923년부터는 안티오크를 포함한 시리아·레바논 지역이 프랑스 보호지역으로 변신한다. 식민지와는 다른 개념으로, 독립국으로 자립할 때까지 보호한다는 식의 통치 방식이다. 프랑스의 지역 내 개입은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대제국 터키의 분할 과정에서 등장했다. 11세기 십자군 전쟁 당시, 프랑스 군인들이 안티오크와 시리아 주변에 주둔했다는 것이 20세기 초 개입의 근거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시리아·레바논·요르단은 모두 독립한다. 이후 안티오크는 시리아가 아닌, 터키로 편입된다. 당시 안티오크 거주민의 대부분이 터키인이었기 때문이다. 온갖 역사가 뒤섞인 곳이고, 악명 높은 테러집단(ISIS)도 존재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들리기 전엔 다소 불안했지만, 도착한 지 1시간 만에 잊어버렸다.

종교적 포용성은 안티오크 시민에게서 발견한 가장 큰 공통분모다. 이슬람 모스크가 주류지만, 곳곳에 기독교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바울로 교회도 있지만, 그리스 정교 교회도 존재한다. 놀랍게도, 한국 개신교가 운영하는 기독교 교회도 하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바울로의 무덤이다. 바울로 무덤은 로마 ‘성 바울로 대성당(Basilica of Saint Paul Outside the Walls)’에 있는 것으로 통한다. 어느 것이 진짜인지 모르겠지만, 안티오크에도 바울로 무덤이 있다. 638년 세워진 이슬람 최고(最古) 사원으로 통하는 ‘하비브 나자르(Habibi Neccar)’ 모스크 안에 안치돼 있다. 로마 교회 안의 무덤에 비하면 너무도 초라하다.

그러나 ‘가톨릭 로마 교회 안에 이슬람 지도자 무덤이 들어설 수 있을까’라는 관점에서 보면 다르게 느껴진다. 이슬람 사원이 이탈리아 로마에 처음으로 세워진 것은 26년 전인 1994년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이슬람 사원은 로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가톨릭은 기독교 외에는 전부 불법으로 여긴다. 심지어 기독교 형제에 해당하는 그리스 정교조차 이단으로 몰아 무력 점령한 종교다.

민주주의 뭉개는 민주주의자


▎사도 바울로 무덤은 로마만이 아니라 안티오크에도 있다. 안티오크의 모스크 ‘하비브 나자르’에 있는 바울로의 무덤. / 사진:유민호 객원기자
안티오크만이 아니라, 터키와 중동 전체를 돌아다니며 느낀 것이지만, 이슬람은 평화와 관용의 종교다. 광신적으로 나아가는 원리주의자도 있지만, 신자의 99%가 평화를 신봉하는 조용하고도 성숙한 종교다. ‘알라냐 죽음이냐’라는 말은 와전되고 과장된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슬람은 다른 신을 믿어도 상관없다. 세금을 낸다는 전제 하에, 이슬람 외 종교도 허용해왔다. 오스만 터키의 경우, 비(非)이슬람 신자에게는 세금을 물리고 공직에 나서지 못하는 식으로 차별했다. 경제적·정치적 제약은 있지만, 종교 그 자체는 개인적 판단에 맡긴다. 서로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개인 간의 벽을 쌓지도 않는다. 시리아 출신의 기독교 신자를 만났지만, 안티오크에서 생활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들었다. 탈레반과 ISIS와 같은 극단 광신집단은 기독교 안에서도 존재한다.

“나는 안티오크 시민이다”라는 말은, 자신이 평화·친절에 기초한, 터키·시리아·아랍·이슬람·기독교를 뛰어넘은 존재라는 의미다. 안티오크를 거쳐 간 수많은 역사의 흔적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함께 공존하는 세상이다. 유대교 비유대교 모두를 상대로 한, 바울로의 포교 출발지가 안티오크였다는 사실이 생각난다. 다르기에 틀리다면서 비난 공격하기 보다, 서로의 경계선을 인정하면서 자기 영역 속에서 살아가는 자세가 “나는 안티오크 시민이다”라는 말 속에 배어있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키케로·케네디의 명구와 함께 안티오크에 머무는 중 떠올린 말이다. 대한민국의 우수성과 국민 개개인의 자부심이 녹아있다. 그러나 현실은 애매하고 척박하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라는 말이 갖는 기본적인 출발점이 로마나 베를린과 다르기 때문이다. ‘로마 시민인 이상, 베를린 시민인 이상 모두 끝까지 함께 간다’는 기본 전제가 없다. ‘대한민국 국민인 이상 끝까지 함께 한다’ 말할 때 동의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부정적·비관적·수동적 판단이라 비난할지 모르겠다.

최근 한국 신문에 오르내린 기사를 하나 보자. 지난 7월 23일 열린 통일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태영호 미래통합당 의원과 이인영 장관 후보자가 주고받은 말이 화제다.

태영호 의원: “인사청문회를 준비하면서 이 후보자 삶의 궤적을 많이 들여다봤다. 언제 어디서 사상전향을 했는지 찾지 못했다. (…) 저는 대한민국에 와서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이 후보자는 언제 어디서 더는 주체사상 신봉자가 아니라고 공개 선언한 적 있느냐.”

이인영 후보자: “북에선 사상전향이 강요되는지 모르지만, 남쪽은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있다… 남쪽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진다.”

필자는 장관 후보자의 사상 전향 여부, 발언의 옳고 그름 여부에는 관심이 없다. “남쪽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진다”는 장관 후보자의 ‘오만하고도 빈정대는’ 태도가 거슬릴 뿐이다. 국회의원은 국민이 뽑아준 의회 민주주의 대표자다.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 뒤에는 수만 명의 지지표가 버티고 있다. 민주주의는 그렇게 어렵고 고상한 것이 아니다. 민의(民意)가 핵심이다. 국회의원은 민의의 총아다. 설령 이인영 후보자가 민주주의론의 달인이라도 그런 발언을 해서는 안 됐다. 민주주의 운운하면서 스스로 민주주의를 부정한 폭언이기 때문이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7월 23일 서울 여의도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인사청문회에서 태영호 미래통합당 의원(가운데)이 이인영 통일부 장관 후보자(오른쪽)와 설전을 벌이고 있다.
키케로는 원래 로마 명문가 집안과 거리가 먼, 로마 바깥의 무명 ‘흙수저’에 불과했다. 케네디는 독일어도 못하고, 오랜 베를린의 역사와도 무관한 미국인이다. 명문가 출신 로마 원로원이 키케로에게 “진짜 로마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변방의 정치가 같은데…”라 말하고, 공습에 시달린 베를린 시민이 “전쟁 당시 베를린의 악몽도 잘 모르면서 무슨 베를린 시민…”이라 대응했다고 가정해보자. 키케로가 원로원보다 더 명문가 출신이었기에, 케네디가 베를린 시민보다 더 베를린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에 ‘현지 시민’을 자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로마 원로원과 베를린 시민들도 두 사람을 모독과 비난으로 맞이하지는 않았다. 원로원이 키케로를 ‘조국의 아버지’라 칭하고 12만의 베를린 시민이 열광적으로 케네디를 맞이한 것이 그 증거다.

통일부 장관 후보자 발언을 보면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라는 말이 갖는 한계와 모호함이 피부에 와 닿는다. 2~3년 전부터 시작됐지만, 한국 정치권에서 통하는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라는 말은 특정 계층에 한정된 개념으로 느껴진다. 로마나 베를린과 달리,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라는 말 앞에 ‘제한적’ 수식어가 따라붙는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에 찬성하는 사람만이 대한민국 국민이다”로 통하는 식이다.

수식어를 좀 더 확대해보자. “백선엽 장군을 친일분자라 생각하는, 김구 선생만이 국부라 생각하는, 그동안의 엄청난 치적을 고려할 때 성희롱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만이 ‘대한민국 국민’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우리가 생각하는 부동산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대한민국 국민이 될 자격도 없다는 의미다. 한발 더 나아가 ‘우리의 평가’에 반대할 경우 명예훼손 혐의로 처벌될 수도 있다. 유신헌법 당시의 ‘유언비어 유포죄’가 역사 명예훼손 혐의로 돌변해 운용되는 식이다.

이런 논리와 과정에서 볼 때, 태영호 의원은 영원히 대한민국 국민 영역 밖에서 살아갈 이방인에 불과하다. 민주주의 달인이 보면, 운동권의 숭고한 이념도 잘 모르는 탈북자는 애초부터 영역 밖이다. 따라서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가 아니라, “우리 생각에 동의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만이 대한민국 국민이다”는 말이 정확한 표현이다. 나머지는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이방인에 불과하다. ‘모두 함께’를 전제로 한 자긍·자부·자신과 무관한, 대한민국이란 전선(戦線)을 무대로 한 우군과 적 사이의 대치가 전부인 셈이다. 키케로 케네디가 와서 본다면 깜짝 놀랄, 사색당파·사분오열 속의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가 2020년 8월 한국의 현실이다.

동과 서, 십자군과 이슬람군, 터키와 프랑스를 오간 변경의 거주민들도 “나는 안티오크 시민이다”라 외친다. 광화문에 가서 모든 국민이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라고 외치는 날이 올까.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2009호 (2020.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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