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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이 발굴한 ‘오랑캐의 역사’(12)] 몽골제국 흥망과 유라시아 문명의 통합 

칭기즈칸 최강병기는 금나라와 싸우면서 배운 공성술(攻城術) 

부족 굴레서 자유로웠던 칭기즈칸, 정복지 장점 흡수해 급속 확장
제국 분열됐지만 중국·이슬람권 지배한 두 형제국, 문명 교류 가속


▎몽골군이 공성전에 투척기를 쓰는 모습. / 사진:위키피디아
1206년에 대몽골국을 세운 칭기즈칸은 1227년 죽기 전까지 역사상 최대의 초원제국을 일으켜놓았다. 서방의 서요(西遼, Qara Khitai)와 호라즘(Khwarazm, 花剌子模)을 격파하고(1218~1220) 카스피해 연안까지 진출했으며, 남쪽의 서하(西夏)를 멸망시켰다(1226). 흉노·돌궐 등 종래의 어떤 초원제국보다 넓은 판도가 확보되어 있었다.


▎대몽골국을 세운 칭기즈칸 초상. / 사진:바이두
그런데 이 방대한 초원제국도 몽골제국 팽창의 첫 단계에 불과한 것이었다. 50년 후(1279) 남송(南宋) 정복이 끝날 때는 당시 알려져 있던 세계의 대부분이 그 판도 안에 들어와 있었다. 인도와 유럽, 그리고 이슬람 세계가 완전히 석권되지 않고 살아남은 사실이 오히려 설명을 필요로 할 정도다.

이 설명으로 많이 제시되는 것이 최고 통치자 대칸(Qaghan)의 계승을 둘러싼 혼란이다. 초대 칭기즈칸(1206~27)에서 5대 쿠빌라이(1260~94)에 이르기까지 계승 때마다 제국이 상당 기간의 마비 상태에 빠지고 내전을 겪기도 했다. 칭기즈칸의 셋째 아들 오고타이(1229~41)가 물려받을 때는 그래도 순탄한 편이었지만 쿠릴타이(Kurultai) 절차를 거치는 데 2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고, 그동안 정복 사업 등 적극적 정책들은 보류 상태에 있었다.

오고타이 사후 그 아들 구육(1246~1248)이 물려받는 데 5년이나 걸린 데서 그 승계가 명쾌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구육의 뒤를 칭기즈칸의 막내아들 톨루이의 아들인 몽케(1251~59)가 물려받는 데는 3년의 시간이 걸렸고, 그동안 칭기즈칸 가문이 두 개 진영으로 갈라졌다. 톨루이 계와 조치(맏아들) 계가 하나의 진영을 이루고 오고타이 계와 차가타이(둘째 아들) 계가 이에 맞서는 대립이 길게 이어졌다.

대칸의 계승이 거듭될 때마다 몽골제국 지도부의 분열은 갈수록 심각해졌다. 오고타이 계승 때는 쿠릴타이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만 정복 사업이 중단되었지만, 구육과 몽케의 계승 후에는 제국의 통합성이 약해졌다. 쿠빌라이 계승 때는 두 개 쿠릴타이가 따로 열리며 내전이 일어났고, 제국이 4개 칸국(汗國, Khanate)으로 분열되기에 이른다.

국가 규모가 커지면 왕위 계승을 예측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작은 조직에서는 지도자 개인의 능력(완력과 지혜)이 조직의 유지와 발전에 필요하기 때문에 능력 위주로 후계자가 결정되고, 왕조가 세워진 뒤에도 형제 계승이 많다. 그러나 많은 후보자 중에서 선택할 경우 더 유능한 인물이 뽑힐 가능성은 크지만, 불확실성 때문에 혼란의 위험이 있다. 그래서 ‘정통성’의 기준을 세워 ‘선택’의 여지를 없애는 방법으로 제도를 안정시키게 된다. 중국 고대 상(商)나라에서는 왕위의 형제 계승이 많았지만 주(周)나라에서는 장자 계승의 원칙이 확립되었고, ‘신하가 군주를 선택하는(擇其君)’ 것은 반역의 죄목이 되었다.

정복 사업도 멈추고 권력승계 ‘형제의 난’


▎칭기즈칸의 셋째 아들 오고타이 초상. / 사진:바이두
그러나 장자 계승 원칙이 지켜지지 않을 때도 적지 않았다. 한(漢) 고조(전206~전195)가 죽고 15년간의 혼란 후 문제(전180~전157) 이후에야 계승이 안정되었고, 당(唐) 태종(626~649)은 형제들을 죽이고 부황을 겁박해서 황제 자리에 올랐다. 송(宋) 태조(960~976)도 아우 태종(976~997)에게 계승되었다. 1392년 개국한 조선에서도 태종(1400~1418)과 세조(1455~1468) 즉위 과정에서 장자 계승 원칙이 유린당하였다. 불확실성이 큰 창업(創業) 단계에서는 이념적 정통성보다 현실적 역학관계가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부족장 회의에서 지도자를 선출하던 쿠릴타이의 전통에 계승과정을 어렵게 만든 원인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럴싸하지 않다. 칭기즈칸은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많은 조직 원리를 만들거나 채용했다. 남송(南宋)과 금(金)나라는 물론이고 서요와 서하에서도 황위의 장자 계승 제도가 시행되고 있었으니, 좋아 보였다면 얼마든지 따라 했을 것이다. 자신이 후계자를 지정하고 쿠릴타이가 추인하도록 하는 방법은 그가 정한 것이었다. 추인의 과정은 계승의 타당성을 모든 구성원에게 확인시키는 과정이었다. 쿠릴타이 석상에서 후계자를 반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반대하는 길은 참석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후계자 옹위 세력은 쿠릴타이 기간 동안 군대·영토·재산 등의 재분배로 참석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칭기즈칸이 정한 계승방법이 그 자신의 계승에서는 꽤 원활하게 작동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형제간의 선택이 아니라 4촌 간의 선택이 되면 모든 구성원을 만족시키는 길을 찾기 어렵게 되어 내전의 위험까지 일어난다.

모든 구성원은 아니라도 대다수 구성원을 만족시킬 길이 있다면 이 계승방법이 지속될 수 있었을 것이다. 제국의 급속한 확장이 많은 구성원을 만족시킬 자원을 늘려주고 있는 한, 계승과정에서 불거지는 갈등은 구조조정의 열쇠로 순기능을 발휘했다. 쿠빌라이가 형인 몽케를 계승할 때 동생인 아리크 보케의 반발로 내전이 일어남으로써 이 계승방법의 한계가 드러났다. 쿠빌라이 이후는 장자 계승 제도가 채용되었으나 그 대신 4개 칸국에 대한 ‘대칸’의 통치권이 줄어들어 ‘몽골제국’은 실질적 분열 상태로 들어섰다.

몽골제국이 능률적인 계승방법을 채택해서 계승에 따른 혼란을 줄였다면 더 큰 제국을 이뤄낼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가상적 주장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1200년대에서 1270년 대까지 몽골제국은 파격적인 팽창을 거듭했고 그 과정에서 거듭거듭 새로운 상황에 직면했다. 대칸 계승 때마다 한 차례 휴식기는 새로운 상황에 맞추는 제국의 구조조정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그런 휴식기가 없었다면 제국의 팽창기가 60년 넘게 계속될 수 없었을 것이다.

유라시아를 석권한 몽골 군사력의 장점은 어디에 있었는가? 기마병의 위력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보다 덜 알려진 또 하나의 장점은 공성술(攻城術)이었다. 페르시아와 러시아 지역에서 기마병은 익숙한 존재였고 그만큼 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몽골군이 금나라로부터 “싸우면서 배운” 투척기 등 공성술은 처음 당해보는 서방 세력에게 절대적 위력을 발휘했다. 중국과 이슬람권에서는 서로 다른 방식의 투척기가 발전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253년 훌레구의 페르시아 정벌 때는 중국인 투척기 기술자 1000호를 데려갔고, 1272년에는 훌레구가 시리아 기술자를 보내 양양(襄陽) 공격을 돕게 했다고 한다. (토머스 올슨 [몽골제국의 상품과 교역] 9쪽)

13세기의 중국에는 공성술이 고도로 발달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국 군대가 다른 문명권으로 쳐들어가 그 기술을 써먹을 일이 없었다. 몽골군은 중국 발명품을 서방으로 가져가 그 가치를 마음껏 발휘한 것이었다. 공성술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군사기술만도 아니었을 것이다. 70년에 걸친 정복 기간 동안 여러 문명권의 기술과 제도 중 쓸모 있는 것을 꾸준히 채용함으로써 몽골군은 막강한 전투력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방대한 영역을 통치하는 방법도 그 기간 중 진화를 계속했다.

유목민의 불완전성, 패러다임 전환기엔 유리


▎오고타이의 아들 구육 초상. / 사진:바이두
문명권의 외곽부는 중심부와 달리 문명의 일부 요소만을 누린다. 그래서 외곽부의 유목민은 중심부의 농경민에게 ‘야만인’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목민이 누리는 문명의 ‘불완전성’이 오히려 농경사회에 대한 우위를 뒷받침해줄 때가 있다. 문명의 ‘패러다임 전환’ 단계에 이르면 변화에 쉽게 적응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로운 단계에서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을 배후지로부터 확보할 조건도 외곽부가 유리하다. 중화제국과 북방 ‘오랑캐’ 사이에 수백 년을 주기로 밀고 밀리는 형세가 뒤집히기를 거듭한 것은 이 때문이다.

몽골제국의 흥기에서 새로 나타난 현상은 중국과 이슬람권, 두 개 문명권의 영향을 함께 받으며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두 문명권은 오랜 세월에 걸쳐 영역을 확장해 왔고, 특히 이슬람권은 7~8세기 ‘이슬람 팽창’을 통해 이집트·메소포타미아·페르시아 등 여러 고대 문명권을 통합해서 대서양 연안으로부터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에 자리 잡고 중국과 함께 유라시아대륙의 양대 문명권을 이루고 있었다.

두 문명권의 확장에 따라 양자 간의 접촉도 늘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751년의 탈라스 전투 이후 직접 충돌이 없었던 것은 중화제국의 후퇴 때문이었다. 안록산의 난(755) 이후 당나라의 대외정책이 약화되었고, 5대10국(906~960)의 혼란을 정리하고 송나라가 일어선 뒤에도 서북방은 요-금과 서하에게 가로막혔다. 이 기간 중국과 이슬람권 사이의 교류에서는 남방 해로의 역할이 늘어났다. 그러나 이 해로는 인도에서 동남아시아에 이르는 힌두-불교 문명권을 지나가야 했고, 그 때문에 양대 문명권 간의 직접 교류보다는 말레이반도~말라카해협 일대를 분기점으로 하는 중계무역이 주된 양상이 되었다. 요컨대 양대 문명권 사이에는 교류의 잠재적 수요가 커지는 데 비해 교류의 실현이 미흡한 상태가 오래 계속된 것이다.

물리학 강의실에서 듣던 ‘3체 운동(three-body problem)’이 생각난다. 뉴튼 물리학에서 움직이는 두 물체 사이의 중력 관계는 고전 수학으로 충분히 표현된다. 그러나 세 개 이상 운동체(예컨대 해와 지구와 달) 사이의 관계는 표현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수학이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해야 했다는 이야기다.

문명 간 교류에도 마찬가지로 관계의 주체가 둘일 때에 비해 셋이 될 때 그로부터 파생되는 변이(variation)가 엄청나게 늘어나는 것 아닐까. 그중에는 돌연변이(mutation)가 일어날 가능성도 커지는 것 아닐까. 8세기 이래 중국과 이슬람권은 상당한 거리를 두고 각자 발전해 왔는데, 13세기에 이르러 몽골을 중심으로 한 유목민 세력이 양쪽 문명권과 긴밀한 접촉을 가지면서 3체 운동을 이루는 제3의 운동체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몽골제국은 동쪽에서 얻은 자산으로 서쪽을 압박하고 서쪽에서 얻은 자산으로 동쪽을 공략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칭기즈칸 거듭된 전투 통해 세력 키워 ‘자수성가’


▎구육의 뒤를 이은 몽케 초상. 몽케는 칭기즈칸의 막내아들 톨루이의 아들이다. / 사진:바이두
문명 간 중간세력의 흥기라는 점을 놓고 보면 육로의 중간에 위치한 유목민만이 아니라 해로의 중간에 있던 해양세력도 비슷한 기회를 맞지 않았을까? 7세기 말에 당나라 승려 의정(義淨, 635~713)이 인도에 다녀오는 길에 오래 체류한 스리비자야(Srivijaya)가 이 지역의 대표적인 해양세력이었다. 스리비자야에게는 경쟁세력이 계속 나타났기 때문에 크게 확장되지도 못하고 오래가지도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 단계에서는 해양보다 초원이 세력 확장과 활동의 확대에 적합한 지정학적 조건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토머스 바필드는 칭기즈칸이 제국 건설에 유목사회의 전통적 조직 원리를 따르지 않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기 사람’들을 만들어 활용했다고 본다.

“칭기즈칸은 초원제국을 일으키는 데 부족에 대한 충성심을 활용하기보다는 그 개인의 추종자들을 만들어 조직했다. 대다수 몽골 부족들은 그를 칸으로 선출해 놓고 이듬해에는 등을 돌리는 등 변덕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의 삼촌과 형제 중에도 때에 따라 그의 적들과 손을 잡은 일이 많았다. 그런 경험이 그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기 때문에 그는 자기 친족이나 다른 몽골 지도자들에게 권한을 위임할 때 그들의 독립성에 어떤 식으로든 제한을 두려고 들었다. 과거 흉노인과 돌궐인이 자기네 선우와 카간과의 사이에 가졌던 것과 같은 친밀한 관계가 몽골인들과 칭기즈칸 사이에는 없었다.” ([위태로운 변경] 191쪽)

바필드는 초원제국의 건설자 대부분이 세 가지 유형에 속한다고 보았다. (1) 초원의 한 지역을 차지한 강성한 부족의 지도자가 세력권을 확장하는 경우. (2) 무너진 지 오래지 않은 제국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경우. (3) 선출을 통해 추대되는 경우. (같은 책 187~188쪽) 칭기즈칸은 어느 유형에도 속하지 않고, 새로운 방법으로 조직을 만들어 거듭된 전투를 통해 세력을 키워낸 특이한 ‘자수성가’의 사례라고 한다.

바필드는 칭기즈칸이 부족의 전통을 등진 이유를 아버지가 죽은 후 아버지가 이끌던 부족이 유족에게 등을 돌리는 등 개인의 경험에서 찾는다. 그러나 당시 초원의 유동적 상황이 부족의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개방적 노선을 뒷받침해 주었기 때문에 주변적 위치에 있던 칭기즈칸이 ‘적자(適者, the fittest)로서 선택’받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자기 부족의 확고한 지지를 받는 지도자들에 비해 확실한 지지기반이 없던 칭기즈칸 같은 인물이 어떤 장벽을 돌파하기만 하면 훨씬 더 큰 확장성을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칭기즈칸은 ‘자기 사람’을 만드는 데 몇 가지 제도를 활용했다. 그중 ‘친위대(keshig)’가 그의 조직 원리를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린다 코마로프가 엮은 [Beyond the Legacy of Genghis Khan 칭기즈칸의 유산을 넘어](2006)에 실린 찰스 멜빌의 ‘The Keshig in Iran: the Survival of the Royal Mongol Household’(135~164쪽)에 친위대의 성격과 기능에 관한 상세한 설명이 들어있다.)

1206년 대몽골국을 선포하면서 칭기즈칸은 그 전에 100여 명으로 운용하던 경호대 대신 1만 명 병력의 친위대를 설치했다. 당시 그 휘하의 병력은 10만 명가량으로 추정된다. 전 병력의 10분의 1을 차지한 친위대는 최강의 정예부대가 되었다. (1206년에는 1000명으로 시작했다가 차츰 확대된 것으로 보는 연구자도 있다.)

다른 부대 장교들보다 더 우대받던 이 정예부대 병사에게는 개인의 무예(와 용모)도 필수였지만, 또한 대부분 지휘관과 귀족들의 자제였다. 각급 지도자들의 ‘인질’을 모아놓는 제도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인질’의 의미가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전국시대 이래 중국의 인질에는 단순한 협박의 장치를 넘어 두 나라의 관계를 다각적으로 증진시키는 상주(常駐) 외교관의 역할이 있었다. 한나라에서 청나라까지 황제의 근위대를 지방 세력의 자제로 많이 채운 것도 그 뜻의 연장이었다.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를 인질로 데려간 데도 그런 뜻이 있었다.)

친위대의 기능이 군사에 국한된 것도 아니었다. 기존 행정 기구가 맡지 못하는 업무를 대칸 측근의 인재 집단인 친위대가 맡게 되었고, 제국의 팽창에 따라 새로운 일거리가 끊임없이 나타났기 때문에 친위대는 몽골제국의 핵심 조직이 되었다. 쿠빌라이(1260~94) 즉위 후 친위대의 규모와 기능을 축소한 것은 정규 행정조직의 확장과 안정에 따른 결과로 이해된다.

귀순세력 지도부 자녀들 뽑아 친위대 편입


▎몽케의 동생이자 제5대 통치자인 쿠빌라이 초상. / 사진:바이두
칭기즈칸이 자기 친족과 부족에게 절대적 신뢰를 두지 않는 만큼 새로 거두는 추종자와 귀순 세력에게는 더 큰 포용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귀순세력의 지도부를 바꾸지 않고 기득권을 인정하는 대신 그 자제 중에서 친위대 병사를 뽑아갔다. 인질을 데려간 셈이지만 그 병사들은 제국 핵심부의 구성원이 되어 출세의 길을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에 고향의 부형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다. 초기의 친위대는 몽골족과 거란족·여진족·한족·카자크족으로 주로 구성되었지만, 제국의 확장에 따라 동쪽으로 고려인으로부터 서쪽으로 러시아인까지 제국 내 거의 모든 종족을 망라하게 되었다. 스티븐 호는 이탈리아인까지도 (마르코 폴로) 원나라에서 친위대 소속으로 활동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Marco Polo’s China: a Venetian in the realm of Khubilai Khan 마르코 폴로의 중국](2006) 165~168쪽)

1206년 세워진 대몽골국은 유목국가였다. 인접국 금나라에 대한 몽골의 정책 노선은 한 마디로 바필드가 말하는 ‘외경 전략(outer frontier strategy)’이었다. 금나라를 공격하더라도 영토 탈취가 아니라 재물과 유리한 교역 조건의 획득에 목적이 있었다. 오랑캐 출신이기 때문에 이 전략을 잘 이해하는 금나라는 몽골의 공격에 강경한 대응으로 일관했고, 그 결과 몽골은 원하지도 않는 영토를 획득하게 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생산력을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금나라의 군사 활동을 제한하기 위해 점령하는 영토였다.

이렇게 획득한 영토를 제대로 관리해서 조세를 징수하는 정책은 칭기즈칸에게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영토는 몽골 귀족이나 장군에게 영지(領地)로 하사해서 구워 먹든 삶아 먹든 마음대로 하도록 맡기는 것이 예사였다. 대몽골국이 제대로 다스릴 영토는 초원이었고, 농경 지대는 국가의 기본자산이 아니었다. 금나라로부터 빼앗는 땅에서 농민을 몰아내 초원을 늘리자는 주장은 이런 초원 중심의 유목민 관점에서 나온 것이었다.

1229년 오고타이 즉위 후 농경 지대에 대한 정책이 바뀌기 시작한 덕분에 1234년 금나라 멸망 후 북중국 일대가 몽땅 초원지대로 바뀌는 운명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정책 전환을 이끌어낸 대표적 인물이 야율초재(耶律楚材, 1190~1244)였다. [원사(元史)] 권146의 열전에 실린 그의 행적에서 몽골제국이 중국식 통치방법으로 전환해 가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그의 글도 [담연거사문집(湛然居士文集)]으로 전해진다.)

야율초재는 요나라 황실 자손으로 -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의 9세손 - 조부 때부터 금나라 고관을 지낸 집안 출신이다. 그 아버지가 60세 나이에 얻은 아들을 놓고, 큰 인물이 될 아이인데 다른 나라에 쓰일 운명이라며 “(남쪽의) 초나라 재목이 (북쪽의) 진나라에서 쓰인다(楚材晉用)”는 고사에 빗대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요나라 황손으로 금나라 벼슬을 하던 사람이 자기 아들이 또 다른 나라에 쓰일 것을 예상하고 그 생각대로 이름을 지어줬다는 것이 기이한 이야기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忠臣不事二君)”는 유교적 덕목에 구애받지 않던 오랑캐 왕조의 개방적 분위기를 보여주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금나라 조정이 1214년 변경(汴京, 즉 開封)으로 옮겨간 뒤 야율초재는 옛 수도 중도(中都, 즉 燕京)의 관원으로 남아 있다가 이듬해 몽골군에 함락될 때 포로로 잡혔다. 칭기즈칸은 풍채와 학식이 뛰어난 이 청년을 측근에 두었고 이 청년은 30년간 칭기즈칸과 오고타이의 조정에서 일하게 되는데, 1231년 이후에는 문관 최고직인 중서령(中書令)의 자리에 있었다.

요나라 황손으로 몽골 지배 정책 바꾼 야율초재


▎카라코룸 성곽과 궁전의 모형. 1235년 이후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 사진:위키피디아
야율초재는 중국뿐 아니라 이슬람권 방면으로 몽골 지배가 확장될 때도 농경 지역에 대한 살육과 파괴를 억제하는 전략과 정책을 꾸준히 건의했고, 추상적 ‘인의(仁義)’를 내세우기보다 조세 제도 등 ‘수익 창출 모델’을 제시하며 실용적 득실에 중점을 두었다. 그는 천문·지리·역법·술수(術數) 등 다방면의 박학다식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송나라의 학술이 성리학에 집중한 것과 달리 요나라와 금나라에서는 ‘실학(實學)’의 풍조가 성했고, 그것이 유목민 지도부를 설득하는 데 주효했던 것 같다.

조세원(租稅源)으로서 농민의 가치를 설파하여 과도한 살상을 억제하는 한편 유사(儒士)를 비롯한 각 부문 전문가 집단을 보호하고 등용하도록 이끈 것도 중국의 안정된 통치를 유도한 노력으로 볼 것이다. 오고타이에게 권해 4000여 명의 유사를 등용하게 한 1238년의 ‘무술선시(戊戌選試)’는 과거 제도에 접근한 시도로서 후일 쿠빌라이가 원(元) 왕조를 세우는 데 활용할 인재 집단을 창출한 계기로 평가된다.

자크 제르네의 [La Vie quotidienne en Chine à la veille de l’invasion mongole-몽골 침략 전야 중국인의 일상생활](1959)은 1250~1276년간 남송, 특히 그 수도 항주(沆州)의 생활상을 그린 책인데, 여기에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많이 인용된다. 폴로가 항주를 방문한 것은 몽골군에 함락된 뒤의 일인데, (항주는 1276년에 함락되었고 폴로가 유럽으로 돌아간 것은 1292년이다) 폴로의 기록에 나타나는 화려한 모습은 함락을 계기로 큰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근접한 시기의 관찰로 참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1234년의 금 멸망과 1276년의 남송 멸망 사이에 몽골의 정복 정책이 크게 바뀐 것이다. 유목민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랑캐로서 타자화하던 주류 한족사회와 마찬가지로 농경사회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유목민은 중국을 약탈의 대상으로만 봤다. 그러나 접촉면이 넓어지고 이해가 깊어지면서 농경민을 백성으로 다스리는 입장의 중화제국을 몽골 지도부가 지향하게 되었다. 그래서 1271년 원 왕조의 선포에 이른 것이고, 그 후의 남송 정복은 적국의 침략이 아니라 ‘천하’의 회복을 위한 사업이 되었다.

몽골 지도부의 정책 전환, 나아가 그 정체성의 재정립을 향한 변화를 주도한 대표적 인물로 야율초재가 꼽힌다. 몽골군의 진격이 사납던 시기에 몽골의 신하 노릇을 하였음에도 그는 후세 중국 학인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명나라의 손승은(孫承恩, 1481~1561)은 “어질음의 공덕이 이보다 더 클 수 있는가(仁者之功,孰能與京)?” 찬탄했고, 왕세정(王世貞, 1526~1590)은 그를 ‘원나라의 어진 인물 3인(元朝三仁)’의 하나로 꼽았다. 야율초재의 재능과 지혜(才智)에 대한 칭송이 워낙 많은 중에 어질음(仁)을 앞세운 두 사람의 평가가 특히 눈길을 끈다.

유목민 전통 고집한 초원의 제국은 몰락


▎요나라 황실 자손인 야율초재 초상. 칭기즈칸과 오고타이의 측근으로 활약했다. / 사진:바이두
칭기즈칸에게는 아들이 넷 있었다. 차남 차가타이는 장남 조치를 극력 배척했다. 어머니 보르테가 다른 부족에 납치되었을 때 묻어온 ‘잡종’이라고 주장했다. 둘 사이의 불화가 심해서 무던한 성품의 3남 오고타이가 낙점을 받았다. 4남 톨루이는 막내가 안방을 물려받는 유목사회의 전통에 따라 제국 중심부의 몇 가지 핵심요소를 물려받았다.

1241년 오고타이가 죽은 후 아들 구육이 물려받은 데는 이제부터 부자 상속의 원리를 세우려는 뜻이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오고타이 계가 대칸 자리를 독점할 형세가 아직 되지 못했기 때문에 큰 반발이 일어났다. 서방에서 큰 병력을 거느리고 있던 바투(조치의 아들)는 구육을 선출하는 쿠릴타이에 참석을 거부했다. 1246년에야 대칸에 즉위한 구육은 2년 후 군대를 끌고 서방으로 가던 중에 죽었다. 그가 그때 죽지 않았다면 내전이 일어났을 것으로 바필드는 추정한다. ([위태로운 변경] 215쪽)

구육이 죽은 후 바투와 톨루이 계의 연합으로 톨루이의 장남 몽케가 대칸이 되었다. 구육이 죽기 전에 차가타이 계를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인기 없는 인물을 억지로 앞세웠기 때문에 차가타이 계 내부에 분열이 일어나 힘을 모을 수 없었다.

바투는 4촌들 사이의 가장 연장자인 데다 병력도 컸지만 ‘킹메이커’ 역할에 만족하고 스스로 나서지 않았다. 몽골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자기 나라를 지키는 편을 택했다. 몽케의 계승을 도와주는 대가로 실질적 독립성을 보장받았다. 차가타이 계는 자기네 영역의 독립성을 강화하는 데 만족했고 오고타이 계는 끝까지 불복하다가 쇠퇴하고 말았다. 칭기즈칸 시절과 같은 통합성은 제국에서 사라졌다. 4칸 국의 분열은 이때 시작된 것이다.

1259년 몽케가 죽은 후의 계승 분쟁은 형제간에 일어났다. 몽케는 차제(次弟) 쿠빌라이와 함께 남송 정벌에 나서면서 3제 훌레구를 페르시아 정벌에 보내고 말제(末弟) 아리크 보케에게 수도 카라코룸을 맡겼다. 몽케가 정벌 중 죽자 쿠빌라이와 아리크 보케가 대칸 자리를 놓고 다투다가 쿠빌라이가 승리를 거두고 이듬해 대칸 자리에 올랐다. (몽케에게는 9명의 동생이 있었지만 중요한 역할을 맡은 4형제만을 놓고 형제의 서열을 표시한다.)

몽골의 계승 분쟁이 제국의 분열로 이어진 경위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그런데 이 과정에는 우연으로 볼 수 없는 하나의 추세가 있는 것 같다. 당시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했고 기록을 남기지 않았더라도, 분열의 방향을 정해주는 어떤 기반조건이 있었던 것처럼 생각된다.

분열의 단층선이 ‘문명’에 대한 태도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정착 농경사회가 문명의 주인이고 유목민은 손님인 것이 문명의 ‘정상 상태’다. 정착사회의 질서가 무너져 손님이던 유목민이 주인 노릇을 맡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상황은 ‘패러다임 전환’ 단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유목민 중에는 주인 노릇을 흔쾌히 맡으려는 경향이 있는가 하면 새 역할을 거부하고 살던 방식대로만 살려 드는 경향도 있다. 몽골제국의 분열은 이 두 개 노선의 분화에 따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리크 보케는 카라코룸에 머물면서 초원의 전통을 지키는 보수적 입장에 섰기 때문에 형제들과 대립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대칸 자리에 오른 몽케가 중국 정벌에 나서면서 동생 훌레구를 페르시아(이란) 방면 정벌에 보낸 뜻이 무엇이었을까. 자기 집안(톨루이 계)의 세력 확대를 바라는 몽케 입장에서 발전 가능성이 가장 큰 방면들을 자기 형제가 독점하고자 한 뜻으로 이해된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장기적으로는 초원이 아니라 문명권의 농경지대에 있음을 간파한 것 아닐까.

중국·이슬람 문명권 속으로 들어가 주인노릇


▎토머스 바필드가 지은 [위태로운 변경](동북아역사재단, 2009) 표지.
농경지대의 힘은 쿠빌라이와 아리크 보케 사이의 쟁투 과정에서 확인되었다. 쿠빌라이는 정면 대결을 서두르는 대신 카라코룸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아리크 보케는 초원을 지키는 유목민의 순수성을 자기 정통성의 근거로 내세웠겠지만, “순수한 유목민이란 곧 가난한 유목민”이라던 오언 래티모어의 말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는 굶주림을 피해 서쪽으로 옮겨가 차가타이 계와 오고타이 계 지도자들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거부당하고 패망했다.

쿠빌라이가 아리크 보케를 격퇴한 후 칭기즈칸 이래의 수도인 카라코룸을 버리고 지금의 베이징 자리에 대도(大都, Khanbaliq)를 세운 것은 몽골제국 전체에 대한 대칸의 통치권을 축소하더라도 ‘똘똘한 한 채’에만 집중하겠다는 뜻이었다. 중앙 초원의 차가타이 칸국, 서방 초원의 금장(金帳, Golden Horde) 칸국, 페르시아 방면의 일-칸국(Ilkhanate)과 중국의 원나라, 4개 칸국의 분립은 이렇게 이뤄진 것이다. 원나라 황제가 대몽골국 대칸의 지위를 계속 지켰지만 명목상의 권위에 그치게 되었다.

칭기즈칸의 네 아들 중 장남 조치와 차남 차가타이의 후손은 칸국 하나씩을 지키게 된 반면 3남 오고타이의 자손은 몽케-쿠빌라이 형제와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세력을 잃었다. 한편 4남 톨루이의 자손은 대칸의 타이틀과 함께 두 개 칸국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일-칸국은 다른 칸국들과 달리 원나라의 대칸과 밀접한 관계를 오랫동안 지켰다. ‘일-칸(Il-khan)’이란 호칭 자체가 대칸에게 위임받은 종속적 통치자라는 뜻을 담은 것이었다.

일-칸국과 원나라의 사이가 각별히 가까웠던 이유는 중시조인 훌레구와 쿠빌라이가 형제간이었다는 데 있었다. 그런데 [Culture and Conquest in Mongol Eurasia-몽골시대 유라시아의 문화와 정복](2001) 및 [Commodity and exchange in the Mongol empire-몽골제국의 상품과 교역](1997) 등 토머스 올슨의 연구로 밝혀지는 두 나라 사이의 장기간에 걸친 긴밀한 관계를 보면 이유가 그것만이 아닌 것 같다.

일-칸국과 원나라는 초원제국의 성격을 지킨 다른 두 칸국과 달리 이슬람권과 중국의 문명권에 들어가 주인 노릇을 맡은 왕조들이다. 몽골제국의 팽창 과정에서 마주친 양대 문명권의 경영에 몽케-쿠빌라이-훌레구 3형제의 뜻을 모은 결과가 두 왕조였고, 두 왕조가 지속되는 동안 두 문명권 사이에 활발한 교류가 계속되었다. 김호동이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에서 설명하는 ‘세계사’의 탄생을 비롯해 문명의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여러 가지 현상이 이 시기 두 문명권의 교류를 통해 빚어지게 된다.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전반에 걸친 두 나라 사이의 관계에서 ‘유라시아 문명권’의 통합을 향한 움직임을 읽을 수 있다.

※ 김기협 - 서울대·경북대·연세대에서 동양사를 공부하고 한국과학사학회에서 활동했다. 1980년대에 계명대 사학과에서 강의하고, 1990년대에 중앙일보사 연구위원(객원), 전문위원(객원) 등으로 일하며 글쓰기를 시작했다. 2002년 이후 18년간 공부와 글쓰기를 계속해왔다. 저서로 [밖에서 본 한국사](2008), [뉴라이트 비판](2008),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2010), [아흔 개의 봄](2011), [해방일기](10책, 2011~2015), [냉전 이후](2016) 등이 있다.

202010호 (2020.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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