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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우의 청와대와 주변의 역사·문화 이야기(10)] 외국 귀빈 맞는 영빈관(迎賓館) 변천사(제2부 대한제국~현재) 

박정희 때 완공 ‘장충단 영빈관’ 첫 손님은 뤼브케 서독 대통령 

일제, 조선 자주독립 상징 환구단 허물고 조선호텔 건립
1978년 지은 청와대 영빈관, 국빈 유숙 시설 없어 아쉬움


▎옛 환구단 전경.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조선을 황제국으로 선포하기 위해 경운궁 맞은편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환구단을 세웠다. 지금은 사진 속 왼쪽 건물인 황궁우만 남았다. / 사진:국가기록원
조선호텔의 주소는 서울 중구 소공로 106, 지번상으로는 소공동 87-1번지다. 1912년 일제 토지조사부의 소공동 87번지는 6916평으로 나온다. 이 자리는 대한제국 시절 남별궁 터에 세웠던 환구단(圜丘壇: 원단 또는 원구단이라고도 함)이 있던 자리다.

환구단은 천자(天子)가 기우제 등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제천단(祭天壇)으로 조선 초기부터 존재해 왔다. 그러나 ‘천자가 아니면 하늘에 제사할 수 없다는 의견들이 있었기에 없앴다가 다시 쌓았다’는 [태종실록] 11(1411)년 10월 27일 기록이나, ‘여러 해 동안 천신(天神)에 제사를 거행했으나 제후국의 법도에 어긋난다는 까닭으로 그만두고 시행하지 아니한 지 이미 여러 해’라는 [세종실록] 20(1438)년 12월 19일 기록처럼 동아시아의 질서상 천자가 아닌 제후국(諸侯國)의 왕이 천신에 제사 지내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논란 때문에 여러 차례 환구단을 없앤 일이 있었다.

고종은 1년간의 아관파천 이후 1897년 2월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이어서 1897년 10월 13일 조선의 국호를 ‘대한’으로, 임금을 ‘황제’로 호칭하며 조선이 황제국임을 선포했다. 조선이 중국이나 일본, 서구 열강의 황제국들과 대등한 격을 가진 나라임을 알리는 것이 조선의 자주독립을 강화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898년 남별궁 터에 환구단을 새롭게 세우면서 대한제국 역시 황제의 나라, 천자의 나라임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렇듯 웅대한 뜻을 가지고 심혈을 기울여 세웠던 환구단도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庚戌國恥)와 함께 몰락의 길을 걷게 됐다. 이 환구단 권역에 들어선 시설 중의 하나가 조선호텔이다. 조선호텔의 이전 명칭은 ‘경성 철도여관’이었다. 철도여관이란 철도를 이용하는 고객들의 편의를 위해 철도역 인근에 세워진 숙박이 가능한 시설을 말하며 철도호텔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910년 당시는 이미 경인철도(경인선)와 경부철도(경부선) 그리고 서북철도(경의선)가 운행 중이었다.

조선총독부 직속 기관인 철도국에서는 1912년 7월 15일 부산철도호텔을 시작으로 각 철도역 근처에 서양식 건물과 설비를 갖춘 여관(호텔)을 세워 직영했다. 특히 경성역 인근에 세워질 철도여관에 대해서 [매일신보] 1913년 2월 27일자 ‘철도여관의 신축’ 제하의 기사에는 “경성의 여관 부지는 환구단으로 결정됐다”며 환구단의 훼철(毁撤)을 공식화했다. 그리고 1년 후 [매일신보] 1914년 2월 24일 자 ‘철도여관의 명칭’ 제하의 기사에는 “철도호텔의 명칭을 조선호텔로 명명하기로 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조선호텔의 시작이다.

1914년 9월 20일 약 80만원(圓)의 예산을 투입해 지하 1층, 지상 4층의 건물로 준공된 후 다음 달인 10월 10일부터 정식으로 운영되기 시작한 조선호텔의 각 방에는 대부분 욕실이 갖춰져 있었고, 탁상전화·세면소 등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호텔은 큰 식당과 사교실, 난방과 소방 시설, 승강기와 주차장까지 갖췄던 일류호텔이었다.

[매일신보] 1914년 11월 8일 자 ‘조선호텔 영업 호황’ 제하의 기사에 “개업 후 22일간의 영업 총수입은 7828원(圓)18전(錢), 대소연회 29회, 숙박 인원은 129명이었다. 그 중 내지인(일본인)이 54명, 영국인 13명, 미국인 45명, 스위스인 1명, 기타 4명”이라는 내용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조선호텔은 개업 초기부터 호황을 누렸음을 알 수 있다.

환구단 부지를 훼철하고 건립된 조선호텔은 조선총독부의 직영호텔로 단순히 상업적 목적만으로 건립된 호텔이 아니었으며, 일제 식민통치의 상징으로도 활용됐다. 1915년 경복궁에서 개최된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를 방문하는 외국 귀빈 숙소를 비롯해 주일미국대사·정무총감·조선총독 등 주요 인사들과 일제와 관련 있는 권력자들이 활발하게 사용했으며 각종 회의나 행사도 빈번하게 개최됐다. 1922년 10월 7일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閑院宮載仁親王)과 1931년 4월 27일 간인노미야 하루히토 왕(閑院宮春仁王)이 방한했을 때도 조선호텔에 묵었다는 기사를 통해 이 호텔이 일제의 영빈관 기능도 겸했음을 알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 별장 자리에 워커힐호텔


▎서울 장충동 영빈관 건물 전경. / 사진:국가기록원
광복 이후 조선호텔은 귀속재산이 됐으며, 1958년 8월 31일 화재로 4층이 전소돼 수리한 바 있다. 그러나 미군정당시부터 미군 및 유엔군의 숙소와 사무실 등으로 주로 사용되다 1961년 3월 30일 한국 정부에 반환돼 1961년 4월 13일 교통부로 이관하기로 결정됐다. 용도·사용처 등과 관련한 문제로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으나, 1961년 11월 1일 외국인 전용호텔(관광호텔)로 재개관했다.

당시 호텔업은 외자 확보 및 획득에 용이할 뿐 아니라 관광산업의 중요한 시설이었다. 하지만 조선호텔과 반도호텔 그리고 해운대호텔 등 정부 주관의 서울과 지방에 있던 몇몇 호텔을 수리하는 것을 제외하면 객실 규모 증가 등과 관련해서는 별다른 진척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196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도 나아지지 않았다. 마침내 정부는 1962년 4월 24일 국제관광공사법을 선포하고 국제관광공사를 설립, 그동안 국영으로 운영하던 조선호텔·반도호텔을 비롯한 지방의 관광호텔들, 서울역과 부산역의 식당 등등에 대한 운영권을 넘기게 됐다.

그 후 조선호텔은 늘어나는 관광 수요를 고려해 1967년 6월 국제관광공사와 미국항공(American Airline)이 건설 계약을 체결한 후 기존의 4층 건물을 철거하고 현재와 같은 20층 규모의 건물을 신축해 1970년 3월 17일 재개관했다. 1969년 12월 18일 국제관광공사에 위탁 운영 중이던 조선호텔과 관련해 총무처에서 국무회의에 제출한 ‘영빈관 운영 개선’ 제하의 의안 내용에 따르면 “영빈관 운영 결손을 최소한으로 감소하고 영빈관의 순수성을 유지함과 아울러 재산의 효율적 관리를 위해 수상급 이상의 방한 국빈과 외무부 장관이 인정하는 귀빈에 한해서 유숙하도록 하되 이 개선책이 신축 중인 조선호텔이 개관된 후에 시행한다”고 명시돼 있다. 조선호텔이 영빈관의 기능을 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1946년 5월 16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대일 배상특사였던 에드윈 폴리 대사 일행, 1965년 11월 8일부터 나흘간 ‘구엔카오 키’ 월남(베트남) 수상 일행 48명, 제6대 대통령 취임식(1967년 7월 1일)에 참석하기 위해 1967년 6월 29일부터 닷새간 방한한 험프리 미국 부통령과 50명의 수행원 등 다수의 국빈이 조선호텔에 묵었다.

그렇지만 조선호텔의 객실 규모로는 늘어나는 대규모 외국의 방문객을 수용하기에 부족하다고 판단한 정부는 이승만 대통령의 한강 별장 자리였던 지금의 서울 광진구 광장동 지역에도 호텔을 지었다. 19만1500여 평에 총 35개 건물로 구성된 워커힐이라는 매머드급 호텔은 6·25 전쟁 당시인 1950년 12월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미 제8군사령관 워커(Walton H. Walker) 장군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1963년 4월 개관했다.

워커힐호텔 역시 개관 당시에는 국제관광공사가 운영했으나 경영상의 문제로 1973년 3월 선경(SK)그룹이 인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66년 10월 31일부터 2박 3일간 방한했던 존슨 미국 대통령 내외와 수행원의 숙소, 제6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사또 에이사쿠(佐藤榮作) 일본 수상 등 24개국 60여 명의 숙소로도 사용되는 등 국빈 규모에 따라 여러 호텔이 국빈의 숙소 역할을 대행했다.

일제 관저였던 ‘한국의 집’도 국빈급 손님 맞아


▎1963년 당시 조선호텔 전경. 조선호텔 정문으로 사용했던 환구단 정문과 뒤쪽으로 황궁우와 반도호텔이 보인다. / 사진:국가기록원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관공서와 일본 기업은 물론 사찰·호텔 등 일본인 소유의 대부분이 미군정의 통제를 받는 귀속재산이 됐다. 조선총독부 제2인자였던 정무총감의 관저도 그중 하나였다. 대일 항쟁기 정무총감의 관저였던 한국의 집은 사육신으로 잘 알려진 조선시대의 문신 박팽년(1417~1456)의 사저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 2가 80-2번지(퇴계로36길 10)에 위치한 한국의 집은 대지 7153㎡(약 2163평)으로 필동 2가는 조선 초기에는 한성부 남부 훈도방(薰陶坊) 지역이었으며 대일 항쟁기인 1914년부터는 대화정(大和町) 2정목(丁目)이라고 했다가 1946년 필동 2가로 바뀌었다.

광복 이후 1950년대 중반까지도 정부 차원의 국빈급 손님이 방문 시 묵을 수 있는 적절한 장소는 마땅치 않았다. 기껏 사용할 수 있는 호텔은 반도, 조선호텔 정도였으나 그마저도 미군정 관련 다수 인원이 묵고 있어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은 제한적이었다. 정무총감의 관저였던 ‘한국의 집’도 귀속재산으로서 미군정의 관리하에 있다가 1948년 정부가 수립된 이후 공보처 산하로 이관돼 내외 귀빈들의 숙소인 영빈관으로 활용됐다.

‘코리아하우스(Korea House)’로 불렸던 한국의 집은 한국전쟁 기간 중 밴 플리트 미8군사령관의 관저로, 그리고 관저 이외의 나머지 가옥과 시설은 미군의 편의시설과 게스트하우스로 이용됐다.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3년 8월 4일 방문한 덜레스 미 국무장관 일행도 한국의 집에서 묵었다는 기록을 언론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정부의 중요 시설로서 새롭게 단장을 완료한 1957년 9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수행원 22명과 함께 방한한 응오딘지엠 월남 대통령은 한국의 집에서 유숙(留宿)했다. 이를 보면 당시 한국의 집도 공식적인 정부의 영빈관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1967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뤼브케 서독 대통령을 영빈관 현관에서 영접하고 있다. / 사진:국가기록원
한국의 집은 그동안 코리아하우스·영빈관·귀빈관 등으로 불려왔으나 1957년 6월 24일 대통령 소속 공보실에서 처음으로 ‘한국의 집’으로 공식 명명한 이후 1960년대 말부터 한동안 ‘한국소개관’으로 명칭이 바뀐 적이 있다. 그러나 1978년 다시 한국의 집으로 이름을 개칭해 현재까지도 그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독일의 루프트한자(Lufthansa) 전세기를 이용해 1964년 12월 6일부터 9박 10일의 일정으로 서독을 방문했다. 그리고 뤼브케 서독 대통령도 그에 대한 답방 형식으로 1967년 3월 2일부터 4박 5일간의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의 안내로 영빈관 서쪽 2층 큰 방에서 한국에서의 첫 밤을 보냈다. 뤼브케 대통령은 1967년 2월 28일 개관한 신라호텔 영빈관의 첫 번째 손님이었다.

신라호텔은 서울 중구 장충동2가 202(동호로 249)의 지번 주소를 가지고 있다. 이 지역은 대한제국 시기 장충단(奬忠壇)의 권역에 속해 있었다. 일반인들에게는 장충단공원으로 더 잘 알려진 장충단은 원래 조선시대 한성부 남부 명철방(明哲坊)에 위치하면서 도성 수비와 방어를 담당한 남소영(南小營: 어영청의 분영)의 옛터에 세워진 제단이다. 이경직·홍계훈 등 을미왜변 당시 사망한 충신과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광무 4(1900)년 10월 27일 고종 황제의 명에 의해 만들어진 이 제단은 충성을 장려한다는 뜻에서 ‘장충단’이라 명명됐다. 그리고 이듬해인 1901년부터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당시의 희생자들도 함께 배향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현충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장충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의 결과로 1906년 2월 서울에 통감부가 설치돼 일제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면서 장충단 권역도 야유회와 운동회 장소, 사격장 건설 등 공원화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술국치 무렵까지 제사와 관련된 부분은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충단 영빈관’ 세 명의 대통령 거쳐 완공


▎1957년 한국의 집 개관식(왼쪽)과 1958년 개관 1주년 기념공연. / 사진:국가기록원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7년 4월 20일 자 ‘고교운동(高校運動)’ 제하의 기사에는 “관립 한성고등학교에서 장충단에서 운동회를 연다”는 기사가 등장하지만 같은 신문 4월 28일 자 ‘문외운동(門外運動)’ 제하의 기사에는 “우천으로 연기된 운동회를 당일 장충단에서 개최하려 했는데 군부에서 허락하지 않았다”는 기사도 등장하는 것으로 봐 장충단의 많은 지역이 비록 지속해서 공원화돼 가고 있었으나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던 장충단만은 적어도 1909년 가을까지 군부의 통제하에 유지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09년 10월 말부터 상황은 반전되기 시작했다.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가 사살된 것이다. 그리고 11월 4일 장충단 남쪽 기슭에서 이토의 추도회가 거행됐다. 순종 황제는 이토가 태자 영친왕의 스승이었다고 사후 이틀 후인 10월 28일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까지 내려줬다. 이후 1910년에는 매 4월과 10월에 거행하던 장충단 치제(忠壇致祭) 관련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봐 이토의 추도식 이후부터 이미 장충단에서의 제사는 금지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1919년 4월 3일 자 [매일신보(每日申報)]에는 “장충단과 훈련원(訓練院)을 금년부터 십 개년 계획으로 공원과 운동장으로 만들 계획”임을 밝히고 있다. 장충단 권역이 지금의 장충단공원으로 바뀌게 된 배경이다. 또한 일제는 1930년 12월 조선병합의 일등공신인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한 사당 건립 계획을 수립하고 그 대상지로 장충단을 선택했다.


▎청와대 영빈관의 외부 전경. / 사진:국가기록원
[매일신보] 1930년 12월 18일 자 ‘이등 공 보리사 건설(伊藤公菩提寺建設)로...’ 제하의 기사에 의하면 “본당의 위치는 장충비 동남쪽의 현재 정자가 있는 곳에 세우기로 했다”고 해 개략적이나마 당시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사찰은 이토의 23주기 기일인 1932년 10월 26일에 맞추어 완공됐으며 사찰의 명칭은 박문사(博文寺)로 정해졌다. 박문사라는 이름은 이토의 이름인 이등박문(伊藤博文)에서 따온 것이다. 또한 사찰이 자리잡고 있는 언덕도 춘무산(春畝山)이라고 명명됐다.

춘무가 이토의 호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토를 추모하는 사찰은 ‘춘무산 박문사’로 불리게 됐으며, 대한제국의 현충원 격인 장충단 권역은 을사늑약과 경술국치를 지나면서 철저히 파괴돼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사찰과 공원으로 변모하게 됐다. 어쩌면 일제는 1909년 11월 장충단에서 이토의 추도회를 거행할 때부터 장충단을 파괴할 음모를 꾸몄는지도 모른다.

일제 패망 후 장충단 지역은 고종 황제가 뜻했던 것처럼 한동안 국립묘지로 사용됐다. 1946년 군이 창설된 이후 장충단에는 옹진·포천 등 38선 지역과 오대산·지리산 등 기타 여러 지역에서 작전 중 전사한 장병들의 영현(英顯)이 봉안됐다. 장충단의 장충사(獎忠祠)는 1950년 4월 16일 개수 공사가 완료됐으며 박문사의 본당 건물을 충혼전(忠魂殿)으로 사용했다.

농사 장려하던 ‘경농재’ 자리에 청와대 영빈관


▎1958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영빈관 건설 장소인 박문사 본당 터를 둘러보고 있다. / 사진:국가기록원
그러다 1956년 동작동에 새로운 국립묘지가 만들어지면서 장충단은 그 기능을 다 하게 됐다. 전쟁 이후 장충단 권역을 정비하게 됐을 때 육군체육관·재향군인회관·한국반공연맹자유센터·중앙공무원교육원 등등 여러 건물이 들어찼다. 박문사 본당 터에도 국빈용 영빈관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여러 채의 건물이 세워지게 됐다. 지금의 신라호텔의 영빈관이 그것이다.

1958년 11월 14일 국무회의에는 영빈관을 짓기 위한 ‘장충단공원 부지 국유화 신청안’이 부의됐다. 11월 27일 이승만 대통령도 현장을 직접 방문해 돌아본 후 12월 30일 영빈관용으로의 장충단공원 부지 국유화가 가결됐다. 신축공사는 1959년 1월 13일부터 시작은 됐다. 그러나 4·19 혁명의 여파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면서 영빈관은 기초공사 단계에서 중단됐다. 윤보선 정부 당시 추가로 건물 지붕까지는 완성했으나 5·16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면서 또다시 공사가 중단됐다.

그렇지만 영빈관의 필요성을 느꼈던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1964년 11월 30일 건축 예산 4300만원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1965년부터 공사는 다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두 번의 공사 중단 등 우여곡절을 겪은 후 8년 만인 1967년 2월 28일 드디어 오늘날의 신라호텔 영빈관이 완공됐다.

그러나 국빈 위주로 운영되던 영빈관이 일반 호텔처럼 흑자를 내기는 쉽지 않았다. 경영난에 빠진 것은 워커힐호텔도 마찬가지였다. 1972년까지 국제관광공사가 관리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마침내 정부는 영빈관을 일반에 매각하기로 하고 1973년 6월 26일 영빈관과 인근 국유림 약 2만7000여 평에 대한 공매 공고를 냈다. 대상 물건은 1097평의 영빈관 건물, 임야 2만7600평, 집기·비품류 2046점, 관상수 4만3215본 등 28억원 상당이었다. 참여 업체는 삼성 계열의 ㈜임페리얼(호텔신라의 전신)과 정우개발 등 두 곳이었다.

결과는 25억원을 써낸 정우개발보다 3억여원이 더 높은 28억4420만원을 써낸 ㈜임페리얼에게로 돌아갔다. 1973년 11월 1일 신라호텔의 기공식이 열렸다. 그러나 처음부터 공사는 순탄치 않았다. 차관도입 문제, 오일쇼크 등 난항을 겪어가면서 5년 4개월 간의 공사 끝에 완공했다. 1979년 3월 8일 지하 3층 지상 22층 규모의 대형호텔인 신라호텔이 문을 열게 된 것이다.

1970년 이후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국빈은 증가했지만 청와대 내에는 만찬이나 연회 등 행사를 치를 공간이 마땅치 않아 여러 가지로 불편하고 또 국가 위상과도 걸맞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많은 인원이 참석하는 대규모 회의도 자주 열리게 됐는데 당시 청와대에는 마땅한 공간도 없었다. 따라서 청와대 내에 대규모 행사장을 갖춘 지금의 영빈관을 마련했다.

이 터는 원래 고종 30(1893)년 경농재(慶農齋)가 있었던 곳으로 부속건물인 대유헌(大有軒) 등과 함께 농사를 장려하는 뜻에서 건립된 곳이다. 그러나 대일 항쟁기 언제인지 모르게 경농재 지역의 건물들은 모두 헐리고 그 자리에는 일제의 관사가 들어섰다. 일제 패망 이후 남아 있던 관사 중 하나인 36호 관사에서는 1960년 4월 28일 이기붕 부통령 일가족 4명이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청와대 영빈관 공사는 1978년 1월 15일 시작했다. 부족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주변의 민가 일부도 매입했다. 시공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건물 외부의 30개 대형 열주(列柱)를 세우는 공사였다. 열주의 원석은 전북 익산시 황등면에서 채석한 화강암으로 특히 전면에 세운 이음새가 없는 4개의 통기둥은 1개의 중량이 60t에 달해 운반하고 다듬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공사는 1978년 12월 22일 완공됐으며 12월 27일 저녁 박정희 대통령의 제9대 대통령 취임 축하 리셉션과 만찬, 축하공연이 거행되기도 했다. 큰 변화 없던 영빈관은 지은 지 20년 후인 1998년 10월 주변에 산재해 있던 노후 건물들을 정비하기 시작해 2000년 6월 새롭게 단장한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 나라의 영빈관이란 그 나라를 대표하는 외교 시설이다. 청와대 영빈관도 당연히 그렇다.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국빈이 영빈관이라는 건물 자체를 통해서 우리의 역사·문화·예술 수준을 느낄 수 있도록 미국이나 일본, 심지어 북한의 영빈관처럼 국빈이 유숙도 가능한 별도의 시설을 새롭게 검토해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싶다.

※ 이성우 - 전 청와대 안전본부장.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용인대에서 경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대통령경호실에서 25년간 근무했다. 2007년 발간된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대표 저자이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같은 해 ‘대한민국 문화유산상’ 문화재청장 감사패를 받았다. 현재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개정판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010호 (2020.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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