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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식의 부국굴기(富國屈起) | 자유시장경제의 원류를 찾아서(22)] 작지만 부유한 ‘남반구의 스위스’ 칠레 

포퓰리즘 유혹에 NO라고 말할 수 있는 나라 

피노체트 군부독재의 신자유주의 실험, 경제 도약 동력 확보
과감한 개방으로 안정적 발전, 라틴 아메리카 선두로 떠올라


▎피노체트 군사 독재 시절 피해자들을 기념하는 장소. 피노체트는 칠레에 경제발전이라는 업적과 인권탄압이라는 상처를 동시에 안겨줬다. / 사진:위키피디아
바빌로니아에서 싱가포르에 이르기까지 부국굴기에서 살펴본 나라는 모두 지구 북반구에 자리하고 있다. 이번 호에서 살펴볼 칠레는 부자 나라 시리즈에서 유일하게 지구촌 남부에 속하는 사례다. 세계 정치경제를 논할 때 종종 남북문제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는 부국 vs 빈국, 또는 선진국 vs 개발도상국의 대립을 의미한다. 그만큼 북반구의 경제발전과 남반구의 열악한 경제가 대비되는 것이 현실이다.

사실 경제발전 수준만 놓고 본다면 칠레를 앞서는 나라는 많다. 폴란드, 헝가리, 체코 등 우리가 미처 다루지 않은 중·동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있고, 같은 남반구에 호주나 뉴질랜드가 칠레보다 더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칠레는 유럽이 세계로 진출해 식민지로 삼은 지역에서 부상한 새로운 주자다. 게다가 유럽계가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와는 달리 칠레는 인구 대부분이 메스티소(Mestizo), 즉 유럽인과 현지인의 혼혈 집단이다.

칠레는 라틴 아메리카를 대표할 만큼 이 지역에서 가장 성공적인 경제 발전을 이룩한 국가다. 만약 주된 관심사를 라틴 아메리카의 경제 강대국에 둔다면 멕시코나 브라질을 다뤄야 할 것이다. 인구 2억 명이 넘는 브라질은 2019년 국내총생산(GDP) 1조8000억 달러로 라틴 아메리카에서 최대 규모다. 인구 1억2000만 명을 초과한 멕시코도 GDP는 1조2000억 달러에 달한다. 이에 비해 칠레의 인구는 1800만 명 정도에 불과하다. 다만 2019년 국제통화기금(IMF) 추정 1인당 국민소득은 1만5000달러 이상으로 멕시코(1만118달러)나 브라질(8797달러)보다 높다. 브라질이 브릭스(BRICs)라는 떠오르는 강대국 클럽에 중국, 러시아, 인도, 남아공 등 강대국들과 어깨를 겨누고 멕시코는 미국 및 캐나다와 북미 자유무역 지대(NAFTA)를 형성하고 있지만, 칠레만큼 높은 소득 수준을 자랑하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유엔이 발표하는 인간개발지수(HDI)에서도 칠레는 우루과이와 함께 라틴 아메리카의 선두 주자다. 작지만 부유한 나라 칠레는 어떻게 남반구의 스위스가 될 수 있었을까.

아르헨티나의 작가 에세퀴엘 마르티네스 에스트라다는 이웃 나라 칠레를 두고 “지구에서 위치와 모양이 제일 나쁜 나라”라고 표현했다. 위치가 나쁘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다는 뜻이다. 칠레는 서쪽에 광대한 태평양이 펼쳐져 있고 남쪽으로는 남극해에 발을 담그고 있다. 동쪽은 아메리카 대륙의 척추라고 할 수 있는 안데스 산맥으로 막혀있고 북쪽은 아타카마 사막으로 단절되어 있다.

세계 개발 문제의 석학인 미국의 경제학자 제프리 삭스는 [빈곤의 종말]에서 바다에 접한 나라는 복 받은 나라지만 육지에 갇힌 나라는 발전이 어렵다고 설명한 바 있다. 바다는 이동이 비교적 간편하기 때문에 교류와 발전이 그만큼 쉽기 때문이다. 다만 칠레가 접한 바다는 다른 육지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세계에서 제일 긴 나라

칠레는 1540년대 스페인이 침공해 식민지로 삼았지만, 산티아고 항에서 대륙의 남쪽 끝을 돌아 대서양을 건너 유럽의 카디스 항까지 가는 데는 95일이나 걸렸다. 거대한 태평양을 넘어 동아시아까지도 짧은 길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스페인이 지배하는 라틴 아메리카의 중심지는 중미의 멕시코와 남미의 페루였다. 각각 아스텍과 잉카 제국이 있었던 곳이다. 그 시기 칠레는 페루 리마의 지배를 받는 입장이었다. 칠레는 말하자면 스페인 제국 ‘주변의 주변’이었던 셈이다.

어린이들이 세계 지리를 배울 때 칠레는 세상에서 제일 긴 나라로 유명하다. 남북으로 4200㎞의 길이를 자랑하면서도 폭은 평균 140㎞에 불과한 뱀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뜨거운 열대 기후의 아타카마 사막부터 빙하가 지배하는 남극 기후까지 자연의 다양한 파노라마를 자랑한다. 게다가 짧은 폭의 140㎞ 안에 드높은 안데스 산맥이 태평양 바다와 마주하고 있으니 인구 대국으로 성장하는 데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 실제 칠레에서 사람들이 주로 모여서 생활하는 지역은 온대 기후를 가진 수도 산티아고 부근이다. 현재 전국 인구의 1/3 정도인 540만 명이 수도 산티아고에 거주한다.

16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까지 스페인 식민지 칠레는 인구 70만 명 정도에 불과한 작은 주변부 지역이었다. 참고로 미국은 1776년 독립 당시 인구가 250만 명이었다. 식민 초기에 건설된 산티아고가 중심 역할을 하지만 그곳에는 1758년이 돼서야 산 펠리페 왕립대학이 수립되고, 1805년에 식민 조폐(造幣)국이 설립됐다. 라모네다(La Moneda)라고 불리는 이 조폐국 건물은 19세기 독립 이후 대통령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만큼 변변한 행정건물이나 법원 등도 없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식민 시기에 칠레는 라틴 아메리카의 중심지 리마에 식량과 생필품을 제공하는 생산 기지에 불과했다.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번화한 수도 리마에 밀을 수출하던 칠레였기에 “칠레 없는 리마는 없다”는 표현이 생겼고, 축산업의 발전으로 칠레는 ‘수지(獸脂)의 나라’(tallow country)로 불렸다. 스페인 제국의 가장 빛나는 부를 생산하는 곳은 남아메리카의 칠레가 아니라 포토시 광산이었다. 19세기 라틴 아메리카의 스페인 제국이 붕괴하자 리마는 페루의 수도가 됐고, 포토시 광산을 보유했던 지역은 볼리비아로 독립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개가 짖지 않은 이유


▎‘산해튼’(산티아고 +뉴욕 맨해튼)이라고도 불리는 산티아고 시내 광경. / 사진:위키피디아
제도주의 경제학으로 노벨상을 받은 미국의 더글러스 노스는 자유로운 영국과 봉건적인 스페인을 비교한다. 영국은 사람들이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제도를 발전시켰다. 영국에는 자유롭게 토지를 사고파는 시장이 있었기 때문에 누구나 땅을 사서 생산적인 방법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토지의 사적 소유권도 법원이 잘 지켜주었다. 반면 스페인은 자유로운 시장에서 사람들이 활동할 수 있는 제도적 여건이 갖춰지지 못했다. 그 결과 스페인보다는 영국에서 장기적으로 경제발전이 일어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영국의 발전 친화적 제도는 미국에 이식됐고, 스페인의 봉건적 제도는 라틴 아메리카에 수출되어 뿌리를 내렸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제국주의를 통해 영국의 발전적 제도와 스페인의 봉건적 제도가 신대륙으로도 확산됐다는 주장이다. 실제 미국은 자본주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강한 사적 소유권이나 법치 국가의 전통을 영국으로부터 이어받았다. 하지만 라틴 아메리카는 노예제나 노동을 억압하는 대농장 제도와 같은 봉건적 관습을 유지했고 미국과 달리 국가가 개인의 경제적 자유를 보호해 주지 못했다.

영국과 스페인 등 모국 제도의 역할을 부정하기는 어렵지만 다른 구조적 요소들이 식민지 아메리카 대륙에서 더 큰 역할을 했다는 주장도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은 현지 인디언들이 거의 멸종돼 백인만의 나라를 형성했고, 결과적으로 평등한 정치사회 질서를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반면 라틴 아메리카에는 원주민들이 상당 부분 생존해 사회의 기층(基層)을 이루는 한편 사탕수수와 같은 열대작물의 재배를 위해 아프리카 노예를 대량 수입했기 때문에 백인~현지주민~흑인으로 이어지는 매우 불평등한 사회 구조가 만들어졌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경쟁하는 사회질서가 미국에서는 쉽게 만들었지만 라틴 아메리카에서 뿌리내리기는 무척 어려웠다는 지적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정치질서와 정치 붕괴]에서 국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셜록 홈스를 인용해 발생한 사건을 분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개가 짖지 않은’ 사실도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 라틴 아메리카의 문제는 유럽이나 동아시아처럼 경제발전을 강하게 추진할 수 있는 효율적인 국가가 없었다는 점이다. 거시 역사적으로 강한 국가를 만들어내는 것은 전쟁의 경험이나 안보의 위협인데, 실제 라틴 아메리카는 유럽이나 동아시아와 비교했을 때 19세기 초반의 독립전쟁 이후 무척 평화적인 역사를 누렸다.

국가 운명을 걸고 치열하게 경쟁해야 경제발전의 동인(動因)도 강하고 국가도 효율적으로 진화하는데 라틴 아메리카는 기존의 불평등한 식민지 사회구조를 재생산하는 데만 열중했다는 의미다. 실제 미국 마르쿠스 컬츠(Marcus Kurtz) 교수의 [라틴 아메리카의 국가 건설 비교]라는 연구를 보면 19세기부터 현재까지 칠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만이 어느 정도 탄탄한 국가를 가졌다. 이들은 역설적으로 식민지 라틴아메리카의 전형적인 사탕수수 대농장이나 금·은광 등 식민지 경제의 기반을 갖지 못한 주변부 나라들이다.

라틴 아메리카에 위치했지만 상대적으로 미국처럼 동질적이고 평등한 사회였던 이 세 나라는 생존하기 위해 강한 국가를 만들어야 하는 소국들이었다. 아르헨티나는 대국 브라질과 자주 전쟁을 치러야 했으며,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사이 끼어있는 완충 국가였다. 칠레 또한 페루 및 볼리비아와 태평양 전쟁(1879~1884년)을 치렀다. 후쿠야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개가 짖지 않았던 라틴 아메리카에서 그나마 칠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는 조금은 짖어야 했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칠레와 아르헨티나는 스페인 제국에서 독립한 이후 사회를 지배하는 엘리트 계층이 단결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장 안정적인 국가 체제를 유지해 왔다. 멕시코나 브라질처럼 광활한 영토에 인종적, 문화적 다양성이 심한 나라에 비해 결집력을 발휘하기가 그만큼 쉬웠던 셈이다. 제국주의가 노예를 동원해 사탕수수나 담배 농사를 짓던 시대에는 빈곤한 주변부에 불과했지만, 19세기 유럽에서 시작한 산업혁명이 서서히 다른 대륙으로 전파되면서는 유럽을 모방하는 전략을 펴기가 한결 수월한 나라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대표적으로 20세기 초반 성장의 대표주자로 부상하며 경제 발전의 궤도에 먼저 올라섰다. 1870년대부터 1914년까지 아르헨티나의 연평균 성장률은 6%로 세계 최고를 자랑했으며 1인당 국민소득은 영국이나 미국보다는 낮았지만 유럽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보다 높을 정도였다. 당시 미국과 비슷하게 아르헨티나는 유럽의 이민을 대폭 받아들이는 성장의 메카였다. 21세기 호주의 시드니처럼 당시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인구의 절반 정도가 이민자일 정도로 아르헨티나는 꿈의 나라였던 셈이다.

치고나간 칠레, 거꾸로 간 아르헨티나


▎세계에서 제일 큰 생산량을 자랑하는 구리 오픈 광산, 추키카마타. / 사진:위키피디아
하지만 그때부터 지난 100년 동안 아르헨티나는 지속적인 쇠퇴의 길을 걸어왔다. 1971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사이먼 쿠즈네츠(Simon Kuznets)는 세상에는 선진국과 개도국, 일본과 아르헨티나라는 네 종류의 나라가 있을 뿐이라고 말하곤 했다. 일본은 빠르게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올라선 나라라면, 아르헨티나는 신속하게 선진국에서 개도국으로 후퇴하는 나라라는 뜻이다. 아르헨티나가 쇠퇴의 함정에 빠진 이유는 다양하지만 몇 가지 눈에 띄는 요소들을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아르헨티나 경제의 부상은 광활한 대지에 농업과 축산업을 발전시킨 결과다. 특히 19세기 후반 냉장기술의 발전과 해운의 보편화는 아르헨티나의 곡식과 쇠고기 수출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농산물 수출에서 산업화의 단계를 뛰어넘는 데는 실패했다. 예컨대 초등교육 수준은 세계 최고였지만 중등교육은 엘리트주의의 폐쇄적인 모습이었다. 미래를 위해 투자하기보다는 현실에 만족하는 모양새였다.

게다가 20세기 중반 아르헨티나를 지배한 페론 정권(1946~1955년, 1973~1974년)은 자유무역보다는 보호주의를 선택했고, 빈곤을 퇴치시킨다는 목표로 적극적인 분배 정책에 나섰다. 동아시아의 네 마리 호랑이가 자유무역의 기회를 백분 활용하던 바로 그 시기에 아르헨티나는 나라의 문을 닫아걸었던 것이다. 분배정책 또한 정치적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단기적 수단으로 전락했다. 페론이즘으로 불리는 이 정치세력은 아직까지도 아르헨티나를 지배하고 있으며, 아르헨티나는 21세기에도 지속되는 외채와 인플레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20세기 초까지의 칠레는 아르헨티나에 비해 낙후된 지역에 불과했다. 하지만 21세기 현재 칠레는 아르헨티나를 추월했고, 라틴 아메리카의 경제 모델로 불려도 손색이 없다. 칠레와 아르헨티나는 모두 20세기에 군부 세력이 집권하는 등 파란만장한 정치사를 경험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칠레는 아르헨티나와는 다른 경제 정책을 선택했고 이는 안정적인 경제 발전의 토대가 됐다.

새로운 경제 모델 실험실

20세기 중반까지 칠레의 정치경제는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나라와 별 커다란 차이를 드러내지 않았다. 칠레의 경제는 수출의 90%를 구리가 차지할 정도로 광산업에 의존하는 전형적 개발도상국의 구조를 갖고 있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칠레의 인플레이션은 항상 두 자리 숫자를 기록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미국은 쿠바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한 뒤 라틴 아메리카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많은 경제지원을 했지만 이것이 선진화나 국가 발전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칠레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독보적으로 새로운 정치 실험에 돌입했다. 1964년에는 기독교민주주의 정당이 집권함으로써 유럽 밖에서 기민주의(Christian democracy)를 실험하는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1970년에는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가 주도하는 사회주의 세력이 선거를 통해 집권에 성공했고, 주요 산업의 국영화와 토지의 분배정책 등 진보적 정책 프로그램을 실천했다. 하지만 아옌데의 실험은 참담한 실패로 귀착됐다. 농업과 산업 등 모든 분야에서 생산은 축소됐고, 인플레와 무역 적자는 치솟았다.

왼쪽으로 기울어진 경제정책을 다시 오른쪽으로 조정한 것은 1973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 장군의 군사정권이다. 당시 군부세력은 경제에 대해 무지했으므로 ‘시카고 보이즈’(Chicago Boys)라 불리는 미국 유학파들에게 정책을 맡겼다. 이들의 스승으로 시카고 대학에서 근무하던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교수는 1975년 칠레를 방문한 뒤 인플레를 잡기 위해서는 ‘충격요법’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내렸다. 모든 가격을 자유화하고 환율을 시장에 맡기는 과격한 정책으로 1973년 600%가 넘던 인플레율은 1980년대 10~20% 수준으로 낮춰졌다.

신자유주의 이론가 프리드먼의 제자들은 칠레에서 독재의 힘을 빌려 정책 실험에 나섰다. 당시 1970년대는 아직 케인스주의 경제정책 패러다임이 지배하던 시절이었던 만큼 신자유주의는 칠레에서 거의 처음 실현되는 셈이었다.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나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 이전에 칠레는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의 장을 열었던 것이다.

칠레는 이후 세계를 뒤흔들 신자유주의 정책의 방향을 제시했다.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긴다는 원칙에 따라 400여 개에 달하는 공기업을 민영화했다. 평균 70%에 달하는 관세를 10% 수준까지 내려 자유로운 수입을 가능하게 했다. 또 토지 분배를 중단함으로써 농촌에서는 새로운 기업형 농장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농장의 규모가 커지면서 자본과 노동을 집중하게 되고 수출을 향한 시도들이 이뤄졌다. 구리라는 하나의 광물에 의존하던 수출구조는 1980년대가 되면 구리의 비중이 절반 이하로 떨어지면서 다양한 상품의 수출시장이 열리기 시작했다.

칠레의 신자유주의 실험은 경제 분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사회정책에서도 시장의 원칙이 다양한 분야에 적용됐다. 예를 들어 칠레는 교육 부문에서 바우처(Voucher) 정책을 보편화했다. 바우처를 주고 학부모가 학교를 선택하게 함으로써 학교 간 경쟁을 유도한 것이다. 또 연금 제도도 시민의 책임과 선택권을 강조하는 한편 민간 보험회사의 역할을 널리 인정했다. 미국이나 영국 등 민주주의 국가에서 유권자의 눈치를 보며 시행돼야 했던 신자유주의 정책들이 칠레에서는 군부의 권위주의 권력에 의존해 시민들에게 강요됐던 셈이다.

피노체트의 ‘불편한’ 성공


▎마이포 계곡의 포도주 창고. 칠레 와인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 사진:위키피디아
칠레의 사례는 극단적 정치경제 이데올로기의 의미를 담고 있어 차분한 논의를 진행하기가 쉽지 않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진보적 정부를 군사 쿠데타로 무너뜨린 피노체트 정권이 가장 노골적인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편 것이 칠레다. 정치와 경제에 있어 모두 극우적인 요인이 경제발전이라는 성과로 연결된다는 사실이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하지만 마음이 불편하다고 현실을 부정해서는 곤란하다.

피노체트 군사정권의 경제적 성과는 부정하기 어렵다. 일단 위에서 보았듯이 칠레의 세 자릿수의 인플레는 20% 이하로 잡혔고 평균 수명은 1973년 65세에서 1990년 72세까지 증가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었던 영아 사망률도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런 변화는 경제 관료가 중시하는 통계뿐 아니라 일반 시민의 가장 기초적인 삶의 조건이 향상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리드먼과 시카고 보이즈의 이야기가 세계에서 회자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칠레의 성공을 반드시 신자유주의의 작품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이런 인식과는 별개로 칠레는 상당히 실용주의적 노선을 걸어왔다. 예를 들어 민영화를 대거 추진했지만 일부 전략적 기업은 군부 실세들이 자신의 영역에 둔 상태에서 지배하곤 했다. 1985년에 재정장관으로 부임한 36세의 에르난 뷔치(Hernán Büchi)는 시카고가 아닌 컬럼비아대학을 나왔고 경제학이 아니라 경영학을 전공한 실용주의자였다.

무엇보다 칠레의 성공은 군부 독재 시절보다 민주화 이후에 더 활발하게 기지개를 펴면서 전개됐다. 1990년부터 집권한 민간정부 시기에 인플레는 지속적으로 하락해 1994년 이후에는 10%를 넘지 않았다. 1990년 2500달러에 불과하던 1인당 국민소득은 2019년 현재 1만5000달러를 넘어섰으니 30여 년 동안 적어도 6배 이상 증가한 셈이다.

이웃 아르헨티나와 비교해 보면 두 나라 모두 민주화로 복귀한 이후에도 차이는 지속됐다. 아르헨티나는 정부 지출이 국내 총생산 대비 40% 수준으로 유럽 국가 수준이지만 칠레는 25% 정도로 여전히 매우 낮은 편이다. 아르헨티나의 페론이즘이 여전히 포퓰리즘의 전통을 이어가면서 정부 지출을 남용할 때, 칠레는 보다 책임 있는 정부의 모습을 보였다고 분석할 수 있다. 국내총생산 대비 공공 부채의 수준도 아르헨티나의 42%에 비해 칠레는 23%로 비슷한 차이를 드러낸다.

결국 칠레가 성공한 이유는 군사 독재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극단적 신자유주의 정책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보다 단순한 경제적 지혜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 현재보다는 미래를 보고 투자하고 당장 이로운 선택보다는 지금 괴롭더라도 필요한 노력을 지속하는 지혜에 의존한 덕분이다.

태평양 시대 자유무역 우등생

물론 칠레에 운이 따르지 않은 것은 아니다. 100년 전 아르헨티나의 발전에 해운과 냉장기술이 크게 기여했듯이 칠레 또한 20세기 후반기 운송 분야의 놀라운 혜택과 세계화 바람을 타고 발전할 수 있었다. 영국의 슈퍼마켓에 칠레산 사과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다. 북반구와 반대되는 계절을 누리는 칠레가 과수농사를 통해 틈새시장을 개발한 덕분이다. 칠레의 과일은 미국이나 유럽에서 장보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상품이 되었다.

칠레의 ‘몬테스 알파’는 한국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와인 브랜드다. 프랑스 와인보다 저렴하면서도 고급술을 마시는 기분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국토 전체가 태평양을 바라보는 세계에서 제일 긴 해안을 가진 칠레는 수산 양식에도 천혜의 자연을 가진 셈이다. 따라서 해안지역에서 양식한 연어는 칠레의 짭짤한 수입원이다. 또 남위 18도에서 56도에 걸친 기나긴 영토는 뜨거운 사막부터 아름다운 풍경의 온대 지역을 거쳐, 스키를 즐기는 산이나 빙하가 떠다니는 남극 바다에 이르기까지 무궁무진한 관광자원을 선사한다. 또 95일이나 걸리던 유럽 대륙으로의 항해 길이 지금은 비행기 덕분에 하루면 충분하다. 세상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낙후됐던 칠레는 이제 인구도 적은 청정(淸淨) 관광의 땅으로 다시 섰다.

21세기 들어서서 세계화가 심화하자 칠레 같은 나라는 더 큰 혜택을 누리게 됐다. 준비된 지역이라면 세계화가 선사하는 기회를 포착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칠레는 적극적인 자유무역정책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FTA(자유무역협정)를 체결한 국가 중 하나다. 칠레는 실제로 미국, 유럽연합(EU), 중국, 일본 등 세계 주요 경제 대국과 모두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했다. 한국이 2004년 최초로 체결한 자유무역협정 대상국이기도 하다. 2010년부터 칠레의 최대 무역 국가는 미국에서 중국으로 바뀌었다. 멀기만 하던 태평양도 이제 더 이상은 국가 간 경제 관계를 막는 장애가 되지 못한다. 대서양 시대에 아르헨티나가 빛을 보았다면 태평양 시대에는 칠레가 혜택을 독점하게 될 수도 있다.

물론 2019년 가을 칠레를 뒤흔든 사회적 불안과 반발을 무시할 수는 없다. 산티아고에 비상사태 선포와 야간통행금지 조치까지 내려졌던 상황은 경제 발전이 초래한 사회적 격차가 그만큼 심화된 결과다. 하지만 세계경제포럼에 따르면 칠레는 여전히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높은 경쟁력(2019년, 33위)을 자랑한다. 우루과이(54위)나 아르헨티나(83위) 등 이웃 나라를 크게 앞서며 멕시코(48위)나 브라질(71위) 등 강대국보다도 위에 있다. 성숙한 민주주의만이 포용할 수 있는 유연한 대응으로 불평등 문제를 개선해 나간다면 칠레는 앞으로도 여전히 라틴 아메리카 경제 발전의 선두 자리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 조홍식 - 1989년 프랑스 파리 정치대학(Sciences Po)을 졸업하고, 1993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유럽통합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베이징외국어대, 팡테옹-소르본대 등에서 객원 연구원 및 교수를 역임했고, 2006년부터 숭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경제와 유럽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근저로는 [문명의 그물: 유럽문화의 파노라마]와 [파리의 열두 풍경] 등이 있다.

202010호 (2020.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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