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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재 전문기자의 레전드를 찾아서(20)] 그라운드의 ‘풍운아’ 이회택 전 축구협회 부회장 

“전술보다 마음, 믿고 따르게 해야 명장” 

60~70년대 풍미한 골잡이, 월드컵 감독 땐 황선홍·홍명보 발탁
“좋은 선수 키우려고 애쓰다 보면 좋은 성적은 따라오게 돼 있어”


▎모교인 서울 동북고 운동장에서 지난 시절을 회상하는 이회택 전 축구협회 부회장.
축구 팬이라면 줄줄 꿰는 ‘한국축구 스트라이커 계보’가 있다. 최정민(작고)에서 시작해 이회택-차범근-최순호-황선홍-이동국으로 이어진다. 이회택(74) 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은 ‘아시아의 표범’ ‘풍운아’ ‘이춘풍’ 같은 별명을 갖고 있다. 축구도 잘했지만 사생활도 화려했다. 불같은 성격에 화통하고 직선적이라서 따르는 후배가 많다. 남진·조용필 등 당대를 풍미했던 가수들과도 긴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이회택은 1960~70년대 축구 국가대표팀 최전방에서 많은 골을 넣었다. 대한축구협회 공식 기록에 따르면 A매치(국가대표팀간 경기) 82경기에 출전해 21골을 기록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보다 수십 골은 더 넣은 것으로 그는 기억한다. 폭발적인 스피드로 적진을 부수고 들어가 오른발·왼발·머리 가릴 것 없이 골을 터뜨렸다. 펠레가 뛴 산토스(브라질)와의 친선경기에서도 골을 기록했다.

근성도 대단했다. 말레이시아 수비수가 경기 내내 밀착 마크하며 괴롭히자 심판이 안 보는 사이에 그 선수의 뺨을 후려갈긴 적도 있다. 동남아 원정 경기에서는 코너킥을 하러 갔는데 관중이 하도 야유를 하니까 관중 쪽으로 공을 냅다 찼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이회택은 은퇴 후 모교인 한양대 감독을 거쳐 프로축구 포항·전남 감독을 역임했다. 1988년 대표팀을 맡아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끌었다. 축구협회 부회장과 기술위원장으로 일할 때는 2006 독일 월드컵 본선 진출, 2010 남아공 월드컵 16강에 기여했다.

이 전 부회장은 고향인 김포에서 이회택축구교실을 운영하며 꿈나무들을 키우는 재미에 빠져 있다. 지인들과 어울리는 골프도 큰 즐거움이다. 이 전 부회장을 그의 모교인 서울 송파구 동북고등학교에서 만났다.

골프 늦바람, 올해만 에이지 슈트 두 번 기록


▎70년대 포항제철 축구단 소속으로 뛸 당시 이회택. 빠르고 과감하고 슈팅력도 좋았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한 달에 대여섯 번은 골프장에 갑니다. 동북고 선후배,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지인들과 골프장에서 만나지요. 에이지 슈트(자기 나이와 같거나 적은 타수를 기록하는 것)가 뭔지도 몰랐는데 알고 보니 여러 번 했더라고요. 내가 올해 한국 나이로 75세인데 올해만 75타를 두 번 쳤으니까요. 골프를 늦게 배웠는데 소질이 좀 있는지 옛날에는 드라이버 잡으면 270~280m 나갔는데 요즘은 거리가 많이 줄었어요. 잘 맞으면 220m 나가려나? 동반자가 홀인원 하는 건 몇 번 봤는데 내가 해본 적은 없어요.”

축구는 안 하십니까?

“축구 원로 중심으로 모인 로얄축구단의 창단 멤버니까 매주 토요일 나갑니다. 후배들 챙기고 응원은 하지만 게임을 뛰지는 않아요. 나가면 다치니까. 옛날 선수 시절처럼 볼을 차니 안 다치겠어요? 내 뛰는 스타일이 파워로 팍팍 밀어붙이는 건데 주위에서 ‘그렇게 축구 하면 안 됩니다. 다칩니다’하는데 그래도 이회택인데 볼 안 차면 안 찼지 어슬렁거리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몇 년 전 일본서 친선경기 중에 하프라인에서 단독 찬스가 났는데 패스가 좀 길었어요. 그놈을 끝까지 쫓아가서 골도 못 넣고 숨 막혀 죽을 뻔했지요. 하하.”

축구 인생을 되돌아보면 만감이 교차하실 텐데요. 고등학교만 네 군데를 다니셨죠?

“축구는 김포 시골 동네서 놀이로 했죠. 본격적으로 축구 선수를 한 건 중3 때인데 웬만한 고3보다 더 빨랐고 잘했어요. 김포농고 들어가던 해인 1961년 1월에 김포 양촌면에서 리(里) 대항 축구대회가 열렸어요. 고려대를 나오고 대표팀 라이트 윙으로도 뛰었던 이현이라는 선수가 있었는데 동북고-고려대 출신 선수들을 대거 데리고 내려왔어요. 걸포리에는 영등포공고-한양대를 나온 백원기라는 형이 청소년대표들을 몰고 온 겁니다. 나는 게임 구경을 갔는데 그 형들이 볼 다루는 게 무슨 서커스 보는 거 같았어요. 우리는 볼 리프팅 한 개도 제대로 못 할 때였으니까. ‘축구는 저렇게 해야 되는데. 그러려면 나도 서울로 가야겠다’고 결심했죠. 등록금 3기분을 안 내고 모아서 한양공고 나온 선배 만나서 ‘로비 자금’으로 줬는데 그걸 들고 튀었어요. 설상가상으로 김포농고 축산과에서도 등록금을 안 내 퇴학당했죠.”

어쨌든 서울로 올라오신 거 아닙니까?

“한양공고 나온 친척이 추천해 줘서 테스트 선수 비슷하게 들어갔죠. 뻥뻥 내지르고 냅다 달리기만 잘하던 놈인데 한양공고 운동장이 좁잖아요. 기본기가 전혀 안 되어 있으니 코치가 일주일 동안 지켜본 뒤에 ‘내일부터 나오지 마라. 집에서 기다리면 연락해 줄게’ 하더라고요. 보기 좋게 잘린 거죠. 털레털레 김포로 내려와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혼자 연습하고 있는데 아까 말한 백원기 형이 개인운동 하러 와서 날 보더니 ‘영등포공고 가 보겠냐’고 해요. 거기서 넉 달 동안 죽어라 연습해서 드디어 5월에 첫 시합을 뛰게 됩니다. 그러니까 고1 때 공식적인 축구 선수가 된 거죠.”

첫 경기에서 두 골을 넣었다면서요?

“동대문운동장 잔디구장을 처음 밟아봤지요. 첫 경기를 부산상고랑 했는데 내가 두 골 넣어서 2-0으로 이겼어요. 두 번째는 광주상고라고 기억하는데, 비가 촉촉하게 오고 잔디를 고르게 잘라 놓은 게 내 잔칫날 같더라고요. 단독 드리블로 또 두 골을 넣어서 2-0으로 이겼지요. 그런데 내가 사실은 부정선수였어요. 영등포공고에서 입학은 시키지 않고 축구협회에 선수 등록만 했거든요. 감독이 걸릴까 봐 쫄아서 경신고와 경기에는 나를 출전시키지 않는 바람에 우리가 졌어요. 한 달 뒤 서울시 대회가 생겨서 중동고와 붙었는데 나를 막을 사람이 없어요. 골키퍼까지 제치고 골을 넣어 1-0으로 이겼죠. 당시 전국 최강이었던 동북고 박병석 감독님이 나를 주목하신 것 같아요. 땅딸한 게 총알처럼 뛰어다니니까 보통 놈 아니라고 판단하시고 스카우트하신 겁니다. 8월 말에 동북고로 옮겼고, 부정선수였기 때문에 다음 해 4월이 돼야 대회에 출전할 수 있었죠. 그 시간 동안 박 감독님이 야생마 같은 촌놈을 인간개조 시킨 겁니다. 볼 트래핑, 패스, 볼 없을 때 움직임 등 기본기부터 당신이 가진 모든 노하우를 나한테 쏟아부으셨으니까요. 그분 아니라도 대표선수까지는 됐을 것 같아요. 타고난 게 있으니까. 그러나 최고 선수는 못 됐을 겁니다.”

선생님 축구 스타일을 황희찬(24·라이프치히)과 비교하는 사람들이 있던데요?

“황희찬과 나는 비교가 안 되지. 그 친구는 담벼락에 대고 볼 차는 선수고(웃음). 스피드와 저돌성, 폭발력은 비슷하지만 난 그 이상을 갖췄다고 봐요. 볼 없을 때 움직임과 골 결정력 같은 거죠. 동북고에 오니까 한해 위 2학년 김기복이 최고 스타였어요. 청소년 대표팀 갔다 와서 가슴에 태극기, 등에 ‘KOREA’를 새긴 유니폼을 입고 다니는데 그게 그렇게 부러운 거야. ‘김기복을 넘어서겠다’는 분명한 목표가 생겼죠. 감독님이 전수해 주신 기술을 밤늦게까지 다지고 다지면서 내 것으로 만들었죠.”

골 결정력은 어떻게 좋아졌나요.

“골 넣는 건 타고난 것 같아요. 골잡이라면 양발은 기본이고 몸 어느 곳을 써서라도 득점할 수 있어야죠. 거기다 난 골 넣는 자리를 찾아가는 기술을 익혔어요. 수비수를 순간적으로 따돌리면서 공이 오는 위치를 선점하는 거죠. 내가 A매치 82경기에서 21골을 넣었다고 공식 기록이 나오는데 아마 훨씬 더 넣었을 거요. 사실상 대표팀인 양지(중앙정보부 축구팀) 소속으로 유럽 105일 전지훈련 하면서 우리가 수십 골을 넣었는데 내가 절반은 넣었으니까. 그때는 A매치에 대한 정확한 기준도 없었고, 기록에도 신경을 쓰지 않았잖아요.”

21살에 이미 무너져… 기량보다 사생활이 문제


▎2005년 9월 한국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돼 흉상 앞에 선 차범근·이회택 ·정몽준(왼쪽부터).
차범근처럼 유럽에 진출했다면 어땠을까요?

“기량이 문제가 아니라 사생활이 문제였죠. 스물한 살 때 이미 무너졌으니 세계 최고 선수들이 경쟁하는 자리에 갈 수 있었겠냐고. 난 고등학교 졸업하던 해 국가대표가 된 이후 한 번도 후보로 벤치를 지킨 적이 없었어요. 선배들이 워낙 나를 예뻐해서 ‘스타는 공만 잘 차선 안 된다. 술·오락·연애 등 못 하는 게 없어야 한다’며 여기저기 끌고 다녔죠. 차범근이 독일에서 성공한 가장 큰 요인이 부인(오은미 여사)을 잘 만난 겁니다. 축구 외에 아무것도 못 하게 막아줬잖아요.”

선수 은퇴 후 이회택은 모교 한양대 감독을 거쳐 41세에 프로축구 포항제철 지휘봉을 잡는다. 1988년 프로축구 우승을 달성해 1990 이탈리아 월드컵을 준비하는 대표팀 감독을 겸하게 된다. 아시아 지역예선을 9승2무 무패로 통과해 본선에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개막 1주일 전에 현지에 도착하는 바람에 컨디션 조절에 실패, 3전 전패로 예선 탈락한다. 이회택 감독은 이탈리아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당시 ‘듣보잡’이었던 황선홍과 홍명보를 발굴해 ‘한국축구 10년 먹거리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0년 10월 한국전쟁 때 헤어진 부친 이용진 옹과 평양에서 극적으로 상봉한 이회택 감독.
프로축구 전남 드래곤즈 감독직을 내놓은 뒤 2004년부터는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맡아 행정가로 일했다. 조 본프레레 감독 재임기에 기술위원장을 맡아 2006 독일 월드컵 본선 진출의 조력자 역할을 했고, 2008년 허정무 감독이 대표팀을 이끌 때도 다시 기술위원장직을 맡아 2010 남아공월드컵에서 사상 첫 월드컵 원정 16강을 달성하는 데 한몫을 담당했다. 이후 허정무 감독 후임을 정하는 과정에서 이회택 부회장 겸 기술위원장은 축구협회 반대파로 꼽히던 조광래를 추천해 축구계 화합에 앞장선다. 그러나 조광래 감독이 선임된 뒤 선수 선발 과정에서 마찰을 빚었고 그걸 조 감독이 기자회견에서 폭로하는 바람에 둘은 완전히 갈라서게 된다.

황선홍을 뽑은 사연을 좀 들려주시죠.

“내가 한양대 감독으로 부임한 해에 용문고 P선수를 스카우트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입시를 앞두고 용문고 감독이 찾아와 ‘P를 다른 대학에 보낼 수밖에 없는 사정이 생겼습니다. 죄송합니다’라는 겁니다. 그러면 다른 좋은 선수를 보자고 해서 한양대와 용문고가 연습게임을 했어요. 전방에서 휘청휘청 뛰는 비쩍 마른 애 하나만 눈에 들어왔죠. 경기 끝나고 ‘저 비쩍 마른 애 우리 줘’ 했더니 용문고 감독이 깜짝 놀라면서 ‘감독님, 쟤는 1학년인데요?’ 하는 겁니다. 그게 황선홍이었어요. 내가 포철로 가면서 한양대 후임 감독에게 ‘황선홍은 무조건 뽑아라. 큰 선수가 될 거다’ 했는데 건국대 정종덕 감독에게 뺏긴 겁니다. 그 후 건국대 경기 있을 때마다 가서 봤고, 88년에 대표팀 맡으면서 1순위로 뽑은 겁니다. 당시 카타르에서 아시아선수권대회가 있었는데 그때부터 쭉 주전으로 기용했죠.”

주변 반대 뿌리치고 ‘듣보잡’ 홍명보 발탁


▎에이지 슈트를 여러 차례 기록할 정도로 골프 매니아인 이회택 전 부회장이 퍼팅을 하고 있다.
홍명보 발탁 과정에도 사연이 많죠?

“1990 이탈리아 월드컵 개막을 얼마 안 남기고 최종수비수(스위퍼) 조민국이 무릎을 다쳤어요. 급한 대로 이 선수 저 선수 넣어봤는데 신통치 않아 고민 중인데 동북고-고려대 출신인 김순기 코치가 ‘감독님, 제 제자라서가 아니라 고대 2학년에 홍명보라는 선수가 있습니다. 미드필더 보다가 스위퍼로 내려왔는데 머리가 영리하고 잘합니다’고 귀띔을 해줬어요. 대표팀 허정무 코치한테 한번 보고 오라고 했더니 좀처럼 그런 얘기 안 하는 허정무가 ‘괜찮은데요’ 하는 겁니다, 기술위원회를 소집했는데 위원들이 ‘대표팀 합숙 기간에 정기 연고전 출전한다고 다 도망가 버리는 연대·고대 출신은 안 뽑기로 하지 않았나. 그런데 고대에다 청소년대표 경험도 없는 듣보잡 선수를 동북고 후배라고 뽑으려고 하느냐’고 난리가 났어요. 내가 무릎만 안 꿇었지 사정사정했어요. 명보 하나 뽑는데 한 시간 이상 걸렸죠. 일단 뽑은 다음에는 1990년 1월 이탈리아에서 열린 초청대회부터 월드컵 본선 끝날 때까지 한 번도 안 빼고 주전으로 기용했지요.”

조광래 감독과는 악연이네요.

“인간적으로 배신감을 크게 느꼈어요.(조 감독은 월드컵 예선 부진으로 경질된 뒤 2011년 12월 언론 인터뷰에서 “대표선수 선발 과정에서 외압이 있었다”고 폭로했다) 조 감독한테 선수 얘기 한 건 특정 포지션에 선수가 없다고 하기에 ‘야, 조 감독. OOO이가 요즘 몸이 많이 좋아진 거 같은데 한번 체크해 봐라’ 한 게 전부예요. 그런데 기자회견에서 내가 선수 명단 집어던지면서 소리 질렀다고 거짓말을 하대요. 그리고 당시 올림픽팀(감독 홍명보) 경기는 울산에서, A대표팀 경기는 서울에서 열렸는데 조 감독이 올림픽팀 들어갈 선수를 A대표팀에 다 뽑아놓고 쓰지도 않았어요. 조 감독이 홍 감독을 좀 견제하지 않았나 싶어요.”

“역대 최고 선수? 두말할 것도 없이 손흥민”


▎70년대 메르데카배 우승을 차지한 축구 대표팀이 청와대 초청을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 왼쪽이 육영수 여사. / 사진:tkwls 이재형 축구자료수집가
최정민-이회택-차범근-최순호-황선홍-이동국으로 이어지는 ‘한국축구 스트라이커 계보’는 어떻게 보세요?

“대체로 수긍합니다. 최정민 선배님은 직접 경기하는 걸 본 적은 없고 대표팀에서 감독으로만 모셨죠. 차범근은 스트라이커라기보다는 윙포워드에 가깝지만 워낙 골을 많이 넣었으니 뺄 수가 없고, 최순호는 큰 키에 비해 기술이 좋고 유연성이 뛰어났어요. 황선홍은 내가 발탁했으니 말하기 좀 그렇고, 이동국은 전형적인 골잡이지요. 이 계보에 꼭 끼어야 하는데 빠진 사람이 있어요. 박주영입니다.”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선수가 박주영(35·FC 서울)이라면서요.

“체력이나 기술이나 흠잡을 곳이 없는 천재지요. 청구고 다닐 때부터 내가 반했어요. 걔 데려오려고 청구고를 두 번이나 광양 클럽하우스에 불러 일주일씩 합숙훈련을 시켜줬어요. 당시 전남 구단이 신인 계약금으로 3억원 이상을 줄 수 없었는데 어떻게든 4~5억은 맞춰 주려고 했지요. 결국 고대로 갔는데 고대 1학년 때와 FC 서울 입단 첫해를 빼고는 제대로 보여주지를 못했어요. 오죽 답답했으면 FC 서울 동료 선수들에게 ‘박주영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 ‘집안에 우환이 있나, 술 먹냐, 여자 만나냐’ 물어보기도 했다니까요. 그런 거 전혀 없다고 하기에 참 이상하다 했죠. 선수가 이유 없이 부진에 빠질 수는 없거든요.”

그럼 역대 최고 선수는 누굽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손흥민(28·토트넘)이죠. 누가 부정하겠어요. 차범근과 손흥민의 공통적인 강점은 체력과 스피드, 슈팅력이지요. 2017년 11월 수원에서 콜롬비아 수비수 가랑이 사이로 골 넣는 것 보면서 완전 인정했어요. 그 전까지는 딱딱하고 유연성이 좀 떨어진다고 봤거든요. 본인도 그 경기 이후 자신감이 더 커진 것 같아요.”

이회택 축구협회 부회장은 2007년 동남아 4개국(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태국·베트남) 공동개최로 열린 아시안컵에 단장으로 대표팀을 인솔했다. 핌 베어벡 감독이 이끈 한국은 준결승에서 이라크에 승부차기로 지고, 3-4위전에서 일본을 승부차기로 눌러 3위를 기록했다. 주전 5명의 음주 파동으로 더 유명했던 대회다.

당시 대표팀은 최악의 경기력을 보여줬다. 윙포워드까지 공이 갔다가 백패스-백패스로 수비 라인까지 돌아오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 부회장은 정몽준 축구협회장과 골프를 하면서 “회장님, 우리나라 축구 수준을 어느 정도로 보세요”라고 물었다. 정 회장이 “아니, 그런 얘기를 왜 저한테 물어보세요”라고 하자 이 부회장은 “기술은 대한민국이 동남아한테도 떨어집니다. 얘들은 힘은 없어도 재간은 있어요”라고 답답한 마음을 토로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는 ‘이번에 돌아가서 초등학교 기초부터 가르쳐야겠다’고 결심하고 김영균 유소년연맹 부회장에게 “내가 직접 지도자 교육을 해야겠다. 장을 좀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마침 제주도 서귀포에서 초등학교 대회인 칠십리배가 열렸다. 이 부회장은 정해원·신태용 등과 함께 제주도로 내려갔다. 경기가 다 끝난 밤에 실기 교육을 하기로 했는데 현장에는 울산의 초등학교 감독 한 사람만이 선수들을 데리고 나왔다.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 부회장 일행은 철수했다. 그는 “거기에 내 제자들도 꽤 있었어요. 나 같으면 저 사람이 어떻게 가르치나 호기심이 생겨서라도 왔을 텐데…”라며 쓴 입맛을 다셨다.

좋은 지도자의 조건은 뭡니까?

“선수는 골 많이 넣는 게 최고고, 감독은 우승 많이 하는 게 최고 아니오? (웃음) 상대에 맞게 전술만 잘 준비한다고 우승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기본이고 선수와 감독의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고 믿음을 줄 때 성적이 납니다. 내가 포철 감독 마지막 해 허정무한테 물려주기 전에 선수들을 좀 정리해주고 떠나야겠다 싶었어요. 후반기부터 신예들을 많이 기용했는데 게임 전에 불러서 ‘90분 동안 안 뺄 테니까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단 기회는 한 번뿐이다’라고 했어요. 이 아이들이 펄펄 날아다니면서 박경훈·이흥실·이기근 등 기라성 같은 선배 자리를 완벽하게 메우더라고요. 아무리 좋은 선수라도 몇 번 실수할 수는 있는데 10분 넣었다 뺐다 하면 클 수가 없어요. 박태하(52·전 옌볜 감독)가 대구대 다닐 때 망아지처럼 잘 뛰어다녀서 1순위로 뽑았는데 영 실력이 안 나오는 겁니다. 불러서 ‘야, 내가 뽑았으니 책임져야 할 거 아니냐. 지금부터는 연습경기부터 내년 리그 전반기까지 한 번도 안 뺄 테니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하고는 정말 한 게임도 안 빼고 기용했어요. 가을쯤 되니까 날아다니더라고요.”(박태하는 1991년부터 2001년까지 포항 스틸러스에서만 뛰며 261경기에 출전, 46골-37도움을 기록해 포항 스틸러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지도자들이 좀 더 큰 비전 갖고 일했으면…”


▎이회택 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이 2010년 7월, 남아공 월드컵에서 원정 첫 16강을 달성한 허정무 감독을 격려하고 있다.
노을이 아름다웠던 이 날, 동북고에서 사진 촬영을 마치고 근처 음식점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이 전 부회장은 자신의 경험과 기술을 전수할 때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테이블에 놓인 물잔과 소주잔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공격수가 수비수를 따돌리고 골이 나올 자리를 찾아가는 법, 수비수를 등지는 요령 등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공격수의 가장 중요한 자질 중 하나가 공을 뺏기지 않고 간수하는 겁니다. 그러려면 수비수를 등지는 플레이를 제대로 해야 합니다. 나는 1대1로 붙는다면 하루 종일 해도 볼을 안 뺏길 자신이 있어요. 경합 상황에서 상대보다 먼저 자리를 차지하려면 어깨만 들이밀어서는 안 되고 어깨-골반-다리가 동시에 들어가야 합니다. 박주영·이천수 같은 천재들도 등지는 플레이를 잘할 수 있었다면 더 큰 선수가 됐겠죠.”

불같은 성격에 할 말은 직선적으로 하던 이회택 전 부회장도 세월과 함께 많이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한국축구가 더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만큼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백발이 성성한 원로는 안타까움과 진심을 담은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지도자들이 당장의 성적에 목멜 수밖에 없는 현실을 압니다. 그렇지만 좋은 선수를 키우는 데 힘쓰다 보면 성적은 저절로 따라오게 돼 있어요. 지도자들이 좀 더 큰 비전과 긴 안목을 갖고 일했으면 좋겠고, 축구협회도 이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제도와 시스템을 만들어 주길 바랍니다.”

※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 중앙SUNDAY에 ‘스포츠 오디세이’ ‘스포츠다큐-죽은 철인의 사회’를 연재하고 있다. 중앙일보 스포츠부장을 역임했고, 2013년 이길용체육기자상을 수상했다. 연세대 국문학과,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에서 공부했고 한국체대에서 스포츠산업경영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희대와 한양대 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202010호 (2020.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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