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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열풍 | 특별기고] ‘테스형’으로 돌아온 나훈아 파워의 비밀 

민소매에 ‘찢청’ 여전··· 특유의 고음으로 팬심 쥐락펴락 

9월 30일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로 16년 만에 지상파 방송 등장
“왕·대통령이 국민 때문에 목숨을 걸었다는 사람 못 봤다” 발언도 화제


▎올해 추석 연휴 KBS TV 깜짝 공연으로 국민적 화제를 모았던 나훈아. / 사진:KBS화면캡처
지금 대한민국은 나훈아 열풍으로 후끈하다. 9월 30일 KBS 2TV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로 16년 만에 지상파 방송에 등장한 나훈아는 추석 연휴 안방극장을 뜨겁게 달궜다. 전국 시청률 29%(닐슨 코리아 집계)라는 경이로운 시청률이 증명하듯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홀린 그는 이슈메이커로서 존재 가치를 재확인시켰다.

사실 나훈아의 TV 단독공연 소식에 ‘상당한 개런티를 받았다’는 부정적 소문이 나돌았다. 하지만 코로나 시국에 탈진 지경인 국민을 위해 노개런티로 출연한 사실이 알려지며 분위기는 반전됐다. 나훈아는 공연 성격에 따라 무대 연출부터 의상까지 콘텐트 구성과 연출에 탁월한 능력을 지닌 뮤지션이다. 이번엔 코로나19로 신음하는 사회 분위기에 적절한 ‘위로’ 메시지로 레벨이 다른 뮤지션임을 각인시켰다. 특히 “옛날의 역사책을 보든, 제가 살아오는 동안에 왕이나 대통령이 국민 때문에 목숨을 걸었다는 사람은 못 봤다” 등 그의 소신 발언은 정치권까지 들썩거리게 했다. 전염병으로 고통받는 국민의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었기 때문이다. 이에 조용필을 지칭하는 ‘가왕’을 넘어 ‘가황’이란 칭호까지 등장했다.

화제의 신곡 ‘테스형’은 K팝 아이돌들이 장악한 각종 음원과 음반 차트에 균열을 냈다.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지칭해 해학적 효과를 극대화한 이 곡은 자신의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노래로 알려지며 큰 공감대를 형성했다. 이미 8월에 발매된 신보 ‘나훈아 아홉 이야기’의 수록곡인 이 노래는 공연 이후 10월 판매 차트에서 정상에 오르는 역주행을 실현했다.

나훈아는 호불호가 극명한 뮤지션이다. 일부에서는 치아를 드러내고 웃는 모습과 요염한 몸짓이 다소 ‘느끼하다’고 비호감을 드러낸다. 반면 이번 공연에 대한 시청자들의 관전평은 대부분 감동과 감탄으로 모였다.

나훈아는 ‘음악은 장르를 떠나 하라’는 평소 소신을 이번 공연을 통해 실천했다. 밴드 ‘메써드(Method)’와 협업한 ‘사내’는 트로트와 헤비메탈이라는 이질적인 장르 질감을 자연스럽게 융합해 놀라움을 안겨줬다.

사실 나훈아의 공연에는 늘 국악과 다양한 장르 음악이 시도된다. 트로트의 범람에 질려 소화불량을 일으키는 이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나훈아는 ‘트로트 가수도 다양한 장르를 소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증명했다. 모든 가수가 언택트 공연을 염두에 둬야 하는 엄혹한 코로나 시국에서 나훈아의 이번 공연은 향후 언택트 공연이 지향해야 할 시범 사례가 됐다.

험난했던 데뷔 과정


▎2008년 1월 25일 서울 홍은동 그랜드힐튼 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나훈아가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바지 지퍼를 내리려 하고 있다.
추석 방송 공연으로 인해 나훈아에 대한 관심이 다시금 증폭되고 있다. 나훈아(본명 최홍기)는 부산시 동구 초량동에서 선원이었던 부친 최영석의 집안에서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산 초량초교 시절 부산시 교육위원회에서 개최한 콩쿠르에 학교 대표로 출전해 2년 연속으로 1등을 차지하는 재능을 보였다. 대동중 시절 야구부에서 포수를 했던 그는 고향 뒷산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던 아이였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가수가 되려고 결심했다. 보수적인 당시 사회 분위기 때문에 집안의 반대는 예상됐던 일이다. 그는 “가수가 되려는 꿈을 끝까지 말린다면 영도다리 밑에 풍덩 빠져 ‘풍덩 대학’에 가버리겠다”며 어머니를 협박해 상경했다. 그때부터 집안에서 버린 자식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서라벌예고에 진학한 그는 지인의 사무실 의자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고단한 무명가수 도전을 시작했다.

심형섭·오영원·심우영·이호 등 여러 작곡가 사무실을 찾아다녔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결국 오아시스레코드 사무실에 사환 역할로 들어간 그는 회사 마루를 닦고 작곡가들에게 세숫물까지 떠다 바치는 고단한 생활을 감내했다. 영양실조에 걸렸을 만큼 배고픈 시절이었지만 가수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1968년 어느 날, 장충동 녹음실에 심부름을 위해 따라갔다. 마침 그날 취입 예정인 가수가 나타나지 않는 사고가 터졌다. 녹음실 관계자들이 농담 삼아 가수 지망생인 최홍기에게 ‘노래 한번 해보라’고 떠밀어 마이크 앞에 섰다. 노래가 시작되자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촌스럽고 투박한 외모의 경상도 청년이 범상치 않은 노래 실력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노래가 끝나자 깜짝 놀란 오아시스레코드 손진석 사장은 즉석에서 그의 노래 취입을 전격 결정했다.

본명 최홍기 대신 예명을 쓰기로 결정했다. 당시 외자 이름이 유행한지라 ‘최훈’으로 작명했다. 한데 최씨 성이 너무 흔하다는 의견에 희성인 나(羅)씨로 골라 ‘나훈(羅勳)’으로 개명했다. 이후 사람들이 그를 ‘나훈아, 나훈아’라고 부르면서 그의 예명은 나훈아로 최종 결정됐다.

나훈아는 한 인터뷰에서 “그때만 해도 한 곡 취입해 판을 내는 데 6만원을 냈습니다. 나한테는 돈이고 뭐고 밥 사줘가면서 공짜로 내주겠다고 했습니다. 연습을 한 번 했지만 하나도 안 틀리고 녹음을 끝냈더니 어른들이 잘했다고 자장면하고 탕수육을 사줘서 실컷 먹었어요”라고 데뷔 시절을 기억했다.

나훈아의 데뷔곡은 히트하지는 못했지만 “배호와 음색과 창법이 많이 닮았다”는 평을 받으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나훈아 팬의 70%는 여고생부터 중년 부인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이 주축을 이룬다. 지방의 극장 순회공연은 수난과 봉변의 연속이었다. 극성 여성 팬들에게 꽃다발 공세와 와이셔츠를 찢기고 손등을 할퀴는 일은 일상이었다. 심지어 목에 매달리고 키스를 하려 들고 심한 여성 팬은 과감하게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는 도발까지 감행했다.

인기가수 남진의 입대로 인한 공백기에 스타로 떠오른 나훈아에게 하루 100통이 넘는 팬레터가 날아들었다. 별난 우편물도 많았다. 대구의 한 여성 팬은 ‘장차 나훈아와의 사이에 날 아기의 기저귀에 옷’이라며 소포를 보내기도 했다. 또 ‘부산의 어느 극장 앞에 어느 날 몇 시 몇 분에 서 있을 터이니 그때 와주지 않으면 청산가리를 먹고 죽어버리겠다’는 섬뜩한 편지도 쇄도했다. 갑작스러운 인기는 신인가수 나훈아를 ‘신인가수 선발 콩쿠르’의 심사위원을 맡게 하는 황당한 상황까지 연출시켰다.

전설로 통하는 만큼, 확인되지 않은 그에 대한 잘못된 정보가 난무한다. 필자는 많은 사람에게 나훈아의 진짜 데뷔곡과 나이에 대해 질문을 받아왔다. 그는 지금도 출생과 데뷔곡에 대한 논쟁이 뜨거운 미스터리한 가수다.

현재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소개된 그의 프로필에는 1947년 출생, 데뷔곡은 1966년 ‘천리길’로 공식화돼 있다. 잘못된 정보다. 나훈아의 데뷔곡은 1968년 발표한 ‘내 사랑’이다. 나훈아는 1947년이 아닌 1951년생으로도 알려졌다. 해외공연을 함께 떠났다가 우연히 그의 여권을 보고 자신보다 한 살 어린 것을 알게 돼 멀어진 조용필의 사례는 가요계에서 유명한 일화로 회자한다.

팬 카페 ‘나사모’에 소개된 인터뷰 기사 ‘오효진의 인간탐험’에는 나훈아가 1947년 2월 11일, 부산시 동구 초량 2동 415번지 7통 3반에서 태어났다고 소개한다. 나훈아는 인터뷰에서 “김영광씨가 작곡한 ‘사랑은 눈물의 씨앗’ 등 네 곡을 받았는데 마장동 녹음실에서 녹음했어요”라고 말했다. 녹음실을 장충동으로 소개한 언론 기사와는 장소가 다르다.

데뷔곡과 첫 히트곡으로 나훈아와 많은 언론은 ‘천리길’을 언급한다. 나훈아는 “여러 사람이 내는 LP에 내 노래 ‘천리길’ 한 곡을 끼워 넣어 먼저 낸 겁니다. 그런 식으로 ‘사랑은 눈물의 씨앗’ ‘임 그리워’ ‘약속’을 차례로 낸 겁니다.

“‘천리길’이 전국 라디오에서 1위를 했을 때 배호의 ‘황금의 눈’과 멜로디가 같다고 금지곡이 됐습니다”라고 그는 회고했다. 문제는 ‘천리길’이 수록된 1966년 발표 음반은 실체가 없다는 사실이다. ‘천리길’은 1969년 5월 29일 오아시스레코드에서 발매한 컴필레이션 앨범에서 확인된다. 인터뷰에서 ‘천리길’에 이어 발표했다는 4곡 중 ‘약속’은 ‘약속했던 길’의 오류다.

나이와 데뷔 음반 진실 공방


▎1976년 가수 나훈아와 배우 김지미의 결혼 발표.
‘천리길’이 히트했던 시기인 1969년 7월 5일 세광출판사 대중가요 제40집에 소개된 나훈아의 본명은 최홍기, 데뷔일은 1968년 7월 27일, 데뷔곡은 ‘내 사랑’, ‘천리길’은 히트곡으로 소개돼 있다. 그의 생일은 인터뷰와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등장하는 ‘1947년 2월 11일’이 아닌 ‘1951년 2월 11일’로 4세나 차이가 난다. 1946년생인 라이벌 남진을 의식해 나이를 수정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확인하긴 어렵다. 실제로 한국전쟁 시기에 태어난 부산의 신생아들은 1957년부터 뒤늦게 출생신고가 가능해지면서 실제 나이에 많은 오류가 있다.

1969년 ‘천리길’보다 앞선 1968년에 발표된 나훈아 음반 2장이 발견됐다. 음반으로 확인된 나훈아의 데뷔 연도는 1968년 8월 16일이고, 데뷔곡은 앨범의 타이틀곡을 장식한 ‘내 사랑’과 ‘약속했던 길’ 2곡으로 봐야 한다. 모두 작곡가 심형섭의 작품이다. 데뷔곡에서 나훈아는 배호와 유사한 창법을 구사해 다른 가수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데뷔 시절의 그는 아직 자신만의 보컬 스타일이 확립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나훈아가 처음 녹음했다고 언급한 4곡에는 데뷔앨범의 타이틀곡 ‘내 사랑’은 없다. 아마도 당시의 많은 가수처럼 그도 첫 히트를 기록한 ‘천리길’을 데뷔곡으로 잘못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영원한 오빠’ 남진과 ‘가황’ 나훈아의 라이벌전은 대중가요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남진의 파월장병 군복무로 생긴 공백기에 신인가수 나훈아는 급부상했다. 이에 긴장한 남진의 소속사는 월남에 있는 남진을 잠시 귀국시켜 신보 ‘사랑이 스쳐 간 상처’를 발표해 나훈아의 ‘두 줄기 눈물’을 제치고 차트 정상에 오르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라이벌 전쟁의 서막이었다. 서로 비교되기 시작한 두 사람의 출신이 나훈아는 부산, 남진은 목포인 점도 라이벌전에 보탬이 됐다. 본격적인 라이벌전은 남진이 제대하면서 불타올랐다.

공식적인 첫 대결은 1971년 7월, 청계천에 있던 살롱 아마존 무대에서 시작됐다. 두 가수의 대결을 홍보하자 홀은 인산인해를 이뤘지만 남진의 불참으로 불발됐다. 이에 MBC TV 프로그램 [오색의 화원]에서 나훈아와 남진을 초대해 노래를 바꿔 부르기로 자웅을 겨루게 했다. 방송 노래 대결은 나훈아의 판정승으로 판세가 기울자 남진은 시민회관 리사이틀 무대로 진검승부를 걸었다. 9월 16일부터 4일간의 ‘남진 귀국 리사이틀’ 공연은 완전 매진이 되며 1971년 그해 최다관객 동원기록까지 세웠다.

이에 나훈아는 10월 2일부터 3일간 ‘나훈아 리사이틀’로 응수했다. 나훈아는 10벌 넘는 의상을 준비하고 ‘칼춤’에서 고고 춤까지 다채로운 레퍼토리를 선보여 호각지세를 이뤘다. 그해 MBC 가수왕에 3년의 공백기를 가진 남진을 누르고 나훈아가 뽑힐 것으로 예상했지만, 이변은 없었다.

1972년부터는 상대의 연예 활동에 신경을 곤두세워 견제하기 시작했다. 2월에 열린 ‘나훈아의 꿈’ 시민회관 공연은 선전포고였다. 트로트에 팝송·포크송까지 부르고 전통 북치기에 하춘화·김부자까지 동원한 가극 ‘갑돌이와 갑순이’ 등 화려한 콘텐트는 대성공이었다.

이에 11개 영화에 겹치기 촬영으로 눈코 뜰 새 없던 남진은 모든 영화 스케줄을 중단하고 김 빼기 작전에 돌입했다. TBC TV 쇼프로그램 [쇼쇼쇼]가 긴급 편성한 남진과 펄시스터즈와 조인트 리사이틀이 그것이다. 당시 TV쇼로는 드물게 인천 해변에서 촬영을 시도했다. 3월에는 나훈아와 같은 장소에서 리사이틀을 열어 대응했다. 관객동원 결과는 5만 명 대 3만 명. 이번에는 나훈아의 완승이었다.

세기의 라이벌일 수밖에 없었던 두 남자


▎1972년 음료수병 피습을 당한 나훈아가 병실 침대에 누워 있다.
이후 라이벌전은 방송으로 옮겨갔다. TBC가 남진을 집중 지원하자 MBC는 나훈아를 편애하는 분위기로 흘렀다. 이 때문에 가요계 전체가 양분되는 부작용이 심각했다. KBS 가수 청백전에서 남진·나훈아 양측은 꽃다발 공세, 화환 수를 늘리는 세몰이는 기본이고 무대에서 여성 팬들과 키스신까지 연출했다. 방송에서는 남진·나훈아가 등장할 때만 소녀 팬들의 아우성이 터지고 다른 가수들의 무대는 무관심으로 일관돼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결국 사고가 발생했다. 1972년 6월 시민회관 ‘쇼 스타 페스티벌’ 이틀째 공연 날. 마지막 순서로 등장한 나훈아는 예정된 3곡에 이어 앙코르로 ‘찻집의 고독’을 부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객석에서 ‘남진의 사주를 받았다’고 횡설수설한 김웅철이 깨진 음료수병을 휘둘렀다. 왼쪽 뺨을 두 군데 찔린 나훈아는 70바늘이나 꿰매는 참변을 당했다. 무대에서 가수가 피습당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이후 협박 전화, 편지에 시달렸던 나훈아는 ‘숨겨놓은 동거녀’ 스캔들에 시달리며 은퇴 소문까지 나돌았다.

1972년 8월 발표한 나훈아의 신곡 ‘고향역’은 반전의 신호탄이었다. 나훈아는 그해 TBC의 방송가요대상에서 가수왕에 올랐다. 최대 관심사는 그해 12월 MBC 10대 가수상 시상식이었다. 가수왕 쟁탈전을 벌이던 나훈아는 대세가 기울자 파월장병 위문을 떠나버렸다. 이후 MBC는 나훈아의 모든 노래에 방송금지처분을 내렸다. 당시 그의 매니저가 ‘가수왕을 주면 가수를 귀국시켜 출연시키겠다’는 흥정을 했다는 이유였다.

한양대 연극영화과 출신인 남진의 출세작은 1967년 발표한 영화 주제가 ‘가슴 아프게’다. 이 노래가 담긴 음반이 당시 거침없이 질주하던 이미자를 제치고 전국 레코드 판매 1위에 오르며 동명의 영화까지 제작됐다. 남진은 [서로 좋아해] [춘향전] 등 5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최고의 엔터테이너로 군림했다. 나훈아의 출세작도 1969년 개봉한 영화주제가인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다. 예상을 뒤엎고 음반이 10만 장 넘게 팔려나갔다. 이후 나훈아는 [님 그리워] [가지 마오] 등 취입하는 영화 주제가마다 히트가 터졌다.

두 사람은 연기 대결까지 벌였다. 가수와 영화배우로 상종가를 날리던 남진에 이어 나훈아에게도 영화 출연 제의가 들어와 20편 가깝게 작업했다. 현재 필름은 고사하고 아무 기록도 남지 않은 데뷔영화인 1970년 12월 코미디 영화 [웃겨주시네]를 시작으로 1971년 2월 [폭풍을 몰고 온 사나이], 6월에는 [풋사랑]의 주제가 취입은 물론이고 주연배우로도 출연했다. 그해 추석에 개봉한 [인생 유학생]에서는 액션 연기에도 도전했다.

당시 나훈아의 연기력은 평론가와 관객들로부터 비판적인 시각이 있었지만 영화 [풋사랑]은 태국으로 수출되는 성공을 거뒀다. 두 사람의 연기 라이벌전이 뜨거워지면서 함께 출연한 영화 [친구] [기러기 남매] [어머님 생전에] 등이 제작돼 초미의 관심을 끌었다. 겹치기 출연으로 스크린을 누빈 두 사람으로 인해 위기감을 느낀 영화인들이 이들의 영화 출연을 제한하는 촌극까지 벌어졌다.

연이은 스캔들 퍼레이드


▎남진과 나훈아(오른쪽)는 여러 영화에도 함께 출연했다.
1973년까지 [미움이 변하여] [우정] [쥐띠부인] 등 나훈아의 출연 영화들은 평균 3만 명이 넘는 관객몰이에 성공했다. 이후 연기 활동이 뜸했던 나훈아는 가수 컴백 이후인 1983년 미국 올 로케로 화제를 모았던 [3일 낮 3일 밤]에 이어 19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주제가상을 받았던 영화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에서 주연배우로 출연해 미녀 배우 정윤희와 농도 짙은 러브신을 벌여 화제가 됐다.

남진-나훈아의 라이벌전은 전속음반사인 지구와 오아시스 사이의 전쟁으로 확장되며 점입가경을 내달렸다. 언론들도 신체 조건에서 창법·스캔들 등 시시콜콜한 것들을 들춰내고 비교하며 라이벌전을 부채질했다. 1980년 미국에서 재혼한 남진은 1982년 귀국해 신곡 ‘빈잔’을 발표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나훈아도 같은 해에 심지어 러닝타임도 같은 신곡 ‘잡초’를 발표해 나란히 재기에 성공했다. 두 가수의 대결은 과열 현상으로 일부 부작용도 있었지만 한국대중음악의 공연 수준을 끌어올리는 긍정적 효과도 가져왔다.

스캔들로도 라이벌전을 벌였다면 다소 과장이겠지만 실제로 남진과 나훈아는 모두 인기 여가수 조미미와 열애설로 화제를 뿌렸다. 나훈아는 1970년 ‘피너스 시스터스’의 멤버 강선희와 ‘부산 정사 사건’ 스캔들이 터졌다. 1972년 MBC 10대 가수상 출연을 거부하고 월남공연을 떠난 그는 귀국 후 동거 스캔들의 주인공인 배우 고은아의 사촌 이숙희와 결혼하면서 은퇴를 선언했다. 또한 MBC에 사과하면서 1973년 3월 방송금지조치에서 해제됐다. 하지만 결혼 일자를 미루고 지구레코드와 전속계약을 맺으며 은퇴도 취소를 해버려 비난을 받았던 나훈아는 공군에 자원입대해 물의를 빚었다.

제대 직전인 1976년 3월 나훈아는 이혼과 2중 3중 전속계약 스캔들로 곤욕을 치렀다. 이유가 있었다. 제대 후 나훈아는 서울 외교구락부에서 11세 연상인 배우 김지미와 전격 결혼선언으로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았던 것. 나훈아는 결혼 이후 모든 방송 활동을 전면 취소하며 은거 생활에 들어갔다.

한동안 가요계에서 모습이 사라진 나훈아는 1978년 11월 민요 앨범과 1979년 1월 MBC TV [토요일 토요일 밤에] 출연으로 돌아왔다. 나훈아의 가수 복귀를 반대했던 김지미와는 이때부터 결별설이 나돌며 또다시 모습을 감췄다.

1981년 10월 나훈아는 태양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복귀했다. 과거의 히트곡들을 디스코로 편곡한 신보 [디스코 메들리45]를 발표해 판매고 20만 장을 기록하며 재기했다. 당시 부산의 한 나이트클럽에 나훈아 출연 소식에 여성 팬 3000명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나훈아의 가수 복귀를 반대했던 김지미와는 결국 1982년 6월 결별했다. 이후 나훈아는 14년 연하인 후배 가수 정해인과 1983년 7월 결혼을 발표했다. 하지만 영화 제작 실패와 경영하던 은성카바레에 2명의 괴한이 침입해 난동을 부리는 우환이 발생했다. 그런 와중에도 을지로4가 남남회관을 인수하며 사업을 넓혀나간 그는 신보 발표와 창작 활동에 몰두했다.

제2의 전성기와 신비주의 활동


▎나훈아의 미술 작품 ‘야견’. 그는 그림에도 소질이 뛰어났다.
나훈아는 성인 발라드 장르를 개척한 ‘잡초’ ‘사랑’ ‘무시로’ ‘갈무리’ ‘영영’ 등을 연속 히트시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특히 ‘사랑’은 삼성경제연구소의 ‘송년회 분위기를 휘어잡을 필살가(歌)’ 설문조사에서 ‘남자들의 잔잔한 마무리 곡’ 부문 1위에 선정됐다. 1983년 발표한 ‘하얀 새’는 기존 트로트와 차별되는 팝 분위기로 인해 ‘나훈아 혁명’으로 평가받았다. 1984년 7월 나훈아는 일본 데이찌구 레코드와 거액의 전속계약을 맺었다. 사원 전원이 나훈아 이름을 새긴 유니폼을 입고 적극적인 홍보를 벌여 일본에도 나훈아 팬클럽이 탄생했다. 그는 1985년 12월 일본에서 활동하던 가수 정수경과 결혼했다.

1990년대부터 나훈아는 앨범과 대규모 공연으로만 대중과 소통했다. TV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 신비주의 활동은 이때부터다. 1992년 SBS TV의 [나훈아 모창대회]를 통해 그의 창법과 외모를 흉내 내는 ‘너훈아’ 등 이미테이션 가수들이 등장했다. 1999년 12월 30일 나훈아는 KBS 여론조사에서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남자 트로트 가수로 선정됐다. 이후 2007년 세종문화회관 공연을 갑자기 취소하고 두문불출했다.

2008년 급속하게 유포된 ‘일본 야쿠자로부터 테러를 당했다’는 소문에 대한 기자회견을 마지막으로 그는 긴 잠행에 들어갔다. 당시 기자회견에서 허리띠를 푸는 격한 모습은 충격파를 날렸다. 2015년 이혼소송 당시 그의 저작권료가 연간 4억~5억원이라는 추측이 나와 화제를 모았다. 2017년 7월 새 앨범 ‘드림 어게인(Dream again)’을 공개하며 전국 투어에서 매진 행렬을 기록했다. 2019년 ‘벗2’에 이어 2020년 ‘테스형’이 실린 ‘아홉 이야기’ 앨범을 냈다.


▎영화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의 한 장면. 주연배우 나훈아(오른쪽)와 정윤희가 키스 신을 연출하고 있다.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나훈아는 과연 몇 곡을 발표했을까? 그는 노래방 기기에 업체별로 211~235곡이 등록돼 있을 만큼 국내외 가수 중 가장 많은 곡을 등록한 가수다. 숨겨진 음반들이 계속 발견되고 새로운 앨범까지 발표하는 현재진행형 뮤지션인 그는 대략 2600여 곡을 발표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동안 트로트는 비평의 영역이 아니었기에 직접 작사·작곡한 작품이 800곡이 넘는다는 사실만으로 나훈아의 존재 가치는 선명하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 가창력과 퍼포먼스가 떨어지는 노쇠 현상을 거스를 수는 없다. 하얀 민소매와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무대를 누빈 그의 몸매는 여전히 날렵했고, 피부는 탱탱했다. 나이가 들면 음역도 떨어지게 마련인데, 그는 고음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가창력으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쥐락펴락했다. 이처럼 세상은 나훈아로 떠들썩한데 정작 그는 초연해 보인다. 사회 각계각층에서 러브콜을 보내고 있지만 향후 그의 행보는 오리무중이다.

-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한국대중가요연구소 대표 oopldh@naver.com

202011호 (2020.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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