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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이 발굴한 ‘오랑캐의 역사’(13)] 초원·농경 복합 제국을 경영한 칭기즈칸 후계자들 

정복에서 정착으로… 몽골 제국의 진화 

찬란한 송나라 경제·문화 흡수한 뒤 약탈보다 동행에 주력
중원·페르시아 물려받은 원나라와 일-칸국, 문명 결합 가속


▎TV 드라마 [마르코 폴로] 시즌1의 한 장면. 마르코 폴로(오른쪽)가 쿠빌라이칸(왼쪽)의 친위대원으로 활동했다는 가설이 있다.
학생 시절 윌리엄 맥닐의 [The Rise of the West](서양의 흥기, 1963)를 읽으면서 무척 재미있으면서도 바닥에 깔린 유럽 중심주의가 불만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이번 ‘오랑캐의 역사’ 작업에서 유럽 중심주의에 관한 생각을 한차례 정리할 마음으로 다시 펼쳐보게 되었는데, 전에 못 본 글 한 꼭지가 붙어 있다. 1991년 재판의 서문으로 “25년 후에 되돌아보는 [서양의 흥기]”라는 글을 붙인 것이다.

1990년 시점에서 1963년 초판 내용을 반성한 이 글의 초점은 유럽 중심주의에 대한 반성에 있다. 유럽의 후계자 미국이 온 세계를 쥐락펴락하던 1950년대 상황에서 역사에 대한 자신의 인식도 자유롭지 못했음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송나라 시대 중국 문명의 힘과 중요성을 경시했던 것을 특히 중요한 문제로 지적한다.

“한 세대 전까지 내가 접하던 역사서술이 중국의 역사에 대한 전통적 평가방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변명으로 삼는다. 역사적 중국 강역의 한 부분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한 왕조라면 제대로 덕을 갖춘 황제 아래 강역이 온전하던 시대에 비해 열등한 상태일 수밖에 없었다는 평가다. … 자크 제르네의 1972년 [Le Monde chinois, 중국 세계]에 이르러서야 초원지대에서 송나라 군대의 약세의 원인이 중국의 기술이 전통적 국경 밖으로 퍼져나감으로써 중국과 유목민 사이의 종래의 균형이 무너진 데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되었다. 이 균형의 붕괴는 칭기즈칸의 활동을 통해 유라시아 전역에 파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19쪽)

돈으로 평화를 산 송나라의 번영과 굴욕


▎[동방견문록]에 나타난 마르코 폴로의 여정. 붉은 화살표로 표기돼 있다.
이 고백에 접하며 금석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50년 전 역사 공부를 시작하던 때에 비해 역사학계에서는 유럽 중심주의가 많이 극복되어 있다. 그러나 역사학 밖의 다른 학술 분야에는 이 변화가 아직 많이 투영되지 못하고 있다. 임마누엘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이 단적인 예다. 유럽 패권으로 구축된 세계체제의 구조적 문제점을 밝히는 학설인데도 유럽의 전통 안에서만 문제를 고찰하는 경향은 가치관과 연구 방법 자체가 유럽 전통에 묶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맥닐이 송나라에 대한 평가를 특히 통절하게 반성하는 이유는 가치관이 적용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류는 최근 수백 년간 ‘국가 간 경쟁’의 시대를 살아왔다. 그 시대의 ‘좋은 정치’는 경제적·군사적 경쟁에서 승리하는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정치였다. 온 천하에서 폭력을 줄이는 과제 같은 것은 정치적 과제로 부각되지 못하던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태어난 정치철학이 국가 이상의 분석 단위를 갖지 못한 사실을 자오팅양은 지적한다.

“중국의 정치철학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의 정치적 세계관, 즉 내가 말한 ‘천하체계’의 이론을 창조하려고 했다. 이것의 이론의 틀과 방법론은 서양의 정치철학과 매우 다르다. 먼저 이론의 틀에서 살펴보면 중국의 정치철학은 천하를 가장 높은 단계에 위치한 정치 분석의 단위로 간주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다른 것에 앞서는 분석의 단위로 간주했다. 이것은 국가의 정치 문제를 천하의 정치 문제에 종속시켜 이해하려고 한 것이자 천하의 정치 문제는 국가의 정치 문제가 근거하는 것임을 의미했다.”(노승현 옮김 [천하체계] 29~30쪽)

송나라 때의 중국에도 국가주의가 있었고 애국심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치의 전부가 아니었다. 인종(仁宗, 재위 기간, 1022~1063) 때 송나라 조정을 그린 연재사극 [청평악(淸平樂)]이 중화방송에서 방영되고 있는데, 당시의 정치상을 깊이 있게 다룬 일품이다. 인종 때는 서하(西夏)가 칭제(稱帝)하며 송나라가 위축된 시기인데, 그때도 유교 원리가 정치에 잘 반영되고 경제적 번영이 이뤄지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어쩌면 금나라에 대한 굴욕적 정책을 주도한 진회(秦檜, 생존기간, 1090~1155)가 최악의 간신으로 남긴 오명도 당시보다 후세의 평가로 이뤄진 것인지 모른다. 그가 죽은 50년 후 남송이 금나라를 공격할 때 관작이 추탈되었으나 2년 후 북벌이 실패한 후 회복되었고, 후세의 평가도 크게 엇갈리는 인물이다. 요나라 황손으로 금나라에 출사하다가 몽골의 조정에서 큰 역할을 맡았던 야율초재(耶律楚材)와 같은 실용주의자도 그 시대에 널리 통용되었던 것은 아닐지.

북송 남송 가릴 것 없이 송나라의 문화와 예술은 전통시대부터 높은 평가를 누려왔고, 근년에는 그 시대 경제와 과학기술의 뛰어난 수준을 밝히는 연구가 많이 나왔다. 모든 방면에서 중국문명의 장점이 잘 발현된 시대로 이제 널리 인식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의문이 더 깊어진다. 이처럼 뛰어난 문물을 자랑하던 왕조가 군사적으로는 오랑캐에 대한 열세를 내내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가 끝내 정복의 대상이 된 까닭이 무엇일까?

중국의 왕조 중 오랑캐에게 정복당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내부 혼란으로 무너지고 난 뒤에 오랑캐 왕조가 들어와 공백을 메운 경우가 많다. 명나라가 특히 분명한 경우다. 북경이 반란군에게 함락된 후 명나라 주력부대를 지휘하고 있던 오삼계(吳三桂)가 대치 중이던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인 것은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었다. 5호16국(五胡十六國)도 한-위-진(漢-魏-晉)의 혼란이 수습되지 못한 끝에 용병 역할로 중화제국 안에 들어와 있던 오랑캐들이 정권을 세운 것이었고, 요-금(遼-金)도 중국의 혼란에 흡인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송나라는 제국 체제에 결정적 파탄이 없는 상태에서 오랑캐의 힘에 압도된 이례적인 경우로 보인다. 다른 오랑캐의 중국 정복과는 다른 설명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다.

중화제국과 중국문명 사이의 간격에서 생각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중국문명 전체를 정치적으로 조직한다는 중화제국의 이념은 현실 속에서 완벽한 실현이 불가능한 것이다. 문명의 경계선은 제국의 국경처럼 명확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수한 농경 지역만을 제국에 넣을 때도 있었고 주변의 유목 지역까지 포괄한 때도 있었던 것이다.

당나라가 융성할 때는 많은 유목 지역이 제국에 편입되었다. 그에 따라 제국의 구성이 복잡해지면서 혼란이 일어났다. 당나라 후기의 절도사 세력과 그에 이은 5대10국(五代十國)의 대부분은 제국에 편입되어 있던 ‘오랑캐’를 주축으로 한 것이었다.

송 태조 ‘군벌’ 견제 위해 군사력 중앙 집중화


▎[동방견문록] 저자 마르코 폴로. / 사진:위키피디아
송 태조가 즉위 후 옛 동료 장군들에게 병권 해제를 권한 일화는 군사력 중앙 집중을 꾀한 송나라의 기본정책을 보여준다. 조정 직할의 금군(禁軍)이 송나라 군대의 주축이 되었다. 군사력의 약화를 피할 수 없는 정책이었다. ‘내 군대’를 내 세력으로 키우던 종래의 장군들 대신 월급쟁이 지휘관들이 군대를 관리하게 되었고, 그나마 최고위 지휘관들은 문관으로 임명되었다. 오랫동안 형성되어온 중국의 경무(輕武) 전통이 이때 확정되었다.

제국이 강한 군사력을 유지하려면 ‘군벌(軍閥)’의 위상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조직의 특성을 문관들에게 침해받지 않고, 조직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 전심전력으로 전투에 임하는 군대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군대가 필요로 하는 독립성은 상황에 따라 제국의 질서를 해칠 수 있다. 안록산의 난(755) 이후 200년간 중국을 괴롭혀온 이 문제를 벗어나기 위해 송나라는 군사력의 약화를 감수하기로 한 것이다.

중화제국의 영광을 받드는 사람들에게는 송나라의 이 선택이 안타까운 일이다. 그만한 경제력과 기술력을 가지고 부국강병의 길을 걸었다면 한 무제나 당 태종보다 더한 제국의 위세를 떨칠 수 있었을 것을! 요나라와 금나라에게 굴욕적인 입장에 머물러 있다가 몽골에게 멸망당하는 일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을!

그러나 모든 선택에는 득실이 엇갈리게 마련이다. 송나라에게는 군사적 열세와 강역의 축소를 감수할 만한 이득이 있었다. 요·금에 대한 세폐(歲幣)는 넓은 강역의 확보·유지를 위한 군사비에 비하면 약소한 액수였고, 강력한 군부의 존재로 인한 권력구조의 위험이 없었다.

‘돈으로 평화를 사는’ 송나라의 노선은 미야자키 이치사다가 말하는 ‘재정(財政)국가’의 길이었다. 풍부한 경제력 위에서 가능한 선택이었다. 장기간의 평화 속에서 학술·사상·상업·문화를 한껏 발전시킨 송나라의 경제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양자강 유역의 농업생산력 발전이 그 근거였다. 농업기술 발달에 따라 강우량이 큰 양자강 유역의 생산력 발전이 북방보다 빨랐고, 송나라 때는 인구가 북방보다 더 많아졌다. 프란체스카 브레이는 [The Rice Economies, 벼농사 경제지역](1986) 203~206쪽에서 송나라 때 벼농사 기술 발전이 중요한 국가정책이었던 사실을 설명했다. 1012년부터 참파 지역의 품종을 들여와 2모작을 시작하게 한 것이 가장 중요한 사례다.

농업생산력의 발전이 송나라 경제의 하드웨어를 제공하는 한편에서 소프트웨어를 만들어준 것은 운하 중심의 수운(水運) 네트워크였다. 수운 네트워크는 황하 유역보다 회하~양자강 유역 남중국에서 크게 발달해서 중국의 실질적 중심이 남쪽으로 옮겨가는 조건이 되었다. 1126년 수도가 금나라 군대에 함락되고 황제 이하 온 조정이 통째로 포로가 되는 파국을 겪고도 남쪽으로 옮겨 제국 체제를 이어간 것은 남중국의 경제기반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운하는 7세기 초 수나라 때 만들어진 것이다. 운하의 이로움은 중국에서 일찍부터 인식되어 전국시대부터 축조가 시작되었는데, 북중국과 남중국을 연결하는 ‘대(大)’운하는 남북조의 대립을 끝낸 수나라가 천하제국의 통일성을 담보하기 위해 건설한 것이다.

‘2중 갑문’ 발명, 안전·효율성 높아진 대운하


▎금나라에 대한 굴욕적 정책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송나라 진회의 초상. / 사진:바이두
당나라 말기에서 5대10국까지 혼란기에 남중국과 북중국 사이의 거리가 다시 멀어졌다. 군벌(절도사)이 할거한 북중국과 달리 남중국은 쇠퇴해가는 당나라의 마지막 밑천으로 남아 있다가 과도한 착취에 항거하는 일련의 민란을 통해 무너져갔다. 5대10국 중 ‘5대’는 북중국에서 꼬리를 물고 천자국(天子國)을 자칭한 단명한 왕조들이었고 ‘10국’은 대부분(北漢을 제외하고) 남중국에 할거한 지방 세력이었다.

남북을 다시 통합한 송나라에게도 운하체제의 정비가 중요한 과제였다. 송나라의 수로 정비 사업에서 눈에 띄는 것 하나가 2중 갑문(閘門)의 발명이었다. 조지프 니덤은[Science and Civilisation in China, 중국의 과학과 문명] 제4부 3권 351쪽에서 이 발명이 984년 송나라 관리 교유악(喬維岳)에 의해 이뤄진 사실을 밝혔다.

황하와 양자강을 연결하는 대운하만을 놓고 보더라도 수면의 표고차가 약 40m에 달한다. 다른 수로에는 표고차가 더 큰 곳도 있다. 그 때문에 수로 곳곳에 물살이 빠른 곳이 있는데, 종래에는 그런 곳을 지날 때 인부들이 기슭에서 밧줄로 배를 끌고 지나갔다. 많은 물이 계속 흘러내리지 않으면 배가 바닥에 부딪칠 위험이 크기 때문에 갈수기에는 막힐 때가 많았고 평시에도 통과가 힘들고 오래 걸렸다. 2중 갑문의 발명으로 이러한 ‘병목 현상’을 해소함으로써 수운 체제의 안전성과 효율성을 크게 높일 수 있었다.

대운하는 만리장성과 함께 중국문명이 빚어낸 초대형 구조물로 명성을 떨친다. 그런데 대운하는 하나의 독립된 구조물이 아니라 중국의 방대한 수로 체계를 대표하는 한 부분이다. 철도가 등장하기 전까지 중국의 수로 체계는 세계 최대·최고의 내륙 교통망이었다. 7세기 이후 남중국 경제와 문화의 눈부신 발전은 수로 체계 위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기술 발전에 따라 농업생산력이 늘어나더라도 잉여생산물을 처분할 시장이 원활하지 않으면 경제 발전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수나라 이후의 남중국에서는 수송비가 극히 저렴했기 때문에 시장 기능이 극대화될 수 있었고, 농민은 자급자족의 틀에서 풀려나 생산성 제고에 전념할 수 있었다. 상업 활동은 소수 상인들만의 영역이 아니라 대다수 서민의 일상이 되었다.

금속화폐 사용에서 금화·은화 등 귀금속이 주종이던 다른 지역과 달리 중국에서는 동전이 압도적이었다는 사실도 중세 중국경제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고액권인 금·은화는 전문 상인들의 대규모·장거리·귀중품 교역에 주로 사용되고, 소액권인 동전은 서민의 일상적 경제활동을 뒷받침해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송나라의 탁월한 문명수준에 관해서는 문학·예술·상업·기술·제조업의 여러 분야에서 많은 연구가 나와 있어서 어떤 것을 인용할지 판단이 어려울 정도다. 꽤 오래전에 나온(1959) 자크 제르네의 인상적인 논평 한 대목을 소개한다.

“13세기의 중국은 놀라운 정도의 근대성을 보여주었다. 전폭적인 화폐경제, 종이 화폐, 결제 제도, 고도로 발달한 차와 소금 관련 사업, 대외무역의 큰 비중, 그리고 지역별 생산의 전문화 등이 눈에 띈다. 상업의 큰 영역들을 무소부재의 국가가 장악하고 국가전매와 간접세로 세수의 대부분을 충당하고 있었다. 사회생활과 예술·오락·제도·기술 등 여러 방면에서 중국은 당시의 어느 다른 나라보다도 확연히 발달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중국 밖의 어느 곳에도 야만인밖에 없을 것이라고 중국인들이 생각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H. M. Wright, tr., [Daily Life in China on the Eve of the Mongol Invasion] 18~19쪽)

세계 최대 ‘보물창고’였던 남송


▎송나라 태조는 주연을 베풀어 장수들의 병권(兵權)을 회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잔 술로 병권을 거둔다는 의미의 ‘배주석병권 (杯酒釋兵權)’을 묘사한 그림. / 사진:바이두
제르네가 보는 송나라의 ‘근대성’이란 무(武)에 대한 문(文)의 선택에서 나온 것이다. 제국의 양적 팽창보다 질적 발전을 택한 것이다. 돈으로 평화를 사는 노선이 지속되는 동안 경제와 문화가 한껏 발전할 수 있었다. 이 평화노선은 1276년 몽골의 무력에 짓밟혀버린 것처럼 보이지만, 잘 살펴보면 오히려 몽골제국의 발전 방향에 영향을 끼친 측면도 알아볼 수 있다.

금나라에 군사적 열세를 보이던 남송이 1234년 금나라 멸망 후 40여 년이나 더 버틸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몽골제국의 분열과 혼란, 서방 정벌에 치중한 사실, 기마전에 적합지 않은 남중국 지형 등을 흔히 이야기하는데, 나는 그런 설명이 미흡하게 느껴진다. 약탈을 목적으로 하는 정복이라면 세계 최대 보물창고인 남송이 어디에도 밀릴 수 없는 최고의 정복 대상이었다. 이 40여 년의 기간은 몽골 정복자들이 ‘정복’의 의미를 더 높은 차원으로 올려놓은 ‘업그레이드’ 기간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1250년대 이후 몽골의 남송 정벌은 거위 고기를 먹으려고 죽이러 나선 것이 아니라 알을 받아 먹으려고 생포하러 나선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1246년 구육의 조정을 방문한 카르피니(Giovanni da Pian del Carpine)나 1253~1255년 몽케의 조정을 방문한 뤼브루크(Willem van Rubroeck)의 여행기에서 대칸을 비롯한 몽골 지도자들이 유럽에 관심을 보인 기록을 보면 다른 사회들을 알려고 애쓰는 그들의 자세가 뚜렷하다. 마르코 폴로 일행이 쿠빌라이에게 우대를 받은 이유도 이해할 수 있다. 각지 지도층 자제를 모아놓은 친위대(Keshig)에도 여러 지역의 정보를 수집하고 검토하는 기능이 있었을 것이다. 마르코 폴로가 친위대 소속이었으리라는 추측도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오고타이 시대(1229~1241)부터는 몽골제국의 확장이 단순한 초원제국의 확대에 그치지 않고 복합적인 제국의 건설로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토머스 바필드는 “칭기즈칸의 후계자들은 보편적 통치권을 주장했지만 그 자신은 초원의 장악에 중점을 둔 좁은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며 그의 손자들 대에 와서야 거대문명권의 정복이 시작된 것도 계획에 따른 것이 아니라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일 뿐이라는 견해를 보인다([Perilous Frontier] 198쪽). 그러나 오고타이가 야율초재(耶律楚材)를 등용한 것을 보면 이 변화의 시작이 바필드의 견해보다 더 빨랐던 것 같다.

데이비드 크리스천 역시 몽케 시대(1251~1259)에는 몽골 지도자들에게 정복의 의미가 달라져 있었다는 견해다.

“1250년대까지 몽골 지도부는 초원과 농지 양쪽의 생산성 유지에 자기네 부와 권력이 걸려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몽케는 페르시아와 중국 정벌에 나서기 전에 조세 부담을 고르게 하고 군사 활동에 따르는 생산력의 파괴를 줄이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바그다드 약탈 외에는 몽케 시대의 정벌이 칭기즈칸 시대에 비해 훨씬 파괴성이 덜했음을 올슨은 지적한다. 몽케는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파괴된 지역의 생산성 회복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고 상당한 성과도 거둔 것으로 보인다.”([A History of Russia, Central Asia and Mongolia] 416쪽)

초원제국과 정복왕조의 분화


▎송나라 때 수로의 모습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중국 강남 지역. / 사진:위키피디아
쿠빌라이와 아리크 부케의 충돌을 ‘본지파(本地派)’와 ‘한지파(漢地派)’의 경쟁으로 해석한 일본 연구자들도 있다. 초원의 전통을 지키려는 경향과 중국의 고등문명을 접수하려는 경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익숙하지 않은 새 길을 열려는 한지파에게는 익숙한 길에 한계가 있다는 문제의식과 함께 새 길이 이끌어줄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제국의 규모 확대에 따라 전통을 그대로 지키기 어려운 문제는 대칸 계승 과정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다. 칭기즈칸이 후계자를 지명하여 쿠릴타이의 확인을 받게 한 것은 그 단계에서 좋은 계승방법이었다. 쿠릴타이 기간 동안 제국의 대다수 구성원들이 만족할 만한 체제 정비가 이뤄질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 세대로 넘어갈 때는 원만한 조정이 어렵게 되었다. 집권(集權)과 분권(分權)의 모순되는 요구가 모두 강해졌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인식되고 대책이 강구되는 과정을 실증적으로 확인할 길은 없지만, 몽케·쿠빌라이·훌레구 3형제가 실제로 택한 노선에 비쳐볼 수 있다. 몽케는 대칸 자리를 위해 조치계의 바투와 손잡았고 그 대가로 바투 세력의 독립성을 보장해주었다. 차가타이·오고타이계에 대해서도 통제력 완화를 감수했을 것이다. 그 대신 이슬람권과 중국의 정복과 경영에 몽골제국의 진로를 설정하고 3형제가 나서서 전력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몽케가 그린 몽골제국의 미래는 자기 형제들이 장악할 두 문명권의 역량을 발판으로 초원제국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가 너무 일찍 (50세 나이에) 죽는 바람에 초원제국과 정복왕조의 분화를 서두르는 플랜B로 넘어가게 된 것 아니었을까. 아리크 부케 외에는 몽케의 아들들을 위시한 톨루이계 거의 모두가 쿠빌라이를 지지한 것을 보면 그의 즉위가 상당 범위의 합의를 기반으로 이뤄진 것 같다.

쿠빌라이의 즉위를 계기로 몽골제국이 4칸국으로 분열되었다고 하지만 평면적 분열이 아니었다. 초원제국의 성격을 지킨 두 칸국(금장 칸국과 차가타이 칸국)과 달리 일-칸국은 대칸(원나라 황제)의 책봉을 받는 입장을 오랫동안 내세웠다. 원나라와 일-칸국은 나란히 농경제국의 성격으로 바꾸면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 관계는 군사적 동맹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방면의 교류를 통해 두 문명권을 결합하는 방향의 노력이었다. 4칸국의 분열은 실제에 있어서 초원제국과 정복왕조의 분화였다.

마르코 폴로는 쿠빌라이 친위대원?


▎1. 윌리엄 맥닐의 [The Rise of the West, 서양의 흥기] 1991년 재판 표지. / 2. 조지프 니덤의 [중국의 과학과 문명] 표지. / 3. 토머스 올슨의 [Culture and Conquest in Mongol Eurasia, 몽골시대 유라시아의 문화와 정복] 표지.
1271~1295년 사이에 몽골제국을 여행한 마르코 폴로(1254~1324)가 남긴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은 오랫동안 유럽에서 베스트셀러의 지위를 누렸지만, 대부분 독자에게 판타지작품으로 받아들여졌을 뿐이다. 그가 그린 몽골제국, 특히 중국의 웅대하고 화려한 모습이 당시 유럽인의 상상을 벗어나는 것이었고, 내용의 사실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중국을 가리킨 이름 ‘카테이(Cathay)’가 참으로 중국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조차 그 책이 나온 300년 후의 일이었다.

폴로의 기록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들도 있었다. (항해 때 그 책을 갖고 다녔다는 콜럼버스도 그중 하나였다.) 황당해 보이는 내용이 많지만, 지어낸 것으로만 볼 수 없는 상당한 일관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16세기 말 예수회 선교사들의 중국 진입 이후 중국에 관한 유럽인의 지식이 늘어나면서 폴로의 기록 중 사실로 확인되는 것이 많아짐에 따라 역사·지리 자료로서 [동방견문록]의 가치도 커졌다. (‘카테이’가 중국임을 확인한 것도 예수회 선교사들이었다.)

[동방견문록]의 진실성을 (폴로의 직접 견문에 근거한 것이라는) 믿는 연구자들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 많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여러 가지 기술적 이유들이 제시된다. 제노아의 감옥에서 폴로의 회고를 작가 루스티첼로가 글로 정리하면서 작가다운 기교를 부린 문제, 필사본의 확산과 번역 과정에서 오류가 생긴 문제, 폴로가 겪은 내용과 들은 내용이 혼동된 문제 등이 많이 지적된다. 폴로가 중국을 실제로 돌아다녔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이제 별로 없고, 오히려 ‘그 시기에 그만큼 많은 분량의 정확한 정보를 일개 여행자가 모은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커지고 있다.

스티븐 호는 [동방견문록]의 진실성을 재확인하는 책 [Marco Polo’s China: A Venetian in the Realm of Khubilai Khan, 중국에 간 마르코 폴로](2006)에서 흥미로운 추측을 내놓는다. 폴로가 쿠빌라이의 친위대(Keshig)에 들어간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다.(165~168쪽) 몇 가지 중요한 의혹을 해소할 수 있는 추측이다. 예컨대 폴로가 쿠빌라이를 여러 번 만났다고 하는데, 그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면 왜 중국 측 자료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가 하는 의혹이 있다. 친위대 소속이라면 역사기록에 남을 만큼 중요한 위치가 아니라도 황제를 자주 만났으리라 상상할 수 있다.

[동방견문록]의 4부 중 쿠빌라이 조정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제1부 내용에 다른 부분보다 온갖 오류가 훨씬 더 많다는 사실도 이 추측으로 해명이 가능하다. 폴로가 친위대에 들어갔다면 각지의 상황을 조사해서 황제에게 보고하는 임무도 맡았을 수 있다. 서방 출신의 색목인(色目人)을 행정에 많이 활용한 원나라 관습에 비춰볼 때 ‘이방인의 눈’을 상황 파악에 이용한다는 것은 그럴싸한 일이다. 그렇다면 어디를 다니더라도 그냥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보고를 위해 면밀하게 관찰하고 메모를 (머릿속에라도) 남기는 습관을 익히게 되었고, 따라서 초기의 기록보다 정확한 기록을 남기게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폴로는 상인 집안 출신이었다. 상인은 언제 어디서나 장사에 관계되는 일들을 열심히 관찰하고 많이 기억한다. 그런데 [동방견문록] 제2부 이후의 기록 중에는 상인의 관점을 넘어서는 내용이 많다. 황제의 관심 범위가 폴로의 시선에 투영되어 있었기 때문에 폴로의 관찰과 기억이 그런 폭과 깊이를 가지게 된 것 아니었을까? [동방견문록]의 진실성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저만큼 풍부한 내용을 당시 상황 속에서 모을 수 있었을까?’ 하는 경이로움이 의문으로 남아 있다. ‘친위대원 마르코 폴로’설은 이 의문도 풀어줄 수 있는 가설이다.

19세기 후반 근대적 ‘동양학’이 유럽에서 일어날 때 마르코 폴로의 실체 확인이 인기 있는 주제로 떠올랐다. 중국에 관한 지식이 늘어나고 [동방견문록]의 신뢰도가 높아짐에 따라 그의 흔적을 중국에서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일어난 것이다.

이때 일부 학자들이 [원사(元史)]에서 ‘발라(孛羅)’라는 이름을 찾아내고 흥분했다. 웨이드-자일스 표기법에 따라 ‘po-lo’로 적히는 이 이름이 마르코 폴로의 것이라고 본 것이다. 폴로 일행이 일-칸국을 방문한 1290년 무렵에 이 인물도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럴싸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이 착각은 20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

두 정복왕조 ‘문명동맹’ 매개자들

볼라드(Bolad, 孛羅, 1238?-1313)는 원나라 초기 조정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중서성 승상에 오른(1280)고관이었을 뿐 아니라 쿠빌라이의 심복 가문 출신으로 아리크 부케심문(1264)과 아흐마드(Ahmad)사건 조사(1282)등 민감한 과제를 맡을 만큼 절대적 신임을 받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1285년 일-칸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서 근 30년 여생을 지냈다. 차가타이 칸국과의 군사적 충돌로 길이 막혀 귀국하지 못했다는 설명이 있는데, 석연치 않다. 해로도 있었고 육로도 그렇게 오랫동안 완전 두절된 것은 아니었다. 사신으로 보낼 때 그의 장기 체류 방침이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의 신분과 명예는 원나라에서 부재중에도 그대로 지켜졌다.

토머스 올슨은 [Culture and Conquest in Mongol Eurasia, 몽골시대 유라시아의 문화와 정복](2001)에서 볼라드의 역할에 초점을 맞췄다. 원나라와 일-칸국의 관계를 넘어 중국문명과 페르시아문명 사이의 가교 노릇을 맡았다는 것이다. 폴로와 이름이 비슷할 뿐 아니라 문명 간 교섭에서 큰 역할을 수행한 점, 큰 수수께끼를 남긴 인물이라는 점에서도 폴로 못지않게 큰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이 인물을 통해 두 정복왕조 사이 ‘문명동맹’의 의미를 꽤 깊이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 김기협 - 서울대·경북대·연세대에서 동양사를 공부하고 한국과 학사학회에서 활동했다. 1980년대에 계명대 사학과에서 강의하고, 1990년대에 중앙일보사 연구위원(객원), 전문위원(객원) 등으로 일하며 글쓰기를 시작했다. 2002년 이후 18년간 공부와 글쓰기를 계속해왔다. 저서로 [밖에서 본 한국사](2008), [뉴라이트 비판](2008),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2010), [아흔 개의 봄](2011), [해방일기](10책, 2011~2015), [냉전 이후](2016) 등이 있다.

202011호 (2020.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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