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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의 세종 리더십과 부민(富民)의 길(12)] 시대를 너무 앞서 좌초한 ‘화폐 혁명’ 

200년 뒤 빛난 동전 보급 선견지명 

‘조선통보’ 만들어 물품 화폐 대체해 유통·운송 혁신 모색
물가 폭등하자 백성들 불신, 원료 문제 등 겹쳐 기능 상실


▎만원권 지폐에 실린 세종대왕 초상. / 사진:뉴시스
아무리 세종이라도 그가 시도한 모든 개혁이 큰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본궤도에 오른 사업도 있었다. 왕이 애써 도입한 동전이 바로 그러했다. 즉위 초부터 왕은 종이 화폐 저화(楮貨)가 널리 사용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세종 2년(1420), 왕은 모든 물건을 저화로 거래하라는 지시도 내렸다(실록, 세종 2년 윤 1월 9일). 6년이 지나 왕은 동전을 중심으로 화폐 제도를 개혁했다(세종 8년 2월 28일). “이것은 옛날부터 백성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였다”라고 하며 세종은 동전의 효과를 자신했다.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세종 13년(1431), 동전사업이 곤경에 처한 사실을 왕은 솔직하게 인정했다. “동전을 수납한 것은 국가가 이익을 보려고 벌인 일이 아니다. 동전이 원활하게 돌아가게 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관리들이 취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거둬들일 동전의 수량을 정해 놓고 백성에게서 거둬들이기만 하고 쌀의 지급은 미뤘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동전을 싫어한다.”(세종 13년 3월 14일) 실무 관리가 정책 의지를 잘 몰라서 동전사업이 좌초했다는 왕의 진단은 과연 옳았을까.

동전 보급에 대한 세종의 열정은 끝까지 식지 않았는데, 그것이 민생과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세종 27년(1445) 2월 29일, 왕은 이렇게 말했다. “동전을 보급하면 재물이 널리 유통되며, 무거운 짐을 힘겹게 운송하는 수고도 사라진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틀림없이 옳은 주장이었는데, 그때는 왕의 생각을 이해하는 신하가 드물었다. 그의 화폐 정책을 반기는 백성은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시대를 너무 앞서가는 지도자는 외롭다.

15세기까지도 우리는 현물 화폐만 사용했다. 쌀과 베, 즉 미포(米布)를 가지고 상품을 거래했다. 서양에서는 고대부터 금속 화폐를 널리 사용했고, 이웃 나라인 중국도 그러했다. 우리 역사에도 종종 금속 화폐가 등장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조선 시대에 와서 화폐 사용에 큰 관심을 나타낸 것은 세종의 부왕 태종이었다. 태종 2년(1402)부터 닥나무로 만든 종이 지폐인 저화(楮貨)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대신 하륜의 건의를 수용한 결단이었다. 하륜의 주장은 이러했다. “국가에서 백성에게 보상할 것이 있으면 저화를 나눠주시고, 백성이 바치는 세금은 쌀과 곡식으로 거둬주십시오. 그러면 장차 나라가 부유해집니다. 흉년에는 저화를 가져온 백성에게 국가가 보유한 곡식을 나눠주시고, 풍년에는 저화를 풀어서 곡식을 사들이십시오.”(태종 4년 12월 4일) 태종은 그 말을 옳게 여겨 마침내 저화를 정식 화폐로 선포했다(태종 10년).

그런데 저화에는 약점이 있었다. 한낱 종이에 불과해 실물 가치가 없었고 쉽게 손상되는 데다가 위조도 어렵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백성이 저화를 외면하자 가치가 나날이 폭락해 무용지물이 됐다.

태종 때 지폐 ‘저화’ 보급 시도 실패


▎저화 유통의 부진을 보완하기 위해 조선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동전인 조선통보. / 사진:한국은행 화폐박물관 홈페이지 캡처
중국 역사에 밝은 세종은 화폐의 효용성을 확신해 부왕의 실패를 딛고 일어서기로 결심했다. 세 명의 정승과 왕은 통화정책을 논의했는데, 그들의 의견은 제각각이었다. 한 명은 저화를 사용하는 것이 옳다고 했고, 또 한 명은 동전이 좋다고 했다. 나머지 한 사람은 현물 화폐인 베를 고집했다(세종 4년 10월 16일).

이듬해 세종은 고위관료 연석회의를 열어 이를 상의했다(세종 5년 9월 16일). 의정부와 육조의 관리들이 열띤 토론을 벌인 끝에 동전 사용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마침 그때는 저화 가치가 더욱 폭락한 바람에 저화를 옹호하는 의견이 수그러들었다. 본래 저화 1장은 쌀 한 말(10되)에 해당했는데, 그 시절에는 겨우 쌀 한 되를 살 수 있었다. 재정을 담당하는 호조는 동전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호조판서 이지강은 당나라 초기의 개원전(開元錢)이란 동전을 표준 삼아 새 동전을 만들자고 했다. 동전 38g을 1전(10문)으로 삼자고 했다. 동전의 명칭은 ‘조선통보(朝鮮通寶)’로 하고, 사섬서(司贍書)에서 제작을 맡기로 했다. 드디어 동전의 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애초부터 왕은 동전사업을 지향했다. 세종 7년(1425) 초여름, 신하들 앞에서 왕은 자신의 본마음을 털어놓았다. “저화를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송나라였다. 원나라 때는 저화와 동전을 함께 쓰려 했으나 사업이 이뤄지기 전에 망해버렸다. 명나라도 두 가지를 함께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나는 두 가지를 동시에 사용할 수 없을 줄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동전을 사용하기 전에 저화를 써보지 않으면 백성이 동전을 더욱 싫어할 줄로 짐작했다.”(세종 7년 4월 14일)

저화를 거쳐 동전으로 넘어온 데는 세종 나름의 전략이 있었다는 고백이었다. 세종은 이제부터 백성에게 동전을 주고 저화를 거둬들이라고 명했다. 왕의 한 가지 근심은 저화의 액수보다 동전의 양이 부족할까 하는 것이었다. 당시 최고의 화폐 전문가는 호조참판 목진공이었다. 그는 통화량을 파악하고 있었다. 시중에 깔린 동전은 3000관(1관은 100전)이고, 국가가 보유한 동전은 2만4000여 관이라고 했다. 보유량은 통화량의 8배라는 뜻이었다.

호조의 통화정책은 이러했다. 저화 10장당 동전 1전으로 교환하고 이를 위해 동전 1000관을 풀어 저화를 모두 회수하자고 했다. 호조판서 이지강과 참판 목진공이 이 사업을 주도했다.

저화를 거두고 보니, 과연 목진공의 주장처럼 소액에 불과했다. 충청도의 경우에 저화 1만3328장, 쌀로 환산하면 414석이 전부였다(세종 7년 4월 21일). 환산하면 동전 133관이었다. 전국의 저화를 환수하는 데 필요한 동전은 목진공이 말한 1000관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해 가을 저화의 시대가 조용히 막을 내렸다(세종 7년 7월 20일).

처음에는 동전이 화폐의 기능을 웬만큼 감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목진공과 이지강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종 8년(1426) 2월, 참판 목진공이 죽었고, 그 이듬해에는 판서였던 이지강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들이 갑자기 연이어 사망하자 정책을 이어갈 마땅한 후계자도 없이 세종의 화폐 정책은 표류하고 말았다.

세종 9년(1427) 10월 12일, 왕은 동전의 가치 하락을 크게 염려했다. “동전을 만들어 사용하면 저화처럼 무용지물이 되지 않을 것이요, 저화처럼 가격이 폭락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그대들이 모두 말했다. 내가 그 말을 믿고 따랐으나 지금 동전 가치가 매우 떨어졌다.”(세종 9년 10월 12일) 저화와 달리 동전은 실물가치도 있고 위조하기도 어려워, 왕은 동전사업이 성공할 것으로 낙관했으나 다시 곤경에 빠졌다. 아무리 좋은 정책 의도를 갖고 있더라도 유능한 실무관리가 없을 때 발생하는 일이다.

구리 확보 위해 광산 개발하고 놋그릇 수집


▎화폐 정책을 주도한 호조는 상인과 수공업자가 동전을 거래에 사용하지 않을 경우, 곤장 100대를 때리고 재산을 몰수하는 법을 마련했다.
처음부터 애로가 있었다. 동전 원료는 구리인데 수급이 어려웠던 것. 동전 제조를 담당한 사섬서에는 주조용 화로가 30개였고, 날마다 구리 135근, 연간 4만8060근의 구리가 필요했다. 그런데 세종 6년(1424) 연초에 확보한 구리는 4011근에 불과했다(세종 6년 1월 18일). 원료가 턱없이 부족하자 국내 놋그릇을 모두 수집했다. 호조가 전국의 자원을 끌어모았더니 구리가 3만6348근, 생동(가공되지 않은 구리)이 6만4077근이었다(세종 6년 3월 20일).

향후 동전 제작을 위해서도 다량의 구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왕은 구리 그릇 제작을 전면 금지하고, 구리와 철의 광맥도 탐사하도록 했다. 아울러 사람을 보내 일본의 광산탐지 및 제련기술을 알아보게 했다(세종 6년 3월 20일 및 세종 8년 12월 6일). 그 당시 기술적인 분야를 총괄한 이는 중군총제 이천이었다. 실무관리로는 대호군 백환과 사직 김윤하와 김유지 등이 활약했다(세종 6년 9월 2일 및 세종 11년 12월 23일). 그들은 강원도 철원의 김화를 비롯해 경상도 고성·창원·김해·밀양·함안·의성·안동·고성 및 대구 일대를 누비며 자원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세종 11년 12월 23일).

특히 경상도에서는 백환의 역할이 중요했다. 그는 경상도에 두 곳의 주전소(동전 제조국)를 두자며 합포진과 울산진을 후보지로 거론했고, 각기 풀무 15개를 설치하자고 주장해 이를 관철했다(세종 6년 2월 7일). 호조에서는 전라도 군영 내에 주전소를 설치하자고 건의해 왕의 허락을 받았다.

세종 6년(1424) 한 해에 전국에서 주조한 동전은 1만921관이었다(세종 6년 12월 5일). 그 이듬해에는 경상도에서만 약 1만관의 동전이 제작된 것으로 짐작한다. 경상 좌도에서만 해도 5326관 578문이 만들어졌다(세종 7년 9월 3일).

목진공과 이지강이 호조를 이끌던 시절, 그들은 동전의 보급을 위해 세밀한 시행 규칙도 제정했다. 도성의 부유한 상인(부상대고)과 수공업자(공장)가 동전을 거래에 사용하지 않을 경우, 곤장 100대를 때리고 재산을 몰수하는 법을 마련한 것이었다. 또 동전 거래가 시중에 정착하도록 국고를 열어 매월 100석의 쌀을 민간에 팔았다(세종 7년 2월 8일). 화폐의 신용을 높이려고 이와 같은 강제 유통도 마다치 않았던 것이다. 워낙 엄격하고 단호한 동전 보급 정책 덕분에 백성들은 함부로 법을 어기지 못했다(세종 7년 2월 18일).

그런데 정책을 위협하는 강력한 복병이 있었다. 인플레이션이 문제였다. 동전 1문(10문은 1전)으로 쌀 한 되를 사도록 정했으나, 실제로는 3문에 거래됐다(세종 7년 5월 8일). 왕은 민의를 수렴해 가격을 정하려고 도성 부자들의 의견을 청취했다. 그러나 4년 뒤(1429년), 쌀 한 되 가격이 동전 12~13문으로 폭등했다(세종 11년 9월 23일). 동전의 가치가 형편없이 추락하자 조정은 할 말을 잊었다.

동전으로 거래 안 하면 재산 몰수 등 엄벌


▎혜촌 김학수가 그린 ‘칠패시전도’. 남대문 밖에 있었던 칠패 시전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시장 중 하나였다. / 사진:역사비평사
동전의 가치 하락은 처음부터 염려한 일이었다. 세종 7년(1425) 가을, 면포 한 필이 동전 600~700문(6~7관)이나 된다는 소식이 들리자 화폐 제도를 자주 바꿔서 비롯된 폐단이라며 다들 우려했다(세종 7년 7월 18일). 호조 참판 목진공은 그 사태를 두 가지 측면에서 분석했다. 첫째는 민간에 흩어진 돈, 즉 초기 통화량이 너무 많은 것이 문제요, 둘째는 조정 대신들이 끊임없이 동전 폐지를 주장해 백성이 동전을 신뢰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왕은 이러한 분석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통화량이 적으면 동전이 화폐로 자리를 잡기 어렵다고 했다. 문제는 적정한 통화량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이지강의 뒤를 이은 신임 호조판서 안순은 2만 관(2000만 문) 한도 내에서 시중에 동전을 풀자고 했다(세종 8년 11월 1일). 엄격한 기준도 없이 거액을 한꺼번에 푼다는 뜻인데, 그 정도라면 최초 2년 동안 제작한 동전을 몽땅 시장에 내놓는 셈이었다. 만약 그 말대로 2만 관 이상의 동전이 백성의 손에 들어갔다면 통화 팽창으로 물가가 급등하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동전 유통을 위해 이지강과 목진공 등이 제정한 시행령은 가혹했다. 가죽신 장인 이상좌는 동전 대신 쌀 1말 5되를 받고 신 한 켤레를 팔았다(동전 1전 5문 상당). 그가 법령을 어긴 사실이 드러나자 경시서(물가 담당기관)는 벌금 동전 8관(800전)을 부과했다. 쌀로 계산하면 무려 8석(80말)에 해당하는 거액이라 이상좌는 겨우 1관을 바쳤다. 관청에서 남은 벌금을 독촉하자 이상좌는 목매어 죽었다.

그 소식을 들은 세종은 통탄했다. “법으로 규제한 것은 동전을 널리 이용하려 한 것이었지 백성을 죽음으로 내몰려는 뜻이 아니었다. 내 마음이 아프다. 너희는 실정을 조사해 아뢰어라. 만일 관리가 가혹하였다면 그 죄를 용서하지 않겠노라.”(세종 7년 8월 23일) 왕은 유족에게 쌀 3석을 주고 이미 낸 벌금 1관도 되돌려줬다.

대신 가운데는 동전 사용을 반대하고, 정책 실패라 간주하는 사람이 많았다. 세종 8년(1426) 도성에 연쇄 화재 사건이 발생하자 왕은 의정부와 육조의 신하들을 모아서 대책을 숙의했다. 그때 대제학 변계량이 동전 문제를 거론했다. 흉년으로 백성이 시달리고 있는 판에 동전만 사용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무리라는 얘기였다. 그는 동전 사용을 싫어하는 백성이 남몰래 물물 교환을 하는 경우가 많다며, 금령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재산을 몰수하는 등 법이 가혹해 민심이 이반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변계량은 동전을 쓰거나 말거나 백성의 자유를 보장하고, 벌금의 납부와 관청에서 물품을 사는 경우에만 동전 사용을 강제하면 된다고 했다(세종 8년 2월 26일).

“백성들이 왜 싫어하는지 모르겠다”


▎서울 통인시장은 엽전을 사용해 시장 내 음식을 골라 담는 방식을 도입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변계량의 주장을 경청한 세종은 “화폐 제도를 또다시 변경할 수 없는 일”이라고 일단 못 박았다. 하지만 동전 정책 실패에 대한 세종의 걱정은 가시지 않았다. 이틀 후에, “지금 백성이 모두 동전을 싫어하고 있다”라고 말하며 왕은 동전의 사용을 중단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걱정했다(세종 8년 2월 28일). 호조판서 안순은 세종을 위로하고 앞으로도 동전을 계속 사용하자고 건의했다.

실용과 합리성을 기준으로 매사를 판단하는 왕으로서는, 다수의 대신을 비롯해 백성들이 동전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죽하면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저화보다 동전이 더 나은데 백성들이 왜 싫어하는지 모르겠다”(세종 9년)고 말하기까지 했을까.

동전 사용 초기 안순이 통화량을 너무 키운 것이 문제였으나, 수년이 흐른 뒤에는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훗날 집현전 직제학 이계전이 이 문제를 정확히 파헤쳐 이렇게 분석했다. “구리는 다른 나라(일본)에서 생산되는 물건이라 꾸준히 공급하기 어려운데, 이미 만들어 놓은 동전(전문)을 기술자들이 녹여서 일본으로 다시 흘러 들어갔습니다. 그리하여 통화량이 날마다 줄었습니다. 그밖에 다른 문제점이 있어서 동전을 사용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습니다.”(세종 27년 10월 11일)

이계전의 날카로운 통찰이 너무 늦게 나온 것이 유감이었다. 그보다 오래전 동전의 가치는 크게 훼손돼 화폐로서 기능을 이미 상실했다. 결국 호조의 의견을 바탕으로 의정부에서는 재정 적자를 초래하는 동전 제작을 중지하고, 저화의 시대로 되돌아가기를 왕에게 권하였다(세종 27년 12월 4일).

이에 이계전은 대안을 제시했다. 재료 확보에 어려움이 덜 한 철전, 즉 쇠로 만든 화폐를 쓰자는 의견이었다. 그는 중국의 예를 들어가며 두께도 얇고 모양도 아름다운 철전이라면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제안했다.

세종은 세자(문종)에게 명해 여러 대신과 함께 철전 사용을 검토하도록 했다. 좌의정 신개, 우의정 하연, 좌참찬 이숙치, 우참찬 정인지, 호조판서 정분과 집현전 직제학 김문과 이계전이 토론을 벌였다. 그때도 대신들은 미온적이었다. 어설프게 추진하면 이번에도 폐단이 일어날 것이라며 변화를 두려워했다(세종 27년 10월 11일). 마침 세종은 건강이 나빠져 세자에게 통치를 위임한 상태였다. 결국 동전 사용은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세종 29년 7월 29일).

그동안 학자들이 발견한 화폐정책 실패 원인 중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은 국가 정책이 신뢰를 잃어서 화폐 제도가 절로 무너졌다는 설명이다. 직제학 이계전이 지적했듯, 관공서마다 물가상승으로 인한 피해를 벗어나려고 백성에게 현물을 요구했다(세종 27년 10월 11일). 이 같은 관청의 불법 행위는 백성이 동전을 신뢰하지 못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이계전은 사태를 다음과 같이 고발했다. “형조와 의금부에서 벌금을 받을 때 동전과 베를 함께 요구했고, 관공서에서 노비와 장인들에게 벌금을 물릴 때도 여러 가지 물품으로 받았습니다. 도성에서도 이러한데 시골은 어떠하겠습니까.”

악재도 겹쳤다. 목진공·이진강 등 유능한 관리가 사망한 이후 적절한 인재를 발견하지 못했고, 구리 수급도 원활하지 못했다는 점 이외에 치명적인 결정이 있었다. 가격 변동이 극심한 쌀을 가지고 동전 가격을 결정했던 점이다. 역시 이계전이 제대로 짚은 것처럼, “쌀값의 오르내림과 동전의 수급상황이 한결같지 않아 하나로 고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세종 27년 10월 11일). 물건의 가격은 항상 유동적인데 동전으로 가격을 고정하려 했으니, 탈이 나는 것이 당연했다.

조정에 화폐 운용 방법 아는 인재 없어


▎세종 승하 200년이 지난 숙종대에 유통되기 시작해 조선 후기까지 사용된 상평통보.
동전을 유일한 결제 수단으로 삼은 것도 착오였다. 이계전은 이를 이렇게 지적했다. “동전만 고집하면 수백 필의 면포를 사기 위해 수백 관이 필요합니다. 부유한 상인이라도 쉽게 마련할 수 없는 분량인데, 다른 사람은 어떠하겠습니까.” (세종 27년 10월 11일)

세종이 동전을 사용하고자 했을 때는 이계전처럼 화폐의 운용 방법을 정확히 아는 인재가 조정에 한 명도 없었다. 이계전이 문제점을 파악했을 때는 이미 정책은 실패한 상태였다. 동전에 대한 백성의 신뢰도 바닥이었고, 세종도 병이 깊어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른 상황이었다.

이계전의 종합적인 분석이 나오기 몇 달 전, 세종은 이미 현물 화폐로 돌아가기를 결심했다. 왕은 충청·전라·경상도의 관찰사에게 지시해 목면과 정포(품질 좋은 5승포)의 가격을 쌀과 벼로 어떻게 평가하는 것이 좋을지를 알아보라고 지시했다(세종 27년 3월 17일).

왕자 시절 세조는 부왕의 화폐 정책을 꼼꼼히 살펴봤다. 그 또한 화폐의 효율성을 믿어 재위 중에 쇠로 전폐(화살촉 모양의 화폐)를 만들었다(세조 10년, 1464). 유사시에는 화살촉으로 쓰고, 평시에는 돈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원료인 철의 공급이 불확실했다. 세조의 화폐 정책도 일관성을 잃고 우왕좌왕하다가 결국에는 현물 화폐로 다시 후퇴했다.

한국에서 동전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임진왜란이 지난 뒤였다. 광해군 말기(1640년대)가 되자 개성에서 백성들이 스스로 동전을 사용했다. 17세기의 명신 김육은 동전 사용을 적극적으로 주장했고, 그 결과 숙종 4년(1678)부터 나라에서 상평통보를 만들기 시작했다. 세종이 동전을 법정 화폐로 정한지 200년도 훨씬 지난 뒤 중앙 관청은 물론이고 여러 군영과 지방관청에서도 동전을 제작했고, 점차 민간에 널리 퍼져나갔다. 뒤늦게나마 왕의 선견지명이 통하는 시대가 된 셈이다. 아울러 동전이 국가와 민생에 도움이 되었으니 다행인 일이라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 백승종 - 역사가이자 역사칼럼니스트. 전북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튀빙겐대 대학원에서 한국학과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튀빙겐대 한국학과 교수를 비롯해 서강대 사학과 교수, 경희대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로 있다. 저서로 [상속의 역사]와 [신사와 선비] 등 20여 종이 있으며, 2012년 한국출판평론학술상과 제52회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202012호 (2020.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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