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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사랑으로 재해석한 한국사(9)] 스물세 살 차이 어린 몽골 공주에게 매 맞은 충렬왕 

황제의 딸과 결혼한 고려 왕의 굴욕 

장인 쿠빌라이 칸 도움으로 무신권력 무너뜨리고 왕권회복
원나라 황제 바뀌자, 아들에게 밀려 실권 잃고 쓸쓸한 퇴장


▎실존 인물 기황후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지만 역사적 사실과 전혀 관계가 없는 로맨스 판타지 사극 [기황후]의 주인공들. 왼쪽부터 원나라 황제 타환(지창욱), 공녀 출신으로 황후에 오르는 기승냥(하지원), 약소국의 울분을 온몸으로 겪는 고려 유왕(주진모). / 사진:MBC
"마누라, 부디 노여움을 푸시오. 이러시면 임금 체면이 뭐가 되오?”

나이 40줄에 접어든 왕은 원나라에서 온 어린 왕비를 달래느라 애를 먹었다. 왕비를 높여 부르는 몽골어 ‘마누라’를 써가며 상전 모시듯이 했다. 1277년 고려 25대 충렬왕이 요양차 머무르려고 천효사에 행차했는데 뒤따르던 왕비 제국 대장공주가 발끈 화를 내면서 돌아가 버렸다. 격에 맞지 않게 시종하는 사람들이 적다는 게 이유였다. 세계 제국 원나라의 실질적 창업자인 쿠빌라이 황제의 친딸이다. 자존심이 하늘을 찔렀다. 공주가 행차할 때는 사람들이 위에서 내려다볼까 봐 도로변 집들의 누각을 철거시킬 정도였다([고려사] 세가 ‘충렬왕 3년’).

왕이 다독였지만 제국대장공주의 노여움은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역효과가 났는지 지팡이를 들고나와 임금을 때리는 것이었다. 충렬왕은 모자를 내동댕이치고 원나라에서 온 시종 후라타이를 꾸짖었다. 윗사람을 잘못 모셨으니 반드시 죄를 묻겠다며 짐짓 목소리를 높였다. 그제야 화가 누그러진 공주는 다시 남편을 따라나섰다. 그런데 충렬왕이 자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천효사에 들어가자 또 성을 냈다. 제국대장공주는 왕을 때리고 욕하더니 말을 타고 궁으로 가려 했다. 일관 문창유가 지켜보다가 탄식했다. “우리나라에 이보다 더 치욕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고려사] 열전 ‘제국대장공주’)

어린 왕비에게 매 맞는 임금이라니, 고려에 하늘 같은 ‘마누라’가 나타났다. 1274년 5월 원나라에서 세기의 결혼식이 열렸다. 신부는 쿠빌라이 황제의 딸 쿠두루칼리미쉬, 당시 16세 소녀였다. 신랑은 고려 태자 왕심(충렬왕)으로 39세의 유부남이었다. 태자는 1260년 정화궁주 왕씨와 결혼해 슬하에 1남 2녀를 뒀다. 고려에 태자비를 놔두고 무려 23세나 어린 몽골 공주에게 새 장가를 든 것이다. 그것은 부왕 원종이 황제에게 청혼표(表)를 올려 성사시킨 결혼동맹이자, 고려의 운명을 바꾼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원종은 왜 쿠빌라이 황제와 사돈을 맺고 고려를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만들려고 했을까?

차기 대칸은 누구? 고려의 운명을 건 선택


▎제주도 북제주군 애월읍에 위치한 항파두리성. 고려말 삼별초가 몽고와 항쟁할 때 최후의 진지로 삼았던 곳이다.
고려는 1231년부터 28년간 몽골군의 침공에 맞서 싸웠다.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하고 최씨 무신정권을 중심으로 굳세게 항전한 것이다. 그러나 바다 건너 요새로 들어간 지배층과 달리 아무 보호막이 없었던 백성들의 삶은 철저히 파괴되고 말았다. 1254년 한 해에만 포로가 된 남녀가 20만6800여 명이었고, 살육된 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었으며, 적군이 휩쓸고 간 고을은 모두 잿더미가 됐다.([고려사] 세가 ‘고종 41년’)

이렇게 되자 고려 조정에서도 문신들이 나서 화친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마침 국내외 여건도 화친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1258년 몽골에 강경노선을 견지해온 최씨 정권이 무신 김준의 정변으로 무너졌다. 또 함경도의 반란 세력이 몽골군에 항복하면서 철령 이북에 쌍성총관부가 설치됐다. 고려는 마침내 몽골제국에 화친을 청하기로 했다. 1259년 4월 태자 왕전(원종)이 대칸의 신하로 입조(入朝)하려고 중국에 들어갔다.

칭기즈칸의 손자이며 4대 대칸이었던 몽케는 당시 남송(南宋)을 정벌하느라 중국 조어산(쓰촨)에 있었다. 그런데 왕전이 육반산(닝샤)에 이르렀을 때 놀라운 소식이 들어왔다. 몽케가 이질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고려 태자는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왔던 길을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대칸 후계자를 만날 것인가? 총명한 왕전은 빈손으로 귀국하는 대신 중국에 남았다. 고려의 운명을 걸고 차기 대칸을 만나기로 한 것이다.

몽골제국의 대권 판도는 안갯속이었다. 명분상으로는 수도 카라코룸의 유수 아리크부카가 유리했다. 몽골에는 막내아들이 집안을 잇는 풍습이 있었다. 칭기즈칸 사후 대칸의 자리가 셋째 오고타이 가문의 구유크로부터 막내 툴루이 가문의 몽케에게 넘어간 것도 그래서다. 맏형 몽케가 죽자 막냇동생 아리크부카는 여러 가문의 폭넓은 지지를 받으며 5대 대칸의 자리에 오를 채비를 했다.

그러나 둘째 형 쿠빌라이는 생각이 달랐다. 북중국의 지배자였던 그는 내몽골 초원에 상도개평부를 건설하고 대권을 넘보고 있었다. 칭기즈칸은 일찍이 온 세상을 말발굽으로 짓밟아 말을 먹일 초원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것이 몽골인의 긍지요, 유목민족이 농경민족을 지배하는 방식이었다. 반면 쿠빌라이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였던 어머니 소르칵타니의 영향을 받아 피지배 민족을 끌어안고 융합하는 세상을 꿈꿨다. 중국에 대해서도 우호적이어서 총애하는 아들에게 친킨(眞金)이라는 중국식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1259년 쿠빌라이는 대칸 몽케의 명으로 남송 원정군의 한 갈래를 지휘하고 있었다. 형이 병사했다는 급보를 받자 그는 카라코룸으로 돌아가는 대신 남송 공략에 박차를 가한다는 의외의 결정을 내렸다. 몽케의 장례식과 차기 대칸 선출을 위한 쿠릴타이(족장회의)에 참석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그랬다가는 아리크부카에게 대권을 넘겨주고 반역자로 몰려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쿠빌라이는 몽케의 유업을 계승해 남송 원정을 기필코 승리로 이끌겠다고 선언했다. 그것은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취하는 탁월한 전략이었다.

그해 9월 쿠빌라이의 군대가 장강 중류 북쪽 지역에 나타났다. 몽골인은 물론 북중국의 한족·거란족·여진족을 아우르는 혼성 군단이었다. 그들은 ‘유목민 군대는 물을 두려워한다’는 터부를 깨고 새로운 신화를 쓰고자 했다. 전사들은 부적을 붙이고 장강 남쪽으로 건너갔다. 도강을 마친 쿠빌라이군은 남송의 악주(우한)를 에워쌌다. 악주는 수륙교통의 요충지로 이곳을 빼앗으면 적을 동서로 분리할 수 있었다. 수도 임안(항저우)을 고립시키고 남송을 벼랑끝으로 몰아붙일 승부수였다. 도강 작전이 전쟁의 양상을 바꾼 것이다.

남송은 부랴부랴 구원군을 편성해 악주에 투입했다. 그런데 쿠빌라이군은 어쩐지 싸울 의사가 없어 보였다. 슬며시 군대를 되돌려 다시 장강 북쪽으로 넘어간 것이다. 장강을 건너 악주를 포위했을 때 쿠빌라이는 이미 원하는 것을 얻었다. 그는 몽케의 유업을 계승한다는 명분 아래 각지의 몽골 가문과 동맹 세력에 무력시위를 한 것이다. 유목민 군대도 물을 건널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면서 함께 새로운 시대를 열자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관망하던 세력들이 대거 합류하기 시작했다. 중국·만주 등 동방의 왕가들이 대칸 옹립에 앞장섰다.

쿠빌라이 정통성 약점 메워준 고려 태자


▎해인사에 소장돼 있는 재조대장경(국보 제32호). 초조대장경이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자 고려 왕조가 11년에 걸쳐 만든 두 번째 대장경이다.
쿠빌라이의 군대는 본거지인 상도개평부로 북진했다. 이제 지지자들을 모아 독자적인 쿠릴타이를 열고 대칸의 자리에 오를 것이다. 그리고 몽골 수도 카라코룸을 장악하고 있는 아리크부카와 일전을 벌일 것이다. 쿠빌라이가 벅찬 미래를 구상하며 양주와 초주의 교외에 이르자 특별한 손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려 태자 왕전이 기다렸다는 듯이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쿠빌라이를 맞은 것이다. 그는 예법을 갖춰 부왕 고종의 표문(表文)을 전했다. 화친을 청하는 고려국의 공식 입장이었다.

“우리나라는 이제까지 병권을 잡은 권신이 군대를 장악하고 제 마음대로 국사를 요리하는 바람에 상국에 결례를 범했습니다. 다행히 하늘의 도움으로 흉악한 자(최의)를 제거하고 강화도로 피난 온 백성들도 옛 터전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부디 약자를 은총으로 감싸주시어 제후로서 충성을 다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고려사] 세가 ‘고종 46년’)

쿠빌라이는 크게 기뻐했다. 동방에서 몽골제국에 맞서 싸우는 나라는 고려와 남송밖에 없었다. 남송을 군사적으로 압박하고 돌아가는 길에 고려가 자신에게 신하 되기를 청하다니 이것은 하늘의 뜻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쿠빌라이는 아리크부카에 비해 정통성이 뒤처졌다. 상도개평부에서 그들만의 쿠릴타이를 열어 세를 과시할 수는 있지만 대칸으로서의 권위는 아무래도 떨어졌다. 고려 태자의 입조는 부족한 권위와 정통성을 상당 부분 메워주는 정치적 승리였다. 쿠빌라이는 왕전을 칭찬하면서 말했다.

“고려는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어 과거 친히 정벌에 나섰던 당 태종조차도 굴복시키지 못했다. 지금 그 나라의 태자가 스스로 찾아와서 나에게 복종하니 이는 하늘의 뜻이로다.” ([고려사] 세가 ‘원종 원년’)

고려 태자 입장에서는 사실상의 항복이자 굴욕이었다. 그러나 몽골의 실력자에게 선물을 안겨 후일을 기약할 수 있었다. 왕전은 몽케 사후 중국 땅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해 아리크부카가 아닌 쿠빌라이에게 투자한 것이다.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귀순할 때처럼 자신의 나라와 신하와 백성들을 위해 항복 비즈니스를 한 것이다. 태자는 이듬해 초까지 쿠빌라이의 부중에 머물며 번왕(藩王)에 준하는 후한 대우를 받았다. 그리고 ‘불개토풍(不改土風)’이라 해 ‘고려 풍속을 고치지 않겠다’는 약속도 얻어냈다.

그 사이 고종이 세상을 떠나고 왕전, 곧 원종이 뒤를 이었다. 새 임금은 1260년 봄 몽골 다루가치와 함께 서경·개경을 거쳐 강화도에 돌아왔다. 대칸이 된 쿠빌라이는 서경에 주둔한 몽골군을 철수시키고 조서를 내려 원종을 엄호했다. 조서에는 “만약 다시 반란을 일으켜 윗사람을 해치는 자가 나온다면 내가 정한 법을 문란케 하는 것”이라며 무신 권력자 김준을 겨냥하기도 했다. 몽골 대칸을 등에 업은 원종은 왕정복고(王政復古)와 개경으로 환도를 서둘렀다.

하지만 1170년 정중부의 난 이후 90년 넘게 지속된 무신정권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리 없었다. 1264년 몽골 조정이 원종에게 직접 입조할 것을 요구하자 김준 일파가 굴욕이라며 거세게 반대했다. 최씨 정권은 무너졌지만 무신들은 여전히 교정도감을 장악하고 대몽(對蒙) 강경노선을 견지했다. 원종이 화친을 청하면서 약속한 개경 환도는 재위 10년이 지나도록 지켜지지 않았다. 무신정권은 항쟁의 근거지이자 자신들의 존립 기반인 강화도를 포기할 수 없었다. 왕과 조정도 눈치를 보며 떠나지 못했다.

1268년 드디어 원종이 칼을 뽑았다. 무신 임연을 배후 조종해서 권력자 김준을 제거한 것이다. 그러나 무신정권은 건재했다. 1269년 임연이 개경 환도에 반대한다며 원종을 폐위시키고 동생 왕창을 옹립한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서경에서 반란이 일어나 자비령(황해도 서흥) 이북 땅이 몽골에 넘어가고 동녕부가 설치됐다. 쿠빌라이의 도움으로 왕위를 되찾은 원종은 파병을 요구하러 다시 몽골에 입조했다. 이때 왕은 대칸에게 대담한 청을 넣었다. 태자 왕심과 몽골 공주를 혼인시키자는 것이었다.

원종은 무신정권을 끝장내고 개경으로 천도해 왕권을 제대로 펼치고 싶었다. 그 정치적 해법이 바로 몽골 대칸과의 통혼이었다. 태자가 쿠빌라이칸의 부마가 된다면 허약해진 고려 왕권에 세계 최강의 배경이 생긴다. 첫 번째 시도는 무위에 그쳤다. 시집보낼 공주가 없다는 것이었다. 원종은 1270년 임연이 등창으로 죽자 혼란을 틈타 개경 환도를 단행했다. 이어서 임연의 아들 임유무마저 암살하고 무신정권을 무너뜨렸다. 삼별초의 항쟁 속에 간신히 왕정복고에 성공한 임금은 이듬해 다시 한번 청혼표를 올렸다.

권력 판을 뒤집은 결혼동맹 승부수


▎처인성은 몽고의 2차 침입 때 고려의 승장 김윤후가 적장 살리타를 활로 쏴 죽인 곳이다. 처인성승첩기념비 뒤쪽으로 새로 복원한 야트막한 토성이 자리 잡고 있다.
1271년 쿠빌라이 칸은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바꾸고 중국식 황제를 칭했다. 그가 다스린 원나라는 거대한 용광로와 같았다. 중국 유학자들을 등용해 정치적 자문을 구했고, 상업과 재무는 유능한 색목인들에게 맡겼으며, 마르코 폴로 같은 기독교도들도 배척하지 않고 포용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됐다. 이 융합과 실용의 대제국에 고려도 한 축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황제는 원종의 거듭된 청을 받아들여 태자 왕심을 부마로 삼았다. 후궁 소생인 쿠두루칼리미쉬가 배필로 정해졌다.

39세 태자 왕심과 16세 공주 쿠두루칼리미쉬는 1274년 5월에 원나라에서 결혼했다. 다음 달에 원종이 세상을 떠나자 왕심, 곧 충렬왕이 즉위해 먼저 고려로 들어갔다. 10월에 왕이 서북면에 나아가 공주를 맞이했는데 일부 신하가 변발하지 않은 채 나타나자 책망했다. 충렬왕은 원나라에 입조했을 때 이미 변발을 한 것이다. 쿠빌라이 황제는 지난날 고려 풍속을 고치지 않겠다고 했지만 부마가 된 충렬왕은 스스로 몽골풍을 받아들였다. 새 임금이 변발하니 신하들도 모두 따라했다.([고려사절요] ‘원종 15년’)

그런데 쿠두루칼리미쉬에게는 신분상의 약점이 있었다. 그녀는 황제의 딸이었지만 후궁 소생 서녀였다. 이 때문에 원나라에서 공주에 책봉되거나 존호를 받지 못했다(‘제국 대장공주’는 후일 세상을 떠나고 나서 무종 카이샨 황제에게 받은 시호다. ‘대장공주’는 황제의 고모를 뜻한다). 충렬왕으로서는 다소 아쉬운 대목이었다. 원나라 부마 지위를 굳건히 해야 고려 왕권이 탄탄해지기 때문이었다.

보완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원나라에 공식적인 책봉과 존호를 요구하되 일단 고려에서 먼저 해주기로 했다. 1275년 정월 임금은 어린 왕비를 ‘원성공주(元成公主)’에 봉하고 떠들썩하게 축하했다. 그녀의 궁은 경성궁, 전각은 원성전, 부는 응선부로 정해졌고 따로 관속을 뒀다. 또 안동과 경산부를 탕목읍(湯沐邑)으로 삼아 부세를 거둘 수 있도록 했다.

제국대장공주는 재물을 모으고 굴리는 데 각별한 관심과 재능을 갖고 있었다. 일찍이 인삼·잣·모시·은 등을 원나라의 강남에 수출해 재미를 보았다. 또 광주의 흙을 가져다 강화에서 도자기를 굽도록 해 중국에 내다 파는 수완도 발휘했다. 이 상품들은 몽골계 칸국들이 장악한 비단길을 따라 서방세계로도 보내졌다고 한다.

고려에 처음 왔을 때는 어려서인지 엉뚱한 욕심을 부리기도 했다. 공주는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반드시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렸다. 1276년 흥왕사 금탑(金塔)을 무단으로 가져와 자기 궁에 들였을 때는 사람들이 기절초풍했다. 제국대장공주는 금탑을 허물어서 다른 용도로 쓰려고 했다. 충렬왕이 말렸지만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금탑이 제자리로 돌아간 것은 이듬해 임금이 중병에 걸려 드러누운 덕분이었다. 신하들이 액운을 떨치려면 금탑을 돌려줘야 한다고 간언하자 공주는 군말 없이 내놓았다. 간혹 남편을 지팡이로 때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의지하고 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충렬왕, 몽골풍 받아들여 솔선수범 변발


▎대구시 신무동 팔공산 자락에 있는 부인사 전경. 이 절에서 고려 초조대장경을 보관했으나 몽고군의 침입으로 모두 불탔다.
나이가 들수록 엄하고 사리에 밝은 모습도 보였다. 충렬왕은 사냥에 몰두한 임금이었다. 1282년에는 불을 놓아 사냥하다가 백성들의 곡식을 태워 먹기도 했다. 제국대장공주는 “백성들의 고통은 아랑곳없이 사냥만 일삼으니 나랏일이 어찌 되겠느냐?”고 왕에게 돌직구를 날렸다. 또 음악에 관심 많은 충렬왕이 틈만 나면 내관과 악사들에게 연주를 시키자 공주가 사람을 보내 “거문고와 퉁소로 나라를 다스렸다는 말은 들은 바가 없다”며 중단시켰다([고려사] 열전 ‘제국대장공주’).

충렬왕은 제국대장공주를 소중히 여기고 귀하게 대접했다. 그녀의 존재가 고려 왕권과 직결되기 때문이었다. ‘황제의 딸’을 앞세워 부마 지위를 인정받아야 국내에서 임금의 통치에 권위가 실리고 대외적으로 고려의 국가 위상을 높이며 다루가치 등 원나라 관리들의 간섭을 제어할 수 있었다. 충렬왕은 끊임없이 부마의 격을 높이고 지위를 공식화하려고 애썼다. 그는 ‘부마 왕권’을 추구한 임금이었다.

1278년에는 원나라에 들어가 쿠빌라이 황제로부터 ‘부마금인(駙馬金印)’을 받아냈다([고려사] 세가 ‘충렬왕 4년’). 3년 후엔 황제가 ‘부마국왕(駙馬國王)’으로 책봉한다는 조서를 내렸다([고려사] 세가 ‘충렬왕 7년’). 1294년에는 세조가 세상을 떠나고 성종 테무르 황제가 보위에 올라 쿠두루칼리미쉬를 ‘안평공주(安平公主)’에 정식으로 책봉했다. 이로써 부마 충렬왕은 세계 제국 원나라 쿠릴타이(족장회의)에서 서열 7위에 앉게 됐다.

제국대장공주와 충렬왕, 그리고 두 사람의 아들 충선왕은 세상을 뒤흔든 무고 사건들의 중심에 서 있었다. 무고(巫蠱)란 무속으로 남을 저주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는 질투와 복수, 그리고 정치적 음모가 감춰져 있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금지된 유혹에 빠져들었다. 결국 제국대장공주는 일찍 생을 마감했고, 충렬왕과 충선왕 부자는 죽을 때까지 불화했다.

1275년 제국대장공주가 17세의 나이로 원자 이지리부카(충선왕)를 낳았다. 이를 축하하려고 정화궁주가 잔치를 열어줬다. 궁주는 과거 충렬왕의 태자비였다. 원래 임금의 첫 번째 부인이었으나 남편이 원나라 공주에게 새 장가 드는 바람에 제1비 자리를 내주고 쓸쓸한 처지가 됐다. 그런데 잔치에서 궁녀가 정화궁주와 같은 반열에 제국대장공주의 자리를 마련하자 난리가 났다. 자신을 궁주와 동등하게 대우하려 했다는 하인의 고자질에 공주는 버럭 화를 내면서 높은 의자가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화궁주는 사죄의 의미로 무릎을 꿇고 술을 올려야 했다.

그 일이 불씨가 됐을까? 이듬해 어떤 사람이 다루가치의 관아에 익명의 글을 던져 넣었다. 투서에는 “정화궁주가 왕의 총애를 잃자 무녀를 시켜 원성공주를 저주했다”고 씌어 있었다. 궁주는 공주의 시종들에게 구금됐는데 유경이 힘써 변론한 덕분에 형벌은 면했다. 하지만 그날부로 별궁에 유폐돼 원나라 공주가 죽을 때까지 왕을 보지 못했다.([고려사] 열전 ‘정신부주’)

1297년 5월 제국대장공주는 원나라에서 아들 이지리부카와 계국대장공주의 혼례를 보고 돌아왔다. 당시 수령궁(壽寧宮)에 작약꽃이 활짝 피었다. 공주가 한 송이를 꺾어 오게 해 한참을 만지작거리다가 흐느껴 울었다. 얼마 후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니 나이 39세였다. 어머니의 비보를 듣고 귀국한 이지리부카는 돌연 충렬왕이 총애하던 궁첩 무비를 지목해 무고 사건을 일으켰다. 무당에게 공주를 저주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는 무비가 부왕의 총애를 믿고 방자하게 굴어 모후가 화병으로 죽었다고 믿었다. 복수심에 불탄 아들은 무비와 환관들을 죽이고 일당 40여 명을 유배보냈다.([고려사] 세가 ‘충렬왕 23년’)

금지된 유혹에 빠진 황제의 외손자, 충선왕

아내와 애첩을 잃고 상심에 빠진 충렬왕은 이듬해 이지리부카, 곧 충선왕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새 왕비 계국대장공주는 조인규의 딸 조비(趙妃)가 왕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걸 시샘해 원나라 황태후에게 편지를 띄웠다. 조비의 저주 때문에 왕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이 일로 100여 명이 혹독한 문초를 당하고 조인규와 조비가 원나라에 잡혀갔다. 충선왕도 연경(베이징)으로 소환됐고 충렬왕이 왕좌에 복귀했다.

늙은 왕은 나랏일을 팽개치고 사냥과 음악에 심취했다. 왕유소·송린 등 임금의 측근들이 권력을 휘둘렀다. 그들은 충선왕이 돌아올까 봐 부자 사이를 이간질했다. 계국대장공주를 서흥후 왕전에게 개가시켜 왕위를 잇게 한다는 음모까지 꾸몄다. 1305년에는 이 계획을 성사시키려고 충렬왕을 구슬려 원나라에 건너갔다. 1307년 성종 테무르 황제가 세상을 떠나고 후계자 쟁탈전이 벌어지면서 부자의 운명은 엇갈렸다.

충선왕은 절친한 사이인 무종 카이샨 황제를 옹립하는데 큰 공을 세워 제왕의 반열에 올랐다. 반면 충렬왕은 안서왕 아난다를 황제로 밀다가 낭패를 봤다. 새 황제를 등에 업은 충선왕은 왕유소 일당을 처형하고 아버지의 실권을 빼앗았다. 측근들을 다 잃고 쓸쓸하게 귀국한 충렬왕은 1308년 7월 세상을 떠났다. 원나라에 충성했다는 뜻의 ‘충(忠)’자 시호를 쓴 첫 번째 임금이다.

원나라에서 돌아온 충선왕은 아버지 빈전이 차려진 숙창원비 김씨의 집으로 향했다. 숙창원비는 일찍 시집갔다가 과부가 된 여인이다. 지난날 이지리부카는 무비를 죽인 뒤 아버지를 위로한답시고 김씨를 궁에 들여보냈는데 뒤에 충렬왕의 비로 봉해졌다. 충선왕은 부왕의 빈전에서 제사를 드린 다음 숙창원비 김씨와 시간을 보냈다. 얼마 후 새 임금은 김씨를 숙비(淑妃)로 봉했고, 원나라 황태후는 그녀에게 족두리를 하사했다. 개경 거리에는 충렬왕 때 유행한 노래가 유령처럼 떠돌았다.

“쌍화점에 만두 사러 갔더니/ 회회(몽골인) 아비 내 손목을 쥐더이다./ 이 소문이 가게 밖에 나며 들며 하면/ 다로러거디러 조그마한 새끼 광대 네 말이라 하리라./ 더러둥셩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다로러거디러다로러/ 그 잠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위 위 다로러거디러다로러/ 그 잔 데 같이 난잡한 곳 없다.”(고려가요 ‘쌍화점’, 현대어 번역, [문화원형백과])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사람을 읽고 생각하고 쓰면서 역사의 행간을 채워나간다. 팟캐스트·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2015) 등을 썼다.

202012호 (2020.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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