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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 대기자 ‘고전의 재발견’] 21세기 국가 리더 어떻게 뽑아 쓸 것인가 

국민주권 정치, 한비자에게 길을 묻다 

이익 탐하는 인간과 정치, 진화 멈춘 본질 간파한 한비자
욕망·술수의 정치인, 나라 위해 일하게 만드는 법술 설파


▎국민주권시대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정권을 탄핵한 촛불혁명의 모습.
[한비자]를 처음 몇 장만 읽어 보면 알게 된다. 이게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말이다. 이 이야기들은 2300여 년 전 사람이 쓴 것이지만, 지금도 어느 곳에서든 일어나는 일이다. 한비자의 이야기는 온통 정치와 정치적 인간들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또 우리는 알게 된다. 수천 년이 지나도 인간의 본질은 진화하지 않는다는 것, 특히 정치와 정치를 하는 인간들의 행동양식은 수천 년래 똑같다는 것을 말이다.

[한비자]는 이렇게 진화가 멈춘 정치와 정치인들의 ‘루틴(routine)’을 다룬다. 우선 자기 잇속부터 챙기고, 모함과 모략을 일삼고, 이권을 위해 투쟁하고, 백성을 억울하게 만드는 그들의 ‘평범한 본질’. 문제는 또 있다. 그렇게 자신의 이익과 권력에 대한 치열한 욕망이 없는 사람들, 염치를 챙기고 자신의 깨끗함을 중시하는 순정주의자들은 아무리 유능해도 정치에 발을 담그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비자는 이렇게 현실 정치를 외면하는 선비들도 ‘쓸모없는 인간들’이라며 분노하지만, 그런 이들은 유사 이래 역시 똑같이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택할 수 있는 현실은 정치와 관직을 지향하는 욕망의 본능을 타고난 자들을 골라 쓰는 것이다. 관건은 그런 이들을 어떻게 잘 이끌어 나라를 위해 써먹을 수 있느냐다. 그것이 바로 ‘군주의 기술’이다.

나는 지금까지 한비자와 관련한 책을 두 권 출판했다. [적우(敵友):한비자와 진시황](나남)과 [21세기 군주론-국민주권시대의 제왕학](독서일가)이다. 전자는 소설이고, 후자는 제왕학 입문서다. 내 폴더에는 이보다 더 많은 한비자 관련 글들이 있다. 내 버전의 완역본도 있고, 해설서도 있고, 칼럼도 있다. 오히려 최근에 출판한 [21세기 군주론]은 그 글들 중 용인(用人)과 무위(無爲) 부분을 국민주권시대 국민의 정치기술로 소환하기 위해 새로 쓴 제왕학 입문편이다. 그러나 한비자를 우리 시대의 국민 정치기술로 소환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 쉽지 않음과 그럼에도 한비자를 불러내려는 이유를 이제부터 말하려고 한다.

알고 보면 친숙한 한비자


한비자를 이 시대로 끌고 오려는 나의 시도가 쉽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그가 한국인에게 익숙한 인물이 아니어서이다. 오히려 성리학 전통이 강한 우리나라에서는 한비자를 이단으로 백안시하는 경향도 있다. 그러니 한비자를 다루는 글들은 인기가 없다. 일부 제왕적 지배논리를 세우고 싶은 CEO를 위한 경영전략으로 소개된 것 외에는 말이다.

한데 알고 보면 우리는 누구나 한비자를 알고 있고, 꽤 친숙하다. 중국 문학 안에 수없이 반복 인용되는 한비자를 통해서다. 물론 해당 글에서 출처를 밝히지 않아 그 연원이 한비자인지 모르는 경우가 거의 전부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옛 이야기 속에 한비자는 도처에 숨어 있다. 또 콘텐트로서의 한비자는 우리 시대에도 재생 반복되고 있다. 예를 들어볼까.

[삼국지]에서 조조가 “신하는 손과 같다”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손은 얼굴도 씻지만 발도 닦고 뒤도 닦는다. 또 추위가 닥치면 얼굴을 가리고 적이 공격하면 손으로 막는다는 대목이 바로 한비자에서 나오는 내용이다. 조조가 유비와 청매실을 안주삼아 한잔하며 용을 그리는 대목도 그 출처를 따지고 들어가 보면 한비자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나라에서 일상적으로 쓰이는 ‘역린’의 출처도 한비자이다.

나는 중국 드라마 고장극(장편의 고전 사극)을 꽤 자주 보는 편이다. 보다 보면 대사 중 가장 많이 섞여 있는 말들은 공자가 아니라 한비자·노자·장자라는 걸 알게 된다. 그중 한비자는 궁중 정치를 둘러싼 각종 논쟁이 벌어질 때 활용되는 논리로는 으뜸이다. 내가 중국드라마를 보게 된 것도 이런 고전 속의 말과 논리를 드라마마다 반복적으로 써먹는 것에 친숙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서였다. 그리고 중국 드라마 주인공 중 강직하고 정의로운 사람의 대사와 논리는 거의 한비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예를 들어 [랑야방]이라는 중국 드라마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정왕은 대표적인 한비자의 법가적 인물로 그려진다. 중국인들은 이런 드라마를 통해서도 늘 한비자를 학습한다.

나는 우리나라엔 잘 알려지지도 않았고, 인기도 없는 한비자를 꾸준히도 우리 시대로 소환하는 일을 한다. 소설도 쓰고, 제왕학 입문서도 쓰고, 칼럼에도 인용하면서 말이다. 조만간 또 다른 한비자 책을 낼 수도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다. 그의 통찰력이 가진 ‘현재성’ 혹은 ‘통시대성’ 때문이다. 기원전에 살았던 사람을 놓고 이게 무슨 말이냐 싶겠지만, 내가 보는 현재성이란 그 콘텐트 자체에 담긴 내용이 아니라 통찰력이다. 그러나 그의 통찰력에 이르기까지는 넘어야 할 관문들이 많다. 여기에서 나는 그 관문들을 하나씩 넘어가 보겠다. 그러고 나서 내가 이 시기, 우리 시대에 한비자를 소환하려는 이유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관문 1 | 냉혹한 법가 한비자


▎한비자는 나라의 주인인 제왕의 정치기술을 다룬다. 이런 점에서 국민주권시대 나라의 주인인 국민을 위한 정치기술로도 소환해 쓸 내용이 많다.
[한비자]는 표면적으로 쓰인 내용만 쫓아보면 현대 사회와는 너무나도 부조화하다. ‘세상에 군주보다 더 귀한 건 없다’거나 ‘서자들이 나대도록 놔두면 안 된다’거나 하는 말들은 지금 시대로 보면 아주 시대착오적인 ‘봉건 꼰대’ 같은 말로 들린다. 그리고 실제로 [한비자] 안에는 이런 종류의 내용이 너무나 많다.

심지어 선비란 왕의 부름에 냉큼 달려와 신하가 되는 사람 만이 가치가 있다고 역설한다. 자기 세계를 누리며 유유자적하느라 신하 되기를 거부하는 선비는 죽이는 게 답이라는 섬뜩한 결론도 내린다. 다스려지지 않는 백성과 선비는 거둘 필요가 없다는 논리도 편다. 인간을 도구화하는 냉혹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인권·자유·평등 같은 개념은 없다.

실제로 이런 얘기들은 현대인들에게 거부감을 일으키게 한다. 또 이런 부분을 지적해 한비자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론 [한비자] 안에 있는 이런 못된 지식만 집어내 ‘갑질’에 활용하려는 시도 역시 도처에서 일어난다. 이것이 한비자를 원전 그대로 현대에 소환하기 어려운 이유다. 내가 원전대로 번역해 놓고도 발표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비자]는 주의 깊게 읽어야 한다. 철저한 고전 읽기의 눈을 가지지 않으면 [한비자]에선 얻을 게 별로 없거나 잘못된 길을 잡을 수 있다. 고전 읽기의 눈이란 그 글이 쓰인 시대 배경과 역사성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한비자의 시대는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였다. 이미 수없이 난립했던 제후들은 7개의 제후국으로 편입되고,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천자(天子)의 주(周)왕실도 이미 문을 닫은 후였다. 당시의 국제질서는 합종과 연횡이라는 두 축의 모략으로 부딪치고 있었고, 합종이 성공하면 초(楚)나라가 패자가 되고 연횡이 성공하면 진(秦)나라가 패자가 될 거라는 전망이 득세했던 시대다. 단순한 힘겨루기나 땅 넓히기가 아니라 중원의 패권 쟁탈전으로 방향을 잡아 나가던 시기였다. 문명적으로는 노예제 사회에서 봉건제로 진화하면서 각 제후국마다 전제권력을 강화하는 한 편에선 여전히 노예제를 기반으로 한 지방 대부들이 제후들과 힘겨루기를 하던 혼란한 시절이었다. [한비자]에 등장하는 여러 구체적 상황은 이런 시대적 산물이다. 이렇게 그 시대에서 연원한 사고방식과 습관, 행동양식 등 특별한 사정을 걷어내고 읽지 않으면 고전에선 얻을 게 없다.

중국의 역사해설가 리중톈은 “전국시대 말기를 가장 정확하게 진단한 것은 묵자였고, 유일하게 처방을 내린 것은 한비자였다”고 했다.

묵자의 진단이란 어떤 미사여구를 들이대더라도 결국 인간은 이익을 위해 살고 죽으며 이익만을 추구하고, 모든 다툼은 결국 이익 때문에 일어난다는 통찰이다. 묵자는 현실을 직시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 해법은 ‘사랑’이라는 이상론이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익을 나누어야 세상의 혼란을 잠재울 수 있다는 ‘겸상애교상리’(兼相愛交相利)의 해법이다.

이 때문에 묵자의 해법은 마치 1000년에 한 번 아무도 모르게 피었다 진다는 우담바라와 같다는 비판을 듣는다. 인간이 이익을 나눌 수 있는 존재였다면 애당초 그처럼 피가 강을 이루는 참혹한 전쟁을 반복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묵자는 간과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비자는 현실적이었다. 한비자는 실제로 진단에는 별 관심이 없다. 해결책에 몰두한다. 그는 옛 춘추시대 제나라 승상 관중의 입을 빌어 “강도 물과 육지를 가르는 강변과 같은 경계가 있지만 인간의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은 끝이 없으니 그런 강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로 인간에게 이익은 나눌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설파한다.

실제로 인간은 이익을 나눌 만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존재가 아니다. 서로 사랑해 결혼을 약속하고도 혼수 때문에 결혼이 깨지고 원수가 되는 일도 흔하다. 부모자식 간에도 재산 문제로 송사를 벌이고, 형제 간에도 재산 때문에 원수가 되는 일은 흔히 볼 수 있는 인간의 과정이기도 하다. 이익을 결코 포기하지도 양보하지도 않는 인간. 인간의 실존이 허접하고 참혹한 것은 그래서다.

한비자는 이익 때문에 흩어지고 뭉치는 인간의 본성 그 자체를 ‘디폴트 값’으로 설정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서로 사랑하라거나 도리를 지키라고 훈계하지 않는다. 이런 인간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통제해야 한다는 대안을 내놓는 것이다.

이 혼란을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은 인간의 감정이나 사람의 개인기가 아닌 ‘법술’로 다스리는 것. 즉 법치를 확립하는 것이고, 법치 확립의 주체는 오직 군주였다. 그래서 그에게 군주보다 더 중요한 건 없었다.

관문 2 | 언론인 한비자


▎중국 호남성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청나라 시절 [한비자] 인쇄본. / 사진:위키피디아
나는 [21세기 군주론]에서 한비자의 글은 언론의 글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실제로 중국의 고대 사상은 철학이라고 볼 수 없다. 특정 사상을 논하면서 인과를 증명하거나 깊이 파고드는 등의 철학적 사고는 없다. 대개는 훈계이거나 현실적 기술서이다.

또 선진시대의 중국 고대 사상가들 중에서 자기 글로 생각을 남긴 사람은 많지 않다. 대략 성경처럼 제자들이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며 후술하는 형태다. 자기 글을 가진 사람은 순자와 한비자가 대표적이다. 둘은 사제지간이다. 순자가 자기 글을 써서 세상에 알렸다는 점은 당시에도 특이하게 보였던 것 같다. 여불위가 편찬한 [여씨춘추]에도 순자의 저술활동이 기록돼 있을 정도니 말이다. 어쨌든 순자의 제자들은 자기 글을 남긴다. 한비자는 말할 것도 없고, 한비자에게 독배를 보내 자살을 유도한 이사의 글도 몇 편이 남아 있다.

순자와 한비자의 글 쓰는 스타일은 좀 다르다. 순자는 자신의 숙고와 성찰의 결과를 주로 썼다면, 한비자는 자신의 주장, 즉 법이 통하는 사회를 관철하기 위해 촘촘하게 취재해 다양한 예시들을 덧붙이며 주장을 뒷받침하는 방식으로 써내려 간다. 순자는 선생님의 글이라면 한비자는 전형적인 언론인의 칼럼 글이다.

그의 글은 상주문·편지·설화모음집·아포리즘·논평 등 다양한 형태가 섞여 있다. [한비자]라는 책을 엮은 형식을 보면 훗날 한비자의 글을 한 점이라도 더 그러모으느라 그야말로 연습장까지 다 뒤진 흔적이 보인다.

[한비자]에서 재미있는 부분 중 하나가 내저설과 외저설이다. 이 부분은 춘추전국시대의 다양한 에피소드를 모아놓은 사례 모음집이다. 일종의 취재노트다. 형식으로 보면 언론 글 중 전형적인 스케치 기사다.

이 글들이 재미있는 것은 경과 전으로 나눠놓은 것이다. 경은 ‘글의 설계’이다. ‘내가 이런 글을 쓸 때는 이런 사례들을 넣어야지’ 하면서 자기가 기억할 수 있는 제목과 간단한 키워드만 기록해놓은 수첩 같은 것이다. 이건 나도 그렇고, 아마 다른 칼럼을 쓰는 사람들이 평소에 칼럼을 쓰기 위해 자료를 모을 때 하는 작업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리고 전은 경에서 분류해놓은 스케치들의 에피소드 전체를 기록해놓은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기록된 에피소드들은 그의 글 여기저기에서 인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세상에 흩어진 이야기를 자신이 주장하고자 하는 논지에 맞춰 선택하고, 의미를 뽑아내는 일을 쉬지 않았다. 그는 정말 부지런히 일하는 언론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저작 [한비자]는 한비 공자의 칼럼 모음집 겸 그의 자료집인 셈이다.

이 말은 곧 [한비자]는 신문 칼럼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글이라는 말이다. 원래 고전을 읽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어떤 책은 해설서를 먼저 읽고 원전으로 들어가는 게 수월한 게 있고, 어떤 경우는 원전과 해설서를 함께 봐야 하고, 어떤 경우는 해설서보다 원전만 보는 게 나은 경우도 있다.

한비자는 마지막 경우다. 해설서 100권을 읽는 게 원전 한 번 읽느니만 못하다. 원전 자체가 논리는 직설적이고, 분명하고, 정연한 데다 문장은 간결하고 촌철살인하면서 유머러스하기도 하다. 20년 정도 ‘한비자’와 관련된 것이라면 이 책 저 책 많이 사모아 봤는데도 원전보다 잘 쓴 해설서는 아직 보지 못했다.

사마천 [사기]에는 한비자를 한나라 공자(公子)라고 표현한다. 한나라는 제후국으로 왕실이 아닌 공실(公室)이었으므로, 공자란 곧 그 나라 왕자라는 말이다. 그의 거칠 것 없는 신분은 그의 글을 옛 중국의 고전 중에서도 상당히 독창적인 경지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관문 3 | 반골의 공자 한비자


▎중국 대표적인 정치 모략 드라마 [랑야방]에선 ‘법가’의 논리를 풍부하게 다룬다.
한비자의 글은 선진(先秦) 시대의 책사나 왕에게 유세하러 다니던 정치 사상가들의 글과는 다르다. 그런 이들의 글에 깨알같이 박혀있는 미사여구와 은유, 가설이나 자신을 포장하는 홍보성 발언이 없다는 것이다.

그의 글은 상상이나 가설이 아니라 팩트(fact)에 근거해 자기주장을 강하게 피력한다. 그가 독창적 사상가라기보다 법가를 종합하여 집대성한 사상가로 자리매김한 것도 세상의 팩트와 사상을 휘뚜루 녹여내는 그의 칼럼 방식 글쓰기 덕분일 것이다. 그는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수많은 인용을 하고, 사례를 나열하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

상앙·신도·신불해 같은 이전 세대의 법가 논리를 다 따와서 지금은 저작이 남지 않은 그들의 사상을 보존하고, 공자·묵자·양주 등을 다 인용하는가 하면 자기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와 다를 경우엔 속된 말로 까기도 한다.

그의 글들 중엔 ‘신왈(臣曰)’처럼 자신을 신하(臣)로 지칭하는 글들이 여러 편 있는데, 이는 왕에게 올리는 상주문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글들조차도 미사여구가 없고, 세도가들의 행태부터 왕의 잘못까지도 직설법으로 하나하나 지적하고, 아픈 데에 소금을 뿌린다. 그는 그 시대의 진보적 지식인으로 공자(公子)라는 자신의 신분에 안주하지 않는 ‘반골’의 기질을 보여준다.

물론 그가 한나라 공실의 공자 출신이어서 눈치 보지 않고 소신껏 말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사실 왕이라도 사람한테 이렇게 대놓고 직설화법으로 지적하지는 않는다. 이런 점에서 참 특이하다. 어쨌든 그는 에두르거나 포장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 비수로 찌르듯이 원 포인트 타격을 하는 문장의 결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언제나 진실을 외치지만 실은 가장 두려워하고 기피하는 것도 진실이다. 진실은 늘 아름답지 않다. 그래서 보통의 문장가들은 포장하려고 든다. 그런데 인류엔 포장되지 않은 진실을 드러내 날것으로써의 현실을 보여주는 작가들이 있다.

[벌거벗은 임금님]에 등장하는 어린아이 같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본 것을 말하는 사람들. 대부분의 사람은 벌거벗은 임금님의 나라 백성들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세상에서 강요받은 것을 진실이라고 외치며 보이지 않는 옷에 감탄하는 사례가 흔하다. 글 쓰는 사람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포장하고 분식하느라 바쁜 글의 세계에서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대놓고 지적하는 어린아이 같은 존재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한비자는 그런 글을 가진 사람이었다.

실제로 이런 문장을 타고난 사람은 통쾌한 글을 쓸 수 있지만 세간의 입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지는 못한다. 진나라에 가서 요가를 대놓고 비난하다 자살로 포장된 독살을 당한 것도 결국은 이런 반골 기질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시대성을 덜어내고라도 [한비자]는 물론 내용이 단순하지 않고, 불편한 대목이 많다. 신하들은 군주가 정을 주면 뒤통수를 치고, 자리를 뺏으려고 눈을 희번덕이는 협잡꾼처럼 그려지고, 온통 왕이 신하를 어떻게 제압해야 하는지를 상세히 묘사한 것을 보면서 ‘갑질하는 재벌 3세’를 보는 것처럼 불편한 점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 구체적 묘사 뒤에 흐르는 그의 통찰력과 인간을 간파하는 생생한 날것으로서의 안목은 그 자체로 감동적이다. 한비자는 왕이 신하의 말에 솔깃해 이리저리 흔들리고, 신하들은 왕을 꼬드겨 자기 잇속을 채우는 현실을 한탄하며, 왕에게 마음을 비우고 신하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한 뒤 조용히 신하들이 성과를 낼 때까지 기다리라고 거듭 강조한다. 한비자의 울분과 주장은 전국7웅 중 가장 약한 나라인 한나라의 공자로 망해가는 나라를 지키려고 애쓴 흔적이다.

관문 4 | 한비자에 대한 오해와 이해


▎[삼국지]에 등장하는 조조의 삽화. 소설 속에 그려지는 조조의 인상적인 대화 중 한비자를 인용하는 내용도 많다.
우리나라에선 한비자가 모략과 처세술 교과서를 쓴 사람인 것처럼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사실 나는 그 이유를 모르겠다. 그의 글을 읽어보면 그가 얼마나 모략과 술수를 싫어하는지 알게 된다. 그는 왕에게 지(智)를 버리라고 반복해서 권한다.

중국 고대 문헌에서 이 지(智)의 의미는 오묘하다. 흔히 지혜로 번역되지만 [한비자]에서는 노자가 “지(智)가 나오자 거짓이 생겼다”고 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풀이될 때가 많다. 지혜는 지혜인데 긍정적 의미가 아닐 경우가 많다. 꾀와 모략 혹은 자기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교묘하게 현실을 비틀어 자신에게 유리하게 상황을 이끌어가는 지략 같은 걸 일컫는 때가 많다. 요즘 말로 ‘잔머리를 굴리는 행위’로 풀이된다. 인간은 머리를 쓸 줄 알아 문명을 이루었지만, 이 머리 쓰는 일을 이기적 본능에 활용하기 때문에 끝없이 거짓을 생산한다는 양면적 현실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백성이 지와 기교를 쓰면 자기 몸에 환란이 올 것이고, 군주가 쓰면 나라가 망할 것”(양권편)이라고 경고한다. 그는 모략을 권한 사람이 아니다.

흔히 공자는 ‘성인’, 노자와 장자는 ‘기인’이라 하고, 한비자는 ‘천재’라고 불린다. 그는 왜 천재로 불릴까.

원래 인간 세상은 두 명 이상만 모이면 정치가 시작된다. 정치의 시작은 결국 이익의 충돌과 더 큰 이익을 위한 도모로 봐야 한다. [한비자]는 인간의 여러 모습 중 ‘정치적 인간’을 통찰하고 있다. 그런데 그 통찰력이 대단하다. 천재가 아니라면 이렇게 정치적 인간 군상들의 작태를 속속들이 파악해내고 분명하게 표현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정치적 인간들이 조정에서 벌이는 온갖 술수를 꿰뚫어보고 있다. 모골이 송연해질 지경이고, 나를 들키는 기분까지 들 정도이다. 그런 어리석은 왕과 사악한 신하들의 수작을 구체적으로 나열하며, 이런 작태에 속아선 안 된다고 강변한다. 그러면서 또 이런 이익을 탐하는 인간의 본질을 ‘법술’로 잘 다스리면 ‘백성의 이익’과 ‘나라의 안녕’을 살리는 길이 있음을 역설한다.

그의 이와 같은 정치적 인간에 대한 통찰은 요즘 조직 생활을 하는 개인이나 리더나 나랏일을 하는 정치인 모두에게 적용된다. [한비자]의 현재성과 통시대성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한비자]는 이런 거시적 이유 말고도 친숙해야 할 미시적 이유도 있다. 내가 아는 한 변호사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한비자]를 처음 읽고 지축이 흔들리는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한비자]에 심취한 사람들은 대략 비슷한 경험을 한다. 내 경우도 같다.

내가 [한비자]를 손에 잡은 건 30대 중반이었다. 그야말로 조직생활에서 부딪히게 되는 이해 못할 인간 군상에 대한 역겨움과 이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대답을 찾는 과정에서 [한비자]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성리학에 찌든 우리 사회가 “[한비자]는 이단이며 권모술수를 가르치는 나쁜 책”이라고 가르쳤으므로 막연히 [한비자]는 음험하다고 생각했다. 음험한 사회를 지나는 길이 아니었으면 이 ‘어두운 책’을 접할 마음을 먹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한비자]를 손에 들었던 순간 내 머릿속에 몰아쳤던 천둥번개를 기억한다. 그리고 가장 큰 성과는 마음에 평화가 왔다는 것이다. [한비자]를 통해 ‘정치적 인간’ ‘조직의 인간’의 모순과 부조리, 수작과 논리를 구체적으로 보게 되면, 어느 순간 마음에 평화가 온다. 또 인간에 대해 기대하는 바가 없어지게 되고, 나에 대한 전략을 세우게 되면 내가 훨씬 발전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얻게 되는 처세술은 허정(虛靜)과 무위(無爲)가 될 것이다. [한비자]를 읽으면 마음을 비우게 되고, 머리가 차가워지고, 인간을 냉정하게 보게 되며, 매사에 크게 분노하지 않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소위 멘탈이 강해진다는 것이다.

21세기에 던지는 메시지


▎미국의 대통령 선거 풍경. / 사진:AFP/연합뉴스
나는 가끔 조직의 인간들이 벌이는 어처구니없는 작태를 대할 때 예수와 한비자를 떠올리면 나에게 벌어지는 매사의 일이 깃털처럼 가벼워지곤 한다. 예수는 그가 구원하러 온 백성들의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아우성 속에 십자가에 못 박혔고, 한비자는 동문수학한 벗에게 독살당했다.

‘하느님의 아들과 이 세상에 다녀간 이 중 가장 뛰어났던 천재도 이런 일을 당했는데, 도대체 뭐가 대수란 말인가.’

그리고 기원전에 쓴 [한비자]에 등장하는 조직 내의 정치적 인간 군상들의 하는 짓은 21세기인 현대에도 어쩌면 이렇게 똑같을까를 생각한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 것이고, 우리가 지금 더 나쁜 세상에 살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 것들을 깨닫게 되면 의외로 세상이 밝아 보인다.

왜 제왕학 교과서인 [한비자]를 나는 현시대로 끌어내려고 하는가. 그것은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관점의 변화에서 시작됐다. 나는 그동안 제왕을 자신이 천하의 주인임을 주장하는 명실상부한 ‘왕’이라고 생각했다. 민주주의 사회에 살면서도 나라의 주인은 민(民)이라는 것은 이론에만 머물러 있었을 뿐 실재하는 자각이 아니었던 것이다. 정치에 있어서 우리의 삼류 정치만 탓했지 이미 수준 높은 국민에 대한 각성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건 아마도 필자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대부분은 우리 정치 현실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거나, 식자들은 비판의 언사 한마디 정도 붙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냥 그 수준을 우리의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나의 일은 아니라며 체념했던 생각들. 우리는 국민의 입장에서 얼마나 나라의 주인이라는 생각과 책임감을 가졌을까.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한국인의 책임감은 훨씬 컸던 것이 사실이긴 하다. 민주화·촛불 등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주인은 ‘저항하는 자’가 아니라 ‘지키는 자’이다. 지키기 위해선 알아야 하고, 알기 위해선 공부해야 한다. 국민주권시대를 살아가는 국민은 그러므로 나라의 주인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나라의 이익을 위해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배우고 익혀야 한다. 나는 그 시작으로 한비자의 ‘제왕학’을 제시한다. 제왕학이란 무엇인가. 여기엔 내 책 [21세기 군주론]에 썼던 내용을 인용한다.

“제왕학은 한마디로 하자면 용인(用人), 즉 왕이 사람을 쓰는 이야기다. 왕이 어떤 사람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사람을 자기 목적에 맞게 움직이도록 하려면 스스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다루는 군주 처세를 위한 실용적 기술서. 왕이 나라의 주인이고, 그 아래로는 신하와 백성밖에 없던 시대에 ‘제왕학’을 제대로 알아야 하는 사람은 왕이었다.

고대 제왕학에서 왕에게 권하는 처세는 ‘무위(無爲)’다. 제대로 일할 신하들을 잘 뽑아서 적재적소에 앉혀놓고, 그들의 일을 감시하고, 잘하면 상을 주고 잘못하면 벌을 주는 일. 그것이 왕의 일이었다.

지금의 국민도 다르지 않다. 나랏일을 할 대통령과 정치인을 뽑고, 그들에게 권력을 위임하고, 하는 일을 감시해 재신임하거나 신임을 거두는 일, 그리고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벌주도록 요구하는 일. 그것이 국민주권시대 국민의 일이다.

고대 동양의 제왕학에 기록된 사례들은 왕이 재상이나 측근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흥망성쇠가 결정됐음을 보여준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 국민은 대통령을 잘 뽑아야 한다. 그리고 정치인들의 행동양식과 속셈을 잘 파악해야 한다.

“자기만 살려고 만백성 돕지 않으면 야비”


▎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투표장에 질서정연하게 줄을 서 투표 순서를 기다리는 유권자들.
현대를 사는 투표권을 가진 한 사람의 국민 입장에서 본다면, 제왕학은 우리가 뽑아야 할 대통령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할 단서를 주고, 또 나랏일을 맡겨야 할 정치인들을 고르는 통찰력과 안목을 줄 수 있다는 말이다.

제왕학은 나라의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것은 오직 군주뿐임을 강조한다. 결국 이 시대의 군주는 둘이다. ‘국민’과 국가통치를 위임받은 ‘대통령’. 어떤 대통령을 뽑느냐에 따라, 대통령이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 흥망성쇠가 갈린다.”

한비자는 붕당의 패거리가 나라를 어떻게 망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붕당, 요즘말로 진영에 휩쓸리지 않고 냉정한 눈으로 사람의 그릇을 평가해 정치지도자를 뽑고, 그에게 위임하고, 그가 일의 성과를 내고 공익을 위해 올바르게 힘을 쓰고 있는지를 잘 살피는 것이 주인이 해야 할 일이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피력한다. 주인은 파당에 휩쓸릴 이유가 없다. 다만 자기 집안에 무엇이 이익이 되는지만 따지면 된다.

한비자는 동문에게 독살당했을 만큼 강렬한 자기주장을 가졌던 사람이다. 당시엔 군주에게 ‘제발 왕답게 행동하라’고 시끄럽도록 주장했다. [한비자]에는 특이한 장이 하나 있다. 42장 문전(問田)편이다. 이 장은 마치 논어나 맹자처럼 한비자와 당계공이 대화하는 것을 옆에서 기록한 것 같은 형태로 편집되어 있다. 왜 그가 그렇게 분투하며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얘기다. 그 얘기로 끝을 맺는다.

당계공이 한비자에게 말했다.

“몸을 온전하게 하려면 예를 지키고 겸손해야 하며, 일을 이루려고 하면 행동을 삼가고 지혜를 감추는 것이라고 저는 들었습니다. 지금 선생은 법술을 앞세우는 제도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는 선생 자신에게 위험하고 몸도 위태롭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위험한 행동을 하는 것은 선생을 위해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한비자가 대답했다.

“천하를 다스리는 권력의 칼자루(權柄)와 백성들을 거느리는 법도란 다루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선생의 가르침을 듣지 않고 제가 이 길을 가야만 하는 이유는 법술을 내세우고 제도를 만드는 것이 백성에게 이득을 주고 대중을 편하게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지럽고 어리석은 군주에게서 화를 당한다 하더라도 모든 백성의 이익을 위해 힘을 써야 하는 것은 어질고 지혜로운 사람(仁智者)이 해야 할 일입니다. 폭군과 암군으로 인한 재난을 두려워하며 죽음을 피하기 위해 자신만 알고 만백성의 이득에 도움 줄 일을 돌보지 않는 것은 탐욕스럽고 야비한 행위입니다. 저는 탐욕스럽고 야비한 행위를 차마 할 수 없으며, 인지자의 행동을 감히 손상시킬 수 없습니다.”

※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 중앙일보 온라인편집국장과 논설위원을 역임했으며, 사회적·경제적 소외와 불평등 문제를 직설화법으로 다루는 칼럼으로 유명하다.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소설가이며, 해박한 중국 역사와 고전 지식을 바탕으로 [여류(余流)삼국지(메디치미디어)][적우(敵友):한비자와 진시황(나남)]등 중국 역사소설을 썼다. 서울대에서 경제교육학 전공으로 교육학박사학위를 받았다.

202012호 (2020.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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