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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재 전문기자의 레전드를 찾아서(22)] 제주 ‘생각하는 정원’ 성범영 원장 

우공(愚公)의 피·땀·꿈으로 일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 

제주서 가장 척박한 저지리 황무지 개척 50년
분재·돌담·오름 어우러진 사색의 명소 만들어


▎양털구름을 머금은 새파란 하늘이 ‘생각하는 정원’의 멋진 배경이 돼 주고 있다. 성범영 원장은 늘 허름한 작업복 차림으로 정원 일에 몰두한다.
한라산이 서쪽으로 바다를 향해 내달리다 잠깐 숨을 고르는 중산간. 녹차밭 공원인 오설록에서 차로 5분 정도 더 가면 제주 특유의 검은색 돌담으로 둘러싸인 ‘생각하는 정원’이 나온다. 도로명 주소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녹차분재로 675. 이곳 지명으로는 제주시 한경면 저지리다.

제주의 상징인 오름을 형상화한 나지막한 언덕 사이로 수천 점의 분재와 나무가 제각각 아름다움과 이야기를 뽐내는 생각하는 정원은 해외 언론과 국제기구로부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올해 7월 세계적인 여행 플랫폼 ‘트립어드바이저(TripAdvisor)’가 수백만 개의 리뷰와 의견을 바탕으로 선정하는 ‘2020년 트래블러스 초이스 어워드’에 ‘생각하는 정원’이 뽑혔다. 9월에는 한국관광공사와 문체부가 선정하는 코리아 유니크 베뉴(KOREA UNIQUE VENUE)에도 이름을 올렸다. ‘유니크 베뉴’는 국제회의 등 마이스(MICE) 행사를 열기에 적합한 지역의 독특한 장소를 말한다. ‘생각하는 정원’ 안에 숨겨져 있는 ‘시크릿 가든’(평소 비공개)에서는 지금까지 33차례 국제 이벤트가 열려 참석자들로부터 극찬을 받은 바 있다. 1995년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의 방문은 ‘생각하는 정원’을 전 세계에 알린 터닝포인트다.

제주 시내 땅 주겠다는 제안에도 저지리에 남아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생각하는 정원’ 전경.
‘생각하는 정원’은 성범영 원장이 50년에 걸쳐 피·땀·눈물·헌신으로 일군 보석이다. 경기도 용인 출신으로 자수성가해 와이셔츠 공장을 운영하던 그는 제주의 매력에 끌려 1968년 저지리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 당시 이곳은 제주도에서도 가장 척박하고 황폐한 곳이었다. 성 원장이 가시덤불 돌짝밭을 개간해 나무를 심고 분재를 들여놓자 마을 주민들은 “저 두루외! 낭이 밥 멕여주나?”라며 손가락질했다. “미친놈, 나무가 밥 먹여주나”는 뜻이었다. 나무와 돌에 미친 성 원장은 가족까지 끌고 내려와 ‘우공이산(愚公移山·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는 중국 고사)’의 외길을 걸었다.

지금 저지리는 서부 중산간 최고의 핫 플레이스다. 오설록~유리의 성~생각하는 정원~저지오름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많은 외국인이 ‘생각하는 정원’에서 분재를 보고 성 원장이 직접 쓴 안내 글을 읽는다. 그리고 마음의 휴식과 평화, 좋은 생각을 얻어 간다.

성 원장은 하루도 빠짐없이 허름한 작업복을 입고 가지치기나 돌담 보수 작업을 한다. 우리가 찾아간 날은 하늘이 그렇게 청명할 수 없었다.


▎중국의 지인이 만들어 준 韓國愚公(한국우공) 비석 앞에 선 성 원장.
와이셔츠 사업이 잘돼서 괜찮았는데 어떻게 제주도로 터전을 옮겼는지요?


▎어른 주먹보다 큰 열매를 달고 있는 모과나무.
“공장과 점포 체계가 잡혀가는데 문제는 너무 과로해서 몸이 안 좋아지는 겁니다. 우리집이 서울 종로구 계동에 있었는데 당시만 해도 전부 연탄을 때서 겨울이면 연탄가스 냄새 때문에 숨이 막혀 잠을 잘 수가 없어요. 그런데 제주도 오면 코가 시원해지고 혈색이 좋아지니까 여기에 정을 붙이기 시작한 거죠. 워낙 나무를 좋아하니까 육지에 없는 식생을 보면서 신기하기도 하고. 보름 안 올라가다 한 달 두 달 안 올라가고, 그러다 서울 가게는 처한테 맡기고 아예 눌러앉아 버렸죠.”

‘생각하는 정원’은 어떻게 문을 열게 됐나요?

“전기도 수도도 없는 황무지 돌덤불에서 빗물로 밥을 지어먹으며 개척을 시작했죠. 어느 정도 형태가 만들어지니까 한경면장이 분재 정원을 만들자고 3년을 졸라댔어요. 내가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하니까 도지사까지 모셔왔어요. 비포장 길을 달려온 도지사가 ‘이곳은 제주시에서 너무 멀어서 사람이 어떻게 찾아오겠습니까’ 하셨어요. ‘지사님. 한라산에 사람 못 가는 험한 계곡에도 향기로운 꽃이 피면 벌나비가 와서 꿀 따서 갑니다’ 그랬더니 빙긋이 웃으셔요. 그 뒤에 ‘여기도 좋지만 비포장이고 교통도 나쁘니 제주시에 2~3만 평 땅을 드릴 테니 이왕이면 나가서 하시죠’ 하는 제안이 왔어요. 굉장히 좋은 제안이죠. 땅값도 올라갈 거고 영업도 잘 돼 금방 부자 될 찬스잖아요. 내가 ‘한경면에 관광지 없다고 면장이 3년을 졸라댔는데, 이 마을에 내가 나무를 다 캐서 제주시로 나가버리면 무척 서운할 거우다. 해주려면 여기다 해줍서’ 했죠. 20일 뒤에 한경면장이 뛰어와 ‘여기에 허가가 났다’고 해서 마음의 결정도,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1992년 ‘분재예술원’이란 이름으로 문을 열게 된 겁니다.”

저지리가 어떤 마을인지 궁금했다. 성 원장의 정착 초기부터 같은 편이 돼 준 저지리 이장 출신 김상원 씨를 만났다.“한경면은 바로 위가 곶자왈(제주 특유의 원시림)이라서 내(川)가 없어요. 비가 내려도 곶자왈로 다 스며 들어가 버리니까. 물이 귀하다 보니 제주도에서 사람이 가장 늦게 정착한 지역이랍니다. 집에서 키우는 소에게 하루 한 번 물을 먹이려고 8~10㎞ 떨어진 고산·한림 바닷가까지 갔다 오곤 했지요. 한창 가물 때 경조사가 생기면 돈이나 곡식이 없으니 허벅에 물 한 동이 져서 주는 게 부조였어요.”

성 원장이 말을 받았다. “제주시에서 이곳까지 울퉁불퉁 돌밭 비포장도로를 달려서 오면 승용차 밑바닥이 남아나지 않았어요. 제주도에서 가장 낙후되고 척박한 땅이었다고 보면 됩니다. 너무 가난하니까 돈 3만~4만원이 없어서 아파도 병원에 못 가고 무당 불러다 굿하다가 죽어가는 동네였죠. 내가 들어와서 8년간 전기·수도 없이 살았어요. 비바람이 치면 막을 곳이 없어서 밥을 해 먹지 못할 정도였으니까요.”

지금은 저지리가 한경면에서 가장 잘사는 ‘뉴저지’가 됐다. ‘생각하는 정원’에서 오설록까지 이어지는 도로 쪽 땅값은 한경면에서 가장 비싸다. 김상원 씨는 “원장님이 생각하는 정원을 시작한 게 저지리 근대화의 시발점이었죠. 그 후에 문화예술마을이 생기고 저지리가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서부 중산간의 핫 플레이스가 됐죠.”

저지리 사람들이 힘을 합쳐 숲을 일군 저지오름은 2007년 산림청이 주관한 ‘제8회 아름다운숲 전국대회’ 대상(大賞)을 차지했다. 2012년에는 저지리가 ‘올해의 아름다운 마을’에 선정되기도 했다.

출자금 37만원 신협, 자산 700억원으로 키워


▎‘살아 천년, 죽어 천년’ 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주목.
한경면 신용협동조합 초대 이사장이셨다고 들었습니다.

“내 처가 하도 졸라대서 서울 남대문지하상가에 있던 조그만 가게를 팔아 동네에 교회를 지어줬어요. 거기 부임한 김창주 목사님이 ‘우리 마을이 자립하려면 반드시 신용협동조합이 있어야 한다’면서 나보고 이사장을 맡아 달라고 해요. 난 그런 거 모른다고 했는데도 출자금 37만원을 만들어 설립 총회를 하면서 날 이사장으로 옹립하려는 겁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도망가다가 돌밭에 넘어져서 손가락 하나 부러지고 붙잡혀 들어와 울며 겨자 먹기로 이사장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동네서 총무 한 명을 임명했는데 이분이 돈 37만원을 보자기에 싸 놓고는 ‘겁이 나서 집에 못 가져가겠다’면서 돌담 밑에다 숨겨놓고 가는 겁니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서 근처 땅 가진 아주머니 한 분을 모셔와 ‘1년 뒤에 돈 드릴 테니 땅을 좀 주시오’해서 얻었어요. 한림에 가서 목재와 블록 등 자재를 외상으로 사서는 이사들과 힘을 합쳐 뚝딱뚝딱 사무실을 지었어요. 여직원 한 명을 뽑아 내가 봉급을 줬지요. 이렇게 차츰차츰 안정이 됐죠. 40년이 지난 지금은 자산이 700억원이나 되고 이사장을 서로 하겠다며 치열하게 선거전을 치르고 있어요. 신용협동조합이 이 마을 부자 되는 원동력이 됐습니다. 작년에 ‘한경면민상’을 준다고 해서 ‘훈장 받는 것보다 낫다’면서 받았지요. 하하.”


▎제주 토종 윤노리나무. 가을에 빨간 열매를 맺는다.
돌담 쌓는 일이 정말 힘들었을 것 같은데요.

“가족들이 다 지치고 병들었죠. 나는 손톱 발톱 빠지고 손목 부러지는 건 다친 것도 아니고, 병원에 입원한 것만 12번, 수술만 7번을 했어요. 유럽의 여행 기자들이 와서 ‘한국에 볼 게 없다’고 하는 말 듣고 자존심이 상해 잠을 못 잤습니다. 마음속으로 칼을 갈면서 일본을 앞설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했지요. 분재와 정원은 일본만 앞서면 세계 제패는 문제없다고 본 거죠. 문제는 사람들이 놀랄 정도의 뭔가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런 돌담도 구상했어요. 지금은 돌이 금값이지만 당시에 지천으로 널린 게 저 검은 돌이었잖아요. 여기 조성하는데 15톤 트럭 1만 대 이상의 돌이 들어갔어요. 담을 쌓으려면 지면과 닿는 부분의 너비가 1m 이상 되는데 그 밑으로 판 구덩이에 돌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몰라요. 높은 곳에서 작업하려면 돌은 미리 다듬어놓고 크레인에 올라가서 돌을 하나하나 맞춘 뒤에 시멘트 반죽으로 붙입니다. 그 과정이 얼마나 지루하고 힘든지. 그러니까 한국우공(韓國愚公)이라는 말이 나왔죠. 중국인 세 사람이 ‘이건 만리장성보다 더 위대하다’고 하기에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라고 했더니 ‘만리장성은 국민을 엄청나게 죽여가며 나라가 수십 년 동안 한 거고, 이건 원장 혼자 한 거니까 더 위대하다’고 하더라고요.”

장쩌민 주석 다녀간 뒤 중국인 몰려와


▎1995년 11월 ‘생각하는 정원’을 방문한 장쩌민 주석. / 사진:성범영
1995년 11월 장쩌민 주석이 방문한 과정도 궁금합니다.

“인민일보 총편집장이었던 판징이(范敬宜) 선생 역할이 컸죠. 장쩌민 주석이 판 선생에게 ‘11월 18일 일본에서 APEC 정상회담이 열리니 그 전에 한국 선진지(先進地)를 견학하고 싶다. 답사를 좀 해오라’고 지시를 내립니다. 극비리에 우리 정원에 온 판 선생이 정원을 꼼꼼히 둘러보시더니 ‘원장 선생, 이 정원 만드느라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압니다. 나도 문화혁명 때 농촌 가서 고생 좀 했습니다. 우린 문화혁명으로 30년을 뒤졌습니다. 빨리 따라가야 합니다’라고 말하더니 내 이야기를 A4 용지 너댓장에 새까맣게 받아 적습디다. 20일쯤 뒤 40~50명의 경호팀이 몰려왔어요. 그때 누군가가 ‘장쩌민 주석이 오신다’고 귀띔을 해주더라고요.”

장쩌민 주석은 어떻던가요?

“친근하고 자상하셨죠. 분재를 일일이 관찰했고 설명문도 꼼꼼히 읽은 뒤 궁금한 게 있으면 내게 묻곤 했어요. 난 소나무 분재 앞에서 감히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분재는 나무가 아름다워서만 가꾸는 것은 아닙니다. 분재를 가꾸면서 깨닫는 진리를 통해 나 자신을 개조해가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나무에 심취하게 되면 일이 많아 근면해지고, 오래 가꾸면서 인내와 멀리 내다볼 수 있는 기획력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창의력과 미적 감각을 깨치게 되며, 나무는 거짓이 없어 정직함을 갖게 되고, 또 이웃과는 서로 교류하며 화합하게 되고, 국가 간에는 나무 예술을 통해 평화를 논의하는 중요한 문화예술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으셨지요.”

그 이후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주석님이 접시를 선물로 주시고 휘호를 써 주셨어요. 내가 분재를 답례로 드리니까 ‘이걸 어떻게 키우지요?’ 하셔서 ‘중국에는 잘 키우는 분들이 많아서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고 대답하니 좌중에 웃음이 터졌지요. 주석님이 다녀가시고 5일도 안 돼 중국의 장관·성장·국장·기자 등 고위 인사들이 계속 들이닥치는 겁니다. 많이 오는 날은 300명이 넘었어요. 주석님이 다녀가셔서 오나보다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장쩌민 주석이 ‘일개 농부가 정부 지원 없이 혼자서 세계적인 공원을 일궜는데 그 개척정신을 배우라’고 지시를 했다고 합니다. 그 후 후진타오·시진핑 등 중국 최고 지도자들이 여기를 방문하게 되지요.”

분재는 자식 훈육하는 것과 똑같아


▎중국 9학년 [역사와 사회] 교과서에 실린 ‘생각하는 정원’. / 사진:성범영
성 원장과 판징이 선생 사이에는 [병매관기(病梅館記]에 얽힌 더 깊은 스토리가 있다. 두 사람이 처음 생각하는 정원에서 만난 날, 판 선생은 병매관기 이야기를 했다. 청나라 때 공자진이 쓴 이 글에는 ‘문인과 화가들을 위해 매화의 곧은 것을 찍어내고, 촘촘한 것을 쳐내고, 바로 선 것을 솎아내게 하여, 매화를 일찍 죽게 하고 병들게 하는 것을 일삼는다’는 내용이 있다. 청나라 왕이 인재를 못살게 군 걸 병든 매화에 빗대서 분재도 비판하고 왕정도 비판한 글이다. 이 글 때문에 당시 중국의 분경(분재) 문화가 크게 꺾였고, 판 선생도 그 글로 인해 분재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성 원장은 [병매관기]는 매화의 속성을 오해한 데서 나온 것이라며 이렇게 설명했다. “매화는 꽃이 피고 나면 곧바로 새순이 터지는 성질이 있습니다. 그래서 꽃이 지면 꽃이 피었던 가지를 즉시 짧게 잘라주어야 합니다. 그대로 두면 가지 끝에서 새 가지가 약하게 자라기 때문에 나중에는 꽃도 피지 않습니다. 결국 매화가 아름답고 건강한 나무로 성장하려면 가지를 잘라내는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

판 선생은 생각하는 정원의 생기발랄한 분재들과 성 원장의 철학을 듣고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다. 성 원장이 “그렇다면 돌아가셔서 [신(新) 병매관기]를 한번 써 보시죠”라고 하자 그는 빙긋이 웃기만 했다.

장쩌민 주석 방문 1년 뒤, 성 원장은 베이징에 초청 받은 길에 판징이 인민일보 총편집장을 만났다. 판 선생이 누런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그 속에는 [신병매관기] 칼럼이 실린 인민일보가 들어 있었다.

“주석님 방문하시는 날 쓰시라고 했더니 쓰셨네요.”

“내가 가서 감동을 많이 받았습니다. 주석님께 보고 드리고 기사 썼습니다.”

그제야 수수께끼가 풀렸다. 장쩌민 주석 방문은 판 선생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2010년 11월 17일 판 선생이 타계하기까지, 두 사람은 나무와 분재, 인생과 철학을 나누며 형제처럼 지냈다.

아직도 분재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남아 있죠?

“정원 오픈하면서부터 한국 손님들이 이구동성으로 ‘분재는 잘살고 있는 나무 캐다가 자르고 못살게 괴롭히는 거다’ ‘이게 일본 문화 아니냐’라며 마치 큰 지식을 가진 듯 얘기하는 걸 보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고된 일과를 마치고 곯아떨어졌다 새벽 두세 시에 눈이 떠지면 그 고민으로 인해 책을 찾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했죠. 한 6개월 뒤에 교수 30명이 왔는데 그중 한 명이 ‘저 사람 나쁜 사람이야. 잘 자라고 있는 나무 막 캐다가 잘라서 괴롭히고 말이야. 이거 뭐 좋은 거라고 보러 왔어?’ 라면서 목청을 높이는 겁니다. 내가 그분 곁에 가서 ‘교수님 뭘 전공하셨습니까’ 물었더니 그걸 왜 묻느냐고 그래요. ‘교수님이 전공하는 걸 문외한인 제가 이러고저러고 비판하면 어떻게 들으시겠습니까. 교수님이 나무에 대해서 뭘 알고 분재에 대해서 얼마나 아신다고 말씀을 함부로 하십니까’ 그랬더니 일행이 다들 ‘옳소’ 하면서 박수를 치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그 사람은 혼자 도망가 버렸고, 나머지 29명을 다 안내한 뒤에 식당에서 차 한잔 대접하면서 설명했죠. ‘분재가 나무를 괴롭히는 거라면 저 나무들은 일찍 죽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다른 나무들보다 훨씬 더 오래 살고 기품 있는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죠. 분재는 아이들을 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좀 힘들어도 자녀를 훈육해서 곧고 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해 주는 것 아닙니까.’ 그러자 그분들이 ‘잘 알겠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홍보해 드리겠습니다’ 하더라고요. 나무는 생긴 모양·성격·목적이 다 다릅니다. 그렇지만 나무는 계절에 맞춰서 일을 착착 진행합니다. 약속을 철저히 지키죠. 거기서 깨달은 진리와 철학을 통해서 인간의 교만과 잘못을 스스로 수정하라고 글을 써서 붙여놓는 겁니다. 그걸 보고서 생각은 스스로 해야지 어떻게 느껴라 깨달아라 할 수 있는 게 아니죠.”

경매로 넘어간 정원, 7년 뒤 은행 도움으로 되찾아


▎IMF 사태 때 정원을 뺏기고도 눈보라 속에서 돌담 쌓는 작업을 했다. / 사진:성범영
1998년 IMF 사태 때는 정원을 7년간 뺏겼다면서요?

“은행에 경매로 넘어갔죠. 낙찰받은 주인에게 ‘아무 조건 없이 여기서 잠자고 일할 수 있게만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새벽 동틀 때부터 해가 져서 깜깜해질 때까지 돌 다듬고 나무 만지는 일만 했어요. 관광객 안내하는 가이드나 운전기사가 ‘저 사람이 주인이었는데 경매에 넘어가서 아마 봉급 받고 일하는 거 같네요’라고 얘기하는 소리가 들려도 모자 푹 눌러쓰고 들은 척도 안 했어요. 그렇지만 내 가족은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어요. 7년 뒤에 어느 은행의 대리가 찾아와 몇 번을 둘러보고 간 뒤에 ‘아드님을 보내 주세요. 이 정원을 되찾아 드리고 싶습니다’ 하더라고요. 결국 은행 대출을 통해 정원을 다시 찾게 됐죠. 그 사이에 일을 엄청나게 하고 정원 규모를 크게 늘렸죠.”

‘생각하는 정원’은 장기적으로 어떤 방향으로 발전하게 될까요?

“중국에서 받은 그림과 서예 작품 800여 점을 포함해 전 세계에서 받은 선물이 2000점을 넘습니다. 이들을 전시할 미술관을 지을 계획입니다. 식당 건물은 지은 지 30년이 지났고 우리 정원의 콘셉트에도 맞지 않아 돌집으로 리모델링할 생각입니다. 정문 옆 담을 헐고 건물을 지어 아래층은 역사관과 매표소, 2층은 세미나실과 강의실로 꾸미려고 합니다. 단순히 관광하는 곳이 아닌 나무와 분재를 통해 인생과 철학을 배우고 가르치는 교육문화정원으로 만들 겁니다. 이 정원 하나만으로도 지구촌 사람들 다 끌어들여 한국 관광의 격을 높이고 수입도 올리게 할 자신이 있습니다. 이 정원은 전 세계에서 누구도 흉내 내거나 따라올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죠.”

보통사람은 상상도 못 할 고난과 풍파를 딛고 생각하는 정원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원동력은 무엇인지 물었다. 성 원장은 ‘신앙의 힘’을 이야기했다. “하나님이죠.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무릎 꿇고 울면서 기도했어요. 누구한테도 호소할 데가 없었으니까요. 정원이 경매로 넘어갔을 때 중국 부호 두 사람이 와서 ‘돈·집·땅 원하는 대로 줄 테니까 중국으로 갑시다’고 제안했어요. 많이 흔들렸지만 기도하면서 결론을 얻었죠. ‘내 나라 빛내려고 지금까지 해왔는데 이 나라 버리고 간들 환영을 받을까. 언젠가 버림받을 수도 있다. 힘들지만 견뎌내자’라고요. 그 고통의 시기를 견딘 열매가 지금의 ‘생각하는 정원’입니다.”

키 1m 남짓한 모과나무 분재에 어른 주먹보다 큰 모과 열매가 서너 개씩 달려 있다. 모과나무 줄기는 울퉁불퉁 험상궂기 그지없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노랑 모과 빛깔이 더욱 선연했다. 성경에 ‘열매를 봐서 그 나무를 안다’는 구절이 있다.

※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 중앙SUNDAY에 ‘스포츠 오디세이’ ‘스포츠다큐-죽은 철인의 사회’를 연재하고 있다. 중앙일보 스포츠부장을 역임했고, 2013년 이길용체육기자상을 수상했다. 연세대 국문학과,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에서 공부했고 한국체대에서 스포츠산업경영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희대와 한양대 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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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호 (2020.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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