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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대 HK+ 한자문명연구사업단 공동기획 - ‘한자어 진검승부’ | 새 연재] 시계(時計): 인류를 진정한 승자로 만든 도구(1) 

인간 활동에 통일된 표준 제공… 정교한 최고 문명 낳아 

해시계·물시계·소리시계 등 자연환경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발전
단순한 시간·건강 관리 넘어 인간 관리 단계로 진화 중

‘경성대학교 한국한자연구소 인문한국플러스(HK+) 한자문명연구사업단’과 월간중앙은 한자어를 주제로 한자문화권 여러 언어 내에서 해당 어휘가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한자어에 담긴 문화적 의미를 밝히고 동아시아 문명 및 인류 공통의 사상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아보려 한다. 이 연재에는 하영삼 경성대 한국한자연구소 HK+ 한자문명연구사업단 단장과 연구소 내 양영매·연규동 교수, 신웅철·이지영·전국조·조정아 연구교수 등이 필진으로 참여한다.[편집자 주]


▎인류는 시간을 세밀하게 재고 나누는 일을 해왔다. 덕분에 상대적인 시간에서 표준적인 시간으로 발전하게 됐다. ‘대한민국 청년비엔날레 2004’에 전시됐던 이상아 작 ‘당신의 인생은 몇 시입니까?’.
1. 호모 템푸스(Homo tempus), 시간을 사는 인간

또 한 해가 저문다. 지나온 해를 되돌아보고, 다가올 새해를 계획한다. 이맘쯤이면 항상 하는 일이다. 언제나 그렇듯 시간은 빨리 갔고, 계획대로 되지도 않았다. 다가올 한 해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무엇에 홀린 마냥, 습관적으로 새로운 한 해를 설계(設計)하고 계획(計劃)한다. 인류의 삶과 가장 가까이서 언제나 연결돼 있음에도 여전히 설명하기 어려운 시간(時間), 시간은 우리에게 무엇일까? 인간은 언제부터 시간을 인식하고 규격화하고 관리해 왔을까? 인간이 정말 시간을 지배해온 것일까? 아니면 인간이 시간에 지배돼온 것일까? 어느 쪽이든 시간을 벗어나 시간과 분리돼 살 수 없는 인간, 그 존재를 ‘호모 템푸스’(Homo tempus)라 부를 수 있을까? 시간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다시 묻는다.

2. 인류의 지혜, 시간의 측정과 관리

인류는 시간의 주기를 어떻게 인식하고, 어떤 단위로 헤아리고, 어떻게 세분했을까? 인류가 지혜로운 존재(호모사피엔스)로서 만물의 영장이 된 것은 다른 동물이 갖지 못한 엄청난 도구의 발명과 활용에 힘입은 바가 크다. 특히 말과 문자는 다른 종족을 소통하고 연결해 협력함으로써 무한한 힘을 만들게 했고, 시공적 한계를 넘어 인류의 지식과 지혜를 축적하고 전수해 진정한 문명을 일구게 했다. 나아가 시계는 인간의 활동에 통일된 표준을 제공해 정교한 최고의 문명을 만들었다. 시계에 의해 계량화되고 표준화된 시간, 시간은 글자 그대로 “어떤 시각에서 어떤 시각까지의 사이”를 말한다. 어원적으로 시(時)는 ‘해가 가다’는 뜻을 담았다. 원래는 일(日)과 지(之)로 구성돼 ‘태양(日)의 운행(之)’이라는 의미로부터 ‘시간’이라는 개념을 그려냈는데, 이후 지(之)가 사(寺)로 변해 지금처럼 됐다. 또 각(刻)은 태양이 운행하는 간격(亥)을 눈금으로 새겨놓다(刀)는 의미를 담았다.

3. 시간을 나타내는 방식, 카이로스(Kairo)적 인식


▎갑골문에 나타난 간지표. 10개의 천간과 12개의 지지를 조합한 60개의 단위(甲子~癸亥)로 날짜와 순서를 표시했다. / 사진:경성대 한국한자연구소 인문한국플러스(HK+) 한자문명연구사업단
약 3300년 전의 갑골문을 보면 시간에 대한 기록이 이미 상당히 구체적이다. 연(年)·월(月)·일(日)·계절·하루의 시간대, 추상적 시간의 등장은 물론 60갑자도 시간 단위로 쓰였다. 당시 사람들은 해가 떠서 다시 뜨기까지의 시간을 하루로 인식했고, 그래서 이를 일(日)로 표현했다. 마찬가지로,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주기를 한 달로 보았고, 이를 월(月)로 표현했다. 또 하늘을 상징하는 10개의 천간과 땅을 뜻하는 12개의 지지, 이들을 조합한 60갑자(甲子)로 날짜를 표시했다. 일주일은 10일이었는데, 이것을 순(旬)이라 했다. 순(旬)은 ‘태양의 순환’을 표상하는 글자다. 순(旬)이 3번 모이면 한 달이 되고, 12번 모이면 1년이 됐다. 그들은 1년을 360일로 인식했고, 나머지 자투리를 모아서 6년에 한 번꼴로 윤달을 만들었다. 갑골문에 등장하는 13월은 이러한 윤달을 말하는데, 지금과는 달리 한 해의 끝에다 배치했다. ‘윤달’을 뜻하는 윤(閏)은 왕(王)이 대궐의 문(門) 앞에서 역법을 선포하는 모습인데, 윤달을 포함해 각종 시간적 정보가 포함된 ‘달력’은 절대 권력의 상징이었음을 보여준다.


▎상나라 때의 갑골문. 왼쪽부터 하루를 나타내는 시간대인 단(旦), 중일(中日), 곽혜(郭兮), 혼(昏) 등의 시간 명칭이 보인다. / 사진:경성대 한국한자연구소 인문한국플러스(HK+) 한자문명연구사업단
갑골문이 만들어졌던 화북평원은 사계절의 변화가 분명했지만, ‘계절’을 나누고 표현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 때문인지 당시에는 춘(春)과 추(秋)의 두 계절만 등장한다. 춘(春)은 ‘햇볕을 받아 초목이 돋아나는’ 계절이 ‘봄’임을, 추(秋,)는 곡물의 수확을 위협하는 ‘메뚜기 떼를 불로 태우는’ 모습으로 ‘가을’의 이미지를 그렸다. 그리고 지금처럼 동지점에서부터 다시 동지점으로 회귀하는 주기를 1년으로 인식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갑골문 당시에는 ‘큰 낫으로 걸어가며 곡식을 베는 모습’을 그린 세(歲)와 ‘제사의 주기’를 말하는 사(祀)가 1년을 뜻하는 단어로 쓰였다. 고대사회에서 생존을 담보해줄 곡식의 수확과 자신들을 지켜줄 조상신에 대한 제사가 그 무엇보다 중요했고, 그것들로 1년의 순환 주기를 인식했던 것이다. 연(年)은 ‘사람이 볏단을 지고 가는 모습’으로 당시에 ‘수확’이라는 뜻으로만 쓰였다.


그러면 하루의 시간대는 어떻게 표현했을까? 근대의 24시간 체계가 들어오기 전까지 동양에서는 12지지(子~亥)를 이용해 하루를 나타냈으니, 2시간을 단위로 나눈 셈이다. 그러나 갑골문의 경우, 보통 다음의 시간대가 등장한다. ①‘해가 땅 위로 떠오르는 모습’을 그린 단(旦) ②‘아침식사’ 시간임을 표상한 ‘식일(食日)’[달리 대식(大食)이나 대채(大采)라고도 했다] ③‘해가 하늘 정중앙에 위치하는 시간’이라는 뜻의 중일(中日) ④ ‘해가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비추는’ 모습인 측(昃) ⑤의미는 불명확하지만 측(昃)과 소식(小食) 사이에 놓여 오후 4시 정도로 추정되는 곽혜(郭兮) ⑥‘적게 먹는다’는 뜻의 소식(小食)[달리 혼(昏)이나 소채(小采)라고도 했다] ⑦‘달이 뜬 시간대’를 말해 밤 전체를 지칭한 석(夕) 등이다.

사람이 활동하는 낮은 6단계로 상당히 세분했던 반면, 활동이 불가능한 밤은 석(夕) 하나로 지칭했다. 이러한 시간 명칭들은 대부분 인간의 활동과 연관해 표현됐음을 볼 수 있는데, 태양의 운행에 근거해 시간을 객관화고 균등화하기 전의 모습이다. 게다가 사람의 행위가 개별 한자의 표현에도 직접 관여하고 있다는 특징도 보인다. 이는 당시의 시간 인식이 카이로스(Kairos)적 시간, 즉 인간의 목적의식이 개입된 주관적·정성적 시간이며, 과거-현재-미래로 연속해 흘러가는 객관적·정량적 시간을 뜻하는 크로노스(Kronos)적 시간과는 차이를 보인다.

4. 시간의 획정, 시계의 출발과 크로노스(Kronos)적 시간으로의 발전

인류는 이러한 ‘시간’을 더욱 세밀하고 재고 나누는 일을 해왔다.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시간에서 객관적이고 표준적인 시간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를 통해 인간은 점차 지역적 오차를 줄여가며 모두가 공통의 시간을 갖게 됐고, 개인적·민족적 차이 없이 표준화된 시간을 공유하게 됐다. 또 휴대 가능한 정밀한 기계시계의 발명으로 전 지구적 범위에서 고도의 표준화를 이룰 수가 있었다. 이 때문에 시계를 인류 문명 최고의 발명품이라 하며, 진정한 근대도 바로 이 기계식 시계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그림자 길이 변화에 주목했던 해시계

시계는 언제 어떻게 만들어져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날 우리의 곁으로 왔을까? 또 어디로 갈 것인가? 근대의 기계식 시계가 나오기 전, 대략 다음의 방법들이 있었다.

(1)표(表: 해시계) 태양의 이동에 따라 비추는 그림자의 길이가 달라짐에 주목해 시간을 나누고 측정하는 방식은 매우 일찍부터 이뤄졌으며, 이것이 해시계의 출발점이다. 태양이 움직여 운행하는 것을 시(時)라 한 것에서처럼, ‘태양’의 그림자를 재고 그것으로 시간의 표준을 삼았던 것이다. 처음에는 나무나 막대 등으로 했겠지만, 점차 다양한 푯대가 등장했다. 얼(臬)은 자(自: 鼻의 원래 글자)와 목(木)으로 구성돼 사람 코 높이의 나무 말뚝을 말했으며, 표(表)는 키가 큰 푯대나 기둥을 말한다. 북경의 자금성이나 대만의 고궁박물원처럼 주요 건축물 앞에는 화려한 돌로 만든 기둥 화표(華表)가 지금도 남아 있다. 해시계는 달리 규표(圭表)나 일영(日影)이라고도 하는데, 규(圭)는 두 개의 토(土)로 이뤄져 흙더미와 그것의 그림자를 그렸다. 또 영(影)은 높은 건물(京) 위로 햇빛(日)이 강하게(彡) 비추는 모습으로부터 ‘그림자’라는 의미를 그려냈다.

(2)루(漏: 물시계) 밤이나 흐린 날에는 쓸 수 없는 해시계의 한계를 극복해 등장한 것이 물시계인데, 흘러내리는 물의 일정한 양을 눈금화해 시간을 측정하도록 한 장치다. 물시계를 뜻하는 루(漏,, )는 루(屚: 새다)에 수(水)가 더해진 구조로, 빗물(雨)이 집(尸) 아래로 떨어지듯(屚) 좁은 구멍으로 물을 떨어지게 해 그 분량으로 시간을 계산하는 장치라는 의미를 담았다. 서기 100년에 완성된 [설문해자]에서는 “구리로 된 용기에 물을 받는데 눈금이 새겨져 있고, 하루의 길이를 100개의 눈금으로 구분했다”라고 했다. 하루가 1440분(24시 간 X 60분)이니 1/100은 14.4분, 지금의 쿼트(15분) 정도의 간격으로 하루를 세분했던 셈이다.

(3)종(鐘: 소리시계) 종이나 북은 소리를 통해 시간을 알린다. 옛날, 전쟁에서 북을 쳐 전진과 후퇴를 알렸고 나라에 중요한 일도 종이나 북을 울려 공표했던 것처럼 ‘소리’에 의존한 ‘알림’은 일찍부터 응용됐다. 고대 도시에 남아 있는 종각(鐘閣)이나 고루(鼓樓)가 이의 흔적이다. 서구의 교회 종탑(鐘塔)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런 종이나 북도 처음에는 스스로 시간을 측정하지 못해 다른 시계의 도움을 받아 사람이 치는 불편이 있었다. 그러나 일찍이 수레에 달아 일정한 거리마다 북이 울리도록 고안한 자명고(自鳴鼓)가 등장했듯, 시간을 스스로 측정해 종까지 울릴 수 있는 장치들이 창안됐다. 대표적인 것이 장영실 등에 의해 1434년 만들어진 자격루(自擊漏)인데, 물시계(漏)에 의해 측정된 시간에 따라 ‘스스로 종을 치도록(自擊)’ 고안된 시계였다. 1631년에 한국에 처음 들어왔다고 알려진 자명종(自鳴鐘)도 어린 시절 많은 영감을 줬던 뻐꾸기시계도 이의 발전형이다.

5. 기계시계, 과학의 시작이자 근대의 출발


▎1901년 발굴된 ‘안티키테라 메커니즘 (antikythera mechanism)’의 부품들과 이를 토대로 복원한 모습.
“기계시계 발명의 어려움은 방보다 작은 바퀴가 지구와 같은 속도로, 그것도 거의 계속적으로 회전하는 방법을 생각해내는 일이었다. 이것이 성공하면 바퀴는 지구의 축소판이 돼 시간을 알릴 수 있다. 결국 시간이란 지금 지구가 얼마나 회전했나 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조지프니덤 [중국의 과학과 문명] ‘기계시계’)

모든 경쟁자 물리치고 살아남은 ‘시계’

이 어려운 기계를 만들고자 인류는 부단히 노력했다. 1901년 그리스 앞바다에서 발굴된 안티키테라 메커니즘(Antikythera Mechanism)은 기원전 2세기쯤 만들어진 고대 그리스의 천문관측 시계인데, 4년마다 윤년을 계산해 넣는 ‘365일 달력’ 역할과 일식과 월식의 순환주기(사로스 주기)에 따라 일식과 월식까지 예측하도록 고안됐다. 중국도 적어도 8세기에는 이러한 획기적인 기계를 발명했으며, 북송의 소송(蘇頌) 등은 1092년 ‘수운의상대(水運義象臺)’라는 탈진기를 단 기계식 시계를 만들었는데, 세계에서 가장 이른 기계시계로 알려져 있다. 유럽 최초의 기계시계는 1335년 밀라노에서 만들어졌다고 하며, 16세기 말 갈릴레오는 흔들리는 샹들리에를 보면서 진폭(振幅)이 진동(振動)의 주기와 관계없이 일정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657년 네덜란드의 하위헌스(C. Huygens)가 이를 응용해 최초의 진자(振子)시계를 만들었다. 이것이 시계의 혁명이자 진정한 근대 기계식 시계의 시작이었다. 이제는 기계시계·전자시계·원자시계를 거쳐 훨씬 복잡한 개념의 스마트 시계로 진화하고 있다. 구축된 데이터를 통해 특화된 개인의 생체와 업무 정보는 물론 각종 스몰 데이터를 반영해 건강 관리는 물론 최적화된 효율적 시간 관리가 가능해지고 있다. 이제 단순한 시간 관리를 넘어서 인간 관리가 가능한 시계로 가고 있는 것이다.

6. 동아시아 제어의 시계: 같음, 다름, 그리고 다시 같음으로


▎경기도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릉(영릉)에 있는 자격루. 세종16년(1434)에 장영실이 제작했다. / 사진:이영관
근대 서양의 기계식 시계가 동양으로 전해지면서 시계는 다양한 이름으로 표현됐다. 우리나라에서는 1631년 명나라 사신으로 갔던 정두원이 기계식 시계인 ‘자명종(自鳴鐘)’을 가져 왔다고 한다. 이후 19세기 말에 이르면 시계의 급격한 보급으로 다양한 명칭이 등장한다. 예컨대 ‘시간을 알려주는 종’이라는 뜻의 시종(時鐘), ‘일정한 시각에 이르면 스스로 울리는 종’이라는 뜻의 자명종(自鳴鐘), ‘침이 달린 시계’라는 뜻의 시침(時針)이나 ‘시간을 나타내는 푯대’라는 뜻의 시표(時表), ‘시표(時摽)’ ‘시표(時鏢)’ ‘시간을 계산해주는 기계’라는 뜻의 시계(時計)나 시계(時械), ‘호패(戶牌)처럼 지니고 다닐 수 있는 시계’라는 뜻의 시패(時牌) 등이 그것이다.

이런 모든 명칭을 물리친 표준 명칭이 시계(時計)다. 1895년 [국민소학교본] 등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쓰였는데, 일본어 시계(時計)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에서는 1551년 선교사 사비에르가 오우치의 다이묘에게 자명종을 선물한 것이 서구식 기계시계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은 이를 적극 수용해 일본에 맞는 화시계(和時計: 와도케이)를 만들어 시계의 강국은 물론 동양 최고의 근대국가가 됐다. 일본어에는 자명종 이외에도 두계(斗鷄, 도케이), 두경(斗景, 도케이), 두계(斗計, 도케이), 도계(度計, 도케이), 진기(辰器, 신키), 시두(時斗, 지토), 시진의(時辰儀, 지신기), 시진표(時辰表, 지신효), 시진표(時辰鏢, 지신효), 시진(時辰標, 지신효), 시진기(時辰器, 지신키), 시진반(時辰盤, 지신반), 시진종(時辰鐘, 지신쇼), 시진기(時針器, 지신키), 시기(時器, 지키), 진기(辰器, 신키), 누각(漏刻, 로코쿠) 등의 다양한 표기법이 나타나고 있다(송민, 2000).

또 자명경(自鳴磬, 지메이케이)이나 두영(斗影, 도케이), 도경(圖景, 도케이) 등의 표기도 있었다. 이들 어휘를 보면 대부분 ‘시계(時計)’와 독음이 같은 ‘도케이’로 읽히는데, 두(斗)·도(度)·도(圖) 등은 ‘도’, 계(鷄)는 ‘케이’의 음역이고, 나머지 경(景)·계(計)·시(時)·진(時辰)·누각(漏刻) 등은 시계와 관련된 의미를, 경(磬)은 경쇠로 종(鐘)과 같은 의미를 나타냈다. 이후 일본에서는 시계(時計)가 이들을 대표하는 단어로 정착됐고, 이것이 한국으로 들어와 영향을 미쳤다. 일본어 독음인 ‘도케이’는 중국에서 해시계를 뜻하는 토규(土圭)에서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메이지 시대에는 지키(時器)나 지신기(時辰儀), 지신효(時辰表) 등에 대해서도 특별히 ‘도케이’로 읽도록 주기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시계 지칭 한자어에서 문화적 배경도 읽혀

시계가 없는 생활을 상상도 할 수 없는 현대, 17세기 이후 등장한 탈진기를 장착한 현대식 시계를 한자문화권 국가에서는 각기 다른 한자어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시계(時計), 중국에서는 표(表, biăo)나 종(鍾, zhōng), 혹은 이 둘을 합친 종표(鍾表, zhōngbiăo)로, 일본에서는 시계(時計, とけい)를, 베트남에서는 동호(銅壺, đõng hõ)를 쓴다. 이는 같은 한자문화권이지만, 각국의 전통과 문화적 배경 등에 따라 비슷하면서도 다른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고대부터 사용하던 해시계 전통의 표(表)와 시간을 알려주던 종(鐘)을 유지한 상태에서 현대적 의미를 추가했다. 이에 비해 일본은 서구 근대의 적극적 수용과 함께 중국 한자의 틀을 벗어나고자 새로운 한자 어휘인 시계(時計)를 탄생시켰다. 다만 그 과정에서 전통적인 측면을 고려해 기존의 ‘とけい’라는 음에 한자만 바꿨으며, 일본어의 문법 구조에 맞게 ‘목적어+동사’ 구조로 됐다.

만약 시계(時計)라는 단어가 중국에서 만들어졌더라면, 그들의 문법에 맞게 ‘동사+목적어’ 형식의 ‘계시(計時)’가 됐을 것이다. 이는 우리말이나 일본어에 남은 등산(登山, とざん)이나 하산(下山, げざん)과 차이를 보인다. 이들은 ‘동사+목적어’ 구조로 돼 중국어의 어순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한자 어휘가 아닌 실제 언어생활에서는 모두 ‘산(山)을 오르다(登)’나 ‘산(山)을 내려오다(下)’는 구조로 돼 목적어가 동사 앞에 놓여 한·일의 언어 구조에 최적화했다. 또 자명종(自鳴鐘, じめいしょう)에서처럼 ‘스스로 우는 종’이라는 개념에서 ‘잠을 깨우는 시계’라는 의미를 변화시켰다. 이러한 어휘 생성 방법은 한자의 단순한 교체가 아닌 사고방식의 새로운 전환을 반영했다.

이에 비해 베트남은 현재 한자 대신 로마자 표기법을 사용하고 있지만, 심층(深層)에는 여전히 한자어가 다수다. 시계를 뜻하는 동호(đõng hõ)도 한자어 동호(銅壺)의 베트남식 표기일 뿐이다. 동호는 한자어 동루(銅漏)에서 왔을 것이다. 남위 23~55˚에 위치하며 남북 길이가 무려 1650㎞에 이르는 지리적 특징, 특히 우기와 건기 두 계절만 있는 남부의 열대몬순기후를 고려하면 해시계보다는 물시계가 유용했을 것이다. 그 때문에 물시계의 전통을 담은 동호가 베트남의 시계 지칭으로 남았을 것이다.

또 한국은 조선시대만 해도 자격루(自擊漏)·일구(日晷) 등의 용어가 있었지만, 개화기 이후로는 신문물과 함께 유입된 일본 한자어인 시계를 채택한 상태다. 이처럼 시계를 지칭하는 한자어를 통해 이들 4개 국가에서 일어난 단어의 이동과 변용 및 창조 등은 물론 그에 반영된 문화적 배경까지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연구는 동아시아 제국의 정체성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박스기사] 한국형 한자 완성 위해 뛰는 ‘경성대 HK+ 한자문명연구사업단’ - “4차 산업혁명 시대 한자문화권의 새로운 도항(導航) 구현해나갈 터”


▎2020년 1월 5일 개최된 ‘갑골문 12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후 한 자리에 모인 경성대 한국한자연구소 인문한국플러스(HK+) 한자문명연구사업단. / 사진:경성대 한국한자연구소 인문한국플러스(HK+) 한자문명연구사업단
날로 강화되는 중국의 문자 패권화에 맞설 선봉장도 자임

베트남을 포함하는 한국(북한 포함)과 중국(대만·홍콩 포함) 및 일본 등 4개국은 한자를 기반으로 성장해온 문명으로, 보통 ‘한자문화권’이라 불린다. 이 때문에 이들 국가는 언어와 민족은 다르지만, 문화적 동질성이 매우 높다. 게다가 유학(儒學)이라는 사상적 전통도, 불교(佛敎)라는 종교적 전통도 공유하고 있다.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문화와 가치는 오늘날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다.

단순히 한자문화권의 국가들이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뤄냈기 때문만은 아니다. 최근 코로나19라는 전 세계적인 재난을 맞았을 때 개인보다는 사회를 생각하고,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그러면서도 미래를 긍정적으로 보는 유연한 태도는 위기의 세계인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줬다.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문명적 특성은 무엇인가? 무엇이 서구 국가들과 차이를 갖게 했는가? 그간은 주로 기독교와 유가 문명이라는 사상적 비교를 통해 이 양대 문명을 연구해왔다. 인류를 문화적 인간으로 만든 문자, 음성 중심의 알파벳 문자를 사용해온 서구와 문자 중심의 한자를 사용하는 동양이라는 관점에서 체계적이고도 방대한 실증적인 언어학적 접근은 부족한 실정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2018년 5월 출범한 경성대 HK+ 한자문명연구사업단은 이들 국가의 한자 어휘의 세밀한 문화 비교를 통해 다음의 목표를 설정했다.

(1) 4개 국가 간 한자어의 생성·발전·이동·상호 영향 등의 구체적 양상을 규명하고 (2) 이를 통해 한국 한자어의 고유성과 문화 특성을 밝혀서 이를 한국 한자어의 순화 표준으로 제공하며 (3) 한자문화권 내의 국가별 문화 특성은 물론 서구와의 비교를 통해 한자문화권의 ‘문자에 기반한 문명’의 특성을 규명하고 (4) 한자어 기반의 문화지도 제작과 관련 문화 콘텐트 제공을 통해 시민인문센터를 활성화하며 (5) 초국가적 연대에 의한 한자 연구와 학문 후속세대 양성 및 네트워크 구축 등을 통해 세계적 한자연구센터로 정착한다.

이러한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경성대 HK+ 한자문명연구사업단은 한자문화권의 ‘새로운 도항(導航)’을 구현해나갈 것이다. 문화적 동질성을 갖는 한자문화권의 발전적 연대와 협력은 물론 날로 강화되는 중국의 문자 패권화에도 주체적으로 대응하는 상호 존중과 배려의 정신을 발양(發揚)해 21세기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걸맞은 동아시아 문명권의 올바른 방향성을 제시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한자문명연구사업단은 2025년 4월까지 7년간(1단계)의 기나긴 여정을 항해 중이다. 한자문명권의 소통(疏通)을 위해 그 동인(動因)을 찾고, 미래를 향한 도항을 개척하고 있다.

- 하영삼 경성대 중국학과 교수 hayoungsam@gmail.com

202101호 (2020.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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