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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이 발굴한 ‘오랑캐의 역사’(15)] 문명 통합의 그늘, 14세기 인류 최악 흑사병 대유행 

세계제국 몽골, 질병의 세계화도 촉발 

고원지대 들쥐에 잠복하던 흑사병, 교역 급증하자 빠르게 확산
5년 새 인구 절반 희생된 유럽, 문명 수준 낮아 면역력 약했던 듯


▎14세기 유럽, 벨기에 토리네이시(市)의 흑사병 대유행을 묘사한 그림. / 사진:디아스포라 박물관
20세기 최악의 유행병은 1918~20년의 ‘스페인 독감’이었다. 위키피디아의 ‘Spanish flu(스페인 독감)’ 기사에 따르면 2년 동안 5억 명이 감염되었고, 사망자 수는 1700만 명에서 5000만 명 사이에 여러 견해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스페인 독감’이란 이름이 스페인 사람들에게는 억울하다. 감염이 폭발할 때는 제1차 대전이 아직 계속되고 있어서 취재와 보도에 제약이 많았는데, 중립국인 스페인에는 그런 제약이 없어서 그곳 사정이 집중적으로 보도되는 바람에 널리 각인된 것이라 한다. 국왕 알폰소 8세가 그 병에 걸린 것도 강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그 진짜 발원지에 관해서는 아직도 정설이 나오지 않고 있다. 연구가 계속됨에 따라 1918년 4월의 폭발보다 꽤 앞선 시점(길게는 3년까지)에 발생한 사실이 밝혀지고 있으니 확실한 결론이 나오기 어려운 문제 같다.

1918년 독감이 20세기 최악의 유행병이라면 인류의 전 역사를 통해 최악의 유행병으로는 14세기 중엽의 흑사병이 꼽힐 것이다. 흑사병 사태의 실상에 관해서는 지금도 엇갈리는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어서 명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위키피디아의 ‘Consequences of the Black Death(흑사병의 결과)’ 기사에 정리된 것을 보면, 당시 세계 인구가 4억7500만 명에서 3억5000만 내지 3억7500만 명까지 줄어든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인명 피해를 전 인구의 20~25% 수준으로 많은 연구자가 보는 것이다.

유럽 지역의 흑사병 피해 연구가 다른 지역보다 많이 나와 있는 데는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1)유럽의 피해가 가장 혹심해서. (2)피해 기록이 제일 잘 남아있어서. (3)근대적 연구가 유럽을 중심으로 진행됐기 때문에.

(3)은 당연한 사실이다. 근대적 학문의 발전이 진행되는 동안 유럽의 역사가 인류 역사의 주축이라는 유럽 중심주의가 상식으로 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역사 연구의 압도적 비중이 유럽 역사에 있었고 흑사병 사태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른 지역의 흑사병 피해에 관한 연구는 20세기 말에 와서야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2)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다. 당시 유럽은 기록문화가 중국이나 이슬람권에 비해 뒤져 있어서 그 시대로부터 전해지는 기록 전체 분량이 아주 적다. 연구가 집중되었기 때문에 기록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많이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1)이 가늠하기 어려운 문제다. 위키피디아의 위 기사에 따르면 1347~1351년의 5년간 유럽 인구의 3분의 1 내지 절반이 흑사병에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어 중국에 관해서는 13세기의 1억2500만 명 인구가 14세기 말까지 6500만 명으로 줄어든 사실만을 제시하고, 중동 지역에서는 1348년을 전후해서 인구의 25~38% 희생이 있었다는 연구가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 연구 결과로는 중국과 이슬람권의 피해가 유럽에 비해 덜했는지 어떤지 판단하기 어려운 것 같다.

14세기의 흑사병은 선(腺)페스트(bubonic plague)로 밝혀졌는데, 박테리아 감염병인 페스트 중 림프샘이 심하게 부어오르는 증상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증세가 참혹하고 치사율이 높아서 큰 공포의 대상이었다. 중국과 한국 기록에 온역(瘟疫)이란 이름으로 나타났다. (‘온역’이 페스트 외의 다른 전염병을 가리킨 경우도 많이 있다. 영어의 ‘plague’도 마찬가지다.)

모든 감염병은 어느 곳에선가 안정 상태의 풍토병(endemic disease)으로 자리 잡고 있다. 어느 범위의 숙주에게 심한 증세를 일으키지 않으면서 공생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원래의 숙주 아닌 다른 동물(인간)이 감염될 때 격렬한 증세를 일으킨다. 풍토병 지역 사람들은 면역력을 키우거나 감염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는데, 다른 지역 사람이 들어오면 걸리기 쉽고, 환경이나 여건의 큰 변화로 외부로 터져 나오면 무서운 유행병이 될 수 있다.

흑사병은 중앙아시아 고원지대의 들쥐를 숙주로 잠복해 있다가 몽골 제국 건설에 따른 환경 변화를 계기로 터져 나온 것으로 보인다. 흑사병을 옮긴 것은 쥐와 쥐벼룩이었다. 집쥐는 들쥐와 달리 감염 후 곧 죽기 때문에 감염 기회가 제한되는데, 중앙아시아 지역의 교통량이 급격히 늘어나고 이동 속도가 빨라지면서 널리 퍼져나갈 조건이 이뤄진 것이다.

환경과 여건의 변화에 따라 유행병의 폭발이 일어나는 것이라면, 문명 발생 자체가 유행병의 위험을 본질적으로 내포한 것이다. 경제 발달에 따라 이동이 늘어나고 도시의 인구 밀집 지역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몽골 제국이 문명권의 통합으로 경제와 문화의 ‘세계화’를 바라보는 이면에서 질병의 ‘세계화’를 위한 계기도 만들어진 것이다.

북·서유럽엔 흑사병 이전 질병 대유행 기록 전혀 없어


▎중세 말기 유럽 회화에 많이 등장하는 ‘죽음의 무도회’. 14세기 중반 흑사병 대유행의 영향으로 이해된다. / 사진:위키피디아
문명과 유행병의 관계를 생각할 때, 14세기 이전의 유럽에 질병 대유행의 기록이 적다는 사실이 눈에 띈다. 기원전 430~426년 아테네의 역병 이래 몇 차례 있기는 하지만 같은 시기 중국의 재해 기록에 비하면 아주 드물다. 그나마 유럽의 질병 유행 기록이라는 것이 모두 지중해 세계의 것이고, 서유럽과 북유럽에는 흑사병 이전에 질병 대유행의 기록이 전혀 없었다. 교역 규모가 작고 도시가 형성되지 않은 상황을 보여주는 것 같다.

여기서 ‘유럽’의 역사적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세계를 유럽·아시아·아프리카의 세 구역으로 나눠 본 데 그 기원이 있다. 그리스인이 자기네를 유럽에 속한다고 생각할 때, 지중해 건너편인 아프리카와의 구분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시아와의 지리적 구분은 명확하지 않다. 페르시아 제국을 의식하며 문화적 구분을 생각한 것 같다.

그리스인에게 유럽은 동쪽의 페르시아 영역, 남쪽의 이집트 영역과 대비되는 자기네 영역이었다. 로마인이 이 인식을 물려받으면서 아시아와의 경계는 돈강까지 확장되었다. 로마제국이 무너진 후 유럽의 정체성이 다시 인식된 것은 9세기 카롤링거 시대였는데, 이때의 유럽은 로마교회 영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슬람권은 물론 동방정교회 영역과도 대비되는 것이었다. 15세기 후반 모스크바대공국이 금장한국(Golden Horde)의 통제를 벗어나 서유럽과 관계가 늘어나면서 비로소 지금과 비슷한 유럽의 영역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후 대항해시대를 거쳐 유럽인의 해외정복이 시작되면서 정복의 주체인 유럽을 정복의 대상인 여타 세계와 구분하는 의식 속에서 유럽의 근대적 정체성이 세워졌다.

고대 그리스-로마인이 생각한 유럽과 근대인이 생각하는 유럽은 위치상으로는 꽤 겹쳐진다. 근대의 유럽 중심주의는 그사이의 연속성을 전제로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흑사병이 덮칠 무렵까지 중세인의 ‘유럽’ 인식은 그와 크게 다른 것이었다. 그 상황을 되돌아보는 것이 이후 세계사 속에서 유럽의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이번 작업을 통해 오랫동안 그려 온 중국사의 모습을 새로 그려보게 되었다. 그러다 어려운 문제에 마주치게 된 것이, 유럽사의 그림도 자꾸 새로 그리고 싶어지는 것이다. 중국사에 관한 새로운 생각들과 맞춰볼 때 어려서부터 배웠던 유럽사와 잘 맞지 않는 구석이 계속 나타난다. 하지만 전공 분야도 아닌 유럽사를 내 멋대로 그릴 수는 없으니 답답한 일이다.

그런 참에 마주친 귀인(貴人)이 100년 전의 벨기에 역사학자 앙리 피렌느(1862~1935)였다. 그가 유고로 남긴[Mohammed and Charlemagne(마호메트와 샤를마뉴, 1937)]를 정리해서 출간한 아들 자크가 서문에 이렇게 썼다.

“아버지는 모든 책을 두 차례 쓰는 것이 습관이었다. 초고에서는 형식과 관계없이 내용을 끌어모아 놓았다. 거친 형태의 초고라 할 수 있다. 이것을 정리한 완성고는 초고를 수정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 쓰는 글로서, 객관적이고 공들여 간결하게 다듬은 형식을 갖추면서 자신의 개인적 취향을 그 형식 뒤에 숨겨놓는 것이었다.”(10쪽)

피렌느는 객관성과 엄밀성에 매우 충실한 역사학자였다. 그런데 이 책은 평소의 기준을 100% 지키지 않은 것이다. 여러 해 전에 원고를 완성하고도 죽을 때까지 발표하지 않고 있었던 것은 그 기준에서 벗어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발표할 가치는 있는 글이라고 여겼기에 아들이 정리해 낼 수 있는 형태로 남겨놓은 것일 텐데.

1차대전 때 포로수용소서 ‘중세 유럽사’ 저술


▎기원전 6세기에 아낙시만드로스가 그린 세계지도.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파시스 강은 그루지야에 있는 리오니강을 가리킨 것이었다. 카프카스 지역이 당시 그리스인이 인식한 ‘세계의 끝’이었던 것이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경계는 나일강으로 인식되었다. / 사진:위키피디아
이번에 참고한 또 하나 피렌느의 책 [Medieval Cities(중세의 도시, 1927)]는 평소의 기준을 지킨 작품으로, 건조할 정도로 엄정한 스타일을 보여준다. [마호메트와 샤를마뉴]에는 그와 달리, 발랄한 생각들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저자 본인이 만년의 작품에서는 ‘역사학자’의 기준을 벗어난 ‘사상가’의 역할을 추구한 것 같다. 다만 그 역할을 생전에는 자임하지 않고 사후의 업적으로만 남긴 것으로 이해한다.

오래전에 써놓은 채 발표하지 않고 있다가 아들에게 일거리로 남겨 둔 더 큰 책이 있다. [A History of Europe -from the Invasions to the 16th Century(유럽중세사)]. 1916년 3월 독일 점령군에 체포되어 1918년 11월 1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32개월간 독일의 몇 개 수용소를 전전하는 동안 집필한 책이다. 수용소에 함께 있던 러시아 유학생들을 위해 사설 강단을 열어 경제사를 강의하다가 유럽의 역사를 정리할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다른 학자들과 토론은 물론, 참고자료도 구해 볼 수 없는 환경에서 기억에 의지해 이 책을 쓰면서 평소와 같은 고증의 기준을 지킬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책에도 서문을 쓴 아들 자크는 원래 원고의 연도 표시가 대부분 빈 괄호로 붙어 있었던 데서 참고자료 없이 작성된 원고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 전쟁이 언제 끝날지, 과연 예전과 같은 연구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 학인(學人)의 역할에 최선을 다한 것이다.

유럽사를 새로 그려보는 데 피렌느의 저술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에게 받아들인 생각 중 가장 기본이 된 것은 무엇보다 ‘유럽’과 ‘지중해 세계’를 구분해서 보는 시각이다. [마호메트와 샤를마뉴]의 첫 문단이 이런 내용이다.

“인간이 빚어낸 경이로운 구조물인 로마 제국의 모든 특성 가운데 가장 강렬하면서 또한 가장 본질적인 것이 ‘지중해성’이다. 동쪽의 그리스 문화권과 서쪽의 라틴 문화권으로 갈라지지만, 지중해에 속한다는 그 특성이 제국의 모든 주(province)들을 하나의 통일성으로 묶어주었다. 우리들의 바다, Mare nostrum의 의미를 가득 품은 이 내해는 사상과 종교와 상품이 움직여 다니는 통로였다. 벨기에·브리타니아·게르마니아·라이티아·노리쿰·파노니아 등 북쪽의 주들은 단지 오랑캐를 가로막는 울타리일 뿐이었다. 문명의 생명은 거대한 호수의 기슭에 응축되어 있었다. 지중해 없이는 아프리카의 밀이 로마에 공급될 수 없었다. 해적이 사라진 지 오래되어 항해의 안전이 확보된 이제 지중해의 혜택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커졌다. 모든 주로부터 바다로 나오는 길을 통해 로마 제국의 모든 교통이 지중해에서 합쳐졌다. 바다로부터 멀리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문명의 밀도는 점차 희박해졌다.”(17쪽)

그리스-로마인에게는 지중해 세계가(특히 그 동쪽 일대) 곧 문명 세계였고, 그중에서 동쪽의 페르시아 문명권, 남쪽의 이집트 문명권과 대비해서 지중해 북안의 자기네 영역을 유럽이라 불렀다. 지금 기준으로 유럽의 동남부 지역에 해당하며, 후에 유럽을 이끌 서북부는 아직 문명 세계의 바깥에 있어서 페르시아나 이집트보다도 더 먼 곳으로 여겨졌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후에야 서서히 이뤄져 가는 유럽의 진정한 탄생을 다룬 책이 [마호메트와 샤를마뉴]다.

메소포타미아·이집트와 인도에서 발생한 농업 문명의 다음 단계 확장·발전에서 지중해와 인도양이 주축이 된 것은 교통의 기술적 조건 때문이었다. 고대 세계에서 수상 교통은 육상 교통과 비교가 안 되게 효율적이었다. 지중해 연안의 많은 지역이 하나의 문명으로 통합되어 가면서 그리스권·라틴권·이집트권·페르시아권 등 지역 간 차이는 문화적 차이에 그치게 되었다.

동-서 로마제국, 분열 아닌 동진으로 보는 게 적절


▎베네치아의 위성사진. 피난처로서 적합한 지형을 알아볼 수 있다. / 사진:위키피디아
지중해 동부 연안에서 출발한 지중해 문명이 서쪽으로 확장해 가는 과정에서 북쪽 연안의 로마와 남쪽 연안의 카르타고가 신흥세력으로 자라났다. 기원전 2세기 중엽 로마제국이 카르타고를 제압하고 지중해 전체를 장악하면서 팍스 로마나가 이뤄졌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 문명이 중화 제국으로 조직된 것처럼 지중해 문명은 로마 제국으로 조직된 것이다.

팍스 로마나는 375년경 시작된 게르만 대이동을 통해 무너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무렵(395) 로마 제국의 동-서 분열이 이뤄진 사실이 주목된다. ‘동-서 분열’이라고 배워왔지만, 이제 돌아보면 로마 제국의 ‘동진(東進)’으로 보는 편이 더 적절해 보인다. 겨우 80여년간 존재한 서로마 제국의 역사적 의미는 이후 1000년 넘게 계속된 동로마 제국과 비길 것이 아니다. 330년 콘스탄티노플을 제2의 수도로 정할 때 로마제국의 동진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서쪽 변방에서 출발한 로마 제국이 문명 중심부인 동쪽으로 옮겨가는 과정과 북쪽의 오랑캐들이 남하해서 서쪽에 남겨진 로마 제국의 껍데기를 넘겨받는 과정이 나란히 진행되었다. (북중국 일대를 5호16국에게 남겨주고 ‘남진’ 한 중화 제국과도 비슷한 모습이다.)

미개한 게르만 부족들이 훈족 등 더 미개한 부족들의 서진에 밀려 로마 제국으로 들어왔다가 제국을 탈취하기에 이른 것으로 배워 왔다. 이것 또한 근년 인류학계의 유목 세계 연구 성과를 참고하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게르만 일부 부족이 로마에 복속한 것은 토머스 바필드가 [위태로운 변경]에서 말하는 ‘내경 전략(inner frontier strategy)’과 같은 모양이다. 용병 역할로 제국에 포섭된 오랑캐가 상황 변화에 따라 왕조를 탈취하거나 정권을 세우는 것은 중국 역사에서 수없이 일어난 일인데, 이른바 ‘게르만 대이동’도 비슷한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피렌느는 470년대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유럽의 중세가 시작되었다는 종래의 통설과 달리 게르만 여러 종족이 휩쓴 서유럽에서 로마 제국의 틀이 수백 년간 더 계속되었다는 관점을 제시했다. 8세기 중엽 메로빙거 왕조가 무너질 때까지 프랑크 왕국을 비롯한 게르만 제 세력은 로마 제국의 제도를 원용하고 라틴어를 비롯한 라틴 문화를 고급문화로 수용했을 뿐 아니라 경제면에서도 지중해 연안의 선진 지역에 중심을 두었다. 카롤링거 왕조가 들어선 뒤에야 갈리아 내륙으로 중심이 옮겨가면서 지중해 문명에 종속되지 않는 새로운 ‘유럽 문명’이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피렌느는 보는 것이다.

유럽의 중세가 8세기에야 시작되었다고 보는 피렌느의 관점을 둘러싼 논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고대와 중세의 분기점에 나는 큰 관심이 없다. 고대-중세-근대의 시대구분에 지금까지의 통념처럼 막중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렌느의 관점에서 지중해 문명과 유럽 문명의 구분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7~8세기 이슬람 세력의 지중해 제해권 장악이 프랑크 왕국으로 하여금 지중해 문명을 벗어나 새로운 길로 나아가게 했다고 보는 점에도 함축하는 의미가 커 보인다. 내가 흉노 제국을 ‘그림자 제국’으로 보는 것은 한나라가 주도하는 시대 변화에 이끌려 이뤄진 제국이라는 뜻인데, 8세기 이후의 프랑크 왕국 역시 지중해 문명권의 상황 변화에 떠밀려 새로운 길에 들어섰다는 의미에서 또 하나의 ‘그림자 제국’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유럽인의 정체성 희박했던 이탈리아 도시들


▎콘스탄티노플에서 약탈해 온 마상(馬像)들이 산마르코 대성당 입구를 장식하며(지금은 복제품이다) 당시 베네치아의 도덕적 감수성 수준을 증언해 주고 있다. / 사진:위키피디아
피렌느는 카롤링거 왕조를 유럽 중세의 출발점으로 보는데, 나는 이것을 ‘유럽 문명’의 출발점으로 이해한다. 르네상스 이후 유럽인들은 그리스-로마 문명을 유럽 문명의 기원으로 여겨 왔지만, 그리스-로마 문명은 지중해 문명의 일부였다. 그리스-로마 사람들이 지중해 북쪽 연안의 자기네 영역을 ‘유럽’으로 인식한 것은 동쪽의 페르시아, 남쪽의 이집트와 대비되는 하나의 문화권으로서 지금 유럽의 동남쪽 귀퉁이만을 가리킨 것이었다.

이슬람 세력이 지중해를 장악한 후 갈리아 등 배후 지역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키워낸 프랑크인들이 수백 년 후 본격적 문명 단계로 진입하기 위해 지중해 문명의 유산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러 나선 것이 르네상스였고, 그 유산에 대한 상속권을 표방하기 위해 ‘유럽’이란 이름을 스스로 붙인 것이다. 8~9세기의 이른바 ‘카롤링거 르네상스’ 때 사람들이 말하던 ‘유럽’은 로마교회의 당시 영역을 가리킨 것으로, 동로마 제국도 배제하는 이 영역은 아직 독자적인 문명을 이루지 못하고 지중해 문명의 변방에 머물러 있었다.

중세 말기의 유럽에서 경제와 문화가 가장 발달한 곳으로 이탈리아 도시들이 꼽힌다. 공화정과 자본주의를 비롯한 근대 유럽의 핵심 요소들의 기원을 이곳에서 찾는 연구가 많이 나와 있다. 그리고 ‘유럽다운 유럽’을 빚어낸 15~16세기 르네상스도 이 도시들을 무대로 펼쳐진 것이었다. ‘유럽 문명의 기원’으로서 그리스-로마 문명보다 ‘근대 유럽의 기원’으로서 이 도시들의 역할이 더 구체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이 도시들의 구성원들이 과연 ‘유럽인’의 정체성을 갖고 있었을까? 그랬을 것 같지 않은 이야기가 많이 전해진다. 그 대표로 베네치아의 역사를 한번 훑어본다.

421년 3월 25일 정오 산자코모 교회의 봉헌을 베네치아의 기원으로 이야기한다. 3세기 이후 게르만 침략을 피해 방어가 쉬운 석호(潟湖)의 섬에 피난민들이 모여든 것으로 추정된다. 5세기에 비지고트족과 훈족의 침략으로 더 많은 사람이 모였고, 서로마 제국의 멸망 후 553년부터 동로마 제국의 관할을 받았다.

697년에 베네치아 공화정의 핵심인 도제(doge) 제도가 시작되었다고 전해지기도 하지만, 도시국가로서 독립성은 9세기 이후에 완성되었다. 8세기 중엽 인근의 라베나 총독령(Exarchate of Ravenna)이 롬바르드 왕국에 점령당하면서 동로마 영토로서 베네치아의 위치가 고립되었고, 베네치아를 넘보던 샤를마뉴가 814년에 동로마 황제와 협약을 맺었다. 베네치아는 동로마 영토로 인정받으면서 아드리아해의 교역권을 부여받았다.

그 후 동로마 제국의 쇠퇴에 따라 베네치아의 독립성이 강화되었고, 교역로 일대의 영토를 점령해서 해상 제국을 이루기도 했다. 16세기 이후 대서양 항해의 발전에 따라 베네치아의 위상이 움츠러들다가 19세기 초 나폴레옹 침공을 계기로 오스트리아 제국의 관할에 들어갔고, 1866년 통일된 이탈리아 왕국에 합류했다.

베네치아의 번영은 교역 활동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지중해 세계에서는 그리스시대 이전부터 교역 도시들이 발달해 왔다. 교역 도시 중에는 해로 상의 요충지에 자리 잡고 항로와 항로를 연결하는 역할의 도시들이 있고, 해로의 끝에 자리 잡아 육상의 배후지와 바다를 연결하는 역할의 도시들이 있었다. 베네치아는 후자의 경우로 출발했다가 동로마 제국의 옹호 아래 지중해 동부 해역과 흑해까지 활동 영역을 넓히면서 해상 제국을 이루었다. 동로마 제국의 베네치아 옹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1082년 알렉시오스 1세 황제의 ‘황금칙령(chrysobull)’이다. 베네치아가 아드리아해에서 노르만 세력을 막아주는 대신 교역의 권리와 관세 면제 혜택을 보장해주는 내용이었다.

베네치아, 십자군 혼란 틈타 동로마 제국 약탈


▎샤를마뉴 시대 유럽의 국가- 민족 분포. 지금의 터키를 비롯한 보라색으로 표시된 영역이 동로마 제국에 속해 있었다. / 사진:위키피디아
장사꾼의 성공을 위해서는 누구에게도 충성심을 갖지 않아야 한다는 냉소적인 말이 있다. 베네치아에서는 확실히 적용된 원칙이다. 베네치아의 번영에는 이슬람권과의 교역이 큰 몫을 했고, 이를 억제하려는 황제와 교황의 뜻을 거침없이 거슬렀다. 베네치아 지도부는 교황에게 수없이 파문의 경고를 받고 실제로 두 차례 파문을 당하기도 했다. 11세기 말 시작된 십자군운동에서도 베네치아는 병력과 물자 수송대금을 착실히 징수할 뿐 아니라 정복 지역의 이권도 철저하게 챙겼다. ‘성전(聖戰)’의 명분을 위해 장삿속을 양보한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앙리 피렌느가 쓴 [마호메트와 샤를마뉴] 표지. / 사진:위키피디아
베네치아의 장삿속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제4차 십자군(1202~1204)의 혼란을 이용한 콘스탄티노플 약탈(1202)이었다. 애초에 십자군운동은 투르크계 이슬람 세력의 침략으로부터 기독교 세계를 함께 보호하자는 동로마 제국의 호소로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제4차 십자군은 오히려 동로마 제국을 파괴함으로써 이슬람 세력의 진출을 더 쉽게 만들어주는 역설적인 행동을 취했고, 그 와중에서 베네치아는 인근 해역의 제해권을 포함한 막대한 이득을 취한 것이다.

수백 년간 종주국으로 모시며 많은 혜택을 얻던 동로마 제국의 파괴에 앞장선 베네치아의 모습에 중국의 왕조에 복속하다가 왕조의 파괴에 앞장서던 오랑캐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어쩌면 동로마 제국에 대한 베네치아의 태도를 이해하는 데도 바필드가 말하는 ‘내경 전략’을 적용할 수 있는 것일지 모른다. 서쪽 변방 유지를 위해 베네치아를 후원해 주며 포섭하고 있던 동로마 제국 체제가 허약해졌을 때 베네치아가 배후의 오랑캐들을 규합해서 제국을 뒤집어엎은 것이다. 이때 무너진 동로마 제국은 60년 후 일단 회복되기는 하지만 1453년 멸망에 이를 때까지 과거의 성세를 끝내 되찾지 못한다.

십자군운동(1096~1271)은 새로 태어나고 있던 유럽이 지중해 세계와의 관계를 바꿔 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대항해시대 유럽의 모습을 파악하기 위해 보다 깊은 설명을 덧붙일 주제로 르네상스와 함께 남겨둔다.

피렌느는 [중세의 도시]에서 베네치아의 흥기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베네치아가 유럽의 서쪽과 그토록 다른 세계와의 관계로부터 어떤 혜택을 얻었는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교역으로부터 번영을 얻었을 뿐 아니라 문명의 차원 높은 형태, 완성된 기술, 그리고 베네치아가 중세의 유럽과 차별된 위치에 서게 해준 정치와 행정의 조직방법을 동쪽에서 얻었다. 8세기까지 베네치아는 콘스탄티노플에 물자를 공급하는 사업에 전력을 기울여 갈수록 큰 성공을 거뒀다. 베네치아 배들은 인접 지역의 생산품을 콘스탄티노플로 실어 갔다. 이탈리아의 밀과 와인, 달마시아의 목재, 그리고 교황과 동로마 황제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아드리아해 연안의 슬라브인으로부터 손쉽게 획득한 노예를 수송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배에는 비잔틴에서 생산된 값진 직물과 아시아에서 조달된 향료를 싣고 왔다. 10세기까지는 해상활동의 비중이 엄청나게 커졌고, 교역의 확장에 따라 이득에 대한 사랑을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베네치아 사람들은 절제심이라는 것을 아주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들의 종교는 장사꾼의 종교였다. 장사에 도움이 되기만 한다면 이슬람이 기독교의 적이라는 사실은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54쪽)

지중해 문명 ‘노예’ 공급지였던 유럽 내륙


▎20세기 최악 대유행병, ‘스페인 독감’ 환자를 격리 수용한 미국 캔자스 주의 임시병동 모습.
이 대목에서 유럽의 대표적 수출품으로 ‘노예’가 언급된다. 윌리엄 번스타인도 [A Splendid Exchange: How Trade Shaped the World 교역의 세계사](2008)에서 13세기의 교역 상황을 검토하다가 “유럽인들이 그토록 갈구하는 향료를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에서 구입하는 대가로 공급할 만한 다른 상품이 있었는가?”(111쪽) 자문한 다음 노예가 그 상품이었다고 자답한다. 10세기에는 아드리아해 연안에서, 13세기에는 흑해 연안에서 노예를 확보했는데 어느 쪽이나 슬라브인이 그 대상이었다. ‘slave’ 등 노예를 뜻하는 유럽 어휘들이 ‘Slav’에서 나온 것이다.

피렌느는 [마호메트와 샤를마뉴]에서 게르만인이 로마제국의 노예 제도를 배웠고 라인강 서쪽의 야만인으로부터 노예를 포획했을 것으로 추정했지만(96쪽), 나폴리와 베네벤토 사이의 836년 조약 중에 “롬바르드 노예”를 살 수는 있지만 되팔 수는 없게 한다는 조항으로 보아 게르만인 중에도 노예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181~182쪽) 대상 종족에 제한이 지켜지지 않을 정도로 노예 시장이 성행했다.

15세기까지 노예는 유럽의 중요한 수출 품목이었다.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교역 도시들은 동방에서 향료와 직물 등 고급 상품을 수입하는 대신 목재·곡물 등 원자재와 함께 노예를 수출했다. 문명 중심부에서는 다양한 인력의 수요가 있었고 노예 구입은 인력 확보의 한 방법이었다. 노예의 수급 관계를 놓고 본다면 이탈리아 도시들은 지중해 문명권의 외곽부, 유럽 내륙 지역은 배후지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8세기 중엽 중국의 제지술이 이슬람권에 전해진 후 수백 년이 지나서야 유럽에 전파된 사실을 놓고 그때까지 유럽에는 종이의 수요가 적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유럽에서 양피지가 널리 쓰인 것은 7세기 말부터의 일로 피렌느는 추정했다.([마호메트와 샤를마뉴] 167~170쪽) 그전까지 로마 시대 이래의 파피루스가 쓰이다가 양피지로 대치된 것은 이슬람 세력이 지중해를 장악하면서 교역권에서 배제된 갈리아 지역에 파피루스 공급이 끊긴 때문이라고 그는 해석했다.

14세기 중엽 흑사병의 대유행에서 유럽 지역의 충격이 중국이나 이슬람권보다 더 강렬했을 이유를 두 가지 생각할 수 있다. 두 가지 다 낮은 문명 수준과 관련된 이유다. 하나는 유럽인의 유전자 풀이 문명 선진 지역보다 빈약해서 질병에 대한 면역력과 저항력이 낮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16세기에 아메리카인이 유라시아 질병에 취약했던 것과 비슷한 피해자의 입장에 14세기의 유럽인도 처해 있었던 것 아닐까?(지나친 상상 같기도 하지만, 마르코 폴로가 말한 “Cathay”가 중국이라는 사실을 수백 년간 모르고 있었던 사실을 생각하면 유럽의 고립성이 정말 심했던 것 같다. 14세기 말의 조선에서는 아프리카·유럽과 대서양이 들어간 지도가 그려지고 있었는데!)

또 하나 이유는 개체가 아닌 사회체제의 저항력 문제다. 문명 선진 지역에서는 전염병 유행을 여러 차례 겪어 왔기 때문에 웬만한 비상사태에도 체제의 전면적 붕괴를 억제하는 제도적 장치가 나름대로 갖춰져 있었던 반면 안정된 문명 단계에 미처 진입하지 못하고 있던 유럽에서는 문명의 어귀에서 반(反)문명의 정글로 일거에 빠져들게 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지금의 코로나 사태에 이른바 ‘선진국’들이 오히려 더 큰 어려움을 겪는 데도 같은 이유가 다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두 이유 모두 확실한 근거 없는 추측일 뿐이다. 그러나 14세기 유럽의 문명 수준이 일반 통념에 비해 매우 낮은 것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는, 그 시대의 여러 현상을 이 사실에 입각해서 다시 검토할 필요는 분명히 있다. 유럽 근대문명의 특성 중에 흑사병 대유행에 따른 체제의 파괴가 다른 문명권보다 혹심했다는 역사적 경험이 비쳐진 측면이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도 있다. 근대문명의 미래가 갈수록 불확실해지고 있는 시점에서 절실한 필요다.

※ 김기협 - 서울대·경북대·연세대에서 동양사를 공부하고 한국과학사학회에서 활동했다. 1980년대에 계명대 사학과에서 강의하고, 1990년대에 중앙일보사 연구위원(객원), 전문위원(객원) 등으로 일하며 글쓰기를 시작했다. 2002년 이후 18년간 공부와 글쓰기를 계속해왔다. 저서로 [밖에서 본 한국사](2008), [뉴라이트 비판](2008),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2010), [아흔 개의 봄](2011), [해방일기](10책, 2011~2015), [냉전 이후](2016) 등이 있다.

202101호 (2020.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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