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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우의 청와대와 주변의 역사·문화 이야기(13)] 영빈관 담장 너머 ‘비밀의 공간’ 칠궁(七宮) 유래 

300년 세월 넘어 영조 효심 전하는 듯 

궁녀 출신 어머니 신주 모신 사당 지어 놓고 재위 중 200차례 방문
대일 항쟁기 등 겪고도 큰 변화 없이 보존, 최근 일반인 출입 허용


▎사적 제149호인 칠궁(七宮)은 조선 시대 임금을 낳은 후궁 7명의 신위를 모신 사당 이름이다. / 사진: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181쪽
사적 제149호인 칠궁(七宮)은 조선시대 임금을 낳은 후궁 7명의 신위를 모신 사당 이름이다. 청와대 영빈관의 서쪽과 담장을 함께하고 있는 이곳의 이름이 처음부터 칠궁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영조가 자신의 생모 숙빈 최씨(1670~1718)의 사당으로 세운 숙빈묘(淑嬪廟)만 있었다.

조선 제19대 임금인 숙종의 후궁이자 제21대 임금 영조(1694년생, 재위 1724~1776년)의 친어머니인 숙빈 최씨는 충무위 사과(忠武衛司果: 정6품의 무관직)를 지냈으며, 후일 영의정으로 추증(追贈)된 최효원(崔孝元: 1638~1672)과 남양 홍씨(南陽洪氏: 1639~1674) 사이에서 현종 11(1670)년 11월 6일 태어났다.

7세 때인 숙종 2(1676)년부터 궁녀의 삶을 시작해 숙종 19(1693)년 4월 26일 내명부 종4품인 숙원(淑媛)이 된 후 숙종 25(1699)년 10월 23일 숙빈(淑嬪)이 됐다. ‘숙’은 휘호이며 ‘빈’은 후궁으로서의 최고 신분인 내명부 정1품 품계의 명칭이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이후 숙종 27(1701)년부터 숙종 30(1704)년 4월 사이 어느 시점에 숙종이 별도로 마련해준 이현궁(梨峴宮)으로 거처를 옮긴 후 혼자서 10년을 살았다. 광해군의 잠저(潛邸)였던 이현궁을 숙빈에게 내줬던 숙종은 숙종 37(1711)년 6월 22일 이현궁을 환수하면서 창의궁(彰義宮)에서 아들인 연잉군(후일 영조)과 함께 살아도 좋다는 전교(傳敎)를 내렸다. 그때 연잉군의 나이 18세, 숙빈은 42세였다.

연잉군은 글쓰기와 공부를 즐겼던 까닭에 숙종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는 6세 때인 숙종 25(1699)년 군(君)으로 봉해져 연잉군이 된 후 숙종 30(1704)년 2월 21일 11세의 나이로 진사 서종제의 딸과 혼인했다. 혼례를 올린 왕자나 공주에게는 살 집을 마련해주고 궐 밖으로 나가서 기거하도록 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렇게 결혼한 뒤에 사궁(私宮)으로 나가는 것을 출합(出閤)이라 하는데, 숙종도 호조에 구매 비용을 주도록 명했으나 결혼 4년째가 되도록 연잉군의 살 집은 정해지지 않았다.

숙종 33(1707)년 8월 29일 숙종은 연잉군의 집을 사주도록 다시 명을 내리니 호조에서는 선조의 첫째 딸인 정명공주(貞明公主)의 집을 사들이고자 했다. 그러나 며칠 후인 9월 3일 정명공주의 증손으로, 당시 이조참판이었던 홍석보가 ‘집을 팔지 말라’는 것이 선조의 유훈이라며 이의를 제기하자 이 역시 무산됐다. 숙종은 다시 여러 장소를 물색하던 중 효종의 셋째 딸 숙휘공주가 살았던 집을 2000냥에 사들여 연잉군의 궁가(宮家)로 마련해줬다. 숙종22(1696)년 10월 27일 55세를 일기로 사망한 숙휘공주는 숙종의 친고모이기도 하다.

국상 애도 기간 끝나는 날 생모 사당 건립 논의


▎칠궁 별묘 지역의 사당. / 사진:이성우
연잉군은 궐에서 생활한 지 8년 만인 숙종 38(1712)년 2월 12일에 마침내 출합했다. 이곳이 영조의 잠저인 창의궁이다. 잠저란 임금이 즉위하기 전에 살던 사저를 말하며 이 창의궁은 한성부 북부 순화방(順化坊), 지금의 경복궁 영추문 서쪽 지역인 종로구 통의동 35번지 일대에 있었다. 창의궁에서 5년여 동안 연잉군과 함께 살던 숙빈은 47세가 되던 숙종 42(1716)년 병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됐으나 일어나지 못하고 49세가 되던 해인 숙종 44(1718)년 3월 9일 아들 내외가 지켜보는 가운데 생을 마감했다.

숙종 45(1719)년 10월 2일 6년 터울의 이복동생 연령군(延齡君)이 사망하고, 아버지인 숙종마저 이듬해인 숙종 46(1720)년 6월 8일 승하하면서 연잉군의 이복형인 경종이 즉위하게 됐다. 그러나 경종에게는 후사(後嗣)가 없었고 병약하다는 의견이 계속 대두해온 터라 후계자 지명 논의가 일찍부터 있었다. 대비였던 인원왕후와 노론 계열의 지지를 받던 연잉군은 경종을 보위하려는 소론 계열의 거센 견제 속에서도 경종 1(1721)년 8월 20일 경종의 뒤를 잇는 공식적인 후계자로서 왕세제 지명을 받았다. 경종이 즉위한 지 겨우 1년이 조금 지난 때였다.

이와 관련해 [경종실록] 1(1721)년 8월 23일의 내용을 보면 왕세제의 책정이 사리에 합당하지 않다는 소론 측 전 도승지 유봉휘의 상소에 대해 경종이 비망기(備忘記: 임금이 명령이나 의견을 적어서 승지에게 전하던 문서)를 내리면서 “나의 병이 점점 더해 득남할 희망이 없고 자성(慈聖: 인원왕후)도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을 허락하셨다. 내게 조금이라도 사속(嗣續: 대를 이음)할 희망이 있다면 어찌 이러한 하교가 있었겠는가?”라며 경종 자신도 왕세제 책봉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왕세제가 된 연잉군은 10년간의 창의궁 생활을 뒤로하고 다시 궐내에서 거처하게 됐다. 경종의 건강은 재위 4년째 갑자기 나빠지기 시작했고 자리에 누운 지 단 며칠 만인 경종 4(1724)년 8월 25일 37세를 일기로 창경궁 환취정(環翠亭)에서 승하했다. 왕세제 연잉군은 1724년 8월 30일 창덕궁 인정문에서 임금으로 즉위하면서 재위 52년간의 긴 역사 여정을 시작하게 됐다.

영조는 경종의 국상으로 인해 조정의 정상 업무가 정지됐던 26일간의 공식 애도 기간인 공제(公除)가 끝나던 그 날, 생모인 숙빈 최씨의 사당 건립 문제를 논의했다. 우의정 이광좌와 문답하는 [영조실록] 즉위(1724)년 9월 21일 기록을 보면 “사당은 내가 불초(不肖)함으로 인해 3년이 지나도록 세우지 못했다. 지금은 흉년이 들어 백성이 곤궁한 데다 나라에 대장(大葬)이 있으니 인산(因山) 후에 백성의 힘이 조금 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며 보위에 오르자마자 사당 건립에 강한 의욕을 보인다.

영조가 최초 숙빈의 사당으로 염두에 뒀던 장소는 잠저였던 창의궁이었다. 그러나 창의궁에 사친(私親: 친어머니)의 사당을 둘 경우 제사를 모시는 주사(主祀)가 거처해야 하는데 신하의 한 사람인 주사에게 임금의 잠저를 쓰게 할 수는 없다는 조정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별도의 장소를 물색하게 됐다. 논의가 있은 지 1년도 더 지난 영조 1(1725)년 12월 23일 경복궁 북쪽에 사당이 완성됐다. 그 사당을 숙빈묘라 칭했으며 지금의 칠궁 영역이다.

일반적으로 사당을 지칭하는 묘(廟)를 무덤을 지칭하는 묘(墓)와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숙빈묘(廟)는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셔놓은 사당을 지칭하는 것이며, 숙빈 최씨의 무덤을 지칭할 때는 숙빈최씨지묘(淑嬪崔氏之墓)라고 해야 한다. 영조는 그 후로도 추숭(追崇)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 끝에 20년 후인 1744년 ‘상서로움을 기른다’는 의미의 육상(毓祥)이라는 묘호(廟號)를 올렸고 영조 29년인 1753년에 마침내 궁으로 격상시켜 육상궁(毓祥宮)이 됐다. 물론 숙빈 묘도 소령묘(昭寧墓)와 소령원(昭寧園)으로 같이 격상됐음이다. 영조는 52년의 재위 동안 육상궁을 200여 차례나 방문했다.

숙빈묘는 육상궁으로 격상된 후 변동 없이 대한제국까지 유지됐으나 1908년 저경궁(儲慶宮) 등 다섯 임금 사친의 신주를 모시면서 육궁(六宮)으로, 1929년 덕안궁(徳安宮)이 또 모셔지면서 지금의 칠궁이 됐다. 1912년 조선총독부 임시 토지조사국에서 조사한 칠궁 영역의 면적은 8871평이었다. 축구경기장(2164평)의 4배 정도 되는 크기인 셈이다. 동서로 줄지어 배치돼 있던 칠궁은 1968년 2월부터 남북을 관통하는 도로가 개설돼 규모가 축소되면서 저경궁·대빈궁(大嬪宮)이 지금의 자리로 이건(移建)됐으며 덕안궁 또한 기존의 자리에서 앞쪽인 남쪽으로 이건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쪽인 별묘 지역으로부터 배열된 칠궁의 순서와 모셔진 신위의 내용을 보면, 서쪽(왼쪽)부터 추존된 임금 원종(元宗: 인조의 아버지)의 생모이자 선조(14대)의 후궁인 인빈 김씨의 사당 저경궁과 그 동쪽(오른쪽)으로 경종(20대)의 생모이자 숙종(19대)의 후궁인 희빈 장씨의 사당 대빈궁이 각각 별도의 정당(正堂)으로 배열돼 있다. 대빈궁의 동쪽으로는 추존된 임금 장조(莊祖: 사도세자, 정조의 친아버지)의 생모이자 영조(21대)의 후궁인 영빈 이씨의 사당 선희궁(宣禧宮)에 순조(23대)의 생모이자 정조(22대)의 후궁인 유비 박씨의 사당 경우궁(景祐宮)이 같은 정당에 모셔져 있으며, 영친왕의 생모이자 고종(26대)의 후궁인 순헌황귀비 엄씨의 사당 덕안궁은 선희궁의 앞쪽(남쪽)에 배열돼 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신위 같은 정당에 모셔


▎칠궁의 정문인 외삼문 앞 도로 쪽에 있는 하마비(왼쪽)와 하마석. / 사진:이성우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사당인 육상궁은 별묘 지역 동쪽의 별도로 구획된 공간에 추존된 임금 진종(眞宗: 효장세자)의 생모이자 영조의 후궁인 정빈 이씨의 사당 연호궁(延祜宮)이 같은 정당에 모셔져 있다. 이 사당이 최초부터 있었던 육상궁의 정당으로 칠궁의 원주인인 셈이지만 지금은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함께 있는 셈이다.

진종은 영조의 맏아들로 세자 시절 사망했으며, 이복동생인 사도세자가 뒤를 이어 왕세자가 됐다. 그러나 사도세자마저 즉위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효장세자의 양자(養子)로 입적돼 세손으로 지내다가 즉위했다. 그에 따라 양아버지는 진종으로, 친아버지는 장조로 각각 추존한 것이다.

칠궁의 정문인 외삼문 앞 도로 쪽으로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고 새겨져 있는 비석이 하나 있다. 이 비석을 하마비(下馬碑)라고 하며 비석 이후의 공간은 성역이니 경의를 표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지금이야 별 의미를 두지 않고 무심히 다니는 사람들이 대다수이지만 조선시대 이런 하마비 앞에 도착한 사람들은 “누구나”, 즉 ‘높거나(大) 낮거나(小) 관직이 없거나(人) 관직이 있거나(員)’ 모두(皆) 말에서 내려야 한다(下馬).’고 명령하는 비석이다. 물론 임금은 예외일 것이다.

영조, 재실에서 내려 걸어서 사당으로 이동


▎육상궁의 부속 건물로 영조의 어진을 봉안한 냉천정과 냉천 우물(사진 아래 부분). / 사진:[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202쪽
칠궁 입구 재실 쪽 문으로 들어서면 너른 마당 가운데에 계단처럼 보이는 돌이 하나 놓여 있다. 이 돌을 하마석 또는 노둣돌이라고 하는데 ‘여(輿)’라고 하는 전용 가마를 타고 다니는 임금이 내릴 때 디딤돌로 사용한다. 영조는 어머니에게 예를 다하기 위해 여기서부터는 직접 걸어 사당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하마비는 아직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지만 하마석은 말이나 가마가 사라지다 보니 남아 있는 곳이 많지 않다.

하마석 앞쪽으로 가옥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칠궁의 재실(齋室: 제사를 준비하기 위하여 지은 집)인 이 건물에는 현재 ‘풍월헌(風月軒)’과 ‘송죽재(松竹齋)’라는 두 현액이 동서로 각각 걸려 있다. 이를 통해 이전에는 이와 관련된 두 채의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뒤로 돌아들면 또 다른 가옥 한 채가 눈에 띈다. ’삼락당(三樂堂)’이라는 현액이 걸려 있는 재실의 안채 격인 가옥이다. 이 가옥들에서 영조는 어머니를 모신 육상궁에 거둥해 예를 올리기 위해 준비도 하고 쉬기도 하며 신하들을 접견하기도 했다.

원래의 이 건물들이 언제 건립됐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영조 15(1739)년 정선(鄭敾)이 그린 그림인 ‘육상묘(毓祥廟)’를 보면 북악 산록에 처음 지었던 숙빈 최씨의 사당은 홍살문이 있는 초가 형태로 그려져 있고 건물도 두 채만 있는 것으로 봐 최초부터 이 건물들이 있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 상단에는 육상묘를 출범시키기 위해 설치한 임시 기구인 부묘도감(祔廟都監: 상례 기간을 마친 뒤 신위를 종묘 또는 사당에 옮겨 봉안하는 것)에 참여했던 총 책임자 좌의정 조문명(趙文命) 이하 18명의 관원 명단이 기록돼 있다.

영조가 추숭을 위한 꾸준한 노력 끝에 ‘육상(毓祥)’이라는 묘호(廟號)를 올렸던 시기는 영조 20(1744)년이었고, 육상궁으로의 추숭은 그로부터도 9년 후인 영조 29(1753)년 6월 25일에야 이뤄졌다. 그리고 삼락당이 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육상궁으로 추숭이 이뤄졌던 때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영조 29(1753)년 7월 16일이며, 풍월헌의 경우도 그 얼마 후인 영조 29(1753)년 8월 5일인 것으로 보아 이 건물들이 건립된 시기는 숙빈 최씨의 사당이 육상궁으로 승격될 즈음에 대대적으로 정비하면서 건립됐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왕세자는 먼저 환궁하고 임금은 이어서 육상궁에 나아갔다. 예를 행하고 삼락당에 나아가 이조참판 조명리에게 말하기를, “소령원(昭寧園)에 계명산(鷄鳴山)이 있는데. (…) 어찌 기이하지 하겠는가?” 했다([영조실록] 29(1753)년 7월 16일).

임금이 육상궁에 거둥했다. (…) 고유제(告由祭)가 끝나고 임금이 풍월헌에 나아가 원경하에게 명해 입시(入侍)하게 했다([영조실록] 29(1753)년 8월 5일).

실록에는 보이지 않던 송죽재를 [일성록]에서는 확인할 수 있다. 영조 51(1775)년 3월 15일 [일성록]은 당시 24세의 세손이었던 정조가 영조의 육상궁 수행시 “상께서 익선관(翼善冠)을 벗고 송죽재 뜰 가운데 엎드리셨으므로 나도 관을 벗고 백관도 모두 모자를 벗고 부복(俯伏)했다”고 기록했다. 이를 통해 송죽재 역시 영조 당시부터 있었던 건물로 추정할 수 있다.

실록과 [승정원일기]에서는 육상궁이 고종 15(1878)년 9월 27일과 고종 19(1882)년 8월 1일 등 발생한 두 번의 화재로 피해를 입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육상궁에 화재가 났을 때 냉천정(冷泉亭)의 어진(御眞)을 임시로 송죽정(松竹亭)에 봉안(奉安)했다”는 [고종실록] 19(1882)년 8월 1일 기록으로 볼 때 육상궁 내에 어진을 임시 봉안할 수 있는 정도의 격을 갖춘 송죽정이라는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 송죽정이 영조 당시의 송죽재와 같은 건물이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일부 건물, 화재 후 창의궁에서 이건한 듯


▎칠궁과 담장을 함께하고 있는 청와대 영빈관 전경. / 사진:이성우
한편 그보다 4년 전인 고종 15(1878)년 9월 27일 발생한 화재에 대해 입직승지로 하여금 화재가 난 육상궁 등을 살펴보고 오게 한 후 “육상궁에 불이 난 곳들을 다시 짓도록 호조에 분부하라”고 하교하고 있으며, 10월 5일 [승정원일기]에는 “호조의 경비가 매우 궁색하니 칸수를 예전과 같이 할 것 없이 60~70칸으로 정하도록 하라”는 고종의 또 다른 하교 기록이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봐 육상궁 정당과 냉천정 이외의 건물에서 화재 피해가 발생했음을 추정할 수 있으며, 당시의 재정 규모가 넉넉지 않아 개축하려는 건물의 규모를 축소하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고종 16(1879)년 8월 29일 [승정원일기]의 “육상궁 내외의 재실 이하를 개축하는 역사를 완료했다”는 기록을 통해 화재 당시 재실 영역이 피해를 입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송죽재도 규모를 줄여 송죽정이 됐을 수도 있으나 공식적인 근거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1720~1758년)와 부마 김한신(1720~1758년)의 혼인에 관한 기록인 [옹정십년임자 십이월 길례시자초간택위시일기(雍正十年壬子十二月吉禮時自初揀擇爲始日記)]를 살펴보면 송죽정과 송죽재에 대한 단서를 어느 정도 추정해볼 수 있다. 옹정은 청나라의 제5대 황제인 옹정제(재위: 1722~1735년)를 의미하며, 옹정 10년은 영조 8년인 1732년이다.

왕실의 혼인은 궁궐과 사가 사이에 별도의 장소를 정하여 혼례를 치르는 데 부마는 길례궁(吉禮宮)이라는 데서, 왕녀는 옹주궁(翁主宮)에서 머물게 한다. 당시 옹주궁은 대궁(大宮)이라 기록돼 있다. 이 대궁이 어느 곳인지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이 일기에서 10월 29일 대궁 안 삼락당에서 납채(納采: 신랑 측 혼주가 신부집에 보내는 편지)를 받았고, 11월 29일 “대궁 삼락당에서 전안(奠雁: 혼례 때 신랑이 기러기를 가지고 신부집에 가서 상 위에 놓고 재배하는 의식)을 마친 부마 김한신은 안사랑 송죽재에서 머물렀다”는 기록과 “12월 1일 부마와 공주가 대궁에 갔다. 대궁의 사묘(私廟)와 정빈 이씨 사당에 현례(見禮: 혼례 때 신부가 시댁 조상과 친척에게 처음으로 인사드리는 예)를 드린 후 길례궁으로 갔다”는 기록을 통해 볼 때 삼락당과 송죽재는 대궁 안에 있는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정빈 이씨는 영조의 장남인 효장세자(진종)의 생모이며 영조가 세제로 책봉되던 경종 1(1721)년 11월 16일 28세를 일기로 창의궁에서 사망했다. 영조 즉위 후 정4품 소원(昭媛)으로, 영조 1(1725)년 2월 27일 정1품 정빈(靖嬪)으로 추증됐으나, 연호궁(延祜宮)으로의 추숭은 정조가 즉위한 이후에야 이뤄졌으므로 그때까지의 사당은 창의궁에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대궁은 창의궁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견해가 사실이라면 지금 칠궁에 있는 삼락당과 송죽재는 당시의 재정 여건을 생각해 본다면 육상궁의 건물들이 화재를 겪은 뒤 복원될 때 창의궁으로부터 이건됐을 가능성도 있다고 추정된다. 다만 옮겨 온 건물 중 송죽재에는 한 건물에 ‘송죽재’와 ‘풍월헌’이라는 두 개의 현액이 걸리게 됐다. 그런데 송죽재는 옛 건물을 그대로 계승한 이름으로, 풍월헌은 화재로 인해 사라진 옛 풍월헌을 계승한 이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물 상단 대리석엔 영조 친필 오언시


▎영조 임금의 50세 생일잔치인 ‘조선시대 영조 오순 어연례(御宴禮)’ 재현 행사.
냉천정은 본래 육상궁의 부속 건물로서 영조의 어진을 봉안한 건물이다. 영조는 재위 기간에 자신의 어진을 여러 번 그리게 했다. 이 가운데 61세(1754년)와 81세(1774년) 때에 그린 어진은 육상궁 안 봉안각에 봉안했다. 영조가 자신의 어진을 육상궁에 걸도록 한 것은 바빠서 자주 오지는 못하더라도 곁에서 늘 모신다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순조 25(1825)년 냉천정의 어진을 봉안하던 곳에 비가 새어 개수했고, 순조 31(1831)년 순조는 승지를 냉천정에 보내 어진을 잘 받들어 살펴보게 한 바 있다. 이를 통해 볼 때이 봉안각은 이름을 순조(純祖: 1800~1834년) 때 냉천정으로 바꾼 것으로 보이며,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특히 순조 8(1808)년 11월 6일까지는 봉안각이, 순조 9(1809)년 3월 10일부터는 냉천정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그 어간 언제쯤인가에 바뀌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고종 19(1882)년 8월 육상궁이 화재로 소실됐을 때 신위를 모신 정당은 전소됐으나, 냉천정의 영조 어진은 무사해 이를 육상궁 내 송죽정(松竹亭)에 임시로 봉안했다가 환안(還安)한 바 있으며 이 당시 소실된 육상궁 건물들은 이듬해 6월에 복구됐다.

냉천정 뒤쪽에 있는 냉천(冷泉)은 육상궁을 지을 때 발견된 셈인데 제사 때 이 물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 물은 흘러서 냉천정 남쪽 아래 뜰에 있는 네모난 모양의 연못으로 모인다. 연못에 ‘자연(紫淵)’이라는 각자(刻字)는 ‘신선 세계의 연못’을 뜻한다.

냉천 우물 상단의 대리석에는 냉천정에 대한 영조의 친필 오언시가 각자돼 있다. 유교 국가 조선의 왕실은 특히 선대왕의 위업을 간직하고 계승한다는 뜻에서 역대 임금의 글씨를 보존하는 데 각별한 힘을 쏟았다. 그 보존 방식의 하나가 임금의 글씨를 대리석에 새기는 것이었다. 오언시의 서두와 말미에 ‘御墨雲翰(어묵운한)’, ‘峕强圉協洽病月上浣也(시강어협흡병월상완야)’라고 돼 있어 ‘임금이 지은 글이며, 때는(峕) 정미(强圉協洽)년, 즉 영조3(1727)년 3월(病月) 상순(上浣)’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1725년 숙빈 최씨의 사당이 세워진 지 어언 300년. 그동안 허가되거나 극히 제한된 사람만 출입이 가능했던 칠궁이 이제는 사전 신청만 하면 누구나 출입이 가능한 장소가 됐다. 영조의 효심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사당이었기에 대일 항쟁기와 광복 이후 혼란기를 겪으면서도 큰 변화 없이 세월을 이겨온 것은 아닐까?

※ 이성우 - 전 청와대 안전본부장.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용인대에서 경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대통령경호실에서 25년간 근무했다. 2007년 발간된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대표 저자이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같은 해 ‘대한민국문화유산상’ 문화재청장 감사패를 받았다. 현재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개정판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101호 (2020.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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