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Home>월간중앙>히스토리

[권경률의 사랑으로 재해석한 한국사(10)] 가짜로 몰려 죽임당한 왕, 출생의 비밀 

우왕 아버지는 공민왕일까 신돈일까 

왕비 잃어 후사 걱정하던 공민왕, 신돈의 비첩 품어
이성계파, 풍문을 사실로 만들어 고려왕조에 결정타


▎MBC 사극 [신돈]에서 신돈 역을 맡은 배우 손창민. 신돈과 관련해서는 지금까지도 신승과 요승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 사진:MBC
엄마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산에 나물 캐러 가면서 흥얼흥얼 콧노래를 불렀다. 바구니 들고 따라가는 아이가 해맑게 웃는다. 신돈은 퍼뜩 잠에서 깼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꿨던 그 꿈이다.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모자의 기억이다. 그 장면이 어머니 기일마다 꿈이 돼 찾아온다. 이것은 내가 꾸는 엄마 꿈일까, 엄마가 꾸는 내 꿈일까?

정신 차리고 옆을 돌아보니 비첩(婢妾) 반야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 왕의 사부가 돼 권력을 쥔 신돈은 아름다운 여종과 사랑에 빠졌다. ‘반야(般若)’는 그가 여종에게 붙여준 이름이었다. 범어로는 ‘프라즈나(prajna)’, 인간이 불법(佛法)을 깨달아야 얻을 수 있는 근원적인 지혜를 뜻한다. 신돈은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을 받들었다. 반야는 그가 지향하는 궁극의 경지다. 그만큼 이 여인을 사랑한 것이다.

그녀의 신분이 종이라는 점도 끌렸다. 최고 권력자가 된 신돈이지만 어머니는 사찰의 종이었다. 반야만 보면 그리움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절집에서 고생스럽게 일하면서도 자신에게는 티 내지 않고 환하게 미소 짓던 엄마를 엿본 것이다.

절집 여종이 낳은 승려, 임금의 사부가 되다


▎북한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에 있는 공민왕릉. 부인인 노국공주와 함께 쌍분을 이루고 있다.
신돈은 깊이 잠든 여인을 지긋이 들여다봤다. 반야의 얼굴 위로 문득 공민왕이 겹쳐졌다. 노국대장공주가 세상을 떠나자 임금은 깊은 슬픔에 잠겼다. 그러더니 신돈의 거처로 발걸음이 잦아졌다. 공민왕은 반야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 왕비를 잃은 상실감을 달래고 싶으리라.

사실 고려 땅에서 주군을 위해 첩을 내놓는 것은 그리 낯선 일이 아니다. 게다가 반야가 임금의 사랑을 받아 왕자라도 낳는다면 더할 나위 없는 경사다. 하지만 너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아니, 무사할 수 있을까? 정치는 생물이다.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른다. 나와 임금의 관계가 틀어져 서로 원수가 된다면, 네 운명은 어찌 될까? 반야는 세상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신돈은 피식 웃었다. 너는 지금 누구의 몽환 속을 거닐고 있는 것이냐? 그의 가슴에 헛헛한 그리움이 차올랐다.

신돈은 경상도 영산(창녕) 출신의 승려였다. 아버지는 누군지 모르고 어머니는 이 고장 사찰인 옥천사 여종이었다. 그는 어깨너머로 불경을 외우고 홀로 참선을 하면서 깨달음을 얻었다. 장성하자 바리때를 들고 개경으로 향했다. 신돈의 설법에 장안이 들썩였다. 신승(神僧)이 나타났다!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설법하면서 노골적으로 권문세족(權門勢族)을 질타했다. 백성들의 것을 빼앗아 권력과 부를 쌓는다는 비난이었다. 청중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준 것이다. 속이 후련한 설법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개경의 권문세족은 이 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문벌 귀족 사회, 무신 정권, 원나라 간섭기를 거치며 개경에 뿌리내린 명문가들이었다. 고려 후기에는 그네들이 온 나라의 권력과 부를 거머쥐고 있었다. 권문세족으로서는 신돈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개경의 큰 사찰들도 견제에 나섰다. 자신들의 권위와 영향력이 ‘땡중’ 때문에 깨질까 봐 전전긍긍했다. 얼마 뒤 개경에 신돈에 관한 풍문이 나돌았다. 허황된 말로 과부들을 꾀어 정을 통한다는 것이었다. 그를 둘러싸고 신승이냐 요승(妖僧)이냐,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이 떠들썩한 논쟁은 임금의 귀에까지 흘러 들어갔다. 고려 31대 공민왕은 1356년 쌍성총관부를 공략해 철령 이북 지역을 회복하고 원나라 간섭에 종지부를 찍었다. 대외적으로 큰 숙제를 해결하자 그는 내치로 눈길을 돌렸다. 왕권을 우습게 아는 권문세족을 손보려고 한 것이다. 임금과 측근 몇몇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개혁 군주에게는 파트너가 필요한 법이다. 권문세족에게 휘둘리지 않고 변화의 구심점 노릇을 해줄 인재가 어디 없을까?

“대대로 벼슬한 명문거족들은 가까운 무리끼리 얽혀 있어 서로 감싸준다. 또 초야에 묻혀 있던 신진기예들도 일단 귀한 신분이 되면 명문거족과 혼인하고는 애초의 생각과 행동을 죄다 던져버린다. 유생(儒生)들은 강직하지 못한 데다가 개인적인 친소(親疏)만을 따져 당파를 이룬다. 이 세 부류는 모두 등용하기에 부적합하다.”([고려사] 열전 ‘신돈’)

신돈의 등장은 그래서 임금의 관심을 끌었다. 공민왕은 이 풍운의 승려를 불러들였다. 불도를 논한다는 명목으로 이야기를 나눠보니 과연 비범한 인물이었다. 신돈은 사시사철 해진 장삼 한 벌로 지냈다. 속세에 초연한 도승의 풍모에 임금은 그를 우러러보기 시작했다. 정결한 의복을 선물했는데 머리 위까지 받들어 경건하게 바쳤다. 욕심도 없고 얽매임도 없으니 장차 큰일을 맡겨보면 어떨까? 왕은 신돈을 발탁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권문세족 대신들이 가만있지 않았다. 원로대신 이승경은 “나라를 어지럽힐 자는 필연코 이 중놈일 것”이라며 배척했다. 당대 최고의 무장 정세운은 아예 ‘요승’이라 낙인찍고 죽이려고 했다. 공민왕은 신돈을 피신시켰다. 풍운의 승려는 머리를 기르고 신분을 숨긴 채 방랑했다. 신돈이 돌아온 것은 1364년, 맹장 정세운이 죽은 뒤의 일이었다. 공민왕은 그를 ‘사부(師傅)’라고 부르며 국정에 관한 의견을 물었다. 바야흐로 신돈의 시대가 오고 있었다.

왕비 잃고 상심한 왕 대리해 개혁 칼춤


▎서울 종묘의 망묘루와 향대청 사이에 있는 공민왕 사당에는 공민왕(오른쪽)과 노국대장공주의 영정이 있다.
1365년 2월 노국대장공주가 난산 끝에 세상을 떠났다. 공민왕은 실의에 빠졌다. 원나라 공주였지만 고려 임금의 충실한 아내로 살았고 정치적으로 방패막이가 돼준 여인이었다. 빈자리가 컸다. 게다가 대를 이을 자식까지 잃었다. 공민왕은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누웠다. 임금은 사부에게 자신을 대신해 국정을 맡아 달라고 간청했다. 국정 대리인이라니 말도 안 된다며 승려는 거듭 사양했지만, 공민왕은 막무가내였다. 신돈은 조건을 달았다. 다른 사람이 헐뜯어도 자기를 절대적으로 믿어달라고 요구했다.

“일찍이 듣자오니 임금과 대신들은 참소와 이간질을 잘 믿는다던데, 이런 일을 하지 않으셔야 세상이 복되고 이롭게 될 것입니다.” “대사는 나를 구하고 나는 대사를 구할 것이며, 다른 사람의 말에 미혹되는 일이 절대 없을 것을 부처와 하늘 앞에 맹세하노.”([고려사] 열전 ‘신돈’)

공민왕이 맹세문까지 쓰자 신돈은 수락했다. 임금의 무한 신뢰를 등에 업고 국정 대리인이 된 것이다. 곧 최고위직 벼슬들이 내려졌다. 진평후, 취성부원군, 벽상삼한삼중대광, 판중방감찰사사, 제조승록사사, 판서운관사 등 온갖 계급장을 달았다. 권력을 틀어쥐자 신돈은 대대적인 숙청에 착수했다. 발단은 인신공격이었다. 당시 그는 측근 김란의 집에 기거했는데, 이 자가 딸 둘을 바쳤다는 소문이 퍼졌다. 상장군 최영 등이 이를 책망하자 신돈은 즉각 반격했다. 오히려 그들이 임금과 자신을 이간질하고 충신들을 모함했다는 것이다.

공민왕은 대리인의 손을 들어줬다. 찬성사 이구수 등은 머리를 깎여 산사로 쫓겨났는데 신돈이 보낸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고 바다에 던져졌다. 최영은 계림윤으로 좌천됐다가 유배를 떠났다. ‘흥왕사의 변’과 ‘덕흥군의 난’을 진압하고 강화도에 나타난 왜구를 소탕한 공이 참작된 것이다. 덕분에 목숨은 건졌지만, 이 유배는 1371년 신돈이 죽을 때까지 풀리지 않았다. 그 밖에 시중 경천흥, 영도첨의 이공수, 판삼사사 이수산, 찬성사 송경, 동지밀직사 왕중귀 등도 파직당했다. 대부분 권문세족 대신들이었다.

신돈은 자기를 비방하는 자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인정사정없이 쫓아내고 잔인하게 복수했다. 빈자리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인사들로 채웠다. 관리들은 신돈을 두려워하면서 잘 보이려고 했다. 그의 거처로 백관들이 몰려들었다. 나랏일을 보고하고 지시를 받기 위해서였다. 거리에는 이를 빗댄 도참설이 떠돌았다. ‘진사(辰巳)에 성인(聖人)이 출현한다’는 것이었다. 신돈이 개경으로 돌아온 1364년이 갑진년이고, 정권을 잡은 1365년이 을사년이었다. 기현·최사원·이춘부·김란 등 측근들은 그 성인이 신돈이라고 의기양양하게 떠벌렸다.

신돈의 권세는 하늘을 찔렀다. 그는 임금과 동격이었다. 격구 경기가 열리면 공민왕과 신돈은 임시로 가설한 누대에 오르고, 관리들은 그 아래에 장막을 치고 자리 잡았다. 신돈이 말을 타고 장막 앞에 이르면 모든 벼슬아치가 기립했다. 그는 말 위에서 채찍을 늘어뜨린 채 이야기를 나눴다. 관리들의 우두머리인 시중이 술을 권하면 신돈은 마시다가 남은 것을 돌려줬다. 시중은 어쩔 수 없이 받아 마셨다. 신돈의 명성은 멀리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원나라는 그를 ‘권왕(權王)’이라 불렀고, 명나라에서도 ‘상국(相國)’이라고 칭했다.

권문세족의 역습, 신돈 잡으려 성추문 유포


▎경기도 고양시 원당에 있는 공양왕의 고릉(高陵).
이쯤 되면 왕권을 위협하는 수준이다. 그런데도 공민왕은 자신을 낮추고 신돈을 떠받들었다. 임금은 정치인이다. 공민왕은 권문세족의 폐단을 개혁하지 않으면 고려가 멸망의 길을 걸을 것이라고 봤다. 단, 임금은 함부로 칼을 휘두를 수 없었다. 혼맥 등으로 왕실과 권문세족이 복잡하게 얽혀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욕심도, 얽매임도 없어 보이는 신돈을 내세웠다. 자신의 대리인으로 하여금 권문세족과 대리전을 벌이게 한 것이다.

신돈은 대숙청으로 권문세족의 정치적 영향력을 위축시켰다. 다음은 경제 기반을 무너뜨리는 작업이었다. 왕에게 건의해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한 것이다. 전민변정도감은 권세가들이 부당하게 차지한 경작지와 노비를 바로잡는 기관이었다. 이런 일은 실행 의지를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 그는 직접 전민변정도감 판사가 되어 포고문을 붙이고 으름장을 놓았다.

“최근 국가 기강이 무너져 백성의 재산을 탈취하는 일이 유행을 이룬다. 나라의 토지와 노비도 권세 있는 가문들이 거의 다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병역·부역·조세를 피해 도망한 자들을 숨겨 놓고 농장을 크게 일으킨다. 양민을 노비로 만드는 경우도 많다. 이제 도감을 설치해 스스로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를 주겠다. 개경은 15일, 각 도(道)는 14일이 기한이다. 기일이 지난 후 발각되는 자는 그 죄를 조사해 다스릴 것이다.”([고려사] 열전 ‘신돈’) 신돈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포고령이 나오자 많은 권세가들이 빼앗거나 무단으로 점유한 논밭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줬다. 또 억울하게 노비와 천민이 된 자들은 전민변정도감에 호소하면 모두 양민 신분을 회복시켜줬다. 백성들은 신돈을 가리켜 “성인(聖人)이 나왔다”라고 칭송했다.

하지만 권문세족은 이를 갈며 역습에 나섰다. 그들은 신돈의 여자 문제를 건드리는 자극적인 책략을 세웠다. 승려로서 범해서는 안 되는 게 색계(色界)다. 신돈을 여색 밝히는 ‘땡중’으로 만들면 임금의 무한 신뢰도 허물어질 것이다. 때마침 신돈은 왕궁 근처에 큰 집을 마련했다. 그는 집 북쪽 뜰에 여러 겹문을 지나는 별실을 짓고 새 거처로 삼았다. 이 별실이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음행(淫行)으로 얼룩진 추잡한 소문이 돌았다. 조선 시대까지 회자될 만큼 강렬한 성 추문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신돈은 관리들의 처첩 중에 용모가 뛰어난 여인이 있으면, 사소한 트집을 잡아 그 남편을 감옥에 가뒀다. 그리고는 연통을 넣어 부인이 직접 억울함을 호소하러 오게 했다. 신돈의 집에 와서 대문을 들어서면 말과 시종을 돌려보냈다. 또 중문에서는 종들을 보내게 했고, 내문으로는 안내자도 없이 부인 혼자 들였다. 신돈은 별실에 이부자리를 깔고 앉아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부인네가 들락거리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었다는 것이다(성현, [용재총화] ‘신돈의 음란한 행실’).

이 성 추문에는 신돈을 무너뜨리려는 세력의 입김이 담겨 있었다. 다만 전혀 사실무근의 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로 신돈은 많은 첩을 뒀다고 한다. 그것은 벼슬아치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그에게 미인계를 쓴 자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관직을 얻기 위해, 죄를 면할 요량으로 딸이나 여종을 들여보낸 것이다. 뒷말이 무성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겹문이 여럿 딸린 밀실은 야한 상상을 자극하기 마련이다. 누군가 조금만 입김을 섞어도 소문은 더욱 지저분해지고 떠들썩해질 터였다.

자극적인 책략은 먹혀들었다. 신돈의 권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추잡한 소문은 공민왕의 귀에도 들어갔다. 임금은 신돈을 불러 축첩(畜妾) 문제를 따졌다. 예상치 못한 추궁에 당황했는지 그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도력(道力)을 기르기 위해 부녀자들을 가까이했다는 것이다. 신돈은 부처와 하늘에 맹세할 수 있다며 측근 이춘부를 불러 서약서까지 작성했다. 그러나 공민왕의 심중에는 이미 불신이 싹트고 있었다.

도읍 옮겨 반격하려던 신돈, 반역죄 몰려 비참한 최후


▎KBS 사극 [정도전]에서 힘겨루기를 벌이고 있는 이성계(유동근 분, 왼쪽)와 최영(서인석 분). / 사진:KBS
권문세족의 반발과 임금의 변심 속에서도 신돈은 물러서지 않았다. 형세가 불리해지면 오히려 정면 돌파를 택했다. 1369년 그는 가장 근본적인 개혁을 들고나왔다. 바로 천도(遷都), 도읍을 옮기는 것이었다. 오랜 세월 개경에 뿌리내린 권문세족으로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다. 그것은 명문거족들의 기반을 송두리째 뽑아내고 새로운 세력으로 대체하겠다는 뜻이었다.

12세기에도 비슷한 시도가 있었다. 묘청이 개경 문벌 귀족에 맞서 서경(평양) 천도를 도모하다가 정변을 일으켰다. 천도의 근거로 삼은 것은 [도선비기]의 한 대목이었다. 도선 국사는 개경이 고려의 도읍으로 적합하지만, 수백 년이 지나면 땅의 기운이 쇠한다고 예언했다. 신돈 역시 이 풍수설을 들어 임금에게 천도를 주청했다. 과연 후보지는 어디였을까?

신돈은 2년 전 서경 천도를 잠시 모색했는데 이번에는 충주를 점찍고 강력히 밀어붙였다. 국토의 정중앙에 위치한 사통팔달의 요지를 택한 것이다. 개경 권문세족의 기반을 뿌리 뽑고 지방 향리들도 치우침 없이 통제하겠다는 의도였다. 고려 지배층 전체를 대상으로 전면적인 개혁을 선포한 셈이다. 하지만 공민왕은 점진적으로 개혁하기를 바랐다. 임금이 주저하자 신돈이 설득에 나섰다. 개경은 바다와 인접해 적의 침입에 쉽게 노출된다는 논리였다. 왜구가 강화도까지 쳐들어오는 마당에 왕으로서 흘려듣기 어려웠다.

공민왕은 충주·서경·금강산을 둘러보겠으니 순행(巡行)을 준비하라는 영을 내렸다. 임금이 직접 살펴보고 도읍을 옮길지 말지 결정하겠다는 것이었다. 신돈은 도로를 정비하고 별궁을 짓는 등 순행 채비를 서둘렀다. 권문세족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판사천감 진영서 등이 왕에게 글을 올렸다. 그들은 하늘을 보고 길흉을 점쳐서 군주의 마음을 돌리려고 했다.

“최근에 태백(太白)이 낮에 나타나고 있어 조짐이 심상치 않습니다. 게다가 올해는 기근까지 들었으니 조용히 있으면 길하고, 움직이면 흉할 것입니다.”([고려사] 열전 ‘신돈’)

태백은 금성을 말한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에는 금성이 ‘살벌(殺伐)’, 곧 죽이고 정벌하는 것을 주관하는 별이라고 기록돼 있다. 그럼 금성이 낮에 나타나 빛나거나 움직이면 어떻게 될까? 반고의 [한서(漢書)] 천문지(天文志)는 천하에 혁명이 일어나서 백성이 왕을 바꾼다고 했다. 금성이 태양, 즉 임금과 밝기를 다투므로 반란이 일어날 조짐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듣고 싶은 것을 들으려고 한다. 그러잖아도 순행이 찝찝했던 공민왕은 얼씨구나 하고 받아들였다. 왕은 즉각 천도에 관한 논의와 준비를 중단시켰다.

의심은 마음의 씨앗이다. 한번 심어지면 저 홀로 쑥쑥 자란다. 금성이 낮에 나타나는 것은 반란의 조짐이란다. 공민왕은 신돈에게서 반역의 냄새를 맡았다. 그렇다고 당장 쳐내기는 어려웠다. 조정 안팎에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명절마다 자기 아버지 묘에 술과 음식을 바친 사람에게 벼슬을 내린 신돈이다. 이런 자들은 임금보다 그를 더 섬겼다. 무엇보다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신돈은 문수보살을 숭상했다. 문수회를 열면 부호들로부터 시주를 받아 기근을 만난 유랑민들에게 나눠줬다. 백성들은 ‘문수보살의 화신’이라고 찬양했다.

하지만 파국은 예정돼 있었다. 1371년 임금의 능행(陵行)을 노려 신돈 측이 공민왕을 시해하려 했다는 밀고가 들어왔다. 신돈은 붙잡혀 수원으로 유배 갔다. 문수보살의 화신을 죽이려면 절차를 잘 밟아야 한다. 중서문하성, 도평의사사, 사헌부에서 신돈의 극형, 가산 몰수, 일당 처단 등을 일사천리로 제기했다. 공민왕은 짐짓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윤허했다.

마침내 칼날이 번뜩였고 신돈의 목이 떨어졌다. 그의 사지는 잘려 각 도에 돌려졌고, 머리는 개경 동문에 내걸렸다. 기현·최사원·이춘부·김란·고인기·진윤검·이운목 등 신돈 추종자들도 목숨을 잃고, 귀양을 가고, 관직에서 쫓겨났다. 그 가족들도 죽거나 노비로 끌려갔다. 무려 수백 명이 화를 입었다. 같은 시각 경천흥·최영 등 신돈이 쫓아낸 권문세족 유력자들은 유배에서 풀려 개경으로 향했다. 신돈의 집권은 그렇게 미완(未完)의 개혁으로 남은 채 6년 만에 막을 내렸다.

“왕은 내 아들” 밝힌 계집종, 임진강에 던져져

공민왕은 왕권에 도전하는 권문세족을 억누르고 누적된 폐단을 일부 개혁하기 위해 신돈을 대리인으로 발탁했다. 그러나 신돈이 부분적인 개혁을 넘어 지배층 전체를 수술하려 하자 제거했다. 그들 지배층이 한편으로는 고려왕조를 떠받치는 기둥이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신돈은 공민왕에게 실컷 이용당하고 비참하게 버려졌다. 그렇다고 억울할 건 없다. 그가 고려왕조를 끝장내는 복수의 씨앗을 남겼기 때문이다.

1365년 노국대장공주가 난산 끝에 세상을 떠나자 공민왕의 후사 문제가 지상과제로 떠올랐다. 신돈도 왕자 탄생을 기도하기 위해 문수회를 여러 차례 열었다. 하지만 자식을 얻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남녀가 교합하는 것이었다. 신돈은 아름다운 비첩 반야에게 임금을 받들라고 명했다. 첩이자 여종인 그녀는 주인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결실로 아들이 태어났다. 신돈은 이 아이에게 ‘모니노(牟尼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석가모니의 종이라는 뜻이었다. 모니노의 존재는 당분간 비밀에 부쳐졌다.

공민왕은 틈만 나면 신돈의 집으로 행차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제 자식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발길을 하기 어려울 때는 호위무관을 시켜 금화나 선물을 보냈다. 모니노가 그것을 받고 뛸 듯이 기뻐했다는 말을 들으면 아비의 마음도 흐뭇했다. 반야에게도 예우를 했다. 매달 쌀 30석을 하사한 것이다([고려사] 세가 ‘공민왕 17년’).

1371년 신돈이 반역 혐의로 유배를 떠나자 공민왕은 모니노를 보호하기 위해 은밀히 사람을 보냈다. 신돈을 처형한 다음에는 자신의 유일한 혈육을 궁으로 불러들여 왕실의 큰 어른인 명덕태후에게 맡겼다. 임금은 서둘러 후계 구도를 공식화했다. 먼저 수시중 이인임에게 왕자를 얻게 된 경위를 밝히며 잘 보필해달라고 당부했다. 유학자 이색에게는 새 이름을 지어달라고 청했다. 이색은 여덟 자를 써서 바쳤는데 공민왕은 그중 ‘우(禑)’로 정했다.

1374년 공민왕은 자제위 홍륜과 환관 최만생 등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당했다. 이 정변을 진압한 이인임은 열 살짜리 왕자 우를 즉위시키고 조정의 실권을 거머쥐었다. 단, 우왕은 반야가 아니라 선왕의 후궁 한씨 소생으로 공표했다. 한씨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는데 덕분에 순정왕후로 추존됐다. 자식을 빼앗긴 반야는 억장이 무너졌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정치는 비정하다. 저들은 입을 막으려 할 것이다. 이에 신돈의 비첩은 스스로 궁에 찾아가 “우는 나의 소생”이라고 밝혔다([고려사] 세가 ‘공양왕 1년’).

우왕의 후견인 이인임은 사람을 시켜 반야를 임진강으로 끌고 갔다. 가련한 여인은 꽁꽁 묶인 채 강물에 던져졌다. 그러나 입막음은 무위로 돌아갔다. 새 왕이 신돈의 비첩 소생이라는 소문이 세간에 일파만파 번진 것이다. 우왕이 누구의 핏줄인지를 놓고 공민왕이냐 신돈이냐, 의논이 분분했다.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면 힘이 생긴다. 게다가 출생의 비밀은 더욱 힘이 세다. 풍문은 고려를 뒤흔드는 태풍의 눈이 됐다. 거센 비바람을 불러일으키더니 마침내 나라를 통째로 바꿔버렸다.

1388년 위화도회군을 단행한 이성계 일파는 우왕을 왕좌에서 쫓아냈다. 뒤를 이어 우의 아들 창(昌)이 즉위했지만, 부자는 벼랑 끝에 몰렸다. 이인임도 죽고, 최영도 죽었다. 고려 왕실을 지켜줄 방패막이가 사라진 것이다. 1389년 이성계·정도전·조준 등이 흥국사에 모여 창왕을 쫓아내고 새 임금을 옹립하기로 결의했다. 폐가입진(廢假立眞)! 가짜 왕을 내쫓고 진짜 왕을 세운다는 것이었다. 우왕과 창왕은 공민왕이 아닌 신돈의 핏줄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궤변이었다. 공민왕이 제 자식인지 아닌지 분간 못 했을 리 없다. 원래 영웅호걸들은 낯가죽이 두껍고 속마음이 시커멓다고 했던가(이종오, [후흑학]). 이성계 일파는 뻔뻔하게도 세간의 풍문을 내세워 역성혁명으로 가는 이정표를 세웠다. 결국 우와 창 부자는 목숨을 잃었고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이 즉위했다. 이 사건은 기울어가는 고려왕조에 결정타를 날렸다. 멀쩡한 국왕을 가짜로 몰아세워 죽인 순간 고려의 정통성이 끝장난 것이다. 고려왕조는 호흡기를 단 채 몇 년 더 연명하다가 1392년 멸망한다.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사람을 읽고 생각하고 쓰면서 역사의 행간을 채워나간다. 팟캐스트·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2015) 등을 썼다.

202101호 (2020.12.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