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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의 서양사 현장르포 - 승자의 조건, 패자의 교훈(25)] 로마 황제가 암살한 ‘최후의 로마인’ 아에티우스 

훈족 물리친 명장, 권력 콤플렉스에 스러지다 

유년시절 이민족 경험 바탕 ‘오합지졸’ 로마군 재조직
숙청으로 자리 지킨 황제, 6개월 만에 반대파에 암살


▎아에티우스가 암살당한 지 25년 만에 서로마는 멸망한다. 이탈리아의 한 역사 동호회 회원들이 기원전 44년 카이사르 암살 순간을 재현하고 있다. / 사진:REUTERS/연합뉴스
한 세대 전 흑백필름 시대, 국민학생이었던 필자가 가졌던 의문이 몇 개 있다. 한국사에 관한 부분이다. 첫째는 임진왜란 때다. 원균은 어떻게 이순신을 누르고 삼도수군통제사가 됐을까? 50대 이상 장년에 접어들면 인간의 내면을 읽을 수 있다. 여기저기 평판도 들리고, 몇 마디 대화만으로도 인물 됨됨을 가늠할 수 있다. 선조 때 사관은 원균을 “사납고 거친 위인”이라고 평가했다. 이미 5년간 이어진 환란으로 나라가 엉망일 때(1597년) 선조는 왜 원균 같은 인물을 중용했을까?

둘째는 6·25전쟁 중 임시수도 부산에서 터진 정치파동이다. 이승만 대통령(이하 이승만)이 헌병을 동원해 직선제 개헌에 반대하던 야당 국회의원 50여 명을 강제 연행한 사건이다. 그중 일부에겐 공산당 연루 혐의를 씌웠다. 이승만은 사건을 벌인 지 한 달여 뒤 이른바 ‘발췌 개헌’으로 불리는 개헌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국회의사당 일대를 경찰로 포위한 채였다.

필자는 이승만을 천하의 독재자로 비난하거나, 건국의 아버지라고 찬미할 생각은 없다. 어려운 시대에 어려운 일을 맡은 당시 한국인의 초상화 그 자체로 해석할 뿐이다. 다만 전쟁 중인데도 야당을 ‘북한보다 더 무서운 원수’로 여긴 배경과 사정이 궁금했다.

전쟁 때도 멈추지 않는 정쟁


▎프랑스 역사가 프랑수아 기조의 저서(1870~1875년 연작)에 실린 카탈라우눔 전투 삽화. 오늘날 프랑스 북동부 평원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다. / 사진:위키피디아
두 가지 의문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 건 40여 년 전 국민학생 시절이 전쟁공포로 점철된 시대였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매달 학교 운동장 구석 미루나무 아래서 한 민방위 훈련을 지금도 뚜렷이 기억한다. 북한 공습경보 4단계를 잘 못 외워 힘들었던 기억도 난다. 북에서 날아온 ‘삐라’(대남전단)를 학교에 주워가면 도덕 점수를 더 받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원균과 이순신, 이승만과 정치파동에 관한 얘기가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2020년 연말 한국의 현실을 보면, 국민학생 때 의문이 풀린다. 코로나19와 주택 문제로 난리가 나도 정치권 관심은 ‘검찰개혁’에 꽂혀 있다. 반면 바이든의 한반도 정책, 한·중·일 정상회담에 참석하지 않는 일·중 수뇌 문제 등 우리 운명에 직결되는 문제는 해외토픽 수준에 머무른다. 전쟁 중에 원균을 임명하고, 정치파동을 벌였던 때와 다르지 않다. 지금 생각해보면 한국사의 결정적 순간마다 되풀이돼 온 ‘한국적 비극’이었을지 모른다. 어린이도 공감할 법한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웠을 뿐이다.

‘최후의 로마인’(The last of the Romans). 로마의 건국정신과 이상을 지킨 마지막 인물이란 말이다. 간단한 말인 듯해도 복잡하다. 이유는 로마의 멸망 시기를 언제로 잡는지에 대한 문제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로마사는 쌍둥이 로물루스와 레무스(Romulus and Remus)를 시조로 한, 기원전 753년 로마 왕국에서 시작된다. 이후 기원전 509년 로마는 독재자 왕을 쫓아낸 뒤 공화정 체제로 들어간다. 남성 시민 개개인에게 권력을 부여한, 그리스 폴리스와 같은 정치체제다. 기원전 27년 로마 왕국과 로마 공화정의 중간 형태인, 제정 로마에 들어간다. 초대 황제는 아우구스투스다. 4세기 로마 제정은 다시 두 개의 나라로 분리된다. 현재의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즉 현재의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한 비잔틴 대제국이다. 역사학자들은 이탈리아 로마를 서로마, 콘스탄티노플 비잔틴을 동로마라 부른다.

서로마는 476년 게르만 용병대장에 의해 멸망한다. 동로마 비잔틴은 서로마보다 1000년 이상 지속한다. 이슬람 오스만 튀르크의 술탄 아메트(Sultan Ahmet)가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한 것은 1453년이다.

이렇게 로마 역사는 ‘왕정-공화정-제정-서로마-동로마’로 크게 다섯 번의 변화를 맞이한다. 한국인이 배우는 세계사는 보통 서로마 종언, 즉 서기 476년을 로마의 최후로 풀이한다. 가톨릭 중심의 서유럽 역사관에 따른 해석이다. 오해하기 쉬운데, 가까울수록 더더욱 잔인하다. 같은 기독교 형제지만, 일단 딴 살림을 차리면서 적보다 더 살벌한 관계로 돌아선다. 서유럽은 동로마의 비잔틴을 미신적이고 원시적인 이교도로 규정한다. 현재 이슬람 세계의 이란 시아(Shia)와 사우디아라비아 수니(Sunni) 사이의 갈등에 비견할 만하다.

‘최후의 로마인’이란 말은 영국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이 쓴 책 [로마 흥망사](1776)에 처음 나온다. 기번은 서로마의 멸망을 유럽에서의 고대와 중세를 가르는 분기점으로 풀이했다. 또 서로마와 동로마를 분리해 로마사를 분석했다. ‘고대 로마=이탈리아의 서로마’라는 구도를 처음 만든 셈이다.

기번의 관점에서 최후의 로마인은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Flavius Aetius, 391~454) 장군이다. 451년 오늘날 프랑스 북동부 지역인 카탈라우눔 평야에서 아틸라(Attila)가 이끄는 훈족을 물리쳤다. 서로마를 지킨 공로는 분명하지만, 최후의 로마인으로 거론되는 다른 인물도 많다. 공화정을 명분으로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기번은 아에티우스야말로 최후의 로마인이라고 말한다. 왜일까?

크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무엇보다 적어도 반세기 정도 로마의 멸망을 늦춘 공적이 크다. 4세기 중반 이후 로마는 변방 국경선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 즉 로마 대제국의 평화는 3세기까지에 그친다. 근본적인 원인은 ‘항상’ 내부에 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변방 이민족들이 로마 국경선을 뚫고, 아예 수도 주변까지 공격해오는 과정에서 대제국 전체가 위기에 접어든다.

아에티우스가 아틸라를 물리친 지 25년 만인 476년, 로마는 결국 게르만계 오도아케르(Odoacer)에 의해 멸망한다. 아틸라의 훈족과 오도아케르의 게르만족 모두 로마의 적이다. 그러나 유럽사라는 큰 그림에서 보면 다르다. 오도아케르는 변방의 야만족이기는 하지만, 유럽 내부에서 배출한 인물이다.

훈족의 아틸라는 다르다. 유라시아를 잇는 평원에서 밀려온, 아시아 이민족이 훈족이다. 따라서 아에티우스는 아시아로부터 유럽을 지킨 인물이란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로마의 생명을 연장시켰다는 점만이 아닌, 아시아로부터 유럽을 지킨 영웅이기도 하다.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패한 지 2년 뒤 아틸라가 사망하면서 훈족의 위협도 사라진다. 기번이 ‘아에티우스=최후의 로마인’으로 추앙하는 배경이다.

둘째는 아에티우스의 출신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아에티우스는 로마인 이전에 이민족 출신이다. 흑해 주변에서 군사 지도자로 활약하던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이탈리아를 기반으로 한 로마인이 아닌, 오지·변방 출신 이민족 로마인인 셈이다. 그러나 425년, 34세 이후 아에티우스는 로마의 최고 사령관으로서 각종 전투에 참전한다. 당시 로마는 이미 뇌경색 상태에 들어서 있었다. 대제국 핵심 파워인 로마군도 재정 파탄 탓에 오합지졸로 전락한다. 그러나 아에티우스는 뛰어난 용병술과 지도력으로 로마군의 영광과 권위를 지켜갔다. 가는 곳마다 승리하면서 이름뿐인 황제를 능가하는 파워를 가진다. 이민족 출신 장군이 로마의 구원투수로 등장한 셈이다.

뇌사 직전의 서로마 마지막 수도


▎라파엘로의 1514년 작 ‘레오 1세와 아틸라의 만남’. 아틸라는 아에티우스에게 참패한 이듬해 다시 서로마를 침공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불안을 느낀 인물은 당시의 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Valentinian)다. 여러 문제가 있지만, 453년 아에티우스 아들과 황제 딸의 결혼 문제가 황제의 권력 콤플렉스를 자극했다. 발렌티니아누스는 아에티우스가 결혼을 활용해 아들을 황제 자리에 올리려 한다고 의심했다. 황제의 시종 헤라클리우스는 아에티우스 암살을 거론하며 황제의 콤플렉스를 부추겼다.

결국 아에티우스는 454년 9월 21일 암살당한다. 국방비 문제로 황제와 대면하러 갔다가, 발렌티니아누스가 휘두른 칼에 찔려 아에티우스가 사망한다. 카이사르가 그러했듯이 원로원 출입이나 황제 접견은 비무장 상태에서 이뤄진다. 전장을 누빈 무적 장군이지만, 대항 한번 못하고 비명에 사라진다. 황제 발렌티니아누스도 6개월 뒤인 455년 3월 16일, 원로원의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Petronius Maximus)에 의해 암살된다.

이민족 출신의 명장이지만, 정작 자신의 황제로부터 암살된 인물이 최후의 로마인이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비극적이지만, 인류 역사를 되돌려볼 때 곳곳에서 만나는 일상적 장면이기도 하다. 장군을 임명하면서 온갖 찬사와 함께, 그 어떤 권력에도 굴하지 말라고 응원한 최고 권력자가 있었다. 그러나 힘이 그쪽으로 쏠리면서 정작 칼이 자신을 겨누자 상황은 180도 달라진다. 얼굴빛과 말투가 차갑게 변하면서 ‘왕따 작전’에 들어간다. 왕따도 안 통하자, 온갖 명분을 붙여 단두대에 세우기에 혈안이 된다.

아에티우스를 잃은 로마는 무방비 상태에 들어선다. 모든 길이 통하는 로마를 향해 쳐들어간 뒤 왕이라 선포를 하는 즉시 정복할 수 있는, 뇌사 상태의 나라였다. 역사가 기번은 발렌티니아누스가 아에티우스를 암살한 뒤의 원로원 분위기를 글로 남기고 있다. 당시 암살 현장을 지켜본 원로원 정치가의 글을 인용한 것으로, 왜 아에티우스가 최후의 로마인인지를 밝히는 증거이기도 하다. “발렌티니아누스 황제가(장군 암살을) 잘했는지 여부는 모르겠다. 그러나 황제가 자신의 오른팔로 자신의 왼팔을 잘랐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탈리아 고도(古都) 라벤나에 들린 것은 지난해 12월 말이다. 중국발 코로나가 이미 발생했던 시기지만, 서방에 드러나지 않았던 시기다. 라벤나는 산비탈레 성당(Basilica di San Vitale) 내 비잔틴 모자이크로 유명한 곳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건물 중 하나로 6세기 사실상 로마를 통치했던 비잔틴 황제 유스티아누스의 흔적이 표류하는 공간이다.

대부분 무심할 듯하지만, 라벤나는 뇌사 직전 대제국의 수도다. 원래 수도 로마는 이미 4세기 넘어가기 직전부터 이민족의 침략에 시달렸다. 410년에는 로마 전역이 독일계 이민족에게 점령되기도 했다. 황제는 로마를 버리고 밀라노로 도피한 데 이어, 402년부터는 라벤나를 새로운 수도로 공표한다. 황제의 궁궐은 물론, 입법·사법 기능도 라벤나로 옮겨간다. 이후 로마가 완전히 멸망한 뒤에도 라벤나는 동로마, 즉 비잔틴의 도움으로 8세기 중반까지 번성한다.

필자는 라벤나에서 사망한 두 인물의 흔적을 살피려고 이곳을 찾았다. 이탈리아 문학의 아버지,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가 첫 번째 주인공이다. 단테가 마지막 여생을 보낸 곳이 바로 라벤나다. 단테 무덤도 라벤나에 있다. 피렌체 출신이지만, 정치에 휘말려 사형선고까지 받은 상태에서 망명지로 라벤나에 머물게 된다. 1351년 56세 나이로 세상을 뜨기 직전, 유럽 중세문학의 최고봉인 [신곡](La Divina Commedia)을 완성한다. 라벤나는 단테의 가치와 의미를 생전에 파악한 곳이다. 사망과 함께 교회에서 장지를 제공하고, 현지인의 추모도 이어진다.

황제조차 아이 갖지 않으려 해


▎로마 카피톨리니 박물관에 전시된 칼리굴라의 흉상(왼쪽)과 나폴리 박물관에 전시된 네로의 흉상. 칼리굴라는 네로의 외삼촌이다. / 사진:유민호
단테의 무덤은 라벤나 중심가의 교회 프란체스코 교회(Basilica of San Francesco) 바깥쪽에 인접해 있다. 이장을 몇 번이나 한끝에 현재의 위치에 들어섰다. 무덤 앞에 늘어선 길고 긴 행렬을 볼 때마다 느끼지만, 추모하고 존경할 만한 인물이 너무도 많은 나라가 이탈리아다. 이탈리아 어디를 가도 역사책에서 접할 인물들이 반드시 등장한다. 피렌체 같은 곳은 수백, 아니 수천 명이 등장한다.

단테 무덤은 아주 작다. 비잔틴 양식으로, 지름 2m 정도의 둥근 지붕을 가진 높이 5m의 대리석 건물이다. 한 사람씩 문 앞에 다가가, 밖에서 안을 지켜보면서 추모하는 식으로 이뤄져 있다. 구체적인 무덤은 없고, 단테가 책을 읽는 모습이 평면 조각으로 장식돼 있다. 단테의 초대형 입상 조각상은 이탈리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국가와 국민 통합의 상징에 해당한다. 보통 도시 한가운데 대형 광장(Piazza)에 들어선 조형물로 활용되지만, 의외로 진짜 무덤의 크기는 절대 크지 않다.

이탈리아 문학의 아버지에 이어 찾아 나선 인물은 최후의 로마인 아에티우스다. 암살을 당한 황제의 원로원 건물이나, 아에티우스 무덤 같은 것을 기대하고 도시 전체를 헤맸다. 결과는 제로다. 인터넷을 통해 자료도 뒤지고, 박물관에 들러 현지인에게 물어봤지만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었다. 워낙 인물이 많은 나라라서 잊힌 것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사실 자기 부모의 어제도 모르는 사람들이 1600년 전 로마 장군을 기억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로마에 수입된 이민족 장군으로 대제국의 수명을 연장한 아에티우스는 라벤나 정도가 아닌, 전 세계 역사무대에 선 인물이란 생각도 들었다.

아에티우스 흔적을 찾는 동안 알게 된 것은 로마 몰락과 인구와의 함수관계에 관한 부분이다. 간단히 얘기해서 ‘로마 멸망=인구 감소’로 보는 시각이다. 대제국이 멸망할 때는 단 한 가지 이유로 붕괴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인구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변수다. 고대의 인구조사는 절대 간단하지 않다. 로마는 과거의 대제국 가운데 누구보다도 인구조사에 적극 나섰던 나라다.

로마 최전성기이던 2세기 땐 ‘인구 5000만 명, 총 병력 60만 명’이 정설로 여겨진다. 그러나 3~4세기로 갈수록 준다. 이민족의 유입으로 변방 인구의 수가 늘어났다고 볼 수 있지만, 이탈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한 원조 로마 시민권자의 수는 줄어든다. 이른바 로마 지배층의 인구 감소다. 로마 황제사를 보면 자식이 없어 양자를 맞이하는 황제가 대부분이다. 로마법에 따르면 아들이 없을 경우 재산 대부분을 그대로 국가가 몰수한다. 남의 피라도 가족으로 끌어들여 집안의 부와 권력을 이어가는 것이 로마 지배층의 상식이다. 평화가 지속되면서 지배층의 출산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다.

인간의 본능일지 모르겠지만, 평화와 번영이 지속될 경우 자식 농사에 게을러진다. 양자 문화가 상식화된 로마 지배층은 더더욱 자식 갖는 것을 기피한다. 1세기 당시 로마인의 평균 수명은 25세다. 곧 죽을 운명이란 공기가 로마 지배층에 표류했다. 건강하게 즐거운 인생을 만끽하는 것이 삶의 의무이자 상식으로 정착된다.

납 중독 빠진 로마… 이민족 수입은 필연


▎개인용 수로와 분수는 로마 시대 ‘금수저’의 상징이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자신의 별장에 만든 인공 호수. / 사진:유민호
로마의 ‘무자식 상팔자’ 분위기는 대제국의 확산과 함께 더더욱 심화된다. 중금속 납(Lead)의 수입 확대는 그런 상황을 부채질한다. 강남 아파트 평수는 21세기 한국에 풍미하는 세속적 힘겨루기의 주된 무대다. 로마 금수저의 상징은 무엇이었을까? 집으로 직접 연결된 수로다. 아무리 집이 작아도, 금수저라면 집 한가운데 분수를 만든다. 예술적 차원의 조형물에 그치지 않는다. 물이 있다는 말은 노예가 있고, 음식도 부엌에서 독립적으로 만들어 먹을 수 있다는 말이다.

반면 로마 주택의 대부분은 부엌이 없다. 집안에 물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도 접할 수 있는 도시 내 공공용 작은 수도관이나 우물, 분수의 주변이 주된 수원지였다. 빵이나 소시지는 국가가 제공하는 정기 배급품이다. 엄청난 거리를 통해 집안에 끌어들인 개인 수로야말로 ‘파워·재력·권위’의 증거였다. 로마 당시 공용 수로의 대부분은 토기로 만들어진, 길이 50㎝, 직경 10㎝의 수도관이다.

그러나 부자의 경우, 좀 더 고급스러운 기술을 활용했다. 바로 번쩍거리는, 납 수도관이다. 토기 수도관과 달리 물이 샐 빈틈도 없고, 방향이나 굴곡도 쉽게 조절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진, 당시로써는 첨단기술에 해당된다. 그러나 납 수도관은 치명적인 피해를 남긴다. 바로 납 중독이다. 로마의 금수저는 납을 곳곳에 활용했다. 와인 보관용 용기를 비롯해 비누와 화장품에도 납을 첨가했다. 번쩍거리면서도 싱싱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납은 몸에 들어가는 순간 밖으로 배출되지 않는다. 그대로 축적되면서 신경계통과 호르몬 자율신경을 파괴한다. 불임은 납 축적의 결과 중 하나다.

인구 절벽 앞에 선 한국


▎조셉-노엘 실베스트르, ‘야만족에 의한 로마의 함락, 410년’, 1890년. 벌거벗은 서고트족 병사가 서로마를 침략하는 모습을 그렸다.
로마는 폭군 황제가 유난히 많았던 대제국이다. 칼리굴라·네로가 남긴 악행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본인을 부검하기까지는 어려울 듯하지만, 의학자들은 납중독으로 인한 자율신경 파괴가 폭군황제 등장의 원인일 것으로 추정한다. 매일같이 납 용기에 채워진 와인을 마시고, 납 수도관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납 중독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다. 결국, 생식기능 감퇴와 함께 인구 감소도 확산됐을 것으로 본다.

이민족 군사력의 수입과 활용은 이 같은 상황에서 등장한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군은 이민족이 단숨에 출세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다. 이민족 장군이란 말은 로마 본류 외의 이민족을 휘하에 거느리고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비주류 입장에서, 이탈리아 로마의 이익보다 현지의 이해관계에 주목하기 쉽다. 이 과정에서 로마 본류와의 충돌은 필연적이다. 아에티우스 급부상과, 그에 따른 황제의 경계와 암살 사건은 최적의 본보기다.

글을 쓰는 순간, 세계 인구 전망에 관한 BBC 보도가 눈에 들어온다. 2100년이 되면 한국은 현재 5300만 명에서 2900만 명으로 줄어들 전망이라고 한다. 올해 3분기 한국의 출산율은 0.84로 세계 최저 수준이다. 중국·일본도 현재보다 줄어들겠지만, 비율로 보면 한국보다는 양호하다. 흥미롭게도 전반적인 인구감소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인구는 한층 더 늘어날 전망이다. 자동화를 거치겠지만, 2100년 전 세계 노동력의 대부분이 아프리카에서 수입될 수밖에 없을 듯하다.

2020년 말 상황을 보면 황제의 칼에 의한, 한국판 아에티우스의 제거도 결코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인구 절벽도 하루가 다르게 다가오는 시한폭탄이다. 그러나 준비는 하나도 없고, 적폐청산과 검찰개혁 같은 슬로건으로 날밤을 새운다. 2021년 신년, 잊혀가는 한국인의 기상을 일깨워 줄, 미래에 전력투구할 구원투수의 출현을 기원해본다.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2101호 (2020.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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