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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 신명호의 근·현대 건국운동사 - 근·현대 건국 담론(2)] 민주공화제 실현 위해 행동에 나선 도산 

비밀 정치결사 신민회를 조직하다 

입헌군주제 표방하는 장경과 대립, 재미교포 사회 분열
을사늑약 계기로 국민이 주체가 되는 신국가 건설 천명


▎1900년대 초반 미국 하와이로 이민 갔던 한국인들. 살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그들은 밤낮 없이 일해야 했다.
1905년 4월 미국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에서 조직된 공립협회(共立協會)는 1909년 2월 하와이 합성협회(合成協會)와 통합해 국민회(國民會)가 됐다. 이로부터 국민회는 재미 교포사회 전체를 대표하는 조직이 됐다. 국민회 본부는 리버사이드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옮겼고, 기관지로 [신한민보(新韓民報)]를 발간했다.

1914년 2월 5일 자 [신한민보]는 국민회 통합 5주년을 기념해 ‘국민회 역사’라는 특집기사를 게재했다. 기사에 의하면 을사늑약 직후 재미교포들은 “모국의 변란을 듣고 감개 격앙해 사람마다 국권 회복을 창도하며 정치사상이 날로 발달해 국가에 대한 관념이 그 행동을 일치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그 행동을 통일시켰다’는 것은 재미교포들의 정치사상과 국가 관념이 하나로 통일됐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반대로 정치사상과 국가 관념에 따라 재미교포 사회가 크게 분열됐다는 의미다. 그 이유는 국권 회복에 대한 방법과 국권 회복 이후 국가 건설 목표가 재미교포 간에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었다. 재미교포 각 사회가 조선의 축소판 같았기에 모국 조선에서처럼 정치사상과 국가 관념이 통일되지 않은 결과였다.

한국인들의 미국 이민은 공식적으로 1903년 하와이 노동 이민부터 시작됐다. 당시 100여 명의 한국 노동자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기 위해 하와이로 갔다. 이후 1905년까지 약 7000여 명의 한국인이 하와이로 건너갔다. 따라서 1900년대 재미교포 사회의 주류는 하와이에 있었다. 그러나 하와이 노동 이민 이전에 이미 샌프란시스코로 간 한국인들이 있었다. 그들이 어떻게 샌프란시스코로 갔는지, 또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에 대해서는 국민회 하와이 지부의 기관지인 [국민보(國民報)]에 관련 기사가 실려 있다.

국민회 창설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국민보]는 1958년 4월 23일 자 기사에 ‘국민회 역사 간략’이라는 특집기사를 실었다. 기사에 의하면 초기 샌프란시스코 교민 사회에는 상호간에 부르는 두 가지 칭호가 있었다고 한다. “단발한 청년들에게는 까까중이라 했고, 삼상(蔘商) 노인들에게는 상투쟁이라 칭했다”는 것인데 단발 청년들은 삼상 노인들을 ‘상투쟁이’라 부르고, 반대로 삼상 노인들은 단발 청년들을 ‘까까중’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이 기사를 통해 샌프란시스코의 교포사회가 상투를 튼 삼상과 단발한 청년들로 시작됐음을 알 수 있다.

상투쟁이 vs 까까중, 갈라진 샌프란시스코 교민


▎신민회를 조직한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상투를 튼 삼상은 말 그대로 상투를 튼 인삼 상인이었다. 한국의 그 많은 상인 중에서도 하필 인삼 상인이 제일 먼저 샌프란시스코에 온 이유는 중국인들과 일본인들 때문이었다. 1860년 전후로 청나라와 일본은 미국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그때를 전후로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해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에 차이나타운·재팬타운이 형성됐다. 그들에게 인삼을 판매하기 위해 한국의 인삼 상인들이 하와이 그리고 샌프란시스코까지 갔다.

그런데 [국민보] 특집 기사에 의하면 ‘유학생을 제외하고 상민으로 1887년 박영순씨가 선도자로 도미했고’란 내용이 있는데, 그 박영순씨는 인삼 상인일 가능성이 높다. 그에 앞서 1882년 조미수호조약 이후 젊은 청년들이 유학 차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1902년 샌프란시스코에 간 안창호 역시 유학 차 도미한 젊은 청년이었다. 1903년 9월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친목회를 창설했을 때 남자 회원은 총 10명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가족까지 합쳐도 당시 샌프란시스코 교포는 전체 20명이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교포가 혼인 전 청년들이기 때문이었다. 그 20명 내외의 교포가 서로 간에 ‘상투쟁이’ 또는 ‘까까중’이라 부르며 분열돼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상투쟁이’와 ‘까까중’은 단순히 머리 스타일만 다른 것이 아니었다. 출신 지역도 달랐고, 이념도 달랐다. 세상을 보는 관점도 달랐다. 우선 상투를 튼 인삼 상인들은 주로 기호 지역 출신이었다. 그들은 전통 유학을 고수했기에 상투를 고집했다. 또는 중국인이나 일본인에게 조선 출신 인삼 상인이라는 각인 또는 신뢰를 주기 위해 상투를 고집했을 수도 있다.

반면 단발한 청년들은 주로 관서 지역 출신으로 평민이 많았고, 기독교를 신앙했다. 이런 배경에서 상투를 튼 인삼 상인들은 단발한 청년들을 “까까중”이라 멸시했다. “까까중”이란 “까까머리를 한 중”이란 뜻이다. 물론 조선 양반들이 불교 스님을 멸시하던 칭호다. ‘신체발부는 부모에게서 받았으니, 감히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는 [효경] 구절을 주문처럼 외우던 조선 양반들에게 머리를 박박 깎은 스님들은 효도를 저버린 짐승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조선시대 “까까중”이란 “인륜을 저버린 짐승 같은 중놈”이란 욕과 같았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인삼 상인들은 비록 자신들이 타국에서 인삼을 파는 상인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상투를 틀고 최소한의 인륜을 지키는 선비라는 자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의 눈에 자발적으로 단발한 고국의 청년들은 ‘짐승 같은 중’이나 마찬가지로 경멸스러웠을 것이 분명하다.

반면 단발한 청년들에게 상투를 튼 인삼 상인들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완고한 사람들로 비쳤을 것이다. 저들의 완고함 때문에 조선이 개화에 실패해 멸망 직전으로 몰렸는데, 미국까지 와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상투를 고집하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했겠는가? 단발한 청년들이 말하는 ‘상투쟁이’란 ‘상투만 아는 천한 장사치’라는 의미다. 조선시대 상인은 기술자보다도 못한 천민으로 대우받았고, 그래서 ‘장사치’ 또는 ‘쟁이’로 불렸다. 결국 ‘까까중’이나 ‘상투쟁이’란 본국 조선에서 다른 신분층을 무시하고 깔보던 용어였고, 그런 용어들이 동족 간에 남발될 정도로 샌프란시스코 교민 사회가 처음부터 분열돼 있었던 것이다.

그런 분열을 없애기 위해 안창호는 1903년 친목회, 1905년 공립협회를 만들었다. 공립협회 조직 당시 샌프란시스코 교포는 100여 명으로 증가한 상황이었다. 또한 1907년에는 200여 명으로 늘어나는 등 샌프란시스코 교포사회는 확장일로에 있었다. 교포사회가 확장될수록 갈등 요인 역시 늘어났지만 핵심은 ‘상투쟁이’와 ‘까까중’ 사이의 갈등이었다. 이런 면에서 샌프란시스코의 친목회와 공립협회는 사실상 ‘상투쟁이’와 ‘까까중’의 통합체였다. 그 같은 공립협회를 통해 교포사회의 갈등이 어느 정도 가라앉기는 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해소되지는 않았다. 지역 갈등, 이념 갈등, 직업 갈등 등 여러 요인이 그대로 잠복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수면 아래 잠복했던 갈등들이 을사늑약으로 폭발하고 말았다.

물론 을사늑약이 처음부터 샌프란시스코 교포사회의 갈등을 조장한 것은 아니었다. 통합체인 공립협회가 있었기에 처음에는 단합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상투쟁이’와 ‘까까중’ 사이의 갈등이 폭발했다. 이와 관련해 1958년 4월 23일 자 [국민보] 특집 기사에는 “안창호·장경(張景) 두 분 선생이 국사 문제로 주야 간 토의한 결과, 한 분은 귀국해 또 한 분은 원동(遠東-만주와 연해주)에 가서 활동하기로 내정이 된 후, 안창호 선생 말씀에 지도자로서는 무엇보다 도중(徒衆)에게 신임을 득함이 최상에 양책이라 삼상을 말라고 권고함에 이에 반감이 발해 분립됐다 합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명분 같았지만 길이 달랐던 두 지도자


▎하와이 한인 교포들이 사탕수수밭 작업 도중 휴식을 취하고 있다.
위에 등장하는 안창호는 단발 청년인 ‘까까중’ 대표이고, 장경은 인삼 상인인 ‘상투쟁이’ 대표이다. 처음에 안창호는 장경의 협조를 얻어 친목회도 조직할 수 있었고 공립협회도 조직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을사늑약 직후 공립협회가 어떻게 대응할지를 놓고 안창호가 주로 장경과 논의했을 것은 불문가지다. 처음에 장경은 친목회나 공립협회 때와 마찬가지로 아주 협조적이었다. 특집기사는 바로 이런 상황을 묘사한다.

이런 상황은 1914년 2월 5일자 [신한민보]의 특집기사에서도 확인된다. 즉 “공립협회는 이 시기를 당하여 정당한 방침으로 일시 인물을 지배해 동년(1905) 12월에 리버사이드·로스앤젤레스·큐카롱가 등 여러 지방에 지방회를 조직하고 상항(桑港, 샌프란시스코)에 총회기관을 설치해 홀로 미주(美州) 한인 우이(牛耳)를 잡았으며”라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이 내용에 의하면 을사늑약을 계기로 공립협회는 리버사이드·로스앤젤레스·큐카롱가에 지방회를 조직하고, 샌프란시스코에 총회기관을 창설해 미 본토의 한인사회를 완전히 장악했다.

이런 상황을 [신한민보]에서는 “홀로 미주(美州) 한인 우이(牛耳)를 잡았으며”라고 묘사했던 것이다. 또한 공립협회는 총회기관을 설치하기 한 달 전인 11월 22일 기관지 [공립신보(共立新報)]도 창간했다. 을사늑약이 11월 17일 체결된 사실을 고려하면, 공립협회는 을사늑약에 대응하기 위해 곧바로 [공립신보]를 창간하고 뒤이어 공립협회 조직을 강화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일들이 단기간에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물론 안창호와 장경의 협조 때문이라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아주 협조적이었던 두 사람이 무엇 때문인지 갈라서고 말았다. 그 원인을 [국민보]에서는 “안창호 선생 말씀에 지도자로서는 무엇보다 도중에게 신임을 득함이 최상에 양책이라 삼상을 말라고 권고함에 이에 반감이 발해 분립됐다”고 했다. 즉 안창호가 장경에게 지도자가 되려면 인삼 상인을 그만둬야 한다고 해서, 장경이 반감을 갖고 갈라섰다는 의미다.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일 것이라 이해된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정치사상과 국가 관념의 차이 때문이었다. 을사늑약 직후 안창호와 장경은 국권 회복이라는 대의명분 앞에서는 같은 의견이었다. 하지만 국권 회복을 어떤 방식으로 추진할지, 또 국권 회복 이후 어떤 국가를 건설할지에 대해서는 확연히 달랐다.

비록 미국으로 이민왔지만 전통 유학의 영향 속에 있던 장경은 군주제를 버릴 수 없었다. 그나마 장경 그리고 그와 의견을 같이하는 ‘상투쟁이’들이 생각하는 군주제는 개명된 군주제 즉 ‘입헌군주제’ 정도였다. 하지만 안창호를 비롯한 ‘까까중’들은 ‘입헌군주제’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1884년 김옥균의 갑신정변부터 1896년 서재필의 독립협회에 이르기까지 개화파들은 ‘입헌군주제’를 목표로 개혁운동을 벌여왔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전제군주 고종 때문에 실패했다. 따라서 국권 회복 이후 입헌군주제를 추구한다는 것은 지난날의 실패를 되풀이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입헌군주제를 넘어 미국식 민주공화제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전제군주 때문에 나라 망했다고 본 도산


▎[대한매일신보]가 순종의 일본 방문을 전하고 있다. 육군대장의 복장이 특이하다.
이에 따라 을사늑약 이후 안창호와 장경은 국권 회복 방법과 국권 회복 이후 국가 건설을 놓고 상당한 기간 논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1906년 9월쯤 갈라서고 말았다. 그 사실은 “1906년 9월 5일 장경씨가 분립해 대동교육회(大同敎育會)를 조직한 후 1907년 3월 19일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로 개조하고 동년(1907) 10월에 대동공보를 발간했습니다”는 [국민보]의 특집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1905년 연말부터 1906년 9월까지 약 9개월가량 상호 간에 협조하며 논쟁하던 안창호와 장경이 1906년 9월 5일부로 완전히 갈라서게 됐다는 의미다. 두 사람이 갈라선 결과 장경은 대동교육회와 그 후신인 대동보국회를 조직하고, 안창호는 신민회를 조직하게 됐다. 그러므로 당시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논쟁이 오갔는지를 확인하려면 대동교육회와 대동보국회의 취지서 그리고 신민회의 취지서를 분석해 상호 검토·비교할 필요가 있다.

먼저 대동교육회 취지서부터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장경이 대동교육회를 처음 조직한 시점은 1905년 12월 9일이었다. 그때는 장경이 안창호와 협력하던 시점이었다. 1905년 12월 조직된 대동교육회가 무엇을 목표로 했는지는 그 이름에서 추정할 수 있다. 우선 ‘대동’이라는 용어 그리고 ‘교육’이라는 용어가 중요하다. 대동이란 ‘대동단결’이란 의미다.

이는 국권 회복을 위해서는 한국 사람들이 상하귀천 없이 모두 대동단결해야 한다는 의미와 같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을사늑약의 책임이 고종황제보다는 고종황제에 도전한 개화파 또는 동학 같은 어리석은 백성들 때문에 국론이 분열된 결과라는 인식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따라서 국권 회복을 위해 상하귀천 없이 모두 대동단결하자는 것은 결국 고종황제를 중심으로 대동단결하자는 주장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다만 ‘대동교육회’의 ‘교육’은 교육을 통해 세계화된 상황에서 대동단결해야 국권 회복이 가능하다는 뜻을 함축하므로 ‘대동교육회’는 생각에 따라 진취적일 수도 있었고, 퇴보적일 수도 있었다. 만약 세계화가 국민 교육만 지칭하고 정치제도는 제외한다면 그것은 한정된 의미에서만 진취적이라 할 수 있다.

반면 국민 교육은 물론 정치제도까지 포괄한다면 대단히 진취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1905년 12월 장경이 대동교육회를 조직했을 때 안창호는 대동교육회의 최종 목표가 국민 교육의 세계화를 넘어 정치제도의 세계화까지 포괄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에 반해 장경은 대동교육회의 최종목표는 말 그대로 국민교육의 세계화만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아마도 장경은 조선의 현실을 감안하면 일단 국민 교육의 세계화부터 추진하고, 정치제도의 세계화는 나중에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을 듯하다. 당시 절대군주제 하의 대한제국 상황에서 민주공화제를 최종 목표로 내세운다면 그것은 곧 반정부 활동을 공식화하는 것과 같은데, 그렇게 되면 국권 회복을 위해 일본 제국주의와 더불어 대한제국까지 두 곳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므로 성공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창호는 1880~90년대 개화운동 실패를 들어 이왕 하는 국권 회복 운동이라면 정치제도의 세계화를 최종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이 같은 의견 차이를 좁히기 위해 안창호와 장경은 상당 기간 논쟁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양자 사이의 의견은 접점을 찾지 못했다.

국권 상실, 못 배운 백성 탓으로 돌린 장경


▎[르 프티 파리지앵] 1905년 10월 8일 자.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딸인 앨리스 루스벨트가 고종 황제를 만나기 위해 궁궐로 들어가는 모습을 묘사했다.
결국 장경은 1906년 8월 9일 고국의 [대한매일신보]에 ‘대동교육회 취지서’를 공개해버렸다. 그 취지서에서는 을사늑약의 원인을 “불학(不學)” 때문이라고 해 무엇보다도 교육을 강조했다. 그런데 을사늑약의 근본 원인을 “불학”이라고 한다면 그 책임은 주로 불학무식한 백성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대동교육회’는 불학무식한 백성을 열심히 교육해 그들이 고종황제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국권 회복을 추진하게 만들려는 조직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이 점을 대동교육회 취지서에서는 “대한인사(大韓人士)는 무론재외재내(無論在外在內) 하고 상하남녀노유(上下男女老幼)가 의각출성력(宜各出誠力) 하야 이조성대사(以助成大事)”라고 명시했다. 이를 좀 더 명확히 하기 위해 장경은 1907년 7월 10일 대동보국회의 목적을 [황성신문]에 기고했는데, 그것은 “위로 군주와 정부를 조력(助力)하며 아래로 부로(父老)와 자제를 상구(相救) 하기로 정신을 치(致)하고 목적을 입(立)하야”라고 천명했다. 요컨대 장경의 대동교육회 그리고 대동보국회는국권회복 방법을 고종황제를 중심으로 대동단결 하는 것에서 찾았고 나아가 국권 회복 이후의 국가 형태는 문명화된 입헌군주제 정도로 구상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반면 안창호는 이 같은 대동교육회 그리고 대동보국회의 국권 회복 방법과 국가 건설 목표에 동의하지 않았다. 안창호는 장경이 1906년 8월 9일 고국의 [대한매일신보]에 ‘대동교육회 취지서’를 공개하자 더 이상의 대화를 포기한 것으로 이해된다.

즉 ‘1906년 9월 5일 장경씨가 분립해 대동교육회를 조직한 후’라는 [국민보] 특집기사는 1906년 9월 5일 장경이 처음으로 대동교육회를 조직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대한매일신보]에 대동교육회 취지서가 공개된 사실을 알게 된 안창호가 대동교육회를 포기하고 별도 조직을 만들어야 하겠다고 결심했다는 의미라 하겠다. 그 조직이 바로 신민회(新民會) 즉 대한신민회였다.

안창호가 구상한 신민회는 여러 면에서 장경의 대동교육회와 대조적이었다. 우선 대동교육회는 1906년 8월 9일 [대한매일신보]에 취지서를 공개할 정도로 합법 조직이었다. 달리 말하면 공개적으로 입헌군주제를 추구할 정도로 합법조직이었다. 반면 신민회는 처음부터 비밀결사를 염두에 둔 비합법 조직이었다. 달리 말하면 입헌군주제를 넘어서려는 정치조직이었던 것이다. 또한 대동교육회는 기존 리더십과의 대동단결을 강조하는 ‘대동’이 핵심인 반면, 신민회는 ‘백성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그대로 기존 정치제도와 사회제도를 새롭게 뜯어고치겠다는 ‘유신(維新)’이 핵심이었다.

안창호는 신민회를 구상했을 뿐만 아니라 취지서와 세부조직도 작성했다. 안창호가 정확히 언제 신민회를 구상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대동교육회를 염두에 둔다면 1906년 9월 5일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신민회를 구상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신민회 취지서 및 세부조직은 1906년 연말쯤 완성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신민회는 애초부터 비밀결사로 구성됐기에 취지서나 세부규칙 등은 오직 회원들만 알 수 있었고 공개된 적이 없었다. 1907년 초 조선에 입국한 안창호는 신민회를 은밀하게 확산시켰지만 취지서나 세부규칙을 공개하지는 않았다. 신민회 회원들 역시 비밀을 엄수한 덕분에 일제 정보망은 1909년에 가서야 신민회 관련 정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신민회, 대한제국과 일제 모두 타도 대상


▎형무소로 끌려가는 신민회 독립운동가들. 일제는 을사늑약 후 105인 사건 등을 조작해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다.
그 정보는 1909년 3월 5일자헌병기밀 제501호로 보고됐으며 신민회 취지서와 통용장정(通用章程)이 첨부됐다. 신민회 관련 정보를 조사한 일제 정보망은 신민회를 “기(其) 심의(深意)는 한국으로 하여금 열국(列國) 보호 아래 공화정체의 독립국으로 함에 목적이 있다고 운(云)함”이라고 결론지음으로써 신민회를 민주공화제를 추구하는 비밀정치조직으로 판단했다.

이는 나름대로 정확한 판단이었다. 안창호가 애초부터 신민회를 비밀결사로 구상한 이유는 당연히 민주공화제를 목표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면에서 신민회는 한국 역사상 최초로 민주공화제를 목표로 조직된 비밀 정치결사라 할 수 있다.

일제 정보망에서 파악한 신민회 취지서에는 “본인 등은 국민의 일분자로서 해외에 표박(漂泊)하는 일이 지금 여러 해, 바라건대 학문견문(學問見聞) 하는 중에 얻은 바로써 국민의 책임을 보답하고, 국민의 직분을 실행하고자 한다”는 내용이 있다. 여기 등장하는 ‘본인’은 물론 안창호다. 아울러 신민회 취지서는 “위로 천지신명에게 묻고 아래로 동포형제와 상의해 드디어 일회(一會)를 미국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에서 발기하고 그 이름을 대한신민회라 한다”고 함으로서 이 취지서를 안창호가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에서 직접 작성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신민회를 조직한 근본 취지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배운 지식으로 국민의 책임과 직분을 다하고자 하려는 데 있음도 알 수 있다. 여기서 안창호가 언급한 국민의 책임과 직분은 주권자로서의 책임과 직분이다. 그 책임과 직분은 유신(維新)된 국민이 주체가 돼 국권을 회복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유신된 국민이 주체가 돼 유신된 국가 즉 민주공화제를 건설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 안창호는 신민회 취지서 결론 부분에서 “무릇 우리 한국인은 내외를 논할 것 없이 통일연합으로 그 길을 정하고, 독립과 자유로 그 목적을 세워야 할 것이다. 이는 신민회가 발원하는 바이며 신민회가 회포(懷抱)하는 바다. 약언(略言)하면 역시 말하기를 신(新)정신을 불러 깨우치고, 신단체를 조직해서 신국가를 건설할 뿐”이라고 천명했다.

요컨대 안창호는 신민회로서 한국인들을 정신적·사회적·경제적·정치적으로 유신시켜 국권을 회복하게 하고, 국권 회복 후에는 궁극적으로 신국가인민주공화제 국가를 건설할 것임을 천명했던 것이다. 이 같은 민주공화제는 당시 상황에서 대한제국 체제에 대한 도전일 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안창호가 신민회를 비밀 정치조직으로 구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2102호 (2021.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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