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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59)] 임금에게 직언한 선비 남명(南冥) 조식 

퇴계와 쌍벽 이룬 영남학파의 거두 

단성현감 제수받았지만 명종 실정 통렬히 비판하는 상소 올려… 지리산 아래 산천재 짓고 은일, 정인홍·곽재우 등 의병장 길러내

▎남명의 후손 조종명 옹이 선생이 제자를 가르친 산천재 앞에 섰다. / 사진:송의호
직언(直言)이 사라진 시대. 언젠가부터 나라를 걱정하는 지식인의 바른말은 듣기가 어려워졌다. 대신 그 자리에 곡학아세(曲學阿世)와 견강부회(牽强附會)가 난무하고 있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선생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일갈이 그리운 까닭이다. 12월 19일 경남 산청군 시천면 남명기념관에서 선생의 후손으로 선조를 깊이 공부하고 알려온 조종명(80) 옹을 만났다. 두루마기 차림의 조옹은 노무현 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사람이 2007년 “단성소(丹城疏)를 듣고 이곳을 찾아왔더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남명이 단성현감을 제수받고 사절하는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는 1555년 명종 임금에게 올린 상소다. 선생은 이 상소에서 벼슬을 사양하는 두 가지 이유를 든다. 자신은 그동안 과거시험에 세 차례나 떨어진 능력이 부족한 사람임을 먼저 밝힌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가 자주 회자된다. “전하의 나랏일이 그릇되고 나라의 근본이 망했으며 하늘의 뜻은 떠나버렸고 민심도 이미 이반됐습니다. 비유하자면 백 년 동안 벌레가 그 속을 갉아먹어 진액이 말라버린 큰 나무와 같습니다. (…) 그런데도 낮은 벼슬아치는 아래에서 주색을 즐기고 높은 벼슬아치는 위에서 어름어름하며 오로지 재물만 늘립니다.” 당시 조정이 외척의 발호로 극도의 혼란에 빠져드는 것에 대한 통렬한 지적이다. 양신(良臣)이 없음을 먼저 질타한 뒤 다음은 임금을 향한다. “자전(慈殿, 임금의 어머니 문정왕후)은 생각이 깊기는 하나 궁중의 한 과부(一寡婦)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선 어리시어 다만 선왕의 한낱 고아(一孤嗣)일 뿐이니 백 가지 천 가지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 민심(民心)을 어떻게 감당하며 무엇으로 수습하시겠습니까?” 죽음을 무릅쓴 고언이다. 어린 명종은 치마폭에 싸여 있고 문정왕후와 척신들의 수렴청정을 비판한 것이다. 상소는 일대 파문을 일으킨다. 바른 선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직언이다.

기념관 앞뜰을 둘러봤다. 한쪽에 선생의 신도비와 전신 석상, 그 오른쪽에 을묘사직소를 국역한 바윗돌이 서 있다. 기념관 건너편에 산천재(山天齋)가 위치해 있다. 들어가는 풍광이 압권이다. 영하 기온에 날이 맑아 저 멀리 산이 선명하게 보였다. 지리산이다. 그 중 정면으로 보이는 봉우리는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1915m 천왕봉이다. 그 봉우리를 오른쪽으로 바라보는 위치에 산천재가 있다. 담대한 기운이 그대로 전해지는 자리다.

천왕봉을 오른쪽으로 바라보는 서실 산천재


남명은 61세에 합천 삼가에서 이곳 지리산 덕산으로 옮겨 서실 산천재를 지었다. 선생은 이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산천재에서 제자들에게 학문과 사상을 전했다. 재실의 이름은[주역]에서 따왔다. 강건한 기상으로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깊숙이 묻혀 심성을 올바로 수양하겠다는 뜻을 담았다. 그는 이곳에서 약포 정탁, 동강 김우옹, 한강 정구, 수우당 최영경, 망우당 곽재우, 내암 정인홍, 덕계 오건 등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이들 대부분은 이후 정계와 학계를 이끌었고 내암과 망우당은 임진왜란 시기 의병을 일으켜 전란 극복에 앞장섰다.

조종명 옹은 산천재 편액 주변 벽면에 그려진 그림 3점을 가리켰다. 가운데는 ‘상산사호도(商山四皓圖)’, 왼쪽은 ‘이윤우경도(伊尹牛耕圖)’에 오른쪽은 ‘허유소부도(許由巢父圖)’다. 이 중 ‘허유소부도’가 의미심장하다. 허유와 소부는 요임금 시대 기산에 살던 전설적인 은자(隱者)들이다. 요임금이 어느 날 허유를 불러 천하를 선양하려 하자 그는 이를 사양한다. 이어 허유는 다시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다며 영수 물가에서 귀를 씻었다. 친구 소부는 한술 더 뜬다. 소부는 영수에 소를 몰고 와서 물을 먹이려다가 허유가 귀를 씻는 까닭을 듣고는 더러운 물을 소에게 먹일 수 없다며 상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다. 남명의 처사적 은일(隱逸, 세상을 피해 숨어 삶) 정신을 엿보게 하는 벽화다.

산천재 앞 기둥에는 남명이 처음 이곳으로 들어와 자리 잡을 때의 심경이 주련으로 걸려 있다. “천왕봉이 상제와 가까움을 좋아해 자리 잡았네.” 하늘에 닿아 있는 천왕봉을 바라보며 천도를 추구한 것이다. 산천재 벽면에는 선생의 웅혼한 기상과 정신을 담은 시판이 걸려 있다. ‘제덕산계정(題德山溪亭)’이다.

청컨대 천 석의 종을 보라(請看千石鐘)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없다(非大扣無聲)
어찌하여 저 두류산은(爭似頭流山)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가(天鳴猶不鳴)


선생은 천석종(곡식 천 섬이 들어가는 종) 같은 거대한 정신세계를 이룩해 세상에 큰 울림을 주고 싶었다. 그 세계를 천둥·번개가 쳐도 끄덕 않고 의연히 서 있는 천왕봉에 비유한 것이다. 남명은 이 시기에 ‘경(敬)’과 ‘의(義)’를 강조했다. 산천재의 양쪽 벽면에 ‘경’과 ‘의’를 크게 써 붙이고 수양을 위해 몸에 늘 지녔던 칼 경의검(敬義劍)에 ‘內明者敬(내명자경)’, ‘外斷者義(외단자의)’라 새겼다. 이는 당시 학문이 이기(理氣) 등 형이상학으로 흘러 성리학 본연의 심성 수양이 소홀해진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방울은 김우홍에게 칼은 정인홍에게 넘겨


▎남명 선생의 학덕을 기리는 산청의 덕천서원. / 사진:송의호
1566년 훈구세력이 무너지면서 명종은 상서원 판관으로 남명을 부른다. 선생은 66세에 처음으로 조정에 나아간다. 그는 임금을 만나 정치와 학문의 도리를 제시하며 선비로서 나라에 대한 책임을 밝힌다. 그러나 남명은 무슨 일을 함께해볼 만한 임금이 못 된다고 판단해 출사는 9일로 끝이 났다. 그는 귀향한다. 이후 선조가 즉위하면서 사림 시대가 열리자 임금은 퇴계·남명 등 당대 석학을 간절히 부른다. 하지만 남명은 상소를 통해 왕도정치의 이상을 제시할 뿐 나아가지 않았다.

산천재를 돌아본 뒤 2004년 개관한 남명기념관을 관람했다. 선생이 수양의 도구로 늘 몸에 지녔다는 쇠방울 성성자(惺惺子)와 경의검 모형이 눈길을 끌었다. 남명은 후에 방울은 김우옹에게, 칼은 자신을 빼닮은 정인홍에게 넘겼다고 전해진다. 140여 문인의 계보를 그린 남명학맥도도 걸려 있다. 남명은 본래 외가인 합천 삼가에서 태어나 줄곧 그곳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문과에 급제해 출사하면서 그는 서울로 이주한다. 10대 후반 남명은 서울에서 성운을 만나 독서하며 경(經)·사(史)를 섭렵했다. 그러던 중 25세에 [성리대전]을 읽다가 원나라 허형의 “이윤의 뜻에 마음을 두고 안자(顔子)의 학문을 배워 벼슬길에 나아가면 큰일을 해내고 초야에 숨어 살면 자신을 지키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말에 크게 깨닫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둔다. 최석기 경상대 교수는 “선생은 이때부터 성리학에 침잠하는 학문의 대전환을 이룬다”고 봤다.

남명은 30세에 처가가 있는 김해로 옮겨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15년간 성리학에 몰두했다. 45세에 모친상을 당한다. 남명은 지금의 합천군 삼가면 선영에 어머니를 모시고 시묘한 뒤 삼가면 토동에 뇌룡사(雷龍舍)를 짓고 수양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러면서 기상을 드러낸다. ‘민암부(民巖賦)’를 통해 백성인 물이 노하면 임금인 배를 전복시킬 수 있다는 민본정치를 역설한다. 신랄한 ‘을묘사직소’를 올린 것도 이 시기였다. 이어 1561년 덕산으로 옮겨 산천재 시대를 연다.

남명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같은 해 태어난 퇴계 이황과 흔히 비교한다. 낙동강을 경계로 좌우에 살았던 두 사람은 평생을 학문에 몰입하며 수많은 인재를 길렀다는 점에서 닮았다. 그러나 기질과 출처(出處)는 사뭇 달랐다. 남명은 여러차례 벼슬을 천거 받았지만 딱 한 차례를 제외하고는 나아가지 않았다. 퇴계는 대과에 급제한 뒤 140여 회 벼슬을 권유받고 79차례 사직을 반복했다. 두 사람은 서로 명성을 듣고 있었지만 한 번도 만나지는 않았다. 편지만 다섯 차례 오갔을 뿐이다. 1553년 성균관 대사성 퇴계가 먼저 편지를 보냈다. 그 무렵 조정이 남명에게 정6품 관직을 내렸지만 사양하자 퇴계는 벼슬을 권하는 간절한 뜻과 함께 교유를 제안한다.

해학과 풍자에 능한 남명, 퇴계와 교유


▎산천재에서 바라보이는 지리산. 가운데 봉우리가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해발 1915m 천왕봉이다. / 사진:송의호
“천 리 먼 곳에서 정신적으로 교제하는 것은 옛사람들도 숭상하는 바입니다 (…) 벼슬길에 나가는데 경솔하여 말로에 낭패를 보는 것은 비루한 자의 소행이고, 한번 나오는데 신중하여 평소 가진 절개를 온전히 지니는 것은 훌륭한 자의 넓은 식견입니다 (…) 황은 올립니다.” 이 간곡한 뜻에 남명은 화답한다. “하늘에 있는 북두성처럼 평소 우러러보았고, 책 속에 있는 성현처럼 까마득하니 만나기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간절한 뜻으로 깨우쳐 주신 편지를 받고 보니, 저의 병통을 다스릴 약이 될 말씀이 넓고도 많아 아침저녁으로 만나던 사이 같았습니다 (…) 게다가 눈병까지 있어 앞이 흐릿하여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한지 여러 해 되었습니다. 명공(明公)께서 발운산(撥雲散, 눈앞의 흐릿함을 없애는 안약)으로 눈을 밝게 열어주시지 않겠습니까.”

남명은 해학과 풍자에 능했다. 발운산이라는 비유를 통해 세상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는 가르침을 달라고 부탁한다. 퇴계도 답장에서 “발운산 분부는 감히 힘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저도 당귀(當歸, 약초 이름이지만 ‘마땅히 돌아가야 한다’는 뜻도 된다)를 구하고 있는데 얻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라며 해학으로 표현한다. 1564년 이번에는 남명이 편지를 보낸다. 그때까지 서로 만나지 못한 점을 아쉬워한 뒤 후반부에 비판을 덧붙인다.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 뿌리고 비질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를 담론하여 헛된 이름이나 훔쳐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 (…)선생 같은 분은 우러르는 사람이 참으로 많으니, 십분 억제하고 타이르심이 어떻겠습니까.”

이 무렵 퇴계는 기대승과 사칠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김권섭은 [선비의 탄생]에서 “이 일은 유학자들 사이에 큰 화제가 됐다. 남명은 그러나 이 논쟁을 단지 헛된 이름이나 훔치는 것으로 단정했다”고 정리했다. 퇴계는 답장에서 남명의 지적에 공감하면서도 세상 사람이 도를 지향하도록 만들려면 논의 자체를 막아서는 안 된다는 뜻을 밝혔다. 실학자 성호 이익은 후대에 두 사람을 이렇게 평가했다. “중세 이후에는 퇴계가 소백산 밑에서 태어났고, 남명이 두류산 동쪽에서 태어났다. 모두 경상도의 땅인데, 북도에서는 인(仁)을 숭상했고 남도에서는 의(義)를 앞세워 유교의 감화와 기개를 숭상한 것이 넓은 바다와 높은 산과 같게 되었다. 우리 문화는 여기서 절정에 달하였다.”

남명기념관을 나와 변명섭 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뒷산에 자리한 선생의 묘소에 들렀다. 묘비에는 선생이 ‘징사(徵士)’로 새겨져 있다. 징사는 절행이 뛰어난 산림(山林)을 뜻한다. 평생 친구인 성운이 지은 묘비 오른쪽에는 한글세대를 배려한 국역비가 함께 세워져 있다. 선생 아래 또 하나의 묘가 있다. 측실(側室)로 숙부인에 봉해진 은진 송씨 무덤이다. 묘소 아래 기념관 오른쪽으로 후손들이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하는 ‘여재실(如在室)’이란 가묘(家廟)가 있었다. 종택은 따로 없다. 종손도 오래전 ‘파(破)종손’ 된 뒤 새로 봉해지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 산천재 옆으로는 최근 국비 등 200억원을 들여 남명학 연구의 본산인 한국선비문화연구원이 들어섰다. 선생을 배향한 덕천서원(德川書院)에 들렀다. 1576년 문인들이 세운 덕천서원은 ‘강우(江右)48가(家)’ 본산으로 불린다. 낙동강 오른쪽 경상우도 유림의 본거지란 뜻이다. 동·서재와 강당인 경의당(敬義堂)을 지나 맨 안쪽에 사당 ‘숭덕사(崇德祠)’가 있다. 위패에는 ‘남명조선생’이라 쓰여 있다. 숭덕사 가운데 선생이 모셔져 있고 오른쪽에는 정여립 사건의 무고로 옥사한 고제(高第) 수우당 최영경이 최근 복설됐다. 광해군 시기 사액이 됐던 덕천서원은 대원군 시기 불행히도 훼철을 피하지 못했다.

산이 높아 일찍 어두워졌다. 덕천서원을 떠나 합천 삼가로 들어서자 뇌룡정이 도로에서 멀지 않았다. 천둥 같은 직언으로 을묘사직소를 올렸던 현장이다. 건너편은 선생을 모신 용암서원이다. 문은 잠겨 있고 서원 앞에 을묘사직소를 새긴 큰 돌이 있었다. 일대는 찾는 이가 많지 않은 듯했다. 주변은 잡초 등이 수북했다. 서원에서 300m를 더 가면 선생이 태어난 삼가면 외토리가 나온다. 마을 높은 위치에 생가가 복원 중이다. 선생을 현창하는 사업은 이어지고 있었다. 재야의 지식인 남명은 ‘민암부’에서 백성은 나라를 엎을 수도 있는 위험한 존재임을 인식시킨다. 그 정신이 이어진 것일까. 1862년 진주민란의 첫 부대는 산천재에서 출발했다. 1894년 전북 고부에서 시작된 동학혁명도 두 번째 봉기는 이곳 덕산에서 이어졌다고 한다.

합천 삼가면 외토리에 생가 복원 한창


▎[남명집] 중 1604년(선조 37) 발간돼 가장 오래된 갑진본. / 사진:한국선비문화연구원
선생은 사화(士禍)의 시기를 살면서 직언과 출처(出處) 대절(大節)로 후인의 본보기가 되었다. 초야에 묻혀 지내면서도 한시도 나라와 민족을 잊지 않고 학문으로 현실을 구제하려는 생각을 했다. 일찍이 율곡 이이는 “근대에 이른바 처사로서 끝까지 지절을 온전히 하고 벽립천인(높이 솟은 바위)의 기상을 세운 이는 선생뿐”이라고 했다. 남명은 직언을 서슴지 않던 선비였다. 절대군주인 임금의 면전에 용기 있게 말한 사람이었다. 직언은 임금의 잘못을 뉘우치게 하고 조정의 과실을 바로잡게 한다. 또 백성을 고초에서 구한다. 지식인의 직언이 그리운 시대다.

[박스기사] 남명이 후대에 저평가된 이유 - 제자 정인홍의 정치투쟁 패배와 양명학적 학문 성향이 원인

남명 조식은 조선 중기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룬 유학자였지만 왜 퇴계만큼 알려지지 않았을까. 사람들은 주된 이유를 남명의 고제(高第)인 내암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의 비극적인 죽음에서 찾는다. 내암은 광해군 시기 개혁 세력인 북인(北人)의 영수였다. 정인홍은 합천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학문에 매진했다. 내암은 남명의 문하에 들어가 스승이 세상을 떠난 다음 해인 1573년 조정에 천거돼 벼슬길로 나아갔다. 그의 나이 39세 때다.

내암은 스승이 경전을 공부하면서 긴요한 말을 기록한 ‘학기(學記)’를 편찬하는 일에 앞장섰다. [남명집]을 최초로 펴낸이도 내암이었다. 그는 출사 이후 당쟁과 관료의 부정부패를 질타하는 상소를 올렸다. 임진왜란 시기엔 영남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역할이 커지면서 정적이 생겨났다. 또 스승이 문묘에 종사되지못한 데 대한 반발로 퇴계를 비방하기도 했다. 그는 광해군 이후 세력을 잃은 서인에게 눈엣가시였다. 서인이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자 결국 정인홍은 제거됐다. 내암은 조선의 법에도 없는 참형을 당했다. 법은 여든이 넘은 사람은 참형에 처할 수 없도록 했다. 당시 내암은 여든아홉에 영의정을 지냈다. 그러나 서인은 영창대군 살해에 앞장섰다는 죄명을 씌워 내암을 처형했다.

이광표는 [시대가 선비를 부른다]에서 “내암이 무참히 희생되자 남명과 그 학문은 왜곡되고 폄하됐다”고 평가한다. 남명 문집은 무려 15차례나 고쳐졌고 내암 관련은 모두 빠졌다. 그래서 남명의 일부 후손은 조심스럽게 “이제는 내암을 재평가하고 그가 건립을 주도한 용암서원에 함께 배향하는 걸 검토할 때”라고 말한다. 다른 관점도 있다. 남명이 잊힌 것은 그가 추구한 학문의 특성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칼을 찬 유학자 남명 조식]을 쓴 박병련·이종묵 등은 “그는 극단적으로 말을 아꼈다”며 “문자를 고르고 있으면 뜻을 잃는다며 시를 폐기했고, 병든 세상과 담을 쌓아 편지를 남기지 않았다”고 했다. “자신을 알리고 학파를 세울 중심인 저술도 정주(程朱) 이래 하나도 보탤 것이 없다며 거부했다. 그러니 그를 무엇으로 기억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들은 “남명이 경전의 일자 일구를 신성시하지 않고 일상의 실천적 관점에서 취사했다”며 “그런 점에서 남명은 주자학적이기보다 양명학적 풍모가 두드러진다”고 봤다. 남명학의 지향점도 후대의 조명을 받는 걸림돌이 됐다는 것이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102호 (2021.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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