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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근·현대 건국운동사 | 근·현대 건국 담론(3)] 손병희의 ‘자치형(自治形) 입헌군주제’ 구상 

동학 농민이 다스리는 문명국 실현 꿈 

일본 직접 본 뒤 ‘척양척왜’ 노선 버리고 개화파와 손잡아
조선의 친러정권 몰아내려 한·일 군사동맹 추진하다 무산


▎1994년 동학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공연된 신창극 ‘천명’. 출연 배우들이 동학혁명 당시 상황을 재현하고 있다.
손병희는 동학의 제3대 교조(敎祖)다. 호는 의암(義菴)이다. 1861년(철종 12) 충북 청원에서 태어났다. 그는 22세 되던 1882년(고종 19) 동학에 입도(入徒)했다. 제2대 교조 최시형의 측근이 된 그는 북접(北接) 지도자로 성장했고, 34세 되던 1894년(고종 32) 남접 지도자 전봉준 등과 합세해 갑오 농민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동학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에 참패했다. 손병희는 최시형과 함께 깊은 산속으로 피신해 겨우 살아남았다. 하지만 전봉준·김개남 등 수많은 동학 지도자가 체포돼 죽임을 당했고, 동학은 궤멸 직전으로 몰렸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자 최시형은 1897년(고종 35) 교조에서 물러났고, 손병희를 제3대 교조로 임명했다.

37세의 동학 교조 손병희는 갑오 농민운동 실패 원인과 동학 재건 방법을 놓고 고민했다.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양척왜(斥洋斥倭)를 기치로 궐기했던 갑오 농민운동은 왜 실패했을까? 보국안민과 척양척왜라는 목표 자체가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목표는 좋았는데 방법론이 잘못된 것일까? 궤멸 직전에 몰린 동학을 재건할 방법은 무엇일까? 이런 문제를 놓고 몇 년간 고민하던 손병희는 척양척왜의 대상인 서양과 일본을 정확히 아는 것이 급선무임을 깨달았다. 적을 정확히 알아야 어떻게 싸울지 대책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1900년(광무 4)에 손병희는 미국으로 망명하려 했다. 하지만 당시 동학의 2인자 김연국이 반대해 성사되지 못했다. 그때 김연국이 왜 반대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마도 벼랑 끝 위기에 몰린 동학을 내버려두고 교조가 해외 망명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생각했을 듯하다.

그러나 전봉준과 함께 갑오 농민운동의 주모자로 몰린 손병희는 도피처를 찾아야 했다. 만에 하나 교조 손병희가 체포된다면 동학은 재기 불능으로 빠질 수 있었다. 신변 안전을 도모함과 동시에 동학을 세계 대세에 맞춰 혁신하려면 해외 망명밖에 대안이 없었다. 이런 공감대에서 손병희는 1901년(광무 5) 3월, 원산에서 배를 타고 부산을 거쳐 나가사키로 갔다. 우선 일본에 갔다가 미국으로 망명할 생각이었다. 세계 대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일본보다 미국이 적합하다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비가 넉넉지 못해 일본으로 망명하게 됐다. 당시 손병희의 나이 41세였다.

손병희의 일본 망명은 안창호의 미국 유학보다 1년여 앞섰다. 만약 손병희가 처음 목표대로 미국 망명에 성공했다면 그의 사상은 훨씬 더 세계화됐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안창호와 만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안창호와 손병희 두 사람이 협력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됐다면 1900년 대 민족운동 그리고 동학운동이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손병희가 미국 망명에 실패하고 일본에 체류함에 따라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손병희는 미국의 안창호 대신 일본의 개화파 망명객들을 만나 협력하게 됐다.

손병희는 일본으로 망명할 때 손병흠과 이용구 두 사람을 대동했다. 손병흠은 동생이고, 이용구는 핵심 측근이다. 특히 이용구는 손병희보다 7세 아래로 동학의 차기 지도자로 손꼽히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손병희와 이용구의 일본 망명은 현재와 차기 동학 수뇌부의 일본 망명이란 측면에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손병희는 1906년(광무 10) 1월 귀국하기까지 5년 동안 오사카·교토·도쿄 등에 머물며 일본과 서양을 공부했다.

충청도 갑부 행세하며 개화파 망명객들과 교류


▎독립운동가이자 동학 제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
또한 일본에 망명한 개화파 인사들과도 교류했다. 그러면서 손병희는 크게 바뀌었다. 특히 서양과 일본을 야만으로 간주하던 기존 생각이 변했다. 손병희가 직접 확인한 일본은 절대 야만이 아니었다. 냉정히 봤을 때 일본은 선진국이었고 오히려 조선은 후진국이었다.

본래 동학의 척양척왜는 조선의 문명과 백성을 수호하기 위해 야만 서양과 야만 일본을 몰아내자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일본에 가서 직접 확인해보니 서양과 일본은 보고 배워야 할 문명국이자 선진국이었다. 배척 대상이 아니라 학습 대상이었던 것이다. 깊은 고민 끝에 손병희는 척양척왜 노선을 버리고 문명개화 노선으로 전환했다.

손병희의 문명개화 노선은 특히 박영효·권동진·조희연·오세창 등 개화파 망명객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갑신정변 실패 후 김옥균·박영효 등이 일본 망명을 선택한 이래로 개화파 인사들은 정치적 위기에 몰릴 때마다 일본으로 망명했다. 권동진·조희연·오세창 역시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공히 친일반중 또는 친일반러에 입각한 문명개화를 추진하다 실패해 일본에 망명한 사람들이었다. 강력한 동지애로 결속한 그들은 일본 협력을 얻어 권토중래(捲土重來)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일본에 망명한 손병희는 처음 이상헌이란 가명을 쓰며 충청도 출신 갑부 행세를 했다. 권동진은 1930년 1월 31일 자[동아일보] 기사에서 손병희를 처음 만났을 때의 회고담을 소개했다. 그중에 “충청도 어느 고을 아전으로, 상납한 돈을 훔쳐가지고 도망해온 사람 같으나. (…) 자객이 아닌 것만은 간파했으므로 돌아가 조희연에게 자객은 아니니 안심하라고 말해뒀다”는 내용이 있다. 충청도 갑부 행세를 하는 손병희를 보고 공금을 횡령해서 도망한 아전이 아닐까 의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손병희를 처음 만났을 때 권동진의 첫 번째 관심은 자객 여부였다. 일본에 망명 중이던 김옥균이 1894년 자객에게 암살당한 후 개화파 망명객들은 조선에서 낯선 이가 올 때마다 자객 여부부터 의심했던 것이다. 권동진 역시 정체불명의 손병희를 처음 만났을 때 자객 여부부터 의심했다. 확인 결과 자객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자 권동진은 조희연 등 동지들에게 안심하라고 알려줬다. 그 결과 권동진·조희연·오세창 등 개화파 망명객들은 손병희와 가까운 사이가 됐고, 결국 손병희는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권동진의 회고담에 의하면 손병희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면서 “운동비는 몇 만원이라도 댈 것이니 널리 동지를 규합해 장차 큰일을 이루길 준비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권동진은 “우리도 굳게 맹세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 목적을 달함에는 당시 수백만 대중을 가진 동학당의 당력(黨力)과 자금이 실로 백만 대군을 얻은 것보다도 나은 것 때문”이라 한다. 이로 본다면 손병희와 개화파 망명객들은 상호 필요에 의해 협력관계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기왕의 동학과 개화파가 서로 갈등했던 근본 이유는 동학의 척양척왜 노선 때문이었다. 그런데 동학의 척양척왜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보국안민을 위한 방편일 뿐이었다. 따라서 손병희 입장에서는 척양척왜가 보국안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었다. 심지어 개화파가 주장하는 문명개화가 동학의 보국안민과 궁극적으로 상통하는 목적이라면 문명개화 노선으로 바꿀 수도 있었다. 손병희는 문명개화된 일본 현실을 자신이 직접 확인했고 나아가 개화파 망명객들과도 교류하면서 척양척왜 노선이 비현실적임을 깨달았다.

동학은 ‘폐정개혁’, 개화파는 ‘문명개화’ 염원


▎1915년쯤 손병희 선생이 타고 다니던 자동차. 왕족이나 귀족이 아닌 민간인으로는 처음 자가용을 이용한 인물로 전해진다.
아울러 당시 국제 현실에서 진정한 보국안민을 위해서는 문명개화가 절실함도 깨달았다. 이런 깨달음에서 손병희는 동학이 추구하는 ‘큰일’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개화파 망명객들의 도움이 절실하다 판단해 협력을 제안했다고 이해된다. 개화파 망명객들 역시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동학의 도움이 절실했다.

당시 손병희가 언급한 ‘큰일’이란 갑오 농민운동에서 동학군이 추구했던 ‘폐정개혁(弊政改革)’이라 할 수 있고, 권동진이 언급한 ‘우리 목적’이란 개화파가 추구했던 ‘문명개화’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손병희와 개화파 망명객들이 협력한다는 것은 동학의 폐정개혁과 개화파의 문명개화가 협력한다는 것이나 같은 의미였다. 그런데 이 문제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가권력 그리고 국가체제라는 측면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폐정개혁이나 문명개화는 궁극적으로 국가권력 그리고 국가체제와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갑오 농민운동에서 동학군이 추구했던 폐정개혁은 폐정의 내용 그리고 그 폐정을 개혁할 방법론이 중요했다. 갑오농민운동 당시 전봉준 등의 농민군이 주장한 폐정이란 궁극적으로 농민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는 부정부패한 국가권력이었다. 그런 부정부패한 국가권력을 개혁할 수 있는 방법론으로 전봉준 등 동학군이 제안했던 것이 이른바 집강소(執綱所)라고 하는 군현 단위의 농민 자치조직이었다.

즉 갑오 농민운동에서 농민군은 군주제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다만 군주제의 폐정을 개혁하기 위한 대안으로 집강소라고 하는 농민 주도의 지방 자치를 제안했던 것이다. 김옥균·박영효 등 개화파 역시 군주제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군주는 문명개화를 추진할 주체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해 군주를 상징적인 존재로 놓고 중앙 개화파 관료들이 문명개화를 추진하는 국가체제를 세우고자 했다. 그런 생각은 결국 입헌군주제로 귀결됐다.

그러므로 손병희와 개화파 망명객들이 협력해 국가권력을 장악한다면 군주는 상징적인 존재가 되면서 중앙권력은 개화파 망명객들이 장악하고, 군현 단위의 지방권력은 동학이 장악하는 국가체제로 바뀔 가능성이 컸다. 그런 국가체제라야 손병희와 개화파 망명객들 공히 만족할 수 있고, 나아가 상호간 협력도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군현 단위의 지방권력을 동학이 장악한다는 것은 집강소라고 하는 농민군들의 염원이 실현되는 것이고, 중앙권력을 개화파 망명객들이 장악한다는 것은 입헌군주제라고 하는 개화파의 염원이 실현되는 것이다.

이처럼 군주를 상징적인 존재로 만들고 중앙권력과 지방권력을 개화파 망명객들과 동학이 양분해 장악하는 국가제체는 ‘자치형(自治形) 입헌군주제’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자치형 입헌군주제는 다분히 동학 농민군의 요구가 반영된 한국적 국가체제로 이해될 수 있다.

권동진의 회고에 의하면 “운동비는 몇 만원이라도 댈 것이니 널리 동지를 규합해 장차 큰일을 이루길 준비하라”는 손병희의 제안에 그는 “우리도 굳게 맹세했다”고 답했다. 이는 손병희와 개화파 망명객들이 상호 협력을 맹세했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손병희, 러일전쟁에서 일본 승리 예상


▎1885년 초 일본 망명 시절의 갑신정변 주역들. 왼쪽부터 박영효·서광범·서재필·김옥균.
물론 상호협력이란 힘을 합쳐 국가권력을 장악한 후 동학의 폐정개혁과 개화파의 문명개화를 실현하겠다는 의미로 봐야 한다. 당시 손병희와 개화파 망명객들이 상호협력 해 국가권력을 장악한 뒤 ‘자치형 입헌군주제’를 확립하겠다고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상호협력은 궁극적으로 ‘자치형 입헌군주제’를 지향할 수밖에 없었다. 손병희는 ‘자치형 입헌군주제’의 세부 내용을 1906년 (광무 10) 저술한 [향자치(鄕自治)]에서 자세하게 밝혔다.

손병희는 1902년(광무 6) [삼전론(三戰論)], 1903년(광무 7) [명리전(明理傳)] 등을 통해 문명개화를 공개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나아가 1903년(광무 7) 초부터는 한·일 군사동맹까지도 주장했다. 손병희가 한·일 군사동맹을 주장하던 시점에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1903년 음력 3월의 이른바 용암포 사건 때문이었다. 용암포 사건이란 러시아군이 압록강 하구의 용암포를 무력점령하고 조차(租借)를 요구한 사건이다. 일본은 용암포 사건을 러시아의 한반도 무력점거를 위한 사전포석으로 보고 전쟁을 해서라도 저지하고자 했다.

당시 일본에 체류 중이던 손병희는 전쟁이 난다면 일본이 승리할 것으로 예상했다. 근거는 네 가지였다. 첫째, 러시아는 수만 리 원정(遠征)이므로 지리에서 불리하다. 둘째, 전쟁 동기가 러시아는 영토 확장과 부동항 획득이지만, 일본은 한반도를 점거하려는 러시아 위협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므로 일본이 더 절박하다. 셋째, 러시아는 쇠퇴 중이고 일본은 번영 중이므로 일본의 전의(戰意)가 훨씬 강하다. 마지막으로 일본은 국운을 걸고 결사항전 자세로 임하기에 승리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 승리가 예상된다고 하더라도 러시아는 세계적인 강대국이었다. 설혹 일본이 단기적으로 이긴다고 해도 장기적으로 보면 러시아는 일본에 크나큰 후환이 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를 지구상에서 완전히 없애버리지 않는 한 패배한 러시아가 언젠가 복수하고자 할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려면 일본은 확실한 대책이 필요했다.

1902년 1월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비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무엇보다도 전략적 요충지 한반도에 자리한 대한제국과 군사동맹이 절실했다. 그러나 당시 대한제국은 친러파 관료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어서 불가능했다.

손병희는 이 같은 국제 환경이 동학 재건과 국가 혁신에 오히려 도움이 될 것으로 봤다. 우선 동학이 일본 협력을 끌어내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만약 동학이 나서서 친러파 정권을 타도하겠다고 한다면 일본이 적극 협조할 가능성이 컸다. 일본 협력으로 친러파 정권을 타도한다면 동학이 주도권을 잡고 국가를 혁신시킬 수도 있었다.

나아가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다면 일본은 대한제국과의 군사동맹을 장기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도 계속 우호적으로 나올 것으로 기대할 수 있었다. 이런 판단과 기대에서 손병희는 1903년(광무 7) 초부터 일본과의 군사동맹을 주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손병희 선생 기념사업회가 1967년 편찬한 [의암 손병희 선생 전기(義菴孫秉熙先生傳記)]에는 “그러므로 우리 한국은 러시아에 대하여 선전포고 하는 동시에 일본과 동맹하여 공동출병의 입장을 취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한국의 내각은 모두 친러파에 속하기 때문에 도저히 가망이 없다는 것이다. 부득이 동학군의 힘으로 정부를 개혁하는 수밖에 없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군 당국과도 사전양해가 성립되지 않고는 갑오혁명 때와 같은 사태가 벌어질 것을 우려하여, 손병희 선생은 권동진으로 하여금 일본군 참모 다무라(田村)를 만나 사유를 말하고 쾌락을 받는 동시에 손병흠을 국내에 파견하여 국내의 동지들로 하여금 거사의 준비를 서두르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지방권력 장악 대비해 동학 조직 재정비 나서


▎동학혁명에 참여했다 체포된 농민군이 목에 칼을 쓰고 있다.
위에 등장하는 일본군 참모 다무라는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1902년(광무 6) 일본 육군참모본부 차장이 된 인물이다. 손병희는 권동진의 소개로 1903년(광무 7) 초 다무라를 만나 한·일 군사동맹을 제안해 쾌락(快諾)을 받았다고 하는데, 구체적인 협력 방안은 “먼저 일본 병사로 하여금 상인으로 변장해 비밀리에 불통상항(不通商港)에 들어가 있다가 동학교도들과 더불어 일제히 성세(成勢)를 올리며 일어나서 곧바로 경성에 충격을 줘 당시 정부 내의 친러파를 제거하고, 그다음에 한편으로는 내정을 혁신하고 한편으로는 대군을 내보내서 일본국과 같이 한국도 참전해 러시아를 격퇴시키자는 것”이라 한다.

권동진의 회고는 이 내용을 다음과 같이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우리는 수백 만의 동학당을 움직일 수 있고, 또한 개명의 선봉인 독립협회 잔당을 규합하면 가위 공고한 민당(民黨)이 돼 조선 정부쯤이야 능히 움직일 수 있다고 하였소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민당의 힘으로 조선 정부를 견제해 러시아의 진출을 제어하고 그 대상으로 우리가 정부를 조직할 때 일본이 원조해주기로 다무라와 사이에 밀약이 체결됐소이다.”

요컨대 동학·개화파 그리고 일본군이 합세해 친러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후 일본과 군사동맹을 맺고 문명개화를 추진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방안은 지난 1884년 갑신정변 때 김옥균이 일본군과 협력해 친청파를 타도하고 문명개화를 추진하고자 했던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갑신정변의 역사에 비춰보면 일본군이 손병희와 개화파 망명객들의 기대와 예상대로 끝까지 움직여줄지는 사실 미지수였다.

아무튼 다무라와 협상 후 손병희는 한·일 군사동맹에 필요한 조치들을 취하기 시작했다. 우선 동학 조직을 재정비했다. 1903년(광무 7) 2월, 기왕의 접주제(接主制)를 강화해 대두령제(大頭領制)로 전환했다. 대두령제는 100호(戶) 이상에 해접주(該接主), 500호 이상에 수접주(首接主), 1000호 이상에 대접주(大接主), 1만 호 이상에 의창대령(義昌頭領), 5만 호 이상에 해명대령(海明大領), 10만 호 이상에 수청대령(水淸大領)을 두는 체제였다.

당시 동학의 대접주가 200여 명, 대령이 100여 명이었다고 한다. 대접주는 1000호 이상에 뒀으므로, 대접주 200여 명이라고 하면 적어도 20만 호가 넘었다는 의미이고, 호당 인구를 5명으로 계산하면 100만이나 된다. 그동안 손병희의 노력으로 동학 세력이 크게 확장된 결과라 할 수 있다. 당시 2000만 명으로 추산되던 대한제국 총인구에서 100만은 어마어마한 수였다. 동학교도가 100만이라면 그중에서 10만 병력을 동원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당시 손병희가 대두령제로 동학 조직을 개편한 이유는 비상시 10만 병력동원 및 성공 시 지방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사전포석으로 이해된다.

동학 조직을 재정비한 손병희는 동생 손병흠과 측근 이용구를 국내로 파견해 거사를 준비하게 했다. 특히 이용구는 1903년(광무 7) 3~5월 사이, 수청대령(水淸大領) 자격으로 귀국해 조직 강화에 주력했다. 그 결과 1903년 가을쯤에는 100만 동학교도가 결집했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10만여 병력을 동원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 10만여 동학군이 일본군과 합세해 일시에 궐기한다면 친러파 정권 타도는 어렵지 않을 수 있었다.

손병흠·다무라 죽음으로 한·일 군사동맹 무산


▎1905년 1월 5일 뤼순(旅順)에 있는 호두산 203고지 (러시아군의 요새)에서 일본군에 투항하는 러시아 장병들.
그런데 국내의 동학 조직을 재정비한 후 손병흠은 보고차 일본으로 가기 위해 1903년 8월 3일 부산에 갔다가 여관에서 객사했다고 한다. 설상가상 손병희와 밀약했던 다무라 역시 이틀 뒤인 8월 5일 급사했다. 이 결과 1903년(광무 7)가을이나 겨울쯤, 동학과 독립협회 잔당들 그리고 일본군이 합세해 친러파 정권을 타도하고 국가권력을 잡으려던 계획은 무위로 돌아갔다.

1903년 봄부터 손병희가 일본과의 군사동맹을 주장하자 그를 친일매국노로 간주해 암살하려는 한국인도 등장했다. [의암 손병희 선생 전기]에 의하면 1903년(광무 7) 5월 15일 저녁, 손병희가 도쿄 우에노(上野) 공원을 홀로 산책하고 있을 때 한국 유학생 한 명이 품속에서 시퍼런 단도를 꺼내들고 다가와 “내가 네 뒤를 따른 지 이미 오래됐다. 오늘은 내 칼에 죽어봐라. 이놈 네가 우리 조국을 왜놈에게 팔아먹으려는 매국노 아니냐?”라며 찌르려 했다고 한다.

그때 손병희는 “매국노를 죽이겠다 하니 듣기에 반갑소만 자객은 사실을 바로 안 뒤에 사람도 바로 알고 죽여야지. 만일 그렇지 않으면 일을 그르칠 수도 있고 후회하기도 쉬운 것이니, 먼저 내 이야기나 들어보고 나를 죽여도 죽이는 것이 늦지 않을 것 아닌가”라고 한 뒤 한·일 군사동맹의 이점을 설득했다고 한다.

손병희의 설득 논리는 “이이제이(以夷制夷)로 이번 기회에 일본으로 하여금 러시아를 막게 하자는 것이요, 또한 일본을 가까이 하는 사이에 내정을 탐지할 수도 있으며 한국 정신을 가지고 일본 정신을 매수할 수도 있는 것이니, 이것이 겉으로 보면 친일인 것 같으나 내용으로 보면 반로(反露)인 동시에 반일본이라, 동양에서 먼저 러시아를 몰아낸 뒤에 일본 정신을 빼앗아 주기만 하면 장래의 동양은 한국의 동양으로 될 것이 아니겠소”였다.

즉 손병희는 동학사상으로 일본 정신을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한·일 군사동맹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 점이 문명개화를 주장하며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김옥균과의 차이라면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손병희가 암살 위험을 무릅쓰며 추진했던 한·일 군사동맹은 손병흠과 다무라의 죽음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그들의 사망 소식을 접한 손병희는 3일 간이나 먹지 않고 크게 걱정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1903년 손병희가 개화파 망명객들과 추진했던 문명개화 및 한·일 군사동맹은 실패했다. 하지만 이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었다. 무엇보다도 동학과 오랫동안 갈등관계에 있던 개화파와 협력관계를 맺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이었다. 다음으로 동학의 척양척왜 노선을 문명개화 노선으로 바꿨다는 점에서도 역사적이었다.

마지막으로 보국안민과 집강소라는 다소 모호하던 동학의 국가 관념이 개화파 망명객들과의 협력을 통해 훗날 손병희의 ‘향자치’에서 밝혀진 ‘자치형 입헌군주제’로 구체화됐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이었다. 특히 ‘자치형 입헌군주제’는 동학의 요구를 적극 반영한 한국적 국가체제라는 점에서 역사적이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2103호 (2021.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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