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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의 세종 리더십과 부민(富民)의 길(15)] 적재적소 인물 활용한 성군의 용인술 

군주는 인재를 알아보고 신하는 능력으로 보답하다 

사후에도 왕의 묘실 지킨 영광 누린 황희·맹사성·최윤덕
흠결있는 신하들도 국정 도움된다면 과감히 발탁해 기용


▎서울 경복궁 근정전 앞에 배열된 정1품 품계석. 조선 시대 영의정이 조회나 하례 등 궁궐 주요 행사 때 서 있었던 자리다.
세종 때는 유능한 신하가 많았다. 왕이 직접 발굴하거나 양성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요즘은 어떠한가. 고위 공직자의 하마평이 나올 때마다 쓸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푸념이 들린다. 대한민국에 인재가 그렇게도 없는 것일까 잠시 생각하다가도 고개를 가로젓는다. 세종이 인재를 아끼고 후원하였듯 노력한다면, 우리의 공직사회나 기업에 인재가 곧 차고 넘칠 것이다.

황희, 맹사성 그리고 최윤덕은 그 시대 최고의 인물이었다. 사후에도 그들은 종묘에서 왕의 묘실을 지키는 영광을 누렸다. 특히 황희는 작고한 지 닷새 만에 문종의 특명으로 묘실에 배향됐다.

조선 시대 역사가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세종 시절의 탁월한 재상과 명신을 수십 명이나 언급했다. 이미 언급한 재상들 말고도, 유관·허조·윤회·신개 등 허다한 명신을 열거했다. 이변과 정갑손, 김하도 빠뜨릴 수 없다. 이 글에서는 세종이 자랑스러워했고 아꼈던 신하에 대해 얘기하려 한다. 되도록 일반에 별로 알려지지 않는 사실에 주목해 세종과의 독특한 관계를 설명하고 왕의 리더십을 알아본다.

왕을 보좌한 공을 따지면 황희와 맹사성 그리고 최윤덕을 앞지른 이가 없었다. 당대의 공론도 그러해, 왕의 묘정(廟庭)에 그들의 위패를 모셨다. 그중 으뜸은 황희다. 그는 관대하면서도 강직한 보수주의자였다. 황희는 세종 8년(1426) 64세 나이로 정승에 임명돼 80세까지 재임했다. 의정부 재상으로 재직한 기간이 27년이었다(연려실기술). 세종과 호흡이 얼마나 잘 맞았는지 짐작할 만하다.

세종의 해결사 황희, 조선 최고의 정승


▎황희 초상. 황희는 세자 양녕의 비리를 비호하다가 전북 남원으로 유배당했다. 하지만 세종은 그를 중용해 세종 시대의 대표적인 재상으로 만들었다.
세종은 황희의 어떤 점을 높이 샀을까. 첫째, 그는 실무에 두루 밝았다. 아흔이 될 때까지도 기억력이 좋아 국가의 제도와 문물(典章) 전반을 정확히 꿰뚫었다. 유능한 젊은 관리라도 그의 총명을 따라가지 못했다. 사람들이 황희를 조선 최고의 정승으로 꼽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둘째, 황희는 세종이 각종 제도를 함부로 고치지 못하도록 제동을 걸었다. 세종은 개혁을 다소 급하게 몰아붙이는 경향이 있었다. 현명한 왕은 자신의 특성을 냉철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누군가 적절히 통제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이 역할을 맡았던 것이 황희였다. 그는 모든 사안을 무척 관대하게 처리했으나, 중요 현안에 대해서는 시비를 엄격히 가렸다. 그럴 때면 자신의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고 누구보다 강경했다.

“신은 변통하는 재능이 부족하여, 이 제도의 변경을 가볍게 의논할 수 없다고 생각하옵니다.” 황희가 이렇게 나올 때마다 세종은 잔뜩 긴장했고, 저절로 개혁 속도는 조절됐다. 황 정승의 반대를 계기로 급진적으로 추진되는 정책은 그 문제점이 철저히 검토됐다. 세종도 그것이 국가적으로 큰 이익이라고 믿어, 시간이 갈수록 황희를 더욱 깊이 신뢰했다. 황희 역시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백성을 위해 견제할 뿐이었다. 왕과 정승은 시간을 충분히 두고 서로의 입장 차이를 조절할 수 있었다.

셋째, 세종에게 황희는 해결사였다.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마다 황희의 의견을 물었다. 그의 도움으로 왕의 뜻에 반대하는 신하도 설득했다. 황희만 움직이면 거의 모든 문제가 풀리곤 했다. 그에 대한 신임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왕은 인사문제도 비밀리에 그와 상의했다. 세종 22년(1440) 6월 19일, 왕은 좌승지 성염조를 황희의 집에 보내어 함길도 절제사 김종서의 후임을 비밀리에 상의했다. 황희가 좌부승지 이세형을 천거하자 세종은 그대로 단행했다.

여기서 황희와 김종서의 특수 관계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김종서가 공조판서였을 때였다. 하루는 황희 정승이 공조에 와서 일을 보는데, 김종서가 술과 과일 안주를 내놓았다. 그러자 황희가 격노했다. “나라에서는 예빈시를 두어 정승을 대접한다. 배가 고프면 내가 예빈시를 통해 해결할 터인데, 대감이 왜 향응을 제공하는가.” 김종서는 혼비백산했다. 이후 김종서는 병조와 호조의 판서를 연달아 맡았는데, 작은 실수라도 저지르면 황희가 심하게 꾸짖었다. 김종서의 죄를 대신해 그 하인을 매질한 일도 있었다. 황 정승의 대응에 지나치다고 하는 동료 정승들도 있었고 당사자인 김종서는 매우 힘들어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맹사성이 황희에게 까닭을 물었다. 의외의 답이 나왔다. 김종서를 아끼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김종서가 성격이 강하고 과감한 추진력을 가진 이라, 훗날 정승이 돼 국사를 경솔하게 처리할까 봐 염려한다고 했다. 황희는 김종서의 기세를 조금이라도 꺾어야 장차 매사를 삼갈 것이라고 믿었다. 황희의 깊은 뜻을 알게 된 맹사성이 탄복했다. 과연 황희는 조정을 물러날 때가 되자 김종서를 자신의 후임으로 추천했다. 자신의 정승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 황희는 김종서를 엄격하게 대했던 것이었다.

그에 비해 맹사성은 완전히 다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고 매사에 공평했고, 청렴결백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맹사성은 고려 명신 최영 장군의 손녀사위이기도 했다. 황희는 재물욕을 참지 못해 말썽을 일으킨 적도 있었으나, 맹사성은 흠잡을 데 없이 모범적이었다. 성품이 고상해 재산 늘리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한 나라의 정승인데도 품질이 나쁜 녹미(祿米)를 먹고 살았다. 녹미란 나라에서 주는 묵은쌀로 하급관리조차 그것으로 밥을 짓지 않았다. 언젠가 맹사성의 부인이 햅쌀로 밥을 지어 올리자, 맹 정승은 이 쌀이 어디서 났느냐며 불쾌한 기색을 보이기도 했다. “국록을 받았으면 그 쌀을 먹는 것이 너무 당연한 일이오.” 맹사성은 이렇게 믿고 실천하는 이였다.([무인기문(戊寅記聞)])

청렴하고 소탈했던 맹사성과 최윤덕


▎충남 아산에 위치한 맹사성 기념관이 보관 중인 맹사성 초상화.
세종은 조정 신하들이 맹사성의 맑은 행실을 보고 배우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는 겸손하고 예의 바른 선비라 [실록]에도 예화가 보인다. “비록 품계가 낮은 이가 찾아오더라도, 맹사성은 관대를 갖추고 대문 밖까지 나와서 맞았다. 손님은 반드시 윗자리에 앉혔고, 손님이 떠날 때는 몸을 굽히고 손을 모아 절한 다음 그가 말에 올라탄 뒤에야 집 안으로 들어갔다.”(세종 20년 10월 4일, 실록 졸기(卒記)) 이처럼 세종은 ‘맹사성’이라는 도덕책을 곁에 두면서 조정에 청렴한 기풍을 일으키려고 했다.

정승 최윤덕은 무사였다. 세종은 소탈하고도 믿음직스러운 그를 마음에 들어 했다. 정승이 되기 전에도, 이후에도 그의 취미는 농사였다. 공무를 마치면 으레 관청 뒤꼍으로 나가서 빈 땅을 손수 갈아 오이도 심고 그 밖의 채소도 가꿨다. 부정부패나 사치와는 거리가 먼 이였다.

세종이 최윤덕을 높이 평가한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국방이 중요했기 때문에 왕은 군사 실무를 정확히 아는 정승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최윤덕은 왕의 기대에 부응해 군사제도의 개편과 무기개발에 필요한 제안을 내놓았다. 전국의 화통전(火㷁箭)과 각종 무기를 규격화할 수 있었던 건 그의 전문지식 덕분이었다(세종 19년 5월 29일). 세종 때 국방력이 강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이처럼 최고위 정승들부터 각기 개성이 다르고 관심 분야나 특기도 다양했다. 세종은 그들이 저마다 강점을 발휘하도록 힘썼다. 왕은 국정을 안정적으로 이끌면서도 너무 권위적인 방향으로 흐르거나 수구적인 병폐를 낳지 않게 조심했다.

조정 대신 중에는 탁월한 이가 많았다. 유관은 학식이 풍부하면서도 겸손하고 검소했다.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는데도 초가집 한 칸이 전부였고, 늘 베옷을 입고 짚신을 신었다. (성현, [용재총화]) 앞에서도 확인했듯, 세종은 청렴결백한 신하를 선호했다. 유관도 예외가 아니었다. 유관과는 대조적으로, 허조는 강직하고 엄격했다. 그는 공석에서 사적인 일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자기의 신념을 굽히는 적도 없어 아무리 대세가 그렇다 하여도 무조건 따른 적이 없었다(세종 21년 12월 28일 자 실록 졸기).

허조의 강직한 성품을 세종은 귀하게 여겨, 그를 만날 때면 신하 중에서 누가 현명한지를 물었다. 왕은 허조가 추천하는 인재를 발탁할 때가 많았으나, 허조는 그런 말을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추천으로 출세한 관리는 허조가 뒤에서 도왔다는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한번은 왕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감이 사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을 임용한다고 불평이 있더라.” 그러자 허조의 대답이 통쾌했다. “진실로 그러하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쓸 만한 인물이라면, 제 친척이라서 남이 비방을 할 염려가 있어도 저는 구애받지 않사옵니다. 만약에 그 사람이 못난이라면 신이 어찌 감히 사사로이 임용을 꾀하겠습니까.” 왕은 허조의 충심과 판단력을 믿어, 10년이나 이조판서 자리를 맡겼다.

마침내 그가 임종할 때가 되자 세종은 어의(御醫)를 두 명이나 파견했다. 인재를 아끼는 왕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가. 그런데 병세가 매우 악화하자 허조는 머리를 조아리며 의원들을 돌려보냈다. 그러고는 자제들에게 말했다. “나는 이미 70세도 넘었고, 지위도 정승에 이르렀다. 임금께서는 실천하기 어려운 일도 내가 간언하면 꼭 하셨다. 비록 죽더라도 내게는 여한이 없다.” 말을 마치자 그는 곧 조용히 세상을 하직했다.

능력 있다면 작은 일탈은 덮어 둬


▎조선시대 왕이 신하들의 하례를 받던 덕수궁 중화전의 천장과 내부 모습. 천장에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용이 조각돼 있다.
세종은 나라를 운영하는데, 글의 힘이 크다고도 여겨 문장가를 우대했다. 그가 가장 총애한 문장가는 윤회였다. 그러나 그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실록]에 보면, 왕은 윤회를 불러 이렇게 꾸짖었다. “그대는 총명하고 똑똑한 사람인데 술을 과도하게 마신다. 앞으로는 태상왕(정종)과 상왕(태종)이 하사하는 술 외에는 절대 과음하지 말라.”(세종 2년 9월 14일)

그래도 윤회의 음주벽은 여전했다. 왕은 그에게 “석 잔 이상은 절대 마시지 말라”고 특명을 고했다. 그러자 윤회는 유난히 큰 그릇을 술잔이라며 가지고 다녔다. 석 잔을 마신다고 하였으나 실은 배나 많이 마시게 되는 셈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세종은 웃으며 말했다. “술을 많이 마시지 말라고 경계한 것이, 도리어 더 마시라고 권한 셈이 되었구나.” ([필원잡기])

늘 술에 취해 있었으나 윤회의 재능은 비상했다. 언젠가는 갑자기 대궐에 불려갔는데 말 그대로 고주망태였다. 그를 데려간 신하들이 조바심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임금 앞에 이르자, 윤회는 정신을 차려 평상시와 똑같은 언행을 보였다. 그런 그에게 세종이 교서를 작성하라고 명하자, 잠깐 사이에 붓을 휘둘러 한 편의 글을 완성했다. 잘못 쓴 부분이 한 구절도 없었다. 세종이 감탄하며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 “정말 천재로구나!”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서로 전하며, 문장의 별(文星)과 술의 별(酒星)이 한데 모여 한 어진 선비를 낳았다고 평했다. ([필원잡기]) 세종은 엄숙하고 단정한 선비를 좋아하는 편이었나, 때로는 그것과 거리가 먼 선비라도 재능이 있으면 기꺼이 포용했던 것이다.

이외에도 조정 신하 중에는 특이한 인재가 많았다. 문신 이변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임진왜란 때 종묘사직을 위기에서 구한 이순신 장군의 5대조였다. 이변의 성품은 얼음처럼 차갑고 엄격했지만, 청렴 강직하다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때로는 도가 지나쳐 상관과도 마찰이 종종 발생했다. 그러나 세종은 올곧은 성품을 높이 평가해 이변을 이조 참의로 기용했다. ([연려실기술] 제3권)

조정의 인사정책에 깊숙이 관여하게 되자, 그는 상관인 이조판서와 충돌하기 일쑤였다. 한 번은 어떤 관리가 생선과 고기를 선물로 가져왔으나, 이변은 뇌물이라며 즉각 거절했다. 그러나 판서는 그 사람의 선물을 받았다. 그날 판서가 이변을 불러서 음식을 대접했는데, 고기 요리가 나오자 이변은 손사래를 치며 뇌물로 받은 고기는 먹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필원잡기]) 이변의 이러한 성품을 닮아서일까. 이순신 장군도 지나칠 정도로 청렴했다.

세종이 이변을 애호한 또 다른 이유는 특출난 중국어 능력이었다. 그는 문과를 거쳐 조정에 나온 선비였으나, 독학으로 중국어를 공부해 대가가 되었다. 훗날 예종의 어전에서 신숙주는 다음과 같이 제안할 정도였다. “중추부지사 이변은 세종 때부터 중국어의 전문가로 손꼽힙니다. 그 때문에 승문원과 사역원 관리들은 모두 이변을 스승으로 모시고 중국어를 배웠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국법이 엄하여 하급관리가 고관을 방문하지 못합니다. 아무도 이변에게서 중국어를 배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 관리들이 그에게서 중국어를 배울 수 있게 허락하시면, 나라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예종은 신숙주의 뜻을 따랐다(예종 1년 11월 13일).

합당한 비판한 정갑손에게 벌 안 내려


▎경북 경산 금호서원 경덕사 내 문경공경암 허조의 위패와 초상화.
이변은 세종의 명으로 중국에도 다녀왔고, 통역관 양성에 필요한 중국어 교재를 직접 개발하기도 하였다. 세종은 명나라와의 관계를 더욱 개선하려고 중국어를 학습할 정도였으니, 중국어에 능통한 이변이 눈에 띈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강직한 신하를 애호했던 왕은 정갑손에게도 기대를 걸었다. 그는 얼굴도 미남인 데다 키도 컸고 수염까지 아름다웠다. 성품이 워낙 강직해 탐욕스러운 관리들은 모두 그를 두려워했다. 세종은 자주 그를 승진시켰고 대사헌에 자리에 오르게 됐다. 그때 이조는 인사행정에 착오를 일으켜 여론이 나빴다. 왕이 사정전에서 조회를 열자, 정승 하연과 이조판서 최부 등도 그 자리에 나왔다. 하연은 직책상 이조판서를 통제했고, 최부는 현직 이조판서였다. 정갑선은 어전(御前)에서 두 사람을 한꺼번에 공격했다. “최부는 물론이고 하연도 관리임용에 잘못이 있사오니, 엄하게 국문하기를 청하옵니다.” 이 한마디로 조정이 얼어붙었다. 그러자 세종이 온화한 얼굴로 정갑손과 하연을 어루만지며 서로 화해하기를 당부했다.

조회가 끝났어도 하연과 최부는 땀을 비 오듯 흘렸다. 정갑손이 미소 지으며 그들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저마다 직분대로 했을 뿐, 누구를 해치자고 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고 나서 하인을 불러, 두 분 대감이 더위에 고생하시므로 부채로 시원하게 부쳐드리라고 했다([용재총화]). 이런 일화에서 보듯, 정갑손은 항상 언행이 당당하고 후회도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심지어 세종과도 충돌을 하는 일도 있었다. 세종 28년(1446) 10월 4일의 [실록]에는 우참찬 정갑손이 불교 문제로 세종을 공격했다고 나온다. 나라에서는 소헌왕후 심씨의 넋을 위로하려고 대규모 불교 예식을 준비했다. 그러자 정갑손이 의정부를 대신해 강력히 항의했다. 그가 한 말의 취지는 아래와 같았다.

“예전에는 사대부와 평민이 모두 불교를 믿어, 부모가 돌아가시면 부처를 공양하고 절간에서 제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왕께서 국법을 고친 이후 관리는 사당을 세워 조상의 제사를 받들고, 평민은 신주 앞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왕후께서 병환이 나실 때부터 불교 예식을 자주 거행하시고, 금은으로 불경을 베끼게 하셨습니다(寫經). 각종 기물도 금은과 주옥으로 화려하게 꾸민 데다가 과천에 큰 절을 창건하시더니, 이제는 대자암에서 독경 예식(轉經)을 대대적으로 거행하려 하십니다.”

그러자 세종은 정갑손을 불러 해명을 하려 했다. 궁중의 불교 행사는 오래된 전통이라고 변명하면서도, 왕은 대군들이 모후를 위해 행사를 열게 된 것이라며 양해를 구했다. 그러자 정갑손은 왕을 더욱 압박해 “대군들이 주도한 행사라고 말씀하시지만 실은 전하께서 주도하신 일”이라고 비판했다. 결국 세종은 화를 내며 정갑손에게 따졌다. 이번 행사는 이미 대신들과 사전에 논의가 된 것인데, 인제 와서 왕에게 허물을 돌리는 것은 그대의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그대들의 눈에 비친 나는 불교를 좋아하는 임금이 아닌가.” 왕이 이처럼 극단적으로 항변하자 군신 간의 대화는 거기서 끝나버렸다. 세종은 자신의 의지대로 불교 행사를 열었다. 그러나 성리학자 정갑손의 반대 의견을 충분히 청취했고, 그에게 어떠한 벌도 내리지 않았다. 화를 내기는 하였으나 서로 견해차가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만하면 너그럽고 합리적인 왕이라고 생각한다.

총애했던 중국어 능력자 김하, 감싸지만은 않아


▎매일 아침 국왕이 편전에서 주요 관리와 정사를 논의하던 상참의 재현 행사가 열린 경복궁 사정전 모습.
조금 다른 이야기도 있다. 중국어를 워낙 중시한 세종은 김하라는 신하를 매우 아꼈다. 왕은 통역의 고수였던 그를 나라에 꼭 필요한 인재라 여겼다. 그런데 김하는 녹명아(鹿鳴兒)라는 기생을 사랑했는데 관계가 복잡했다. 왕실 종친 한 사람에 도승지 안숭선까지 그 기생을 좋아한 것이다.

이 문제로 조정이 시끄러워지자 왕은 김하의 손을 들어줬다. 이후 사람을 보내 종친을 타일렀다. “그대가 있고 없고는 나라에 크게 중요한 일이 아니지만, 중국과 외교를 하는 데는 김하가 꼭 필요하다. 나는 그 기생을 김하의 첩으로 인정하므로 서로 다투지 말라.” 이 말을 전해 들은 도승지도 이내 마음을 비웠다.

훗날 김하는 상중에도 녹명아의 집을 드나들다가 사헌부에 적발됐다. 세종은 사헌부 관리를 불러서, 이미 허락한 관계이니 덮어두라고 했다. ([소문쇄록]) 자그만 재능일지라도 국가에 도움이 되는 이라면, 왕은 이처럼 아끼고 보호했다. 이 일은 [실록]에도 자세히 나와 있다(세종 21년 9월 10일). 왕은 삼정승 곧 황희, 허조 및 신개를 불러서 상의했다. “김하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있는데, 그가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라면 내가 어찌 은혜를 베풀겠는가.” 이렇게 말하며 정승들에게 해결책을 물었다.

고심 끝에 삼정승을 대표해 허조가 말했다. “김하의 죄는 곤장 80대에 불과합니다. 해당 부서에 명령해 형량을 알아보라고 명하신 다음에, 전하께서 사면해주시면 됩니다.” 해당 관청에 구형(求刑)을 요구한 다음에 용서하라는 충고였다. 왕은 김하의 죄를 용서해주면서도 행여 국가의 기강을 무너뜨리지 않을까 고심한 사실이 역력했다.

세종이 아끼고 사랑한 ‘왕의 남자’들을 살펴보면 공통점이 있다. 세종은 다양한 능력의 소유자를 고루 등용했다는 점과 인재를 아끼고 소중히 여겼다는 점이다. 그리고 여러 신하 중에서도 세종에게 가장 도움을 많이 준 이는 황희였다는 점이다. 다방면에 걸쳐 그와 같이 왕을 유능하게 보좌한 정승은 한국의 역사를 통틀어서 다시 보기 어려웠다.

인재는 구슬과도 같아, 아무리 많아도 꿰어야 보배가 된다. 영롱한 오색 구슬을 하나로 꿰려면 실이 있어야 할 터인데, 세종이 가진 실은 무엇이었을까. 독서를 통해 체득한 역사적 통찰력이었다고 생각한다. 세종 시대를 음악에 비유하면 감미로운 교향악과도 같았다. 다양한 재능의 소유자를 적성과 소질에 맞는 자리에 배치하고 왕이 멋지게 지휘봉을 휘둘렀다. 그런 풍경을 현대 한국사회 어디서나 다시 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 백승종 - 역사가이자 역사칼럼니스트. 전북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튀빙겐대 대학원에서 한국학과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튀빙겐대 한국학과 교수를 비롯해 서강대 사학과 교수, 경희대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로 있다. 저서로 [상속의 역사]와 [신사와 선비] 등 20여 종이 있으며, 2012년 한국출판평론학술상과 제52회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202103호 (2021.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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