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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사랑으로 재해석한 한국사(12)] 윤심덕·김우진의 현해탄 정사(情死), 진실은? 

인습에 희생된 근대 예술 선구자들 

시련 속에 돋아난 예술적 동병상련, 단순 불륜 이상의 관계
자유 연애와 대중 예술 기폭제, 한국인 일상 근대로 이끌어


▎배우 고(故) 임성민(왼쪽)과 장미희 주연의 영화 [사의 찬미]의 한 장면, 1991년 작품이다.
연애(戀愛)란 무엇인가?

연애는 남녀가 서로 좋아해 사귀는 것이다. 이 말이 한국에 처음 출현한 것은 1910년대였다. 1912년 조중환이 [매일신보]에 연재한 번안 소설 [쌍옥루]에 등장하더니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조선시대까지 남녀의 사랑은 부모에 의해 결정됐다. 갑돌이와 갑순이가 눈이 맞아 물레방아에서 몰래 만나기도 했지만 이런 사랑은 윤리적으로 환영받지 못했다. 동네 창피하고 가문에 먹칠하는 일이었다. 그 오랜 터부를 깨고 연애라는 이름의 근대가 밀어닥쳤다. 당사자인 남녀가 주인공이 돼 세상을 장밋빛 연심(戀心)으로 물들인 것이다.

1920년대 조선에서는 자유 연애가 활짝 꽃피었다. 연애 열기에 불을 지핀 것은 편지였다. 사랑의 열병을 앓는 청춘남녀들은 아침저녁으로 연애편지를 썼고 오매불망 답장을 기다렸다. 연애편지 잘 쓰는 법이 베스트셀러로 떠올랐다. 작가들은 사랑이 인생의 오아시스라고 부르짖었다. 우편제도 정착의 일등공신도 연애편지였다. 1895년 우편제도가 처음 시행됐을 때 첫 보름간 수거된 편지는 고작 137통이었다. 그런데 1925년 한 해 동안 오간 편지는 무려 7000만 통으로 늘었다(강준만,[한국근대사산책] 7권).

연애에 목숨 거는 일도 다반사였다. 1910년 391명에 그친 자살자 수가 1925년 1500여 명으로 급증한 데는 ‘이 죽일 놈의 사랑’이 한몫했다. ‘정사(情死)’, 이뤄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들이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1920년대 신문과 잡지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뜨거운 뉴스였다. 주인공이 유명인사들일 경우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윤심덕과 김우진의 현해탄 정사 사건은 불후의 명곡 ‘사의 찬미’와 더불어 전설이 됐다.

스타와 재력가는 왜 바다에 몸을 던졌을까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주인공 김우진과 윤심덕(오른쪽). 둘은 현해탄에 함께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
1926년 8월 4일 새벽 4시, 일본 시모노세키를 출발해 현해탄 건너 부산으로 향하는 부관연락선 도쿠주마루는 대마도 옆을 지나고 있었다. 배를 순시하던 급사는 일등선실 3호의 방문이 열린 것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선객이 이 시간에 갑판으로 산보를 나간 것일까? 수상하다 싶었는지 급사가 확인차 선실에 들어갔다. 가방 위에 놓인 편지가 눈에 밟혔다. 겉봉에 ‘뽀-이에게’라고 적혀 있어 뜯어보니 메모가 나왔다.

“대단히 미안하나 이 유언서를 본적지에 부쳐주시오.”(박준표, [윤심덕 일대기], 1927)

편지에는 사례로 보이는 5원 지폐 한 장과 집에 부쳐달라는 유서도 들어 있었다. 퍼뜩 자살을 떠올린 급사는 선장에게 달려갔다. “긴급사태 발생!” 연락선이 발칵 뒤집히고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배를 멈추고 안팎을 수색했으나 3호실 선객의 종적은 찾을 수 없었다. 정황상 바다에 몸을 던진 것 같은데 몇 시에, 어느 지점에서 그랬는지도 알 수 없었다. 선실에 남겨진 것은 여자 지갑과 남자 금시계, 현금 160원과 기타 장식품 정도였다. 선장은 신원을 파악하기 위해 선객 명부의 인적 사항을 살펴봤다.

‘김수산(金水山), 조선 목포부 북교동, 남자, 30세’

‘윤수선(尹水仙), 경성 서대문정 일정목 73번지, 여자, 30세’

이윽고 도쿠주마루가 부산에 도착하자 선장은 이 사건을 경찰에 신고했다. 곧 두 사람의 정체가 드러났다. 남자는 목포 대부호 김성규의 맏아들이며 극작가·연극평론가로 알려진 김우진(金祐鎭, 1897~1926)이었다. 그는 1924년 일본 와세다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집안의 재산과 토지를 관리하는 상성합명회사 사장에 취임했다. 당시 풍습에 따라 일찍 결혼해 슬하에 1남 1녀를 두기도 했다.

여자는 놀랍게도 조선 최고의 소프라노 윤심덕(尹心悳, 1897~1926)이었다. 평양 출신으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나온 그녀는 국비 유학생에 뽑혀 도쿄음악학교에서 공부하고 1923년에 돌아왔다. 보기 드문 여류 성악가에게 화려한 조명이 쏟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방송 출연과 음반 취입에 나서며 대중가수로서의 명성도 높아져 갔다. 일거수일투족이 뉴스거리였다. 당대의 스타였다.

현해탄 정사는 곧 세상에 알려졌다. 이런 호재를 언론이 가만 놔둘 리 없었다. 스타와 재력가는 언제나 대중의 관심사다. 게다가 남자는 유부남이다. 연락선에서 조선 사람이 사랑 때문에 자살한 것도 처음이다. 8월 5일 [매일신보] 등 주요 신문의 사회면이 온통 이 사건으로 도배됐다. 관심은 줄기차게 이어졌다. 8월 29일 일본 닛토축음기회사에서 윤심덕의 음반이 나오자 다시 절정으로 치달았다.

사람들은 정사 사건의 내막이 궁금했다. 언론에서는 윤심덕과 김우진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남자가 처자식 딸린 유부남이었기에 비관해 동반 자살을 택한 것이라고 추측했다. 따지고 보면 불륜이다.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단, 시대상은 살펴봐야겠다. 1920년대에는 신여성(新女性)과 조혼남(早婚男)의 연애가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그들에게 뭔가 특별한 사정이 있었을까?

신여성은 국내외에서 근대 교육을 받은 배운 여자들을 일컫던 말이다. 학창 시절 윤심덕 같은 신여성은 김우진처럼 일찍 결혼한 유부남과 함께 공부하고 어울렸다. 당시에는 아들이 학업을 위해 객지로 떠나기 전에 결혼부터 시켜 가문의 대를 잇는 조혼(早婚) 풍습이 있었다. 고등보통학교 남학생의 60%는 이미 기혼자였다고 한다. 조혼한 남자들은 처자식을 고향에 두고 계속 학업을 이어나갔다. 나이가 차면서 심중에 변화가 생기기도 했다. 연애 상대로 신여성을 점찍으면서 부모가 시킨 결혼을 부정하는 일이 속출했다.

“창순은 지금 스물한 살이다. 그는 열다섯 살에 장가를 들었다. 종래의 결혼제도에 따라 부모가 시킨 것이다. 지금이라면 부모에게 반항하고 그 결혼제도를 굳게 거부했겠지만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인 까닭에 하라는 대로 순종하는 수밖에 없었다. 몇 해 동안은 그럭저럭 무사히 지냈으나 그가 중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들어가자 사정이 달라졌다. 지식이 붙고 사상이 늘어감에 따라 창순은 차츰 자기 결혼생활을 부정했다. 그것은 털끝만 한 사랑도 이해도 없는 죽은 육체의 결합에 지나지 않았다.”(박준표, [운명], 1924)

처자식 둔 조혼남, ‘배운 여자’ 신여성을 만나다


▎윤심덕의 유고 앨범 [사의 찬미].
1920~30년대 딱지본 대중소설 작가로 인기를 끈 박준표는 1924년작 [운명]에서 신여성과 사랑에 빠진 조혼남의 심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소설 속 창순은 고향을 떠나 경성대학 문과에 진학하며 근대적 가치관이 형성된다. 그는 부모가 하라는 대로 따른 정희와의 결혼을 부정하고 영문과 다니는 영숙과의 주체적인 사랑을 꿈꾼다. 졸업하고 집에 돌아온 창순은 인습에 얽매인 구여성을 버리고 신여성과 새로운 시대의 가정을 꾸리고자 한다. 하지만 실제로 이혼을 단행하는 것은 무척 괴롭고 고민스러운 일이다.

“그녀는 한사코 반항할 것이다. 우리 집과 처가에서도 반대하겠지. 자식까지 낳았으니까. 생각해보니 시끄럽게 일어날 일장 풍파가 싫고 싫었다. 그뿐인가. 무지한 사회로부터 허다한 욕설과 비난이 쏟아질 것이다. 벌써 여러 가지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고 정신이 답답하여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 남편 마음도 모르는 그녀와 천진스럽게 누워 자는 어린애가 퍽 불쌍하고 애처로워 보였다.”(박준표, [운명], 1924)

딱지본 소설은 대체로 대중의 가치와 구미에 따랐다. 박준표의 [운명]도 주인공이 자유 연애에 대한 환상을 품지만 이혼을 부담스러워하다가 처자식이 기다리는 가정에 복귀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대중 정서에 부합하는 결말이다. 반대로 조혼 가정을 깨고 자유 연애 상대를 후처나 첩으로 받아들이려면 거센 풍파를 감수해야 했다. 사회적 거부감이 컸다.

김우진과 윤심덕의 고민도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도쿠주마루 선객 명부에 기재된 ‘수산(水山)’은 김우진의 호였다. ‘수선(水仙)’은 수산의 곁에 있는 사람이라며 그가 윤심덕에게 지어준 애칭이었다. 두 사람의 인연은 도쿄 유학 시절인 192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 유학생 동우회에서 극단을 만들어 조선 순회공연을 열기로 했는데 김우진이 연극 연출, 윤심덕이 성악 독창을 맡은 것이다. 그들은 준비 모임을 하면서 안면을 텄다.

동우회의 조선 순회공연은 성공을 거뒀다. 20여 일 동안 14개 지역에서 공연했는데 가는 곳마다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연극과 강연도 좋았지만 특히 윤심덕의 독창이 화제였다. 머지않아 유학파 여류 성악가가 돼 귀국할 그녀였다. 윤심덕을 향한 세상의 관심과 기대가 자라났다.

김우진도 동갑내기 여학생에게 마음이 갔다. 그는 성격이 차분하고 섬세한 편이었다. 반면 윤심덕은 ‘왈녀’라는 별명을 갖고 있을 만큼 대범하고 쾌활했다. 그녀는 김우진의 도쿄 하숙집을 스스럼없이 드나들며 음악과 문학을 논하고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두 사람은 예술적 동반자로서 인간적인 신뢰와 정을 쌓아나갔다. 그들의 관계를 단순히 불륜의 틀에 가둘 수 없는 이유다.

1922년 여름 윤심덕은 도쿄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성악가의 길을 모색했다. 선구자는 가시밭길을 걷기 마련이다. 조선에서는 아직 성악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소프라노 해서 밥 벌어먹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김우진은 벅찬 도전을 앞둔 윤심덕에게 힘을 주고 싶었다. 졸업 후 고향 평양에 잠시 머물고 있던 그녀에게 그의 초청장이 도착했다. 마침 자기도 방학을 맞아 목포에 있으니 여기 와서 가족음악회를 열어달라는 것이었다.

김우진의 초청장에는 윤심덕과 두 동생의 기차표가 들어 있었다. 여동생 윤성덕은 이화학당에서 피아노를, 남동생 윤기성은 연희전문학교에서 성악을 배웠다. 혼자라면 부담스러웠을 텐데 가족음악회라니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윤심덕은 초청에 응했다. 동생들과 함께 목포 제일 갑부의 대저택에 찾아가 서양 음악과 성악을 선보였다. 김우진의 부모와 동생들, 그리고 부인과 딸을 만나 인사도 나눴다(이철,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

새롭고 낯선 스타에 대한 삐뚤어진 관심


▎동경 우에노 음악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윤심덕 (앞줄 오른쪽 흰 옷).
그리고 윤심덕은 학교로 돌아가 1년 더 성악을 갈고 닦은 뒤 1923년 5월 귀국했다. 소프라노로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당시 조선 땅에는 임배세가 잠시 활동하다가 미국으로 떠나는 바람에 여류 성악가를 찾아볼 수 없었다. 소프라노가 뭔지도 모르고 청하는 이도 거의 없는 실정이었다. 그녀는 우선 모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 시간강사로 출강하며 음악회 무대에 설 날을 기다렸다.

다행히 얼마 후 기회가 왔다. 윤심덕은 6월 26일 동아부인상회 창립 3주년 기념음악회에서 데뷔무대를 갖고 소프라노 활동을 개시했다. 비교 대상이었던 임배세가 ‘꾀꼬리 같은 목소리’였다면 윤심덕은 ‘옥쟁반에 구르는 구슬 소리’로 인기를 끌었다. 그녀는 곧 경성 지역 음악회의 단골손님이 됐다. 한 달에 서너 번 무대에 서기도 했다. ‘관중을 취하게 하는 일류 성악가’, ‘조선 제일의 성대’ 등 찬사가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음악회라고 해봐야 출연료가 빤했다. 거마비 정도만 받고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경제 사정은 날이 갈수록 궁핍해졌다. 1924년 초에는 평양의 부모가 경성으로 이사와 살림을 합쳤다. 윤심덕은 이제 부모를 봉양하는 것은 물론 동생들까지 뒷바라지해야 했다. 무대 수입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개인레슨해가며 악착같이 돈을 벌었지만 힘에 부쳤다.

그녀를 더욱 힘겹게 만든 것은 삐뚤어진 관심이었다. 무대에서 보여주는 쾌활한 표정과 태도를 까분다고 흉보는 관객들이 있었다. 훤칠하고 호리호리한 체격도 문제삼았다. 윤심덕은 새롭고 낯선 존재였다. 대중은 새로운 것이 어색하다. 낯선 것에 거부감을 느낀다. 사람들에게 알려질수록 뒷말도 늘어났다. 인기가 높아질수록 인신공격 수위도 올라갔다.

이윽고 윤심덕의 자유연애 이력이 도마 위에 올랐다. 작곡가 홍난파와 염문을 뿌렸네, 음악 하는 채동선의 고백을 매몰차게 거절했네, 문인 박정식을 상사병에 걸려 죽게 만들었네, 온갖 구설수가 따라다녔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유언비어도 가십으로 언론 지면에 실리던 때였다. 문란한 소문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며 여류 성악가를 바라보는 시선이 싸늘해졌다. 마녀사냥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세파에 시달리는 윤심덕에게 위안이 돼준 이는 김우진이었다. 그는 1924년 여름 와세다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본가인 목포에 돌아왔다. 대학에서 극문학을 전공한 김우진은 계몽주의 문학과 신파극을 극복하고 조선 땅에 서구 근대극을 뿌리내리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맏아들의 꿈을 일축했다. 김성규는 장성군수와 무안감리를 지낸 세도가요, 목포에 거대한 부를 일군 재력가였다. 장남 우진이 뒤를 이어주길 바랐다.

김우진은 부모의 뜻에 따라 상성합명회사 사장을 맡게 됐다. 집안의 재산과 토지를 관리하는 회사였다. 남들은 부러웠겠지만 그에게는 좌절이었다. 이런 남편을 유학자의 딸인 아내는 다독거리지 못했다. 왜 가업 놔두고 연극을 하려고 하는지, 그거 못 한다고 어찌 저리 안달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럴수록 김우진은 윤심덕이 간절했다. 시련 속에서 두 사람의 사랑이 돋아났다. 인습에 상처 입은 선구자들의 예술적 동병상련이었다.

예술과 사랑은 단비가 돼 메말라가던 그들의 삶을 해갈해 줬다. 하지만 인습에 사로잡힌 조선, 이방인에게 척박한 세상을 적셔주지는 못했다. 휘둘리지 않으려고 몸부림칠수록 점점 더 얽매이는 불가항력의 현실이 사방에서 근대 예술의 선구자들을 조여왔다.

1925년 초에 윤심덕이 경성 갑부 이용문의 첩이 됐다는 루머가 나돌았다. 남동생 윤기성의 미국 유학 경비를 후원받기 위해 그의 집을 몇 번 찾아갔다가 스캔들에 휩싸인 것이다. 소문은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호사가들은 예술가인 척하더니 돈에 팔려 갔다며 노골적으로 비아냥댔다. 금전에는 처첩의 구별이 없다느니, 셋째인가 넷째인가 마마님이 됐다느니, 갑부 앞에서만 성악을 한다느니, 가시 돋친 말들이 칼춤을 췄다.

“윤씨의 이번 행동은 타락한 행동이다. 예술가이면 예술가, 사업가이면 사업가, 가정부인이면 가정부인으로 똑똑히 사람이 좀 되어갑시다. 윤씨야! 기왕 국외로 간다는 소문이 있으니 거기서 태평연월이나 노래하면서 건강히 일생을 지내라. 누구나 그대 보기를 원치 않을 테니.”(‘윤심덕 사건에 대하여’, [신여성] 1925년 3월호)

소나기는 일단 피하고 볼 일이다. 억울하게 마녀사냥을 당한 윤심덕은 혼자 하얼빈으로 떠났다. 어린 시절 따르던 배형식 목사가 선교와 독립운동을 펼치던 곳이었다. 그녀는 모든 연락을 끊고 배 목사 집에서 6개월 동안 칩거했다. 언니 윤심성의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는 전보를 받고서야 경성으로 돌아왔다.

이제 성악가로서 정상적인 활동을 하기는 글렀다. 윤심덕은 총독부 체신국 등에서 시험방송 중이던 라디오에 출연해 노래를 부르고 시를 낭송하고 사회를 봤다(이때 한국 최초 경성방송국은 정식 개국 전이었다). 축음기 음반 취입 제의도 들어왔다. 녹음할 곡은 유행 창가, 곧 대중가요였다. 윤심덕은 국비 유학 성악가의 자존심을 접고 당시까지만 해도 천하게 여기던 대중가수로 변신한 것이다.

스캔들에 상처 입고 연극배우 도전했으나


▎일본 나고야 성(城)에서 바라본 현해탄.
그 시절에 대중가수를 누가 했느냐? 방송 출연과 음반 취입은 기생들의 몫이었다. 1927년 2월에 개국한 경성방송국은 초창기에 기생 100여 명이 출연해 기틀을 다졌다. 유행 창가가 수록된 최초의 음반은 1925년 일본축음기상회에서 출시했는데 기생 김산월·도월색 등이 일본에 건너가 ‘이 풍진 세월’, ‘시들은 방초’, ‘장한몽가’ 등을 녹음했다. 하지만 기생 가운데서도 광대놀음에 끼지 않겠다고 대중가수를 거절하는 이가 있었다. 그런 일에 국비 장학생으로 관립 도쿄음악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한 윤심덕이 나설 줄이야.

파격 변신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26년 윤심덕은 극단 토월회에 가입해 연극배우로 활동했다. 제안은 김우진이 했다. 스트린드베리의 영향을 받은 그는 평론에서 조선의 절박한 사회상을 묘사하려면 표현주의가 가장 적합하다고 분석하고 소극장을 중심으로 한 신극 운동을 주창했다. 윤심덕은 근대극을 표방하는 토월회에 들어가 연기하고, 자신은 시대 흐름에 맞는 희곡을 창작하는 것이 조선 예술 발전에 공헌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윤심덕의 부모 형제는 맹렬히 반대했다. 배우는 타락한 자의 업이요, 최후의 말로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결심은 꺾이지 않았다. 그녀는 가출을 감행해 황금정(을지로) 삼정목의 일본인 여관에 투숙하고 연기 연습에 돌입했다. 언론에는 “힘을 다해 새로 지으라는 조선 예술의 전당에 한 모퉁이의 무엇이라도 되려는 당돌한 발걸음”이라고 각오를 밝혔다.

여배우의 길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미국 영화 [동쪽 길]을 번안한 [동도]는 윤심덕의 연기력 부족으로 관객에게 실망을 안겨줬다. 오페라 [카르멘]에서는 소프라노의 가창력이 빛을 발했으나 너무 그녀에게 기대는 바람에 호응을 얻지 못했다. 흥행을 노렸는데 기대에 못 미치자 토월회는 내분에 휩싸였고 얼마 후 해산하고 말았다.

가족마저 팽개치고 절실하게 도전한 일이 망가지자 그녀는 절망에 빠졌다. 대중가수 변신에 이어 연극 도전 실패로 또다시 비난과 혹평이 난무했다. 그 고통과 상처를 윤심덕은 김우진에게 토로했다. 그는 자기 권유 때문에 예술과 사랑의 동반자가 지독한 아픔을 겪고 있는데 인습의 포로가 돼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이 견딜 수 없었다. 그 책임감과 무력감과 자괴감이 불행한 결심으로 이어졌다. 다음은 김우진의 유고시다.

“그대의 편지를 보고 / 왜 이리 울어지는지 / 난들 어찌할 수 있으랴 / 나 혼자 나 혼자 / 그대의 새 생활을 빌면서 / 먼저 가서 기다리겠노라.”(유민영, [윤심덕: 사의 찬미])

광막한 황야를 달리는 인생아… ‘사의 찬미’ 신드롬

살아 있을 때는 죽고 싶을 만큼 욕하다가 죽고 나면 되살리기라도 할 듯이 숭배하는 게 세상인심이다. 현해탄 정사 사건에도 이런 심리가 깔렸다. 윤심덕을 비난해 죽음으로 몰고 간 것도, 노래에 눈시울 붉히며 그녀를 부활시킨 것도 대중이다.

1926년 7월 17일 윤심덕은 경성에서 출발해 오사카로 향했다. 닛토축음기회사에서 음반을 녹음하기로 한 것이다. 미국 유학을 떠나는 여동생 윤성덕이 피아노 반주를 위해 동행했다. 레코딩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녹음을 마치자 윤심덕은 도쿄에 체류 중이던 김우진에게 전보를 보내 오사카로 오게 했다. 재회한 두 사람은 삶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였다.

김우진은 ‘두덕이 시인의 환멸’‘난파’에 이어 동학을 모티프로 삼은 희곡 ‘산돼지’를 탈고했다. 아내에게 부칠 유언장은 이미 작성해서 보관하고 있었다. 윤심덕은 이바노비치의 기악곡에 직접 가사를 붙였다. ‘사(死)의 찬미’였다. 이 노래를 음반에 추가하려고 하자 닛토레코드 사장은 곡이 너무 ‘센티멘털하다’며 염려했다. 하지만 그녀의 간곡한 청으로 추가 녹음이 이뤄졌다. 윤심덕은 유서를 남기는 심정으로 ‘사의 찬미’를 불렀을 것이다.

“광막한 황야를 달리는 인생아 / 너는 무엇을 찾으려 왔느냐 /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평생 /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

1926년 8월 4일 현해탄 정사 사건은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으며 큰 화제를 몰고 왔다. 그리고 8월 29일 윤심덕의 유고 음반이 나왔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사의 찬미]는 극적인 정사를 배경 삼아 신드롬을 일으켰다. 음반이 무려 10만 장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당시로선 천문학적인 숫자였다. 그 여파로 국내 음반 시장이 조성될 정도였다. 공장노동자 월급보다 비싼 축음기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빅타레코드와 콜럼비아사가 이듬해 서울에 대리점을 개설했다. 유성기와 레코드 보관법이 신문잡지 생활정보 면에 실렸다.

윤심덕과 김우진의 존재감은 시간이 지나도 좀체 지워지지 않았다. 몇 년 뒤 그들을 로마에서 봤다는 목격담이 등장하기도 했다. 김우진의 집에서 목격담의 진위를 확인해달라고 총독부에 요청할 정도였다. 윤심덕의 가족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반응을 보였다. 정사 사건 당시 일본을 거쳐 미국 유학을 떠난 여동생 윤성덕의 증언이다.

“나와 가족들은 한 번도 언니가 죽었다는 말을 한 적이 없어요. 언니를 죽은 사람으로 만든 것은 항상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세상 사람들이지요. 지금에 와서 남이야 살았든지 죽었든지 무슨 걱정입니까? 죽었으면 죽었고 살았으면 산 거죠. 도대체 조선 사회는 왜 이렇게 남을 칭찬하기도 잘하고 욕하기도 잘하는지 모르겠어요.”(‘불생불사의 악단 여왕 윤심덕’, [삼천리] 1931년 1월호)

로마 목격담은 어쩌면 해피엔딩을 바라는 대중의 동화적 상상력일지도 모르겠다. 윤심덕과 김우진은 현해탄에 몸을 던졌을 것이다. 하지만 정사였을까? 과연 사랑을 이루지 못해서 목숨을 끊었을까? 그들은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죽음으로 이끈 것은 예술적 동병상련이었다. 근대 예술의 선구자였던 두 사람의 고뇌와 좌절을 읽어야 할 것이다. 1926년 윤심덕의 노래 ‘사의 찬미’가 거리에 울려 퍼지던 그해에 단성사에는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이 걸렸다. 근대는 대중예술과 함께 한국인의 일상에 스며들었다.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사람을 읽고 생각하고 쓰면서 역사의 행간을 채워나간다. 팟캐스트·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2015) 등을 썼다.

202103호 (2021.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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