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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60)] 주자(朱子)의 일점일획까지 따른 우암(尤庵) 송시열 

춘추대의 신념으로 난세의 질서를 세우다 

대군 시절의 효종과 사제 인연, 북벌(北伐)과 존주(尊周)를 대의로 설정
노론 영수로 군림, 예송논쟁 여파로 유배된 뒤 원자 책봉 반대하다 사약


▎남간사유회 송준빈 회장이 대전 남간정사 앞에서 우암 송시열 선생의 정신을 설명하고 있다. / 사진:송의호
1689년(숙종 16) 6월 8일. 금부도사 권처경이 정읍으로 내려왔다. 사약을 들고서다. 거적자리로 83세 노인이 들어섰다. 사약을 받기 위해서다. 그는 사약을 마시기 전 따라온 제자들에게 말했다. 죽음을 앞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마지막 유언이다. 문인들은 눈물을 흘리며 적었다. “학문은 마땅히 주자(朱子)를 주(主)로 할 것이며, 사업은 마땅히 효종이 하고자 했던 뜻을 위주로 할 것이다.” 주자의 사상을 받들고 효종의 북벌 대의를 수행하라는 뜻이다. 송시열이 제자 권상하의 손을 잡자 그가 묻는다. “상사에 무슨 예법을 써야 합니까?” 우암이 답한다. “[주자가례]를 주로 하고 노선생(김장생)이 엮은 [상례비요(喪禮備要)]를 참고하라 (…) 내 관(棺)은 덧붙인 널빤지를 사용하라.” 앞서 효종의 관에 널빤지를 덧붙인 게 마음에 걸려서였다. 제자들이 거적자리가 추하니 바꾸자고 하자 우암은 “우리 선인(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실 때 이만한 자리도 못 까셨네”하며 거절했다. 송시열이 마침내 사약을 들이켰다. 정적이 흘렀다. 대로(大老)의 파란만장한 삶이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우암은 우리 유학 사에서 가장 오랜 기간 논쟁의 대상이 됐고 지금도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다. 조선 후기 당쟁의 한복판에서 제자들과 정조 임금은 우암을 ‘송자(宋子)’로 부르며 성현의 반열에 올렸다. 그러나 반대쪽은 우암을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육두문자로 부르기까지 했다. 어느 쪽이 진실에 가까울까?

1월 15일 선생의 흔적을 찾아 대전시 동구 가양동 우암사적공원을 찾았다. 공원 입구 왼쪽에 반듯한 건물 남간정사(南澗精舍)가 있었다. 우암이 제자를 가르친 강학 공간이다. 우암을 숭모하는 단체인 남간사유회(南澗祠儒會) 송준빈 회장이 도착했다. 송시열의 방계 후손이다. 남간정사는 건물 아래 가운데로 물길을 끌어들여 사시사철 물소리를 들을 수 있게 만든 서실이다. 송 회장은 “우암이 돌아가신 뒤 장례를 치르고 삼년상을 마친 곳”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우암이 남긴 정신을 “의로움과 곧 음(直)”으로 요약했다. 그러면서 일화 하나를 소개했다. 우암이 한번은 중병을 앓았다고 한다. 백약이 무효였다. 그는 아들을 불러 대뜸 미수 허목에게 약 처방을 받아오라고 부탁한다. “어떻게 거기에 갑니까?” 아들은 난처해 했다. 당시 서인 우암과 남인 미수는 목숨 걸고 싸우던 정적이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내 병은 미수만이 고칠 수 있다”며 아들을 보냈다. 미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처방한다. 마침내 아들이 받아온 처방전을 펼쳐 든 측근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독성이 강한 부자 등이 주재료로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우암은 처방전대로 약을 지으라고 했다. 독성 강한 약사발을 단숨에 비운 우암은 한동안 혼절해 있다가 완쾌됐다. 우암은 이렇게 정적과 소통하고 극약 비방까지 믿을 만큼 강단이 있었다. 송 회장은 “물론 우암을 개 이름으로 부르는 극단적인 반대 세력도 있다는 걸 안다”고 덧붙였다.

숙종, 사약 받게 하고 6년 뒤 시호 내려


사약을 내린 숙종은 이후 우암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숙종은 5년 뒤 그 일을 뉘우치고 우암의 모든 관작을 복구한다. 이듬해엔 ‘문정(文正)’이란 시호를 내렸다. 남간정사는 우암의 상례를 치른 곳이 됐지만 생전 그가 공을 들인 북벌(北伐)과 관련된 장소이기도 하다. 1658년(효종 9) 우암은 벼슬을 사양한 채 회덕(대전)에 머물렀다. 효종은 그때 북벌 의지를 담은 밀찰을 세자(현종)를 통해 비밀리에 남간정사에 전했다. 임금은 북벌을 위해 입시(入侍)를 명한다.

송시열과 효종의 인연은 1635년(인조 13)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암은 생원시 장원급제로 이름이 나면서 문과 급제를 통하지 않고, 그해 봉림대군(효종)의 사부(師傅)가 됐다. 29세 송시열은 열두 살 아래 대군을 8개월가량 가르쳤다. 이듬해 그는 병자호란으로 인조를 호종해 남한산성으로 피난했고, 1637년 화의가 성립되자 낙향한다. 자신이 가르친 대군은 선양(瀋陽)에 인질로 끌려갔다.

봉림대군은 10여 년 인질 생활 끝에 귀국한다. 1649년 효종은 즉위하자 김상헌 등 척화파와 김집·송시열 등 서인을 대거 기용했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어야 합니다.” 효종은 송시열에게 와신상담(臥薪嘗膽)의 뜻을 피력한다. 송시열 역시 마찬가지였다. “북벌이야말로 국가 대의입니다. 청(淸)나라에 대한 치욕을 씻어야 합니다.” 우암은 바른 정치의 요목을 적은 기축봉사(己丑封事)를 올려 북벌론과 존주론(尊周論)을 국가 의제로 설정한다. 북벌론은 청을 토벌해 복수설치(復讐雪恥, 수치를 복수하고 설욕)하겠다는 정책이다. 존주론은 명(明)나라가 망한 지금, 주(周)나라에서 면면히 이어진 인륜 중시 유교가 조선에만 남은 만큼 이제 조선이 그 문화를 존중 발전시켜야 한다는 논리다. 그러나 다음해 김자점이 송시열이 지은 ’장릉지문‘에 청의 연호를 쓰지 않았다고 밀고하면서 우암은 다시 낙향한다.

정조 “우암은 주자의 후인(後人)” 칭송


▎1787년(정조 11) 평양 감사 이명식의 주관으로 목판본 215권 102책이 성현을 부르는 관례에 따라 ‘송자(宋子)’로 해 책 제목을 『宋子大全 (송자대전)』으로 명명했다. / 사진:송정훈·국립청주박물관
효종은 말년 북벌을 가시화하기 위해 다시 송시열을 찬선으로 임명한 뒤 이조판서로 승진시킨다. 우암은 효종의 절대적 신임 아래 북벌을 추진했다. 이때 송준길이 병조판서로 재직하면서 함께 뜻을 펼친다. 효종은 송시열에게 장차 풍상을 함께 겪자며 담비 갓옷인 초구를 하사한다. 사적공원 유물 전시관에 초구 복제품이 진열돼 있었다. 윤여진 문화관광해설사는 “초구의 크기로 체격을 추정하면 우암은 키 190㎝가 넘는 거구”라고 말했다.

1659년 3월 효종은 송시열과 독대한다. 비밀리에 국가의 큰일을 의논한 것이다. 그러나 두 달 뒤 효종은 급서한다. 북벌은 끝내 좌절됐다. 실망한 송시열은 다시 벼슬을 버리고 괴산 화양동으로 들어간다. 그 무렵 복제 논쟁이 일어난다. 이른바 예송(禮訟)이다. 인조의 계비(자의대비)가 아들 효종을 위해 상복 입는 기간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우암은 효종이 둘째 아들인 만큼 부모는 1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며 3년을 주장하는 허적·허목 등과 맞섰다. 왕과 사대부에 적용할 예가 같으냐, 다르냐의 논쟁이었다. 결국 조정은 경국대전에 따라 1년으로 정리해 우암은 1차 예송의 승자가 됐다.

사적공원 맨 위쪽 남간사(南澗祠)로 올라갔다. 대전광역시가 110억원을 들여 1만6000여 평에 조성한 공원의 핵심 공간이다. 사당 한가운데 우암의 위패가 자그맣게 모셔져 있었다. 송준빈 회장은 이어 장판각을 한 번 보라고 했다. 관리사무소 직원이 오랜만에 장판각 철문을 열었다. 정면에 ‘宋子大全’(송자대전)이라 새긴 표지 목판이 보였다. 보관된 목판은 자그마치 1만1023판 5151매. 장판각 내부는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통로만 남긴 채 목판이 서가에 빼곡했다. 215권 102책 방대한 [송자대전]을 관통하는 정신은 주자의 논리다. 우암은 “주자의 일점일획도 고치면 안 된다”는 말을 남겼을 정도로 주자를 존숭했다. 이경구는 [17세기 조선 지식인 지도]에서 “우암은 명이 청에 망한 지금, 하나밖에 남지 않은 유교 국가인 조선이 그 문화의 명맥을 잇고 실현할 의무가 있다고 봤다”며 “송시열이 주자의 말 하나하나를 실천하려 한 데는 그런 절박함이 있었다”고 분석한다. 우암이 예송을 통해 예치(禮治)에 집착하고 후일 정조 임금이 송시열을 “주자의 후인(後人)”으로 칭송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암은 방대한 저작만큼 무려 830여 명의 제자를 길렀다. 이들 중 정승·판서 등 당상관만 70여 명이 나왔다.

1차 예송 이후 우암은 1666년(현종 7) 화양동에 암서재를 짓는다. 그 흔적을 따라 대전을 떠나 괴산으로 1시간여 이동했다. 화양계곡은 코로나19와 추위로 인적이 끊겼지만, 풍광만큼은 송림과 계곡 바위 등이 소문 그대로 빼어났다. 충북도의원을 지낸 박온섭 화양서원 원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화양구곡의 4곡에 화양서원(華陽書院) 터와 만동묘(萬東廟)가 있었다. 화양서원은 우암을 기리는 서원이며, 만동묘는 우암의 유지에 따라 1704년(숙종 30) 조성된 명나라 신종과 마지막 의종을 모신 사당이다. 노론의 성지 같은 곳이다. 만동묘는 조성 이후 노론이 상소를 일삼고 비용을 염출하기 위해 양민을 못살게 하는 등 민폐가 심해져 대원군시기 철폐됐다. 만동묘는 이후 다시 세울 것을 건의하는 상소가 빗발쳐 1874년(고종 11) 중건된 뒤, 일제에 항거한다. 총독부는 다시 만동묘를 강제 철거한다.

박 원장은 “많은 사람이 만동묘를 사대주의의 극치로 보지 않느냐”는 지적에 기다렸다는 듯 “오해”라고 옹호했다. “신종을 모신 것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한 의리를 잊지 않는 것이고, 의종은 명이 망하자 자결한 사명감을 기리는 것이다.” 박 원장과 함께 만동묘로 올라갔다. 이끼 낀 돌계단은 곧추서서 오르지 못하도록 가파르고, 발을 겨우 들여놓을 정도로 좁았다. 사당으로 들어서는 양추문은 코로나19로 출입을 막는 금줄이 처졌다. 양추문 오른쪽 아래에 만동묘의 사적을 기록한 만동묘정비가 서 있다. 비석 글자는 뒷면 일부를 제외하고 모두 정으로 쪼아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일제가 중화(中華)와 관련된 부분만 남겨 만동묘를 사대주의로 몰아갔다.” 땅에 묻힌 묘정비는 최근에야 발견돼 다시 세워졌다고 한다. 박 원장은 우암의 의리를 여러 번 강조했다.

은거지 괴산 화양동은 ‘노론의 성지’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의 만동묘(왼쪽)와 만동묘정비. / 사진:국립청주박물관
우암은 화양동으로 들어온 이후 우의정과 좌의정 임명으로 잠시 출사할 뿐 대부분 산림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는 은거해 있어도 선왕과의 관계와 집권 사림의 중망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사림의 여론은 그에 의해 영향받았고 조정은 매사를 그에게 물어 결정하는 형편이었다.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난다. 다시 자의대비 복상 문제가 제기돼 2차(갑인) 예송이 일어난다. 우암은 대공설(9개월)을 주장한다. 그러나 남인이 내세운 기년설(1년)이 왕명으로 채택된다. 다음 달 현종이 승하하고 숙종이 즉위했다. 우암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이 패배하자 1차 예송까지 문제가 됐다. 우암은 함경도 덕원으로 유배된다. 이후 장기·거제 이배 등 5년 유배 생활을 한다. 1683년 우암은 촉망받던 제자 윤증과의 불화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된다. 당쟁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1689년 숙종은 장희빈이 낳은 아들(경종)을 원자로 책봉한다. 여기에 반대한 서인은 물러나고 이번엔 남인이 등용된다. 이른바 기사환국(己巳換局)이다. 우암은 아직 원자 책봉을 서두를 때가 아니라고 상소했다. 숙종은 진노한다. 그냥 두었다간 임금을 무시하는 무리가 계속해서 일어날 거라며 우암의 관직을 삭탈하고 제주 유배를 명했다. 유배 직후 서인의 정점인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은 문묘에서 출향(黜享)된다. 우암은 죽음을 직감한다.

우암은 원칙론자였다. 그의 호도 여기서 유래한다. 김장생의 손자 김익희가 우암과 토론을 벌이다 그가 의견을 조금도 굽히지 않자 한마디 한다. “그대가 이처럼 말이 많으니 ‘말에 허물이 적다(言寡尤)’고 할 수 없다. 나는 그대의 서재 이름을 우(尤)라고 해야겠다.” ‘우(尤)’란 허물이니 우암은 허물이 많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암은 웃으면서 “그대가 지금 좋지 않은 말로 서재 이름을 지어 주니 비록 신독재(김집)께서 경계하신 바이나 내 어찌 사양하겠는가”라고 답했다고 한다.

화양서원 맞은편 계곡 너럭바위 주변에 선생이 제자들과 함께한 암서재가 보였다. 일대는 관광 명소로 변했다. 박 원장은 다시 괴산군 청천면소재지 우암의 묘소로 안내했다. 묘소로 올라가는 입구에 정조가 쓴 신도비가 있었다. 묘소는 1757년(영조 33) 수원에서 이곳으로 이장했다. 오르는 200m 돌계단 길은 멀고 가팔라 숨이 찬다. 능선에 자리한 묘소의 봉분은 일반 분묘보다 컸다. 묘소 앞에 작은 꽃다발이 하나 보였다. 거기엔 “천하 제1대장부 우암 송선생”이라고 쓰여 있다. 신도비 오른쪽으로 ‘송병일 고택’이란 패널이 보였다. 박 원장은 “한때 우암 종손이 대를 이어 이곳에 살다가 현재는 요양원이 됐다”고 설명했다. 종택은 따로 없었다.

허물이 많다는 뜻으로 우암을 호로 선택


▎1658년 효종이 송시열에게 하사한 담비 갓옷인 초구. / 사진:송정훈·국립청주박물관
17세기 중후반 조선은 임진왜란·병자호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국가재건에 총력을 기울여야 하는 당위에 직면했다. 청은 중원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시대는 나라의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 국민통합을 이끌어낼 신념과 용기 있는 인물을 필요로 했다. 우암은 그 부름을 외면하지 않았고 필요하면 싸웠다. 학문을 두고, 예법을 두고, 또 국가 운영을 두고 소신껏 싸웠다. 우암의 생애를 연구한 김문준 건양대 교수는 “우암의 사고방식과 행동은 주자와 반주자, 군자와 소인, 의와 불의를 가르는 가치관으로 시종일관했다며 그 기준은 춘추대의였다”고 정리했다.

우암이 세상을 떠난 뒤 당파 간 칭송과 비방이 비등했으나 1744년(영조 20) 성균관 문묘에 배향된다. 거기다 영·정조 이후 노론이 정권을 잡으면서 그의 지위는 확고해졌다. 조선은 이제 그가 가르치고 사상을 계승한 후진에 의해 움직이는 나라가 됐다. 역사학자 이덕일은 “조선은 사실상 송시열의 나라였다”고 표현했다. 우암은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3000번 이상 언급됐다. 우암을 다룬 책은 지금도 꾸준히 출간되고 있다. 400년이 지나서도 그를 둘러싼 엇갈린 평가가 계속되고 있다.

[박스기사] 성현이라면 학파 가리지 않고 칭송한 우암 - 영남학파의 거두 퇴계 이황, 무인 이순신 등 추모

우암 송시열은 일생 522편의 비문(碑文) 등을 지었다. 조선을 통틀어 가장 많은 숫자다. 절의와 학문에 뛰어난 선현을 기리는 그의 방식이었다. 여기엔 신분의 높고 낮음을 떠나 임금과 선비는 물론 평민과 여성까지 들어 있다. 김문준 건양대 교수는 [우암 송시열이 추앙한 위대한 선현들]이란 책에서 “우암이 남긴 비문은 그의 사상과 정신을 이해하는 한 방법”이라며 그의 저술이 방대해 접근이 어려운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고 말한다.

우암의 첫 번째 주제는 성현의 학문을 이어 후세에 전한 대학자들이다. 고려 말 성리학을 크게 일으킨 정몽주의 신도비, 도학 정치를 실현하고자 생명을 바친 조광조의 적려유허비, 영남 학맥의 한 축을 이룬 조식의 신도비, 조선 선비의 큰 스승 이황을 존숭하는 뜻을 담은 글 등이 있다.

그중 기호학파의 적전(嫡傳)인 우암이 영남학파의 정점인 퇴계 이황은 어떻게 기렸을까. 송시열은 퇴계를 한국 정통 도학을 잇고 지고의 학덕을 겸비한 스승으로 존경했다. 우암은 ‘퇴계 선생의 시를 써서 이자형에게 주는 설’과 ‘퇴계 이 선생 진적(眞蹟) 발(跋)’ 이란 글에서 존경과 추모의 마음을 담고 있다. 그 중 이자형에게 주는 설의 일부는 이렇다. “율곡선생의 종증손 이자형이 내가 있는 회천에 들러 연보를 언급하면서 빨리 수정해 주기를 청했다 (…) 나는 인자(仁者)가 아니라 그의 뜻에 부응할 수 없어 부끄러웠다. 기억하건대 정암(조광조) 선생의 당질 조충남이 퇴계 선생에게 정암 선생의 행장을 지어 달라고 청하자 퇴계 선생이 이 시를 지어 주어 보냈다. 오늘의 일도 마침 이 일과 부합하기 때문에 이 시를 써서 준다. 그러나 감히 내 자신을 선철(先哲)에 견주는 것은 아니다. 해주에는 주자의 사당이 있어 정암·퇴계 두 선생이 율곡 선생과 함께 배향됐으니, 이자형은 더욱 이 시를 가지고 돌아가야 한다.” 우암은 또 자신의 학문 연원인 이이·김장생의 학문과 행적에 관한 자운서원 묘정비와 돈암서원 묘정비, 평생의 동반자 송준길의 신도비 등을 지었다.

두 번째 주제는 조선 초기 절의였다. 우암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항거하다 죽임을 당한 성삼문과 박팽년의 유허비를 지었다. 셋째는 국란에서 목숨을 던진 충의 정신이다. 그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시기 항전하거나 의병을 일으킨 이순신·조헌·권율·신립·송상현·정기룡 등에 관한 묘비나 신도비 등을 지었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103호 (2021.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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