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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준의 ‘골프와 인생’] 골프여행 작가 류석무의 ‘한국 골프장 예찬’ 

“골프는 자연과 교감하는 18개의 순례길” 

패션 브랜드 기획자에서 골프 매개로 사업가, 작가로 변신
골프장에 담긴 이야기 전하는 크리에이터 역할에 보람 느껴


▎골프여행작가 류석무. 그는 골프 기술에 천착하는 세태와 달리 골프장에 담긴 이야기를 인문학적으로 풀어내는 데 관심을 갖는다. / 사진:류석무
"어느 여름날 연꽃 핀 아침에 라운드를 한다면, 6번 홀 첼로 허리 모양 곡선 연못 가득한 연잎들이 뜬구름처럼 흐르는 가운데, 꽃인지 사람인지 모를 분홍 꽃 얼굴들과 인사하며 ‘연꽃다리’를 건네게 될 것이다. 일렁이는 바람에 서늘히 흔들리는 꽃과 잎들에서 현악기의 낮은 음률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연못을 황금비율로 가르는 곡선으로 난 나무다리 길을 건너는 눈길 발길을, 연잎마다 꽃마다 담긴 이슬방울들이 자꾸 붙잡을 수도 있다.”

골프 라운드를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본 사람이 있을까. 한국에서의 골프는 내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 뽑기를 할 것인가, 조폭을 할 것인가, 스트로크를 할 것인가 고민하는 고스톱 18판 비슷한 것 아니었던가. 뽑기 하다 잘 안되면 “너는 강남 뽑기 학원에 다녔느냐”며 상대에게 투덜거리고, 요즘 여자 프로 중에 누가 몸매가 괜찮다는 등의 성차별적 농담으로 시간을 보내는 곳이 아니었던가.

인용한 문구는 류석무 씨가 쓴 [한국의 골프장 이야기] 시리즈 1권 안양CC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책은 2019년 9월 첫째 권이 나온 이래 스포츠부문 베스트셀러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둘째 권이 출간됐고 최근 첫째 권 개정판도 나왔다. 1권에서 안양CC, 클럽 나인브릿지, 우정힐스 등 24개 골프장을 다뤘고, 2권은 가평베네스트, 해슬리 나인브릿지, 잭 니클라우스, 파인비치 등 23곳을 다녀왔다.

류 씨는 “어릴 때 그림을 그리고 싶었으나 홀로 되신 어머니가 의사를 원했다. 그래서 절충한 것이 국문과였다”고 했다. 그의 글이 감수성이 뛰어난 이유다. 첫 직장은 패션계였다. 브랜드 마케터로 일하며 ‘라코스떼’, ‘먼싱웨어’ 등 여러 유명 스포츠·골프웨어 브랜드 마케팅 기획을 담당했다. 그가 패션회사에서 일하면서 낸 책 [남자의 옷 이야기](1997, 시공사)는 아직도 패션계에서 회자된다. 그는 [뿌리 깊은 나무·샘이 깊은 물]의 편집장을 지내기도 했다.

패션에 재미를 잃은 후엔 골프 사업도 했다. 2015년 골프 전문 화장품인 바록스를 만들었고 골프 여행 사업도 했다. 글재주가 좋은 류 대표는 이따금 골프 칼럼을 기고했는데, 그러다가 기왕 글을 쓰려면 우리나라 골프 문화에 보탬이 될 만한 콘텐트를 쌓아가는 게 의미 있겠다고 생각해 책을 내기로 했다고 한다. 지금 그의 직업은 골프 여행 작가다.

한국에서 골프책은 [10타 줄이기] 같은 레슨서 이외 것은 거의 팔리지 않았다. 몇 타를 줄여준다고 해야 팔렸는데 그나마도 골프 케이블 방송이 많아지고 유튜브 레슨이 활성화된 이후엔 확 줄었다. 그래서 류석무의 [한국의 골프장 이야기]는 새로운 현상이다. 한국에 없던 골프 인문학 서적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류 작가는 “나는 패션계에서 일할 때 스타일리스트나 트렌드세터가 아니라 크리에이터로 자리매김하려 했다. 스타일리스트나 트렌드세터는 빚어진 현상을 세련되게 조합하지만, 크리에이터는 미래를 만드는 사람이다. 미래를 통찰하거나 꿈꾸면서 그것에 접근해 가는 작업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골퍼들 사이에서 코스를 알고 치자는 흐름이 생겨날 거라고 봤다. 그러나 책이 팔리려면 퀄리티가 좋아야 하고, 백서 식의 골프장 내용이 들어가되, 잘 읽히고, 인문적 내용이 있어야 한다고 봤다. 또한 사진이 좋아 보는 책도 되어야 하며, 선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맞았다.”

감수성 풍부한 ‘골프 인문학’ 개척자


▎류석무 작가가 펴낸 [한국의 골프장 이야기] 시리즈. 앞으로 4권까지 펴내 전국 골프장 100곳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게 우선 목표다.
한국 골프는 다른 나라와 다르다. 여성 골퍼 비중이 높고, 스크린 골프가 매우 활성화됐다. 류 작가는 “특이한 현상이 나오는 진원지다. 그렇다면 한국 골프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영국과 미국이라는 서양 문화 전승도 좋다. 그렇지만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것을 만들어야 한다.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고민하고, 설계도를 그리고 재건축, 재정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의 예를 들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때 치열하게 바꾸려 했다. 본질까지 바꿔야 제대로 된 혁신이라고 봤다. 언어를 영어나 프랑스어로 바꾸는 것이 답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이를 실행할 수 없으니 세상 모든 책을 번역했다. 번역자들이 단어의 본질 등을 치열하게 고민했고 미래를 그렸다. 당시의 고민이 100년이 지나면서 힘을 잃었고, 나라의 역동성이 떨어졌다.”

류 작가는 한국은 존경받는 선진국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골프가 그 과정에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골프는 자연과의 대화다. 더 나아가, 자연 속에서 귀족과 평민이 공평하고 동등한 조건으로 경기를 한다. 그 속에서 길을 찾아 나가는 것”이라고 했다. 이에 더해 골프는 정직과 상대에 대한 배려 등 에티켓도 필수다. 어릴 때부터 이런 골프의 정신을 배운다면 사회는 더 풍요롭고 건강하며 존경받는 선진국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혹시 이 책이 한국 골프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작업이라 한다면 너무 지나칠까요”라고 반문했었다.

그의 책을 읽다 보면 골프장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꽃과 나무, 풀들인 것 같다. 나무와 꽃에 대한 조예가 깊다. “살구꽃 피는 이른 봄에 1번 홀 티잉 구역에 설 때, 벚꽃 날릴 무렵 2번 홀 페어웨이를 걸을 때, 연꽃 피는 여름 6번 홀 연꽃다리를 건널 때...” 그냥 지나쳤던 꽃과 나무들인데, 책을 보니 골프장이 아니라 마치 식물원에 와 있는 인상도 든다. 우리 땅에 대한 식견도 깊고 높다. “여주 땅은 남한강을 경계로 이천에 가까울수록 평야를 이루고 동쪽의 원주와 북쪽의 양평에 가까울수록 경사가 가파른 지형으로 변한다. 이곳은 여주의 느긋한 평야가 양평의 산자락을 만나 오르막을 타기 시작하는 완만한 구릉에 학이 알을 품듯 날아 앉은 자리다.”

류 작가는 “지형, 자연 등에 대한 부분은 개인적 관심으로 풍수와 동양철학 바탕의 독서를 했다. 그 바탕 위에 감수성을 돋워 교감하고 통찰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한국 골프의 미래’ 고민하며 책도 여러 권 펴내


▎[한국의 골프장 이야기]에 실린 가평 베네스트 GC 편. 그는 타수를 줄이는 데 필요한 기술적인 정보 대신 골프장마다 간직한 고유의 정서와 이야기를 전한다.
한국 골프장에는 이야깃거리가 적다. 폐쇄적이고 드러내기를 싫어한다. 명문 골프장이라도 역사를 제대로 기록해 놓은 곳은 거의 없다. 숨기고 싶은 것이 많았을 테고 각종 세무조사 등으로 인해 있던 자료도 다 없애는 것이 현실이다. 그 와중에서도 류 작가는 이런저런 이야깃거리를 찾아냈다.

일단 관찰력이 남다르다. “안양CC 9번 홀 그린 옆에는 묵색빗돌에 ‘무한추구’라는 이 회장(고 이병철 회장)의 생전 휘호가 새겨져 있다. ‘구’ 글자가 구할 구(求)가 아니라 공 구(球)인 것이 흥미로운데 골프장에 있어서도 한계 없는 완결성을 추구했던 것으로 읽힌다.”

“(블루헤런) 서코스 6번 홀 카트도로 옆에는 비운의 임금 단종이 강원도 영월로 가는 귀양길에 잠시 목을 축였다는 샘물로, 임금이 마신 물이라는 뜻의 어수정이다.”

골퍼는 라운드 중 희로애락을 느끼게 된다. 만약 내기를 하지 않는다면 마지막 낙엽이 떨어지는 만추 골프 코스에서 삶이 무엇인지,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 자신에게 물을 때도 있을 것이다. 몸이 아파서 한동안 골프를 못하던 여성 인형 공예가와의 라운드를 그는 이렇게 썼다. “그녀의 몸은 자신이 만드는 인형처럼 야위어 있었다. 너무 힘이 없어 처음엔 공을 제대로 맞히지 못했으나, 학(鶴)이 날아들 듯 청수(淸秀)한 소나무 숲을 바라보며 소녀처럼 좋아했다. 한 홀 한 홀마다 자라나는 나무와 꽃에 매료되어 어루만지며 눈물 흘릴듯 감응하더니, 전반 홀을 마칠 때쯤에는 마법에 홀린 듯 건강하던 옛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좋은 골프장은 무엇일까. 류 작가는 “골프장 이야기를 쓰려면 여러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그것은 골프코스 평가와는 다르다”고 했다. 그의 설명은 이렇다. “골프코스를 평가하는 기관들에서는 샷 밸류(Shot Value), 난이도, 다양성, 기억성, 심미성, 지속성, 기여도, 서비스 등의 지표항목으로 배점하여 여러 평가원들의 점수를 참고한다. 그런데 이런 평가의 결과 상위에 있는 골프장들을 좋아하지 않는 골퍼들도 많다. 상위 랭킹에 오른 골프장들은 당연히 ‘도전적인 코스’들인데 대부분의 골퍼는 ‘스코어가 잘 나오는 골프장’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의 항목으로만 판단하면 수도권의 ‘전통 명문’ 골프장 상당수가 랭킹 밖으로 밀려나게 된다. 순위에 오르지 못한 골프장이 좋지 않은 곳이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류 작가는 또 “티 샷이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것을 보며 즐거운 것도 골프의 매력이고, 내기에 몰입해 공과 스코어에 집중하는 것도 골프의 묘미다. 그에 더해 골프장을 더 깊이 이해하다 보면 점점 입체적인 풍미를 많이 느낄 수 있다고 할까. 세상에 나쁜 골프장이란 게 있는지 알 수 없다. 저마다의 용도와 가치가 다르고 그것을 즐기는 골퍼의 상황이 다른 것 아니겠는가. 이 책에 나오는 곳들은 모두 객관적인 지표로 보아 일정한 수준 이상의 좋은 골프장들이다. 이 책은 좋은 골프장과 나쁜 골프장의 조건을 적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읽다 보면 골프장을 보는 입체적인 마음 기준과 눈높이가 고양될 수는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래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골프장이 있지 않을까. “아직 모르겠다. 그걸 찾아가는 중이다. 기술적, 역사적, 변별력 높은 골프장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사람마다 행복을 느끼는 부분이 다르다. 너무나 플레이에 매몰되면 그걸 못 본다.” 에둘러 말했지만 이야기꾼인 만큼 이야기가 있는 곳을 좋아하는 듯했다. “이를테면 아시아나CC는 그린이 어려워 게임과 내기 골프의 성지 성격이 있다. 서울·한양CC는 우리나라 골프의 역사를 볼 수 있는 곳이다, 해슬리 나인브릿지는 명문코스와 명문클럽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곳이다. 남춘천과 라싸 골프장에서는 한국 코스 설계가의 특성을 알 수 있다. 하나하나 모두 의미 있는 골프장들이다.”

전국 골프장 100곳의 이야기 담는 게 목표

그는 골프와 와인이 흡사하다고 했다. “와인을 좋아하다 보면 저절로 공부하며 마시게 된다. 와이너리와 품종, 빈티지 등을 따지고 대화하며 마시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골프장은 와인보다 훨씬 입체적이고 풍성하며 오묘한 세계다. 운동 경기장을 넘어 인생의 깨달음을 얻는 수양의 장소이기도 하고 더러는 예술작품 같은 곳들도 있다. 이런 골프장에서 공만 쫓기는 너무 아깝지 않은가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 게다가 그린피는 얼마나 비싼가. 우리나라의 장년 이상 세대 골퍼들은 입시 체력장 준비하듯 골프를 배웠다. 골프 요금이 비싸기 때문인지 공을 잘 때리는 힘과 기술에 치우쳐 정작 골프장에 나가면 예비군 훈련하듯 플레이하는 분위기로 흐르기도 한다.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골프의 표피적인 일부분만을 즐기는 것일 수도 있다.”

주량이나 술에 대한 지식이 많아야 행복한 술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골프도 비슷하다고 류 작가는 본다. 뛰어난 소믈리에가 반드시 가장 뛰어난 와인 애호가가 아닐 수도 있으며 같은 이유로 타이거 우즈가 가장 행복한 골퍼가 아닐 수 있다고 여긴다. 타수가 아니라 골프에서 자연을 느낄 수 있는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하다.

류 작가는 계속 한국 골프 코스에 대한 책을 낼 예정이다. 3권은 영동과 남부지방, 제주도의 골프장들이다. 그는 “수도권 골퍼에게는 여행지 골프장의 순례 안내서 격이고 지방 골퍼들에게는 1, 2권이 수도권 골퍼들에게 주었던 가치를 할 것이다. 일단 4권까지 내면 대략 한국의 주요 골프장 100여 개를 살펴보게 된다”고 했다.

서문에서 그는 “미국 오거스타 내셔널이나 페블비치,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 올드 코스에 대한 정보는 우리말로도 넘쳐나는데, 정작 우리나라에서 으뜸가는 골프장에 대한 정보는 자신의 홈페이지에서조차 제대로 찾기 어렵다”고 했다. “먼 곳에 있어도 이야기가 많은 것은 점점 더 좋아 보이고, 가깝되 알 수 없는 대상에는 오히려 서먹한 감정을 갖게 되기 마련이다.” 그가 한국의 골프장 이야기를 전하는 이유다.

※ 성호준 골프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 중앙일보 사회부와 스포츠부를 거쳐 골프전문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중앙일보와 중앙SUNDAY. 네이버에 ‘성호준의 골프 다이어리’, ‘성호준의 골프 인사이드’, ‘골프 진품 명품’ 등의 칼럼을 연재했다. JTBC골프 채널에서 [JTBC골프 매거진] [LPGA 탐구생활] 등을 진행했다. 저서로 [타이거 우즈 시대를 사는 행복][맨발의 투혼에서 그랜드슬램까지] 등이 있다.

202103호 (2021.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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