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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의 세종 리더십과 부민(富民)의 길(16)] 성군의 아킬레스건이었던 핏줄 

뛰어난 군주 역시 한 명의 인간이었다 

왕실 종친 비리 감싸줘 원성 높자 “아버지가 사랑한 분들”
허물 있었지만 인품·능력 더 뛰어나 국정 위기 없이 수습


▎세종대왕은 막내 영응대군을 매우 아꼈다.
영응대군 이염을 세종은 유독 사랑했다. 대군에게 수만금에 해당하는 보물을 몽땅 주기로 약속할 정도였다. 세종 31년 6월 26일의 [실록]에 나오는 사실이다. 세종도 누군가에게는 아버지이자 희로애락의 감정을 가진 인간이었다. 우리가 놓치기 쉬운 점이다. 그때도 친인척 비리가 있었고, 권력형 부정부패 역시 없지 않았다. 왕에게도 어두운 점이 있었으나 국정의 혼란과 위기는 전혀 없었다. 세종의 인품과 능력 덕분이었다.

왕은 왕가의 결속을 위해 자주 종친을 대궐로 불러서 친목을 다졌다. 상왕(태종)과 함께 대궐에서 종친들과 격구도 했고(세종 4년 2월 4일), 연회를 열어 함께 즐겼다(세종 6년 12월 8일). 왕의 서제(庶弟) 공녕군 이인과 경녕군 이비는 단골손님이었다.

친인척을 후대하자 부작용도 생겼다. 의산군 남휘가 말썽을 많이 피웠는데, 그는 태종의 넷째 딸 정선공주의 남편(부마)이었다. 세종 초기 북경에 사신으로 다녀올 정도로 왕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이었다. 상왕(태종) 내외는 한때 남휘의 집에서 살았고, 그때 세종은 그 집으로 매일 같이 문안 인사를 다녔다. 그러는 사이 남휘의 권세는 하늘을 찔렀다.

어느 날 남휘가 조정 관리를 폭행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나 왕은 조용히 그를 감쌌다. 남휘는 상중에 있던 공신의 비첩을 데려다가 간음하기도 했다. 그래도 왕은 용서했다. 문제의 여성이 친척 집으로 달아나자, 남휘는 비첩을 숨겨준 친척을 심하게 폭행했다. 여론의 비난이 쏟아졌으나 세종은 근신처분만 내렸다.

남휘의 말썽은 지속됐다. 장인(태종) 내외를 안장한 헌릉의 제관을 하게 되자 그 역할을 소홀히 해 견책을 입었다. 그러나 그는 법을 무시하고 녹봉을 타갔다. 다시 비판 여론이 일자 세종도 더는 그를 감싸주지 못하고 유배를 보냈다. 그러나 수개월 만에 그를 용서했다.

막내 영응대군 일이라면 사리 분별 흐려져


▎의산군 남휘와 그의 부인 태종의 넷째 딸 정선공주의 묘. / 사진: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조카 순성군 이개도 문제였다. 순성군은 양녕대군의 큰아들인데 언행에 결함이 있었다. 한 번은 전염병을 피하겠다며 무작정 판관 김후생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려 했다. 김후생은 아내가 병중이라며 사양했으나 순성군은 막무가내였다. 불청객 순성군은 밤이 되자 거문고를 타고 술을 마시며 벽에 구멍을 뚫어 안방을 엿보았다. 그 이유는 김후생의 아내에게 마음을 뒀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로 조정이 시끄러웠으나, 세종은 벽에 구멍을 낸 하인만 처벌했다(세종 12년 2월 26일).

말썽 많은 종친들을 세종이 비호한 이유는 부왕이 사랑한 사람들이라 여겨 우대한 것이었다. 그것이 효도의 길이라고 믿었다. [논어] 학이편 11장을 보면, 아버지의 ‘도(道)’를 함부로 바꾸지 않아야 효(孝)라고 했다. 유교적 교양이 깊었던 세종이었다. 그는 왕실 인사들을 인격적으로 감화하지 못하는 자신의 부덕을 탓하며 그들을 두둔했다. 이것은 유교적 이념의 한계이기도 했다.

세종에게도 과한 부분이 분명 있었다. 막내 영응대군을 지나치게 아껴 그와 관련되는 일이라면 사리 분별이 어두웠다. 영응대군의 시양부인 이순몽에 관한 세종의 지나친 애정이 그러했다. 판중추원사 이순몽은 거액의 뇌물을 받고 벌을 받았다. 그러나 왕은 그를 도진무라는 중책에 재기용했다. 도진무는 장군의 막하에서 실무적인 군사업무 전반을 관장하는 직책이다. 신하들이 거세게 항의했으나 “고의로 저지른 죄가 아니다”라며 왕은 이순몽을 감쌌다(세종 26년 8월 22일).

이순몽에 관한 세평은 최악이었다. 그는 남의 재물을 함부로 빼앗았고, 권세가에게 뇌물을 바쳤으며 호색(好色)이 지나쳤다. 심지어 상습적으로 문객에게 벼슬을 알선하고 대가를 받은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당시 여론이 그를 더럽게 여기었다”라고 사관이 실록에 기록할 정도였다(세종 26년 8월 22일).

이순몽이 무사했던 까닭은 영응대군의 비호 덕분이었다. 대군은 어렸을 적 잠시 이순몽의 집에서 전염병을 피했다. 그 인연으로 이순몽은 영응대군을 수양아들로 삼았다(세종 28년 1월 13일). 당시에는 돌림병이 퍼지면 왕자와 공주를 신하의 집으로 보내는 풍습이 있었다. 신하들로서는 왕실과 깊은 인연을 맺을 기회이기도 했다.

이순몽은 영응대군의 생일마다 수레나 소 모양의 황금을 만들어 선물로 보냈다. 그는 비단(紬絹)과 면포를 환관과 궁녀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그러자 대군과 궁중 사람들이 세종에게 이순몽을 거듭 칭찬했다. 왕은 그들의 말을 믿고 이순몽을 깊이 신뢰했다. 대궐의 귀한 음식을 그에게 자주 하사했다고도 한다(세종 28년 1월 13일).

이순몽에게 공적이 없진 않았다. 대마도와 여진족 정벌에서 무공을 세웠던 것인데, “무예가 뛰어나지 않았는데도 공을 세워 사람들이 그를 복장(福將)이라고 불렀다”는 것이 세론이었다. 전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었고, 동기간에게도 친절한 사람이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더 많았다. 그는 재물욕이 지나쳐 경기도와 경상도에 농장을 설치하고 백성의 고혈을 착취해 원성이 자자했다. 관가의 물건도 함부로 가져다 썼다고 한다. 게다가 호색한이어서 10여 명의 첩을 거느렸고, 아내가 사망하자 마음에 정해 둔 과부에게 결혼을 강요했다. 그런가 하면 첩이 낳은 딸을 때려 죽이기도 했다(세종 31년 8월 20일). 한마디로 이순몽은 ‘비리 백화점’이었는데도 세종은 늘 그를 후대했다. 왕은 그가 험지에서 무공을 세웠고, 영응대군에게 각별히 잘한다는 점만 기억하려고 했다.

이순몽이 사망하자 세종은 그동안 그가 영응대군에게 바친 재산을 그 집안에 돌려주라고 명했다. 그때 반환한 재산은 엄청났다. 노비가 83명, 금과 은이 네 덩어리씩 모두 8개, 여기에 곡식과 농장도 대규모였다(세종 31년 10월 17일). 이순몽의 재산을 돌려주게 한 다음에, 왕은 영응대군에게 내탕고(조선시대 임금의 사재를 보관하던 창고)에 보관 중인 보물을 주어 손실을 보상할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약속을 미처 이행하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대신 문종이 부왕이 약속한 보물을 대군에게 가져다줬다(세조 13년 2월 2일).

대군·부마들 국법까지 어기며 호화판 생활


▎세종대왕은 영응대군 집에 있던 동별궁에서 승하했다. ‘동별궁’이 위치했던 안국역 옆 풍문여고 자리. / 사진:위키피디아
영응대군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대군은 세종 16년 4월 15일에 태어났다. 소헌왕후가 낳은 여덟 대군 중 막내였다. 영응대군은 마음이 착해, 동자를 그려 넣은 초를 바라보다가 만약 촛불을 켜면 어린아이도 녹을 테니 차마 불을 켜지 못하겠다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왕은 대군의 그러한 착한 마음씨를 기특하게 여겨 더욱 아꼈다. 생전 세종은 수양대군(세조)을 불러 영응대군을 부탁한다는 말을 여러 번 했고, 그 때문에 세조도 그를 매우 아꼈다(세조 13년 2월 2일).

대군이 11살이 되자 세종은 그의 결혼을 서둘렀다. 사정전에서 부왕이 배필을 직접 간택해 장가를 보냈다(세종 26년 7월 8일). 얼마 후 소헌왕후가 세상을 떴는데, 그러자 왕은 영응대군과 영풍군, 영해군, 담양군 등은 나이가 너무 적다면서 상복을 입지 못하게 했다. 어린 아들들의 고생을 덜어주려는 뜻이었다. 예조판서 정갑손은 예법 질서가 무너진다며 왕에게 강력히 항의했다. 세종은 마지못해 담양군(8세)을 제외한 다른 왕자들은 상복을 입으라고 말을 바꿨다(세종 28년 3월 28일).

세종은 자녀들에 대한 사랑이 넘치자 대군과 부마(사위)의 사치가 도를 넘었다. 왕자와 공주들이 국법을 어기고 큰 집을 지어 물의를 낳은 것. 평원대군의 경우 집터를 크게 잡아 한성부가 이전해야 할 정도였다(세종 28년 3월 7일). 대신들이 왕에게 대군들의 사치를 따지자 왕은 난감했다. 영의정 하연을 비롯한 여러 대신을 불러, 왕은 양해를 구했다. 국법에는 대군의 집은 60칸, 왕자와 공주는 50칸으로 한정했다. 왕은 자녀들이 그런 법을 위반한 점을 인정하고, 임영대군의 집도 두 칸을 줄이게 했고 부마들의 집도 규정에 맞추라고 지시했다.

그러고는 영응대군의 집을 짓기 시작했다. 본래는 큰 집을 사서 선물로 줄 계획이었다고 한다. 대군의 집 짓는 문제로 왕은 대신들과 여러 차례 충돌했다. 세종이 난처한 상황에 부닥치자 김종서와 하연이 적극적으로 나서 왕을 편들었다. 김종서는 고관들도 법제대로 집을 짓지 않았다며 융통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연은 영응대군에게 아직 집이 없다는 것은 유감이라며 속히 집을 짓자고 했다. 그러자 김종서는 한발 더 나아가 예정한 택지가 너무 좁다며, 왕실 정원 상림원(上林園) 터와 그 곁에 있는 호조 참판 목진공의 집까지 아울러 택지로 쓰자고 건의했다(세종 30년 12월 14일).

이미 대군들의 집 문제로 곤욕을 치렀기 때문에 세종은 처신하기가 어려웠다. 그때 문신 이현로가 풍수지리를 근거 삼아서 대군의 집터로 안국동 부지를 제안했다. 마침내 60여 채의 민가를 헐고 웅대한 저택을 짓게 됐다(세종 31년 5월 20일). 하필 가뭄이 들어 공사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그 와중에 집의 규모가 크다고 해서 신하들이 거듭 공사를 반대했다(세종 31년 5월 28일). 군자 판관 조휘는 상소를 올려 왕을 비판했는데, 그는 왕의 잘못을 세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절제가 부족하고 둘째, 백성이 생업을 잃게 했고 셋째, 왕실 건축이 지나치게 사치스럽다고 지적했다. 상소를 읽은 세종은 깜짝 놀라 조휘를 궐내로 불러오게 한 뒤 환관을 보내 상소를 하게 된 배경을 자세히 조사했다.

여론이 불리해지자 세종은 우회 전략을 생각해냈다. “영응대군의 집이 법제에 어긋난다고 다들 말한다. 그래서 나는 풍양(현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별궁(離宮)을 영응대군에게 주고, 현재 건축 중인 집은 왕세손(단종)에게 주려고 한다.” 왕의 마음에 없는 말이었다. 대신들은 그런 사정을 정확히 알았다. 그들은 왕의 뜻이 매우 간절하다는 점을 알게 되자 비판의 수위를 낮췄다. 차라리 집을 빨리 완공해서 영응대군에게 주는 편이 좋겠다며, 대신들이 세종을 위로했다(세종 31년 7월 27일).

영응대군 대저택 공사 비판론 거셌지만 관철


▎근정문 누각에서 내려다본 세종대왕 즉위식 재현 행사 모습
앞서 집현전 학사들도 집단으로 상소해 영응대군의 저택이 화려하다고 공격했다. 이에 세종은 화를 냈다. “영응대군의 집은 다른 대군의 집이나 마찬가지다. 집현전에서 생트집을 잡아 법제에 어긋난 것처럼 비난하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별궁으로 지어 후세에 대비(임금의 노모)가 살도록 하겠다.” 이렇게까지 말을 바꿔서 왕은 집을 짓고야 말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런 일을 겪은 뒤 의정부 대신들은 왕의 의지가 강하고 아직 화도 풀리지 않은 것을 알았다(세종 31년 7월 27일).

왕은 장차 영응대군과 함께 살기를 소망했고, 왕의 그러한 생각을 대신들도 곧 알게 됐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집을 대군의 집으로만 삼을 일이 아니옵니다. 장차 임금님께서 옮 기실(移御) 곳으로 생각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소서”라고 하면서 공사 재개를 요청했다. 대신들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자 세종은 화를 풀었다.

“대신들이 영응대군의 집을 빨리 지어, 옮겨 살 곳으로 준비하자고 했다. 나는 이 말이 정말 옳다고 여긴다. (중략) 그곳에 가져다 놓은 목재와 석재를 쓰되, 40인을 동원해 공사를 진행하라. 그러나 꼭 빨리 완공하려고 번거롭게 하지는 마라.” (세종 31년 7월 28일)

대신 정분과 민신이 공사를 진두지휘해 넉 달 뒤 완공됐다. 대궐 급의 대규모 저택이 안국동에 들어섰다. 왕은 자신도 영응대군의 집으로 옮기겠다는 뜻을 공식적으로 언명하며 기대에 가득 찼다. 그러면서 세자는 금성대군의 집에서 지내라고 일렀다. (세종 31년 11월 19일)

새로 지은 집으로 거처 옮긴지 13일 만에 승하


▎영응대군의 묘소. / 사진:전주이씨 영응대군파 종회 홈페이지 캡처
해가 바뀌고 세종은 영응대군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자 화재가 일어나면 큰일이라 집 주변 민가를 철거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왕은 민생도 염려됐고 여론을 자극하기도 싫어 더는 민가에 손대지 말라고 지시했다. 불이야 조심하면 피할 수 있다며 스스로 위로하고 불편한 민심도 달랬다(세종 32년 윤1월 29일). 왕이 일단 영응대군 집으로 들어가자 세자도 계획을 바꾸어 그곳으로 옮겼다. 영응대군의 저택은 임시 궁궐로 바뀌었다(세종 32년 2월 4일).

거처를 옮기고 불과 13일이 지났을 때 세종이 새집에서 운명했다. 실록에는 영응대군 집에 있는 동별궁에서 승하했다고 기록했다. “영응대군의 집을 지을 때 따로 명하여, 이집 동쪽에 왕이 사실 건물을 짓게 하여 옮겨 사실 것을 대비했다”라고도 했다(세종 32년 2월 17일). 짐작하건대 소헌왕후가 세상을 뜨자 왕은 경복궁에 살 마음을 잃고, 사랑하는 막내와 여생을 함께 보낼 결심을 한 것으로 보인다.

대군의 집을 짓기 전에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자신이 고른 며느리 송씨(송복원의 딸)를 세종이 쫓아낸 것. 질병을 이유로 시아버지(세종)가 며느리를 내친 것이다. 그러고 나서 왕은 새 며느리를 골랐다. 도승지 이사철과 상의한 끝에, 신하들이 좋은 후보를 가려서 아뢰면 왕이 최종적으로 결정하겠다고 통보했다(세종 31년 3월 18일). 한 달 후 신하들은 영응대군의 배우자를 물색하기 위해 하삼도(충청·전라·경상)를 샅샅이 살폈다(세종 31년 4월 23일). 다시 두 달 후, 이미 사망한 부윤 정충경의 딸을 데려다 영응대군의 아내로 삼았다(세종 31년 6월 26일). 대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왕이 일방적으로 진행한 일이었다. 세종이 승하하자 영응대군은 부왕이 쫓아낸 송씨 부인과 재결합했다. 재혼한 정씨는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시아버지로서 세종은 매우 무섭고 까다로운 인물이었다. 무려 네 명의 며느리를 쫓아냈다. 선비 집안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고, 왕실에서도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영응대군의 아내 송씨를 내쫓기에 앞서, 세종은 임영대군에게도 아내 남씨를 버리라고 명령했다. 임영대군은 화약 전문가로 부왕의 인정을 받은 인재였다. 그는 동생 금성대군과 함께 군기시에서 총통과 화차를 제작했다.

임영대군의 아내는 개국공신 남은의 증손녀이자 대신 남지의 딸이었으니 왕조와 매우 특별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도 결혼한 지 불과 한 달 만에 강제로 이혼당했다. 세종은 영의정 황희 등을 불러, 며느리 남씨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다며 사정을 설명했다.

“나이가 12살도 넘었으나 아직도 오줌을 가리지 못한다. 눈빛이 바르지 못하고, 발음이 분명하지 못하며, 행동거지도 정상에서 벗어나 놀라고 미친 사람 같다.” 이렇게 심하게 비난한 다음에 남씨를 친정으로 돌려보냈다(세종 15년 6월 14일). 물론 임영대군은 부왕의 뜻에 따라 다시 결혼했다.

아무리 왕의 말이라지만 무조건 믿고 따르기는 어려운 말이었다. 감히 누가 미성숙하고 비정상적인 딸을 대군에게 시집보낼 수 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자신의 자녀를 대할 때와는 달리 며느리를 바라보는 세종의 시선은 지나치게 엄격하고 까다로웠던 것이 아닐까.

세자는 이혼시켜도 신하의 이혼은 이해 못한 왕


▎경기도 구리시에 위치한 문종현릉.
알다시피 세종은 세자(문종)의 아내(빈)였던 휘빈 김씨와 순빈 봉씨는 폐출의 비운을 당했다. 그들의 안타까운 사연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라서 줄거리만 간단히 적어본다.

세종 9년, 휘빈 김씨는 세자빈으로 간택됐으나 세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세자빈은 세자의 마음을 얻으려고 애를 태우다가 시녀 한 사람에게 비법을 들었다. “남성이 좋아하는 여성의 신발을 불에 태워 그 가루를 남성이 마시게 하면 사랑을 얻을 수 있다.” 세자빈은 세자가 좋아하는 궁녀들의 신발을 가져다 시험했으나 효험이 없었다.

뒤늦게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세종은 분노했다. 왕은 세자빈을 다그쳐 자백을 받고는 곧 폐출했다(세종 11년 7월 18일). 휘빈에게 비법을 알려준 시녀는 사형을 당했다(세종11년 7월 20일).

순빈 봉씨의 일도 끔찍했다. 세자는 봉씨도 좋아하지 않았고, 후궁 승휘 권씨(현덕왕후)를 가까이해 임신했다. 세종은 세자를 타이르며 정부인에게 아들을 두는 것이 좋다며 넌지시 책망했다. 그 후 봉씨는 상상임신을 하기도 했고, 승휘 권씨를 괴롭히기도 했다고 한다. 나중에 봉씨가 시녀와 동성애를 하였다는 말도 있다. 왕은 봉씨가 아이도 낳지 못하는 데다 투기도 심하다는 이유로 폐출을 명령했다(세종 18년 10월 26일).

왕은 이처럼 가혹하게 며느리들을 대하였으면서도 신하들의 이혼은 이해하지 못했다. 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김숙자는 집안 어른들의 명령으로 강제 이혼했다. 그러자 왕은 벌을 주고 재결합을 명령했다. 김숙자는 성종 때 이름난 성리학자 김종직의 아버지였는데, 이혼 사건 때문에 세종 때는 좋은 관직에 한 번도 나아가지 못했다. 성균관 사성 이미도 자식을 낳지 못한 아내를 함부로 내쳤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았다.

왕은 네 명이나 되는 며느리를 축출했다. 자신에게는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였다고 변명할는지 몰라도, 그런 결정이 과연 옳았는지 의문이다. 부왕이 별세하자 쫓겨난 아내 송씨를 다시 데려온 영응대군의 예를 보아도, 왕의 이혼 조치가 사리에 맞았다고 인정하기 어렵다.

누구나 허물은 있다. 세종은 공정과 정의를 이상으로 삼았으나 그의 판단과 결정도 완벽했다고 할 수는 없다. 결점이 하나도 없는 성군, 어질기만 한 현왕 같은 것은 실제로 존재할 수가 없다. 세종은 대단히 뛰어난 군주였으나, 그 역시 한 명의 인간이었다.

하지만 앞에서 소개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의 눈길을 끄는 부분이 있다. 첫째, 왕은 신하들을 함부로 윽박지르지도 않았고, 언제나 여론의 흐름을 살폈다. 둘째, 조정에는 김종서와 하연처럼 왕의 뜻을 이해하고 편드는 신하들이 있었다. 셋째, 왕과 대신들은 각자의 역할에 충실했으나 극단적으로 대립하지 않았다. 널리 존경받는 왕이라서, 설사 작은 실수가 있더라도 그것이 정치적 혼란으로 확대되지 않았다.

※ 백승종 - 역사가이자 역사칼럼니스트. 전북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튀빙겐대 대학원에서 한국학과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튀빙겐대 한국학과 교수를 비롯해 서강대 사학과 교수, 경희대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로 있다. 저서로 [상속의 역사]와 [신사와 선비] 등 20여 종이 있으며, 2012년 한국출판평론학술상과 제52회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202104호 (2021.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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