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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사랑으로 재해석한 한국사(13)] 이성계가 개경 현지처 소생을 세자로 삼은 뒤 무슨 일이 

창업 내조에 대한 보상, 왕자의 난 참극 불러 

변방의 장수 이성계, 조정 연줄 될 재상가 상속녀와 정략 결혼
현비 강씨, 사후 이방원에 의해 후궁으로 격하돼 260년간 수모


▎KBS 사극 [용의 눈물]에서 정도전(김흥기 분)과 신덕왕후(김영란 분)가 세자 책봉과 관련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태조대왕이 함흥에서 개경으로 왕래할 적에, 이 시내에 이르러 갈증이 심해졌는데 그때 신덕왕후가 마침 시냇가에서 물을 긷고 있었습니다. 태조가 물을 찾으니 신덕왕후는 버들잎을 띄워 드렸습니다. 급히 마시면 속이 상할까 봐 걱정돼 그랬다는 것입니다. 태조는 그 말을 기특하게 여겨 마침내 혼례를 올렸습니다.”(정약용, [여유당전서] ‘신덕왕후 강씨의 곡산 본궁 전말에 관한 계’)

1799년 황해도 곡산부사 정약용이 임지에서 돌아와 정조 임금에게 계(啓)를 올렸다. 관내에 ‘궁허(宮墟)’라는 곳이 있는데, 여기 있는 돌기둥을 노인들이 ‘신덕왕후 본궁’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 앞의 시내에 설화가 전해진다. 신덕왕후 강씨가 시냇물에 버들잎을 띄워 조선 태조 이성계에게 드렸다는 이야기다. 야사에 따르면 고려 태조 왕건과 장화왕후 오씨 사이에도 버들잎 띄운 물이 오갔다. 건국기에 창업자가 배필을 맞는 상징적인 설화다.

정약용은 돌기둥이 궁에서 쓰는 석재이고, 설화도 깊은 내력을 갖고 있으니, 그곳이 신덕왕후 본궁(집)일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그는 돌기둥 옆에 비석을 세우고 비각을 설치하여 초대 왕비를 기리자고 주청했다. 마침 신덕왕후의 기일을 앞두고 정조 임금은 아련한 감회에 젖어 이를 수락했다.

태조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는 어떻게 만났을까? 정말로 길 가다가 물 얻어먹고 한눈에 반했을까? 사실 두 집안은 예전부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신덕왕후의 부친 강윤성과 숙부 강윤충은 원나라 간섭기인 충혜왕, 충목왕 때 판삼사사(종1품), 찬성사(정2품) 등 요직을 지내며 부귀영화를 누렸다. 또 다른 숙부 강윤휘의 아들 강우는 이성계의 백부 이자흥의 사위가 됐다. 이성계 집안은 쌍성 지역의 원나라 천호 벼슬을 세습해왔다. 어찌 보면 친원(親元) 세력의 혼인 동맹이었다.

고향에 조강지처와 6남 2녀 두고 ‘경처(京妻)’ 들여


▎이성계·정도전 등의 역성혁명에 반대했던 포은 정몽주의 초상.
1356년 공민왕이 원나라를 버리고 쌍성총관부를 칠 때 두 집안의 운명은 엇갈렸다. 이자춘·이성계 부자는 고려에 충성을 맹세하고 쌍성 지역 수복에 결정적 공을 세웠다. 반면 강윤성·강윤충 형제는 역모 사건에 연루돼 1358~1359년쯤 잇달아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권문세족이 하루아침에 무너지지는 않는다. 신덕왕후의 오라비 강순룡이 원나라에서 벼슬하다가 돌아와 집안을 추슬렀다.

이성계는 1360년대 원명 교체기에 북방에서 침입한 홍건적, 원나라 군벌, 여진족 등과 싸워 이겼다. 변방의 무장이었던 그는 1370년대 들어 왜구 토벌전에 본격 투입되면서 개경에 진출했다. 왜적이 강화도까지 들어와 호시탐탐 수도를 노리자 동북면의 호랑이가 차출된 것이다. 이성계가 본거지 함주(함흥)에서 개경을 드나들려면 황해도 동북쪽에 자리한 곡산을 거치는 게 지름길이다. 중도에 사돈지간인 강씨 집에서 묵어가는 게 자연스럽다.

이성계는 일찍이 안변 세족 한경의 딸과 혼인해 슬하에 6남 2녀를 뒀다. 아내 한씨는 10대의 나이로 시골 장수 집안에 시집와서 동북면의 척박한 삶을 묵묵히 감내해온 조강지처였다. 하지만 남편에게 새 아내가 생기면서 한씨는 졸지에 찬밥 신세가 되고 말았다. 고려 말 지방 호족들은 중앙 관직을 받고 개경에 갔다 하면 현지처를 얻었다. 첩(妾)이 아니라 처(妻)였다. 아내를 두고 또 아내를 얻은 것이다. 이른바 ‘경처(京妻)’였다. 이성계는 강윤성의 딸을 경처로 들였고 두 집안은 겹사돈을 맺었다.

북방을 평정하고 왜구 토벌전에 뛰어들 무렵(1371~1372년) 그는 30대 중후반의 혈기 왕성한 나이였다. 나라에 공을 세우고 중앙 무대에서 성공하겠다는 야심이 꿈틀거렸다. 문제는 연줄이었다. 전쟁 실력이야 차고 넘쳤다. 하지만 조정에서 변방의 무장이 빛을 보려면 누군가 끌어주고 밀어줘야 했다. 개경 현지처, 경처는 바로 그 연줄을 제공해줬다.

이성계는 곡산 강씨를 새 아내로 맞이하며 중앙 정계에 출세의 발판을 마련했다. 꼭 개경에 살지 않더라도, 개경에 영향력이 있으면 경처다. 문벌 귀족 사회, 무신 정권, 원나라 간섭기를 거치며 고려 수도 개경을 중심으로 이른바 ‘권문세족(權門勢族)’이 형성됐다. 그들은 끼리끼리 혼맥을 형성하고 뒤를 봐주면서 권세를 키워나갔다. 재상가 강씨 집안은 그들만의 세상에 진입하는 데 필요한 동아줄이었다.

경처 강씨는 나이 차이가 스무 살이 넘는 어린 신부였다. 이성계는 강씨를 곁에 두고 개경에 드나들며 장안의 유력자들과 친분을 쌓았다. 그런데 강씨를 경처로 들인 데는 보다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국가재정 붕괴로 군비의 일부를 장수가 떠안았기 때문이다.

“근년에는 겸병하는 일이 더욱 심해져서 간악하고 흉한 도당들이 주(州)에 걸치고 군(郡)을 포괄해 산과 내를 경계로 삼고서 모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토지라고 합니다. 서로 훔치고 서로 빼앗아 1묘(畝)의 주인이 5~6명이 되고, 1년에 도조(賭租) 받는 회수가 8~9차에 이릅니다. 호소할 곳 없는 불쌍한 백성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개천과 구덩이에 빠져 죽을 뿐입니다.”([고려사절요] 신우 4)

1388년 대사헌 조준이 상소를 올려 사전(私田) 개혁을 청했다. 권세가들이 토지와 농민을 침탈하는 바람에 세금 낼 자영농이 무너지고 정규군 재원이 말랐다는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오랫동안 누적된 폐단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350년대부터 왜구들이 기승을 부리면서 세곡과 공물을 싣고 개경으로 향하는 조운선과 그 집하장인 조창이 자주 약탈당했다. 국고가 바닥을 드러내자 고려군의 전력은 크게 부실해졌다.

특히 1370년대 공민왕 말년과 우왕 초년에 왜적이 매년 10차례 이상 팔도 전역을 유린했는데 고려 정규군은 패하거나 도망치기 일쑤였다. 이때 이성계·변안열 등 신흥 무인 세력이 왜구 토벌에 나섰다. 그들은 군비의 일부를 스스로 마련해 군사를 뽑고 훈련시키고 전투에 투입했다. 정규군 외에 직속 부대를 거느린 것이다. 뒤에 ‘시위패(侍衛牌)’라고 불린 이 군사들은 형식상 나라에 속했지만 실제로는 사병이나 마찬가지였다.

남편 후원해 구국의 영웅으로 만든 여장부


▎유아인은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이방원 역을 맡아 열연했다. / 사진:SBS
이성계는 원래 함주에 최대 2000명의 가병 집단을 두고 있었다. 그 시초는 고조부 이안사가 기생을 놓고 산성별감과 다투다가 전주에서 도망칠 때 따라나선 백성들이었다. 증조부 이행리가 두만강 너머 알동(러시아)에서 덕원(원산)을 거쳐 함주로 거점을 옮기는 와중에도 그들은 생사고락을 함께했다. 그 후로도 조부 이춘, 부친 이자춘, 이성계를 따르며 이씨 집안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이 얼마나 충성스러운 사람들인가.

하지만 전국 규모의 왜구 토벌전에서 공을 세우려면 병력 확충이 절실했다. 가병 중 상당수는 본거지 함주를 지켜야 했으므로 이성계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친위군을 새로 편성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군사를 대대적으로 징발하고 육성하려면 엄청난 비용이 든다. 6남 2녀를 건사한 조강지처를 두고 권문세족 출신 아내를 얻은 데는 군비 후원을 받으려는 속셈도 있었을 것이다. 경처 강씨는 이성계에게 꼭 맞는 정략결혼 상대였다.

강씨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지만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상속녀였다. 고려 시대에는 딸도 아들과 똑같이 상속받을 권리가 있었다. 아버지 강윤성은 원나라 간섭기에 고위직을 연달아 지냈고 숙부 강윤충은 섭정 덕녕공주의 총애까지 받았다. 이 시기에 가문을 크게 일으켰다고 하니 재산이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권문세족 상속녀와 결혼한 덕분인지 이성계는 왜구 토벌전에서 맹활약하며 장수로서 날개를 달았다. 1372년 그는 화령부윤에 이어 원수(元帥)로 임명됐다. 1377년에는 지리산에서 왜적과 만나 말 타고 절벽을 타는 무용담을 남겼고, 이듬해에는 해풍(개풍)에서 최영 군단을 구원해 우왕과 수도 개경을 지켜냈다.

1380년 황산대첩은 이성계를 구국의 영웅으로 만든 역사적인 전투였다. 그해 8월 진포(금강 하구)에 왜선 500여 척이 나타났다. 최대 2만 명의 왜구들이 양광도·전라도·경상도를 휩쓸며 무고한 백성들을 잔인하게 살육하고 재물과 문화유산을 닥치는 대로 약탈했다. 우왕은 이성계를 양광전라 경상삼도순찰사로 삼아 왜구 토벌의 특명을 내렸다.

이성계 부대는 황산(남원)에서 진흙탕 백병전을 치르고 절벽을 기어오르며 왜구들과 치열하게 싸웠다. 적장 아지발도의 무위도 눈부셨는데, 이성계가 활을 쏴 그의 투구를 벗기고 이지란이 안면에 화살을 적중시키는 환상의 무용담을 빚어내며 이겼다. 두목 잃은 왜구들은 고려군의 포위전에 몰살당했고 불과 수십 명만 살아 돌아갔다([고려사절요] 신우 2). 황산대첩 이후 왜구의 활동은 잦아들었다. 수십 년간 나라를 위협하고 백성들을 못살게 군 징글징글한 적이 이성계 덕분에 무력해진 것이다.

그가 구국의 영웅으로 떠오르자 신진사대부 세력이 주목했다. 이성계는 개혁의 간판이자 방패로 손색이 없었다. 정치가로 거듭난 남편 곁에서 경처 강씨는 숱한 고비를 넘겼다. 1388년 위화군 회군 때는 포천 철현의 대농장을 경영하다가 최영에게 인질로 붙잡힐까 봐 동북면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이성계의 최대 후원자를 정적들도 가만두지 않았다.

“내가 잠저(潛邸)에 있을 당시 집안을 일으켜 나라를 세우는 데 신덕왕후의 내조가 실로 많았고, 모든 정사에 임할 때도 또한 충고하여 돕기를 부지런히 하였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 바로잡아 주는 말을 듣지 못하게 되니, 어진 보좌를 잃은 것 같아 내가 매우 슬프도다.” (권근, [양촌집] 권12 ‘정릉원당조계종본사 흥천사 조성기’)

1396년 신덕왕후 강씨가 세상을 떠나자 태조 이성계는 권근을 불러 아내를 이렇게 회고했다. 몇 줄뿐이지만 이 곡진한 말들 속에 신덕왕후의 존재감이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 이성계에게 강씨는 사랑하는 아내였을 뿐만 아니라 ‘화가위국(化家爲國)’, 집안을 일으켜 나라를 세우는 데 있어 ‘양좌(良佐)’, 어진 보좌역이었다.

집안 일으키고 나라 세운 임금의 보좌관 역할


▎KBS 사극 [정도전]에서 극한 대립으로 치달았던 이성계(왼쪽, 유동근 분)와 최영(서인석 분).
강씨는 지혜로운 여성이었다. 태조에게 물을 떠주며 버들잎을 띄웠다는 설화를 살펴보자. 갈증 난다고 급히 마시다가 배탈이 날까 봐 그랬다는 것이다. 설화는 상징적으로 강씨의 자질과 역할을 드러낸다. 조선 건국 과정에서 그녀는 이성계가 탈 나지 않도록 지혜로운 조언으로 보필했다. 역성혁명의 주요 고비마다 태조가 결단을 내릴 수 있게 도왔다.

1392년은 긴박했다. 여기저기서 목자득국(木子得國) 노래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목자(木子), 이(李)씨가 왕이 된다는 참요였다. 정몽주는 고려의 사직을 지키기 위해 이성계 일파를 탄핵했다. 이때 이성계에게 사고가 생겼다. 해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이 넘어지는 바람에 다친 것이다. 교자를 타고 돌아오는 길이었지만 몸을 다쳐 귀경이 더뎠다.

정몽주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조준·정도전 등 역성혁명파를 귀양 보내고 현지에서 국문해 죽이려고 한 것이다. 강씨는 사위 이제를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방원에게 보냈다. 이방원은 전해에 죽은 생모 한씨의 무덤 옆에서 여막살이를 하고 있었다. 강씨의 조언을 받은 방원은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이성계는 벽란도에서 하룻밤 묵고 이튿날 개경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이방원은 사태의 위중함을 알리고 그 길로 부축해 집에 갔다([태조실록] 총서).

이성계는 곧 궁궐에 사람들을 보내 자신의 보좌진을 변론하게 했다. 공양왕은 들어주지 않았다. 대간들은 오히려 조준·정도전 등을 목 베라고 간했다. 공양왕과 대간들 모두 정몽주와 교감하고 있었다. 이방원은 이제 등과 의논한 끝에 휘하의 장사들을 보내 정몽주를 참살했다. 이제가 누구의 사위인가? 암살 계획의 배후에는 강씨가 있었다. 당황한 이성계는 아들더러 불효했다고 야단쳤다. 곁에 있던 강씨가 노기를 띠고 남편을 나무랐다.

“공은 대장군을 자처하시면서 어찌 이렇게 놀라고 두려워하십니까?”([태조실록] 총서)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강단 있게 밀어붙이라는 것이다. 결국 부상당한 이성계를 한시바삐 개경에 데려오고, 고려의 버팀목 정몽주를 과감하게 제거한 것이 조선 건국의 결정적 승부수였다. 아니면 그들은 역사에 역적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이성계가 반역이냐 창업이냐, 갈림길에 서 있다는 것을 강씨와 이방원이 꿰뚫어 보고 힘을 모은 덕분에 역사의 고비를 넘긴 것이다. 그러나 얼마 후 새 나라가 들어서자 두 사람은 등을 돌리고 반목한다.

1392년 태조가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삼은 것은 강씨의 공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이성계로선 터무니없는 상속이 아니었다. 선대로 올라가면 비슷한 사례가 있다. 증조부 이행리는 두만강 너머 알동에서 여진족에 쫓겨나 덕원으로 도망갔다. 그는 안변 호족 최기열의 도움을 받아 재기에 성공하고 함주에 정착했다. 이행리는 손씨 부인과 두 아들이 있었지만 최기열의 딸과 결혼해 늦둥이 아들 춘에게 가주 자리를 물려줬다. 공을 따져 상속에 반영한 것이다. 이성계는 그 집안 전통을 좇은 셈이다. 하지만 임금의 세자 책봉은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왈가왈부 뒷말이 무성했다.

“태조가 배 조준 등을 불러 세자 세울 것을 의논했다. 시국이 평탄하면 적장자를 세우고 세상이 어지러우면 공 있는 이를 앞세워야 한다고 아뢰니, 강씨가 가만히 듣고 있다가 울었는데 그 우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으므로 자리를 파했다. 다른 날 또 극렴 등을 불러 의논했는데 다시는 적장자니 공이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이정형, [동각잡기])

세자 책봉 논의 자리에서 통곡한 왕비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조선 태조의 무덤인 건원릉, 동구릉 내에 있다.
애초 신하들의 뜻은 건국에 공을 세운 이방원에게 있었다. 그러나 강씨가 울자 신하들은 더는 적장자니 공이니 말하지 않았다. 왕비의 영향력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즉위와 함께 강씨는 현비(顯妃)로 책봉됐다. 1391년에 죽은 한씨도 절비(節妃)에 봉해졌지만 살아 있는 조선 최초의 왕비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태조의 총애와 신임이 두터웠기에 현비 강씨의 권위는 상당했다. 세자 책봉에 발언권을 행사할 힘이 있었다.

강씨는 책사 정도전과 손잡았다. 그는 재상 중심의 정치를 꿈꿨다. 임금은 상징적 존재에 머물러야 한다고 봤다. 왕권을 강화하려는 이방원은 경계했다. 어린 이방석을 가르치고 길들이는 편이 나았다. 왕비와 책사는 이해관계가 맞았고 마침내 방석을 세자로 만들었다. 방원은 분노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입 다물고 얌전히 지내는 게 상책이었다. 그가 할 일은 인내심을 갖고 세월을 낚는 것뿐이었다. 기회는 예상보다 빨리 왔다. 그녀가 죽었다.

1396년 8월 현비강씨가 세상을 떠나자 태조 이성계는 경복궁 지척(서울 정동)에 능을 조성하고 존호는 신덕(神德), 능호는 정릉(貞陵)이라고 했다. 또 근방에 흥천사를 창건해 수호사찰로 삼았다. 태조는 흥천사 종소리를 들으며 신덕왕후의 명복을 빈 후에야 수라를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극진하고 사무치는 창업자의 사랑은 머지않아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이방원이 종친, 공신들과 함께 왕자의 난을 일으킨 것이다. 이 정변은 정도전·남은 등 중신들을 처단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방원은 신덕왕후의 아들 방석과 방번, 사위 이제를 살해했다. 왕비의 오라비 강순룡 일족도 참화를 당했다. 세자 책봉에 대한 이방원의 원망이 처절하게 배어 있는 장면들이다. 그의 칼은 명계의 신덕왕후 강씨를 겨누고 있었다.

능 복원 제사 지내는 날, 원통함 씻듯 소낙비 쏟아져


▎‘정자각(丁字閣)’(왕릉 앞에 지어진 ‘丁’ 자형의 제사 건물) 뒤편으로 신덕왕후의 능침 공간이 보인다.
상심에 빠진 태조는 왕위를 넘기고 명산대찰을 찾아 죽은 강씨와 자식들의 넋을 기렸다. 1402년 11월 안변부사 조사의가 친족 신덕왕후의 원수를 갚겠다며 난을 일으켰다. 이성계는 양주 회암사에서 안변 석왕사로 넘어가 사실상 반군을 거들었다. 태종 이방원은 연거푸 (함흥)차사를 보내 아버지의 노기를 달래야 했다.

그해 12월 태종은 친정에 나서 조사의군을 격파하고 창업자를 모셔왔다. 이성계는 궁궐로 돌아가 1408년 여생을 마쳤다. 함흥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이방원은 들어주지 않았다. 조사의의 난 같은 불상사를 우려한 것이다. 태조의 능은 구리에 마련되었고(건원릉), 함흥에서 가져온 흙이 덮였다.

이성계의 죽음은 곧 신덕왕후에 대한 격하로 이어졌다. 1409년 태종은 도성 안에 정릉을 둘 수 없다며 사을한(서울 정릉동)으로 옮겨버렸다. 정릉의 정자각은 헐어서 딴 건물을 지었고, 봉분은 평평하게 밀었으며, 석인(石人)은 땅에 파묻었고, 받침돌은 청계천 광통교 놓는 데 썼다.

이방원의 신덕왕후 지우기는 집요하고 지독했다. 종묘에 신주를 봉안하지 않고 후궁의 예로 제사 지내게 했다. 처와 첩, 적자와 서자의 구별을 엄하게 하고 첩의 자식은 과거시험을 못 보게 한 것(서얼금고법)도 신덕왕후를 깎아내리다가 튄 불똥이었다.

신덕왕후 강씨가 복권되기까지는 무려 260년이 걸렸다. 1669년 서인 영수 송시열은 신덕왕후에 대한 사후 조치가 부당하다며 종묘 부묘(祔廟)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태조가 즉위할 때 중전의 자리에 앉은 정당한 왕비인데 신하들이 예를 잘못 의논했다는 것이다. 예송논쟁을 주도한 송시열은 왕가라도 주자학적 의리와 명분에 어긋난 일은 비판했다. 조선 건국에 공이 크고 태조가 사랑한 왕비를 언제까지고 황폐하게 방치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해 10월 1일 신덕왕후의 신주가 비로소 종묘 태조실에 들어갔다. 조선 최초 왕비의 귀환이었다. 능을 봉하고 제사를 지내던 날 소낙비가 쏟아져 정릉 골짜기에 가득 찼다. 오래 참은 눈물이 터진 것 같은 폭우였다. 백성들은 이 비를 ‘세원우(洗冤雨)’, 원통함을 씻어주는 비라고 하였다([현종실록] 부록 ‘현종대왕 행장’).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사람을 읽고 생각하고 쓰면서 역사의 행간을 채워나간다. 팟캐스트·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2015) 등을 썼다.

202104호 (2021.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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