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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61)] 실학 집대성한 ‘조선 지성사 최고봉’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유배의 역경을 나라다운 나라 만드는 저술로 꽃피우다 

정조 인정받고 수원화성 축조, 천주교 연루돼 강진 등에서 18년 유배
“세상사 힘쓰지 않으면 도가 아니다” 실천 가능한 사회 변혁 대안 제시


▎정호영 종손이 부인과 함께 남양주시 조안면 마재의 여유당을 찾았다. / 사진:송의호
18년의 유배를 끝내고 57세 초로의 나이에 자유의 몸이 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선생은 젊은 나이에 죽은 며느리 무덤을 먼저 둘러봤다. 풀이 무성했다. 그는 붓을 들어 며느리의 묘지명을 짓는다. “시아버지 섬기기 1년뿐이니 나는 그 어짊을 알지 못하나/ 시어머니 섬기기 17년이라 시어머니는 너를 두고 예쁘다 하네.” 며느리 심씨는 다산의 둘째 아들 학유의 아내로 1800년 봄 열네 살에 시집왔다. 그해 여름 정조가 승하하고 다음 해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됐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나 1816년 심씨가 죽었고, 죽은 지 3년 만인 1818년 9월 시아버지는 고향 집 여유당(與猶堂)으로 돌아왔다. 반가움과 안타까움은 그렇게 교차했다.

2월 19일 왼쪽으로 넉넉한 강물을 바라보며 팔당을 지나 두물머리가 앞에 놓인 남양주시 조안면 마재에 닿았다. 일대는 ‘정약용유적지’다. 여유당 앞에서 다산의 7대 종손 정호영 씨를 만났다. 정씨는 EBS미디어 대표이사를 지내고 최근 은퇴했다. 이야기는 여유당의 내력에서 시작됐다. “을축년(1925) 대홍수에 여유당이 떠내려갔답니다. 증조부가 여유당의 마지막 주인이었어요. 그때만 해도 다산이란 이름은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증조부가 ‘사암선생연보(俟菴先生年譜)’란 상세 자료를 만들면서 알음알음 전해졌습니다.”

천주교 심취하다 찰방 시절엔 포교 단속


선생은 몇 가지 호가 있다. ‘다산’은 강진 유배 시절 초당이 있던 지역 이름이며, 연보에 붙여진 ‘사암’은 ‘후대에 저술이 실현될 것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본인이 직접 쓴 호다. 또 한강의 다른 이름인 ‘열수’와 당호인 ‘여유당’도 호로 쓰였다. 유적지 조성 등 대대적인 현창 사업을 벌이는 남양주시는 직제에 ‘정약용과’를 만들어 호 대신 이름을 널리 쓰고 있다. 종손이 여유당을 안내했다. 여유당은 정약용이 벼슬을 그만둔 뒤 처음 머무른 공간이다. 1799년(정조 23) 5월, 38세 정약용은 형조참의에 오른다. 그는 앞서 옥사의 미제 사건을 해결해 정조의 신임을 얻었다. 검안서와 진술서를 엄밀히 조사해 억울한 죄수를 풀려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정약용이 형조참의에 오른 다음 달 서교(천주교)에 연루됐다는 문건이 조정에 접수되자 그는 사직 소를 올리고 7월 해임된다. 다산은 1800년 봄 처자식을 데리고 고향 초천(苕川, 마재 앞을 흐르는 작은 시내)으로 돌아와 거처를 마련했다. 그리고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게 하고(與),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猶)’는 노자의 글귀를 취해 여유당이란 당호를 내걸었다. 이후 여유당은 정약용이 유배를 떠나면서 주인이 돌아올 날만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운명이 됐다.

그 여유당에 마침내 주인이 백발이 된 채로 들어선 것이다. 정약용은 여유당에서 유배 기간 집필한 저술을 정리하는 한편 한강 주변 여러 학자와 교유했다. 또 자연인으로 돌아가 열수를 여행하고 새로운 조선을 찾으려 애썼다. 그 기간이 선생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또 18년이다. 지금의 여유당은 편액이 걸린 사랑채와 뒤로 안채가 있었다. 여유당을 나오니 왼쪽 산자락에 정약용의 묘비가 보였다. 선생의 묘소는 그 묘비보다 훨씬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는 1822년 다산이 회갑을 맞아 지은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이 새겨져 있었다. “열수 정용(丁鏞)의 묘”로 시작해 자신의 생애와 사상, 일을 적었다. 유배를 가게 한 서교 관련 부분이 눈길을 끈다. “1787년 이후 4~5년 동안 자못 마음을 기울였는데 1791년(정조 15) 이래 금령이 내려 마침내 생각을 끊어 버렸다. 1795년 중국 신부 주문모가 오니 국내가 흉흉해졌다. 이에 금정 찰방으로 나가 왕지(王旨)를 받아 서교에 젖은 지방 호족을 달래어 중지시켰다.” 정약용에게 서교를 처음 전한 이벽은 큰형 정약현의 처남이다. 이후 상황은 심상치 않게 전개된다. “1801년(순조 1) 봄 민명혁 등이 서교의 일을 문제삼아 이가환·이승훈 등이 하옥됐다. 얼마 뒤 두 형 약전과 약종도 용(정약용)과 함께 체포돼 하나는 죽고 둘은 살았다. 대신들이 방면을 건의했으나 서용보가 불가를 고집해 용은 장기로 전은 신지도로 유배 갔다.”

천주교 첫 세례자인 이승훈은 정약전의 매부이며 이후 정약종과 아들 정하상은 참수형을 당한다. 사건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 무렵 다시 조선인 천주교도가 프랑스 선교사에게 도움을 청하는 황사영 백서 사건이 드러난다. 황사영은 정약현의 사위였다. “가을 황사영이 체포되자 악인 홍희운·이기경 등이 갖은 계책으로 용을 죽이기를 도모해 용과 전이 또 체포됐다. 조사 결과 황사영과 관련된 증거가 없어 옥사가 성립되지 않았다. 이후 용은 강진으로 전은 흑산도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자찬묘지명에서 짐작할 수 있듯 당시 탄압의 명분은 천주교였지만 집권 노론 벽파가 종교를 빙자해 반대파를 제거하는 당파 싸움이기도 했다. 정약용 집안은 천주교 전래 역사의 축소판이나 다름없었다. 다산 역시 ‘사도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고 한다.

“기중기 만들어 써서 4만냥 절약했다”


▎여유당 뒤편 사당 문도사에 모셔진 정약용의 초상화. / 사진:송의호
서교를 지켜보던 시기 정약용은 이황의 [퇴계집]을 처음 접한다. 1795년 금정 찰방 시절이다. 한국경제학회장을 지낸 고승제의 [다산을 찾아서]에 관련 기록이 나온다. 정약용은 당시 이웃에서 [퇴계집]을 얻어 매일 새벽 일어나 편지글 한편을 읽은 뒤 아전의 아침 인사를 받았다. 낮이 되면 원문과 설명을 붙인 뒤 깨우치고 또 살폈다. 그게 퇴계의 학문과 덕행을 사모한 정약용의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이다. 여유당 왼쪽 뒤로 사당 문도사(文度祠)가 있었다. 1910년(순종 융희4) 조정은 선생에게 정헌대부 규장각 제학(提學)을 추증하고 문도공이란 시호를 내렸다.

다산과 정조의 인연은 특별하다. 정약용은 22세에 생원으로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가 처음 정조를 만난다. 이듬해 정조가 [중용] 관련 과제를 내자 제출한 답변이 정조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이후에도 과제와 시험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1789년(정조 13) 28세에 문과에 2등으로 합격하고, 규장각 초계문신으로 선발됐다. 벼슬에 나아가며 그는 공렴(公廉)을 다짐한다. 대과 합격증인 홍패를 받던 날 정약용은 “능력이 부족해 온전히 나랏일을 수행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공렴을 새기며 정성을 다해 일하겠노라”라는 시를 지었다. 공정과 청렴이 포부였던 것이다. 1790년 그는 예문관 검열이 되고 이듬해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에 임명된다. 31세에 진주목사로 있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정약용이 시묘할 때 정조가 다시 과제를 던진다. “1789년 겨울 배다리를 놓을 때 정약용의 공이 있었다. 이제 성(城)의 규제를 만들라.” 수원화성을 설계하라는 것이다. 또 임금은 [기기도설(奇器圖說)]을 내려보냈고 정약용은 이를 참조해 [기중가도설(起重架圖說)]을 지었다. 이에 따라 작은 힘으로 무거운 물건을 옮길 수 있는 기구가 만들어졌다. 화성을 쌓은 뒤 정조가 말했다. “기중기를 써서 돈 4만냥을 절약했다.”

정약용은 33세에 경기 암행어사로 임명된다. 그는 환정과 군정의 폐단 등 농민의 어려운 현실을 목격하고 자세히 보고했다. 35세엔 정조의 배려로 규장각 교서(校書)가 돼 그곳에 소장된 책 1~2할을 섭렵할 수 있었다. 정약용은 이렇게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두각을 나타냈지만 약점을 떨칠 순 없었다. 그는 세력이 약한 남인이었고 금지된 천주교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 1797년 정조는 그런 정약용을 보호하기 위해 변방 황해도 곡산도호부사로 내보내기도 했다. 정조와의 인연은 그렇게 끝이 났다.

유배지 다산초당에 1000여 권 장서 두고 저술


▎정약용이 강진 유배 시절 머무르며 저술하고 강학한 다산초당. / 사진:실학박물관
1801년 순조가 즉위하면서 그해 11월 정약용은 강진으로 2차 유배 길에 오른다. 18일 만에 도착한 강진은 추운 겨울이었다. 주민들은 대역죄인인 그를 피했다. 다행히 주막집 주모가 방 한 칸을 내줬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윤시유 등의 도움으로 조금씩 기력을 회복했다. 1803년 동짓날 그는 누추한 골방을 ‘사의재(四宜齋)’로 이름 붙인다. 사의(四宜)란 “생각은 맑아야 하고, 용모는 장엄해야 하며, 말은 과묵해야 하고, 행동은 중후해야 한다”는 뜻이다. 정약용은 사의재 기록에 “동짓날이니 갑자년(1804)이 시작되는 날이다. 이날 주역의 건괘(乾卦)를 읽었다”로 적고 있다. 건괘에 담긴 부지런함을 새해에 다짐한 것이다. 다산은 이렇게 역경을 기회로 바꾸는 의지를 다지며 유배를 저술 시간으로 승화시켜 나간다.

1805년 그는 소란한 사의재를 떠나 조용한 보은산방으로 옮기고 다시 이청의 집을 거쳐 1808년 봄 강진 남쪽 만덕산 다산초당에 자리 잡는다. 초당은 처사 윤단의 정자였다. 윤단은 초당을 내주고 윤종기 등 손자들 교육을 맡긴다. 정약용은 초당이 흡족했다. 그는 자찬묘지명에 이렇게 적었다. “그곳에다 대(臺)를 쌓고 못을 파고, 줄을 맞춰 꽃과 나무를 심고, 물을 끌어다 비류폭포를 만들었다. 동암과 서암 두 초막을 지은 뒤 천여 권 장서를 두고 저술하면서 스스로 재미를 느끼고 살았다.”

강학도 이뤄졌다. 정약용은 동암에 기거하고 제자들은 서암에 머물렀다. 그는 다산초당에서 제자 수십 명을 길렀다. 정약용은 그 시절 공자의 가르침은 수기치인(修己治人)에 있다면서 경학(經學)과 경세학(經世學)을 강조했다. 제자 정수칠에게 준 글에 그런 생각이 녹아 있다. “경전의 뜻이 분명해진 뒤에 도(道)의 실체가 드러나고, 그 도를 얻은 후에 심술이 바르게 되고, 심술이 바르게 된 후에 비로소 덕을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경학을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 “공자의 도는 그 쓰임이 경세에 있다. 무릇 장구(章句)에만 얽매이고 은일(隱逸)이라 자칭하며 세상사를 힘쓰려 하지 않는 것은 모두 공자의 도가 아니다.”

정약용은 유교 경전을 해석하면서 서학적 세계관에 눈뜬 철학적 안목을 창조적으로 활용했다. 금장태 서울대 명예교수는 “동아시아 경학 역사에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한다. 그는 유배 18년 동안 [논어고금주] [맹자요의] 등 경전주석 232권과 [경세유표] [목민심서] 등 경세론 저술에 매달렸다. 수기를 통해 치인에 이르러야 선비의 임무가 완성된다고 본 것이다. 정약용은 힘든 유배 생활 속에서 두 아들에게 희망과 깨우침을 편지에 담아 보내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는 8대 옥당(玉堂, 홍문관)을 지낸 명문가가 자신 대에 이르러 폐족(廢族)이 됐음을 두 아들을 향해 선언한다. “폐족이 글을 읽지 않고 몸을 바르게 행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 구실을 하랴” “폐족이라 벼슬은 못하지만 성인(聖人)이야 되지 못하겠느냐, 문장가가 되지 못하겠느냐?”며 좌절하지 않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제시했다.

둘째 아들에게 보낸 편지는 인간미가 넘친다. “네 형이 왔기에 시험 삼아 술을 마시게 했더니, 한 잔을 마셔도 취하지 않더구나. 그래서 동생인 네 주량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너는 네 형의 배도 넘는다고 하더구나. 어찌하여 글공부에는 이 애비의 성벽을 계승하지 않고 술만은 이 애비를 넘느냐. 이것은 반가운 소식이 아니다. 너의 외조부이신 절도사공은 술 일곱 잔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지만 평생 술을 입에 가까이하지 않으셨다. 노년에 이르러 작은 술잔 하나를 만들어 입술만 적셨을 뿐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술 마시는 법은 물론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책을 써야 하는지도 일러준다.

‘가계(家誡)’ 편에는 지혜가 번득이는 교훈을 적었다. “나는 전원을 너희에게 남겨줄 수 있을 만한 벼슬은 하지 않았다만 오직 두 글자 신부(神符)가 있어 삶을 넉넉히 하고 가난을 구제할 수 있기에 이제 너희들에게 주노니 소홀히 여기지 말라. 한 글자는 ‘근(勤)’이고 또 한 글자는 ‘검(儉)’이다. 이 두 글자는 좋은 전답이나 비옥한 토지보다 나은 것이니 일생 동안 수용(需用)해도 다 쓰지 못할 것이다.”

“글공부는 따르지 않고 주량은 이 애비를 넘느냐”


▎정약용의 학문과 사상이 집약된 대표 저술 [목민심서]. / 사진:실학박물관
문도사 사당을 나와 돌계단을 따라 여유당 뒷산 선생의 묘소로 올라갔다. 묘비에는 ‘문도공다산정약용선생지묘’라 새겨져 있다. 선생은 1836년(헌종 2) 2월 22일 75세로 별세했다. 이날은 선생의 회혼일이어서 친족과 문인들이 모인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그 무렵 다산은 “언행에 소박함이 없는 것이 부끄럽게 여겨진다”며 [매씨서평]을 고치는 데 전념하고 있었다. 묘역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뒤로 소나무가 울창했다. 묘 앞 묘비와 상석이 둘씩이다. 묘역을 확장한 흔적이다. 종손은 “음력 10월이면 후손들이 이곳에서 시제를 지낸다”고 했다. 또 4월 7일엔 다산연구소가 이곳을 찾아 제사를 올린다고 설명했다. 여유당 길 건너편에는 실학박물관(관장 김태희)이 있다. 경기도가 정약용의 고향에 조선 후기를 꽃피운 실학자들의 발자취를 한데 모아 2009년 문을 연 공간이다. 1, 2층 공간에 정약용을 비롯해 이익·박지원·김정희·박제가·안정복 등 익숙한 실학자의 사상과 유품 등이 진열돼 있었다.

TV ‘진품명품’에 모습 드러낸 가보 ‘하피첩’

정약용은 광주(廣州)에 은거하며 천문·지리·의학 등을 연구하고 제자를 기른 성호 이익(1681~1763)의 유고를 16세에 처음 읽고 감명받는다. 동도서기(東道西器)에 바탕한 근대적 사고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18년 뒤 후손과 유고를 정리한 뒤 성호를 ‘백세의 스승’으로 높이 평가했다. 다산이 존경한 실학의 씨앗을 뿌린 유형원(1622~1673)의 [반계수록] 기획전도 박물관에서 열리고 있었다. 실학박물관에서 종손은 종가의 다산 ‘유품’을 보여줬다. 정약용의 부인 홍씨가 시집올 때 입었던 다홍치마를 유배지의 남편에게 보내면서 시작된 이른바 ‘하피첩(霞帔帖)’이다. 다산연구소 박석무 이사장의 표현대로 아내는 남편을 잊지 못하는 사랑을 다홍치마에 담았다. 사랑을 받은 남편은 아들과 딸에게 치마에 글과 그림을 그려 그 사랑을 더 크게 넘겨준다.

하피첩은 이후 이 집안의 보물이 됐다. 종손은 근래 사연을 덧붙였다. 애지중지하던 가보는 한국전쟁 중 분실됐다. 조부 정향진은 “(하피첩을 잃고) 조상 뵐 낯이 없다”는 유언을 했다. 종손은 어렸을 적 그 이야기를 몇 번이나 들었다. 그러다 2000년 무렵 TV ‘진품명품’에 하피첩이 등장했다. 예금보험공사 압류창고에서 나와 경매될 운명이었다. 하피첩은 다행히 개인 아닌 민속박물관이 사들였다. 종손은 당시 집안에서 유품을 분실한 아픔을 전하고 복제를 간곡히 요청했다. 용케도 전문가의 손을 거쳐 진품과 다를 바 없는 복제본이 만들어졌다. 종손이 그 하피첩을 차례로 넘겼다. 하피첩은 글씨가 쪽마다 다양한 서체와 크기로 이뤄져 있었다.

선생의 묘소에선 여유당 앞을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이 한눈에 들어왔다. 정약용은 1818년 해배 이후 강진에서 집필한 저술을 여유당에서 정리하고 [경세유표] [목민심서] 등 당대 조선사회가 절박하게 요구하는 변혁의 방법과 방향을 담은 경세서를 완성하며 새로운 국가상을 제시했다. 정약용은 자신이 사는 시대는 썩은 지 오래됐다고 한탄했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다산은 애민정신으로 더 나은 세상, 나라다운 나라를 만드는 실천 가능한 대안을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제시한 선비였다. 실사구시, 다산의 외침이 다시 그리워지는 까닭이다.

[박스기사] 다산 학문·사상 결정판은 '목민심서' - 평생 500여 권 저술, 사후 100년 지나 가치 알려져

정약용은 500여 권의 저작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숫자는 그가 회갑을 맞아 지은 ‘자찬묘지명’에 근거한다. 이 글에는 [시경강의] 12권을 필두로 [논어고금주] 40권, [맹자요의] 9권 등 경집(經集) 232권의 주요 목록이 나온다. 또 시(詩)를 지은 것이 18권(2500여 수), 잡문 60권이다. 여기에 방대한 잡찬(雜纂)이 더 있다. [경세유표] 48권, [목민심서] 48권, [흠흠신서] 30권, [아방강역고] 10권, [아언각비] 3권, [마과회통] 12권 등 모두 260권이다. 그를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조선 지성사의 최고봉’으로 일컫는 까닭이다.

정약용은 죽기 전까지 여유당에서 자신의 저술을 정리했다. “내가 너희에게 바라는 것은 다행스럽게도 너희가 아주 온 마음을 기울여 내 글을 연구해 그 깊은 뜻에 통달하는 것이다.” 사후 여유당에는 저술 183책이 보존돼 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그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세상에 나오지 못한 채 먼지 쌓인 상자 속에 한 벌 저술이 남아 있었다. 1925년 대홍수를 당해 여유당이 물에 떠내려갈 때 현손 정규영의 목숨을 건 노력으로 [여유당집]은 가까스로 구출됐다. 정약용 사후 100년이 지나 그가 남긴 저술의 가치를 알아보는 이들이 생겼다. 1938년 선생의 5대손 정향진과 정인보·안재홍 등의 노력으로 [여유당전서]가 발간돼 본격적인 정약용 연구가 시작됐다.

그의 저술 중 대표작을 꼽으라면 역시 [목민심서]일 것이다. 정약용은 목민관 즉 수령이 백성을 보살피는 목민 정신을 망각하고 그들의 고통을 외면한 채 사익 추구에 급급한 것을 개탄하면서 1818년 이 책을 썼다. 이 시기는 18년 유배 생활에서 경학은 물론 자사제집(子史諸集)을 깊이 연구해 학문적 체계가 완성된 때였다. 거기다 정약용은 내직에 있을 때 논(論)·책(策) 등을 다수 올렸고 경기 암행어사 시절에는 지방행정의 부패와 백성의 고통을 직접 목격했다. 또 곡산부사로 수령 직을 체험하고 유배지에서 수령과 서리의 협잡도 듣고 보았다. 어렸을 때는 수령을 지낸 아버지의 몸가짐도 보고 배웠다. 이처럼 이론과 현장이 어우러져 [목민심서]가 탄생했다. [목민심서]는 정약용의 학문과 사상이 집결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104호 (2021.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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