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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준봉 전문기자의 책과 사람(14)] '명성황후 평전' 펴낸 이희주 서경대 교수 

“명성황후와 대원군은 운명공동체였다” 

일제, 고종을 무능한 군주로 만들기 위해 둘의 갈등 구도 부풀려
조선 살리려는 전략 달랐을 뿐… 식민지배 정당화하려 역사 왜곡


▎[명성황후 평전]에서 황후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한 서경대 문화콘텐츠학부 이희주 교수. 명성황후와 시아버지 대원군의 대립 구도는 일제의 역사 왜곡 결과라고 했다. / 사진:박종근 기자
역사적 평가에 있어서 명성황후(1851~1895)만큼이나 격렬한 부침을 겪은 인물도 드물다. 오랫동안 그는 시아버지였던 대원군을 상대로 양보 없는 권력투쟁을 벌였던 패륜의 여성 이미지가 강했다. 1990년대 중반 뮤지컬 [명성황후]의 성공 이후 그런 이미지에 균열이 왔다. 이번에는 일제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된 비운의 국모였다. ‘패륜’ 일변도에서 ‘국모’로의 전환은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해야겠지만 이런 평가의 양극단, 그 사이의 왕복 운동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패륜도 그렇지만, 민족적 공분을 자아내는 비운의 국모로만 명성황후를 소비하는 한 정작 그의 정치적 삶에 대한 풍성한 해석보다는 앙상한 혹은 얄팍한 이해에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서경대 문화콘텐츠학부 이희주 교수가 펴낸 두 권의 책은 한쪽으로 치우치기 쉬운 지금까지의 대중적 소비에서 명성황후를 구제하는 책이다. 이런 단정적 판단이 과하다면, 구제를 ‘시도’한 책이라고 하자. ‘조선의 혼으로 살아나다’라는 부제를 붙인 [명성황후 평전](신서원), 이를 좀 더 대중적으로 쉽게 풀어쓴 소설 형식의 [어머니 명성황후 조선을 품다](다사리)에서 다양한 사료를 활용해 비정한 명성황후의 모습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이를 위해 이 교수는 “명성황후의 삶을 대상 내재적인 연구방법으로 규명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평전] 서문에서다. 남편(고종)과 자식(순종)의 생존을 자신의 삶보다 우선시하는 한국적 어머니, 정치적 이상이 정치현장의 역동성과 다양성으로 인해 굴절되는 과정에 주목하는 정치적 리얼리즘의 관점에서 명성황후를 복원하려 했다는 얘기다.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교수의 여정은 그런 목적을 위해 지금까지 학계에서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없던 명성황후의 가계(家系)를 꼼꼼히 살피고, 생전 명성황후를 만났던 외국인들의 기록, 명성황후의 편지글을 들췄다. 통치 영역에 침범했던 여성이라는 기존 역사학계의 가부장적인 비판에 맞서 역대로 왕비의 ‘수렴청정은 제도상으로 유일하게 용인된 왕실 여성의 국정운영’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평전]98쪽) 명성황후가 수렴청정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정치 행위를 역대 조선왕실의 여성 정치 전통, 수렴청정의 연장 선상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시아버지 대원군과의 갈등 구도는 조선 정치 세력 간에 분열을 조장하고 악화시키려 했던 일제의 공작 정치가 먹힌 결과다. 이런 점에 대한 인식 없이 조선의 일부 지식인들이 명성황후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확대 재생산했다. 대표적인 민족주의자 황현의 [매천야록], 일본인 저널리스트 기쿠치 겐조(菊池謙讓)의 [대원군전]에 크게 의지한 소설가 정비석의 1980년 소설 [민비]를 그런 사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태영 변호사, 1960년대에 명성 입장 옹호


▎책 [명성황후 평전]과 [어머니 명성황후 조선을 품다].
이 교수를 만나 명성황후를 둘러싼 평가의 변천, 명성황후의 정치 행위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진행형인 것 같다.

“1990년대 들어 명성황후에 대한 긍정적인 연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학계 바깥에서는 국내 첫 여성변호사 이태영(1914~1998) 선생이 60년대에 이미 명성황후를 변호하는 책을 쓰겠노라고 공언해 부정적 통념에 도전했다. 이태영 선생은 실제로 1981년 [차라리 閔妃(민비)를 변호함]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커다란 시대 흐름의 차원에서 명성황후를 봐야지 편협한 개인의 차원에서 봐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학계서 명성황후에 대한 전향적 평가가 늦어졌던 이유는 뭔가?

“학계에서 식민사학이 청산되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식민사학의 대표적인 인물이 기쿠치 겐조나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 같은 인물이다. 기쿠치 겐조는 저널리스트였지 제대로 된 학자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한성신보] 특파원 신분으로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가담하기까지 했던 인물이다. 그는 [대원군전]에서 명성황후를 굉장히 폄하하고 대원군을 보기 드문 영웅으로 추켜세웠다. 그 이면에는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대립구도를 만들어 고종을 무능한 군주로 만들려는 생각이 깔려 있다고 본다. 일본인 집필자들이 왜 대원군을 높이 평가하는가, 아니면 어떤 인물을 폄하하는가 할 때는 다 일본의 국익과 연관돼 있지 않겠나. 일제는 19세기 중반부터 조선 침략 작업에 들어갔고, 학자도 아닌 기쿠치 같은 이를 통해서 한국사를 고대사부터 유린하는 작업을 정부 차원에서 진행했다.”

[평전]에서 다보하시 기요시는 경성제대 교수였을 뿐 아니라 조선사편수회에도 가담했던 식민사학의 중심에 섰던 인물로,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 같은 책을 통해 실증이라는 방식으로 식민통치를 합리화했다고 했는데.

“다보하시는 실증사학이라고 해서 가령 조선왕조실록 같은 자료를 갖고 고증한 것처럼 역사책을 쓰면서도 가면을 교묘하게 씌웠다. 가령 명성황후에 대해 어려서부터 똑똑했다고 밝히면서도 그 집안에 대해서는 가계도까지 제시하며 사료에 의해 실증한 것처럼 하면서 인현왕후를 배출한 명문가라는 점을 밝히지 않는 식이다. 일본 사람들은 자기네 국익을 위해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우리는 그런 점을 제대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제가 명성을 암살한 이유도 우리 관점에서 보면 지금까지와 달리 보인다. 조선 침략에 가장 큰 걸림돌이고 방해가 되는 존재여서 일제가 명성황후를 암살했다는 얘기는, 역으로 조선 생존을 위해서는 가장 막강한 영향력 있는 인물이 명성이 아니었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이 교수에 따르면 다보하시 기요시는 최익현의 상소로 대원군이 하야하고 고종의 친정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에도 ‘실증의 잣대’를 적용했다. 대원군의 하야 요인으로 대원군의 폭정과 고종의 강한 권력의지를 꼽았고, 친정체제 전환 과정에서 민씨 세력과 최익현의 직접 연관성은 보이지 않는다고 기록했으면서도, 결과적으로 민씨 세력들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명성황후와 최익현의 유림 세력이 대원군을 몰아내는 공동의 목표 아래 연결됐으리라는 암시를 주는 포석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최익현의 대원군 비판은 유교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위민 정책 차원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도 다보하시 기요시는 그런 본질적인 요소는 간과한 채 조선 정치 세력 간의 분열 상황만 부각했다는 게 이 교수의 지적이다.

대원군 부인, 명성황후 민씨 집안의 언니뻘


▎권오창 화백이 고증을 통해 2000년 제작한 명성황후 어진.
그렇다면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관계를 어떻게 봐야 하나. 대원군이 하야한 후 어쨌든 고종이 친정에 나서지 않았나?

“나는 정치학자다. 명성황후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내놓은 게 아니라 90년대 이후 역사학계에서 단편적으로 이뤄진 연구들을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번 총괄적으로 꿰뚫었는데, 그 과정에서 역사학자들이 손대지 않았던, 명성황후와 대원군을 대립구도를 깰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대원군이 누구인지를 들여다봤다. 개혁 군주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순조가 즉위했는데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는 왕으로 즉위하기 전에 죽어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이 순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됐다. 손자가 할아버지의 후계자가 된 것이다. 헌종이 후사가 없어 강화도령 철종을 데려왔는데 철종 역시 후사가 없었다. 효명세자의 부인인 신정왕후는 철종이 타계하자 곧바로 수렴청정을 선포하고 후계자로 고종을 선택했다. 이는 자신의 정치적 파트너로 대원군을 선택했다는 의미다.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신정왕후는 풍양 조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은진 송씨였는데 은진 송씨 가문은 명성황후 집안인 여흥 민씨 가문과 혼맥으로 연결돼 있었다. 그런데 대원군의 외가와 처가가 여흥 민씨 가문이었다. 그러니까 대원군의 부인에게 명성황후는 민씨 집안 여동생뻘이 된다. 대원군을 정치적 파트너로 선택한 신정왕후는 고종의 왕비를 누구로 할 것이냐를 두고 여흥 민씨 가문을 주시한 것이다.”

그런 끈끈한 관계였다 해도 정작 권력 앞에서는 명성황후나 대원군이나 물러서지 않고 맞섰던 것 아닐까?


▎명성황후의 편지. 국립고궁박물관이 펴낸 도록 [명성황후 한글편지와 조선왕실의 시전지]에 실려 있다.
“둘의 관계가 정말 치열한 대립 관계였다면 대원군이 명성황후를 제거할 수 있었다. 임오군란 때다. 신설된 별기군에 비해 열악한 처우에 불만이 극에 달한 군병들은 궁궐에 침입해 명성황후까지 위협하려 했다. 그럴 때 대원군이 나서서 ‘너희들이 중전을 내어달라 하니 국모를 해하고 아무리 우람한들 무사하겠느냐? 빨리 흩어져 각자 돌아가라’라고 한 다음 거짓으로 명성황후가 세상을 떠났다고 반포했다는 얘기가 명성황후 피난일지 [임오유월일기]에 나온다. 빨리 사태를 수습해 명성황후가 생명에 위협을 받지 않도록 황후의 죽음을 거짓 반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이후 대원군은 청나라에 납치돼 톈진 보정부에 감금되는데 고종실록을 보면 고종이 여러 차례 아버지의 환국을 요청하는데도 청나라가 듣지 않는다. 대원군은 명성황후에게 한글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에 ‘마마께서는 하늘이 도우셔서 환위(還位)를 하셨거니와 나야 어찌 생환하기를 바라오리까?’ ‘나는 다시 생환은 못 하고 만 리 밖 고혼이 되오니, 우리 집 후사야 양전(고종과 명성황후)께서 어련히 보아 주시겠습니까?’, 이런 대목이 나온다. ‘우리 집 후사’는 왕실의 보존, 조선의 생존이었다. 대원군이 아들인 고종과 며느리인 명성황후를 과연 권력 갈등의 대상으로만 여겼을까, 며느리인 명성황후가 시아버지 대원군과의 대립을 과연 마다하지 않았을까, 다시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 편지는 2012년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종덕 전임연구원에 의해 대원군이 명성황후에 보낸 편지라는 점이 밝혀졌다. 이 편지가 결정적이라고 본다. 대원군과 고종, 명성황후는 실은 공동운명체의 삶을 살고 있었다. 다만 조선의 생존을 두고 전략만이 달랐을 뿐이다.”

대원군, 임오군란 때 기지 발휘해 명성 도와


▎뮤지컬 [명성황후]의 한 장면. 1990년대 중반에 만들어져 명성황후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2012년 이전에는 연구자들의 대원군 한글 편지의 존재를 몰랐던 건가.

“편지 봉투에 ‘뎐 마누라 젼(前)’이라고 적혀 있다. 이렇게 하니까 ‘마누라’를 ‘아내’를 가리키는 말로 해석해 대원군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로 이전 연구자들이 착각했던 거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높은 여성을 마누라라고 했다. 며느리 명성황후에게 보낸 편지로 볼 수 있는 근거다.”

그렇더라도 명성황후는 적극적으로 정치에 관여했고, 그 과정에서 대원군과의 갈등이 불가피했던 것 아닌가?

“솔직히 말해서 명성황후와 대원군이 대립관계였다는 자료는 객관성이 부족하다. 그리고 명성황후와 대원군이 대립관계가 아니었다는 자료도 거의 없다. 명성황후의 정치 행위를 어떻게 봐야 하느냐 했을 때 사대부 집안의 여인이나 정치 관료들의 부인이라든지 수렴청정 대비들을 우리가 다시 규명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왕정 체제에서 군주가 어리거나 군주가 없거나 할 때 요즘 말하면 대통령의 유고, 국가의 위기인데 이걸 다 수렴청정으로 극복했다. 그런 전통을 기존 식민사학은 편협하게 외척의 집안이 다 말아먹었다는 식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여성들의 공적인 역할을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겠다.

“명성황후의 정체성 속에는 공사(公私) 이원적 구조가 관통하고 있었다. 고종의 아내이자 순종의 모후이다 보니 부부나 모자 관계에 있어서 여느 여성과 다를 바 없지만 그에 따른 역할이 왕실과 종묘사직에 관계된다는 점에서 공적인 특성을 보일 수밖에 없다. 명성황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선시대 여성과 정치라는 부분이 고찰되지 않고서는 제대로 규명할 수 없다. 내 책이 다른 책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이런 점에서다.”

결국 명성황후는, 조선 대비들의 정치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자기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던 사람인데, 구한말 조선이 어디로 가야 하느냐를 두고 시아버지와 생각이 달랐지만 권력의 화신으로 시아버지를 쫓아낼 정도는 아니었다, 이런 그림이 그려진다.

“그 정도로, 명성황후가 시아버지를 쫓아내야 했을 정도로 고종이 허약한 군주가 아니었다. 일본 사학자들이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관계를 대립구도로 설정한 이유는 사실은 고종이 무능한 군주라는 암시를 주기 위해서였다.”

고종이 그렇게 무능하지 않았나?

“그렇다. 아주 강한 군주였다.”

일본의 관점 뒤집을 논리와 전략 갖춰야


▎이희주 교수는 조선시대 리더십을 연구한 정치학자다. 현실정치의 시각에서 명성황후의 행적을 재평가했다. / 사진:박종근 기자
고종을 재평가하면 명성과 대원군의 대립 구도는 희석될 수밖에 없겠다.

“그렇다. 바로 그 구도다. 명성황후와 대원군을 대립시키는 구도가 바로 일제 식민사관의 노림수였다. 조선 망국의 책임을 조선 내부로 돌리기 위해 고종을 타깃으로 삼고, 고종을 바로 깎아내리는 것보다는 대원군과 명성의 대립을 통해 치고 들어온 것이다.”

이런 점들을 반영해 명성황후와 관련된 역사책을 다시 써야 하나?

“우선 명성황후에 대한 왜곡을 바로잡자는 거지만 크게는 우리의 역사 인식을 수정해 나가야 한다. 식민 사관 구도 자체를 전반적으로 점검해서 이제는 해체할 시기가 왔다고 본다. 덧붙이자면 역사 해석에 완성이라는 건 없다. 완벽한 것 역시 없다. 그때그때 새롭게 해석하며 자꾸 고쳐 나가야 한다. 그러려면 유연성, 총체적인 시각, 균형감각(balance & harmony)을 갖춰야 한다.”

한·일 관계는 어떻게 꾸려나가야 할까?

“우리의 관점에서만 일본을 바라봐서는 안 된다고 본다. 일본의 관점에서 그들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행동들을 생각해봐야 한다. 가령 독도 문제의 경우 일본의 영유권 주장을 단순히 말이 안 되는 소리라는 식으로 감정적으로 대응할 게 아니라 그에 대한 대응 논리와 전략을 짜내야 한다. 그러면서도 양국의 성장을 위하여 동반자적 관계를 지향해야 한다.”

신준봉 문화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 1993년 중앙일보에 입사했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신문사에서 10년 가까이 문학담당 기자로 일하며 본격적으로 문학과 인연을 맺었다. 상식의 눈에는 괴짜인 문인들, 그들이 생산한 영롱한 것들을 초롱초롱한 독자들에게 중개하는 일, 제도로서 문학의 생로병사에 관심이 많다.

202104호 (2021.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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