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이윤석의 조선 후기史 팩트추적(4)] 1681년 신안 앞바다로 밀려온 난파선의 비밀 

조선 불교 '화엄경' 연구 끊겼던 맥을 잇다 

일본으로 가던 중국 불경 수출선 태풍 만나 표류하다 좌초
백암 대사, 배에서 건져낸 [화엄경소초] 입수해 목판 인쇄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장을 가득 채운 신안 해저선 유물 2만여 점. 700년 가까운 시간을 훌쩍 뛰어넘는 보물창고와도 같았다.
전남 신안군은 1004개의 섬이 있다고 해 ‘천사의 섬’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신안군은 섬이 가장 많은 지자체로 여수시나 진도군보다도 섬 수가 몇 배나 많다. 신안군의 섬은 육지와 다리로 연결된 곳이 많은데, 지금도 섬과 섬 사이를 잇는 교량 설치 공사가 계속 진행되고 있다. 지난 2월에도 ‘지도’와 ‘임자도’ 사이에 다리가 개통됐다.

신안군이라는 지명을 들으면, 바로 ‘신안 앞바다의 보물선’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1975년 어떤 어부의 그물에 걸려 나온 도자기가 알려지면서 이 해역의 발굴조사가 시작됐고, 이후 엄청난 양의 14세기 중국 송나라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현재 이곳은 대한민국의 사적 제274호 ‘신안 해저유물 매장해역’으로 지정돼 있다. 발굴해낸 해저유물의 연구를 통해, 난파한 배는 중국에서 일본으로 가던 무역선이고, 여기에 실린 물건은 중국에서 일본으로 수출하던 것임이 밝혀졌다.

‘신안 보물선’처럼 풍랑을 만나 난파하거나 표류하던 배가 서해안의 섬이나 육지에 닿았다는 내용은, 과거의 기록에서 상당히 많이 볼 수 있다. 특히 신안 앞바다에 떠밀려오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 외국의 배가 표류해서 조선 땅에 닿으면, 당지의 책임자가 조정에 보고하고, 서울에서는 구체적으로 그 처리의 지침을 내렸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7년 7월 9일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중국의 상선이 태풍으로 표류하다 나주의 지도 등지에 닿은 배가 많았다. 매우 깨끗한 불경과 아주 잘 만든 절에서 쓰는 그릇 등이 해류에 밀려 떠다녔는데, 전라도와 충청도 바닷가의 여러 고을에서 건져낸 것이 모두 1000권쯤 됐다. 각 지방에서 계속 조정에 보고하면서 그 책을 함께 바쳤다. 임금이 오랫동안 이 책을 보고 있으니 민정중이 “이단의 책을 임금께서 오래 보시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했고, 김수항도 또한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임금이 남한산성의 사찰에 나눠주라고 했다.

깨끗한 불경과 사찰 용품 해류에 밀려 떠다녀


▎백암 대사의 [화엄경소초] 서문,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 사진:이윤석
이 짧은 기사에는 두 가지 흥미로운 내용이 들어 있다. 하나는 난파선에 불경이 실려 있었다는 것이다. 중국의 배가 태풍을 만나 서해안에 표류하는 일은 꽤 많았으므로 중국의 난파선이 특이한 일은 아니다. 다만 이 배가 장사하는 선박이고, 실려 있는 물건이 불경과 사찰용품이라는 점은 특이하다. 이 배에 실려 있던 불경과 사찰용품은 누가 어디에서 만들었으며, 구매자는 누구였을까?

다른 하나는 숙종이 대궐 안에서 불경을 읽어봤다는 점이다. 전라도와 충청도 해안에서 건져 올린 불경이 약 1000권이고, 각 지방에서는 이를 모두 서울로 보냈다. 그런데 숙종은 이 불경을 오랫동안 봤다고 한다. 난파선에서 나온 물건이니 호기심으로 잠깐 보는 일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단지 호기심만이 아니라, 그 내용에 관심을 보이고 오랫동안 읽었다고 했다. 주자학의 나라 조선의 임금이 오랫동안 불경을 봤고, 신하들의 만류로 겨우 불경 읽는 것을 그만뒀다는 사실 또한 흥미 있는 일이다.

불경을 팔러 가던 중국의 장삿배, 그리고 불경에 심취했던 조선의 임금, 이 두 가지는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상식과는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불경은 사찰에서 인쇄해서 나눠주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중국에는 판매용 불경이 있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리고 세종이나 세조 같은 조선 초기의 왕이 불경을 읽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조선 후기의 임금인 숙종이 대궐에서 불경을 읽었다는 것은 뜻밖의 일이다.

이 사건이 있은 지 60년쯤 뒤에 태어난 이충익은 조금 더 자세한 내용을 기록해놓았다. 난파선에서 나온 불경 중 숙종이 읽은 것은 [유마힐경]이었다고 한다. 숙종은 이 불경의 내용 가운데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이 있었던지, 불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던 당시 승지 임상원에게 이 불경의 내용을 해설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임상원은 승지인 자신이 임금에게 불경을 해설해 드릴 수 없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승지의 직무 가운데는 임금에게 유교의 경전을 강의하는 일도 들어있으므로, 아무리 왕의 요청이라 하더라도, 임금에게 불경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임상원은 생각한 것이다.

[숙종실록]의 이 짤막한 기사는 난파선이라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아내게 하는 내용뿐만 아니라, 그 배에 실려 있던 물건이 불경이었다는 점에서도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유교의 나라에 불경을 싣고 온 난파선 이야기이므로, 이 난파선의 정체는 무엇이고, 불경의 행방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위의 내용 이상의 더 자세한 것은 실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당시에 이 일을 언급한 기록들을 보면 난파선에서 나온 불경의 정체를 잘 알지 못했던 것으로 적어놓고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 난파선에는 상당수의 중국 선원 생존자가 있었고, 이들을 중국으로 돌려보내기 전에 자세히 조사했으므로, 난파선 화물의 내용이나 목적지에 대해서 조정에서는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靑 100년 걸려 목판에 새긴 '가흥대장경' 인쇄해 수출


▎추사 김정희가 쓴 봉은사 '판전(경전을 보관하는 건물)'의 현액.
[승정원일기]에는 실록보다 좀 더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조정에서는 난파선의 선원이 서울에 도착하기 이전에 이미 난파선의 성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우의정 김수항은 난파선의 선원들이 서울에 오면 그들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 있다고 말했는데, 이 말은 서울에 오면 지방에서 이루어진 것보다 좀 더 자세한 조사가 있을 것을 예고한 것이다.

그리고 좌의정 민정중은 난파선에 실려 있던 책은 중국에서 일본으로 수출하는 불경이라고 말했다. 적어도 조정의 상층부에서는 난파선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정보가 당시 일반인이나 불교계에도 전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숙종은 난파선에서 나온 1000권 정도의 불경을 모두 남한산성에 있는 절에 주라고 했고, 당시 남한산성 안에 있던 절 가운데 중심 사찰인 개원사에서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개원사는 20세기 들어와서 한동안 거의 폐사 상태에 놓여 있었으므로, 숙종이 하사한 불경이 어떻게 됐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이렇게 개원사로 보낸 것 이외에도, 또 상당한 양의 불경을 바닷가 주민들이 주워 근처의 사찰에 전해주었다고 한다.

많은 양의 중국 불경이 조선에 전해진 셈인데, 이 난파선에서 건져 올린 불경의 정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오랫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근래 이 문제를 다룬 연구자들에 의하면 이 불경은 일반적으로 [가흥대장경(嘉興大藏經)]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명나라 때인 1579년에 그 제작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서 청나라 때인 1677년에 그 목판 제작이 끝났다고 한다. 약 100년에 걸쳐 완성한 이 대장경의 특색 중 하나는 판매용 불경이라는 점이다.

중국 명나라에는 국가에서 제작한 두 종류의 대장경이 있어서 하나는 북경의 궁궐 안에 뒀고, 다른 하나는 남경의 대보은사에 뒀다. 북경의 대궐에 있는 것은 아무나 쉽게 인쇄할 수 없었지만, 남경의 대보은사에 있는 것은 비용을 내기만 하면 인쇄할 수 있었다. 남경의 대장경 목판은 15세기 초에 제작된 이래 200년 동안 너무 많이 찍어내서 인쇄의 품질이 떨어지자, 16세기 후반에 자연스럽게 민간에서 새로운 대장경 제작의 논의가 일어나게 된다.

[가흥대장경]은 100년 동안 목판을 제작하면서 먼저 완성된 부분은 인쇄해서 판매했다. 중국 국내만이 아니라 일본으로도 수출해 17세기 말 일본에서는 이를 그대로 복제해 새로 대장경을 간행했다. 일본 에도시대 [황벽장]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가흥대장경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다.

1681년 임자도 앞바다에 표류한 난파선에서 나온 불경은 바로 [가흥대장경]이다. 원래 이 배에는 [가흥대장경] 전체가 실려 있었는데, 배가 난파되면서 조선에서 그 일부만 수습한 것으로 연구자들은 파악하고 있다. 1677년에 완성된 목판으로 인쇄한 전체 대장경을 싣고 일본으로 가려던 배가 풍랑으로 파선돼 임자도로 떠밀려온 것이다. 그런데 난파선에서 나온 불경은 그 후 한국 불교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난파선에서 나온 불경에 관한 소식은 당시 조선 불교계에도 전해졌는데, 전라도 영광 불갑사에 있던 승려 백암성총(栢庵性聰, 1631∼1700)도 그 소식을 들었다. 불갑사는 난파선이 떠밀려온 임자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절이므로 백암 대사는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상당수의 불경을 얻을 수 있었다. 그 가운데는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鈔)]도 있었다.

이 책은 9세기 초에 중국의 청량징관(淸凉澄觀, 738~839)이 쓴 [화엄경]의 주석서로, 줄여서 [화엄경소초]라고 한다. [화엄경]은 [법화경]과 함께 대승불교의 가장 중요한 경전이다. 일반적으로 [화엄경]이라고 하지만, 원래 명칭은 [대방광불화엄경]으로 “꽃으로 장식한 넓고도 큰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의미다.

유교의 나라 조선, 불경 연구 엄두 못 내


▎무역협회 빌딩에서 바라본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봉은사.
우리나라에서 [화엄경]을 간행한 역사는 유구하다. 현재 보물로 지정된 구례 화엄사의 [화엄석경]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석경(石經)’은 경전의 내용을 돌에 새겨 보관하는 것으로 화엄사의 석경은 7세기 무렵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찍이 파괴돼 현재는 1만 개 정도의 부서진 조각만이 남아 있는데, 원래는 [화엄경] 전체를 돌에 새겨 보관한 것이다.

신라시대에 이렇게 [화엄경]의 본문을 돌에 새겨 보관한 이래 본문과 함께 주석한 내용을 목판에 새겨서 인쇄한 것이 여러 가지 있다. 그중에서 [화엄경소초]가 가장 중요한 책이다. 대각국사 의천은 [화엄경소초]를 간행해서 고려시대 [화엄경] 연구에 커다란 도움을 줬으나, 조선에 들어와서 불교의 탄압이 시작되면서 이 책은 더는 간행되지 못했다. 백암 대사가 난파선에서 나온 불경을 모으던 시기에 조선에서는 [화엄경소초]를 구해볼 수 없었다.

불교 신앙이 자유로웠으면 이처럼 중요한 책의 전승이 끊어질 리도 없고, 설사 책이 없어졌다 하더라도 중국을 통해서 얼마든지 구해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불교의 맥이 끊기지 않도록 하는 일이 급선무였으므로, 조선의 승려들이 화엄경 연구를 위해 이 책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임진왜란에서 승려들의 활약상은 조선의 전 계층에 깊은 인상을 남겨서 불교의 입지는 그 전보다 조금 넓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불교에 대해 극렬하게 반대했던 유학자들도 불교를 탄압하기보다는 불교의 이념이 주자학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하는 정도에서 그쳤던 것 같다. 완전히 불교를 금지 시키는 것을 제외한다면, 어쩌면 더 이상 탄압할 것이 남아 있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유학자들의 불교 배척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백암 대사가 [화엄경소초]를 간행한 것은 바로 이런 시기였다. 그는 난파선에서 나온 것을 바탕으로 새로 목판을 새겼는데, 전체 목판은 3200장 정도의 분량이다. 목판 한 장에는 앞뒤로 네 페이지가 들어가므로, 요즘으로 치면 300페이 지짜리 책 약 40권 정도가 된다. 최근 전체 100권으로 예상하는 이 책의 한글 번역본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현재 10권이 간행됐다. [화엄경소초]가 어느 정도 방대한 양인가 알 수 있다.

이처럼 많은 분량의 목판을 제작하려면 상당한 시간과 경비가 드는데, 백암 대사는 1년 만에 이 일을 끝냈다. 그는 전라도의 여러 사찰을 이 간행 사업에 참여시켜서 짧은 기간에 간행 사업을 마무리했다.

백암 대사가 1690년 간행한 80권 본 [화엄경소초]는 조선의 [화엄경] 연구에 새로운 계기가 됐다. 그러나 전라도 낙안의징광사에서 보관하고 있던 목판이 1770년 겨울에 불이 나서 모두 재가 되고 말았다. 당시 불교계에서는 설파상언 대사를 중심으로 [화엄경소초]의 간행 사업을 다시 일으켰는데, 전라도와 충청도의 여러 사찰이 참여해 1년 정도의 작업 끝에 1775년에 다시 목판을 완성했다. 그리고 이 목판을 전라도·충청도·경상도의 경계에 있던 덕유산의 영각사에 비치했다.

그 후 약 80년이 지난 1856년에 봉은사에서 또다시 [화엄경소초]의 목판 간행이 이뤄진다. 이 작업은 남호영기 대사가 맡았다. 영각사의 목판이 닳아서 글자가 선명하지 않고, 또 영각사가 남쪽에 있어서 서울 쪽에서는 책을 인쇄해서 널리 퍼뜨리기에 어려움이 있다고 새로 간행하는 이유를 밝혔다. 이 간행사업도 1년 만에 마쳤다.

징광사의 목판은 이유를 알 수 없는 화재로 사라지고, 영각사의 목판도 6·25 전란 속에서 잿더미로 변했다. 그렇지만 봉은사의 판목은 건재하다. 현재 서울 강남의 봉은사에는 [화엄경소초] 관련 두 가지가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는데, 84호는 3000여 장의 목판이고, 83호는 이 목판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수장고의 현판이다. 목판 보관창고의 현판이 문화재가 된 이유는 이 현판의 글씨를 추사 김정희가 썼기 때문이다. 전하는 얘기로는 추사가 돌아가기 사흘 전에 이 현판의 글씨를 썼다고 한다.

조선 화엄학 르네상스… 고승들 해설서 저술


▎신안군 임자도의 전경. 임자도는 전체 면적의 절반가량이 네덜란드처럼 해수면 아래에 있었지만, 주민들의 노력으로 섬과 섬 사이 바다에 둑을 쌓아 만들어진 섬이다.
1681년 신안 앞바다에 난파한 중국 선박에서 건져 올린 불경은 조선 후기에 세 번에 걸친 새로운 목판 제작을 통해 조선 불교계에 화엄학을 꽃피우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3000장이 넘는 목판을 세 번 모두 1년 남짓한 짧은 시간 안에 만들어냈다는 것은 조선 불교의 저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여러 가지 억압 속에서도 조선의 불교계는 굳세고 끈질기게 버티면서 뛰어난 승려들을 배출했고, 또한 이들 고승들은 커다란 사업을 이뤄냈다.

[화엄경소초]의 간행은 불교 서적의 출판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출판문화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이처럼 방대한 서적을 관청이 아닌 사찰에서 간행했다는 데 커다란 의의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사찰에서 불교 관련 이외의 상당히 많은 서적을 간행했으며, 목판을 새기는 각수(刻手) 가운데는 승려가 많았고, 또 종이의 생산도 사찰에서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 인쇄문화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사찰의 서적 간행을 빼어놓아서는 안 된다.


▎백제 침류왕 때 지은 사찰로 추정되는 영광 불갑사.
또 한 가지 얘기할 것은 조선 후기 [화엄경]에 대한 연구다. 신규탁 연세대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화엄경]의 완벽한 해독은 난파선에서 나온 책을 저본(底本)으로 백암 대사가 [화엄경소초]를 간행한 이후라고 한다. 세 번에 걸친 [화엄경소초]의 간행은 조선 불교계에서 [화엄경]을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줬고, 또 이를 바탕으로 여러 고승들이 저마다 특색이 있는 화엄경 해설서를 저술했다.

조선시대 승려들의 [화엄경] 연구는 단지 불교학 연구에서만 다룰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학문적 전통 전체의 일부로 다뤄야 한다. 철저하게 국가의 보호 아래 이뤄진 유교에 대한 학문적 업적은 높이 평가하면서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스스로의 힘만으로 이뤄낸 승려들의 학문적 업적에는 아무런 관심도 표명하지 않는다면 이는 그나마 얼마 되지 않는 한국의 학문 전승을 더욱 쪼그라뜨리는 것이 아닐 수 없다.

※ 이윤석 - 한국 고전문학 연구자다. 연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2016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정년 퇴임했다. [홍길동전]과 [춘향전] 같은 고전소설을 연구해서 기존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30여 종의 [홍길동전] 이본(異本) 가운데 원본의 흔적을 찾아내 복원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 해석 방법을 서술했다. 고전소설과 관련된 30여 권의 저서와 80여 편의 논문이 있다. 최근에는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와 같은 대중서적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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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호 (2021.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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