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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 유민호의 ‘미(美)의 원점, 예(藝)의 기원, 술(術)의 원조를 찾아서’(2)] 땡땡(Tintin), 화이자, 벨기에, 그리고 리버럴 아츠 

위기를 극복하게 하는 상상력의 힘 

벨기에서 100년 간격으로 등장, 세계적 위기마다 게임 체인저 역할
꿈과 상상력으로 무장해 피폐해진 인류에게 새 시대 향한 희망 선사


▎1920년대에 벨기에에서 태어난 만화 ‘땡땡(Tintin)’ 시리즈는 지난 100년 가까이 세계인의 사랑을 받아왔다. 벨기에 브뤼셀의 건물 외벽에 그려진 땡땡 만화의 한 장면. / 사진:유민호
코로나19 팬데믹 덕분이라고나 할까? 세월이 광속 수준으로 나아가는 듯하다. 이미 10년이 흘렀다. 2011년 10월 5일, 애플의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세상을 떠난 이래 3500여일이 지났다. 한때 거의 매일 등장하던 잡스 신화도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 대신 등장한 후속타는 전기자동차 테슬라 스토리다. 세계 최고 부자로 등극했다는 테슬라의 최고경영자 일론 머스크(Elon Musk)에 관한 얘기가 대세다. 주가가 널뛰기 하고 있지만, 돈벼락 신화와 관련해 당분간 머스크를 꺾을 인물은 없을 듯하다. 스티브 잡스와 일론 머스크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캐릭터의 인물이다. 둘 다 원래 미국 출생자가 아니고, 평온한 가정과는 거리가 멀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기발한 두뇌와 세계관으로 ‘세상의 유일한 하나(The Only One in the World)’를 창조해 낸다. 좋게 말하면 부정적 시련을 이겨낸 긍정 사고의 대표 주자들이고, 나쁘게 보자면 심적 열등감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출세한 경우라 풀이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선이 분명한 차이점도 있다. 개인과 사회라는 각도에서 풀이해 볼 수 있다. 필자의 주관적 판단이지만, 스티브 잡스는 인간 개개인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애플을 창조해낸다. 독립적 인간에 맞춰진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결합이자 결집으로서의 아이폰이다. 하드로서의 아이폰이지만, 결국은 소프트로서의 앱을 통해 인간 개개인의 욕구를 해결해 나간다. 이미 애플 세계에서 나타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일본의 오타쿠(オタク) 문화로서의 아이폰 진화가 가속화될 것이다. 사회나 대중이 아닌, 소규모 동아리 나아가 개개인이 주인공이다. 일론 머스크는 어떨까? 인간 개개인이 아니라, 큰 그림으로서의 사회 전체가 주된 테마다. 개별화 차별화된 인간의 욕구가 아닌, 인간 모두의 공통분모인 사회의 요구와 요청에 맞춰진 결과물이 테슬라 전기자동차다.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은 개개인 캐릭터에 맞추면서 개별적 차별적으로 진화해 나간다. 일론 머스크의 전기 자동차는 개개인의 공통점을 테슬라에 하나로 집약해 일반화, 표준화하는 식으로 발전되고 있다. 따라서 인간 모두가 테슬라에 적응해 나가야만 한다. 아이폰은 사회가 아닌 개개인의 색깔을, 테슬라는 사회의 공동 이익을 높이는 데 주목한다. 아이폰은 나만의 독자적인 컬러가 될 수 있지만, 테슬라는 나만의 것이 아닌 사회 전체의 공구(公具)로 자리 잡을 것이다. 상상컨대 언젠가 테슬라도 아이폰처럼 나만의 전기자동차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당분간은 사회 전체 공동 이익에 맞춰진 발명품이 테슬라다.

‘리버럴 아츠(Liberal Arts)’는 스티브 잡스 사후(2011년) 10년에 즈음해 사라진 말 중 하나다. 애플 모바일 신화와 더불어 21세기에 들어서기 무섭게 풍미했던 단어 중 하나가 리버럴 아츠다. 한국에서는 인문학으로 번역되면서 졸지에 관련 학자나 논객들의 주가도 급상승했다. 그동안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궁금하지만, 10여 년 전 리버럴 아츠를 표방하는 인문학자들이 대거 등장했다.

2000년 초 아이폰과 함께 등장한 ‘리버럴 아츠’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한 글로벌 제약업체 화이자의 유럽 생산기지인 벨기에의 작은 도시 ‘필스(Puurs)’는 맥주로도 유명하다. / 사진:유민호
당시 한국 상황을 지켜본 느낌이지만, ‘리버럴 아츠=백만장자 스티브 잡스 만들기’ 정도로 받아들여지는 듯했다. 자식을 리버럴 아츠로 무장한 스티브 잡스로 만들어, ‘지식, 명예, 돈’을 동시에 추구하겠다는 뜨거운 열기가 사회 곳곳에 퍼져나갔다. “돈 많이 버세요”라는 말과 함께 스티브 잡스 전기나 관련 책들이 황금복주머니처럼 팔려나갔다고나 할까? 대박심리로서의 리버럴 아츠, 나아가 스티브 잡스 흉내 내기 일 뿐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뿌리도 없이 아름다운 꽃송이만 장식할 경우, 10일이 아니라 길어야 2~3일이다. 2021년 늦봄, 리버럴 아츠, 아니 스티브 잡스란 이름 자체가 한국에서 완전히 잊힌 이유이기도 하다.

‘필스(Puurs)’

바이러스 전염병 시대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최근 어딘가에서 한 번쯤 들어본 지명일 듯하다. 2021년 코로나19를 박멸할 게임 체인저로 등장한 백신, 화이자(Pfizer)의 유럽 내 생산기지다. 벨기에의 작은 도시로, 브뤼셀에서 북쪽으로 30㎞ 떨어진 곳에 들어서 있다. 마스크와 주사기 관련 방역 선진국이라는 한국은 물론, 전 세계 모두가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화이자 백신의 핵심 생산기지가 바로 필스다. 사실, 벨기에 필스가 화이자 생산 기지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깜짝 놀랐다. 10여 년 전이지만, 3일 정도 머문 적이 있기 때문이다. 화이자 공장이란 것은 전혀 모른 채, 호텔비도 싸고 주차하기도 편했기 때문에 잠시 거쳐 갔다. 당시 필자의 머리에 새겨진 필스의 이미지는 드불(Duvel) 하나로 모아졌다. 맥주 애호가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벨기에를 대표하는 브랜드 중 하나다. 맥주 외 기억에 남는 것은 나치 독일이 운영했던 집단 수용소다. 차를 타고 지나쳤지만, 가운데 수용소를 중심으로 바깥쪽 전부가 하천으로 구성된 것이 인상 깊었다.

‘땡땡(Tintin)’은 벨기에 작은 도시가 코로나의 게임 체인저로 등장했을 당시 떠오른 이미지다. 잡지나 텔레비전을 통해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땡땡, 모험 시리즈(LesAventures de Tintin: 이하 땡땡의 모험) 속의 주인공인 어린이 기자다. 원래 만화로 시작해 텔레비전 드라마는 물론, 최근에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할리우드 영화, [유니콘호의 비밀]로도 만들어져 세계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캐릭터다. 땡땡의 모험은 ‘방드 데시네(BandeDessinee·이하 BD)’의 간판에 해당한다.

BD는 프랑스 서점의 얼굴 중 하나다. BD는 프랑스어로 표현된 만화를 지칭한다. 땡땡의 모험은 프랑스어를 통해 세계에 알려졌다. 따라서 원조를 프랑스로 알기 쉽다. 그러나 프랑스어이긴 하지만, 벨기에·스위스·룩셈부르크에서 탄생한 프랑스 언어권 만화들도 BD라 불린다. 따라서 프랑스인만이 아니라,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한 만화가 바로 BD다. 인구 1200만에 못 미치는 작은 나라지만, 벨기에는 크게 3개 언어권으로 나뉘어 있다. 북부의 네덜란드어, 남부의 프랑스어, 동부의 독일어권이다. 3개의 언어권은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겹치면서 소통한다. 벨기에를 방문할 때마다 재확인하지만, 고등학교 정도 졸업자라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독일어, 나아가 영어도 가능하다.

‘땡땡’의 상상과 화이자 꿈의 공통분모


▎화이자는 코로나19 백신으로 코로나 팬데믹 상황의 게임 체인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땡땡의 모험을 화이자 백신과 함께 떠올린 가장 큰 이유는 벨기에라는 공통분모에 있다. 땡땡과 화이자 백신이 벨기에를 무대로 탄생했다는 것이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와 닿았다. 땡땡의 모험 시리즈가 탄생한 것은 92년 전인 1929년이다. 소년 기자 땡땡이 스노이(Snowy)이란 이름의 개와 함께 세계를 돌아다니며 여행하는,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20세기 초의 만화 여행기다. 공산혁명으로 세워진 소비에트를 시작으로, 과거 프랑스 식민지인 콩고, 인디언이 등장하는 아메리카 대륙, 미라의 이집트, 신비의 나라 티베트, 일본 제국주의하의 중국에 이어지는 24개 지역이 소년 기자 땡땡의 주된 무대다. 지구만이 아니라, 달과 같은 미지의 세계도 모험의 대상이다.

시간을 100여 년 전으로 되돌려 땡땡 당시 어린이들의 마음과 머릿속으로 들어가 보자. 만화를 대하는 순간, 벨기에 나아가 프랑스 언어권 밖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과 갈망이 넘치고 넘쳤을 것이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고 했다. 만화라는 시각적 표현을 통한 묘사가 바깥 세계에 대한 흥미를 더더욱 자극했을 것이다. 장편 소설이나 견문록과 같은 소설, 시를 통한 모험의 세계는 땡땡 이전에도 즐비했다. 만화의 특징이지만, 불가능하거나 가공의 세계도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다. 무성영화는 땡땡 모험이 등장했던 1929년의 주된 문화공간에 해당한다. 유성영화도 막 나타났던 시기였지만, 눈앞에 두고 손안에 넣을 수 있는 상상의 세계로 만화에 버금가는 것도 없었다. 상하이에 직접 가서 촬영하지 않아도, 만화를 통해 중국에 관한 환상과 상상을 전해줄 수 있었다.

‘상상과 꿈의 세계’라는 키워드는 화이자 백신이 땡땡으로 연결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다. 당연하지만, 상상과 꿈의 세계는 열린 세계관을 필요로 한다. 마스크 하나에 매달리면서 전 세계 일등을 외치는 홍위병식 우물 안 세계관이 아니다. 멀고 먼 다른 나라에서 이뤄지는 다르고도 색다른 문화 문명에 대한 존경과 동경이 상상의 세계로 나가게 만드는 첫 번째 동인(動因)이다. 화이자 백신은 그 같은 새로운 세계로 나가게 만드는 육체적 정신적 ‘보증수표’에 해당한다. 벨기에산 백신의 항체 효능은 다른 그 어떤 나라 제품보다도 높다. 95%로 표현되는 화이자 백신의 효능은 새로운 세계에 적용될 ‘보험’의 안전수치일지 모르겠다. ‘화이자 백신을 맞고 세상에 나설 경우 당신의 안전을 95% 책임질 수 있다. 5%의 불안이 있겠지만, 새로운 세계에서 맞이할 모험과 체험의 가치에 비한다면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라는 의미가 95% 디지털 숫자 속에 투영된 듯하다. 전염병 팬데믹 이후 잔뜩 위축된, 인간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다시 한번 부활시켜줄 재도약 뜀틀로서의 백신이다.

경제공황 위기에 세계인의 현실 탈출구 역할


▎벨기에 브뤼셀은 도시 전체가 갤러리를 방불케 할 정도로 시내 곳곳에 다양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 사진:유민호
1929년은 땡땡과 화이자 백신이 가진 공통분모 중 하나다. 시련과 위기, 고독과 고립의 그림자가 땡땡과 화이자 백신에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땡땡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29년 1월 벨기에 현지 신문을 통해서다. 출발점은 신문 간지로 활용된 주말판 어린이용 만화로 1930년 5월까지 이어진 장편 만화다. 대략 신문 한 페이지를 차지했다고 한다. 1년 4개월 치의 연재는 이후 두꺼운 만화책으로 만들어져 1930년 말에 판매된다. 판매 즉시 벨기에는 물론 프랑스 문화권 전체의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는다.

땡땡의 출발점인 1929년의 세계는 2021년 상황과 너무도 비슷하다. 교과서에서 배웠겠지만, 뉴욕 월스트리트 발 경제공황이 전 세계로 확산된 시기다. 1929년 9월부터 시작된 뉴욕 주가 폭락은 곧바로 런던 주식시장을 통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된다. 공장이 멈추고 한순간 실업자가 폭증한다. 유럽의 소국 벨기에도 예외가 아니다. 공황 직전 벨기에의 실업률은 1.7%로 완전 고용에 가까운 상태였다. 그러나 뉴욕발 경제공황과 더불어 실업자가 폭증하면서 1932년 실업률은 20.2%로 급상승한다. 투자도 줄고 월급도 깎이면서 고난의 행군이 2차 세계대전과 종전 이후 1950년대 초까지 이어진다. 시기적으로 당장 내일의 생존을 걱정하던 시기에 등장했던 것이 땡땡의 모험 만화다. 바이러스로 인해 꼼짝 못 하면서도, 서로를 불신하는 2021년 전염병 난세의 상황과 닮았다고 볼 수 있다. 실업과 물가 폭등에 따른 인간성 상실이 1929년 경제 공황이었다고 할 때,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 공포로 인해 모두가 문을 닫고 집안으로 피신한 정신적 공황이 2021년 현실이라 볼 수 있다. 화이자 백신은 항(抗)바이러스만이 아닌, 정신적 공황의 치료약으로 등장한 셈이다.

3년 전이지만, 브뤼셀에 들른 적이 있다. 유럽학회 참석차 들른 도쿄의 일본인 친구와 함께 브뤼셀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동안 와인에 빠져 있었지만, 친구 덕분에 세계적인 명성의 벨기에 맥주가 어떤 것인지도 알게 됐다. 땡땡은 당시 브뤼셀 곳곳에서 접했던 캐릭터다. 브뤼셀 시내 곳곳에 초대형 벽화로 만들어져 전시되고 있다. 땡땡이 주인공이지만, 땡땡을 그린 만화가 ‘에르제(Hergé)’의 다른 작품들도 벽화의 주된 주제다. 브뤼셀은 벽화의 도시다. 유럽 어느 도시에나 벽화가 넘치지만, 브뤼셀은 특히 벽화 도시로 느껴진다. 이유는 좁은 공간 때문일 듯하다. 브뤼셀은 작은 도시다. 유럽 연합(EU) 본부가 위치한 곳이라지만, 인구 120만 정도의 한국 중규모 도시에 준하는 곳이 브뤼셀이다. 대략 열심히 걸어 다니면 반나절 만에 전부 정복할 정도의 크기다. 땡땡을 비롯한 에르제의 벽화는 작은 도시 브뤼셀의 간판에 해당한다. 현지인에게 물어보니 시 정부의 허락하에 체계적으로 조성된 ‘테마파크’ 성격의 벽화라고 한다. 벨기에가 땡땡의 나라라는 점을 부각하려는 의도일 듯하다.

유럽에서 브뤼셀은 크게 세 가지 점에서 인상 깊은 나라로 통한다. 성 소수자, 즉 LGBTQ 정책에 관해 가장 진보적인 나라, 알코올 소비량이 가장 높은 나라, 이슬람 신자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라는 점이다. 법적 차원에서의 동성 간 결혼을 가장 먼저 인정한 나라인 동시에, 1인당 1년간 평균 알코올 소비량이 12ℓ에 달하는 알코올 소비 대국이 벨기에다. 유럽에서 이슬람 신자는 자국 출생이 아닌, 외국 이민을 의미한다. 놀랍게도, 브뤼셀 인구의 25%인 30만 명 정도가 이슬람 신자라고 한다. 유럽의 파리 10%, 프랑크푸르트 12%, 바르셀로나 5%에 비해 엄청나게 높은 비율이다.

벨기에의 특별한 상황을 대변하기 위한 것일 듯하지만, 브뤼셀 벽화는 땡땡만이 아닌 성 소수자 문제나 이슬람 이민자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고 있다. 동성 간 애정 표현이나, 이슬람 이민자의 문화나 전통에 관한 벽화가 곳곳에 들어서 있다. 흥미로운 것은 아시아인 조롱의 상징인 ‘칭, 쳉’, 또는 ‘칭, 창, 총’에 관한 부분이다. 유럽이나 남미에 들러본 한국인이라면 알겠지만, 양손으로 눈을 아래로 찢은 채 ‘칭, 창, 총’이라 외치며 가는 현지인과 만난 적이 있을 것이다. 아시아인이라고 비웃으면서 조롱하는, 인종차별 표현이다. 궁금한 것은 ‘칭, 창, 총’의 의미다. 대략 중국인의 발음을 흉내 낸 속어로 통하지만, 어원은 어디에서 왔을까? 이슬람 이민 대국 벨기에의 작품이라는 얘기가 있다. 바로 땡땡의 모험이 ‘칭, 창, 총’의 주범이란 얘기다.

구체적으로 1934년부터 1년간 이어진 ‘푸른 연꽃(Le Lotus bleu)’ 시리즈 연재물이 아시아인 비하의 기점이라는 설(説)이다. 만화 속에 나오는 땡땡의 친구이자, 중국인 고아인 ‘창총첸(Chang Chong Chen)’이 바로 주범이다. 푸른 연꽃은 1930년대 상하이 조계 지역의 일본 스파이와 애국운동을 주도하는 중국인 사이의 갈등을 다룬 작품이다. 중국인을 응원하고 일본인을 악당으로 다룬 만화로, 중국인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유명한 작품이다. 일본=악, 중국=선으로 그린 작품이었기에 장개석이 땡땡을 그린 에르제를 중국에 직접 초청하기도 했다.

땡땡의 모험은 아시아인 조롱의 상징 기원


▎땡땡 시리즈는 1900년대 초 미지의 세계였던 아프리카와 아시아, 소련 등을 소재로 삼아 유럽인에게 꿈과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러나 비극인지 희극인지, 만화 속의 중국인 주인공 이름은 이후 아시아인 비하의 대명사로 전락한다. 지난 3월 유럽연합은 중국의 위구르 정책을 인도주의에 반하는 야만적 행위라고 맹비난했다. 당시 벨기에는 선두에 서서 위구르 인권문제를 제기한 나라다. 90여 년 전 제국주의 일본을 비난하며 물에 빠졌던 중국인 고아 ‘창총첸’을 구했던 땡땡이지만, 21세기 들어서는 정반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만약 땡땡이 2021년 위구르로 간다면 ‘중국=세계 최악의 반 문명국가’로 규정할 듯하다.

유럽 특히 프랑스 언어권 지식인의 ‘모순된 민낯’은 땡땡의 모험을 통해 알게 된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다. 땡땡의 제1회 출발 시리즈인, ‘소련 모험기(Tintin au pays des Soviets)’를 보자. 1917년 혁명으로 공산화된 나라가 소련이다. 유럽인 모두에게 낯선 체제의 나라다. 소년 기자 땡땡은 공산혁명 12년 뒤인 1929년 소련에 잠입한다. 스탈린 독재 체제의 나라다. 그러나 당시 벨기에와 유럽에는 공산 소련의 파라다이스 프로파간다만이 넘치고 있었다. 땡땡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비밀경찰과 스탈린 1인 독재로 점철된 어둡고도 살벌한 나라를 취재한다. 당시 프랑스 언어권 지식인 대부분은 ‘소련=인류의 파라다이스’로 미화하기에 바빴다. 피카소조차 소련을 찬양하는 공산주의 찬미 예술가로 추앙됐다. 최근의 한국 상황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진보=친북·친중·반미·반일’로 나아가는 행태와 비슷하다. 놀랍게도, 땡땡의 소련 모험기는 소련의 현실을 헐뜯고 왜곡한 작품이라는 평가가 지식인 사이에 팽배한다. 아주 사소한 내용을 근거로 대면서, 소련에 대한 몰이해라 몰아가는 비난이 땡땡 모험기에 따라붙는다.

만화에 투영된 서구 지식인 사회의 이념 편향

장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는 전후 프랑스 지식인의 대표주자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한국 좌파인사들이라면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존경하고 흠모하는 현대 철학가이기도 하다. 가장 큰 이유는 한국전쟁을 북침이라고 주장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남침 관련 여러 증거가 나오자, 뒤늦게 미국과 한국의 계략에 의해 북한이 서울을 공격하게 됐다는 식으로 변명한다. 그러나 출발점은 항상 미 제국주의 주도 하의 북침이다. 프랑스 철학자가 1950년 한국전쟁에까지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 흥미롭지만, 땡땡의 소련 모험기를 둘러싼 프랑스 지식인의 모순된 민낯을 보면 그 배경도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땡땡의 소련 모험기를 왜곡과 편견의 산물이라고 비판하는 것이 21세기 프랑스 지식인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시베리아 유배나 집단수용소, 민족 대이동과 집단이주에 관련된 스탈린 독재에 관한 얘기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어간다. 최근에 나타난 한국적 비극 중 하나지만, 한국어가 유창한 유럽인이나 동구권 인사를 통한 진보논리 독점 행태가 두드러진다. TV에서 봤지만, 러시아 출신 한 인물은 ‘적폐’라는 말을 동원해 한국 현대사 전체를 뒤집어 놓는다. 한국의 오늘과 내일을 걱정해주는 것이 고맙긴 하지만, 한국의 어제를 비난하기 전에 자국에서 벌어지는 모순과 비상식부터 거론하는 것이 순서일 듯하다. 배가 산으로 간다고 해서 달구지 운전사를 선장이라 부를 수는 없다.

스티브 잡스 세계관으로 볼 때 땡땡의 모험기는 리버럴 아츠의 20세기 초 버전에 해당할 듯하다. 앞서도 강조했지만, 상상력 나아가 꿈은 리버럴 아츠를 구성하는 핵심 키워드에 해당한다. 스티브 잡스가 디지털 아이폰을 통한 상상력 증진에 애썼다고 할 때, 땡땡의 모험기는 전 세계를 무대로 한 아날로그 만화를 통한 새로운 꿈의 도전에 나섰다고 볼 수 있다. 어린이 기자를 주인공으로 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만화였지만, 1929년 공황과 이후 제2차 세계대전과 전후의 척박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남녀노소 모두의 가슴에 새겨진 아날로그 리버럴 아츠의 정수(精髓)였을 것이다.

땡땡 모험기 만화는 브뤼셀은 물론 파리의 고서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20세기 초 프랑스 리버럴 아츠의 대명사다. 굳이 만화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프랑스 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예외 없이 수집에 나선다. 출간 시기나 인쇄 상태에 따라 다르지만, 30쪽 정도 땡땡 만화 한 권 가격이 대략 15유로선에서 출발한다. 20세기 경제공황과 전쟁, 21세기 바이러스 전염병을 이겨내는 벨기에의 혼과 정신을 응집한 리버럴아츠의 결정판이, 호기심 덩어리 소년 기자 땡땡이다.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2105호 (2021.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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