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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현의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다시 보는 일본(4)] 제1부 일본에 대한 다양한 시선(4) 서구인들 눈에 비친 동방의 섬나라 

청결·정직·예의… 칼을 감싼 포장에 반하다 

선교사 등 개항기 방문객들 “나라 전체가 예절학교” 찬사
이웃으로 산 적 없는 서양인, 일본인 내면의 폭력성 못 봐


▎야마구치현 하기시에 있는 에도 시대 후기의 사숙인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 걸려 있는 문하생들의 사진. 맨 윗줄 가운데가 요시다 쇼인, 둘째 줄 오른쪽이 이토 히로부미, 맨 위 오른쪽이 메이지 유신 삼걸 중 하나인 기도 다카요시다.
일본의 영어 국명인 Japan의 기원은 무엇일까? 기록에 의하면 왜(倭)라는 국호 대신 일본(日本)이라는 국호가 쓰이기 시작할 때는 중국의 당나라 시대이던 702년이다.

현대 중국어식 일본의 발음은 ‘Rìběn’이다. 일본어에서 일(日)의 음독은 두 가지. ‘にち=니치’는 북경 발음(漢音)이고, ‘じつ=지쓰’는 오나라 발음(吳音)이다. 일본이라는 한자 국명이 생긴 뒤 남부 중국인들이 일본을 저렇게 발음한 것을 들은 유럽인이 일본을 Japan으로 발음하면서 유럽에 알려지게 됐다. 일본 영문 국호의 어원은 [동방견문록]을 쓴 마르코 폴로의 ‘황금의 나라 지팡구(ZIPAN·ZIPANGU)’라는 기록에서 시작한다는 설이 유력하다.

마르코 폴로는 직접 일본에 가보지 않고 원나라에서 들은 이야기를 통해 일본을 설명했다. 그는 “지팡구는 육지에서 동쪽으로 해상 1500마일 떨어진 큰 섬이고, 주민들은 피부가 희고 깨끗하며 잘생겼다. 그들은 우상 숭배자들이며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자기들끼리 독립해서 산다. 궁전과 민가가 황금으로 돼 있는 등 재물이 넘쳐나는 황금의 나라”라고 소개한다. ‘황금의 나라’는 어쩌면 서구에 소개된 최초의 일본 이미지다.

본격적으로 서구에 일본이 알려지게 된 것은 대항해 시대. 대항해 시대는 서구가 황금과 이상향을 찾아 나선 시대다. 비록 쇄국 국가였지만, 나가사키의 인공 섬 데지마(出島)의 네덜란드 상관(商館) 관리들은 제한적이나마 일본을 서양에 알리기 시작한다.

독일 고고학자 “툭하면 바가지 씌우는 중국인과 달라”


▎일본 극우단체 회원들이 도쿄 신주쿠 코리아타운에서 욱일승천기와 ‘중국을 죽여라’고 쓴 피켓을 들고 가두행진을 벌이고 있다.
세계에 문호를 열어 근대화 걸음을 시작한 에도 바쿠후 말기와 메이지 시대, 구미로부터 많은 외국인이 일본을 방문하고 머문다. 그들은 각지를 여행하며 일본과 일본인의 모습을 관찰하고, 서양과 또 아시아의 다른 나라와도 다른 일본의 가치를 발견한다. 이러한 외국인들은 주로 외교관·선교사·여행가·저널리스트 등이었다. 그들은 일본에서의 기록을 일기에 남겨 여행기로 출판하거나 논문으로 발표한다. 당시 ‘미지의 나라’였던 신비한 일본의 모습이 바야흐로 세계에 소개된다.

일본에 최초로 기독교를 전파한 스페인 신부 프란시스코 사비에르,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 등은 당시 일본 사회의 실정을 기록해 편지나 보고서 형식으로 남겼다. 그들은 “일본인은 유럽 최선진국도 미치지 못할 정도의 높은 문화와 도덕성을 지니고 있다”고 극찬했다. 시간이 흘러 에도 바쿠후 말기에 일본을 방문한 서양의 외교관이나 상인들, 초대 주일 영국영사 러더포드 알콕이나 영국 외교관 어니스트 사토, 독일의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 등도 “일본은 다른 아시아 제국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평가했다.

에도 바쿠후 말기의 일본은 이국인에게 문을 연 ‘수수께끼와 신비의 나라’였다. 이후 130년 정도 지나 세계 제2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기적’에 이르기까지, 서구인의 일본에 관한 관심은 다양한 일본론을 만들었다.

일본론의 기원으로는 아즈치모모야마(安土桃山) 시대나 에도 시대 외국 선교사의 보고서를 들 수 있다. 청일·러일전쟁, 그리고 제1·2차 세계대전을 통해 드러난 일본 사람들의 전략과 전술, 충군애국 사상의 배경 등에 관심이 깊어졌다.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이나 오이겐 헤리겔의 [활과 선(弓と禪)] 같은 일본 연구가 진행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에서는 1941년 적국의 정보를 분석하는 전쟁 정보국이 창설됐는데, 이후 문화 연구 차원에서 각 방면의 학자를 모아 전략적으로 일본인을 연구했다. 이 같은 연구는 특히 1942~44년에 걸쳐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제2차 세계대전 후로는, 고도 경제 성장기(1955~1973년)부터 다시 그 성공을 뒷받침하는 사회적 기반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다양한 일본론이 저술됐다. 당시 저서들은 대체로 일본인을 균일한 집단으로 파악하고, 이문화와의 비교를 통해 그 독자성을 주목했다. 일본인 관련 연구는 베스트셀러도 여럿 나올 정도로 인기 분야다.

개국 시기 일본을 경험한 서구인들은 대부분 일본에 열광했다. 그들이 꼽은 일본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청결·정직·예의범절, 아름다운 자연, 높은 문화 수준, 훌륭한 치안, 우수한 교육 등이다. 일본 고유의 화장 문화인 이를 검게 칠하는 오하구로(お齒黑), 혼욕(混浴) 문화, 남색(男色)에 대한 관대함 등에는 기겁하기도 한다.

목숨 걸고 선진 문물 배우려한 지적 호기심에 감동


▎태평양전쟁 당시 한국인 강제징용자들의 모습. 미 해군이 작성한 사진설명에는 1945년 3월 한국 징용자 193명이 일본군에 반발해 저항했고, 이 가운데 100여 명이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했다고 기록돼 있다. /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서구인들은 가난해도 즐겁게 사는 일본 서민들의 모습에 또한 놀란다.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으로 일본을 열등하게 보는 게 아니었다. 어쩌면 자신들보다 더 뛰어난 문명이라고 여기기도 했다. 아편전쟁 이후 서구 열강에 시달리던 중국과도 비교되곤 했다.

슐리만은 귀국 후 [일본견문록]을 저술했다. 그는 일본에서 일본인들을 세심하게 관찰한 뒤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중국에 있을 때 가장 불쾌했던 건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하고 돈을 갈취하려는 사람들이었다. 중국인들은 탈 것을 이용할 때 처음 제시했던 요금과 달리 나중에 바가지를 씌우는 일이 잦았다. 그런 경험 때문인지 일본에서 나룻배를 탈 때 원래 요금보다 웃돈을 얹어서 뱃삯을 지불하려 했다. 그런데 사공이 ‘이건 정해진 요금과 다릅니다’라며 남은 돈을 돌려줬다.”

한국에도 여행하며 조선인의 인물(체격과 얼굴)에 대해 찬사를 보냈던 영국인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비숍은 일본을 이렇게 평가했다. “일본만큼 여성이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는 나라가 없다고 믿는다. 바가지요금을 당한 적도 없고, 외국인이라고 해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곤욕을 치른 적도 없다.”

그리스의 작가이자 신문기자였던 라후카디오 한은 “일본인의 미소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서 오랫동안 키워온 예의범절이다. 그것은 침묵의 언어이기도 하다”며 “일본에는 아름다운 마음이 있다. 그들이 왜 서양을 흉내 내야 하는가”라고 일본인의 미소와 예의범절을 극찬했다.

일본 개국에 공이 컸던 초대 주일미국공사 다운젠드 해리스는 “일본에는 내가 이제까지 어떤 나라에서도 볼 수 없었던 간소함과 정직함이 있다”며 “가키자키(柿崎)는 작고 빈한한 어촌이지만 주민의 옷차림은 산뜻하고, 그들의 태도도 공손하다. 그들에게서는 어떠한 불결함도 보이지 않았다”고 칭찬했다.

오페라 [나비부인]의 주무대인 나가사키에서 활약했던 스코틀랜드 무기 상인 토마스 글로버는 “막부 말기에 조슈·사쓰마·히고·히젠 등 각 번과 몇십만, 몇백만 양(兩)의 거래를 했지만, 뇌물은 한 푼도 쓰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하나같이 청렴해서 뇌물을 받으려고 하지도 않았다”며 일본인의 청렴성을 강조했다.

일본인의 호기심을 이야기하는 기록도 많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메이지 유신 혁명가들의 스승이라 불린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밀항 기도 사건에 대한 페리 제독의 기록이다. 1854년 요시다 쇼인은 제자와 함께 시모다(下田) 항으로 갔다. 그곳에 정박했던 페리 함대에 승선해 미국으로 밀항을 기도했다. 그는 선진 문물을 배우고자 하는 의욕으로 충만했다.

페리의 [일본원정기]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이 두 사람(쇼인과 그의 제자)의 사건은 우리를 감동시켰다. 교양 있는 두 일본인이 목숨을 걸고, 국법을 어기면서까지 지식을 갈망하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일본인은 실로 학문을 좋아할 뿐 아니라 지적 호기심이 뛰어난 국민이다.”

가난하지만 행복… 어떤 나라보다 높은 단계


▎도쿄 시내 한복판에서 총격전을 벌이다 경찰에 체포된 일본 조직폭력배들.
스웨덴 식물학자 칼슨베르크는 1755년 나가사키 네덜란드 상관 데지마에 왔다. 그는 나중에 에도로 상경해서 일본인을 관찰하고 기록했다. “그들은 일급 민족이다. 근면하고 현명하고 예의 바르고 용감하다. 중국과 조선은 여자가 노예와 다를 바 없는데 이 나라는 여자가 남자와 동석하고 문밖에서도 자유롭게 걷는다. 워낙 청결해서 일주일에 한 번이 아니라 매일 목욕한다.”

1690년 나가사키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 의사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한 독일인 엥겔베르트 캠펠은 5대 쇼군 도쿠카와 쓰나요시(徳川綱吉)를 알현하고, 그 앞에서 서양식 가무를 선보이기도 했다. 캠펠은 러시아와 아시아 각지를 탐방한 ‘바로크 시대 최대의 여행가’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는 유럽 제일주의를 배제한 관점으로 [일본지(日本誌)]와 [회국기관(廻國奇觀)]을 썼다. 캠펠은 괴테와 칸트·볼테르 등 유럽 최고의 지성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일본인에 대해 “쉽게 흥분하는 경향도 있지만, 일본인은 기본적으로 무를 숭상하고 명예욕이 강하다. 또 손 매무새가 야무지고 두뇌 회전이 좋다”고 평했다. 캠펠은 일본인의 예의 바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나라 전체를 하나의 예의범절 학교라 불러도 좋을 것 같다. 미천한 농부부터 지체 높은 귀인·영주에 이르기까지 모두 예의가 바르다.”

그런가 하면 해리스 공사의 통역으로 활약한 네덜란드인 휴스켄은 이렇게 기록했다. “이 나라 사람들의 순박한 습속(習俗)이 참 좋다”며 일본에 온 서양인들이 되레 일본의 미풍양속을 해치지는 않을까 우려하기도 했다. 선교사 프란시스코 사비에르는 자서전에서 “일본인은 매우 선량한 사람들로 사교성이 있고 지식욕도 왕성하다”며 “지금까지 본 이교도 가운데 일본인보다 뛰어난 사람들은 없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1855년 안세이(安政) 대지진은 진도 8.4로 역대 최악의 지진으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 쓰나미로 3만여 명이 죽었다고 한다. 페리 제독은 당시 상황을 “대재앙 속에서도 일본인은 의연하게 대처했다. 그들은 끝까지 질서정연했다”고 기록했다.

영국의 시인 에드윈 아놀드는 1899년 도쿄에서 개최된 강연에서 일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상에서 천국 혹은 극락에 가장 가까운 나라다. 경치는 요정처럼 아름답고, 사람들은 꾸밈없고 예의 발랐다. 일본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높은 수준의 나라다.”

이처럼 많은 서구인의 눈에 비친 일본인의 모습은 대체로 ‘가난하지만, 행복해 보인다’였다. 그만큼 서구인들은 일본을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그들에게 크게 매료됐다.

서구인들이 쓴 일본론 필독서의 하나로 꼽히는 책은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가 1970년에 발표한 [기호의 제국]. 이 책은 일본 추켜세워주기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기호학자인 그는 일본이라는 문화 현상 전체를 자신의 철학 텍스트로 삼아 찬미했다. 바르트는 1963년부터 1969년까지 도쿄 일불학원 원장을 지낸 모리스 팽게의 초청으로 1966~1968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 각지를 방문했다.

바르트는 당시 자신이 받았던 인상을 기초로 기호론의 입장에서 일본 문화론을 전개했다. 그는 일본 문화의 전문가도 아니고 일본어를 구사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에 장기 체류한 것도 아니었다. 사실 그는 일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 같은 ‘무지’가 일본이라는 미지의 나라에 끝없이 매혹되는 원천이 됐다.

일본이라는 ‘환상’ 만들어낸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


▎일본 전통 의상인 기모노를 차려입은 여성. 서양인 가운데 상당수는 기모노에 매료된다.
그는 서양 세계가 ‘의미의 제국’인 데 비해 일본은 ‘기호의 제국’이라고 규정했다. 유럽의 정신세계가 기호를 의미로 채우려고 하는 데 반해, 일본은 의미가 결여되거나 의미로 채우기를 거부하는 기호가 존재한다는 게 바르트의 생각이다. 그가 보는 일본의 문화 기호 체계는 ‘무(無)’라는 텅 빈 세계다. 그리고 그러한 기호는 텍스트에서 의미로부터 분리됨으로써 독자적인 이미지를 띠게 된다. 프랑스의 철학과 동양의 공(空) 사상이 결합하면서 일본을 환상적 이미지 그 자체로 만들어 버렸다.

바르트는 선과 깨달음, 무(無), 하이쿠, 스모 선수, 파친코, 꽃꽂이, 가부키(연극), 분라쿠(文樂, 인형극), 젓가락, 된장, 사시미(생선회), 스키야키(전골), 덴푸라(튀김) 등 다양한 일본 문화에 매료된다. 동시에 그런 것들의 단면 하나하나를 기호의 해석으로 읽으려 했다. 롤랑 바르트라는 프랑스인에게 ‘사랑하는 대상’은 바로 일본이었다.

그는 단지 일본 문화의 다양한 상징과 기호를 읽을 뿐, 일본 문화의 의미를 규정하거나 그 가치를 판단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롤랑 바르트에 의해 상상으로 형성된 ‘하나의 세계’가 ‘일본’이라는 기호다. 그가 소비한 감각적 일본은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화려하게 포장된 형식적인 예술품이었다.


▎연극 [히키코모리 (은둔형 외톨이)]의 한 장면.
이에 반해 일본론의 고전으로, 가장 분석적이라고 평가받는 책은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이다. 태평양전쟁 종결을 앞두고 미국은 일본인의 사고방식, 행동양식을 파악하는 게 시급했다. 베네딕트는 전시(戰時) 조사를 토대로 일본인의 행동 패턴을 연구해 1946년 책을 출간했다.

베네딕트는 급진적 문화 상대주의 개념을 일본 문화에 적용해 온(恩, 은혜)·기리(義理, 의리)·기무(義務, 의무) 등 일본 문화 속의 고유 가치를 분석했다. 베네딕트는 일본을 방문한 적은 없었다. 그는 일본 문헌 숙독과 일본계 이민자와의 교류 등을 통해 일본 문화 규명을 시도했다.

베네딕트에게 우선 일본인은 모순덩어리로 비쳤다. 그들은 지극히 예의 바르면서도 동시에 놀랄 정도로 공격적이고 잔혹하기도 했다. 미와 예술을 사랑하는 탐미주의자이자 냉혹한 살인마이기도 했다.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로 상징되는, 양립할 수 없는 양극단의 불가사의한 정신 구조를 해명하고 이해하려 했다. 그가 분석한 일본인의 정신 내부로 들어가 보면 그것은 결코 모순이 아니다. 합리적이고 논리정연한 시스템이다. 베네딕트는 ‘수치의 문화’로 일본을 설명했다.

베네딕트가 파악한 일본인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각자의 자리’(各其の所)다. 일본인은 국가로서도 개인으로서도 각자가 적절한 위치에 놓여 있는지를 중시하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 그게 바로 와(和)라는 안정 중시 의식이다.

이 같은 일본 사회의 특성이 내면 윤리로 나타나면, 온(恩)과 기리(義理)는 독특한 도덕이 된다. 일본에는 유교의 인(仁), 기독교의 사랑처럼 전인격적인 덕은 존재하지 않고, 복수(復讐)의 한 종류인 온과 그에 대응하는 온가에시(恩返し, 은혜 갚기)의 조합이 도덕률을 구성한다. 은혜를 입었으면 반드시 은혜를 갚아야 한다. 또 일본인은 효보다는 충을 앞세운다. 맨 위에 있는 천황으로부터 은혜를 입었으므로 은혜 갚기는 맹목적이고 필연적이라는 이야기다.

양극단의 일본인 내면 간파한 미국인 베네딕트


▎혼욕탕에서 남녀가 함께 목욕을 즐기는 일본인들.
이러한 일본인의 행동 원칙은 다양한 의무의 영역과 인정, 욕망의 영역과 타협함으로써 안정을 유지한다. 서구인과 같은 ‘죄의식’이라는 내면의 절대적인 도덕 기준은 없다. 개개의 의무 항목 위반과 세상에 대한 수치를 기준으로, 사회에 대한 ‘상대적인’ 표준만이 있을 뿐이다.

그 결과 일본인은 적극적으로 자신이 믿는 가치에 힘쓰려 하기보다 세상의 규범 즉 타인의 시선을 중시한다. 그래서 그들은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자신을 억제하는 훈련 즉 수양을 쌓는다. 일본인에 인간의 삶이란 절제와 자제다. 인내를 통해 고통 없이 자신을 통제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는 일본인에게 지고(至高)의 정신적 경지이자, 무아(無我)라고 불린다. 일본에서 수양이 부족한 사람은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이며 사회 부적응자로 큰 수치심을 느낀다.

이웃으로 살아본 적이 없는 서구인들은 한국이나 중국과는 다른 일본관을 가질 수 있다. 안팎이 다른 일본인 심리의 이중성은 도외시한 채 형식적인 아름다움에 열광한다. 서구인들이 관찰한 일본인은 온순하고 예의 바르며, 청결하고 양심적이다. 서구인들은 무사도와 칼에 집착하는 일본인의 폭력적인 이중성도 간과했다. 아마도 아시아 주변국을 향한 터무니없는 우월의식 과시와 함께 멸시를 받아본 적이 없으니 저들의 이중성도 파악하기 어려우리라.

일본인은 국가 성원으로 집단적 조화를 이루기에는 훌륭한 개인적 품성을 지니고 있다. 자연재해나 전쟁 같은 위기상황에서도 질서 정연하게 대처한다. 그러나 절대적인 도덕 기준이나 양심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사회적 규범의 틀 속에서 벗어나 행동하지 않으려 한다. 남의 의견이나 평판과 체면을 중시한다.

또 ‘알맞은 자리’를 고수하고 와(和)를 이루려는 특성 때문에 사회 변혁의 움직임에 능동적으로 나서지 못한다. 권력자가 다루기 쉬운 국민성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광기의 권력이 선동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우리도 잘 알고 있다. 세상은 급격하게 바뀌고 있다. 아날로그 시대 아시아의 대표였던 일본이 과연 격변의 디지털 시대에 보수적 국민성으로 변혁을 이룰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 최치현 -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같은 대학 국제지역대학원 중국학과에서 중국지역학 석사를 받았다. 보양해운㈜ 대표 역임.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로 ‘국제운송론’을 강의했다. 저서는 공저 [여행의 이유]가 있다. ‘여행자학교’ 교장으로 ‘일본학교’ ‘쿠바학교’ ‘스페인학교’ 인문기행 과정을 운영한다. 독서회 ‘고전만독(古典慢讀)’을 이끌고 있으며 동서양의 고전을 읽고 토론한다.

202107호 (2021.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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