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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 김형중의 뮤지컬 오디세이(2)] ‘메모리(Memory)’의 영원한 감동 '캣츠' 

다채로운 장르 음악이 수놓는 형형색색 판타지 쇼 

고양이 부족 ‘젤리클’의 축제 날 벌어지는 재미있는 이야기
런던·뉴욕 넘어 세계로 확산… 뮤지컬 글로벌 시대 열어젖혀


▎2014년 안산문화예술의전당 무대에 오른 뮤지컬 [캣츠]. 고양이 ‘드미터’ ‘봄발루리나’ ‘젤리로럼’(왼쪽부터)이 축제에서 춤추는 장면이다. / 사진:설앤컴퍼니
1981년 초연된 [캣츠]를 비롯해 [레미제라블](1985) [오페라의 유령](1986) [미스 사이공](1989) 등 4편의 뮤지컬을 흔히 뮤지컬 ‘빅(big) 4’ 또는 ‘4대 뮤지컬’이라고 부른다. 이 빅 4는 놀랍게도 한 사람의 손에서 탄생했다. 바로 ‘미다스의 손’이라 불리는 제작자 카메론 매킨토시(75)였다.

매킨토시는 작곡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 클로드 미셀숀버그 등과 손잡고 대자본을 쏟아부어 할리우드 대작 영화 못지않은 블록버스터 뮤지컬을 잇달아 만들어냈다. 탁월한 마케팅 감각을 발휘해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를 넘어 전 세계로 시장을 넓혔다. 뮤지컬은 이제 투어 또는 라이선스 공연의 형태로 아시아와 유럽, 남아메리카로 수출됐다.

뮤지컬 빅 4는 전통 브로드웨이 뮤지컬과 확연히 달랐다. 로저스와 해머스타인 이래 브로드웨이 뮤지컬은 대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달했다. 노랫말 역시 시시콜콜한 일상의 이야기를 즐겨 담았다. 당대 미국인들의 공감대는 얻을 수 있었지만, 국경을 벗어나면 흥미도가 떨어졌다.

국내에서도 이런 종류의 뮤지컬들은 크게 인기를 끌지 못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대사의 맛이 떨어졌고, 유머 코드를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또 노랫말에 이야기를 담다 보니 ‘귀에 꽂히는 한 곡’을 기다리는 국내 팬들을 실망하게 하기 일쑤였다.

뮤지컬 빅 4는 달랐다.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인 주제를 담았고, 음악은 팝과 클래식을 절묘하게 섞어 드라마틱하게 편곡했다. 로이드 웨버와 클로드 미셸 숀버그는 상업적인 멜로디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고양이들이 보여주는 사랑스러운 판타지


▎‘미다스의 손’이라 불리는 뮤지컬 제작자 카메론 매킨토시.
전 세계 뮤지컬의 판도를 바꾼 이 빅 4의 신화는 흥미롭게도 ‘야옹~’ 소리와 함께 시작됐다. 1970년대 후반, 작곡가 앤드류 로이드 웨버는 어린 시절 즐겨 읽었던 T.S 엘리어트의 연작시집 [주머니쥐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지혜로운 고양이 이야기](1939)를 뮤지컬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엘리어트는 고양이들의 생김새·습관·행동거지를 관찰하고, 거기에서 얻은 실마리에 상상력을 더해 독특한 이름의 사랑스러운 고양이 이야기를 만들었다. 마술사 고양이 미스터 미스토펠리스, 변덕쟁이 고양이 럼 텀터거, 선지자 고양이 올드 듀터로노미, 범죄자 고양이 맥캐비티…. 어딘가 사람과 비슷하면서도 각기 은밀한 매력을 지닌 고양이들의 아기자기한 사연은 커리어의 절정을 향해 치닫던 작곡가 로이드 웨버에게 깊은 영감을 줬다.

1981년 웨스트엔드에서 개막해 곧이어 브로드웨이에 연착륙한 [캣츠]는 21년간 8949회나 공연되며, 8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또 한국을 비롯해 헝가리·일본·호주·아르헨티나·홍콩 등 전 세계에서 2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돼 공연됐다. 뮤지컬의 글로벌 마케팅이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캣츠]의 성과는 창대했으나 출발은 불안했다. 스태프 구성을 시작한 로이드 웨버는 일찌감치 난관에 봉착했다. 전작인 [에비타](1978) 이후 사이가 틀어진 작사가 팀 라이스와 함께할 수는 없었다. 또 [에비타]를 연출한 거장 해롤드 프린스는 이 작품에 관심을 보였지만 로이드 웨버와 의견이 달랐다. 프린스는 다양한 고양이가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계급을 상징한다고 생각했지만 로이드 웨버는 “그들은 그저 고양이들일 뿐”이라며 반대했다. 사회성 있는 작품이 아니라 사랑스러운 판타지를 만들고 싶었다.

이 무렵, 로이드 웨버는 인생을 바꿀 결정적인 파트너와 조우한다. 젊은 제작자 매킨토시였다. 매킨토시는 연출가 선택에 고심하던 로이드 웨버에게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의 젊은 연출가였던 트레버넌을 추천했다. 트레버넌은 유능한 인재였지만 대형 뮤지컬을 연출한 경험은 없었다. 주위의 우려에도 로이드 웨버는 과감하게 그를 선택했고, 그 결정은 매우 현명했음이 차차 밝혀진다.

[캣츠] 대성공의 가장 중요한 비결은 로이드 웨버가 사실상 처음으로 자기 뜻을 온전히 펼쳤기 때문으로 보인다. 로이드 웨버는 라이스와 콤비를 이뤄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에비타] 등 대박 히트작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로이드 웨버는 라이스가 관심을 가졌던 정치적, 사회적인 이야기에 더는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가 원했던 것은 낭만적 판타지였다. 의견 충돌을 빚었던 [에비타]를 끝으로 라이스와 더는 새 작품을 만들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로이드 웨버의 예술관에 날개를 달아준 사람은 매킨토시였다. 로이드 웨버가 추구하던 뮤지컬 판타지와 매킨토시가 지향하던 뮤지컬의 글로벌화는 그야말로 환상의 궁합이었다. 매킨토시의 상업적 감각은 [캣츠]를 통해 처음 도입한 혁신적인 마케팅에서도 잘 드러난다. [캣츠]는 다양한 기념품을 판매한 최초의 뮤지컬이었다. 이 작품 이전엔 기념품이라고 해봐야 프로그램과 악보·티셔츠 등이 전부였다.

하지만 [캣츠]의 상징인 ‘까만 바탕에 그려져 있는 노란 고양이 눈 두 개’는 커피 머그잔·열쇠고리·장난감·학용품·실크 재킷 등 별별 MD(기획)상품에 다 붙었다. 오늘날 펼쳐지고 있는 뮤지컬 부대사업의 모든 아이디어는 다 이때 나왔다.

세상 밖과 다른 동화 같은 고양이들의 세상


▎뮤지컬 [캣츠]의 럼 텀 터거(최고의 인기남 고양이). 암고양이들의 관심을 독차지할 뿐만 아니라 추종하는 수고양이까지 있다.
극장에 들어서는 순간, 관객들은 젤리클 고양이들의 특별한 축제에 초대받은 손님이 된다. 무대엔 쓰레기 더미가 쌓여 있는 공터가 펼쳐져 있고 보름달이 둥실 떠 있다. 달에는 살짝 구름이 드리워져 있는데 마치 고양이가 달을 쫙 할퀸 것 같다.

이어 객석 뒤에서 고양이들이 나타나 슬금슬금 기어 다니면서 관객들에게 앞발을 들며 장난을 친다.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환성을 지른다. 세상 밖과는 전혀 다른 동화 같은 고양이들의 세상, 로이드 웨버의 판타지는 이렇게 시작된다.

[캣츠]는 젤리클이라는 고양이 부족이 1년에 한 번 모여 축제를 여는 날 벌어지는 이야기다. 이날엔 관례로 특별한 이벤트가 하나 있다. 선지자 고양이 올드 듀터로노미가 새 생명을 얻을 고양이 한 마리를 낙점하는 것이다. ‘고양이는 목숨이 아홉 개가 있어 여덟 번 죽어도 살아난다’는 서양의 전설에서 환생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렇다면 올해에는 과연 어떤 고양이가 행운을 안게 될까.

올드 듀터로노미가 무대에 도착하면 고양이들은 차례로 자기소개하고 각자의 삶을 이야기한다. 말 많은 이웃집 아줌마 같은 점박이 고양이 제니애니도츠, 바람둥이 고양이 럼텀터거, 왕년에 명배우였던 극장 고양이 거스, 좀도둑 고양이 콤비 몽고제리와 럼플티저, 철도역에 사는 역무원 고양이 스킴블생스, 뚱보 부자 고양이 버스토퍼 존스 등 개성 강한 고양이들이 차례로 등장해 관객을 즐겁게 한다.

이들 무리에서 떨어져 주위를 배회하는 음흉한 범죄자 고양이 맥캐비티의 모습도 보인다. 파티가 절정에 이른 순간, 기회를 노리던 맥캐비티는 무대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선지자 고양이 듀터로노미를 납치해 사라진다. 파티는 엉망이 된다.

우여곡절 끝에 마법사 고양이 미스토펠리스의 활약으로 듀터로노미를 되찾은 젤리클 고양이들은 잔치를 계속한다. 마침내 듀터로노미는 천상의 세계로 오를 고양이를 선택한다. 예상과 달리 주인공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늙고 누추한 고양이 그리자벨라다. 고양이들은 놀라워하면서도 축복을 보낸다. 그리자벨라와 듀터로노미를 태운 폐타이어가 UFO처럼 불을 번쩍거리며 하늘로 두둥실 떠올라 천상의 세계로 향하면서 [캣츠]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캣츠]는 특별한 이야기 없이 노래와 춤, 코미디로 구성된 쇼인 ‘레뷔(revue)’ 형식이다. 장면 전환 없이 하나의 무대에서 다양한 성향의 고양이들이 각각의 재주를 뽐낸다. 스토리가 없는 대신 뮤지컬의 온갖 테크닉을 총동원해 상상력의 버라이어티쇼를 펼친다. 2019년 톰 후퍼 감독이 [캣츠]를 영화로 만들었는데 엄청난 혹평에 시달렸다.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스토리 라인이 없는 레뷔라는 형식이 무대에서는 먹히지만 영화에서는 제대로 구현될 수 없었다는 게 구조적 문제였다.

로이드 웨버는 고양이들의 개성을 살리기 위해 음악 장르를 다채롭게 구성했다. 클래식에서 팝·재즈·록·전자음악, 심지어 찬송가 스타일까지 가미했다. 럼 텀 터거는 강렬한 록으로, 맥캐버티는 스릴러 영화의 배경음악과 비슷한 톤으로 표현했다. 올드 듀터로노미의 노래는 오페라 풍으로 분위기를 띄웠다.

주제 집약한 명곡 ‘메모리’, 작품의 중심 잡아줘


▎뮤지컬 [캣츠]의 맥캐비티(악당 고양이). 중력을 이기는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있다.
다양한 춤의 향연 또한 [캣츠]의 매력이다. 베테랑 안무가 질리안린은 고양이들의 섬세하고 유연한 움직임을 바탕으로 재즈와 탭댄스·발레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춤의 스펙트럼으로 환상의 몸짓을 만들어냈다. 럼 텀 터거의 섹시하고 현란한 댄스, 애교 넘치는 미스토펠리스의 발레가 강한 인상을 남긴다.


▎뮤지컬 [캣츠]의 카산드라는 유일하게 털이 없는 샴고양이다.
특히 축제의 열기가 절정에 이른 1막 후반부에 모든 고양이가 10분 동안 정신없이 추는 군무 장면인 ‘젤리클 볼(Jelicle Ball)’은 압권 중의 압권이다. 신나는 음악과 사이키델릭(psychedelic)한 조명 속에서 오로지 몸짓만으로 관객들은 잔치 분위기에 흠뻑 젖는다. 역사에 길이 남을 ‘뮤지컬의 10분’이다.

[캣츠]는 고양이들의 아기자기한 쇼 덕분에 어른들은 물론 아이들도 좋아한다. 고양이들이 보여주는 인생사라 어린 관객들이 보기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지만, 귀여운 고양이들의 존재만으로 아이들을 극장으로 끌어들였다. 이전까지의 뮤지컬은 성인 관객만이 타깃이었다. 어린이들로 관객층을 넓혔다는 점에서도 [캣츠]는 혁신적이었다.

뮤지컬 빅 4 가운데 국내 팬들이 가장 난해하게 여기는 작품은 아마도 [캣츠]일 듯하다. 기승전결의 드라마 구조가 없는 레뷔 형식이기 때문이다. 우리 관객들은 탄탄한 드라마를 선호한다. 고양이들이 우르르 나와 특별한 줄거리 없이 교대로 쇼를 하는 [캣츠]는 그런 점에서 생소할 수 있다.

이 레뷔 형식에 관객보다 먼저 당황한 이들이 있었다. 초연 배우들이었다. 앞에서 살펴봤듯 로이드 웨버는 [캣츠]를 구상하고 구체적인 실행에 들어갔지만, 팀 라이스 같은 유능한 작사가를 구할 수 없었다. 엘리어트의 원작은 각각의 고양이 캐릭터에 관한 연작시였을 뿐이었다. 전체를 하나로 엮는 스토리 라인이 없었다.

그 상태에서 일단 곡을 만들어 연습을 시작했으니 배우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전체 드라마의 윤곽을 이해한 뒤 자신의 캐릭터를 그 안에서 녹여내는 방식에 익숙한 배우들로선 자신이 맡은 배역의 콘셉트에 혼돈을 겪었다. 배우들은 “도대체 내 캐릭터를 어떻게 잡아야 하느냐?”며 연출진을 괴롭혔다.

이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한 이는 연출가 트레버넌이었다. 그는 고양이 한 마리가 새로운 삶을 선택받는 젤리클 축제라는 틀을 생각해냈다. 독립적이었던 고양이들의 사연이 비로소 하나의 공간 안에 배치될 수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 놓았지만 그래도 뭔가가 허전했다. 관객을 감동의 도가니에 빠트릴 결정타가 없었다. 트레버넌은 작품의 대미를 장식할 ‘한 방’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고심을 거듭하던 그는 마침내 한 줄기 햇살을 발견했다. 엘리어트의 다른 시 ‘바람 부는 밤의 랩소디(Rhapsody On a Windy Night)’를 찾아내 그것을 개사해 노랫말을 만들었고, 로이드 웨버는 여기에 깊이 있는 멜로디를 붙였다. 그것이 바로 뮤지컬 역사에 길이 남을 세기의 명곡 ‘메모리’였다. ‘메모리’ 덕분에 [캣츠]는 확실한 중심을 잡았다.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가 비로소 명확해졌다.

‘메모리’가 가세함에 따라 젤리클 축제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선택을 받아 새 생명을 얻는다는 구원의 메시지가 주제로 잡혔다. 과거는 화려했지만, 지금은 외롭고 비참한 늙은 고양이 그리자벨라가 선택된다는 반전 감동의 엔딩이 마침내 완성됐다. 구원의 메시지는 기독교적 전통의 연장선에 있다. 우여곡절 끝에 넣은 이 아이디어 덕분에 [캣츠]는 무게감 있고, 철학적이며, 보편적인 경쟁력을 갖게 됐다.

노랫말은 삶의 궤적 더듬고, 멜로디는 기승전결로


▎2008년 가수 패티김이 ‘메모리’를 부르며 무대로 내려오고 있다. / 사진:PK 프로덕션
오리지널 초연 멤버인 뮤지컬 배우 일레인 페이지의 음성이 담긴 음반은 큰 인기를 끌었다. 일레인 페이지에 이어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사라 브라이트만, 셀린 디옹을 비롯한 수백 명의 가수가 앞다퉈 이 노래를 불렀다.

‘Midnight(한밤중)/ not a sound from the pav ement(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로 시작해 ‘Look, a new day has begun(봐, 새로운 날이 시작됐어)’로 마무리되는 ‘메모리’는 로이드 웨버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이 한 곡에 그리자벨라의 모든 인생이 녹아 있다. 노랫말은 삶의 궤적을 더듬고, 멜로디는 기승전결의 물결을 타고 흐른다. 가만히 들어보면 한 인물의 인생, 한 편의 대하 드라마가 이 한 곡 안에 응축돼 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기쁨과 슬픔, 절망과 희망이 교차한다.

힘없이 툭 던지듯 ‘Life was beautiful then(그때는 모든 것이 아름다웠어)’이라고 할 때는 찌든 얼굴에서 번지는 희미한 미소가 떠오르고, ‘And I mustn’t give in(난 포기할 수 없어)’에서는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그리자벨라가 왜 구원의 대상이 되는지 관객들은 이 곡 덕분에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한다. 로이드 웨버는 전작 [에비타]에서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 한 곡에 에바 페론의 삶을 녹여냈듯, ‘메모리’에 그리자벨라의 삶을 담아냈다.

사실 그리자벨라는 작품에 많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어떤 인물인지 구체적인 설명도 없다. 지친 표정으로 걸어 다니며 1막과 2막에서 한 번씩 ‘메모리’를 부를 뿐이다. 그런데도 이한 곡으로 그리자벨라라는 역할과 초연 배우 일레인 페이지의 이름은 뮤지컬 역사에 길이 새겨졌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메모리’ 때문에 그리자벨라는 아무나 할 수 없는 배역이 됐다. 화려한 볼거리로 가득 찬 이 뮤지컬에서 감동의 물꼬를 트는 열쇠를 ‘메모리’가 쥐고 있기 때문이다. ‘메모리’를 멋지게 불러야 [캣츠]가 살아난다. 관객 대부분에게 친숙한 노래라 시작되면 모두 귀를 곤두세운다. 기대감에 가득 차 감동받을 준비(?)를 단단히 하고 두 눈을 초롱초롱 뜨고 있는 관객들의 얼굴은 배우에게 부담을 준다. 분량은 작지만 탁월한 가창력과 집중력을 요구하는 역할이 그리자벨라다.

여러 가닥의 시냇물이 모여 강을 이루듯 [캣츠]에 나오는 수많은 고양이의 이야기와 화려한 쇼는 이렇게 ‘메모리’로 집중된다. 이 ‘메모리’에서도 클라이맥스, 바로 “터치 미(Touch me~ it’s so easy to leave me~)” 소절은 모든 에너지가 발산되는 정점이다. 하늘을 향해 힘차게 치솟은 분수의 끝자락이다. ‘터치 미’라는 직설적인 대사는 그리자벨라의 외로움을 낱낱이 보여주고, 그만큼 애절하게 관객의 마음을 ‘터치’한다.

[캣츠]는 런던과 뉴욕을 넘어 부다페스트·삿포로·부에노스아이레스 등에서도 공연되며 뮤지컬의 글로벌 마케팅 시대를 열었다. 뮤지컬이 무엇인지 몰랐던 사람들도 형형색색의 고양이들이 펼치는 판타지를 보며 박수갈채를 보냈다. 뮤지컬은 이제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시장은 확대됐다. [캣츠]의 대성공은 곧이어 펼쳐질 화려한 시대의 서막이었다.

※ 김형중 - 공연 칼럼니스트. 연세대와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20년 넘게 공연 담당 기자로 일했고 한국뮤지컬대상과 청룡영화상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무대예술의 경이로움을 글로 풀어내려고 애쓰고 있다. 쓴 책으로 [우리시대 최고의 뮤지컬 22]가 있다.

202107호 (2021.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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