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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주류서 밀린 한(恨), 틀을 깬 파격으로 풀다 

18세기 베스트셀러 작가의 글과 삶 

당대 문인들 "글이 왜 이래" 불편해했지만… 그의 문집 목판이 닳아 부서질 정도로 출간

글이 대체 왜 그런가.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단정한 송문(宋文)과 다정한 당시(唐詩)를 따르던 18세기 조선 문인들은 그의 문장을 보고 불편해한다. 형식이 난해했지만, 영조도 인정한 명문장가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맞버틸만하다’는 <해유록>을 남긴 신유한(1681~1748)에 대한 당시 세평이 그러했다.

18세기 조선 문단에 큰 그림자를 드리운 신유한은 지금의 우리에게 낯설다. 더욱이, 책에는 한시(漢詩)가 즐비하지 않은가. 하지만 저자는 미국과 일본의 자료까지 뒤져 신유한이라는 인물을 해체한다. 고령 좌랑봉의 신유한 묘소를 찾기도 했다. 그러면서 한시의 뜻과 배경을 쉽게 내준다. 대신, 사람 이야기에 빠지게 만든다. ‘문인’ 신유한에서, ‘인(人)’에 방점을 찍는다.

신유한은 일찍부터 문장이 뛰어났다. 영조가 신하들이 밀담을 주고받는 걸 보고 “뭘 수군거리느냐”고 물어봤다. 진주 촉석루에서 쓴 신유한의 시가 베스트셀러처럼 회자할 때였다. 영조는 그 자리에서 “신유한은 정말 문장을 잘하는 자다”고 칭송했다. 이 시의 운율을 빌린 차운시(次韻詩)가 300여 수란다.

그의 문집 [청천집]은 목판이 닳아 부서질 정도로 출간됐다. 일본 문사들과 교유할 조선통신사 일행으로 가서는 7개월간 6000여 수의 시문을 만들어냈다. 일본 문인들이 당시 그의 숙소 앞에서 장사진을 쳤다고 한다. 신유한의 시를 줄줄 외는 일본인들이 많았다. 하지만, 영조는 반전의 발언을 했다. “그런데, 사람이 좀 거칠더라”고. 왜 그랬을까.

신유한은 문과 장원급제를 했으나, 출세가 막혔다. 영남 궁벽한 곳의 서얼 출신이라는 게 발목을 잡았다. 저자가 ‘시문에는 냉소와 좌절이 묻어난다’고 한 이유다. 하지만, 그 이유는 약자에 대한 연민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척박한 지방을 도맡아 수령으로 겉돌면서도 백성을 구휼하고 가르치는 데 앞장섰다. 고을 선비들과 장사치·나무꾼들이 퇴임하는 그의 길을 막고 ‘1년 더 하고 가시라’고 농성을 벌일 정도였다.

‘스승’ 신유한에게 판에 박힌 커리큘럼은 없었다. 그는 제자들의 자질을 세밀히 살펴 각기 다른 방법으로 가르쳤다. 18세기 판 맞춤형 교육이었다. 박이곤·정원시·원경하 등 요샛말로 하면 ‘신유한 키즈’가 요직과 문단을 주름잡았다.

이 책은 ‘18세기 개인의 발견’ 시리즈 중 제1권이다. 시리즈는 조귀명(2권 [나만이 알아주는 나]), 이용휴(3권 [기이한 나의 집]), 유한준(4권 [저마다의 길])도 다룬다. 자신만의 문학 영역을 개척한 조귀명은 어쩌다 자신의 문집에 서문(추천사)도 받지 못했을까. 재야의 명문장가 이용휴에게는 왜 속물과 진보라는 두 가지 평가가 내려졌을까. 나와 남의 길을 긍정하고자 한 유한준은 왜 생전에 스스로 묘비명을 썼을까. 네 권이 같은 날 출간됐다. 역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 지배적 가치관에 반하면서도 변화를 통해 자신만의 문장 세계를 구축한 인물들이다.

신유한의 문장은 당시 읽기 어려웠다. 시대와 다른 길을 갔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여러 사람의 비방이 있었다. 문장이 그를 입신하게 했고, 좌절하게도 만든 셈. 신유한은 주류의 바깥 어디쯤, 즉 경계에서 서성이고 말았다. 하지만 손명래(1644~1722)가 신유한을 옹호한다. “시대에 따라 문장은 변하기 마련이네…그대의 문장과 시는…옛사람이 적는 대로 써 내려가고 눈앞에서 읊조리는 것과 다르지.” 문학으로 자신만의 경계를 단단히 조였다는 말. 답습과 안주는 곧 퇴보로 이어지는 오늘날, 더욱 사무치는 답안이다.

-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 이 기사는 중앙콘텐트랩에서 월간중앙과 중앙SUNDAY에 모두 공급합니다.

202107호 (2021.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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