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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산책] 상식과 실용의 정치를 꿈꿨던 정두언의 통찰 

정두언 2주기… 시대의 화두 ‘공정’ 예지한 경세가 

미공개 육필 원고와 각계 인사 21인 헌정사 묶어 책으로 출간
생전에 윤석열과 교분… 중도실용주의 형성 과정 엿볼 수 있어


▎2012년 7월 새누리당 의원총회장을 나오는 정두언 의원. 그는 보수이면서 스스로 진영에 갇혀 있기를 거부했고, 진보의 가치를 존중하되 이념의 족쇄에서 한국 정치가 자유롭기를 갈망했다.
2019년 7월 홀연히 생을 마감한 정두언 전 의원에게 ‘경계인(境界人)’이란 말보다 더 적확한 단어가 있을까. 보수이면서 스스로 진영에 갇혀 있길 거부했고, 진보의 가치를 존중하되 이념의 족쇄에서 한국 정치가 자유롭기를 갈망했다. 탁월한 그의 식견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쪽은 없었다. 그로 인해 공고한 기득권에 균열이 생기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그를 경계로 밀어냈다. 자유를 택해 정치권을 떠난 뒤에도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경계에 남아 있었다. 자신이 꿈꿨던 실용정치가 실현되기를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개혁의 열망을 담은 그의 목소리에 비록 정치권의 화답은 없었지만, 울림은 제법 컸다. 그가 떠난 뒤 영영 듣지 못할 것 같았던 경계의 외침이 2년 만에 되살아났다. 스피커가 아닌 활자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정두언, 못다 이룬 꿈](블루이북스미디어)을 통해서다.

[정두언, 못다 이룬 꿈]은 정 전 의원의 생애와 정치 철학을 그의 육성으로 듣는 회고록이다. 생전에 미처 엮지 못한 육필 원고가 이번 책의 바탕이 됐다. 그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봐왔던 소종섭 전 [시사저널] 편집국장이 한 권 책으로 엮어냈다. 유년기부터 20여 년 공직생활과 이후 정치인의 삶까지 인생의 노정을 기록한 1부(나의 젊은 날)는 정두언의 개혁적 경세관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민주화 투쟁에 무임승차했다는 마음의 빚, 총리 18명을 보좌한 국무총리실의 15년 근무기, 3선 국회의원 경험을 통해 자유민주국가를 지탱하는 세 축 중 두 축(입법부·행정부)에 관한 남다른 통찰을 엿볼 수 있다. 개인의 영예이기 이전에 두고두고 참고할 만한 우리 사회의 지적 자산으로도 손색없는 경험들이다.

정두언의 ‘못다 이룬 꿈’을 그린 2부는 평전에 가깝다. 정 전 의원이 남긴 글과 생전의 활동 기록을 토대로 정두언의 통찰을 현재로 소환한다. 정두언의 말을 빌린 필자의 현실 진단에는 조금의 논리적 비약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탄탄하다. 수년 전 혹은 십수 년 전 남긴 글인데도 시공의 간극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그가 지금, 바로 곁에서 한국 사회의 현실을 진단하는 것만 같다.

대표적으로 11년 전에 그가 SNS에 남긴 단상(斷想)을 보자.

‘공정한 사회란 모든 구성원에게 공정한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출발점이 같은 사회를 의미한다. 이를 위해 구성원들에게 균등한 교육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 부모의 경제력에 의해 교육 기회가 좌우되어서는 곤란하다. 경쟁이 공정하게 이뤄지지 않으면 결과에 대한 승복이 이뤄지지 않는다. 공정한 경쟁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기회의 평등이 선행돼야 한다.’(2010년 9월, 정두언 트위터)

2022년 대선의 화두로 자리매김한 공정에 관한 백가쟁명이 ‘기회의 평등, 교육의 균등, 과정의 공정’으로 요약되는 단 몇 줄에 함축돼 있다. 정두언이 남긴 족적의 권위와 현실 감각은 시간이 흘러 더 돋보인다. 예지(叡智)란 이런 것인가. 공정을 슬로건으로 내건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생전의 정두언과 친분이 깊었다는 점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개혁에 좌면 어떻고 우면 어떤가’


▎[정두언, 못다 이룬 꿈]은 정 전 의원의 생애와 정치 철학을 그의 육성으로 듣는 회고록이다. / 사진:블루이북스미디어
중도 실용에 관한 정두언의 철학은 요즘 말마따나 ‘진심’이었음이 곳곳에서 확인된다. 2009년 외국어고 폐지를 추진하고, 2015년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반대한 행보는 언행일치의 삶을 보여준 대표적인 예다. 심지어 2009년과 2015년은 그가 몸담았던 보수 정당의 집권기였다. 실용에 관한 그의 철학은 생전에 남긴 짧은 기고문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실용주의 개혁은 첫째, 관념에 기초하지 않고 현실에 기초해 문제 해결을 지향한다. (중략) 아마추어리즘을 배격한다. 시민의 입장에서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을 모색하면 되는 것이지, 좌면 어떻고 우면 어떻다는 것인가.’(131쪽)

책의 마지막 3부(정두언과 나)는 정두언을 향한 각계인사 21인의 헌정사다. 인간 정두언의 다양한 모습을 목도한 이들이다. 그와 함께 보수 혁신을 주도했던 ‘소장파’의 한 사람인 남경필 전 경기도지사는 ‘가수 정두언’을 통해 그가 꿈꾼 자유를 추억한다. 조원동 전 대통령 경제수석은 공익을 실현하고자 하는 사적 욕망을 추구했던 ‘타고난 공인’으로, 이태규 국민의당 의원은 ‘사려 깊은 게이트 키퍼(gate keeper)’의 모습을 각각 소환한다.

책을 통해 엿보이는 정두언의 집요한 자기관리는 늘 권력과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지경에 놓여 있는 경세가에게 내재된 태생적 두려움을 여실히 보여준다. ‘시종일관’, ‘언행일치’, ‘선공후사’를 철저하게 실천하고자 했던 그의 태도에서 한편으로는 고독함마저 느껴진다. 출중한 능력은 권력의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경계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후견인이 절대적 신임을 거두는 순간, 어느 편에도 서지 못하는 경계인이 가졌을 좌절감은 상상 이상이었을 터다. 특히 그저 한 시류를 따라 흘러가는 정치인에 만족할 게 아니라면 이 책은 세상을 경영하는 정치가(政治家)의 지침서로도 손색이 없다.

-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202108호 (2021.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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