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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특별기고] 마스크 뒤에 감춰진 위태로운 거품 경제 

코로나19 여파 한국 경제 체질개선 시급, 기업 투자심리 회복과 경영혁신이 열쇠 

위기 극복용 유동성 늘어나니 자산 시장과 실물 경기 양극화 심화
탈한국화 부추기는 규제 개혁이 포스트 코로나19 시대 경쟁력 관건


▎코로나19 충격이 장기화하면서 부동산·주식 등 자산시장은 호황을 맞고 있지만, 실물 경기는 극심한 침체로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다. 지난 6월 25일 코스피 지수는 사상 처음 3300선을 돌파했다. 반면 경기도 안산시의 주방용품 판매점에는 폐업한 음식점에서 나온 집기들이 가득하다. / 사진:연합뉴스, 중앙포토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된 뒤로 1년 반 남짓한 시간이 흘렀다. 코로나19는 인류의 삶에 수많은 변화를 가져왔는데, 그중 하나는 마스크 사용이 아닐까 싶다. 코로나19 이전까지만 해도 마스크는 한국과 일본을 제외하고는 수술실 의료 인력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상황은 변했다. WHO와 각국의 보건 당국, 민간 전문가들까지 감염 확산 방지를 위해 마스크 착용을 강력히 권고했다. 대유행 초기 코로나19 감염보다 마스크 강제가 더 싫다던 서방 국가의 국민들도 늘어나는 확진자와 사망자에 결국 마스크를 착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급기야 전 세계인이 마스크와 함께하는 올림픽을 시청했다.

마스크가 일상화되면서 사람들의 온전한 얼굴을 보기 힘들어졌다. 같이 밥을 먹을 정도의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면, 눈과 헤어스타일 정도밖에 볼 수 없다. 그런데 코로나19는 사람들의 얼굴뿐만 아니라 우리 경제에도 마스크를 씌웠다. 마스크에 한국 경제의 실상이 가려진 것이다. 위기 대응 과정에서 불어난 유동성은 자산 시장과 실물 시장의 디커플링(decoupling)을 가져왔고, 코로나19에 따른 불균등한 경제 충격은 산업별·기업별 격차를 불러왔다. 또 임금근로자와 자영업자, 취업자와 미취업자, 수혜 업종 종사자와 피해 업종 종사자 간 격차도 확대됐다. 일부 호조세를 보이는 거시 지표에만 집착한 채 마스크 뒤편에 가려진 경제 실상을 외면한다면, 한국 경제의 건강한 경제·산업 구조 유지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변이 바이러스의 확산, 급등하는 물가 등 경제 불확실성이 존재하지만, 한국은행 등 주요 기관들은 올해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을 4.0% 안팎으로 예상한다. 그대로만 된다면 금융위기를 극복했던 2010년 이후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을 달성하게 된다. 경제 성장을 견인하는 수출 실적은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으며, 삼성전자·LG전자·현대차·네이버 등 주요 기업들은 올해 2분기에 최고 실적을 갈아치우고 있다.

주식과 부동산 등 자산시장도 호황이다. 지난해 3월 1457로 저점을 찍은 코스피는 작년 말 2873으로 9개월 새 두 배 가까이 상승했고, 현재는 3200선을 상회하고 있다. 부동산 시장도 마찬가지다. 서울 아파트 평균 가격은 코로나19 사태 직전인 지난해 1월 8억7000만원에서 올해 6월 11억4000만원으로 1년 6개월 만에 31%나 증가했다. 같은 기간, 전국 아파트 평균 가격은 3억8000만원에서 5억원으로 32% 상승했다.

코로나19로 심화된 K자형 양극화


▎코로나19 여파로 경기 침체가 지속하고 있지만, 수출은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지난 7월 수출은 전년 동월 대비 29.6% 증가한 554억4000만 달러를 기록해 무역통계가 집계되기 시작한 1956년 이후 월 수출액 최고치를 보였다. / 사진:연합뉴스
얼핏 보면 우리 경제가 코로나19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 호황을 맞이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우려스러운 부분이 더 많다. 올해 성장률이 4.0% 안팎으로 전망되지만, 이는 작년 마이너스 성장에 따른 착시일 뿐 아니라 최근 발생한 델타 바이러스 변이와 4차 대유행은 반영되지 않은 전망치이다. 무엇보다도 일부 경제지표 호조의 뒷면에는 코로나19가 가져온 양극화라는 그림자가 있다.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고, 충분한 자금력과 기술력을 통해 코로나19에 잘 대처할 수 있었던 대기업과는 달리 중소기업은 여전히 코로나 위기에 빠져 시름하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의 4월 통계에 따르면 수출 중소기업의 75.6%는 원자재 가격 급등으로 수익성이 악화됐다. 그뿐만 아니라 주 52시간제 시행, 최저임금 인상, 중대재해처벌법 제정 등 늘어나는 기업 규제는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기업의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코로나19는 업종별로도 명암을 갈랐다. 대면 접촉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제조업은 타격을 덜 받았고, 글로벌 제조업 경쟁력을 바탕으로 수출을 견인하며 우리 경제의 회복에 기여했다. 반면 서비스업은 크게 위축됐고 특히 도소매업, 숙박음식점업, 여행업 등 대면 서비스업이 큰 타격을 받았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직격탄을 맞은 자영업자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골목상권 자영업자의 78.5%는 작년 상반기보다 올해 상반기 매출액이 감소했고, 4차 대유행의 시작과 함께 사회적 거리 두기 단계가 더욱 강화되면서 소상공인의 57.3%는 현재 휴·폐업을 고려하고 있다. 이미 일자리를 갖고 있던 취업자와 취업준비생 등 미취업자 간의 격차도 벌어졌다. 경제 충격이 발생하면 기업들은 인력 조정이 불가피한 경우가 있는데, 기존 취업자들은 강력한 고용보호 법제에 의해 조정이 제한되어 있다 보니 신규채용이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용보험 통계를 보면, 작년에 연간 고용보험 취득자 수는 전년 대비 11만4000명 감소했으나, 상실자 수는 7만4000명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위기 극복 위한 유동성 증가로 가계부채 급증


▎3월 24일 대구시 중구 동산동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대구 남부센터에서 소상공인들이 대출 상담을 기다리고 있다. 빚투 열풍과 실물경기 불황이 겹치면서 금융권 대출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양극화와 더불어 우리 경제의 또 다른 위기 요인 중 하나가 부채의 급증이다. 코로나19 위기 대응 과정에서 늘어난 과잉 유동성은 자산 가격 급등을 유발하며 ‘빚투 열풍’을 불러일으켰고, 다른 한편에서는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이 생존을 위해 대출에 의존하는 상황이 심화하고 있다. 자산시장의 호황과 실물경기의 불황이 모두 부채 증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19년 말 843조원이었던 가계 주택담보대출 잔액은 올해 1분기 말 931조원으로 나타나 코로나19 이전보다 10.4% 증가했다. 주택담보대출을 제외한 기타대출 잔액은 같은 기간 662조원에서 735조원으로 11.0% 늘었다. 올해 1분기 말 자영업자 대출은 832조원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으며, 2019년 말 685조원 대비 21.4% 증가했다.

해외 주요국과 비교해도 한국의 부채는 심상치 않은 상황이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2020년 말 한국의 가계신용 잔액(가계부채와 신용카드 이용액 등 판매신용을 더한 금액)은 1998조원으로 GDP 대비 103.8%를 기록했다. 반면, 2020년 말 주요 20개국의 GDP 대비 가계신용 비율은 69.5%로 우리나라보다 34.3%p나 낮았다. 우리나라의 비금융 기업신용도 2137조원으로 GDP의 111.1%에 달해, G20 국가의 평균 109.6%보다 1.5%p 높았다.

민간부채뿐만 아니라 국가채무도 크게 늘었다. 한국은 지난해 네 차례와 올해 두 차례를 포함해 총 여섯 차례 추경을 편성했고, 다섯 차례 국채 발행을 통해 그 재원을 마련했다. 그 결과 2019년 37.7%였던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2020년 43.9%로 6.2%p나 증가했다. 우리의 국가채무비율이 미국, 일본, 프랑스 등 주요국보다 낮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한국은 그들과 달리 기축통화국이 아니며, 공기업 부채와 각종 연금충당 부채의 급격한 증가, 다른 나라보다 훨씬 급속한 저출산·고령화 추세로 인해 앞으로 국가채무비율이 빠른 속도로 악화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연내 금리 인상 가능성이 대두하고 미국이 테이퍼링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 상황에서, 과도한 부채는 우리 경제의 잠재적 위험이 아닌 실재적 위험으로 다가왔다. 올해 1분기 기준, 저소득 가구의 60% 이상이 적자 가구일 정도로 취약 계층의 부채 상환 능력은 열악하다. 또 자산총액 500억 이상 기업 중에서도 18%가 한계기업(3년 연속 영업이익으로 이자비용도 충당하지 못하는 기업)일 정도로 부채 상환 능력이 부족한 기업의 비중도 적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금리 인상을 통한 부채 조정이 이루어질 경우, 빚으로 버티고 있는 기업과 국민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이는 우리 경제에도 충격으로 다가올 가능성이 크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백신 접종 확대를 통한 집단 면역 형성이 시급하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민간 활력 제고를 통한 기업의 투자심리 회복이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될 수 있다. 양극화나 부채 급증은 코로나19 이전부터 제기됐던 문제이며, 코로나19 때문에 상황이 더욱 악화했다. 과도한 기업 규제와 경직된 노동시장으로 인해 민간의 경제 활력은 계속 저하되고 있었고, 이로 인해 양질의 신규 일자리가 창출되지 못하면서 양극화는 점점 심화하고 있었다.

과도한 기업 규제와 경직된 노동시장은 문제


부채 급증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 역시 이전에도 계속 제기돼왔으며, 코로나19로 더욱 심각한 상황에 직면했다. 부채 부담을 줄이는 일반적인 방법은 신규 대출을 막고 기존 대출을 상환하도록 해 부채 규모 자체를 줄이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상환 능력이 열악한 상황에서 강제적이고 과도한 부채 조정은 가계와 기업의 파산 위험만 높일 뿐이다. 결국 가계와 기업의 소득을 높여 부채 부담을 줄여야 한다. 민간의 경제 활력이 살아나면 양질의 일자리가 늘어나고 기업과 가계의 소득은 늘어난다. 이를 통해 원금과 이자 상환 능력이 높아지면 부채로 인한 위기 문제는 극복해나갈 수 있다.

과도한 규제에 따른 기업 경영의 어려움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종종 언급된다. 지난 7월 미 국무부는 투자환경보고서를 통해 “한국에서는 제대로 된 영향 평가 없이 무분별하게 규제가 만들어진다”고 지적한 바 있다. 유럽상공회의소는 한국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규제가 많은 갈라파고스 규제 국가”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실제로 2019년 WEF(세계경제포럼)에서 발표한 한국의 기업규제 부담 순위는 141개국 중 87위로 규제 강도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경직된 노동시장 또한 한국의 최대 약점 중 하나다. WEF가 평가한 한국의 노동시장 유연성은 세계 141개국 중 97위고, 노사협력 순위는 130위로 최하위권이다. 실제로 2009년에서 2019년까지 10년간 한국의 임금근로자 1000명당 파업으로 인한 근로손실일수는 38.7일로, 미국(7.2일), 독일(6.7일), 일본(0.2일) 등 주요국보다 훨씬 많으며, 일본과 비교하면 무려 193배나 더 많다.

열악한 노동환경은 더욱 악화하고 있다. 작년 11월 전경련이 한국에 주재하는 무역·투자 담당관과 외국 경제단체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이들의 69%는 2018년에서 2020년 중기업의 노무 환경이 악화됐다고 응답했지만, 단 5%만이 호전됐다고 응답했다.

이처럼 악화된 국내 기업 경영 환경은 투자의 ‘탈한국화’로 이어졌다. 외국인 직접투자(FDI)는 2012년 100억 달러를 돌파한 후 큰 변동 없이 횡보하다가, 2020년에는 114.2억 달러를 기록했다. 반면 한국 기업이 외국에 투자한 해외직접투자(ODI)는 2015년부터 꾸준히 증가해 2019년에 643.7억 달러로 역대 최고치를 달성했다. 2020년에는 코로나19 여파로 565.8억 달러로 소폭 감소했지만, 우리나라로 들어온 투자금액(FDI)보다 우리나라에서 외국으로 나간 투자금액(ODI)이 5배나 더 많은 실정이다. 작년 한 해 제조업 분야의 해외직접투자 순유출로 인해 빠져나간 일자리는 7만2000개로 추정된다.

기업의 열악한 경영환경과 이에 따른 투자 심리 위축은 양질의 일자리 감소로 이어졌다. 양질의 일자리라고 할 수 있는 정규직 일자리는 수는 2017년 1342만 명에서 2020년 1302만 명으로 지속 감소했다. 반대로 같은 기간 비정규직 일자리는 658만 명에서 743만 명으로 늘었다. 이에 따라 전체 임금 근로자 중 비정규직 비율은 32.9%에서 36.3%로 3.4%p 상승했다. 일자리의 질이 그만큼 나빠진 것이다. 이는 불안정한 경제 상황과 경직된 노동환경에 대응해 비정규직 채용이 늘어난 데 따른 것이다. 2020년 정규직의 월급은 평균 369만원이고 비정규직의 월급은 평균 162만원인 점을 고려하면, 비정규직 일자리 증가는 저소득 근로자를 늘려 경제 양극화를 심화시킨 주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투자심리 위축, 양질의 일자리 감소로 이어져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운데)가 6월 1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중소기업인과의 타운홀 미팅에서 발언하고 있다. 기업인들은 기업 활력을 가로막는 규제 개선을 주문했다. / 사진:오종택 기자
기업규제 개선과 노동시장의 경직성 해소는 기업의 투자 심리를 회복시켜 양질의 일자리 창출을 유도할 수 있다. 실제로 세계적으로 기업 규제 부담이 적고 노동시장이 유연하다고 평가받는 싱가포르(2019년 WEF 기업규제부담 1위, 노동유연성 1위)는 경제 규모가 한국의 23%에 불과하지만, 외국인 직접투자 규모는 한국의 6.9배로 우리보다 훨씬 많은 투자를 유치하고 있다(2019년 기준 한국 134억 달러, 싱가포르 921억 달러). 또 동독과의 통일 비용과 과도한 노동시장 경직성으로 시름하던 독일은 2003년 하르츠 개혁 이후 일자리 창출과 청년 실업난 해소에 성공했다. 고용률은 2005년 65.5%에서 2020년 76.1%로 10.6%p 증가했으며, 청년층(15~24세) 고용률도 41.9%에서 47.9%로 6.0%p 늘었다.

기업 활력 제고를 통한 투자 촉진은 미래 기회를 선점하기 위한 기업의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을 자극함으로써 당면한 시대적 과제인 4차 산업혁명을 준비하는 좋은 대책이 될 수 있다. 코로나19는 위기를 불러왔지만, 새로운 기회도 함께 가져왔다. 감염 위험이 높은 대면 접촉이 제한되면서 비대면·디지털화의 속도가 빨라졌다. 사람들은 극장 대신 OTT(인터넷 동영상 서비스)를 이용하고, 백화점·대형마트 등 오프라인 쇼핑몰을 방문하는 대신 온라인 쇼핑을 통해 물품을 산다. 그리고 외식 대신 배달앱을 통해 음식을 시켜 먹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됐다.

코로나19는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기업 업무 환경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재택근무와 화상회의가 도입되면서 줌(ZOOM) 등을 활용한 협업 솔루션이 인기를 끌었고, 산업 현장에서도 디지털 기술과의 접목이 활성화됐다. 더구나 주요 선진국이 스마트 인프라 구축을 경기 부양책으로 제시하면서 국가 단위의 비대면·디지털화가 추진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라는 전대미문의 위기가 4차 산업혁명의 촉매제가 되어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정부도 디지털 뉴딜 정책 등 새로운 시대에 대비하기 위한 여러 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취지와 방향에 공감하지만, 4차 산업혁명에 맞는 경제·사회 시스템의 획기적 혁신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정책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

역사적으로 낡은 시스템 하에서는 뛰어난 기술도 빛을 보지 못했다. 19세기 서양 열강이 활발하게 동아시아에 진출하면서, 일본과 중국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서양의 선진 문물을 수용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양의 선진 기술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서 사회 시스템 전체를 근대화했다. 반면 중국은 중체서용(中體西用)·동도서기(東道西器)를 내세우며 중국의 전통적인 사회 시스템과 가치관은 유지한 채 서양의 문물만 수용하는 양무 운동을 추진했다. 결과는 청일전쟁에서 중국의 완패로 나타났다. 선진 문물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흡수·체화할 수 있는 기존 시스템의 개혁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혁신은 이뤄지지 않는 법이다.

미래 경쟁력 위해 낡은 규제 과감히 혁파해야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현재 한국의 ICT 기술력은 선진국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됐다. 유통기업의 선진 물류 시스템은 우리가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에 가지 않아도 일상생활에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끔 해준다. 배달앱도 사람들의 외부활동을 최소화해 감염 확산을 막는데 기여한 바가 크다. IT·소프트웨어 분야 대기업의 경쟁력도 확인할 수 있었다. 코로나19 확산 초기, EBS 온라인클래스 사이트가 먹통돼 학생들의 학습 환경이 원활하게 조성되지 못하자 주요 SI 기업들이 사이트 개선 작업에 나서 문제를 해결했고, 최근에도 백신 예약 접종 사이트 오류를 대기업이 참여해 해결한 바 있다.

이처럼 뛰어난 역량을 갖춘 우리 기업이지만 현재 낡은 규제에 가로막혀 제대로 활약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다. 큰 성과도 없이 10년 가까이 유지되는 대형마트 의무휴업일 규제는 마트를 온라인 쇼핑의 물류 거점으로 활용하려는 계획에 차질을 주고 있으며, 대기업이라는 이유로 공공 발주 소프트웨어 사업 참여를 제한해 경쟁력 향상에 어려움을 주고 있다. 여기에 일률적이고 강제적인 주 52시간제 도입은 혁신을 위해 뛰고 있는 많은 벤처·스타트업의 발목을 잡고 있고, 차등 의결권 제도 미비로 인한 쿠팡의 미국 증시 상장 사례에서 보듯이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는 각종 기업지배구조 관련 규제는 창의적인 스타트업의 탈한국화를 가속할 수 있다.

노동규제, 산업규제, 기업규제 등 기업 경영에 걸림돌이 되는 많은 규제를 혁파한다면, 이미 충분한 역량을 가지고 있는 우리 기업들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충분한 경쟁력을 갖춰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규제 일변도의 정책 방향을 과감히 전환할 때, 우리나라는 4차 산업혁명 선도 국가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는 이전부터 누적돼온 우리 경제의 취약한 부분을 마스크 뒤로 감춰줬지만, 향후 코로나19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그 민낯을 드러낼 것이다. 민간과 정부 부문의 부채 증가로 인한 경제체질 약화와 거품 경제의 붕괴 가능성, 가계·기업·산업·세대 등 여러 분야에서 더 거리가 벌어지고 있는 양극화 등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우리 경제의 성장에 큰 위험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민간 부문의 경쟁력 제고를 통한 지속적인 성장으로 가계와 기업의 소득을 높여 경제체질을 개선하는 정공법이 해결책이 될 수밖에 없다.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기업의 혁신 노력을 최우선으로 해야겠지만, 이를 지원하는 정책의 뒷받침과 효율적인 재정집행 등 정부의 혁신도 긴요한 시점이다. 과거 모든 정권에서 규제 개혁을 경제성장의 화두로 삼았기에 이제는 식상한 과제가 됐지만, 코로나19 사태 이후 드러날 우리 경제의 민낯을 직시하고 새롭게 도약하는 데 이보다 절실한 과제도 없을 것이다.

-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장(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

202109호 (2021.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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