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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길이 쓰는 생명의 비밀] ‘과수 에이즈’는 불치병, 발생 땐 과수원 쑥대밭 

 

2015년 경기도 안성서 첫 발생 ‘과수화상병’ 전국 확산
감염되면 검게 변하며 말라 죽어, 매몰 밖에 방법 없어


▎2015년에 경기도 안성에서 첫 발생한 과수화상병은 전국적으로 확산 중이다. 치료제와 백신이 없고 발생 원인도 확실하지 않다. 감염되면 매몰·소각해야 하며 매몰된 땅에서는 3년간 농사를 지을 수 없다./ 사진:충주시
2021년 6월 16일 자 중앙일보 18면에 “나무 말려 죽이는 ‘과수 구제역’ 비상…추석 때 과일 귀해지나”라는 제목으로 과수화상병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났다. 그 내용의 일부이다. “6월 7일 과수화상병이 확진된 충남 예산군의 한 사과농장에서 굴삭기를 이용해 사과나무를 땅에 묻고 있다. 충남도는 5월 31일 위기단계를 주의에서 경계로 격상했다. ‘우리 동네 과수원이 몽땅 없어지게 생겼어요.’ 충북 충주시 산척면 석천리에서 21년째 사과 농사를 짓고 있는 서 모(62) 씨는 과수화상병이 확산한 지역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과수화상병이 충북과 충남, 경북 등 전국으로 확산하고 있다. 농촌진흥청에 따르면 8월 10일 기준, 전국에서 과수화상병 확진 판정을 받은 농가는 20개 시·군 340곳으로 집계됐다. 충북이 188곳으로 가장 많고 경기 69곳, 충남 68곳, 경북 11곳 등이다.

과수화상병은 주로 사과나 배 등에서 발생한다. 감염되면 잎과 꽃, 가지, 줄기, 과일 등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붉은 갈색이나 검은색으로 변하며 말라 죽는다. 아직 치료제가 없고 전염력이 강해 ‘과수 구제역’, ‘과수 에이즈’로 불린다. 국내에서는 2015년에 경기도 안성에서 처음 발생한 후 매년 되풀이되고 있다.

이 병은 감염됐다고 해서 즉시 시커멓게 말라 죽는 게 아니다. 짧게는 3년에서 길게는 20년까지 잠복기를 거쳐 나타나기도 한다. 발생 원인도 확실하지 않다. 나무에 잠복한 균이 적정 기후를 만나 발현되거나 균이 비바람과 벌, 전지가위 등을 통해 번지는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과수화상병에 감염된 나무를 묻은 밭에는 3년간 농사를 지을 수도 없다.

사실 지방방송이나 신문에 연이어 과수화상병(果樹火傷病, fire bligh) 이야기가 나온다. 이 병은 사과, 배 등 장미과에 속한 일부 식물에 영향을 미치는 세균성병해로, 원인이 되는 병원균은 에르위니아 아밀로보라(Erwinia amylovora )다. 보통 개화기인 5~7월경 발생한다.

화상병의 영향을 받는 부위는 꽃, 과일, 원줄기, 나뭇가지의 조직들로 화상(scorched)을 입은 듯이 타들어 간다. 꿀벌이나 다른 곤충들이 화상 세균을 꽃의 암술에 묻히고, 또한 바람이나 새, 빗방울이 옮기기도 한다. 또한 식물체를 곤충이 빨면서 생겨난 부위도 감염되며, 보통은 식물의 기공(stomata)을 통해 식물 안으로 들어간다. 기공 등으로 들어간 병균은 관다발(물관)을 통해 뿌리나 접을 붙인 자리에 도달하고, 결국 뿌리를 상하게 하여 식물(나무)을 말라죽게 한다. 그리고 병원세균은 날씨가 덥고 습도가 높을 때 더 잘 퍼진다.

간단하게 재정리하면, 발병은 과수에 꽃이 필 무렵, 꽃가루를 운반하는 곤충에 의해 화상병 세균이 옮겨지고, 세균은 꿀샘(밀선, 蜜腺)을 통해 꽃에 침입해서 기공과 상처 부위를 통해 잎에 들어가 증식하고 퍼지게 된다. 비가 내리면 세균(박테리아)이 꽃에서 흘러나오기도 하고, 또한 건조해질 때 바람으로 전파되기도 한다.

이 병균에 감염되면 배와 사과의 잎이나 꽃, 가지, 줄기, 과일 조직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검게 변하면서 서서히 말라 죽게 된다. 일단 감염되면 치료나 방제약이 없으므로 반경 100m 이내의 과일나무들은 뿌리째 뽑아서 땅에 묻는 방식으로 폐기해야 한다. 또 확산속도가 빨라 이동통제와 같은 차단 조치가 필수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15년 5월 경기 안성에서 처음으로 화상병이 발생한 이후 충남과 충북, 강원 등 전국으로 확대되고 있다.

병의 증상을 구체적으로 보면 감염된 꽃은 쭈그러든 후 흑갈색으로 변하고, 나무에 매달려 있거나 떨어지고, 감염된 꽃이 달린 가지나 인접한 가지로 진행돼 잎맥(관다발)을 따라 흑갈색 병반(病斑)이 발생한다. 흑화(黑化)가 진행됨에 따라 잎은 말리고, 쭈그러들어 보통은 마른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 병이 걸린 잔가지의 끝부분은 구부러지는 증상을 보이고, 병든 가지의 수피(樹皮)는 흑갈색으로 변하면서 물러졌다가 후에 위축되면서 단단해진다. 줄기에 궤양 증상이 보이는 가지의 수피는 짙은 색으로 함몰된 채 마르게 된다. 감염된 작고 미성숙한 과실은 물러진 후 갈색으로 변하며 결국에는 주름지고 검은색이 된 후 수개월 동안 나무에 달라붙어 있다. 습한 환경에서는 최근 감염된 부분의 표면에 유백색의 끈적끈적한 물방울이 나타날 수 있으며, 대개 공기에 노출된 후 갈색으로 변한다.

잠복기 최대 20년, 매몰 땅서 3년간 농사 못 지어

놀랍게도 아직 병을 잡는 방법이 없다. 고작 가지치기(전지, 剪枝)나 상처 부위 잘라내기, 감염이 일어난 나무를 뽑아서 절단 후 매몰 또는 소각하기, 새로 번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스트렙토마이신(streptomycin)을 살포하거나 옥시테트라사이클린(oxytetracycline) 항생제 주사를 나무에 줄 뿐이다. 또 발병 구역 내 화분 매개 곤충 관리하기, 방제에 사용한 방제 자재, 전정도구, 농기구, 운반기기의 소독(70% 에탄올)을 철저히 해야 할 뿐이다.

북미가 원산인 세균성화상병은 세균성전염병이라 이미 온 세계에 퍼졌으며, 과수원을 하는 사람들에겐 치명적이라 과수원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순식간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과수원농가가 당하는 것에 못지않게 가축 농가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양계장의 닭들은 조류인플루엔자(AI, Aves Influenza)로, 돼지는 아프리카돼지열병(ASF, Africa Swine Fever) 때문에, 또 소 돼지들은 입발굽병(구제역, 口蹄疫, foot-and-mouth disease)으로 한 번에 수만, 수십만 마리가 생매장되는 판이다. 이들 동물을 죽이는 것은 모두 바이러스들이고, 코로나 바이러스(corona virus)는 사람까지 못살게 군다. 아무튼 우리나라 곳곳에 사과, 배나무도 땅에 파묻고 있으니 산지옥(生地獄)이 따로 없다.

※ 권오길 - 1940년 경남 산청 출생. 진주고, 서울대 생물학과와 동 대학원 졸업. 수도여중고·경기고·서울사대부고 교사를 거쳐 강원대 생물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2005년 정년 퇴임했다. 현재 강원대 명예교수로 있다. 한국간행물윤리상 저작상, 대한민국 과학문화상 등을 받았으며, 주요 저서로는 [꿈꾸는 달팽이] [인체기행] [달과 팽이] [흙에도 뭇 생명이] 등이 있다.

202110호 (2021.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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