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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화법으로 본 대선주자들의 경쟁력 

대권의 주인공 되려거든 막말 거두고 유권자의 가슴 울려라 

이재명, 효율적인 언어 투우사지만 지나친 강성 발언은 감점
검사 출신 홍준표·윤석열, 철학 부족한 권위적 말투 지양해야


▎여야 주요 대선후보들은 저마다 색깔이 다른 언어로 유권자에게 어필한다. 정치인의 말은 그 내면의 정치 철학과 경쟁력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다. 왼쪽부터 이재명 민주당 대선후보, 민주당 경선에서 2위에 그치고 만 이낙연 전 국무총리, 국민의힘 경선 주자인 홍준표·윤석열 후보.
선거는 말의 잔치다. 유권자들은 거창한 비전과 복잡한 정책보다 후보의 입에서 쏟아지는 말로써 됨됨이를 판단하고 경쟁력을 가늠한다. 선호도 톱 4를 다툰 이재명, 이낙연, 홍준표, 윤석열 이른바 잠룡 4인방의 언어는 저마다의 인생과 철학을 직조할 만큼 뚜렷한 개성을 드러낸다. 4인방의 ‘정치 언어’를 통해 정치인이 가져야 할 말의 품격은 무엇인지 탐구했다.[편집자 주]

과거 인물 위주의 이미지 정치 시대에서는 ‘정치 언어’가 보조적 수단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정치인에 대한 판단이 몇몇 단어나 한 줄의 문장으로 압축되는 메시지 정치 시대다. 정치 행위의 대부분이 언어에 의존할 정도로 절대적 수단(absolute means)이 됐다. 특히 한국 정치는 과거 정동영의 노인 폄하 발언 하나에 50만 표가 날아갔다 할 정도로, 감수성과 직결되는 ‘실축(失蹴) 정치’다. 그 때문에 이제 정치 언어의 채색은 필연적이다. 더구나 이번 대선은 언어가 지배하는 온라인으로 진행되고 있다.

정치 언어의 채색에도 단계가 있다. 대체로 조립(assembly)·공작(maneuvering), 조작(manipulation), 언어 성형(language cosmetic surgery) 3단계를 거친다.

‘조립·공작’ 단계에서는 함축적인 의미 전달을 위해 일반 언어를 단순하게 손보아 비유적인 의미를 보탠다. ‘백의종군’, ‘한 알의 밀알’, ‘빅 텐트’ 등이 그런 예다. ‘조작’ 단계에서는 강도와 선명성을 높이고 흡인력과 정보 유통력을 강화하면서 이미지 확보와 각인을 위해 언어 조탁 및 카피라이터 수준의 홍보 용어를 개발(창안)한다. 예를 들면 ‘정권 교체’가 아니라 ‘정치(체제) 교체’, ‘정치판 손보기·물갈이 수준이 아니라 불판 자체를 통째로 바꿔야…’, 오바마의 ‘담대한 희망(Audacity of hope)’이 이에 속한다.

3차 손질은 본격적인 정치적 언어 성형(language cosmetic surgery)이다. 감수성을 자극하는 낱말을 덧붙여 추상화하거나 고위 개념을 투영해 긍정적 비전을 담는다. 이 추상화 정도에 따라서 실제 내용은 더욱 모호해진다. 과거의 예를 들면 ‘창조경제’, ‘국민행복캠프’, ‘저녁이 있는 삶’, ‘행복 발전소’ 등이 이에 속한다.

요컨대 정치인의 정치 언어는 조지 오웰의 말대로 의도된 언어 조작이다. “본래 정치 언어란 거짓을 그럴듯하게 만들고, 존경하는 대상을 죽이기도 하고, 딱딱한 것조차 바람결로 느끼도록 할 때 쓰려고 있는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정치인의 입에 주목한다. 그 이유 또한 조지 오웰은 적확히 짚었다. “정치를 생각할 때…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소망과 결부될 때만 미래를 떠올린다.”

그럼에도 언어가 그 사람이다. 그 안에 그의 사상, 철학 등 모든 것이 담긴다. 성장 배경, 인문 환경, 업무 문화, 숙성기 생태, 대인관계 등의 총합 집적물이자 종합적 생태의 산물이다. 언어는 그의 삶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모든 생각의 둥지로 작용한다. DJ가 정치인의 필수 요소로 지적한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도 언어로 태어난다.

정치인의 언어에 깃든 살아온 삶의 궤적


▎김대중 대통령은 한국 정치사에서 손꼽히는 웅변가였다. 그가 정치인의 필수 요소로 정의한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은 언어로 드러난다. 1971년 대선에서 신민당 후보로 출마한 김 전 대통령의 유세 현장.
이번 대선의 유력 주자 4인, 이재명·이낙연·윤석열·홍준표 모두에게 공통적인 인문 환경은 법이었지만, 숙성기의 생태학적 측면은 제각각이었다. 유력 주자 4명 중 3명이 법조인이다. 이낙연만 가정 형편상 곧장 취업했고 정계 진출 때까지 기자로 21년을 보냈다. 그중 윤석열과 홍준표는 특히 검사 출신이다.

검사는 우리나라에서 여러모로 매우 특이한 직종이다. 공무원 사회에서는 ‘별세계’ 인종에 속한다. 군필 사법연수원 초임 검사가 3호봉인데, 급여표로 보면 일반직 4급 9~10호봉 해당한다. 9급 공무원이 30년이 걸리는 직급이고, 27~28호봉인 교사, 19호봉 이상인 국공립대학 교수와 맞먹는다.

게다가 과거 검찰에는 검사동일체의 현물 확인용으로 끼리끼리 밀폐형 폭음 문화가 만연했다. 피의자를 대하는 호칭이 지금은 ‘~씨’로 순화됐지만, 1970년대에는 ‘이 ㅅㄲ’가, 1990년대까지만 해도 ‘당신’이었다. 검사의 언어가 그러한 상하 문화에 저절로 오염될 것은 자명하다. 주된 언어가 설득이 생략된 단정·압박·강요형이고, 최선의 수평 언어라 해도 제시형 정도에 머무르게 된 것은 그러한 검사 문화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반면 변호사는 피고(인)의 입장에 서서 인간적으로 챙겨야 하고 재판장에게 논리와 인정으로 호소해야 하는 자리다. 유능한 변호사는 논리적 전개와 인간적 배려 두 가지를 잘해야 했다. 한편 언론인의 객관성 유지는 기본이어서 관찰자적 어법이 몸에 밸 건 당연하다. 더구나 중산층 출신의 은수저 윤석열을 빼고는 3인이 모두 지독한 가난을 짊어지고 살아낸 흙수저 출신이다.

단문의 대가 이재명, 직설적으로 직선 주행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치적 은유를 걷어낸 직설화법으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정치인이다. 그는 “대통령이 하는 말에는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철학과 사상이 들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02년 대선 경선에서 연설하는 모습.
그 때문에 기본 배경의 출발은 모두 법이었음에도, 이 네 사람의 현재 언어는 판이할 수밖에 없다. 지면 관계상 중문(重文)과 복문을 빼고, 단문(單文·短文) 한 가지만 훑어봐도 그렇다. 단문의 유효적절한 구사는 효과적인 언어 침투 과정에서 매우 중요하고, 나아가 자질 판단으로 이어지는 이미지 형성에도 크게 관여한다. 그럼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드러난 언어는 그 사람의 일부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재명은 언어를 통한 자신의 세일즈에서 가장 성공한 후보라 할 수 있다. 언어가 고유 브랜드라 할 만큼 종합적 언어 구사 능력에서는 단연 1위다. 자신만의 언어를 창조적으로 발명해내는 창발(創發) 수준이다. 그는 언어를 통해 ‘철학이 있는 사람’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노무현의 말, “대통령이 말을 잘할 수도,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통령이 하는 말에는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철학과 사상이 들어 있어야 한다”에 부합한다.

그는 특히 단문의 힘을 아는 단문의 대가다. 단호한 결기를 담아 직설적으로 직선 주행하기 때문에 간결·간명해 호소력·이해력을 높이고 강조 효과에 더해 친밀도도 증대시킨다. 실천적 사유를 반영해 현실적인 공감을 창출하고 정치적 언어 성형 느낌을 배제해 동참 의식을 유도한다. 공감을 통한 공명대 확산을 이루고 무엇보다도 참신한 이미지 제고에 그의 언어가 크게 기여했다. 써준 연설문이 없이도 언제 어디서고 제대로 해낸다는 게 최대 강점이다. 그의 언어들은 대부분 ‘쌩얼’이다. “이재명이 하면 대한민국 표준이 됩니다”, “머슴은 주인인 국민이 하는 말만 잘 들으면 됩니다”, “이재명은 했습니다. 이재명은 하겠습니다. 이재명은 합니다” 등이 대표적이다.

단문의 대가급에는 이낙연도 빠지지 않는다. 언행일치의 수평적 휴머니즘 사고자로서 탁월한 언어 조탁 능력이 있다. 4인의 후보 중 가장 품격 있는 언어 사용이 몸에 배어 있다. 하지만 크게 아쉬운 것은 그의 빛나는 단문들은 자신의 철학을 담아내기 위함이 아니라 주로 되받아치기용으로 쓰였다는 점이다. 나아가 그런 촌철살인의 어법이 후보 시절의 대중 연설에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단호함과 결단력 부족으로도 읽히면서 극적 호소력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 그를 노변정담(爐邊情談)형 정치가로 꼽는 이유다. 다음은 대표적인 예.

“그럼 의원님은 김정은이 만일 한국에 온다면, 인공기를 흔드실 수 있겠냐”(2018년 안상수 의원이 대정부 질문에서 “왜 평양에서 태극기가 보이지 않았는가” 묻자), “최순실 국정농단의 큰 짐을 떠안은 것을 저희들도 불행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수혜자일 수 있겠습니까?(2017년 김성태 의원이 “문재인 정권이야말로 최순실 국정농단의 가장 큰 수혜자”라고 하자)

물론 윤석열과 홍준표도 단문을 구사한다. 하지만 점수가 떨어진다. 철학이 부족·부재하거나 심각한 무지를 드러내기도 하고(윤석열), 주로 공격용이어서 품격이 떨어진다(홍준표). 특히 ‘실언의 아이콘’으로까지 몰린 윤석열의 경우는 매우 문제적이다. 검사 시절, 그를 주목하게 했던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2013년)와 “선택적 의심 아니냐”(2020년)는 발언에는 자신만의 철학이 담겼지만, 대선 후보로서 보인 언어 행위에서는 문제의 연속이다. 그의 실언 시리즈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민낯으로 무지가 드러나는 것과 단견 또는 오류를 그대로 방류하는 발언이다.

“일주일에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 “일본에서도 후쿠시마 원전이 폭발한 것은 아니다. 방사능 유출은 기본적으로 안 됐다”, “손발 노동으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그건 이제 인도도 안 하고 아프리카나 하는 것”, “임금 차이가 없으면 정규직·비정규직(구분)이 큰 의미가 없다”, “집이 없어서 주택청약통장을 만들어보지 못했다.”

이러한 발언들은 듣는 이를 아연실색하게 한다. 단순한 예로 ‘주 120시간 노동’은 120시간÷5일=24시간이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다. 서민의 현실에 대한 무지의 정점은 주택청약통장에 관한 발언이다. 다음 발언들 역시 수많은 후폭풍을 자초한 것들이어서, 그의 발언 뒤 참모들이 장문의 해설판을 준비하느라 매번 바빠야 했다.

콘텐트 빈약 윤석열, 홍준표는 막말로 자기 보호


▎이재명 후보는 쉽고 명료한 단문으로 대중에게 어필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오랫동안 재야 시민운동을 해온 경험은 그의 언변의 토대다. 1990년 시민운동가 시절의 이재명 후보(오른쪽)
“페미니즘이 건전한 남녀교제까지 막는다”, “먹으면 병 걸리고 죽는 것이라면 몰라도, 부정식품이라고 하면, (돈) 없는 사람은 그 아래도 선택할 수 있게, 더 싸게 먹을 수 있게 해줘야 된다. 먹는다고 당장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코로나19) 초기 확산이 대구 아닌 다른 지역이었으면 민란부터 일어났을 것”, “앞으로 정치공작을 하려면 인터넷 매체나 재소자, 의원 면책 특권 뒤에 숨지 말고 국민이 다 아는 메이저 언론을 통해 문제 제기했으면 좋겠다”, “청약통장은 모를 수가 없다. 모르면 거의 치매환자”, “여러분들 들으셨지 않나. 위장당원들이 엄청 가입했다는 것을.”

이러한 문제점의 근본 원인은 그가 ‘반문재인 정부’라는 모호하고도 광범위한 캐치프레이즈에서 얻는 반사이익에 매몰돼서다. ‘의심되는 자체 발광력’을 스스로 증명하는 자충수를 연발해, 콘텐트 빈약 쪽으로 향하고 있다. “확고한 신념이라고는 반문재인주의와 부정식품 활성화뿐인 듯하다”는 자조가 아군 사이에서도 공연하다. 위장당원 발언 후 원희룡은 이렇게 직격했다. “윤 후보도 최근에 입당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윤 후보는 위장 후보인가.”

이와 관련, 정작 문제는 이 언어 문제의 심각성을 당사자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거나, 변명 차원의 썰렁 개그가 도리어 더 궁색한 모습의 부메랑이 되고 있음을 모르고 있는 듯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치매 발언’으로 도마 위에 오른 뒤 “가십거리를 제공하는 것도 정치인의 서비스 정신 아니겠나. 그거 보고 재미있어 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겠나”라고 했다. 그것도 반말투로.

정치 언어의 생명은 철학 깃든 친근한 감동


윤석열의 언어 중 가장 문제적인 부분은 무지와 관련되는 대목이다. 작계 5010, 남북전력지수, 광주공항 문제 등에서 질문을 받자 “예예(말씀 좀 해주시죠)”라 하면서 그 내용 자체를 전혀 모르고 있음을 드러냈다. ‘예예 화법’으로 유통되면서, 한 나라의 지도자 그릇으로서의 심각한 우려를 자아내고, 스스로 신뢰도를 깎아내리고 있다.

홍준표는 또 다른 단문 애용파다. 단문의 직격성 효과를 안다. 하지만 그것이 매번 심각한 부작용을 낳으면서 그의 인간적 품격까지도 낮춰 보게 한다. 두 가지 형태로 분류할 수 있다.

①“만약 대통령이 되면 이재명을 바로 처단할 것이다”, “내가 대통령이 돼서 이재명 지사를 잡아 넣으면 된다. 간단한 것. 내가 대통령이 되면 (대장동) 관련 인물은 거머리 떼들이니 여야를 불문하고 다 잡아넣을 것.”

②“(김진태 의원에 대해) 상대할 가치가 없는 어린애”, “(도의원에 대해) 쓰레기가 단식한다고 해서…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갑니다”, “(방송국 경비원이 신분증 요구하자) 니들 면상 보러 온 게 아냐. 네까짓 게”, “이대 계집애들 싫어한다. 꼴같잖은 게 대들어 패버리고 싶다”, “(기자에게) 그런 걸 왜 물어. 너 진짜 맞는 수가 있다”, “저놈은 그때 우리 당 쪼개고 나가서 우리 당 해체하라고 지X하던 놈. 토론회가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어처구니없는 짓을 당하니 머릿속이 꽉 막힌다. 진짜 쥐어 패버릴 수도 없고.”

①번 그룹의 가장 큰 문제는 복수혈전 의식이다.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에만 취해서, 그 행위가 민주주의의 근간을 훼손하는 권력의 오남용이자 사유화임을 잊고 있다. 그런 발언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게 더 문제다. ①, ②를 관통하는 것은 그릇된 확증편향과 발화자의 품격 문제다. 특히 막말 습관이 자신의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는 것을 당사자가 아직도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는지 “문재앙보다는 홍발정이 낫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자체 언어 정화조가 없음을 드러내면서 천박하다는 이미지를 연속 자초한다. 요즘 뜨는 ‘감수성’과 막말은 전혀 무관하다.

홍준표는 주변인의 중앙부 진출 과정에서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살아남기 위해서, 언어를 자신의 보호막으로 사용하다 보니 거칠어진 듯하다. 하지만 센 말이 강한 리더십으로 직결된다는 잘못된 의식 또한 크게 작용하고 있음이 역연하다. 막말 수준의 거친 말들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이 그 증거다.

이재명은 단순히 언변이 좋다는 수준을 뛰어넘는다. 그 자신이 싱크탱크다. 짧게 표현하면서도 그 안에 그만의 철학을 잘 녹여 담는 요약·압축형 단문의 대가라는 점에서 언어의 연금술사이기도 하다. 정치 언어 생산의 1~3단계를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자연스럽고 그 때문에 더욱 각인 효과가 높아진다. 노무현의 ‘특권과 반칙이 없는 사회’처럼, 훗날 명언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싹수들도 보인다.

“우리가 치열하게 지켜야 할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지 제도나 관습 그 자체는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위해 정치를 선택해야지 정치인을 위해 정치를 선택하지 마십시오”, “국민은 일억 개의 눈과 귀, 오천만 개의 입을 가진 집단지성이다. 가짜뉴스와 거짓선동에 속아 넘어갈 만큼 어리석지 않다.”

이낙연의 단문은 정치판용으로는 지나치게 고품격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강물은 흐른다”(2020년 김정은 위원장의 사과에 대한 평)가 대표적이다. 수긍은 하지만 흡인력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이재명의 사이다 어법과 대조적이다.

언어 치료사급의 이재명은 ‘사이다’ 발언으로도 유명하다. “국민은 지배 대상이 아니에요, 국민을 지배 대상으로 보니까 복지를 공짜라 생각하는 겁니다.” 그에겐 막힌 부분(심정적 불만)을 건드려 감동까지 깃들게 하는 시원함이 있다. 임기응변식 해법 제시에 능하며 현장 설득력도 높다. 흡인력과 설득력에서 압권이다. 또 그는 일석이조의 바로잡기식 어법을 구사해 듣는 이들로부터 수긍을 이끌어낸다. 자신만의 깊은 생각을 확실히 알리면서, 동시에 성공적인 되받아치기도 해낸다.

“우리는 오른쪽이 아니라 옳은 쪽을 가야 합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용기 있는 자는 두려움이 없는 게 아니라 두려움을 이겨내는 사람입니다”, “국민이 낸 세금 열심히 아껴서 다시 돌려주는 게 왜 공짭니까?”

고품격 되받아치기의 대가는 단연 이낙연이다. 하지만 그 쓰임이 개인적이어서 듣는 이들의 박수는 받지만, 감동까지 끌어내진 못한다. “고장 난 레코드 여기[답변대]에 세워두신 이유는 뭡니까”(2019년 대정부질문에서 강효상 의원이 ‘그 고장 난 레코드 같은 답변은 이제 그만하고요’라고 하자).

윤석열·홍준표의 반말은 ‘검사 본능’에서 비롯된 듯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잇따른 말실수로 구설수를 자초했다. TV 토론회에 수차례 출연하면서 손바닥에 쓴 ‘임금 왕(王)’ 자에 대한 해명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적절한 구어체와 예사말의 혼용은 친밀도 증대와 동일체 강조, 그리고 친서민 이미지를 높인다. 이재명은 ‘~해야[여야]합니다’라고도 하지만, ‘해야[여야] 하죠[하는 거죠]’ 등을 혼용해 친근한 이미지를 형성하고 격의 없는 이웃집 사람처럼 보이려 한다. 이 점에서는 이낙연도 크게 뒤처지지는 않지만, 어말 부분에서 차이가 있다. 이재명은 미소를 보태거나 목소리를 높여 마무리하지만, 이낙연은 목소리가 낮아져 효과가 줄어든다. 단호함과 실천적 투쟁력이 모자라는 것으로도 읽히는 대목이다.

이 구어체와 예사말 혼용 부분에서 문제적인 게 검사 출신 후보들이다. ‘훈시형·제시형’ 어법이 주종을 이루고, 예사말 혼용 부분에서는 부지불식간에 삐져나오는 반말투가 흔하다. 특히 안 해야 더 좋은 잦은 반말투의 혼잣말은 감점의 부메랑이 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홍준표의 췌사들이 대표적이다.

“내 참, 꼭 이정희 보는 것 같아서”, “보수를 궤멸한다고 했는데, 나는 문드러지겠네”, “모든 게 배배 꼬여가지고….”

윤석열 또한 예외는 아니다. 공개석상에서도 반말투가 예사로 나오고, 특히 끝을 흐리는 미완성 췌사들은 단연 감점 사항이다. 국민적 논란이 된 ‘왕(王)’ 자 사건 이후 그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지자의 그런 응원도 좋지만 들어갈 때는 신경을 써서 지우고 가는 게 맞지 않았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속옷까지 말이야, 빨간색으로 입고 다닌다고 소문도 다 난 분들도 있는데…(말입니다).”

이 발언에서 괄호 안의 부분들이 생략되는 바람에 반말투가 됐다. 찾아서 붙인 ‘속옷까지 말이야’에서는 도리어 반말 버릇을 부각시켰다. 이런 무의식적인 반말투는 상대를 아래로 바라보는 검사 문화의 대표적인 잔재이자, 윤석열의 개인사적 훈장(?)이기도 하다. 그런 어투는 드럼통을 잘라 만든 연탄화덕 술상을 두 다리 사이에 끼고서 좌중을 연거푸 바라보며 반말투로 일장 연설을 해대는 좌장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의 도리도리질과 쩍벌남 자세는 사실 그 목로주점의 좌장 모습과 한 뿌리로 보인다. 그는 동료나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늘 술을 잘 사는 좌장이었다.

대통령감의 근본적인 자질 문제로도 확산된 ‘왕(王)’ 자 사건에서도 윤석열의 언어는 함량 미달이었다. 2~5차 TV토론 내내 손바닥에 그걸 쓴 채로 출연하고서도, 씻지 않아서 또는 손가락만 주로 씻어서라는 해명은 저급 코미디였다. 자세히 보면 글씨 모양이 매번 조금씩 다르고, 유성 펜이라도 손 세정제로 씻으면 두세 번 만에 깨끗이 닦인다는 걸, 시청자들이 밝혀냈다.

지도자의 으뜸 덕목은 정직이다. 링컨은 말했다. “일부 국민을 오랜 세월 속이는 것도 가능하며 전 국민을 잠시 속일 수도 있지만, 전 국민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고. 유권자의 집단지성은 매섭고 무섭다. 집채만 한 파도도 된다. 일개 후보의 지성과는 비할 수 없다.

여론몰이용 강성 발언보다 겸손한 언어가 호소력 있어


▎검사 출신 홍준표 국민의힘 경선 후보는 정곡을 찌르는 언변으로 ‘홍카콜라’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막말과 함께 권위적 이미지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네 후보를 언어적 측면에서 요약하자면, 이재명은 효율적인 언어 투우사지만 지나친 강성 발언은 중도층의 감점 요인도 되고, 만능 해결사 자임은 저항 피로군 증세를 자초할 우려도 있다. 이낙연은 되받아치기용 단문형에는 강하지만 중문이나 만연체에서는 소구력이 저감되는 경향이 있다. 윤석열은 생활 언어 습관 탈피가 화급하다. 집단지성으로서의 유권자를 배려하는 정치 언어 학습에 진지하게 나서야 한다. 홍준표는 수평적이고 겸손한 언어 학습이 필요해 보인다. 자신은 ‘독고다이(とっこうたい, 特攻隊)’일 뿐 독불장군은 아니라고 하지만, 대통령직이야말로 24시간 온 국민과 함께해야 하는 자리다. 언어로 살펴본 이재명·이낙연·윤석열·홍준표의 정치 상품을 비유하자면 각각 전문점(신모델 중심), 편의점(보완·개량 모델 중심), 도매점(반문재인정부 상품), 대형마트(리모델링 중심)라 할 수 있다.

유권자들도 챙겨야 할 게 있다. 언어에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담기지만, 언어만으로 그의 모든 것을 판단할 수는 없다. 하늘의 모든 것이 날씨에 담기지만 날씨만 보고 하늘의 모든 것을 안다고 할 수 없음과 같다. 유권자들은 어떤 후보에게 투표할 때 그가 자신의 꿈·소망을 이뤄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한 표를 던진다. 유권자는 그 후보를 그의 개인적 꿈과 희망의 대리 실현자로 환치한다. 실제로 투표 심리를 분석해보면 (거창한) 역사를 위해 한 표를 던지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결국 유권자에게도 자신의 선택에 대한 정치적 책임이 존재한다는 얘기다. 영화 [꾼]의 명대사대로, 한 번 속으면 속이는 사람이 나쁜 놈이지만, 두 번 세 번 속으면 속는 사람이 바보다. 한 표를 얻기 위해 임시방편용으로 치장된(꾸민) 언어를 남발하는 정치인들의 영구 추방을 위해, 유권자들도 그의 언어에 주목해 그 안까지 들여다보려고 해야 한다.

“정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함으로써 받게 되는 형벌 중 하나는 당신보다 못한 이들에게 통치받게 되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 말도 이제는 업그레이드돼야 할 시대가 됐다. ‘다 그놈이 그놈이더라’라는 식의 열패감에 떠밀려 정치에 무관심해지기도 했던 과거의 행태에서 벗어나는 일 외에도 루머나 간접 정보, 타인의 구전 평에 따라 특정 정치인의 평가가 좌우되던 일에서도 떨치고 일어나야 한다. 자신만의 주된 잣대가 그 정치인이 해대던 언행들의 총합이 돼야 하지 않을까.

- 최종희 작가, 언어와생각연구소 공동대표 jonychoi@naver.com

202111호 (2021.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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