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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근·현대 건국운동사 | 근·현대 건국 담론(11)] 헤이그 밀사 파견 빌미로 양위 앞장선 조선인들 

“일본을 15회나 배신”, 고종 윽박지른 대신(大臣) 송병준 

이토 통감 “적수답게 행동” 막말, 통치권 탈취 기회로만 생각
합방까지 고려한 측근 우치다는 일진회 회장 이용구 등 조종


▎고종 황제는 헤이그 밀사 파견 사실을 알아챈 일본의 압박을 받았다. 이토 히로부미 통감은 고종에게서 통치권을 빼앗을 계획을 세웠으며 우치다 료헤이는 더 나아가 폐위·양위를 목표로 송병준 농상공부 대신과 이용구 일진회 회장과 움직였다. 사진 왼쪽부터 영친왕, 순종, 고종, 귀비엄씨, 덕혜옹주 모습.
1907년 6월 2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한 고종의 밀사들은 27일부터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했다. 헤이그의 일본 대사관에서는 당연히 그들의 활동을 예의주시했다. 7월 2일, 헤이그의 일본 대사관은 외무대신 하야시 다다스(林董)에게 “어제 또는 엊그제부터 한국인 3명이 이곳에 머물면서 본회의 위원 대우를 받고자 한다고 들었음”이라는 전보를 발송했다.

외무대신 하야시는 이 전보를 즉시 한양의 이토 히로부미 통감에게 알렸다. 이토는 7월 2일 밤에 이 전보를 접수했고, 7월 3일 답장 전보를 보냈다. 전보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헤이그에서 운동 중인 한국인 3명의 이름은 무엇이고, 그들 배후에서 미국인 헐버트라는 자가 지휘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과연 사실인지 여부와 또 그 한국인은 한국 황제 폐하의 칙명에 따라 평화회의 위원으로 대우를 받고자 노력하는지 여부 (중략) 그 운동이 참으로 칙명에 의한 것이라면 우리 정부도 이 기회에 한국에 대한 국면 일변의 행동을 취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함. 곧 앞에 기록한 음모가 확실하면 세권(稅權), 병권(兵權) 또는 재판권을 우리 측이 장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믿음.”

이 전보는 당시 이토 통감이 헤이그 밀사사건을 어떻게 생각하는, 그 기회를 이용해 고종을 어떻게 하려는 지에 대한 기본 발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선 이토는 밀사를 파견한 주체는 고종 황제가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고종이 파견하지 않았다면, 헤이그의 밀사는 밀사라 할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토는 확실한 물증이 필요했기에 “한국 황제폐하의 칙명에 따라 평화회의 위원으로 대우를 받고자 노력하는지 여부”를 확인하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이토 ‘전쟁 불사’ 협박에 고종 깜짝


▎이토 히로부미 통감은 헤이그 밀사 파견 사실을 알아챈 이후 고종을 향해 “일본에 저항하려면 몰래 하지 말고, 마땅히 공공연하게 하라. 그것이 적수다운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고종의 통치권을 뺏어오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렇게 통감 이토는 밀사파견 주체를 고종이라 확신하고, 그에 대한 대책으로 세권(稅權), 병권(兵權), 재판권, 경찰권 등 통치권을 탈취하고자 했다. 말 그대로 세권은 세금 징수권이고, 병권은 군대 통솔권이며, 재판권은 사법권, 경찰권은 치안권을 대표한다. 을사늑약으로 이미 외교권을 잃은 고종에게 남은 통치권은 세권, 병권, 재판권, 경찰권 등이 전부라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토가 이런 통치권을 탈취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고종의 통치권 전부를 빼앗겠다는 생각과 같았다. 그렇게 되면 통감이 고종의 황제권 전부를 장악하게 돼, 대한제국은 사실상 망한 나라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이토가 고종 폐위 또는 한일합방 같은 극단적 조치 대신 통치권 탈취 정도만 생각한 이유는 대한제국의 저력이 아직은 살아있기 때문이었다. 당시는 대한제국의 군대가 엄존했고, 고종에 대한 백성들의 충성심도 적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토가 고종 폐위 또는 한일합방을 추진한다면 우선 고종이 결사항전으로 저항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고종을 따라 군대와 백성이 함께 일어난다면, 그 상황을 감당하기는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이토는 일단 고종의 통치권을 완전히 빼앗고, 나중에 상황을 보아 한일합방을 추진하고자 의도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한편 헤이그 밀사에 관한 전보를 받은 직후, 이토가 고종에게 어떤 일을 했는지는 [일한합방비사(日韓合邦祕史)]에 자세히 실려 있다. 이에 의하면 이토 통감은 7월 3일 고종을 알현했다. 알현 중에 그는 밀사에 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퇴궐 직전 돌변했다. 갑자기 이토는 예식과장(禮式課長) 고희경에게 하야시 외무대신으로부터 받은 전보를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에 저항하려면 몰래 하지 말고, 마땅히 공공연하게 하라. 그것이 적수다운 것이다.”

물론 이토는 일본어로 말했다. 고희경에게 이런 말을 한 것은 통역하라는 뜻이었다. [일한합방비사]에 의하면, 고희경이 이토의 언급을 고종에게 통역하자, 궁중은 ‘악연(愕然)’ 즉 ‘깜짝 놀랐다’고 한다. 여기서 언급한 궁중은 고종과 궁중 관료들을 의미했다. 그들이 깜짝 놀란 이유는 이토의 말속에 함축된 협박 때문이었다.

이토는 “일본에 저항하려면 몰래 하지 말고, 마땅히 공공연하게 하라. 그것이 적수다운거지”라고 했고, 이 말은 고종에게 ‘어디 한번 덤빌 테면 덤벼봐. 비겁하지 않게’라는 식으로 들릴 수 있었다. 다시 말해 고종에게 이토의 말은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뜻과 같았다. 당시 상황에서 전쟁을 불사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는가? 대한제국을 아주 멸망시켜버리겠다는 협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런 협박에 고종과 궁중 관료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토의 언급은 단순한 협박만이 아니라 심각한 인격모독이기도 했다. “그것이 적수다운 거지”라는 말은 몰래 밀사를 보낸 고종은 정정당당히 싸울 용기도 없는 비겁한 왕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말을 듣고 고종과 궁중 관료들은 두려움과 수치심에 할 말을 잃었을 것이다.

만약 그때 이토가 고종에게 ‘왜 몰래 밀사를 보냈습니까?’라고 추궁했다면, 고종은 분명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시치미를 떼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토는 그런 추궁을 하지 않았다. 당시까지는 확실한 물증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토는 고종을 추궁하는 대신 통감부 간부들을 향해 “이번은 결단코 용서하지 않겠다. 반드시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말을 했다. 당시 이토가 언급한 ‘단호한 조치’는 하야시 외무대신에게 보낸 전보에서 언급한 조치, 즉 고종으로부터 세권, 병권, 재판권, 경찰권 등을 탈취하겠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것은 이토의 속셈이었고, 고종이나 궁중 관료들은 그 속셈을 알 수 없었다. ‘단호한 조치’는 생각하기에 따라 천차만별이 될 수 있기에 수많은 억측과 공포를 불러올 수 있었다.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고종 폐위 또는 한일합방 등 무시무시한 조치도 생각할 수 있고, 가볍게 생각하면 고종의 사과도 있었다. 또한 아주 긍정적으로 보면 고종이 아무 관계 없다고 주장할 때 그 주장을 믿고 그냥 넘어가는 것도 생각할 수 있었다.

우치다, 합방과 고종 양위 놓고 저울질


▎이토히로부미 통감의 핵심측근 우치다 료헤이는 이용구 일진회장과 송병준 농상공부 대신을 이용해 고종의 양위를 계획하고 실행했다. 일진회 고문 우치다 료헤이(왼쪽), 다케다 한시(가운데), 일진회장 이용구.
그럼에도 이토가 헤이그 밀사를 언급하면서, ‘단호한 조치’라고만 하고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지 않은 이유는 고종과 궁중 관료들에게 극단적인 공포심을 불어넣기 위해서였다. 예컨대 고종은 이토가 헤이그 밀사에 대해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음으로 어설프게 변명해야 소용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극단적인 경우를 상상할 수 있었다. 궁중 관료들 또한 제대로 약점을 잡힌 고종이 과연 무사히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에 대해 의심할 수 있었다. 그렇게 공포심에 휩싸인 고종이나 궁중 관료들을 상대로 세권, 병권, 재판권, 경찰권 등을 탈취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수 있었다. 이런 면에서 통감 이토는 아주 교활하고 노련한 외교관이자 정치인이라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이토의 핵심측근 우치다 료헤이는 훨씬 더 과격한 조치를 원했다. 그는 이번 기회를 이용해 아예 합방(合邦)을 실현하거나, 그것이 안 되면 그에 버금가는 조치를 취하고자 했다. 예컨대 고종을 폐위시키거나 양위시키는 것이 그것이었다. 고종을 폐위하거나 양위하게 하면, 한일합방이 그만큼 빨라질 수 있을 것이란 기대 때문이었다.

우치다는 헤이그 밀사 소식을 들은 직후부터 한일합방과 고종 양위를 놓고 고심하다가 일단 양위를 추진하기로 결심했다. 무엇보다도 통감 이토가 한일합방은커녕 고종의 양위도 고려하지 않고 다만 통치권 탈취 정도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토를 상대로 한일합방을 건의하면 수용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 그래서 우치다는 그다음 단계로 양위를 생각하고, 이를 통감에게 건의하기로 했다. 우치다의 이런 건의 내용은 만약 이토가 거절할 경우에 대한 대책도 세웠다는 뜻이나 같았다.

7월 5일, 우치다는 이토를 찾아갔다. 그 자리에서 우치다는 “밀사 파견의 소문이 점점 더 사실로 드러나는 이상, 이 기회를 이용해 단호한 처치가 가능합니다”라며 특단의 조치를 제안했다. 물론 우치다가 제안한 특단의 조치는 고종의 양위였다. 하지만 이토는 “아직 전보만이니, 나중에 자세한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어떻게 처분할지 결정해도 늦지 않다”며 우치다를 제지했다. 이토 통감은 통치권 탈취 이상의 조치를 요구하는 우치다의 속셈을 눈치채고, 아예 말도 꺼내지 못하게 했다.

우치다는 통감 이토가 이렇게 나올 것을 예상했던 듯하다. 이토와 헤어진 그는 곧바로 송병준과 이용구를 찾았다. 그들에게 상황을 설명한 우치다는 “이번에 한국 황제를 양위시키지 못할 것이 없다. 각원(閣員)이 과연 결행할 수 있을까?” 하고 물었다. 이런 사실로 보면, 우치다는 양위를 이토가 거절할 경우, 송병준과 이용구를 이용해 고종 양위를 추진할 속셈이었음이 분명하다. 당시 송병준은 농상공부대신이기에 궁중 각료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고, 이용구는 일진회 회장이었기에 대중의 여론을 움직일 수 있었다. 즉 우치다는 송병준은 궁중 각료회의에서, 이용구는 일진회를 이용한 대중여론에서 고종 양위를 추진하게 함으로써 이토를 압박하고 고종 양위를 실현하려 했다.

한편 “이번에 한국 황제를 양위시키지 못할 것이 없다. 각원(閣員)이 과연 결행할 수 있을까?”라는 우치다의 질문에, 송병준은 “제가 먼저 이완용을 속여 그를 끌어들이겠습니다. 이완용만 결심하게 한다면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당시 이완용은 내각을 대표하는 총리대신이었다. 따라서 송병준은 자신이 이완용만 포섭하면 내각회의에서 고종양위를 실현할 수 있다고 자신했던 것이다.

이토도 양위 찬성 거짓말로 이완용 포섭 계획


▎농상공부 대신 송병준(왼쪽)은 조정 내부에서, 일진회장 이용구는 여론을 조장해 고종 황제의 폐위와 양위를 주장했다. 송병준은 고종을 향해 “3천리 강토의 어느 누구도 폐하를 덕이 있다고 하는 사람이 없다”며 몰아붙였다. 송병준에게 고종은 더이상 황제가 아니었다.
그러자 우치다는 “이완용은 교활한데, 속임 술책이 과연 될까?”라고 물었다. 이완용은 교활하고 나름 신중한 정치인이라, 고종 양위가 거론되면 통감 이토의 속셈부터 확인하려 들 것이 확실했다. 그래서 이토 통감이 고종 양위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이완용은 결사반대할 것 역시 분명했다. 이런 불안감에서 우치다는 과연 이완용을 속여 고종 양위에 앞장서게 만들 수 있을지 물었던 것이다. 이런 우치다의 질문에 송병준은 “양위는, 제가 이미 통감의 의향을 탐지했다고 한다면 이완용이 함께 할 것이 분명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송병준은 이완용에게 자신이 통감의 의중을 확인했더니 고종 양위가 분명하다고 거짓말함으로써 이완용을 포섭하겠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만에 하나 이런 거짓말이 이토에게 알려질 경우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도 있었다. 이런 우려에서 우치다는 “양위의 일은 통감도 다 알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의를 줬고, 송병준은 “물론입니다. 다만 이완용을 결심시키기 위해 통감이 찬성한다는 의향을 탐지했다고 할 뿐입니다” 라고 했다. 이런 대화로 보면, 우치다와 송병준은 이토 역시 양위에 찬성한다는 거짓말로 이완용을 포섭하고, 동시에 총리대신 이완용이 양위에 찬성한다는 거짓말로 이토를 설득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정도로 우치다와 송병준은 고종 양위에 적극적이었다.

한편 우치다와 송병준의 대화를 듣던 이용구는 “일이 중대합니다. 각신(閣臣)에게만 의뢰해서는 안 됩니다. 만에 하나 각신이 실패할 경우, 일진회의 힘으로써 반드시 목적을 관철시켜야 하고, 그 준비가 필요합니다” 라고 말했다. 이용구는 만에 하나 송병준이 이완용 포섭에 실패한다면, 일진회의 힘으로써 밀어붙여야 한다고 제안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송병준은 “가령 내각에서 결행한다고 해도, 일진회에서 원호(援護) 하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라고 했고, 우치다는 “먼저 이 회장과 대체(大體)의 준비를 의논하고, 그런 후에 거듭하여 3명이 숙의를 모을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궁중 안에서는 농상공부대신 송병준이 고종의 양위를 추진하고, 궁중 밖에서는 일진회 회장 이용구가 양위를 추진하는 것으로 밀약했다.

이외에도 우치다는 흑룡회의 막후 실세 스기야마(衫山)를 비롯해 일본 정계의 막후 실세들에게 고종 양위를 적극적으로 공작했다. 특히 우치다는 스기야마에게 대한제국 내부의 정세를 자세히 보고하며 그의 협력을 끌어냈다. 이처럼 고종 양위는 우치다의 적극적인 공작에 의해 대한제국 안과 일본 안에서 동시에 추진되었다.

7월 6일, 송병준은 궁중 각료회의에 참석했다. 당시 각료 회의에서 각부 대신은 각부의 소관 업무만 보고하고 다른 부의 업무에 관해서는 간여하지 않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러므로 농상공부 대신인 송병준은 농상공부의 업무에 관해서만 발언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송병준은 헤이그 밀사에 대해서는 발언할 권한 자체가 없었다. 헤이그 밀사는 외교 사안이므로 외부대신 또는 총리대신의 업무였기 때문이다.

송병준 “누구도 폐하를 덕이 있다고 안한다”


▎이토 히로부미 통감이 고종의 양위까지 주장하지 못한 이유는 대한제국 국민의 분노와 신식 군대의 반발 등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각료회의가 시작되기 직전, 송병준은 “이번부터 부(部)나 과(課)를 묻지 말고, 무릇 의견이 있으면 서로 논란하는 의회법(議會法)처럼 할 것”을 제안했다. 고종 황제는 별 생각 없이 재가했다. 잠시 후 각료 회의가 개회하자, 총리대신 이완용이 헤이그 밀사를 어떻게 처리할지 보고했다. 그러자 고종은 “그것은 짐이 아는 바가 아니다. 만약 통감부에서 단서를 공개한다면, 통감에 부탁하여 사실 유무의 조사를 하게 하는 것이 가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뗐던 것이다. 이때를 기다리던 송병준은 벌떡 일어나 자유 발언권을 얻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폐하께서 인호(隣好)를 파괴하여 지불해야만 했던 비용이 협약(協約-1904년 8월의 제1차 한일협약과 1905년 11월의 제2차 한일협약 즉 을사늑약) 전후로 1억 원 이상입니다. 이 막대한 자금은 폐하가 스스로 산업을 경영하여 이익을 얻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인민의 피와 살입니다. 그러므로 궁내부는 원망(怨望)의 부(府)가 되었고, 3천리 강토의 어느 누구도 폐하를 덕이 있다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러일전쟁 이후, 폐하는 일본의 신뢰를 배신한 것이 13회입니다. 일이 노출 되면 꼭 모른다고 하여 죄를 중신에게 전가하여, 중신들이 초개같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지금 신문지에 보도된 사건(즉 헤이그 밀사)까지 합하면 15회입니다. 다만 통감이 심인(深仁)하여, 폐하가 한 번 회준(悔悛)할 날만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사태가 이미 이에 이르렀습니다. 통감이 만약 15회의 죄적(罪迹)을 일괄해 와서, 하나하나 그것을 폐하의 어전에서 나열해 진술한다면, 폐하는 오히려 모른다는 한마디로서 책임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송병준은 고종 면전에서 지난 과거를 거론하며, 이토 통감이 더 이상 참지 않을 것이라고 윽박질렀던 것이다. 군주제 국가에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었다. 그럼에도 송병준이 그렇게 한 이유는, 송병준에게 고종은 황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송병준에게 황제는 이토 통감 또는 메이지 천황이었던 것이다. 사실 고종은 무능했고, 수많은 실패를 반복했다. 한국 근대사가 나락으로 떨어진 이유 중 하나는 분명 고종의 무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대한제국의 황제였고, 송병준은 대한제국의 농상공부대신이었다. 그런 송병준이 이토를 배경으로 고종 황제를 윽박지른 것은, 설사 그의 언급에 일말의 진실이 있다고 해도 민족적, 윤리적 차원에서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같은 송병준의 윽박지름은 사실 계산된 언행이었다. 송병준이 고종을 상대로 이렇게 기세등등하게 윽박지를 수 있는 까닭은, 통감 이토의 허락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총리대신 이완용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 결과 7월 6일의 내각회의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궁중 관료들은 고종 양위를 거부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고종, 대리청정 시도도 무산


▎고종 황제는 대리청정으로 헤이그 밀사 파견에 따른 일본의 압박을 피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순종이 황제로 즉위했고 남아있던 황제의 통치권은 이토 히로부미 통감에게 넘어갔다. 뒤이어 군대마저 해산돼 사실상 대한제국은 껍데기만 남았다. / 사진:문화재청
한편 일진회 회장 이용구는 7월 8일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공함(空函)을 보내, 헤이그 밀사 관련자 처벌을 요구했다. 겉으로 관련자 처벌이라 했지만, 사실상 헤이그 밀사의 최종 책임자는 고종 황제였다. 따라서 이용구는 일진회 이름으로 고종 황제의 처벌을 요구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고종 양위를 위해 우치다(內田) 그리고 송병준과 맺은 밀약을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뒤이어 이용구는 7월 13일부터 다케다 한시 그리고 일진회 간부들과 함께 삼남 순회유세 길에 올랐다. 전날 밤에 송별회가 열렸는데, 그 자리에는 송병준, 이용구 그리고 우치다와 다케다가 참여했다. 고종 양위를 공작하는 네명의 거두가 다 모인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송병준은 다케다에게 “이번 유세의 연설은 자못 중대하니, 변사(辯士)의 연설은 하나하나 귀하에게 검열받게 하여, 훗날 대변혁의 복선(伏線)을 펴십시오”라고 말했다. 여기서 언급한 ‘대변혁의 복선’이란 물론 고종 양위와 한일합방이었다. 이번 삼남유세를 통해 양위를 기정사실화 하고, 장기적으로 한일합방을 추진하는 발판으로 삼으라는 뜻이라 하겠다.

이와 같은 우치다와 다케다의 공작 그리고 송병준과 이용구의 활동 결과 7월 16일 내각회의에서 양위가 결정됐다. 고종은 처음 대리청정으로 곤경을 벗어나려 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순종은 황태자로 대리청정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황제로 즉위했다. 고종은 1907년 7월 18일 대리청정 명령을 내렸고, 다음날인 7월 19일 순종이 황제로 즉위했다. 황제에서 밀려난 고종은 태황제가 됐고, 대한제국의 통치권은 모두 이토 통감에게 넘어갔다. 뒤이어 7월 30일 군대마저 해산되면서, 대한제국은 껍데기만 남은 국가가 되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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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호 (2021.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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