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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석의 조선 후기史 팩트추적(10)] 방랑 시인의 길밖에 없었던 대역죄인 후손 

김삿갓 시집, 1930년대 말까지도 없었다 

본명은 김병연으로 조부가 처형돼 집안 몰락, 과거 응시도 못해
이응수가 시 수집해 간행, 김삿갓면 지명 등 후대에 더 유명세


▎풍자와 해학의 방랑시인 김삿갓 탄생 204주년을 기념해 2011년 10월 김삿갓길 걷기 행사가 영월군 김삿갓면에서 열렸다. 참가자들이 삿갓·괴나리봇짐·짚신 등 김삿갓 복장으로 김삿갓 문학관과 생가 사이를 걷고 있다. / 사진:강원도민일보
김삿갓(1807~1863)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강원도 영월군에 김삿갓면(面)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이름이나 별명을 도로의 명칭이나 역의 이름으로 사용하는 예는 드물지 않아서, 서울의 을지로나 충무로같이 을지문덕이나 이순신 장군의 이름이나 시호에서 따온 도로의 명칭이 있고, 서울에서 춘천 가는 기찻길에는 소설가 김유정의 이름을 그대로 쓴 김유정역이 있다.

그렇지만 면의 명칭에 사람의 별명을 붙인 것은 영월군 김삿갓면이 처음인 것 같다. 영월군에는 이 밖에도 한반도면이나 무릉도원면 같은 쉽게 떠올리기 어려운 행정구역 명칭도 있다.

영월군이 기존의 하동면(下東面)이라는 명칭을 2009년 김삿갓면이라고 바꾼 이유는, 김삿갓의 묘가 이곳에서 발견된 후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김삿갓을 면의 상징으로 삼아서 관광을 활성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영월군 이외에도 전라남도 화순군에는 ‘김삿갓로’라는 도로가 있는데, 이 도로명은 김삿갓이 이곳에서 세상을 떠난 것을 기리기 위해 붙인 것이다. 자기 고장을 알리기 위해 면의 이름을 김삿갓으로 바꾸거나 도로의 명칭에 김삿갓을 쓴 것은 21세기가 관광과 홍보의 시대임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다.

특별히 김삿갓에 관심을 갖지 않은 사람이라도, 주위에서 김삿갓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다. 김삿갓을 주제로 한 문학작품은 많이 있고, 영화나 드라마로 그의 일생이 제작되기도 했으며, 제목에 김삿갓이 들어가는 유행가도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므로 김삿갓은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인물이다. 특히 한시에 한글을 섞어가면서 지은 그의 시 가운데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작품이 많다. 김삿갓의 시에 대한 글은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으므로 거기에 미루기로 하고, 이 글에서는 김삿갓에 관련된 기록 몇 가지를 중심으로 김삿갓 이해에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해보기로 한다.

김삿갓은 별명이고 그의 본명은 김병연(金炳淵)으로, 순조 7년(1807)에 태어나서 철종 14년(1863)에 세상을 떠났다. 세상에 전하는 그에 관한 이야기는 매우 많고, 김삿갓이 지었다고 알려진 시도 상당한 양이 된다. 이렇게 유명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관한 기록은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김삿갓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9세기 중반 이우준이라는 인물이 쓴 [몽유야담]에 실린 것이다. 이우준은 김삿갓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두 편의 시를 실어놓았다.

“김병연은 대나무로 만든 삿갓을 쓰고 다녔다. 옷을 잘 차려입을 때도 있고 누더기를 입고 다니기도 하는데, 술을 즐겨 마셔서 언제나 취하지 않는 날이 없다. 그는 자신의 성과 이름을 속이지 않았고, 글을 잘 쓰는 것으로 이름이 났다. 그는 시를 매우 빨리 정밀하게 지었으며, 자신의 시에 대해 높은 자부심을 지녔다. 언제나 정처 없이 떠돌았으며, 기껏해야 한 달 정도 머물다가는 떠났다.”

“대나무 삿갓에 누더기… 취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광주광역시 무등산 기슭에 세워진 방랑시인 김삿갓의 시비.
이우준은 김삿갓과 거의 동시대 인물이므로, 그가 쓴 김삿갓에 관한 글의 내용은 어느 정도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이우준은 김삿갓을 직접 만난 일은 없고, 또 그가 어떤 내력을 지닌 인물인지 잘 몰랐다. 다만 불우한 환경 탓으로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 인물일 것이라는 추측을 했을 뿐이다. 19세기 자료로는 이우준의 글 이외에는 믿을 만한 것이 없다.

20세기에 들어와서 김삿갓에 관한 글이 나오기 시작한다. 1917년에 장지연이 편찬한 [대동시선]에는 ‘촉석루(矗石樓)’와 ‘영립(詠笠)’이라는 두 편의 한시가 김병연의 작품으로 실려 있다. 이 책에서는 작자에 대해 “김병연의 자는 성심(性深)이고 호는 난고(蘭皐)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순조 정묘년(1807)에 태어났는데, 평생 삿갓을 썼으므로 세상에서는 김삿갓이라고 불렀다”라고 했다.

강학석이 1926년에 간행한 [대동기문]은 갖가지 야담을 모아놓은 책인데, 이 책의 4권에 ‘김병연이 관서지방에 발길을 끊다’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이 글에서는 “김병연은 안동 김씨인데, 그의 할아버지 김익순은 선천부사였다. 그의 할아버지가 임신년(1812) 관서지방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반란 때 항복했으므로 사형당했고, 그 집안은 폐족이 됐다. 김병연은 스스로 자신을 죄인이라고 말하며, 하늘을 우러러볼 수 없다고 하여 일찍이 삿갓을 쓰고 다녔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그를 김삿갓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그런데 [대동기문]에 전하는 얘기는 관서지방의 어떤 사람이 김삿갓의 할아버지를 조롱하는 시를 지어서 김삿갓이 다시는 관서지방에 가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김삿갓은 평생 관직을 가져본 일이 없으므로 조선시대의 공식 문서에는 그에 관한 내용이 없다. 그리고 김삿갓에 관한 얘기로 전하는 것은 많이 있지만, 그를 직접 만난 사람이 써놓은 기록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은 김삿갓이 기록을 남길 만한 당대의 주류세력과는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았음을 보여주는 것인데, 그가 이렇게 된 이유는 주류세력과 관계를 맺으려고 해도 맺을 수 없는 그의 집안 내력 때문이었다.

홍경래의 난 때 반란군에 항복한 조부


▎1973년 공개된 방랑시인 김삿갓의 친필. 친필 공개로 비로소 그의 글씨 솜씨가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김삿갓은 당대에 대단한 권세를 누리고 있었던 안동김씨 가문의 일원이었으므로, 그의 집안도 할아버지가 죄를 짓고 사형당하기 전까지는 괜찮은 편이었다. 김삿갓의 5대조 할아버지 김시태는 황해도 병마절도사라는 꽤 높은 벼슬을 한 인물인데, 경종 초에 목호룡의 고발로 시작된 신임사화에 연루돼 죽었다. 그러나 영조가 즉위하면서 이 사건이 조작된 것임이 밝혀지자, 김시태의 명예를 회복시켜 호조판서를 추증하고, 정조 7년(1783)에는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내려줬다.

왕의 일기라고 말하는 [일성록]의 1783년 2월 20일 기록을 보면 어영청에서 “김시태의 손자인 김이환의 아들 김익순이 무관으로 적합할 듯합니다”라고 정조에게 아뢴다. 그러자 임금은 김익순을 권무군관(勸武軍官)으로 발령을 내도록 명령하는데, 이때 김익순은 20세였다. 권무군관은 특별 채용되는 무관으로, 양반의 자제 가운데 능력 있는 자를 뽑아두기 위해 만든 제도였다.

이렇게 김삿갓의 할아버지 김익순은 증조부 김시태의 후광을 입어 관직에 나아가게 된다. 김익순은 이후 여러 곳의 수령을 하다가 1811년에는 선천부사로 재직 중이었는데, 이때 홍경래가 반란을 일으켜 선천으로 쳐들어왔다. 그런데 김익순은 반란군에 항복했고, 후에 홍경래의 반란이 수습될 무렵에는 자신이 반란군 장수의 목을 베어왔다는 거짓 보고까지 했다. 이러한 그의 행적이 드러나서 사형을 당하고 모든 재산은 몰수됐다.

할아버지 김익순이 순조 12년(1812)에 처형당했을 때 김삿갓은 여섯 살의 어린아이였으니, 이때부터 그는 대역죄로 사형당한 인물의 후손이라는 오명을 쓰고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20세 전후로 부모가 모두 돌아가자, 그는 출세할 수 없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세상을 떠돌게 된다.

김삿갓의 선조에 관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으나, 정작 김삿갓에 관해서는 기록이 없다. 김삿갓의 후손 중에 어느 정도 알려진 인물로는 손자인 김영진이 있는데, 1940년을 전후한 시기에 그를 만난 사람들이 전하는 얘기가 몇 가지 있다.

1973년 3월 8일 자 [중앙일보]에는 ‘방랑시인 김삿갓 친필 발견’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기사 내용은 “삿갓을 눌러쓰고 전국을 방랑하며 해학과 풍자에 넘치는 재치 있는 시구로써 이조사회의 부조리를 읊었던 방랑시인 김삿갓의 친필이 유달영 서울대 농대 교수와 장우성 화백(홍익대 미술학부장)에 의해 소장돼왔음이 최근 밝혀져 처음으로 그의 글씨 솜씨가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는 것이었다.

이 기사가 나온 후 8년 뒤인 1981년 12월 22일 자 [중앙일보]에는 장우성이 김삿갓의 손자를 만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장우성은 [중앙일보]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에 글을 연재하면서 자신이 절의 탱화를 그리게 된 사연을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나는 중일전쟁이 일어난 1937년 겨울에 난데없이 불화제작 주문을 받았다.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에 석문사라는 절을 짓고 있었는데 이 절 주지인 청강 김영진씨가 느닷없이 내게 탱화를 그려달라고 찾아왔다. 이 절 주지스님은 그 유명한 삿갓 김병연의 손자다. 우리 집안과도 세의(世誼)가 있던 분인데 한말에 홍천군수까지 역임했다. 글공부를 많이 했는데 조부인 난고 김병연이 방랑길에 오른 탓에 창강도 세상을 탓하고 머리 깎고 중이 된 것이다.”

장우성은 이 글에서 자신은 불화를 그려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김영진의 요청으로 탱화를 그리게 된 경위를 자세히 썼다. 장우성은 여주에서 성장했으므로, 그의 집안과 김영진의 집안이 서로 알고 있었다. 이 글에 의하면 김영진은 승려가 됐다가 불공을 드리러 온 상궁을 알게 되고, 이 상궁이 고종에게 얘기해줘 승려 생활을 그만두고 벼슬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년에는 절을 짓고 다시 승려 생활을 했다고 한다.

조선 시대 유일한 꿈 과거 급제 막혀 절망


▎강원도 영월군에 있는 방랑시인 김삿갓의 시비. ‘방랑시인 김삿갓 난고 시비’라고 씌어 있다.
안동김씨 족보에 의하면, 김영진은 1868년에 태어나서 1947년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돼 있다. 장우성이 김영진에게 탱화를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김영진은 70세였고, 장우성은 26세의 청년이었다. 김영진은 장우성을 어려서부터 봐왔고, 또 그의 그림 솜씨를 알았으므로 탱화 제작을 부탁한 것이다. 이렇게 장우성이 서술한 김영진에 관한 내용을 통해 김삿갓 손자에 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런데 1997년 4월 14일 자 [문화일보]에 실린 ‘김삿갓의 후손’이라는 글에서 유달영도 자신이 여주의 석문사에서 김삿갓의 손자 김영진을 만났다는 내용을 써놓았다. 유달영은 ‘성서조선 사건’으로 1942년 3월부터 1년간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난 후 처남이 살던 여주에서 며칠 쉰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어떻게 알았는지 두 군데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첫 번째는 초등학교 교사들 그룹이고 두 번째 초청은 뜻밖에도 난고 김병연, 속칭 김삿갓의 손자인 김영진씨였다.”고 했다. 유달영은 김영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다음, 다음과 같은 짐작을 했다고 한다.

“나의 짐작으로는 어떤 상궁이 왕비의 뜻을 받들어 김영진의 소원을 묻게 됐을 것이다. 틀림없이 절을 확장해달라거나 암자를 지어달랄 것으로 믿었는데 뜻밖에도 환속해서 벼슬을 한자리 하고 싶다고 했을 것이다. 후일에 김영진은 소원대로 환속해서 한 고을의 원이 됐고 얼마 후에 퇴임한 후에는 이포로 돌아와 살았다.”

장우성과 유달영이 보관하고 있던 김삿갓의 친필은 이렇게 김삿갓의 손자 김영진에게 얻은 것이었다. 그리고 김삿갓의 손자 김영진이 벼슬을 한 덕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순종 2년(1908) 4월에 대한제국은 김삿갓의 할아버지 김익순의 관작을 회복시켜준다. 이로써 김삿갓 집안의 불명예는 100년 정도 돼 끝난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꿈은 하나로 귀착되는데, 바로 과거에 급제해 높은 벼슬을 하는 것이다. 인간적인 삶을 산다든가, 예술적 능력을 발휘한다든가 하는 것은 모두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을 한 다음에 이뤄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반역자의 손자 김병연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김삿갓의 절망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현대인들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기로 한다. 순조 31년(1831)에 열린 과거의 소과 초시에 김정순이라는 인물이 응시해서 합격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김정순이 김익순의 사촌 동생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합격이 취소됐다. 이 사실이 순조실록에 들어 있다는 것은 국가에 중대한 범죄를 지은 자의 후손이나 친척은 과거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익순의 사촌 동생이 과거에 응시할 수 없다면, 그 직계 손자인 김병연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김병연이 삿갓을 쓰고 세상을 떠돌면서 풍자적인 시를 쓴 것은 이런 일 이외에는 다른 어떤 일도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시집을 내는 일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현재 김삿갓에 관한 책은 대중을 상대로 한 흥미 위주의 책에서부터 한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연구자의 학술 저서까지 다양한 종류의 많은 책이 시중에 나와 있다. 그리고 필자의 이 글처럼 김삿갓에 관한 짧은 글은 셀 수 없이 많으며, 학술 연구자들의 학술논문도 상당수 발표됐다. 그런데 김삿갓은 자신의 글을 정리해두지 않았으므로, 1930년대 중반까지도 김삿갓의 시집은 간행된 것이 없었다.

양주시·영월군·화순군의 김삿갓 홍보 경쟁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 문학관에 세워진 김삿갓 동상. / 사진:영월군청
김삿갓의 시를 수집해서 한 권의 책으로 엮은 인물은 이응수(李應洙, 1909~1964)다. 이응수는 1939년 [상해 김립시집(詳解金笠詩集)]을 출판하고, 2년 후에 다시 [대증보판 김립시집]을 간행했으며, 1956년에는 [풍자시인 김삿갓]을 평양에서 냈다.

이응수는 함경남도에서 출생해 이곳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일본에 유학하다가 중도에 그만뒀다고 한다. 그는 후에 경성제국대 법문학과 철학과를 졸업했다. 해방 후에 그는 북한에서 김삿갓 연구를 계속했는데, 북한의 문학연구에서 김삿갓을 중요한 위치에 자리 잡도록 한 것은 그의 연구 덕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응수가 편찬한 김삿갓 시집은 남북한이나 국내외를 막론하고, 후대에 간행된 수많은 김삿갓 시집의 바탕이 됐다. 그리고 김삿갓을 연구하는 연구자들도 이 시집에 들어 있는 자료로 연구를 진행해왔다.

지금도 새로 발굴해내는 김삿갓 시가 있어서 가끔 화제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1920년대부터 체계적으로 김삿갓의 시를 수집해서 편찬한 이응수의 노력이 없었다면, 남북한 모두 지금보다 훨씬 빈약한 김삿갓 자료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김병연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시인으로, 그의 별명인 김삿갓이 본명보다 훨씬 더 유명하다. 인터넷에서 ‘김삿갓’을 검색해보면, 그의 시에 대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일화나 명언이라는 것도 있으며, 김삿갓이라는 이름을 붙인 수많은 음식점이 국내외에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런데 김삿갓을 가장 열심히 홍보하는 데는 몇 군데 지방자치단체다. 현재 김삿갓과 지역의 연고를 바탕으로 여러가지 문화행사를 하는 곳은 세 군데인데, 김삿갓이 태어났다고 알려진 경기도 양주시, 그가 세상을 떠난 곳이라고 전해지는 전라남도 화순군, 그리고 김삿갓의 묘소와 김삿갓 문학관이 있는 강원도 영월군 등이다.

경기도 양주시는 김삿갓이 태어난 곳이라는 전해오는 얘기를 바탕으로, 양주 출신의 문인 김삿갓의 업적과 생애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백일장을 열고 있다. 그리고 시내에는 김삿갓교라는 다리도 있다.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에는 김삿갓이 세상을 떠난 곳으로 알려진 집이 있었는데, 화순군은 이 집을 복원해 ‘난고 김병연(김삿갓) 선생 운명하신 집’이라는 커다란 비석을 세워놓았다. 그리고 삿갓 동산을 조성해 50여 개의 김삿갓 시를 새긴 석비를 세워놓았다.

강원도 영월군은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더 적극적이다. 우선 면의 명칭을 ‘김삿갓면’으로 바꾸고, 여러 곳의 지명에 ‘김삿갓’의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매년 김삿갓 문화제를 개최하는데, 이 축제에서는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또 ‘난고 김삿갓 문학관’은 김삿갓의 문학적 유산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고, 문학관의 야외에는 다양한 조형물이 전시돼 있다.

이처럼 전국에서 김삿갓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 있으니, 할아버지가 지은 죄에 연좌돼 자신의 꿈을 펼치지 못했던 김삿갓에게 조금쯤 위로가 될지도 모르겠다.

※ 이윤석 - 한국 고전문학 연구자다. 연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2016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정년 퇴임했다. [홍길동전]과 [춘향전] 같은 고전소설을 연구해서 기존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30여 종의 [홍길동전] 이본(異本) 가운데 원본의 흔적을 찾아내 복원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 해석 방법을 서술했다. 고전소설과 관련된 30여 권의 저서와 80여 편의 논문이 있다. 최근에는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와 같은 대중서적도 썼다.

202111호 (2021.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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