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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우의 청와대와 주변의 역사·문화 이야기(23)] 일제가 ‘동아청년단결’ 구호 새긴 인왕산(仁旺山) 바위 

조선 청년 전쟁 동원 야욕이 만든 상처가… 

조선 총독 미나미가 대중적 기반 확보 위해 기획한 노림수
가로세로 5m 크기 글자 새겨, 지금은 뭉개져 흔적만 남아


▎조선총독부가 내선일체를 강조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왕산 병풍바위에 새긴 글씨는 현재 식별이 불가능하다.(2006년 9월 촬영) / 사진:이성우
북악·인왕·목멱·타락 등 조선 시대 한양의 내사산(內四山) 중 우백호에 해당하는 인왕산은 몇 개의 봉우리로 이뤄져 있다. 청와대나 경복궁 쪽에서 바라봤을 때 모여 있는 세 개의 봉우리 중 왼쪽 봉우리가 해발 338m의 인왕산 주봉이다. 주봉 아랫부분은 병풍처럼 거의 직벽(直壁)에 가깝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수성동 계곡의 기린교를 앞에 두고 다시 한번 인왕산으로 시선을 돌리면 병풍처럼 펼쳐져 보이기만 하던 바위는 거대한 암벽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그 암벽을 바라보면 무슨 글씨 같은 것이 눈에 띈다.

일제가 인왕산 암벽에 글씨를 새길 계획을 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80여 년 전인 1939년이었다. 대일항쟁기인 1936년 8월, 조선에 7번째 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 지로(南次郞)는 1942년 5월까지 약 5년 9개월 동안 재임했던 자다. 그는 부임 3년이 지난 1939년 9월 인왕산 주봉 밑 암벽에 ‘동아청년단결’(東亞靑年團結)이라는 구호를 새기도록 한다. 미나미 총독이 직접 썼다는 동아청년단결은 무엇이고, 이런 구호를 인왕산에 새기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700년간의 막번 체제를 무너뜨린 메이지 유신으로 천황 중심의 근대적 통일국가를 형성한 일본은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를 추구하면서 정치적으로는 입헌정치를 시작했고, 사회·문화적으로는 근대화를 추진함으로써 아시아 어느 국가보다 빠르게 제국주의 국가 대열에 합류했다. 이로써 일본 역시 구미 열강의 식민지 확장 정책에 편승하면서 우리나라와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를 침략하기 시작하는데, 1894년의 청일전쟁 승리로 일본은 아시아의 패권국으로 올라섰다. 또 1904년 러일전쟁 승리로 조선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은 물론이고 만주에 대한 이권과 남만주에 대한 지배권도 확보했다. 조선은 결국 1905년 외교권을 박탈당하는 을사늑약에 이어 1910년 주권마저 빼앗겨 일본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조선을 손에 넣음으로써 대륙 진출의 발판을 마련한 일본의 야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관동군은 러일전쟁 이후 획득한 남만주 철도 보호를 위해 배치된 일본 군부대였다. 1920년대 말로 접어들면서 만주에서의 일본 권익 확대를 꾀하기 위해 일본은 강경파 관동군 참모부를 중심으로 만주에 대한 무력 점령계획을 수립했다. 그리고 1931년 9월 18일, 봉천(奉天) 외곽의 류탸오후(柳條湖)에서 남만주 철도를 폭파하고는 중국의 소행이라고 덮어씌웠다. 이는 만주사변의 시작이었으며, 일본의 괴뢰정권 만주국이 세워졌다. 중국의 황제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선통제(宣統帝) 푸이(溥儀)였다. 그의 일대기는 ‘마지막 황제’(The Last Emperor)라는 이름으로 영화화돼 크게 주목받았다.

청일전쟁 승리로 아시아 패권국 된 일본


▎‘동아청년단결’이 새겨졌던 인왕산 주봉은 청와대에서 한눈에 보인다. / 사진:이성우
만주사변까지 세 번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한껏 기세가 오른 일본은 중국 대륙을 차지하려는 욕심을 버리지 않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37년 7월 7일 베이징 교외의 작은 돌다리인 루거우차오(노구교)에서 중국군과 일본군이 충돌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를 트집 잡아 사건을 확대하고 대대적인 공격에 나섰다. 이렇게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짧은 시간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 일본은 병력과 장비를 끌어모아 베이징과 톈진에 이어 상하이, 난징을 점령하고 광둥과 산시에 이르는 남북 10개 성(省)과 주요 도시의 대부분을 점령했지만, 상황은 일본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국민당과 공산당으로 갈라져 있던 중국이 힘을 합쳐 맞서니, 일본은 중국의 저항에 부딪혀 더는 나아가지 못하는 상황에 이른다. 그러던 중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중일전쟁은 미국이 참전하는 전쟁으로까지 확전됐다.

한편 1929년 미국에서 촉발된 경제 대공황은 1933년 말까지 거의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에 영향을 미쳤는데, 그 여파는 1939년까지 지속됐다. 전쟁 중이던 일본 역시 대공황의 여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대공황의 파고는 조선을 통치하던 조선총독부에도 밀려들었다.

남산 지역에 있던 조선 총독의 관저는 고종 당시인 1885년 일본공사관용으로 건립됐는데, 건물이 낡고 비가 새 일본은 이를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이동 거리, 상권의 이동 등 여러가지 상황을 고려해 총독의 관저는 1930년대 중반 현재의 청와대 자리인 경무대로의 이전이 확정됐다. 이를 기점으로 일제의 사정은 급속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1937년 3월 착공한 총독 관저 공사는 이듬해인 1938년 6월 상량식까지 끝마쳤음에도 같은 해 7월 미나미 총독은 돌연 공사 중지 명령을 내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당시의 상황을 [조선일보]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비상시국을 극복하려고 군용품의 충족과 물자의 공급뿐 아니라 전시 국민경제의 철저한 강화에 힘쓰고 있는 총독부에서는 솔선해 이를 실시하고 국책에 순응해 금년도 실행 예산도 감축을 실시하는데, 6일에 열린 국장회의에서 미나미 총독은 돌연히 현재 공사를 하는 총독부 뒤 신무문 밖에 신축 중인 총독 관저의 건축공사를 중지하라고 엄명했다.”([조선일보] 1938년 7월 8일)

다시 말해 1938년은 비상시국이었다는 뜻이다. 1937년 7월 시작된 중일전쟁에서 일본은 초반부터 파죽지세로 중국군을 격파하면서 많은 도시를 점령했다. 이듬해인 1938년 4월 1일에는 국가총동원법을 선포해 더욱 병력을 증강했는데, 1938년 8월 중국에 주둔 중인 일본의 병력이 자그마치 80만명에 달했다. 그러나 전선이 너무 넓어진 탓에 일본은 인원 동원과 물자 부족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전쟁이 길어질수록 전비 지출도 눈덩이처럼 커졌다. 국가총동원법은 전시 또는 전쟁에 준하는 사변의 경우 국가의 모든 힘을 가장 유효하게 발휘할 수 있도록 인적·물적 자원의 총동원을 위해 제정·공포한 전시통제의 기본법이다. 1938년 5월 5일부로 시행되기 시작한 국가총동원법은 총동원 업무의 구체적 내용을 칙령에 위임한다고 하고 있다. 따라서 정부는 필요하면 칙령에 의해 국민을 징용할 수 있고 물자를 징발할 수 있다. 이는 일본 본토뿐 아니라 총독부 치하의 조선과 대만, 만주국에도 동일하게 적용됐다.

1936년 8월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 총독 역시 이러한 전후 사정을 잘 알고 있어 공사중지 명령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상량식까지 마친 공사이기에 마냥 놔둘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1939년 4월 공사는 재개됐고, 9월 20일에는 낙성식까지 마쳐 경무대 총독 관저 시대가 열렸다.

미나미 총독의 ‘내선일체’ 치밀한 계산


▎1936년 8월 5일 제7대 조선총독에 오른 미나미 지로(왼쪽). 오른쪽 양복 차림의 인물이 조선 정무총감이었던 오노 로쿠이치로다.
당시의 어려운 여건은 경무대 총독 관저의 건립 공사뿐 아니라 총독부가 추진하던 많은 공사를 중지·지연되게 했다. 이러한 상황은 ‘관공청 관계제공사(官公廳關係諸工事)에 우울(憂鬱)! 중지(中止)의 대선풍(大旋風)’ 제하의 [조선일보]1938년 7월 9일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시정 25년 기념 종합박물관, 전매국 청사, 평남도청 청사를 비롯해 각 학교와 시험장 등이 물자 절약 계획에 따라 줄줄이 연기됐다.

“획기적 물자 총동원 계획에 따라 조선 내의 물자 절약 계획은 오노 로쿠이치로(大野緑一郎) 정무총감의 귀임과 함께 급속히 구체화해 방금 재무국이 중심이 돼 각 반의 사업에 대해 예의 검토를 하고 있다. 그중에도 방금 공사를 진행하는 총독부 관계 건축물에 대해서는 솔선해 모범을 보이기로 해 총독의 신 관저 공사 중지를 비롯해 벌써 기초공사에 착수한 시정 25년 기념 종합박물관(공비 40만원)의 중지는 거의 결정적이고, 전매국 청사(20만원), 평남도청 청사(35만원)와 이 밖에도 각 학교, 시험장 등 공비의 대소를 불문하고 물자수급과 공사 진행 상황에 의한 준공이 아직 먼 것에 대해 전반적으로 철저한 자재의 소비절약 단행의 방침이다.”([조선일보] 1938년 7월 8일)

하지만 각 건물에 대한 공사는 1939년 6월 재개됐다. 당초 중지할 때는 중국과의 전쟁이 곧 종료될 것이라는 계산 하에 전시 동원에 집중하려 한 것이었는데, 전쟁이 예상보다 길어지다 보니 기본 체제를 정비하는 것이 향후 비상시국을 대비하는데 보다 효율적이라는 방침이 섰기 때문이다.

이는 만주국의 일본 대사 겸 관동군 사령관을 역임 후 예편한 상태에서 부임한 미나미 총독의 치밀한 계산도 깔려 있었다. 조선군 사령관을 역임했던 경험도 있었던 그는 부임 후 ‘조선과 만주는 하나다’라는 선만일여(鮮滿一如)를 표어로 내걸고,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다’라는 내선일체(內鮮一體) 사상을 강조하며 일본-조선-만주를 연결하는 블록 경제를 계획하고 있었다. 일본과 만주 사이에 위치한 조선은 금·철·석탄·전력 등과 각종 농산물이 풍부해 일본의 대륙 진출을 위한 병참기지로서의 필요충분조건을 갖추고 있었음도 미나미 총독은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를 위한 조선 사회 전반의 인프라 구축은 필수였기에 전매국 신청사를 비롯해 평남도청·대전지방법원 신청사 등 관공서의 신축공사, 경성과 공주의 여자사범학교·광주사범·함흥사범 등도 일제히 공사를 재개했다.

그는 전쟁에 투입할 인력 동원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1938년에 들어서면서 17세 이상의 남자를 대상으로 6개월간의 훈련 후 육군 보병으로 조선 사단에 배치하는 ‘현역 지원병 제도’를 칙령으로 공포했으며, 전시 상황이 악화함에 따라 1939년 5월에는 ‘국민징용령’을 공포했다. 그러나 조선 청년을 전쟁에 투입하기 위해서는 대중적 기반 확보라는 사전 정지작업이 필요했다. 그 일환으로 탄생한 조직이 조선연합청년단이다. 조선연합청년단은 기존의 청년단 조직을 기반으로 지방 단위 연합단을 결성하고 교육활동을 통해 조직의 활성화 및 본격적 활동을 준비하다가 중앙조직인 조선연합청년단으로 일원화했다.

대일항쟁기 춘분과 추분은 각각 춘계황령제(春季皇靈祭), 추계황령제(秋季皇靈祭)라는 이름의 공휴일이었다. 일본에서는 24절기 중 추분과 춘분을 공휴일로 지정하는데, 추계황령제는 옛 선조를 위해 제사를 지내고 성묘를 가는 날이다. 15만 조선 청년을 대표하는 조선연합청년단 결성식이 추계황령제 즈음한 1938년 9월 24일 오전 9시 경성운동장(옛 서울운동장)에서 열렸다. 그리고 그동안 추진해 왔던 일본연합청년단 가맹이 결성식을 기점으로 가능하게 됐다. 그 전에는 대일본연합청년단에 가맹돼 있지 않았던 탓으로 명치신궁체육대회(明治神宮體育大會)의 청년단 경기에 조선청년단 대표선수가 출전할 수 없었으나, 이 이후부터는 참가가 가능하도록 했다. 이는 조선 청년들에게 내선일체 의식을 주도면밀하게 주입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중일전쟁 발발 이후 조선인을 전시에 동원하기 위해 추진한 제도적 방법으로 황국신민서사의 제정, 조선인지원병제도를 포함하는 육군특별지원병령의 공포, 국가총동원법의 확대 시행,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회 등이 있었는데, 조선연합청년단의 결성 또한 이와 맥을 같이 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조선연합청년단은 1939년 2월 16일 대일본연합청년단에 정식으로 가입 수속을 완료했다. 이로써 ‘대일본연합청년단 제15회 대회’는 1939년 가을 경성에서 열기로 결정됐다.

전쟁 투입 염두에 두고 만든 조선연합청년단도 결성


▎석공 스즈키 긴지로가 인왕산 병풍바위에 새긴 ‘동아청년단결’(바위 맨 오른쪽 글씨).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1939년 9월 16일과 17일 양일간에 걸쳐 5000여 명으로 구성된 대일본연합청년단 제15회 대회는 경성 부민관에서 옥내행사, 경성운동장에서 옥외행사를 가진 후 남산의 조선 신궁에 참배하는 일정이었다. 행사 말미에는 인왕산 위에서 기념비 건립 기공식을 열기로 했다. 1939년 9월 2일 자 [조선일보] ‘동아친화(東亞親和)는 청년(靑年)의 힘으로!’라는 제하의 기사에는 “9월 17일 오후 3시 인왕산에서 일만지몽강청년대표급관계(日滿支蒙疆靑年代表及關係) 역원(役員)이 참렬시행(參列施行)”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일만지몽강’이란 일본·만주·중국·몽골을 의미한다. 제15회 대회에는 일본·중국·만주·몽골·대만 등지의 청년단원과 청년대표도 참석했다. 이들이 인왕산에 모여 병풍바위 암벽에 ‘각자’(刻字)했다. 그렇다면 어떤 글씨를 새겼을까? 이에 관해서는 1939년 4월 11일 자 [동아일보] ‘일만지청년대회(日滿支靑年大會) 경성 성벽(京城城壁)에 기념비(記念碑)’ 제하의 기사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기사 말미에는 “경성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적당한 장소에 대비석(大碑石)을 세워 본대회의 역사적 사명을 영구히 기념할 터”라고 기록하고 있다. 경성 성벽 중 경성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다시 말해 경성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장소에 큰 비석을 세울 계획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러 곳이 비석을 세울 후보지로 검토됐으며, 그중 인왕산 병풍바위 암벽이 최종 선정됐다. 경성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고, 경성부민들이 경건한 마음으로 올려다볼 수 있는 곳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새겨질 문구로는 ▷흥아청년결맹기념(興亞靑年結盟記念) ▷일만지청년결맹기념(日滿支靑年結盟記念) ▷신동아/흥아(新東亞/興亞) 건설(建設) ▷광명(光明)은 동방(東方)으로부터 ▷분기(奮起)하라 동아청년(東亞靑年) 등 5가지가 물망에 올랐다고 1939년 9월 16일 자 [매일신보]는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최종 확정된 문구는 미나미 총독이 직접 쓴 ‘동아청년단결’이었다. 행사 첫날인 9월 16일, 인왕산 현지에서 거행된 기공식에서 글씨를 새기는 목적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대일본연합청년단 대회, 경성 개최 기념 글씨 새겨


▎1939년 9월 17일 미나미 지로 제7대 조선총독이 직접 쓴 ‘동아청년단결’ 각자(刻字) 기공식 관련 기사. / 사진:매일신보
“이 기념문자는 인왕산 허리의 높이 39메돌(m), 넓이 40메돌 되는 큰 바위에다 사방이 아홉 자 되는 ‘동아청년단결’의 여섯 자를 새기기로 한 것이며, (중략) 이 기념문자로 신동아의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데 몸과 마음을 바치는 상징이 되게 하며 이 글씨를 생각함으로써 동아의 오족(族)을 대표한 청년들은 더욱 단결을 굳게 할 것을 맹세하기로 한 것이다”([매일신보] 1939년 9월 17일)

다시 말해 일본을 비롯한 조선·만주·중국·몽골의 청년들이 단결해 전쟁을 치러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데 몸과 마음을 바칠 것을 맹세한다는 다짐을 바위에 새겨 놓겠다는 의미였다.

이와 관련해 1940년 4월 15일 자 농림국 임정과 소인이 찍힌 ‘국유임야 내 시설사항에 관한 건’ 문서에는 인왕산에 글씨를 새기기 위해 시오바라 토키사부로 조선연합청년단장이 1939년 9월 25일 경성영림서장 앞으로 보낸 계획서가 첨부돼 있다. ‘인왕산 기념문자 조각의 건(仁旺山ニ記念文字彫刻ノ件)’이라는 제목의 계획서 내용을 살펴보면 글씨의 크기나 배치뿐 아니라 인왕산 병풍바위로 위치를 정한 이유 등도 어느 정도 추론할 수 있다. 단장인 시오바라 토키사부로는 당시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이었다.

계획서에 의하면 ‘동아청년단결’은 가장 큰 글씨로 1자당 사방 17척(1척은 30.303㎝) 크기로 한다고 돼 있다. 그러면서 이는 총독부 청사 후정에서 항상 명료하게 글씨 인식이 가능해야 하며, 암반의 방위 관계상 광화문통 효자정이나 청운정 방면에서는 ‘부분적으로 식별이 가능해야(望見) 한다’고 조건을 달았다. 총독부 청사 앞 광장에서 인왕산까지 약 2000 미(米), 즉 2㎞ 정도 된다고 하고 있으므로, 글씨를 가로·세로 각각 5m 조금 넘는 크기로 새긴다면 총독부 청사에서 식별이 가능하다고 계산한 것이다.

같은 문서에 별지로 붙어있는 문자 배치도에 의하면, 오른쪽부터 첫째 열 ‘동아청년단결’은 17척 사방, 둘째 열 ‘황기 이천오백구십구년 구월십육일(皇紀二千五白九十九年 九月 十六日)’은 6척 사방, 셋째 열 ‘조선총독 남차랑 서(朝鮮總督南次郞書)’는 10척 사방, 그리고 거리를 띄워 ‘명기’(銘記) 부분을 비워놓았으며, 마지막 줄에는 조선연합청년단장이자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인 시오바라 토키사부로의 직책과 이름을 새기는 것으로 돼 있다. 명기는 마음에 새기거나 기억으로 남길 내용을 의미한다.

글씨를 새기는 작업은 1940년 3월 15일부터 시작해 10월 31일 끝마치는 것으로 계획됐다. 다만 실제 작업 시작은 글씨를 새길 당사자인 석공 스즈키 긴지로 금강번영회 이사의 개인 사정으로 며칠 연기된 것으로 보인다. 1940년 6월 28일자 [매일신보] ‘성구 동아청년단결 탁마불식 태반 조각’ 제하의 기사에 따르면 ‘동아청년단결’이라는 글씨는 사방 12자 크기이고, 현재 ‘동아청년’의 4자와 ‘황기 이천오백구십구년 구월 십육일’의 15자, 그리고 ‘조선총독’의 4자만 깊이 5치(약 15㎝)로 완성됐는데 나머지 ‘단결’과 ‘남차랑’의 5글씨도 완성될 것이라 하고 있다. 즉 첫째 열과 둘째 열에 새기기로 한 글씨들은 3개월이 지난 6월 말 기준 약 80% 정도 진척됐으며, 작업 단계에서 글씨의 크기가 계획보다 축소되는 등 약간의 변동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당시의 사진들을 유리원판으로 소장하고 있다. 유리원판목록집Ⅴ ‘한성 종로 인왕산 암반 훼손 광경’이라는 제목의 사진을 보면 계획서의 배치대로 글씨들이 거의 새겨졌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계획서상에 명기라고 표시해 놓았던 부분에도 대회 개최 사실과 기념 각자를 남기는 이유 등을 1열 당 28글씨씩 4열, 총 112자를 작은 글씨로 새겨 놓았다.

1962년 이후 왜색 지우기 일환으로 글씨 지워져


▎시오바라 토키사부로 조선연합청년단장이 1939년 9월 25일부 경성영림서장 앞으로 보낸 계획서에는 기념문자의 크기와 배치, 각자할 장소를 설명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 사진:국가기록원
현재 이 글씨들은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뭉개져 있다. 필자가 2006년 9월 2000㎜ 망원렌즈를 이용해 촬영해도 식별할 수 있는 글씨는 거의 없었다. 다만 작은 글씨 중 첫 부분의 ‘소화14’(昭和十四)라는 글씨와 끝부분의 ‘조선총독부 학무국’(朝鮮總督府 學務局) 정도만 어렴풋이나마 알아볼 수 있었다. 과연 언제, 어떤 경위로 이렇게 됐을까?

이와 관련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1950년 2월 25일 자 [조선일보] ‘82만원의 왜색소탕(倭色掃蕩), 인왕산의 미나미 총독 글 삭제(削除)’ 제하의 기사에 따르면 “일제가 인왕산 절벽 암반 위에 새겨놓은 글을 82만원 들여 삭제하는 공사를 추진 중인데 3월 말까지는 끝날 것”이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글씨를 삭제하는 공사는 이 당시 진행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월탄 박종화 선생이 1962년 6월 26일 자 [조선일보]에 기고한 ‘인왕산(仁旺山)의 추흔(醜痕)’ 제하의 기사 내용에 따르면 “일인 총독(日人總督) 미나미 총독은 인왕산 높고 높은 절벽에다가 (중략) 팔굉일우(八紘一宇)라는 큰 글씨와 미나미 총독의 꼴 같지 않은 성명 삼자(姓名三字)를 각자(刻字)해 (중략) 오늘날 이 각자는 의연히 남아 있다”라고 하고 있다. ‘팔굉일우’란 ‘온 천하가 한집안’이라는 뜻으로 일제가 침략 전쟁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건 구호다. 다만 인왕산에 새겨진 큰 글씨가 박종화 선생의 주장처럼 ‘팔굉일우’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광복 이후 왜색 지우기는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는 “상인들의 자진 정리를 이번 마지막으로 바라니 이달 말까지 고쳐주기를 바라며 만약 이달이 지나도록 이것을 이행치 못하는 경우에는 단호히 단속하겠다”는 [동아일보] 1950년 3월 14일 자 ‘왜색간판 말소 이달 말까지’ 제하의 기사를 통해서도 가늠할 수 있다. 왜색 지우기는 1970년대 들어서도 계속되고 있었으며 문민정부 당시인 1995년 8월 15일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한 것 또한 이러한 과정의 일환이었다. 어쨌든 인왕산에 새겨졌던 이 글씨들도 1962년 이후 언제인가 정부 또는 민간에 의해 삭제됐을 것이다.

‘동아청년단결!’ 인왕산 병풍바위에 보란 듯이 새겨놓았던 이 구호는 일제가 조선의 청년들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노림수였다. 일제가 패망한 지 어느덧 77년이 지나고 있다. 영원히 남겨놓겠다며 인왕산 병풍바위에 깊이 새겨놓은 글씨들은 이미 뭉개져 제대로 알아볼 수 없다. 하지만 일제 치하 36년간의 폐해로 인한 후유증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2021년 9월 대한민국 법원은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낸 전범 기업 미쓰비시 중공업의 상표권·특허권에 대한 매각 명령 신청을 받아들임으로써 일본 제국주의가 당시 저질렀던 행위에 대한 책임이 현재까지도 진행형임을 알려주고 있다.

※ 이성우 - 전 청와대 안전본부장.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용인대에서 경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대통령경호실에서 25년간 근무했다. 2007년 발간된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대표 저자이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같은 해 ‘대한민국문화유산상’ 문화재청장 감사패를 받았다. 현재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개정판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111호 (2021.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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