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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사랑으로 재해석한 한국사(20)] 왜란·호란으로 생이별 수난, 조선 민초들 극복사 

홍도야 울지 마라, 노예가 된 아내 찾아 삼만리 

유몽인의 [어우야담] 일화에는 인신매매 등 전란의 비극 생생
가문·체면 따지는 양반들 돌아온 아내 ‘속환녀’들과 이혼 비정


▎'동래읍성역사축제’ 참가자들이 임진왜란(1592~1598) 당시 첫 전투지였던 동래읍성 전투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
달밤에 흐르는 퉁소 소리에 정생(鄭生)은 등에 소름이 돋아 귀를 쫑긋 세웠다. 그 애처로운 가락에 잃어버린 아내의 한숨이 배어 있는 것 같았다. 부인을 찾아 이역만리 중국 대륙을 헤매고 다녔다. 절강(浙江) 가는 배 위에서 그리운 퉁소 가락을 들을 줄이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남편은 알아차렸다. 홍도(紅桃), 그의 아내였다.

정생과 홍도 부부의 기이한 일화는 유몽인이 편찬한 [어우야담]에 실려 있다. 유몽인은 선조~광해군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대사간·이조참판에 올랐지만, 사대부 정권과 불화했다. 조정에서 물러난 당대의 문장가는 자유롭고 독창적인 필치로 임진왜란 전후 백성들의 삶을 그려냈다. 개중에 아내를 찾아 헤맨 남편의 이야기가 자못 흥미롭다.

정생은 남원 사람으로 호탕한 남자였다. 마을 처녀 홍도와 결혼해 아들 몽석을 낳았다. 이들 부부는 금실이 좋았다. 정생은 원래 퉁소를 잘 불고 노래도 꽤 하는 편이었다. 그는 아내에게 퉁소를 가르치고 그녀의 가락에 맞춰 노래로 화답하곤 했다. 부부의 소리는 화목하게 어우러졌다.

두 사람이 생이별한 것은 정유년(1597년)의 일이었다. 임진왜란이 강화 협상으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불붙은 해다. 왜적은 조선을 다시 침략해 남원성을 포위하고 맹공을 퍼부었다. 정생은 활 쏘는 군인이 돼 적들을 막았다. 홍도 또한 남몰래 남자 복장을 하고 군영에서 지냈다. 아들 몽석은 할아버지가 데리고 지리산에 들어갔다.

조명연합군과 남원 백성들의 항전에도 불구하고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명나라 장수 양원이 탈출하자 정생은 경황없이 따라나섰다. 아수라장이었다. 왜적이 사방에서 쏟아져 들어왔다. 성에서 빠져나오기는 했으나 그만 홍도와 헤어졌다. 그는 어쩔 줄 몰라 길에 주저앉았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어버린 것이다.

정생은 미친 듯이 홍도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양원의 부대가 명나라로 돌아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부대에서 인상착의가 비슷한 조선 사람을 봤다고 누군가 알려줬다. 부랴부랴 중국으로 건너갔다. 명군(明軍)이 출병한 절강은 머나먼 곳이었다. 그는 혹독한 굶주림과 피로에도 아내를 포기하지 않고 뚜벅뚜벅 나아갔다.

조선에서 온 이방인의 사연에 중국인들도 감복했다. 지위 높은 도사가 정생을 절강 가는 배에 태워줬다. 바로 그 배 위에서 홍도의 퉁소 소리를 들은 것이다. 구슬픈 가락은 지나가는 장삿배에서 흘러나왔다. 밤안개에 가려 보이진 않지만 분명했다. 아내가 아니라면 불 수 없는 곡조였다. 정생은 얼른 작은 배에서 내려 그리 가려고 했다.

도사가 말렸다. “아무래도 남만(南蠻)의 장삿배 같소. 왜인들도 타고 있을지 모르오. 조선 사람이 무작정 갔다가는 필시 변을 당할 터이니 이 일은 나한테 맡기시구려.”

비극 속에서 탄생한 극적인 부부 이야기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을 지키다 순절한 지사들의 무덤인 만인의총(萬人義塚).
이튿날 아침 그는 은자(銀子)를 챙겨 간밤의 배를 찾아갔다. 장사꾼들은 수십 냥을 받고 퉁소 분 자를 내줬다. 아니나 다를까 홍도였다. 정생이 오매불망 찾아 헤맨 아내였다. 두 사람은 깜짝 놀라 서로 부둥켜안았다. 꾹꾹 눌러둔 그리움이 터져 나왔다. 둑이 무너진 듯 북받쳐서 목놓아 울었다. 극적인 부부 상봉이다. 믿기지 않는 재결합이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그녀는 어째서 남만의 장삿배에 타게 됐는가? [어우야담]에서는 왜적에게 포로로 잡혀 일본에 끌려간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왜인들이 홍도가 남장 여인임을 알아보지 못하고 남만의 장삿배에 노예로 판 것이다.

이쯤에서 시대 배경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겠다. 역사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일화인지 살펴보자는 말이다. 남원전투는 1597년 추석에 조명연합군과 일본군이 남원읍성에서 벌인 일대 공방전이었다. 명나라와의 강화협상이 결렬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서부 다이묘(大名)들에게 동원령을 내렸다. 그해 1월 일본군 14만 병력이 대대적으로 조선을 범했다. 저들은 7월 15일 칠천량에서 원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을 궤멸하고 성난 파도처럼 남원으로 몰려들었다.

남원은 예로부터 왜적이 표적으로 삼은 요충지였다. 서쪽으로는 전라도 곡창지대가 펼쳐지고, 동쪽은 지리산 너머 경상도를 넘나든다. 섬진강을 따라 바다와 통하니 일본을 오가는 물길도 수월하다. 군사·경제·교통 등 여러모로 이점이 많은 곳이다. 적들이 보기에 내륙의 침략 기지로 탐나는 고장이었다.

1380년 아지발도가 거느린 왜구 정예병력이 남원을 공략한 것도 그래서다. 그들을 황산에서 격파한 고려 장수가 이성계다. 그는 남원 땅에서 구국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덕분에 정계 요직에 진출하고 지지 세력을 모았다. 결국 이성계는 이곳에서 왜적을 섬멸해 조선 건국의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그러나 1597년의 공방전은 비극적인 결말로 치달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초기에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해서 자신의 전략이 망가졌다고 봤다.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정유년에는 남원을 먼저 공략했다. 남해에 상륙해 섬진강을 거슬러 온 좌군과 경상도를 가로질러 지리산을 넘은 우군이 여기서 합류하기로 했다. 남원에 대군을 집결시켜 호남을 장악하고 한양으로 북진할 계획이었다.

조명연합군도 알아차렸다. 조선군은 남원 서북쪽의 교룡산성에서 왜적을 맞고자 했다. 전쟁에서 대군의 공격을 소수로 방어하려면 험난한 지형과 튼튼한 요새에 기대는 것이 순리였다. 하지만 명나라 부총병 양원이 반대했다. 요동 벌판에서 기병을 이끌던 장수다. 산보다는 들에서 싸워야 공을 세울 수 있다고 믿었다. 지휘권을 가진 그는 천혜의 요새 교룡산성을 버리고 평야에 증축한 남원읍성에 들어갔다.

8월 13일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이끄는 좌군(수군포함) 5만여 명이 남원읍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했다. 성은 부총병 양원과 전라병사 이복남 등이 지키고 있었다. 병력은 명군 3000명과 조선군 1000명이었다. 5만 대 4000이라니 중과부적이었다. 조명연합군의 군세가 턱없이 모자라성에 남은 백성들이 힘을 보태야 했다.

일본군은 조총을 쏘아대며 사방에서 조여왔다. 조명연합군은 화력이 센 포와 총통으로 맞섰다. 백성들이 파둔 참호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이튿날 일본군은 개미 떼처럼 달려들어 성 주위의 참호를 메우고 성벽보다 높은 망루들을 세웠다. 8월 15일 성을 둘러싼 망루에서 저들의 파상 공세가 펼쳐졌다. 위에서 아래로 총알과 화살을 소나기처럼 퍼부었다. 명군이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남문·서문·동문이 뚫리고 말았다.

‘해적 상인’에 노예로 팔려간 아내 구출


▎병자호란 이후 궁중 모습을 그린 JTBC 드라마 [궁중 잔혹사-꽃들의 전쟁].
악몽의 추석이었다. 일본군이 성안으로 쏟아져 들어와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둘렀다. 명나라 부총병 양원은 수하들만 데리고 성을 탈출했다. 지휘관이 도망치자 명군은 우왕좌왕하다가 적의 칼에 쓰러졌다. 조선군과 백성들은 북문 쪽에 집결해 최후 항전에 나섰다.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활로를 뚫지는 못했다. 왜적이 이중삼중으로 에워쌌기 때문이다. 결국 남원읍성은 도합 1만여 명의 전사자와 희생자를 남긴 채 8월 16일 함락됐다.

성에 쌓인 시신들은 북문 밖 구덩이에 묻혀 먼 훗날 만인의총(萬人義塚)으로 기려지게 된다. 물론 [어우야담]의 정생과 홍도 부부처럼 그 아수라장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이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정생은 양원이 탈출할 때 함께 성에서 벗어났다고 했다. 때마침 부총병과 수하들의 곁에 있다가 얼떨결에 따라갔다면 운 좋게 목숨을 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홍도처럼 적에 사로잡혀 해외에 노예로 팔릴 가능성은 더욱 높았다.

임진왜란 기간(1592~1598년) 왜적에 납치된 조선인은 10만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1597년의 재침 이후 그 수가 많이 늘어났다. 일본은 피랍 조선인들을 영주와 무사들에게 전리품으로 분배하고 각지에 보내 성을 쌓거나 도로를 닦는 부역에 종사시켰다. 그 실상은 일본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이들의 기록에 생생하게 담겨 있다.

“수천 척의 왜선이 바다와 항구에 가득 찼다. 승선자 중 반수 이상이 우리나라 남녀인데 서로 뒤섞였다. 울음소리가 하늘에 사무쳐 바다가 흐느끼는 것 같았다.”(강항, [간양록])

“(도쿠시마성 주변에 구류됐을 때) 다리 위에서 열 사람을 만나면 열에 아홉은 다 조선인이었다. 한숨지으며 울부짖다가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정희득, [월봉해상록])

피랍자 가운데는 해외에 노예로 팔려간 사람도 많았다. [어우야담]의 홍도는 남만 장삿배에 팔린 노예라고 볼 수 있다. 그녀의 처지는 자못 궁금증을 자아낸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 인신매매는 어떻게 이뤄졌을까? 또 노예무역에 종사한 상인은 누구이고, 남만 장삿배의 정체는 무엇일까?

“일본에서 상인들이 들어왔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포로들의 목을 새끼줄로 묶어 끌고 갔다. 걷지 못하면 뒤에서 몽둥이를 들고 쫓아가 두들겨 팼다. 마치 지옥의 옥졸이 죄인을 다루는 것 같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일본 측 종군 승려 게이넨이 [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에 쓴 목격담이다. 정유재란 때 조선에 건너온 그는 왜적이 살육하고 불태우고 약탈하는 아비규환의 참상을 담담하게 기록했다. 일본에서 들어온 노예상인들이 피랍 조선인들을 짐승 취급하며 끌고 가는 광경도 묘사했다. 노예가 된 이들은 오늘날의 나가사키현 등지로 끌려갔다.

나가사키현 북부 히라도섬과 마쓰우라는 13~14세기에 고려를 노략질한 왜구의 본거지였다. 16세기에 이르면 이곳으로 중국 장삿배들이 드나든다. 명나라 조정에서 외국과의 민간무역을 금지하자 밀무역과 약탈을 일삼은 자들이다. 그들은 절강·복건(福建) 등 중국 동남 연안을 주름잡았다. 말이 장삿배지 사실상 해적이나 다름없었다.

명나라 조정의 감시와 추적이 심해지자 그중 일부가 일본 규슈에 근거지를 마련했다. 왕직, 서해와 같은 중국인 해적왕들이었다. 규슈 다이묘들은 전비 마련을 위해 그들을 후원하고 밀무역과 약탈의 수입을 나눠 가졌다. 히라도번이 대표적이었다. 훗날 명나라 수복 운동을 벌인 정성공도 여기서 중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소생으로 태어났다.

이들 ‘해적 상인’의 고객은 동남아를 장악하고 있던 포르투갈·스페인·네덜란드 무역상들이었다. 해적 상인들은 비단·도자기 등 고객이 원하는 상품이라면 무엇이든 취급했다. 인신매매도 빼놓을 수 없었다. 당시 유럽인들은 서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신대륙에 내다 파는 노예무역으로 재미를 톡톡히 보고 있었다.

조선인 노예 40명, 겨우 조총 한 자루 가격에 팔려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제작된 영화 [최종병기 활]의 주인공을 맡은 박해일(남이 역).
임진왜란이 터지자 싸고 근면한 조선인 노예들이 쏟아져 나왔다. [조선일일기]에서 일본 승려 게이넨이 본 ‘지옥의 옥졸’은 그 해적 상인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조선인 피랍자들을 끌고 가 히라도섬 등지에서 노예로 팔았다. 포르투갈 노예상들이 큰손이었다. 공급이 넘치는 바람에 마카오 노예시장의 시세가 예년의 6분의 1 수준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수많은 조선 사람이 베트남으로, 태국으로, 인도로, 유럽으로 팔려나갔다.

가격은 헐값이었다. 이탈리아 상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는 [나의 세계 일주기]에 “조선인 노예 5명을 12에스쿠도(포르투갈 화폐 단위)에 샀다”고 썼다. 당시 흑인 노예 1명의 가격이 100에스쿠도였다. 조총 한 자루로 조선인 노예 40명을 살 수 있었다. 홍도 역시 헐값으로 남만 장삿배에 팔렸을 것이다. 중국인과 일본인으로 이뤄진 해적 상인들의 배라고 봐도 무방하다. 노예가 된 사람을 구출하려면 몸값을 치러야 한다. 정생과 달리 도사는 그걸 알고 있었다.

전란이 일어나면 ‘인간시장’이 호황을 누린다. 어디 임진왜란만 그랬던가. 1636~1637년 병자호란 때는 더했다. 조선을 짓밟은 청나라 군사들은 특히 여자 포로들을 사로잡는데 혈안이 됐다. 몸값을 많이 챙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1637년 1월 세자빈과 원자, 그리고 명문 양반가들이 피난 간 강화도가 청군에 함락됐다. 지체 높은 여성들은 오랑캐에게 잡혀가느냐 스스로 목숨을 끊느냐, 갈림길에 섰다. 자의반타의 반 자결을 택한 여인이 많았다. 나무에 목을 맸고, 칼로 가슴을 찔렀고, 바다에 몸을 던졌다. 양반 남성들은 아내와 어머니, 딸과 며느리에게 자결을 독촉하기도 했다. 정절을 더럽혀 가문에 오점을 남기지 말라는 것이었다.

사대부집 자제들, 돌아온 아내와 이혼


▎정숙하지 못한 여자라는 의미의 화냥년은 병자호란 등 전쟁 때 적들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자를 일컫는 말 환향녀(還鄕女)에서 비롯됐다. 한국 창작 가극단의 [환향녀] 공연 장면.
하지만 사람이 생목숨 끊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강화도를 비롯해 조선 각지에서 여자들이 포로가 돼 심양(瀋陽)으로 끌려갔다. 청군은 일부 여성들을 첩으로 삼기도 했지만 대부분 몸값을 받고 팔았다. 포로들을 성문밖에 모아 공개적으로 인신매매했다. 조선의 가족들은 거금을 내고 여인들을 찾아왔다. 이를 ‘속환(贖還)’이라고 불렀다.

조선은 청나라와 교섭을 벌여 포로 몸값을 은 25냥 내외로 정했다. 이 가격은 어디까지나 액면가일 뿐 실제로는 250냥에 달했다. 고관들이 남몰래 뒤로 빼내려다 몸값을 키운 것이다. 청나라 장수 용골대나 통역관 정명수 등에게 1000냥이 넘는 거금을 뇌물로 바쳤다고 한다. 덩달아 속환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애먼 사람들만 발을 동동 굴려야 했다.

몸값을 내고 돌아와도 문제였다. 양반가 속환녀들은 정절을 잃은 것으로 간주해 강제이혼에 직면했다. 인조의 사돈인 신풍부원군 장유가 예조에 단자를 올렸다. “외아들 장선징의 처가 강화도 함락 때 잡혀갔는데 지금은 속환돼 친정에 가 있습니다. 아들의 배필로서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할 수 없으니, 이혼하고 새로 장가들 수 있도록 허락해주소서.”([인조실록] 1638년 3월 11일)

장유는 예론을 집대성한 김장생의 문인이었다. 속환녀들이 하나둘 돌아오자 강경한 예론이 고개를 들었다. 속환된 아내는 정절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남편과 시가에 대한 의리가 끊어졌다고 본 것이다. 예론상 이혼이 성립된다. 친정 부모 입장에서는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전 승지 한이겸은 딸이 잡혀갔다가 풀려났는데 사위가 다시 장가를 가려고 한다며 징을 쳐서 임금에게 격쟁(擊錚)했다.

좌의정 최명길이 이혼을 반대하고 나섰다. “신이 심양에 갔을 때 속환하려고 따라가는 사족이 많았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부둥켜안고 통곡하기를 마치 저승에 있는 사람을 만난 듯이 했습니다. 만약 이혼을 허락한다면 속환을 원하는 사람이 사라질 것입니다. 이는 조선의 부녀자들을 영원히 이역의 귀신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소원을 이루고 백 집에서 원망을 품으니 화기가 상할까 우려됩니다.”([인조실록] 1638년 3월 11일)

그는 청나라와 교섭하기 위해 심양에 다녀온 바 있다. 마땅한 도리라도 전쟁의 급박한 상황에서는 달리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심양에 끌려가면서도 지조를 지키고자 목숨을 던진 부녀자들이 많았다. 속환됐다고 해서 무조건 절개를 잃었다고 매도할 수는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인조 임금도 아내를 함부로 버려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속환 아내를 둔 사대부 집 자제들은 이내 새장가를 들고, 다시 합치지 않았다. 예(禮) 또한 정(情)에서 나오는 것이다. 가풍과 체면을 우선시한 양반들과 달리 백성들은 부부의 정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겼다. 정생과 홍도 부부의 뒷이야기를 살펴보자.

부부의 끈 잡고 다시 일어선 백성들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에 자리한 녹동서원에는 임진왜란의 명장 김충선 장군의 위패와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 김충선은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출병했다가 투항한 일본 장수 사야가(沙也可)다.
절강 땅에서 재회한 두 사람은 거기 정착해 살았다. 둘째 아들 몽현을 낳아서 기르다가 눌러앉은 것이다. 몽현은 장성해 중국인 아내를 얻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정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언젠가 아버지가 전사한 곳을 찾아가 넋을 위로하고 제사를 올리기 위해 딸은 스스로 조선인에게 시집갔다.

세월이 흘러 정생도 북방으로 원정을 떠나게 됐다.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우고 남하를 개시하자 명나라가 군사를 일으킨 것이다. 1618년 요양총병관 유정의 부대에 배속된 그는 이듬해 심하전투에서 조선군과 함께 후금군에 맞서 싸웠다. 조선 장수 강홍립이 광해군의 밀명에 따라 후금에 항복하자 정생도 행보를 같이했다.

중국군으로 전쟁에 나간 그는 조선 사람으로 풀려났다. 고향 남원까지는 먼 길이었다. 이산현(논산)을 지나는데 다리에 종기가 나서 침놓는 의원을 찾아갔다. 중국인 의원은 놀랍게도 며느리의 아버지였다. 명나라 군대가 철수할 때 낙오돼 조선에 남은 것이다. 사돈임을 알게 된 두 사람은 동행이 돼 남원으로 갔다. 옛집에는 큰아들 몽석이 처자식을 건사하며 살고 있었다. 정생은 기쁘면서도 내심 울적했다. 절강에 두고 온 각시가 간절했다.

홍도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죽었다고 여겼다. 세상만사 무상해진 그녀는 고향에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작은 배를 세내어 일가족이 바다로 나섰다. 홍도와 몽현 부부는 하마터면 굶어 죽을 뻔했으나 천행으로 제주도 부근에서 통제사의 순찰선을 만났다. 표류한 사연을 들은 뱃사람들이 감동해 작은 배를 순천까지 끌어줬다. 고향 집에 당도한 홍도는 이게 꿈인가 생신가 했다. 거기 정생이 있었다. 젊은 날의 호탕한 낭군이 환히 웃고 있었다.

그 난리를 겪고 만릿길을 헤맸지만, 정생과 홍도는 두 번째로 재회했다. 온 가족이 무사히 상봉했다. 심지어 중국인 부녀까지…. 유몽인은 말한다. “기약 없는 만남이 바람과 파도 넘어 국경 밖에서 이뤄졌다”고.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 아닐 리 없다.

그것은 전쟁통의 백성들에게 이치로 헤아릴 수 없는 행운이며, 끝내 놓지 못하는 희망의 끈이었다. 전란이 일어나면 가장 고통스러운 게 힘없는 민초의 삶이다. 죽고 다치고 잃고 헤어지는 도탄의 구렁텅이에서 그들은 부부의 끈을 잡고 다시 일어섰다. 부부는 인륜의 시작이요, 만복의 근원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사람을 읽고 생각하고 쓰면서 역사의 행간을 채워나간다. 팟캐스트·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2015)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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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호 (2021.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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