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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의 ‘미(美)의 원점, 예(藝)의 기원, 술(術)의 원조를 찾아서’(8)] 인류 음식문화의 기원, 메소포타미아 

식탁에 새겨진 생존을 위한 투쟁의 DNA 

거친 자연에 맞선 인류의 담대한 도전의 DNA가 음식 역사에 깃들어
풍요로운 교통 요지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된 식문화가 세계로 전파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에게서 훔쳐 인간에게 전해준 불은 인류의 식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꿨다. 특히 건조한 메소포타미아는 숯불을 발명해 언제나 음식을 익혀 먹는 식문화의 요람 역할을 했다.
인간 유전자에 관련된 두 가지 얘기부터 시작하자. 먼저 청각, 즉 소리에 관한 부분이다. 유리창을 손톱으로 긁을 때 나오는 소음을 생각해보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움츠러든다. 전신에 소름이 돋아난다. 왜일까? 자연과학적으로 풀이하자면, ‘공룡 비명’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 동물학자에 따르면 손톱으로 긁는 유리창 소음이 공룡 비명과 비슷했을 것이라고 한다. 영화 [쥬라기 공원]에 나오는 공룡 비명을 연상하면 될 듯하다. 공룡 비명은 인간을 통째로 잡아먹을 때 발산하는 사형 선고에 해당한다. 공룡 비명=죽음이다.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형태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비참하게 사라진다.

흥미롭게도 지구인류학적 차원에서 볼 때 공룡과 인간이 공존한 적은 없다. 인간이 등장하기 6000만 년 전 이미 공룡이 멸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죽은 공룡 흔적들은 후대의 인간에게 전해진다. 인류의 출발은 정주 농업이 아닌, 야생 수렵생활에서 시작됐다. 동물을 사냥하는 과정에서 거꾸로 맹수에게 잡아먹히거나 사고로 죽는 경우도 많았다. 크기나 힘은 원시사회의 정의이자 순리다. 우연히 발견한 초대형 공룡 뼈, 거대한 발자국 하나만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실제 공룡이 내는 소리를 듣지는 않았지만, 흔적을 보면서 상상해낸 소리가 유리창 긁는 소음이었을 것이라고 인류학자들은 설명한다. 현실과 상상이 뒤섞인 얘기지만, 수백만 년 진화에도 불구하고 인간 유전자 어딘가에 깊이 새겨진다. 공룡에 대한 공포는 유리창 긁는 고주파 음을 통해 21세기 모바일 시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후각, 즉 냄새는 인간 유전자를 둘러싼 두 번째 이야기 소재다. 장작불은 10월부터 시작되는 가을철 지중해 풍경 중 하나다. 가을 저온으로 접어들면서 나무 타는 냄새가 지중해 주변에 퍼져나간다. 보통 어둠이 깔리는 저녁부터 장작불을 피운다. 집안을 따뜻하게 한 뒤 잠이 드는 식이다. 따라서 밤이 되면 나무 타는 냄새가 곳곳에 표류한다. 연말 이탈리아 여행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장작 타는 냄새는 겨울 유럽이 보여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매력 중 하나다. 필자가 아는 한 나무 타는 냄새를 싫어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시골 촌놈뿐만 아니라, 도시에서 자란 사람이라도 장작불 타는 냄새를 맡는 순간 그대로 빠져든다. ‘평화·안정·안전’의 향이랄까. 냄새를 통해 몸과 마음이 가라앉는다. 왜일까? 코를 자극하는 나무 타는 냄새가 어떻게 심신의 안정제로 둔갑할 수 있을까? 여러 각도에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인간 유전자 속 기억이 답 중 하나다.

유전자에 새겨진 소리, 냄새 그리고 맛


▎다양한 그릇은 다채로운 식문화를 반영한다. 이미 메소포타미아에서 기원전 1000년전에 사용한 와인과 음료수용 자기다. / 사진:유민호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인간과 불의 접점은 프로메테우스에서 시작된다. 흙으로 인간을 창조해낸 신이 프로메테우스다. 이어 제우스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전해준다. 신이 직접 내린 선물이기에 포유류 가운데 유일하게 인간만이 불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불은 조명뿐 아니라 인간의 삶 자체를 바꾼다. 바로 음식이다. 불을 활용한 맛있는 음식이 지구 전체에 확산된다. 프로메테우스의 불은 추운 겨울을 이기는 생명선인 동시에, 맛에 기초한 삶의 즐거움을 1000% 향상해준 계기가 된다.

만약 불이 없다면 잡은 동물을 그대로 잘라 생(生)으로 먹을 수밖에 없다. 소화도 안 되는 채소는 입에 대기도 어렵다. 불이 있었기에 먹을 수 있는 음식 종류도 대폭 확대된다. 장작 타는 냄새가 인간에게 ‘평화·안정·안전’으로 연결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아득한 그 옛날의 상황이지만, 불에 탄 나무 냄새 속에는 음식에 관한 기억이 배어있다. 다음 한 끼를 보장할 수 없었던 때가 원시시대다. 평화는 배가 부른 뒤부터 시작된다. ‘불=냄새=음식=생존=평화’인 셈이다. 아무리 엄청난 시간이 흐른다 해도 ‘불=냄새=음식=생존=평화’로 연결된 인간 유전자의 흔적은 그대로 남게 된다. 토스카나 지방 밤길에 접한 나무 타는 냄새는 이탈리아의 매력인 동시에 인간 스스로 축적해온 유전자의 재확인에 해당한다. 필자의 개인적 취향이지만, 고기나 피자 나아가 빵조차도 가능하면 숯불로 즐긴다. 맛도 남다르지만, 음식에 배인 나무 타는 냄새가 오감(五感) 속에 숨겨진 유전자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50대 초부터 원류·원형에 민감해졌다. 금수저-흙수저로 나눠진 상·하위 개념의 근본 찾기가 아니라 사물이나 현상의 원천이나 출발점에 관한 관심이다. 최초에 새겨진 유전자에 대한 관심이라고나 할까? 첫 단추를 알면 마지막 단추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다양성 퓨전’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무책임·무감각·무지’가 도를 넘어선 지 오래다. ‘세상의 중심은 나’가 대세인 것은 안다. 그러나 본인이나 주변 진영에서만 통하는 얘기를 세상의 상식으로 만들려는 ‘페이크’가 판을 치고 있다. ‘개량 한복’을 예로 들어보자. 이런저런 시도를 통해 수많은 개량 한복이 등장했다. 연예계 아이돌 무대에서부터 시민운동 현장에 이르기까지 개량 한복 열기였다. ‘민족성·기능성’이란 의미가 있다 해도 눈에 거슬린다. 일단 주변에 권하고 싶은 마음도, 본인 스스로 입고 싶은 마음도 전혀 안 생긴다. 색상도 화려하고 옷감도 최고급이라지만, 미적 감각이 한참 뒤떨어진다. 전통 역사의 이름으로 ‘거룩하게’ 찬미되지만, 눈으로만 봐도 입에 대기 싫은 음식으로 느껴진다.

개량 한복이란 말을 들을 때 필자가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개량 이전 한복의 원류·원형이 무엇이냐’에 관한 부분이다. 한복의 유전자에 대한 관심이다. 원류·원형을 알아야 개량의 정도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답을 찾기 어렵다. 조금만 올라가면 식민지 당시 일본의 기모노(着物)와 겹쳐진다. 부정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민족주의는 개량 한복 붐을 지탱한 배경 중 하나다. 기모노와 연결할 경우 친일파로 매도당한다. 미(美)가 아니라, 당위성을 전제로 한 이념이 개량 한복 뒤편에 넘실댄다.

필자가 알고 싶고 추구하는 것은 멋과 맛으로서의 한복이다. 한복의 원류·원형, 즉 유전자를 알기 위해선 역사·환경·문화·문명을 객관적으로 살펴봐야만 한다. 지극히 주관적 판단이지만, 개량 한복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한복의 유전자 자체를 모르고, 알려는 노력도 없기 때문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창작 의류’라 부를 수 있다. 미니스커트 치마에다 배꼽과 등이 훤히 드러난 옷에 굳이 ‘한복’이란 단어를 붙이려는 노력이 애처롭다. 튀고 깨고 무너뜨리는 것이 미덕으로 접어든 사회다. 쿨하게 독자노선으로 ‘창작 상상 한복’이라 부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원류와 원형의 탐구 없는 개량은 허구


▎프랑스를 대표하는 바게트의 원류는 메소포타미아에 있다. 12세기 십자군전쟁 당시 유럽에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터키의 아침용 빵인 에크메크(Ekmek)를 파는 상점의 모습. / 사진:유민호
프랑스 파리에 어느 정도 머물러본 사람이라면 마르셰(marche)에 대한 얘기를 수없이 들었을 것이다. 영어로 마켓(market), 즉 시장이다. 보통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열리는 야외 시장으로, 입고 먹는 것에 관련된 모든 것을 살 수 있다. 마르셰는 파리는 물론 프랑스의 일상적 풍경이다. 파리 마르셰는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10유로 정도로도 몸과 마음 전부, 지구 최고의 부자가 될 수 있는 공간이다. ‘시장 예찬’이라고나 할까? 육체노동으로 단련된 사람들의 순수한 정기를 느낄 수 있는 건강한 공간이다. 신은 자연과 맺어진 노동을 사랑한다. 자연 그 자체가 신의 분신이기 때문이다. 정원사(Gardener)는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에게 맡겨진 인류 최초의 직업이다.

파리 마르셰는 프랑스 시장 문화를 존경하고 찬미하게 하는 고품위 문명·문화 현장이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파고든다면 파리 마르셰의 원류·원형, 즉 유전자가 프랑스만이 아닌 유럽 전체에 퍼져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프랑스만의 전통 시장이 아니라는 말이다. 시장 규모와 상품의 종류, 시장에서 일하는 다양한 인종과 민족으로 인해 놀라게 되지만, 작은 규모에다 상품을 과일 채소 고기로 한정할 경우 유럽 어디에 가도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유럽 시장의 근본 유전자는 어디에 있을까? 답은 메소포타미아다. 유럽은 물론, 인류역사에 등장한 시장의 유전자는 유프라테스 티그리스 강을 낀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 있다.

전염병 확산은 음식 관련 원류·원형에 주목하게 된 가장 큰 계기다. 필자의 여행법이지만, 비교적 한 장소에서 오래 머문다.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온종일 전부 돌아다닐 필요가 없다. 보고 싶은 그림 조각 10개만 정한 뒤 철저하게 관찰하는 식이다. 그러나 한 지역에서 아무리 길어야 3개월 정도다. 이후 다른 나라나 공간으로 이동한다. 나태해지고 타성에 젖을 수 있기 때문이다. 2020년 2월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코로나19 팬데믹 시기는 다르다. 이런저런 이유로, 같은 장소에 장기간 머물게 된다. 결과적으로, 현지 주민들의 생활과 역사를 관찰할 기회를 갖게 된다. 장기 거주할 때 마주할 가장 큰 난관은 음식이다. 식당에 가서 먹고 싶은 것만 골라 먹을 수도 있겠지만, 사 먹는 음식은 오래 못간다. 결국 스스로 요리하면서 ‘자주적 식(食)문제 해결’에 나서게 된다. 주거지도 요리가 가능한 아파트형 호텔로 바꾼 뒤, 재료를 구하러 직접 시장에 들르게 된다. 현지 음식에도 주목하고, 요리에 필요한 현지 재료들도 접하게 된다.

팬데믹 이후 그리스와 터키가 주된 거주지가 됐다. 섬으로 이뤄진 그리스는 어디를 가도 비슷하다. 반면 터키는 대륙이다. 15세기 이후 메소포타미아와 북아프리카 전체를 정복한 대제국이 터키다.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영토가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메소포타미아 전체의 윤곽은 터키에 남아있다. 이라크와 시리아가 메소포타미아 핵심이지만, 크게 보면 터키가 메소포타미아 중심에 서 있다. 필자가 터키에 빠진 이유 중 하나지만, 그 어디에 가도 메소포타미아 그림자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대제국은 인종·민족·문화를 넘어선, 다양성에 기초한 나라다. 모든 것을 흡수하면서 공존공영으로 나아가는 체제다. 100% 완벽하진 않지만, 터키는 지금도 과거 대제국의 면모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수백만 명 단위의 이슬람권 망명자를 수용하는 통 큰 자세는 대제국만이 취할 수 있는 용단이다. 한(漢)민족만 내세우면서, 위구르와 티베트의 씨를 말리려는 나라가 중국이다. 당연하지만, 중화 퍼스트 이데올로기가 존재하는 한, 결코 대제국이 될 수 없다.

터키에 거주하는 동안 최소한 일주일에 두 번은 시장에 들렀다. 어디 가도 정신적 육체적 자극을 준다. 나무 타는 냄새가 그러하듯, 시장에 얽힌 인간 유전자의 재발견일지 모르겠다. 사실 시장은 변하는 시간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살아있는 삶의 현장이기도 하다. 출하된 과일·채소를 통해 계절의 변화를 아주 직접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10월 들어 석류와 오렌지가 대량 출하되고 있다. 9월에는 사과·포도·복숭아가 시장 전체를 덮었다. 필자의 인생을 통틀어 올해만큼 다양하고도 엄청난 양의 과일을 맛본 적도 없었다. 굵은 알의 포도는 매일 두세 송이씩 입에 달고 있다. 시장을 오가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유럽은 물론 세계 곳곳 음식의 상당수가 메소포타미아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시장에서 파는 음식의 원류·원형도 메소포타미아란 사실을 확인했다.

시장(市場)은 변화무쌍한 삶의 현장


▎로마는 미식에 눈을 뜬 최초의 대제국이다. 일반 시민들조차 메소포타미아에서 건너온 신선한 과일을 매일 즐길 정도로 풍요로운 식문화를 자랑했다. / 사진:유민호
예를 들어 이탈리아 아침 식사로 등장하는 빵, 코르네토(cornetto)를 보자. 보통 카푸치노와 콤비로 비싸도 2유로 이하로 즐길 수 있다. 프랑스인은 부정하지만, 코르네토는 이후 파리로 건너가 크루아상(croissant)으로 진화한다. 양 끝에 뿔이 달린 반달형 코르네토가 아닌, 작고 바삭바삭한 빵이다. 이탈리아·프랑스 문화의 분기점이기도 하지만, 코르네토가 양인 데 비해 크루아상은 질로 승부를 본다. 나름 맛과 멋을 느낄 아침용 빵이지만, 유전자를 훑어보면 깜짝 놀라게 된다. 터키·이란·시리아·이라크를 아우르는 메소포타미아가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터키에서 차와 함께 드는 아침용 빵인 ‘카트멜포가차(KatmerPogaça)’는 그중 하나다. 카트멜포가차는 코르네토·크루아상에 비해 투박하고 단순한 맛의 빵으로 느껴진다. 코르네토조차 크루아상에 비하면 시골풍 맛이다. 카트멜포가차를 먹다가 코르네토를 맛본다면 무인도에서 대도시로 온 듯한 느낌이 들 것이다. 필자의 관찰 결과지만, 메소포타미아에서 출발, 이탈리아 남부에서 코르네토로 변신한 뒤 다시 바다를 통해 마르세이유를 경유, 파리로 올라간 것이 크루아상의 실체다.

이탈리아가 원조를 자처하는 피자도 원류·원형으로 가면 메소포타미아에 도착하게 된다. 보통 차와 함께 즐기는 간식용 음식인 터키의 피데(Pide)가 그중 하나다. 메소포타미아 어디서나 피데 가게를 볼 수 있다. 보통 터키에 가면 케밥부터 찾지만, 필자의 경우 피데를 선호한다. 전기나 가스가 아닌, 나무 화덕 안에서 만들기 때문이다. 대략 2달러 정도로, 식초로 버무려진 샐러드와 함께 제공된다. 맛은 소박하다. 연변 김치가 피데라고 할 때, 서울 호텔에서 먹는 김치가 피자의 맛이다. 멋과 향에 기초한 맛이 아닌, 위를 채우는 기능이 원류·원형 음식의 운명이다. 이탈리아 피자처럼 치즈 고기 토마토를 토핑해서 먹지만 뭔가 투박하게 느낄 듯하다.

여러 면에서 거의 비슷하지만, 결정적 차이가 하나 있다. 원형의 피자와 달리, 피데는 길쭉한 타원형으로 만든다. 이탈리아 피자의 역사는 나폴리에서 시작된다. 추정컨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출발, 지중해를 건너 나폴리로 건너간 듯하다. 흥미롭게도 터키인은 이탈리아 피자가 피데에서 왔다는 사실을 거의 모른다. 많은 터키인을 접하면서 알게 됐지만, 알고 싶지도 않고 안다고 해도 그게 무슨 특별한 것이냐는 식의 반응에 그친다. 문명·문화는 물 흐르듯 흘러갈 뿐, 선후 서열을 따지는 것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는 자세다. 반도 출신은 이해 못 할, 대제국의 세계관으로 느껴진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세계 식문화의 원류·원형이라 부를 근거는 수없이 많다. 크게 압축하면 세 가지로 나눠진다. 첫째, 세계 문명·문화의 유전자가 메소포타미아에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다. 바늘 가는 데 실 따라가는 식으로, 음식은 문명·문화의 증거이자 상징이다. 세계 최초로 수메르 문자, 인류 최초의 대제국 아카디안(Akkadian)이 탄생한 곳도 메소포타미아다. 점토판 위에 쓰는 수메르 쐐기문자는 세금 징수와 상거래 과정에서 창조됐다. 시장은 세금 징수와 상거래로 연결되는 공간이다. 아고라(Agora), 스토아(Stoa)는 기원전 5세기 그리스 도시의 기본 요소다. 신전·의회·원형극장·스타디움·추모사원과 함께 시장과 관련된 아고라와 스토아가 서양 문명·문화의 출발점이 된 것이다. 놀랍게도 동쪽의 메소포타미아 시장은 그리스 문명·문화의 원류이자 원형에 해당한다. 그리스 아고라 스토아가 탄생하기 거의 2000년 전에 메소포타미아 시장이 등장했다.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실내 시장은 터키 이스탄불의 ‘그랑 바자르(Grand Bazaar)’다. 15세기 만들어진 것으로 4000여 가게가 500여년간 쉬지 않고 장사를 해왔다. 15세기 메소포타미아 전체를 정복한 오스만 튀르크가 세계 최초의 시장 탄생지 메소포타미아의 유전자를 계승하고 있다. 인류 최초의 시장이 이스탄불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메소포타미아=인류 식문화의 유전자’라 평가할 수 있다.

둘째는 메소포타미아가 일찍부터 기아에서 해방된 문명권이란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야생 밀은 신이 내린 축복이다. 농경생활로 들어가기 전부터 자연 발생 야생 밀을 통해 끼니를 해결한 곳이 메소포타미아다. 농경은 물론 목축문화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들판에 널린 야생 밀이 가장 큰 이유다. 목축도 농사도 몰랐던 시대지만, 이미 먹을 것이 널려 있는 땅이 메소포타미아다. 이후 사람 손에 의한 밀 재배에 성공하면서 수많은 음식이 탄생한다. 밀가루 반죽을 화로에 넣어 딱딱한 빵으로 바꾸는 ‘식의 혁명’도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됐다. 밀을 섬세한 가루로 만드는 맷돌이 발명된 곳도 물론 메소포타미아다.

메소포타미아는 인류 식문화의 원류


▎유럽은 실크로드를 통해 메소포타미아의 풍부한 식문화를 받아들였다. 이전까지만 해도 유럽의 식문화는 야만에 가까울 정도로 열악했다. / 사진:유민호
프랑스 파리는 멋과 맛을 겸비한 빵집들로 넘쳐난다. 메소포타미아는 프랑스보다 몇십 내지 몇백 배 더 많은 수의 빵집을 갖고 있다. 99% 장작불로 굽는 빵집이다. 프랑스의 낭만인 아침 일찍 빵집으로 달려가는 문화 자체도 메소포타미아의 흔적에 불과하다. 빵집에서 파는 빵의 내용을 봐도, 크루아상을 비롯한 대부분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프랑스 빵의 대명사 바게트(baguette)조차 아침용 빵인 터키의 에크메크(Ekmek)를 모델로 하고 있다. 맛은 비슷하지만, 바게트의 경우 에크메크보다 가늘고 길다는 점에서 다를 뿐이다.

보존식은 메소포타미아를 세계 식문화의 출발점으로 보는 세 번째 이유다. 겨울을 나고 장기간 보관할 보존식의 출발점이 바로 메소포타미아다. 한국인의 흥미를 끌 음식으로 메소포타미아 스타일 고추장을 빼놓을 수 없다. 메소포타미아 시장에 가면 널려 있다. 그러나 보통 고추장이 아닌, 토마토장으로 보면 된다. 고추가 아니라 토마토가 주재료이기 때문이다. 토마토에다 향신료로서 고추를 첨가하는 식이다. 매운 정도에 따라 네댓 종류로 나눠진다. 한국인이 즐길 정도의 매운 토마토장도 있다. 고추와 토마토는 15세기 신대륙 발견 이후 유럽을 통해 메소포타미아에 전달됐다. 15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고추 자체가 아예 없었다. 그러나 고추장을 만드는 식의 제조법은 이미 메소포타미아에 존재했었다. 올리브나 피스타치오를 고추장처럼 진하게 짜내 만든 반 액체보존식이 증거다. 필자의 유년기 기억 중 하나로 땅콩버터가 떠오른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PX 제품으로 학교까지 들고 가 빵에다 발라 먹었다. 땅콩버터는 메소포타미아 요리법에 기초한 음식이다. 메소포타미아 동부 지역을 원산지로 하는 피스타치오 버터가 원류다. 땅콩버터가 등장하기 수천 년 전 이미 피스타치오나 올리브 반액체보존식이 메소포타미아에 존재했다.

고추장은 콩을 주성분으로 한 된장을 모델로 한 보존식이다. 된장은 당나라를 통해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당나라 된장은 어디에서 왔을까? 중국의 발명품일까? 길고 긴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필자 생각으로는 메소포타미아 반액체보존식이 페르시아를 통해 당나라 중국으로 넘어갔다고 판단된다. 7세기 동서 국제무역의 주인공은 소그드(Sogdh)인이다. 실크로드 중계 무역 상인으로 페르시아·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중국에 전해준 장본인이다. 실크로드는 당시 동서를 잇는 무역 통로이자, 문명·문화 교류 고속도로였다. 가설이지만, 소그드를 통해 입수한 피스타치오 반액체보존식을 맛본 뒤 콩을 사용한 된장이 등장했다고 보면 된다. 건조한 메소포타미아와 달리 습한 곳에서 자라는 효모를 통한 발효음식으로 진화된다.

육류와 유제품 보존식은 ‘메소포타미아=세계 식문화의 원류·원형’이라 부를 가장 확실한 증거이자 소재다. 구체적으로는 소시지, 햄에서부터 치즈, 버터에 이르는 유제품에 걸쳐진다. 메소포타미아는 인류 목축의 원류·원형답게, 고기와 유제품에 관한 조리법에 특화한다. 겨울은 매년 인류가 극복해야 할 시련과 도전의 무대였다. 추운 겨울을 버틸 겨울용 양식이 필요했다. 오래 둬도 부패하지 않고 먹을 수 있는 보존식이 답이다. 맛이 아니라 생존으로서의 보존식이다. 소시지·햄·치즈·버터는 그 같은 보존식의 대표주자다.

풍부한 소금 활용해 장기 보존식 기술 발명

주목할 부분은 소금이다. 바로 메소포타미아의 축복이다. 어디에 가도 쉽게 구할 수 있다. 바다만이 아닌, 산, 호수, 지하에 가도 소금이 있다. 지중해 연안 허브와 함께 곳곳에 널린 소금을 통해 장기 보존식을 간단히 만들 수 있게 된다. 대략 15세기 대항해 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유럽의 식문화는 야만 그 자체였다. 음식에 관한 한 메소포타미아가 유럽을 압도했다. 이유는 소금에 있다. 유럽은 소금도 드물지만, 국가가 수입원으로 관리하면서 철저히 통제했다. 비싼 소금 때문에 보존식이나 다른 음식을 개발할 수가 없었다. 메소포타미아는 그런 제약에서 벗어나 소금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장르의 수많은 음식을 개발해낸다. 메소포타미아가 인류 식문화의 유전자를 장악한 이유다.

따지고 보면 인류 역사의 99%가 위장을 채우려는 생존의 무대였다고 볼 수 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대규모 기아에서 해방된 것은 20세기 중반 이후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도 한반도 북쪽을 비롯한 저개발국에서의 기아는 계속되고 있다. 인류의 처절하고도 끈질긴 투쟁사는 쌀 한 톨, 빵 한 조각에도 각인돼 있다. 하루 세 번씩 맞이하는 식사는 수백만 년 지속된 인류 생존 유전자에 대한 의식에 해당할지 모르겠다. 출발점은 프로메테우스다.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형벌에 처해진 비극의 신에게 감사의 편지를 올린다.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2111호 (2021.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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