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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진단] 중국의 미래 지배까지 꿈꾸는 시진핑의 야욕 

사실상 종신 권력 쥐고 82세까지(2021년 현재 68세) 실권 행사한다? 

예영준 중앙일보 논설위원·전 베이징 총국장
11월 11일 막 내린 중국 공산당 19기 6중전회서 장기집권 명분 쌓아
덩샤오핑 노선과 거리 두며 마오쩌둥 노선과 가까워지는 듯한 모습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1월 11일 막을 내린 중국공산당 19기 중앙위원회 제6차 전체회의 (6중전회)에서 장기집권의 명분을 쌓았다. 지난 6월 28일 베이징 올림픽 경기장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창당 100년 전야제 도중 초대형 전광판에 시 주석이 비치고 있다. / 사진:로이터 연합뉴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이 소설 [1984]에서 남긴 명언이다.

소설 속 가상국가 오세아니아가 그랬던 것처럼 오웰의 이 예언적 명제는 전체주의 체제일수록 잘 들어맞는다. 과거 기록을 지우고 개찬(改饌)하는 임무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하급 당원 윈스턴 스미스에게 당은 이렇게 세뇌 공작을 한다. “만약 모든 사람이 당이 말하는 거짓을 받아들인다면, 만약 모든 기록이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면, 그 거짓은 역사로 흘러들어가 진실이 된다”고. 소설 속 지배자들은 이를 ‘현실 통제(Reality Control)’라 부른다.

오웰이 [1984]를 탈고한 건 1948년이지만, 그가 남긴 말은 2021년 중국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과 일치한다. 중국의 현재를 지배하는 이는 시진핑(68·習近平) 국가주석 겸 공산당 총서기다. 현재뿐 아니라 중국의 미래를 지배하기를 꿈꾸는 그는 ‘2기 연임, 10년 집권’의 제한을 깨고 장기집권의 기반을 닦아둔 상태다. 남은 건 딱 하나, 명분을 얻는 것이다. 이를 위해 역사 해석을 새롭게 하는 것, 즉 과거를 지배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다.

11월 11일 막을 내린 중국공산당 19기 중앙위원회 제6차 전체회의(6중전회)에서 새로운 역사결의를 채택했다. 정식 명칭은 ‘당의 100년 분투의 중대 성취와 역사 경험에 관한 결의’다. 이름에서 보듯 1921년 창당한 중국공산당의 100년 역사를 총괄하고 이를 토대로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는 문건이다.

미사여구를 총동원한 일회성 문건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공산당 일당 지배국가인 중국에서는 역사 해석에 대한 권한을 공산당이 독점한다. 기본적으로 공산당의 역사결의가 국가의 공식 역사 해석으로 채택되고 교육 현장에서의 표준이 돼 궁극적으로는 국민의 의식과 사고를 지배하게 된다. 이에 어긋나는 역사관은 철저하게 배척된다. 중국공산당의 역사결의 채택이 이번을 포함해 단 세 차례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무게를 짐작할 수 있다. 우선 과거의 두 차례 역사결의를 살펴보자.

최초의 역사결의는 1945년 4월 공산당 6기 7중전회에서 채택된 ‘약간의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치열하게 전개된 ‘옌안 정풍(整風)운동’이 일단락된 뒤 나온 이 결의는 중국 혁명의 전략과 주체·방법론 등에 관한 노선 투쟁에서 마오쩌둥(毛澤東)이 완승했다는 승리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오는 반봉건·반식민지 상태인 중국의 실정에 맞게 혁명 과정에서 농촌 근거지와 농민의 역할을 중시했다. 널리 알려진 ‘농촌에서부터 도시를 포위한다’는 이론이다.

마오의 반대파들은 레닌주의에 충실하게 도시·노동자 중심의 혁명에 나설 것을 고집했다. 소련 유학 후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았던 왕밍(王明) 등이 대표적이었다. 마오는 이들의 노선을 ‘좌 편향’, ‘교조주의’로 비판하고 숙청했다. 공산당의 노선 투쟁은 격렬하고 처절하며 철두철미했다. 패한 자는 숙청당하는 것 이외에 달리 길이 없었다. 1945년 역사결의를 지나면서 마오쩌둥 노선을 제외한 모든 이론(異論)이 사라졌다.

역사결의는 처절한 노선투쟁의 결과물


▎지난 7월 1일 톈안먼에서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 연설 중 시 주석이 주먹을 불끈 쥐어 올리고 있다. / 사진:신화 연합뉴스
45년 결의보다 더 유명한 두 번째 역사결의는 1981년 6월 공산당 11기 6중전회에서 채택된 ‘건국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였다. 1976년 마오쩌둥이 숨진 뒤 그의 후계자로 지명된 화궈펑(華國鋒)은 마오쩌둥의 노선은 모두 옳기 때문에 충실히 계승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모두 옳다’는 뜻의 ‘범시파(凡是派)’로 불린 이유다. 덩샤오핑(鄧小平)은 실천만이 옳고 그름을 가르는 기준이라는 논리를 앞세운 실사구시(實事求是)파였다.

치열한 노선투쟁의 결과 덩샤오핑이 승리하고 화궈펑을 비롯한 범시파는 실각했다. 그 결과 채택된 것이 바로 2차 역사결의다. 덩샤오핑은 문화대혁명을 두 번 다시 되풀이돼서는 안 될 재앙이자 마오쩌둥이 범한 오류로 규정했다. 대신 마오쩌둥의 혁명과 건국의 공(功)이 문화대혁명의 과(過)를 앞선다는 평가를 했다. 이른바 공칠과삼(功七過三)의 평가가 공식화된 것이다. 이와 함께 개혁파 후야오방(胡耀邦)이 주석직을 이어받고, 덩샤오핑은 군사위 주석에 올라 실권을 장악해 개혁개방 노선을 본격적으로 펼쳐나갔다.

두 차례 역사결의에는 공통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승자는 권력을 차지하고 패자는 실각하는 처절한 노선투쟁의 결과물이란 점이다. 역사결의는 노선투쟁에서 승리한 측의 정세 인식과 역사관을 총괄하고 향후 진로를 제시한 지침서와 같다. 또 노선이 다른 반대파의 실명을 거명하며 비판했다는 점도 두 역사결의의 공통점이다.

만일 각각의 투쟁에서 반대파가 승리했더라면 역사의 물줄기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수 있다. 가령, 덩샤오핑이 범시파를 이기지 못했더라면 말이다. 지난 두 차례 중국공산당이 역사결의를 채택한 시점은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는 역사의 변절점(變節点)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시진핑이 세 번째 역사결의의 주인공이 됐다. 그런데 지난 두 차례와 비교하면 다소 이질적이다. 무엇보다도 중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꿀 만한 노선투쟁이 보이지 않는다. 2012년 11월 제18차 당대회에서 권력을 장악한 시진핑은 집권 초기 유례없이 강도 높은 반부패 캠페인을 벌여 부와 권세를 누리던 여러 거물급 간부를 추풍낙엽처럼 낙마시켰지만 당과 국가의 진로를 놓고 싸운 노선투쟁으로 보기는 힘들다. 노선투쟁이 없으니 실명으로 비판할 사람도 없다. 비판할 대상이 없는 대신 시진핑의 업적을 찬양하는 것으로 많은 비중이 할애될 것이란 예상이 나오고 있다.

역사결의를 통해 시진핑이 권력 기반을 확고히 다지게 된 것은 앞의 두 차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는 덩샤오핑 이후 최고지도자인 장쩌민(江澤民)이나 후진타오(胡錦濤)는 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런 점에서 시진핑의 위상이 마오쩌둥 및 덩샤오핑과 같은 반열로 격상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과연 훗날 이뤄질 역사적 평가에서도 시진핑이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에 버금가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지는 속단하기 이르다. 그래서 시진핑의 역사결의는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의 결의와 닮은 듯 다르다.

시 주석, 덩샤오핑 시대에 종언을 고하다


▎올해 7월 개관한 베이징 중국공산당역사 전람관 4층에 전시 중인 2016년 10월에 열린 당 18기 6중전회 전시 코너. 당시 6중전회에서는 ‘시진핑 주석이 당의 핵심’으로 확정했다. 중국 정치에서 ‘핵심’은 최종 결정권을 가졌다는 의미로 쓰인다. / 사진:신경진 베이징 특파원
그렇다면 2021년 시진핑의 역사결의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11월 16일 현재 새로운 역사결의의 전문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6중전회 폐막 직후 발표된 공보(公報)를 통해 대략의 줄거리를 유추해볼 수 있다.

이에 앞서 공개된 좋은 자료가 있다. 2021년 2월에 출판된 531쪽 분량의 [중국공산당 간사(簡史)](이하 간사)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1991년 출판된 것을 20년 만에 개정해 펴낸 것이다. 여기에 담긴 주요 내용은 6월 베이징 올림픽 공원에 개관한 ‘중국공산당역사전람관’의 전시 패널에 그대로 반영됐다. 이는 중국 공식 역사해석으로 봐도 무방하고 이번에 통과된 역사결의에도 반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공보와 간사, 그리고 역사전시물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키워드는 ‘신(新)시대’다. 역사전람관의 전시물은 공산당 100년을 ▷1기=신민주주의 혁명 시기(1921-1949) ▷2기=사회주의 혁명과 건설 시기(1949-1978) ▷3기=개혁개방과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 시기(1978-2012) ▷4기=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신시대(2012-현재)로 나눴다. 1기와 2기는 마오쩌둥 시대, 3기는 덩샤오핑 시대, 4기는 시진핑 시대가 되는 셈이다. 시진핑의 시대를 덩샤오핑의 시대(장쩌민·후진타오 집권기를 포함)와 명확히 구별한 게 특징이다. 시진핑은 왜 덩샤오핑의 시대에 종언을 고했을까.

물론 시진핑이 덩샤오핑 노선의 핵심인 개혁개방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시진핑도 2012년 집권 직후 첫 방문지로 광둥성 선전을 찾아 덩샤오핑의 동상에 헌화했다. 이듬해인 2013년 3중전회에서 개혁의 심화를 강조한 바 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시진핑은 덩샤오핑 노선의 단순 계승보다는 차별성을 두드러지게 보인다.

중국공산당은 1981년 11기 6중전회(2차 역사결의를 채택한 바로 그 회의)에서 ‘인민의 물질문화 수요와 낙후한 생산 사이의 모순’을 새로운 모순으로 규정했다. 쉽게 말해 못먹고 못사는 게 최대의 모순이란 의미였다.

그때 덩샤오핑이 내세운 게 ‘사회주의 초급 단계론’이었다. 사회주의 초급 단계에서는 낙후된 생산력을 끌어올리는 게 선결 과제다. 덩샤오핑 표현대로 고양이의 색깔이 검은지 흰지 따질 단계가 아니다. 그래서 나온 게 선부론(先富論)이다. 실용주의자 덩샤오핑은 낙후된 생산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잘살 수 있는 사람부터 먼저 잘살 것’을 주창했다. 잘사는 것을 죄악으로 여기며 절대 평등주의에 갇혀 있던 당시 중국으로선 혁명적 전환이었다.

“누구든지 중국 괴롭히면 머리 깨지고 피 흘릴 것”


▎1958년 11월 방중한 김일성(왼쪽) 당시 북한 주석이 마오쩌둥 중국 주석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그로부터 만 40년이 지났다. 먹고사는 문제가 주 모순이던 나라가 40년 만에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 됐다. 100년은 가야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던 덩샤오핑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다시 새로운 모순이 나타난다. 명색이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최대 문제점은 극심한 양극화다. 시진핑이 공부론(共富論), 즉 공동부유를 주창한 배경이다.

시진핑은 “중국은 덩샤오핑 이래 일부가 먼저 잘살게 되고 나면 (1단계) 부자들이 나머지를 끌어올린다(2단계)는 선부론을 따랐다”며 “중국은 1단계를 이뤄냈다”고 말했다. 남은 과제는 부자들이 나머지를 끌어올리는 2단계의 성취다. 공부론은 사회주의 이념에 한 걸음 더 다가선 것이다. 성이 사씨(=사회주의)이든, 자씨(=자본주의)이든 중요하지 않다던 덩샤오핑의 실용주의와는 분명히 결이 다르다.

덩샤오핑과의 결별은 선부론과 공부론의 차이에만 그치는 게 아니다. 덩샤오핑은 ‘도광양회(韜光養晦)’를 대외전략의 기본으로 삼았다. 삼국지의 유비가 한실 부흥의 웅대한 포부를 감추고 천둥 번개에 떠는 필부인 척하면서 조조에 몸을 의탁했던 것처럼 자신을 낮추고 묵묵히 실력을 기르면 언젠가 중국이 일어설 때가 올 것이라 믿었다.

이것도 모자라 그는 “절대로 남의 앞에 서지 말라”는 결부당두(決不當頭)의 가르침도 남겼다. 그는 적어도 100년 동안은 이 전략을 지켜야 한다고 믿었다. 덩샤오핑은 대외전략의 기본을 6개의 4자 성어로 요약한 ‘24자 방침’을 남겼다. ‘냉정관찰(冷靜觀察), 온주진각(穩住陣脚), 침착응부(沈着應付), 도광양회(韜光養晦), 선어수졸(善於守拙), 결부당두(決不當頭)’로 이어지는 24자 방침은 ‘냉정히 관찰하되 쉽게 흔들리지 말고 침착하게 대처하며 재능을 숨기고 치부는 감추며 절대 앞장서지 않는다’는 의미다.

하지만 시진핑은 어느새 덩샤오핑의 방침을 거둬들였다. 그는 2049년에 중국을 세계의 선두국가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이미 공언한 바 있다. 시진핑 집권 초기 ‘유소작위(有所作爲)’가 중국 대외 전략의 기본 방침인 것처럼 회자된 적이 있었다. 무조건 몸을 낮출 게 아니라 할 일이 있으면 마땅히 한다는 의미였다. 그 후 이를 대치한 건 떨쳐 일어나 해야 할 일을 한다는 ‘분발작위(奮發有爲)’다. 이제는 거기서 한 발 더 나갔다.

시진핑은 2021년 7월 1일 공산당 창당 100주년 연설에서 “누구든지 중국을 괴롭히면 머리가 깨져 피를 흘릴 것”이라고 공언했다. 이를 보면 시진핑의 신시대가 어디로 향할지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마오쩌둥이 중국을 일어서게 했고, 덩샤오핑은 중국을 부유하게 했으며, 시진핑은 중국을 강하게 했다”는 표현이 시진핑의 지향점을 말해준다.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중국이 강대국을 지향하는 것은 국제사회에 커다란 리스크를 안기는 것이다. 이 리스크가 미·중 대결이란 국제 정세 변화와 겹쳐지면 거대한 쓰나미로 변할 것이다.

시대 선언에 ‘중국의 길’ 펼쳐나가겠다는 의미 담긴 듯


▎김일성 주석의 후계자인 김정일 조선노동당 중앙위 비서가 1983년 6월 베이징을 방문해 당시 중국의 최고 실력자였던 덩샤오핑을 만나고 있다.
요약하자면 시진핑의 새로운 역사결의는 시진핑 시대의 도래를 선언한 것이다. 시진핑 시대의 도래는 바꿔 말하면 덩샤오핑 시대의 종언이다. 국제사회의 우려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주지하듯 중국이 종합국력 세계 2위의 강대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고 자신을 변화시킴으로써 죽의 장막을 걷고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동참한 데 있다. 그게 바로 구소련 등 사회주의권이 몰락하는 중에서도 중국 혼자만 성공을 거듭한 비결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시진핑의 시대 선언은 덩샤오핑 이래 지켜온 실용주의 및 국제사회와의 협력과 거리를 두고 ‘중국의 길’을 펼쳐나가겠다는 의미를 담은 것으로 보인다. 중국공산당은 최근 수년 동안 ‘중국 방안(方案)’이란 표현으로 서구 자유민주주의와는 다른 중국의 독자적 발전 모델을 선전해왔는데 이번 역사결의에도 이와 관련한 표현이 담길 것으로 예상한다.

시진핑은 또한 덩샤오핑의 노선과는 거리를 두는 반면 마오쩌둥의 노선과는 가까워지는 듯한 모습도 보인다. 시진핑은 ‘올바른 역사관’의 확립을 강조하면서 “개혁개방 후의 역사로 개혁개방 이전의 역사를 부정하면 안 된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이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평가를 염두에 둔 발언으로 해석된다.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을 발동할 당시의 상황을 기준으로 평가해야지, 후세의 시각에서 평가하면 안 된다는 뜻을 밝혔다는 것이다. 물론 문화대혁명을 심대한 오류로 규정한 평가에는 변화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새롭게 펴낸 [공산당 간사]에서 문화대혁명과 대약진운동을 다룬 장에 ‘사회주의 건설의 모색과 곡절을 겪은 발전’이란 제목을 붙인 것은 종전과는 사뭇 결이 다른 표현이다.

시진핑 시대의 기점은 2012년 11월이다. 아직 9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공산당역사전람관의 시대 분류에 따르면 마오쩌둥의 시대는 57년, 덩샤오핑의 시대는 34년간 이어졌다. 바꿔 말하면 앞으로도 상당한 기간 시진핑의 시대가 계속될 것이란 이야기다. 시진핑은 이미 국가주석 3연임 제한 규정을 철폐했다. 모든 권력의 기반인 당 총서기 자리도 내년 가을에 개최될 제20차 당대회에서 3연임을 이뤄낼 것으로 예상된다.

혹자는 2035년까지는 시진핑의 시대가 이어질 수도 있다고 본다. 2035년은 사회주의 현대화의 기초를 완성하는 해로 시진핑이 제시한 목표 연도다. 그사이 공식 직함은 내려놓더라도 막후에서 실권을 계속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때 시진핑의 나이는 82세가 된다. 사실상 종신 권력을 누렸던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의 전례로 보면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다.

- 예영준 중앙일보 논설위원·전 베이징 총국장 yyju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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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호 (2021.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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