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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수의 국가를 품격 있게 만든 지도자들(2)] 시대적 흐름을 선도했던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총리 

동방정책 ‘나침반’ 들고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로 독일을 이끌다 

베를린 장벽에서 기회 포착… 미국의 신뢰 바탕으로 소련과 공존의 문 열어
한국도 우방국들 신뢰 확보한 가운데 강대국 관리하며 북한과 협상 임해야


▎‘독일 통일의 아버지’ 빌리 브란트는 베를린 장벽의 위기에서 기회를 포착해 독일 통일을 이뤘다. 브란트의 길이 우리가 갈 길인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그 길을 찾는 것은 내년에 선출될 우리 지도자의 몫이자 책임이다.
흙수저로 태어나 역경을 딛고 지도자의 위치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독일 통일의 초석을 다졌던 빌리 브란트(1913~1992) 전 총리의 흔적을 찾아보기 위해 독일의 양대 정당 중의 하나인 사민당을 찾았다. 당사에 들어서면 우스꽝스러운 브란트의 입상(立像)이 눈에 띈다.

지도자의 동상이라면 말끔한 정장 차림에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몸의 균형도 잘 맞춰져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브란트 동상은 상체와 하체가 비슷한 크기로 균형이 맞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어수룩하고 흐트러진 모습에 한 손은 구겨진 양복 한쪽에 넣고 다른 한 손은 뭔가 설명하는 듯 조각돼 있다. 조각상도 정겹지만, 그 옆에 붙어 있던 사진 한 장이 더욱 눈길을 끌었다. 다듬지 않은 희끗희끗한 머리칼, 움푹 팬 주름살, 청바지에 담배를 물고 기타를 치는 모습은 노련한 정치인이라기보다 영락없는 ‘7080 기타 연주자’다.

브란트는 골초였다. 그는 방송 인터뷰 때 성냥에 불을 댕기면서 연신 연기를 내뿜곤 했다. 정치인답지 않게 수줍은 사람이었고, 주로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는 지도자였다. 그럼에도 자신의 주관을 뚜렷하게 지켜나갔던 정치인이었다.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지만, 권위적이고 고압적이지 않은 편안한 총리, 이것이 그의 모습이고 성격이고 삶이었다.

브란트는 자신의 인생 역정을 많은 기록으로 남겼다. 연설문, 저서, 대담 기록, 메모 등을 쌓아놓으면 세계 어느 정치인에도 뒤지지 않는다. 기록의 규모도 놀랍지만, 자서전 등을 보면 깊이가 있다. 치열한 시대적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자신의 논리를 다듬어 상대를 설득하고 국정을 운영해나갔음을 그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사생아로 태어난 브란트는 어려서부터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17세에 사민당원이 됐고, 사민당지에 수시로 기고했다.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자 마르크스의 [자본론] 한 권과 100마르크만 지니고 독일을 떠났다. 그는 12년간의 망명 시절 내내 프리랜서 기자로서 수많은 기고문과 글을 썼다. 독일의 상황뿐만 아니라 스페인 내전도 취재해 보도했고, 전후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현장도 취재했다. 이후 브란트는 정치인으로서 자기 생각을 스스로 적고 발표했으며, 총리직을 사임한 이후 세 권의 두툼한 책으로 자신이 걸어온 삶을 회고했다.

브란트는 죽음을 각오하고 나치의 통치에 반대했던 반(反)나치 운동가였다. 그는 망명 기간 중 노르웨이·스웨덴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유럽 각지를 다니면서 저항운동을 전개했다. 심지어 나치의 검문검색이 날이 갈수록 철저해지고 전쟁 준비로 치닫던 1936년 베를린에 잠입해 활동했다. 그가 나치의 정황을 파악할 목적으로 위장 입국해 근거지를 잡은 곳은 베를린의 가장 중심 거리인 쿠담 거리 인근, 히틀러 사무실이 있던 빌헬름 거리와는 불과 20여 분 거리에 있었다. 우리로 비유하자면 일제 총독부가 위치한 중앙청과 가까운 서울 종로 거리 부근에 머물면서 일본 동향을 파악해 전달하는 소식통 역할을 한 셈이다.

그의 행적은 결국 나치에 발각됐다. 1938년에는 독일 국적이 박탈되고, 심지어 1940년 노르웨이에서 나치 경찰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당시 그는 노르웨이 국적을 지니고 있었기에 가까스로 풀려났으며, 이후 스웨덴으로 피난해 반나치 투쟁을 지속해나갔다.

2차 대전이 끝난 이후 브란트는 1947년 베를린 주재 노르웨이 군사위원회 언론담당관 신분으로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그는 1948년 국적을 다시 취득하고 사민당 당원으로 등록한 이후 정치에 적극 관여했다. 베를린 시의회 의원, 사민당 베를린 지부장 등의 경력을 거쳐 1957년 43세의 젊은 나이에 베를린 시장에 당선됐다. 이후 그의 정치 일생의 전환점은 베를린 장벽이었다. 그는 장벽 현장에서 독일이 걸어가야 할 새로운 정책을 구상했고, 정책을 실현하면서 잊지 못할 사람들을 만났다.

정치 역정 같이 걸었던 에곤 바, 갈라선 귄터 그라스


▎독일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동방정책’ 설계자 에곤 바(오른쪽)와 빌리 브란트 전 총리.
그의 인생에서 변함없이 같은 길을 걸었던 사람은 그의 부인이 아니라 동방정책을 같이 설계한 에곤 바다. 둘은 30년 이상 서로 믿고 의지했다. 에곤 바는 브란트를 처음 만났을 때 베를린 시 공보책임자였다. 에곤 바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내 생각을 기탄없이 말할 것”이라고 하자 브란트는 “너무 안 좋은 얘기는 두 사람이 있을 때만 해달라”고 당부했다. 첫 만남에서 두 사람의 이 같은 대화는 동양적인 시각에서는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솔직한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에곤 바는 브란트의 메신저로서 미국의 키신저, 소련의 그로미코와 긴밀한 협의와 격론을 통해 동방정책을 현실화시켰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서 자칭 전후 시대의 양심이라고 선언한 귄터 그라스는 독일 문화계·학계 등 지식인을 규합해 사민당 지지 유권자 모임을 만들고 언론 기고 등을 통해 브란트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끌어냈다. 이같이 열렬한 지지자였지만 훗날 통일 과정을 두고 브란트와 귄터 그라스는 극명하게 입장이 갈렸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혼란으로 빠져든 동독에 대해 서독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인가를 두고 여러 논란이 있었다. 일부에서 통일을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이 있을 때 브란트는 통일로 직행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귄터 그라스는 독일의 분단은 아우슈비츠 대학살에 대한 대가였으며, 독일이 재통일되면 힘이 다시 집중돼 역사상 가장 잔혹한 학살을 되풀이할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통일에 반대하는 입장을 나타냈다. 이러한 차이로 오랫동안 이어오던 두 지성인의 우정은 막을 내렸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에 대한 비판이 높아가고 국내 여론이 극명하게 양분됐을 때, 브란트 지지를 표명한 사람은 후일 대통령이 된 폰 바이체커였다. 폰 바이체커는 정치 노선을 달리한 기민당 인사였지만 동방정책이 올바른 길이라고 주장하면서 변함없이 브란트를 지지해줬다. 또한 브란트가 1987년 사민당 총재직에서 물러나는 과정에서 당내 큰 내분을 겪는 등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대통령이었던 폰 바이체커는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 시몬 페레즈 이스라엘 총리, 헬무트 콜 총리, 유럽 및 서독 여야 주요 정치인을 초청해 브란트의 75회 생일을 축하해주기도 했다. 브란트와 폰 바이체커 두 사람은 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의 날에 자유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함께 독일 국기를 의회 의사당에 게양했다.

측근 귄터 기욤이 동독 스파이로 밝혀지자 총리직 사임


▎1961년 동독 정부가 동베를린과 서방 3개국의 분할 점령 지역인 서베를린 경계에 쌓은 콘크리트 담장인 베를린 장벽. 1989년 이 장벽은 다 철거됐고, 브란덴부르크문을 중심으로 한 일부분만 기념물로 남겨졌다.
브란트는 역사 앞에 무릎을 꿇었다. 1970년 폴란드 방문 중에 바르샤바 유대인 게토 추모비 앞에서 나치 독일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독일 국민을 대표해 말이 아닌 마음으로 사과했다. 그는 “기념비 앞에서 과거 독일의 잘못을 사죄하기 위해 뭔가 해야 했는데 그 죄책감을 말로 다 할 수 없어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 장면은 독일의 과거를 참회하는 모습으로 전 세계에 비쳤지만, 정작 서독 내에서는 극명한 의견 차이를 보였다. 당시 <슈피겔>지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응답자 중 41%만 브란트의 행동이 적절했다고 반응한 반면, 48%는 과장됐다는 입장을 보였다.

브란트는 적대국과의 화해정책을 통해 유럽과 전 세계의 평화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등 해외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사민당 내 불협화음, 오일 쇼크로 인한 경제 위기, 공공부문의 전국적인 총파업 등으로 어려운 상황을 맞았다. 이 와중에 측근으로 활동하던 귄터 기욤이 동독 인민군 장교로 밝혀지자 브란트는 총리 임기 중이던 1974년 자진 사임했다. 통일 후 브란트 사임 사건과 관련한 동독 정보기관(슈타지)의 활동 내용을 찾아보니, 슈타지가 기욤을 직접 관리하고, 그의 업무에 직접 관여했던 사실이 밝혀졌다.

1961년 세워진 베를린 장벽은 분단을, 1989년 무너진 장벽은 화해와 통합을 상징한다. 베를린 장벽 설치에 이르기까지 시대적 상황을 보자. 2차 대전 이후 포츠담 회담을 통한 전승국 간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베를린을 4개국이 공동 관리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연합국이 관할하기로 한 서베를린은 육지의 섬으로 고립됐다.

그러나 서베를린은 민주체제의 성공 사례로 동독인의 탈출로가 됐다. 당시 동독인의 서독 탈출 상황을 보면 1945년부터 1961년까지 350만여 명에 달했으며, 장벽이 건설되기 직전에 베를린에서만 1961년 7월에 3만여 명, 8월 2주간에 2만여 명이 탈출했는데 특히 젊은 계층의 이탈이 심했다. 이에 바르샤바 조약국들이 동독인의 서독 탈출을 사회주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활동으로 규정하자, 동독은 1961년 8월 장벽을 건설하고 동서 국경선을 봉쇄했다. 예상치 못했던 베를린 장벽 건설에도 불구하고 연합국은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터라 소련의 무리한 조치에 눈을 감았다. 이 사건은 브란트 정치 일생에 커다란 전환점이 됐다. 그는 소련이 베를린 장벽 설치를 주도하면서 전술적으로 전쟁 임계점까지 위험 수위를 올리지만, 전쟁은 원하지 않는다고 봤다.

즉, 소련이 서방의 결속을 약화하기 위해 베를린 장벽을 건설해 상대를 위협하고 공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평화 공존을 주장하면서 협상하려는 측면을 노련하게 파악했다. 브란트는 이 같은 소련의 전략은 스스로 약점을 노출하는 것이기에 공산당 세력과의 접촉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적극적으로 접촉하고 협상해야 하는 게 굴복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브란트는 평화를 보장받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말이 아닌 행동, 일반적인 방책이 아닌 구체적인 정책을 에곤 바와 함께 기획했다. 통일에 목적을 뒀다기보다 당시 동구 국가들과의 단절·대치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접촉을 통해 변화를 가져오겠다는 입장이었는데, 이 정책이 점차 동방정책으로 불리게 됐다.

브란트는 자신이 새로이 구상한 정책은 서구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고 봤다. 서구의 신뢰와 협력을 바탕으로 소련 및 동구 국가들과의 전반적인 협력을 유도하고, 나아가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까지 구상했다. 그는 이 정책이 성공하기 위해서 미국의 지원이 핵심이라는 현실적인 인식하에 에곤 바로 하여금 키신저와 직통 채널을 통해 긴밀히 협의하도록 했다.

동방정책의 성패를 가름하는 또 하나의 축은 소련이었다. 소련의 관여 없이 동방정책의 진전이 가능하지 않았기에 브란트는 에곤 바에게 전권을 주고 소련과 비밀 협상을 하도록 했다. 에곤 바와 그로미코 외상과의 협상은 브란트와 브레즈네프 간의 신뢰로 이어지고 정상 간 전화 라인도 구축됐다.

브란트는 1969~1974년 총리 시절 본격적으로 동방정책을 시행하면서 전략적으로 접근했는데, 소련과 먼저 협상 물꼬를 튼 이후 국경 문제에 민감한 폴란드와의 타결을 추진했다. 그다음 단계로 특수 관계인 동독과 협의해나갔다. 그 결과 소련과 모스크바 조약(1970년 8월), 폴란드와 바르샤바 조약(1970년 12월), 동서독 기본조약(1972년 12월), 체코슬로바키아와 프라하 조약(1973년 12월) 등의 성과를 거뒀다.

이 조약들은 두 가지 중심 내용을 규정하고 있다. 첫째는 예전 영토를 회복하려는 독일의 시도가 향후 발생하지 않도록 재확인한 점이다. 서독과 동구권과의 협상에서 영토 문제가 가장 큰 쟁점이었다. 그 이유는 독일이 폴란드와 소련의 관할에 들어간 영토를 포기해야 하는 것으로, 그 규모는 1938년 국경선 기준으로 독일 전체의 4분의 1이나 됐기 때문이다.

둘째는 무력 사용이나 무력 사용 위협의 포기를 규정한 것이다. 독일이 무장해제당해 무력화됐음에도 불구하고 조약에 군사적 위협이나 무력행사를 하지 않도록 규정한 것은, 소련이나 동구권 국민에 나치의 위협에 대한 트라우마가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 아닌 행동, 일반적 방책 아닌 구체적 정책 기획


▎1970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망한 폴란드인의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이 같은 동구권과의 협상에 대해 국내 그리고 우방국의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국내에서 독일의 영토 할양(割讓)에 대해 심하게 반대한 부류는 이 지역에서 추방됐거나 망명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독일 전체에 1250만여 명에 이르렀으며, 이 가운데 790만여 명이 서독 지역, 460만여 명이 동독 지역에 정착하고 있었다. 서독 이주민 중 많은 수가 국토의 회복을 원했기에 모스크바 조약 등의 비준을 위해 독일의 영토 할양 안건이 의회에 상정됐을 때 반대 여론이 높았다.

또한 미국의 견제도 적지 않았다. 독일의 총리실과 미국의 백악관은 직통 라인을 구축해 서독의 협상 내용을 수시로 공유했지만, 양국 간의 불협화음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정상 간 대화 중에 여러 차례 긴 침묵이 흐르기도 할 정도로 닉슨과 브란트 간에 이견을 보였고, 매우 가까웠던 에곤 바와 키신저도 얼굴을 붉힐 때가 잦았다. 오히려 서독과 소련 간에는 초기에 긴장감이 돌았지만, 정상 간 신뢰를 바탕으로 상호 고위 협력선을 통한 협상이 활발히 전개됐다. 특히 그로미코는 서구와의 협상에 늘 부정적이었지만, 브란트에 대해한 평가만은 달랐다. 그로미코는 브란트가 동서 관계를 냉철히 판단할 뿐 아니라 소련과 서독 간에 가로놓인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고 평화 공존의 사고를 기반으로 상호 실현 가능한 정책을 실행한 서독 최고의 정치가였다고 평가했다.

남북한 관계는 갈등과 불신이 지속하는 가운데 시시포스신화에서와 같이 조그만 진전이 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모습이다. 한반도 문제는 두 당사자뿐만 아니라 미국·중국이 관여한 국제적 분쟁 사안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은 상호 심한 갈등을 겪고 있는 만큼, 남북한 상황을 적극 타개하려 하기보다는 현상 유지가 자국에 유리하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아울러 북한은 경제적 어려움에도 미사일·핵 개발 시험을 지속해오고 있는데 이것은 오히려 체제가 허약하고 불안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우리의 현실은 1961년 베를린 장벽 건설 때와 유사하다. 교착 상황의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도가 요구된다. 이를 위해 지도자는 무엇보다 국제 정세를 정확히 읽고 상대국의 입장을 파악해 대처 방안을 설계할 수 있는 현장 전문가를 활용해야 한다. 에곤 바가 “통찰력과 실천력이 뛰어났던 브란트도 외무부 장관을 거치지 않고 총리를 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할 정도였으니 국제 흐름과 상대국의 속내를 읽어내는 지도자의 통찰력과 참모의 지원은 매우 중요하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


▎1970년 3월 19일 동·서독 간 첫 정상회담을 위해 동독 에어푸르트를 방문한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환호하는 시민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그다음으로 중장기적으로 현실성 있는 구체적인 계획으로 우리의 국익에 맞는 안을 기획해야 한다. 자신의 임기 내에 돌파구를 마련하겠다는 조바심과 단기적인 시각에서 실현 가능성이 낮은 정책을 관련국에 제안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방국과의 신뢰를 통해 설득하고 지원을 확보한 가운데 주변 강대국을 관리하면서 북한과 협상에 임해야 한다.

그런데 현 상황은 미국·일본 등 우방국과의 신뢰가 하락하고 성과를 내기 어려운 중국에 과도한 기대를 하고 있으며 북한에 경도된 형국이다. 미국·중국과 막후 채널을 통해 소통할 라인이 있는 것도 아니며 북한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최근 남북통신선 복원이 화제가 될 정도로 우리의 대북 협력선이 약해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기에는 커다란 한계가 있다. 세계가 핵전쟁의 위험 수준까지 이르렀던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가 정상·고위급 소통 채널을 통해 해결됐음을 깊이 유념할 필요가 있다.

역사는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라 행동하는 인간에 달렸다. 독일은 아데나워의 친서방정책과 브란트의 동방정책이 디딤돌이 돼 45년 만에 정치적 통일을 이뤘다. 또한 30년 만에 경제적·사회적 통합을 달성해 분단된 국가가 유럽의 범주를 뛰어넘어 세계의 지도국이 됐다. 특히 브란트는 베를린 장벽의 위기에서 기회를 포착해 미국과의 신뢰를 바탕으로 소련과 공존의 문을 열고 유럽을 안정과 통합으로 선도했다.

브란트는 베를린 장벽을 계기로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갔던 사람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길을 떠난 것이 아니라 동방정책이라는 ‘나침반’을 들고 독일을 이끌면서 나아갔다. 브란트가 갔던 길이 우리가 갈 길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지금까지 우리가 걸어온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야 한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그 길을 찾는 것은 내년에 선출될 우리 지도자의 몫이고 책임이다.

브란트는 베를린 서남쪽에 있는 공원묘지에 안치돼 있다. 한구석에 있는 그의 묘지를 찾기가 쉽지는 않았으며, 애써 찾고 보니 ‘빌리 브란트(Willy Brandt)’라는 이름 이외에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커다란 묘비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었다. 많은 여백이 있는 소박한 묘비가 그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가! 사민당 건물에서 봤던 어수룩한 조각상, 담배 물고 기타 치는 사진이 중첩되면서 한 사람의 지도자가 얼마나 많은 변화를 가져왔는지 새삼 되새기게 된다.

※ 조윤수 - 미국·러시아·독일·싱가포르·쿠웨이트·터키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했다. 2017년 주(駐)터키 대사를 마지막으로 37년간의 외교관 생활을 마치고, 현재는 한국유라시아문명연구회 이사장, 부산외국어대 초빙교수로 외교의 경험을 나누고 있다. [독일 통일 30년, 독일의 과거에서 한국의 미래를 본다] [대사와 함께 떠나는 소아시아 역사문화산책] 등 근무한 국가의 모습과 주요 국제 사안을 책으로 엮었다. 현재 [오스만 제국의 영광과 쇠락, 터키 공화국의 자화상] [중앙유라시아에서 본 새로운 역사흐름]이라는 책을 준비하고 있다.

202112호 (2021.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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