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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중의 뮤지컬 오디세이(7)] 끔찍하지만 유쾌하게… 역설적 풍자 빛나는 '시카고' 

“사람은 죽였지만, 범죄는 아니에요” 

20세기 초 시카고 배경 블랙 코미디, 시대 초월한 촌철살인 가슴 뜨끔
춤을 드라마 전달 매개체로 승화, 밥 포시 독창적 안무도 롱런 주인공


▎안무가 밥 포시의 독특하면서도 섹시한 춤을 볼 수 있는 뮤지컬 [시카고]에서 주인공 벨마 켈리 역을 맡은 최정원(가운데)이 열연하고 있다. / 사진:신시컴퍼니
"컴온 베이비, 신나게 놀아봐, 앤드 올 댓 재즈~.”

뮤지컬 [시카고]의 오프닝곡 ‘올 댓 재즈’는 이렇게 시작된다. 검은 망사 스타킹에 속이 비치는 의상을 입은 댄서들이 끈적끈적한 선율에 맞춰 농염하게 춤을 춘다. 흥겨운 재즈 리듬을 타고 매혹적인 몸짓으로 관객들을 유혹한다.

[시카고]는 20세기 초반 격동기의 미국, 그중에서도 알 카포네와 같은 갱들이 활개 쳤던 환락과 범죄의 도시 시카고를 배경으로 한 블랙 코미디다. 이 작품의 뿌리는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6년 신문기자이자 희곡작가였던 모린 댈러스 왓킨스는 당시 세간의 관심을 모았던 쿡 카운티의 공판에서 영감을 얻어 희곡 ‘작지만 용감한 여자(A Brave Little Woman)’를 썼다. 이 연극이 인기를 끌자 1927년 무성영화 [시카고]가 제작됐고, 이어 1942년에 극 중 여주인공의 이름을 딴 영화 ‘록시 하트’가 개봉했다.

브로드웨이의 전설적인 안무가이자 연출가인 밥 포시(1927~1987)는 1975년 명콤비였던 작곡가 존 캔더, 작사가 프레드 엡과 손을 잡고 이것을 뮤지컬로 만들었다. 바로 [시카고]였다. 시카고의 어두운 뒷골목을 배경으로 살인·욕망·부패·착취·폭력·간통·배신의 파노라마를 위트 있는 노랫말과 감성을 자극하는 재즈 리듬, 그리고 ‘포시 스타일(Fosse Style)’이라 명명된 특유의 몸짓에 담았다. [시카고]는 개막 이후 898회나 공연되며 1970년대 브로드웨이를 대표하는 뮤지컬로 자리매김했다.

[시카고]의 생명력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밥 포시가 세상을 뜨고 9년이 지난 1996년, 연출가 월터 바비와 [시카고]의 초연 배우이기도 한 안무가 앤 레인킹은 [시카고]의 리바이벌 버전을 선보였다. 또다시 [시카고] 열풍이 브로드웨이를 강타했고, 1997년 런던 웨스트엔드로 진출해 역시 롱런 가도를 달렸다. [시카고]가 큰 인기를 끌자 밥 포시의 작품 가운데에서 주요 안무만 모은 갈라(gala) 형식의 뮤지컬 [포시(Fosse)]도 1999년 제작돼 무려 1108회나 공연되는 등 ‘밥 포시 신드롬’을 이어갔다.

[시카고]는 캐나다·호주·독일·일본 등 16개국 250여 도시에서 공연되는 큰 성공을 거뒀다. 국내에서는 지난 2000년 신시컴퍼니에 의해 첫선을 보인 뒤 지금껏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안무가들과 뮤지컬인들을 중심으로 추앙받던 밥 포시의 예술세계는 마침내 국내 팬들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시카고]는 2002년엔 르네 젤위거, 캐서린 제타 존스, 리처드 기어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져 아카데미와 골든글러브를 휩쓸었다.

복제 불가능한 관능의 미학: 포시 스타일


▎가수 아이비(록시 하트 역)가 뮤지컬 [시카고] 프레스 리허설에서 섹시한 연기를 펼치고 있다.
[시카고]의 강점은 무엇보다 ‘포시 스타일’에 있다. 밥 포시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창적인 안무로 자신만의 춤의 세계를 창조했다. [맨 오브 라만차]나 [지킬 앤드 하이드]가 스테디셀러의 반열에 오른 것은 인간사회가 존속하는 한 영원히 반복될 주제를 깊이 있게 다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카고]로 대표되는 포시의 작품은 좀 다르다. [시카고]가 다루고 있는 신랄한 사회풍자의 드라마 역시 시대를 초월한 공감대를 갖추고 있지만, 그에 앞서 포시 스타일의 독보성, 희소성이 시선을 끈다. 포시 스타일은 그의 작품이 아니면 볼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뮤지컬 [시카고]만 봐도, 나온 지 40년이 훌쩍 넘었지만, 그가 창조해낸 몸짓은 여전히 참신하고, 유혹적이며, 복제를 불허한다. 팝스타 마돈나와 레이디 가가는 물론 국내의 안무가와 댄스 가수들도 여전히 포시의 춤을 연구하며 영감의 원천으로 활용하고 있다.

밥 포시는 매우 흥미롭고 경이로운 인물이다. [시카고]를 비롯해 [스윗 채러티](1966) [피핀](1972) 등의 뮤지컬을 만들었고, 영화 [카바레] [올 댓 재즈]를 연출했다. 1973년에는 영화 [카바레]로 아카데미상, 뮤지컬 [피핀]으로 토니상, 영화배우 라이자 미넬리의 TV 스페셜 [라이자 위드 어 Z(Liza with a Z)]로 에미상을 받는 진기록을 세웠다. 한 해에 영화와 TV, 뮤지컬의 세 장르에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다.

밥 포시는 국내에서는 [시카고]에 앞서 영화 [올 댓 재즈(All that jazz)](1979)로 알려졌다. 포시가 감독한 [올 댓 재즈]는 그의 삶을 다룬 자전적 영화였다. 포시를 모델로 한 안무가 조 기디언 역을 맡은 배우는 로이 샤이더였는데 냉소와 열정을 오가는 연기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과로와 음주로 몸을 혹사하면서 항상 담배를 문 채 배우들과 함께 열정을 불사르는 로이 샤이더의 모습은 감독 포시 그 자체였다.

포시의 삶은 드라마 그 자체다. 대중 공연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3세 때 리프 브라더스라는 보드빌 댄싱팀의 멤버로 버라이어티 쇼에서 탭댄스를 췄으며, 15세 때에는 벌써 나이트클럽에서 안무를 맡았다. 그에게 클럽은 학교였고, 삶의 터전이었고, 예술을 꽃피우는 데 필요한 자양분의 공급처였다. 러시아의 유명 발레학교 출신도 아니고 현대무용을 정식으로 배운 적도 없지만, 그는 스트립쇼와 같은 클럽의 B급 쇼에서 아름다움을 찾아 세상에 새로운 예술을 선보였다. [시카고]나 영화 [올 댓 재즈]를 보면 ‘밤무대’에 대한 그의 진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포시의 안무에는 사실 위대함이 숨어 있다. 자신의 결점을 활용해 독특한 스타일을 창조해낸 것이다. 안짱다리였던 그는 발을 바깥쪽으로 돌리는 데 어려움을 느꼈다. 그 결점을 이용해 크고 시원시원한 동작들보다는 꾸부정하면서도 소소한 근육들의 움직임을 시각화했다. 또 자신의 콤플렉스였던 대머리를 감추기 위해 검은색 모자를 항상 중요한 소품으로 활용했다.

박자에 맞춰 엄지와 중지를 튕겨 소리내기, 어깨 돌리기, 엉덩이 흔들기, 엉덩이를 보이면서 퇴장하기, 점잔빼며 걷는 걸음걸이, 흰 장갑과 한쪽 손만을 쓴 제스처 등이 바로 ‘포시스타일’의 구성물들이다. 어딘지 부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리드미컬하고, 퇴폐적이고 섹시하지만 묘하게 매력적인 동작들로 가득하다. [스윗 채러티](1966)에 들어있는 ‘빅 스펜더(Big spender)’와 ‘리치 맨스 프러그(Rich man’s frog)’를 보면 어떻게 심의를 통과했는지(?) 의심이 들 만큼 야하다. 여배우들이 긴 담뱃대를 입에 물고 짓는 고혹적인 표정은 관객들에게 아찔함을 안겨준다.

“근본 없는 몸짓에 불과” 비판도


▎윤공주(벨마 켈리 역)가 뮤지컬 [시카고] 프레스 리허설에서 열연하고 있다.
포시의 독창적인 안무는 제도권 비평가들로부터 심한 공격을 받기도 했다. 고정된 지식의 틀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게 그의 춤 세계는 ‘근본 없는’ 몸짓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영화 [올 댓 재즈]에서 알 수 있듯 그의 냉소주의와 허무주의는 세상에 대한 이런 실망의 표현이었다.

포시 스타일의 관능미는 사실 겉으로 부각된 측면일 뿐이다. 포시가 진정 원했던 것은 다른 데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몸짓으로 완성된 드라마였다. 그는 손짓·발짓 같은 작은 움직임 하나에 의미를 담으려고 했다. 인물의 캐릭터는 물론 미묘한 감정의 변화, 이야기의 전개를 자신이 창조해 낸 몸짓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음악가에게 인간의 목소리가 최고의 악기라면, 안무가에게 인간의 몸짓은 최고의 언어다. 그리하여 후반기로 갈수록 그의 작품에선 극본 대신 춤의 비중이 점점 커졌다.

[시카고]는 포시의 작품 가운데 비교적 대중적인 편이다. 포시 스타일이 세련되고 무난하게 작품 곳곳에 배어 있다. 중절모와 스틱·담배 등의 소품을 활용해 등장인물들의 섬세한 감정변화를 에로틱한 몸짓에 담았다. 주인공 록시와 벨마가 듀엣으로 보드빌 쇼를 공연하는 장면, 감옥의 여죄수들이 차례로 자신의 남편을 죽인 사연을 이야기하는 장면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뮤지컬은 드라마와 음악, 춤, 다양한 볼거리가 결합한 이룬 종합예술이다. 이 가운데 춤은 많은 뮤지컬에서 드라마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지만 그에 앞서 볼거리의 수단으로도 활용된다. 혼자 또는 여럿이 만들어내는 기하학적인 그림은 사실 그 무엇보다 효율적으로 시각적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순수한 인간의 아이디어로 무대라는 공간을 채워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게 바로 춤이다.

이런 점에서 춤은 가장 전통적이면서 가장 ‘경제적인’ 볼거리의 수단이다. 포시는 이 춤의 역할을 볼거리를 넘어 드라마를 전달하는 매개체로 승화시켰다. 그것도 자신이 창조한 독특한 몸짓을 통해서 구현했다.

[시카고]가 국내에서 꾸준히 리바이벌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의아하다. 국내 관객들은 드라마와 음악을 중심을 이루는 작품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한 분야가 특화되거나, 스타일리시한 뮤지컬은 그렇게 롱런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시카고]는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왜일까. [시카고]에는 포시 스타일 말고도 또 다른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시카고]가 담고 있는 신랄한 사회 풍자의 드라마다. [시카고]는 20세기 초 도래한 대중 사회의 황금만능주의와 현대인들의 부풀려진 욕망을 블랙 코미디에 담아 비춰준다. 대사 한 줄 한 줄이 신랄하지만 코믹하고, 발칙하지만 위트가 넘친다.

남편 몰래 바람을 피우던 록시 하트는 애인이 자신을 속인 것에 화가 나 그를 총으로 쏴버린다. 교도소에 들어온 록시는 자신이 동경하던 보드빌 스타 벨마 켈리를 만난다. 벨마는 남편과 여동생의 불륜 현장을 목격하고 그 자리에서 둘을 죽여버린 죄로 역시 그곳에 먼저 들어온 터였다.

스타를 꿈꾸던 록시는 벨마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만 벨마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벨마는 악덕 변호사 빌리 플린의 도움을 받아 곧 출소할 꿈에 부풀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빌리는 새로 들어온 록시가 훨씬 ‘상품성’이 높다는 것을 금세 알아챈다. 빌리는 록시를 ‘불쌍한 얼짱 죄수’로 포장해 황색 언론의 기자들에게 기삿거리를 만들어주고, 록시는 순식간에 대중의 스타로 떠오른다.

벨마를 뒤로 한 채 록시는 자신에 환호하는 여론을 등에 업고 임신 자작극을 펼친 끝에 무죄로 석방된다. 보드빌 스타를 꿈꾸며 기쁨에 찬 록시. 하지만 희열도 한순간이다. 곧 센세이셔널한 살인 사건이 터지자 기자들은 록시를 잊은 채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몰려간다.

[시카고]는 이렇게 현대 사회의 생리와 인간들의 행태를 코믹하고 노골적으로 비꼰다. 스타가 되기 위해서라면 어떤 짓도 마다치 않는 록시와 벨마, 돈만 되면 있지도 않은 사실을 태연하게 창작해내는 변호사 빌리, 기삿거리만 되면 거리낌 없이 받아쓰는 기자들. 그들은 모두 새로운 스타와 이슈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대중사회의 피조물들이다. 끝없는 탐욕을 중심축으로 해서 돌아가는 현대 사회의 메커니즘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시카고]의 미덕은 이 끔찍한 이야기를 유쾌하고 코믹하게 전달한다는 점이다. 역설적인 풍자의 미학이다. 벨마에게 불륜 현장을 들킨 남편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본 걸 믿을래,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믿을래?” 물론 벨마는 남편의 말을 듣지 않고 바로 방아쇠를 당긴다. 벨마와 록시가 수감된 교도소의 소장 마마 모튼의 인생 철학은 이렇다. “시카고에서 살인은 그저 유행 같은 것에 불과해. 문제는 어떻게 슬기롭게 대처하느냐지.”

록시를 무죄 석방하기 위해 빌리는 온갖 거짓말을 꾸며대 마침내 그녀를 재판정에 세운다. 록시는 법정에서 정당방위를 주장하며 불쌍해 보이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죽였지만, 범죄는 아니에요.” 이미 ‘얼짱’ 여죄수에 넋을 빼앗긴 청중은 “옳소! 옳소!”를 연발한다. 극의 피날레를 앞두고 교도소에서 출옥한 록시와 벨마가 남기는 마지막 대사 또한 유머러스하다. “우리 같은 선량한 사람이 대접받고 살 수 있는 이곳, 미국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모릅니다.”

뮤지컬 [시카고]가 꼬집고 있는 상황은 비단 100년 전 시카고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 세계 어느 도시에서도 여전히 발견할 수 있는 상황이다. 록시처럼 연예인 병에 걸린 젊은이들, 빌리와 같은 악덕 변호사, 무책임한 기사를 남발하는 황색 저널리즘은 멀리 갈 것 없이 21세기 우리 사회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시카고]를 보다 보면 가슴이 뜨끔할 정도다. 시대를 초월한 촌철살인의 풍자, 그것이 [시카고]가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꾸준히 리바이벌되는 근본적인 이유다.

탐욕 가득한 현대 사회 날카롭게 풍자


▎뮤지컬 [시카고]의 연출과 안무를 맡은 밥 포시.
독창적인 포시의 안무, 신랄한 사회 풍자 말고도 [시카고]에는 또 다른 강력한 힘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는 복고의 매력이다. [시카고]는 1970년대 브로드웨이에 불어 닥친 리바이벌과 복고의 유행을 수용했다. 보드빌 쇼가 전성기를 누렸던 1920년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갔다. 극 중 록시가 선망하는 무대인 보드빌은 춤과 노래·코미디·마술 등 다양한 코너로 이루어진 버라이어티 쇼다. 현대 뮤지컬의 조상 중 하나이기도 하다.

보드빌이 유행하던 1920년대라는 설정은 미국의 올드팬들에게 ‘공연 예술의 황금기’ ‘좋았던 옛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극 중 록시와 벨마가 선사하는 듀엣 공연은 보드빌 형식을 따르고 있다. “아 맞아 저런 시절이 있었지”라며 나이 든 팬들은 추억에 잠겼다. 보드빌에서 무대 경력을 시작한 밥 포시에게도 [시카고]는 젊은 날을 회고하는 작품이었다.

포시는 옛날 쇼를 소재로 삼았지만, 영화 [쥬라기 공원]에서 공룡을 복원하듯 있는 그대로 재생하지는 않았다. 창의와 아이디어를 가미해 새롭게 꾸몄다. 당시 브로드웨이에서 새로운 트렌드로 각광받던 ‘콘셉트 뮤지컬(Concept Musical)’의 형식을 도입한 것이다.

‘콘셉트 뮤지컬’은 1940년대 독일에서 건너온 작가 겸 연출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작곡가 쿠르트 바일의 서사극 [서푼짜리 오페라]의 영향을 받아 발전한 양식이다. 이야기가 물 흐르듯 기승전결로 전개되는 기존 드라마와 달리 비사실적이고 양식적인 방법으로 주제를 드러낸다. 음악과 노랫말, 춤, 인물들의 대화와 움직임이 콘셉트(개념)를 중심으로 서로 촘촘하게 얽혀 전개된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애인에게 실연당한 몇몇 사람이 나와 각자의 상황을 보여준다고 상상해보자. 어떤 이는 술에 절어 폐인이 되고, 어떤 이는 군대에 가고, 어떤 이는 새 애인을 찾으려고 하고, 어떤 이는 애인을 다시 찾아가 마음을 돌리려고 하는 상황을 차례로 보여주는 식이다. 극적 줄거리보다는 ‘실연에 대처하는 각자의 자세’라는 일관된 콘셉트에 맞춰 그 상황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뮤지컬이다.

과거 향수 자극하는 복고 매력 ‘콘셉트 뮤지컬’

콘셉트 뮤지컬이란 용어를 대중화시킨 미국의 연출가이자 작곡가인 스티븐 손드하임의 대표작 [컴퍼니]와 20가지 에피소드를 통해 남녀 관계를 탐색한 조 디피에트로 원작의 [아이러브 유] 등이 이 콘셉트 뮤지컬에 속한다.

[시카고]는 교도소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그곳에 온 여죄수들의 이야기를 콘셉트 뮤지컬 기법으로 보여준다. ‘이들은 왜 교도소에 왔으며, 어떤 방법으로 나가려고 하는가’라는 콘셉트에 맞춰 록시와 벨마를 중심으로 각자의 상황을 보여준다. 포시는 [시카고]에 앞서 [카바레](1966)에서도 이미 이 콘셉트 뮤지컬 기법을 활용했다.

콘셉트 뮤지컬의 무대 세트 역시 콘셉트를 따른다. 20세기 초반 발흥한 미술 운동 가운데 ‘개념 미술(conceptual art)’이란 게 있다. 간단히 말하면 대상을 그 개념으로 축소해 표현하는 방식이다. 별을 ‘★’, 남자를 ‘♂’, 여자를 ‘♀’로 묘사하는 식이다.

콘셉트 뮤지컬의 세트는 이 개념 미술의 연장선에 있다. 예컨대 손드하임의 [컴퍼니]를 보면 큰 주사위 모양의 큐브 몇 개가 등장한다. 이 큐브를 움직여 침대와 식탁, 소파, 의자 등을 표현한다. 사실적인 침대와 의자, 소파는 아니지만, 배우들의 연기와 상황을 통해 관객들은 그것이 침대와 식탁, 소파임을 알 수 있다.

[시카고]의 무대 역시 단순하다. 벨마와 록시가 춤을 추면 무대는 보드빌 극장이 되고, 창살 몇 개만 천정에서 내려오면 감옥이 된다. 배우들 역시 무용수 복장으로 죄수가 되었다가, 수첩과 볼펜 하나만 챙기면 기자로 변신한다. 상황과 개념만으로 관객들을 납득 시킨다.

[시카고]는 ‘액트(Act)’라고 불리는 개별 코너로 구성된 보드빌 형식을 따왔기에 콘셉트 뮤지컬과 궁합이 잘 맞는다. 콘셉트 뮤지컬은 주제에 집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대형 블록버스터 뮤지컬과 달리 큰 자본도 필요 없다. 화려한 볼거리의 집약체로 대중들에게 인식된 뮤지컬에 작은 예산으로도 얼마든지 ‘깊이’를 담을 수 있다는 점을 콘셉트 뮤지컬은 입증했다.

밥 포시는 현대 뮤지컬 역사에서 가장 독창적인 인물이다. 기존 문법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만의 기법과 감각, 색깔을 무대에 구현했다. 백지상태에서 원하는 대로 그림을 그려 나갔기에 일부 비평가들의 혹평에 시달리기는 했지만, 자신만의 스타일을 완성할 수 있었다.

몇 년 전 캐나다에 출장 갔다 우연히 현지 신문에 실린 [시카고]의 몬트리올 공연 리뷰를 읽은 적이 있다.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쭉 하더니 맨 끝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 작품의 숨은 주인공은 무대의 배우들이 아니라 세상을 뜬 포시의 여전히 매혹적인 안무다.” 세상 사람들이 느끼는 것은 비슷하다.

※ 김형중 - 공연 칼럼니스트. 연세대와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20년 넘게 공연 담당 기자로 일했고 한국뮤지컬대상과 청룡영화상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무대예술의 경이로움을 글로 풀어내려고 애쓰고 있다. 쓴 책으로 [우리시대 최고의 뮤지컬 22]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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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호 (2021.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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