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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재 전문기자의 레전드를 찾아서(34)] ‘봉사왕’ 김기봉 군산사회복지장학회 이사장 

“베풀며 사니까 내 삶 위로받아 행복은 먼 데 있는 게 아니더라” 

36년간 사재 200억 출연해 봉사·기부 앞장… 국민훈장목련장 수상
‘베푼 건 생각하지 말고, 어려울 때 받은 은혜 잊지 말자’가 좌우명


▎일생의 좌우명을 쓴 족자 앞에 선 김기봉 이사장. ‘서운한 것은 빨리 잊고, 베푼 것은 생각지 말자’ 등의 다짐을 표현했다. / 사진:장정필 객원기자
이번 호에는 ‘봉사왕’ ‘기부왕’ 레전드를 만났다. 36년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어려운 이웃을 위해 마음과 물질을 드린 사람. 군산사회복지장학회 김기봉 이사장이 주인공이다.

김 이사장은 지난 9월 7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제22회 사회복지의 날 기념식에서 국민훈장목련장을 받았다. 소년소녀가장과 홀로 사는 노인 돕기 등 군산지역 복지에 크게 이바지한 공로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자란 김 이사장은 가방 제조업과 외식 사업으로 번 돈을 고향 군산을 위해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그가 봉사와 기부에 쓴 돈만 200억 원이 넘는다고 한다. 김 이사장은 수상 소감에서 “힘들고 어려운 아이들은 나 자신이었고, 아이들의 눈물은 내 눈물이었습니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을 만나러 군산으로 향했다. 인터뷰는 은파호수공원이 내려다보이는 김 이사장의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군산에 수상 축하 플래카드 수백 개, 부담감 커져


▎지적장애인들이 생활하는 목양원 식구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김기봉 이사장. / 사진:군산사회복지장학회 제공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국민훈장목련장은 어떤 상인가요?

“받고 나니 큰 상이더라고요. 이름 그대로 국민이 주는 훈장이죠. 상을 받으려면 국무회의를 통과해야 하고, 그러다 보니 공적 조사도 꼼꼼하게 하더라고요. 이걸 받으려고 선행을 한 게 아니고 주변 추천으로 받게 됐는데 족쇄가 하나 채워진 것처럼 엄청 부담이 갑니다.”

군산 일대에 축하 플래카드 수백 개가 걸렸다면서요?


▎2012년 해남교도소 재소자들에게 자신이 살아온 궤적을 소개하며 특강을 하는 김기봉 이사장. / 사진:군산사회복지장학회 제공
“가족이 서울에 있어서 상을 받은 뒤에 서울에 갔는데 수상 다음 날부터 전화가 오기 시작하더라고요. 지금은 우리나라 복지가 세계적인 수준이지만 그전에는 사각지대가 많았죠. 36년 동안 소외계층, 소년소녀가장, 결식아동, 장애인, 불우 어르신 등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도우면서 살아왔습니다.”

요즘은 어떤 쪽에 관심을 갖고 돕고 계신지요?

“너무 궁핍하게 성장한 터라 제가 도움을 줘서 잘 되는 아이들 보면서 대리만족이라 할까요. 그런 걸 느끼고 있습니다. 살다 보면 때로 어려울 때가 있잖습니까. 빚을 내 도와주기도 했는데 보람은 있더라고요. 교도소 강연도 자주 가고요. 목양원이라고 지적장애인 돕는 곳이 있는데 거기 가면 엄청 위로를 받고 옵니다. 벌써 40년째 인연을 맺고 있는데요. 이 친구들은 침을 흘리고 대소변을 못 가려서 매일 목욕을 해야 합니다. 물을 많이 쓸 수밖에 없는데 수도요금 혜택을 받지 못해서 몇 천만 원을 들여 지하수를 파 줬습니다. 매일 아침 10시에 예배를 드리는데 기도시간마다 김기봉 이사장님을 위해 기도한다고 해요. 힘들고 지칠 때마다 갔다 오면 새로운 힘과 각오가 생깁니다.”

훈장 받으신 뒤 인터뷰에서 “배려하며 살라고 가르치신 어머니께 감사드립니다”고 하셨는데요.

“아버지가 64세, 어머니가 47세에 막내인 저를 낳았습니다. 그때까지는 남의 땅을 안 밟고 사실 정도로 부자였다고 합니다. 제가 네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 후로 집안이 급속히 기울었어요. 어머니는 집안이 잘살 때 어려운 사람을 많이 도왔는데 집안이 기울고 나서도 거지들이 오면 밥 한 그릇이라도 챙겨주시려고 했어요. 그런 어머니 피를 물려받은 것 같습니다.”

성장기에 얼마나 어려운 시절을 보내셨는지요?

“일곱 살 초등학교 들어갈 때였는데 잠잘 집이 없었어요. 자수성가한 사람들 자서전 같은 데 보면 밥을 다반사로 굶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잠잘 집이 없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어요. 오늘은 이 집, 내일은 저 집으로 말 그대로 ‘잠동냥’을 했지요. 당시 월남 파병 갔다 오면서 녹음기나 라디오를 많이 사 왔고, 그걸 훔치는 좀도둑이 들끓었어요. 녹음기 같은 걸 잃어버린 사람들이 내가 훔쳐갔다고 누명을 씌우는 겁니다. 누명을 벗으려면 도둑을 잡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주먹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싸움질을 하고 주먹을 단련했죠. 1987년에 군산 내려와서 우연히 경찰서에 들렀는데 워크맨을 갖고 싶어서 훔친 소년이 조사받는 걸 봤어요. 부모가 없는 소년가장이었는데 어릴 적 제 모습이 생각나서 그때 소년소녀가장자립위원회를 만들게 됐습니다.”

소년 김기봉이 살던 군산 하제포구는 노랑조개가 많이 나는데, 맛이 좋아서 잡으면 100% 일본으로 수출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기봉 집안은 배 한 척 땅 한 평 없었고, 돈이 없어서 공부도 못 했다. 그러니 꿈이 없었고, 매사에 반항적으로 지내다가 툭하면 주먹을 쓰게 되었다. 10대 후반에 해병대에 자원입대한 김기봉은 거기서 3년 동안 몸을 만들고 주먹을 단련했다. “세상은 돈의 힘, 권력의 힘, 주먹의 힘으로 사는데 내가 무시 안 당하고 내 몸을 지키려면 주먹밖에 믿을 게 없더라고요. 주먹 하나 믿고 서울로 올라갔죠.”

고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과 소중한 인연


▎고(故)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아랫줄 가운데)과 함께한 젊은 시절의 김기봉 이사장(뒷줄 왼쪽). / 사진:군산사회복지장학회 제공
서울 와서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가방공장을 해야겠다고 생각해 어렵게 300평짜리 지하 공장은 얻었는데 미싱 놓고 원단 살 돈이 없어요. 인연을 맺은 사장님들한테 사정을 해서 도움을 받았죠. 당시엔 연예인들 사이에 양복을 넣어 다니는 가방이 유행이었어요. 그걸 만들어 팔았는데 대박이 났고, 동구권을 포함해 전 세계에 수출까지 하게 됐습니다. 저는 천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어려울 때마다 도와주는 분들이 있었거든요. 저희 장학회 130명 회원이 있는데 그분들한테도 늘 ‘당신들도 사업을 하려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도움만 받지 말고 베풀고 사회에 환원하고 살라’고 말합니다. 힘들게 돈을 벌어서 조건 없이 남한테 주는 게 죽기보다 힘들다고는 해요. 그런데 베풀면 사업도 훨씬 잘 돼요.”

한때 나이트클럽도 운영하셨다면서요.


▎2014년 8월 23일 군산 삼성애육원 원생들과 함께한 바비큐 파티. 뒷줄 가운데가 김기봉 이사장. / 사진:군산사회복지장학회 제공
“가방공장을 하면서 연예인들과 친하게 됐는데 그분들이 ‘나이트를 하면 도와주겠다’고 했어요. 그즈음에 경북 안강에 골재를 공급했는데 받은 건설사가 부도가 났어요. 사장이 ‘대금을 못 주니 내가 하는 나이트클럽을 인수하라’고 해요. 포항에 있는 나이트에 가 보니 하루에 맥주 한 짝이 안 팔리고 비포장도로라 비가 오면 장화를 신고 가야 할 곳이더라고요. 그래도 연예인들이 도와주니 대박이 났죠. 1년 6개월을 잘 지냈는데 동네 건달들이 각종 청탁을 하기에 거절했더니 15명이 저를 집단 폭행했어요. 저는 누구한테 맞아본 적이 없었는데 그때는 저 혼자였죠. 포항 갈 때 동생들 한 명도 안 데려간 게 전라도 사람이 경상도 와서 나이트 하다가 사고가 나면 큰 사고가 나겠더라고요. 떠나야겠다 싶어서 깨끗하게 정리하고 충남 서산으로 가서 또 성공했어요.”

군산에서도 나이트를 운영하셨죠.

“그때 돈 70억 원을 들여 엄청나게 크고 화려한 나이트를 지었어요. 군산 사람들이 모두 정신병자라고 했지만 저는 군산뿐만 아니라 전주와 일대 도시들을 포함해 인구 200만 명을 보고 만들었거든요. 89년 9월에 오픈했는데 손님들이 들이닥쳐 입구 셔터가 성할 날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넉 달 뒤인 90년 1월 1일부터 영업시간이 자정으로 묶여버렸어요. 그러니 누가 오겠습니까.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잘된 일이죠. 그때 나이트클럽 계속했으면 오점만 남았을 것이고 내 인생에서 가장 귀중한 분들을 만나지 못했겠죠.”

그분들이 원불교 김혜봉 원장과 대우그룹 고(故) 김우중 회장인가요?

“그렇습니다. 김혜봉 선생님은 충남 논산에 있는 원불교 삼동원 훈련원장이신데요. 77세인데 지금까지 산속에 계십니다. 김기봉-혜봉 이름이 비슷하지만 저는 김해 김, 원장님은 광산 김씨라 피 한 방울 안 섞였어요. 저보다 세 살 많은 조카의 군산고 선배로 인연을 맺었죠. 나이트클럽 영업제한 조치로 어려움을 겪고 어음을 막지 못해 코너에 몰렸을 때 도움을 청했어요. ‘100억이 돌아오든 1000억이 돌아오든 내가 다 막아줄게’ 하시고는 그 많은 어음을 ‘어디에 썼나’ 말 한마디 없이 다 막아주셨어요. 지금도 그분이 ‘하늘의 별을 따오라’고 하시면 문방구 가서 종이 사서 별을 만들어 드리든 금으로 만들어 드리든 뭐라도 할 겁니다.”

김우중 회장은 어떻게 만났나요?

“김혜봉 원장님이 제 어음을 다 막아주신 뒤에 ‘너는 사업은 하지 마라’면서 원우건설을 만들어 제게 지분 20%를 줬습니다. 원불교의 원, 대우의 우를 합친 이름이었죠. 그때 김우중 회장님과 인연을 맺었고, 92년에 회장님이 대통령 선거에 나온다고 해서 경호실장으로 차출됐습니다. 회장님이 광주를 방문해 신양파크호텔에서 주무시고 조선대 강연을 가려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데 여자들 몇백 명이 날계란과 밀가루를 집어 던졌어요. 그걸 제가 다 맞았죠. ‘김대중 선생이 출마하는데 김우중이 왜 나오느냐’는 게 그 사람들 주장이었어요.”

94년 군옥장학회 설립을 계기로 봉사와 기부에 본격적으로 나섰는데요.

“자라면서 억울한 일을 너무 많이 당했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상처가 컸어요. 내가 돈을 벌면 나 같은 사람이 다시 나오지 않게 해야겠다고 다짐했죠. 나를 보건복지부 장관 시켜주면 전국 돌아다니면서 있는 분들 협조 얻어서 복지 사각지대를 없애고 싶은데 정부에서 시켜주지 않잖아요. 하하. 그래서 내 고향 군산에서라도 그 일을 하겠다고 다짐한 거죠.”

2000년대 초에는 월명체육관에 어르신 5000명을 초청해 잔치를 베풀고 1만원이 든 봉투를 모든 분들께 드렸다면서요.

“어머님 생각을 했지요. 어머님이 하제포구에서 고기를 받아 갖고 군산 시내까지 60리를 걸어가서 팔았어요. 나는 어머니 잘산 건 모르고 고생한 것만 보고 자랐으니, 막내아들 낳고 나서 얼마나 설움 받고 고생하면서 살았나 싶었죠. 어떡하면 어머니 기를 살릴까 생각하다가 어머니 친구분들 노시는 마을회관 같은 데를 찾아가 1만원씩을 드렸죠. 그때만 해도 큰돈이었어요. 누가 어머니 음료수 사 드렸다 하면 만원을 더 드리고 그랬습니다.”

지적장애 아이들과 삼겹살 먹을 때 가장 행복


▎2013년 9월 야구 꿈나무들을 초청해 ‘코리안 특급’ 박찬호 선수와 함께한 서울미술관 투어. / 사진:군산사회복지장학회 제공
고마운 사람은 끝까지 찾아가 신세를 갚는다고 하던데요.

“80년대 초 서울서 가방공장 할 때 종업원을 1000명까지 거느려 봤어요. 있는 집 아들들한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디다. 당시 대졸 월급이 30만원 정도였는데 100만원 줄 테니까 오라고 해서 인재를 모았어요. 전 세계에 가방을 수출할 때라 무역 업무를 해야 하는데 나도 영어를 모르는데 직원이 결재받으러 오면 ‘이걸 결재라고 가져왔냐’라며 결재판을 집어던지기도 했어요. 거기서 끝나면 원수가 되는데, 내가 자기 부모한테 용돈 드리고 관광도 보내 드리고 하니까 풀어지더라고요. 그리고 내가 배고플 때 따뜻한 말 한마디, 밥 한 그릇이라도 준 사람들 다 갚고 살았죠.”

구체적인 예를 들면요?

“군산에 대우자동차 공장이 들어왔잖아요. 이 지역 가까운 동생이 찾아와 ‘형님, 먹고 살게 해 주소’ 하면서 함바(건설현장 식당) 운영권을 받게 해 달라고 하소연을 해요. 사장한테 말하니 김우중 회장님 소관이라고 해서 회장님께 부탁드려 내가 딴 뒤에 아무 조건 없이 그 동생한테 줬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6개월 하다가 사업이 부도가 나 도망간 겁니다. 당시 제 와이프가 23살에 두 살, 한 살 연년생 아들을 키우고 있었는데 ‘당신이 해 줘야겠다’고 부탁했어요. 한 끼에 5000명분, 하루 다섯 번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데 그걸 와이프가 해내더라고요. 그러면서 가까운 사람들한테 고춧가루라도 김치라도 납품하라고 기회를 줬어요. 그중에 어렵게 사는 한 분이 고춧가루를 납품해 아들을 검사로 키웠어요. 그분은 40년 동안 명절과 내 생일에 한 번도 빠짐 없이 떡을 해 옵니다.”

반면에 도움을 받고도 소식을 끊는 사람도 많죠?

“저희한테 장학금을 받고 도움을 받은 친구들이 보낸 편지가 많아요. 가끔 읽어보면 ‘저도 성장해서 이사장님처럼 남 돕고 살겠습니다’라며 구구절절 감사의 마음을 담아 글을 썼어요. 그런데 사회생활 잘하고 있으면 편지나 전화 한 통하는 게 도리일 텐데 소식을 딱 끊어버리는 사람이 많아요. 그런 걸 보면서 괘씸하기도 하고 회의감도 들 때가 있었어요. 제가 30년 넘게 매일 밤 반성의 시간을 갖는데요.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나. 이런 생각을 할 거라면 도와주면 안 되지’ 싶어서 마음을 추스르고 그랬습니다.”

김 이사장이 자신이 쓴 글이라며 족자를 보여줬다. 정갈한 그림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었다.

우리는!
함께할 때 존중하고
없을 때 칭찬하고
힘들 때 서로 돕고
서운한 것은 빨리 잊고
베푼 것은 생각지 말자
그러나
도움받은 은혜는
영원히 기억하자
우리는…

힘들게 번 재산을 나눠주는 건데 좀 더 효율적으로,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건 아닌가요?

“주변에서 그런 얘기도 많이 합니다. 그런데 가서 보면 다 도와줘야 할 데고…. 장애인들 보면 눈물 나잖아요. 그거 안 도와줄 수 없잖아요. 목양원 갔다 오면 편지가 옵니다. ‘키다리 아저씨, 우리 에버랜드 한번 가게 해주세요.’ 그러면 다섯 명에 선생님 한 명씩 짝을 지어 에버랜드로 보냅니다. 평생 주는 것만 먹고 외출 한번 못해 본 친구들이잖아요. 3만원씩 나눠줘서 아침, 점심, 저녁을 자신들이 먹고 싶은 걸 사 먹게 해 줍니다. 그 아이들과 같이 손잡고 여행하고, ‘키다리 아저씨, 우리 삼겹살 먹고 싶어요’ 하면 삼겹살 사서 같이 구워 먹고.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저하고 같이 간 사람 중에 비위가 약해서 그 아이들과 같이 못 먹는 분들도 있어요. 난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어요. 아이들이 나한테 뽀뽀하는 것도 너무 좋고요. 하하하.”

베풀면 더 많은 걸 받는다는 말, 진짜죠?

“당연하죠. 내 걸 줘 봐야 내 인생이 있답니다. 안 줘보고 욕심으로 살면, 화 때문에 건강이 무너집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제가 무슨 종교인이라도 된 것 같은데요. 저는 믿음이 약합니다. 와이프가 4대째 크리스천 집안이라서 교회 나가는 조건으로 결혼했는데 그래도 믿음이 부족합니다. 와이프와 결혼할 때 엄청난 반대에 부닥쳤는데 너무 착하니까 놓칠 수가 없었죠. 마누라 자랑하면 바보라고 하는데, 저는 자랑하고 싶습니다.”

큰아들, 3000만원 들여 눈 수술 후 31살에 자원 입대


▎군산시내에 있는 장학회 사무실에서 2021년 9월 7일 수여된 국민훈장 목련장과 훈장증을 보여주고 있는 김기봉 이사장. / 사진:장정필 객원기자
집안에도 이사장님 덕분에 잘된 분들이 많죠?

“군대 PX(매점)에서 외상으로 이것저것 먹고 휴가 갔다 와서 갚아야 하는데 2~3만원 갚을 돈이 없었어요. 시집간 작은 누나밖에 믿을 데가 없어서 누나 시댁 큰집에서 세 번 정도 도움을 받았어요. 당시에 초등학생이던 그 집 아이가 나중에 깡패가 됐어요. 대우자동차 공장이 완공된 뒤에 김우중 회장님이 제게 공장 청소 용역권을 줬어요. 그 친구한테 ‘다시는 깡패짓 안 한다’는 각서를 받고 청소 업체 운영하게 해줬고, 그 와이프한테도 구내식당 하도록 도와줬죠. 어렵고 힘들 때 잘해줬던 분들은 자식들까지 다 취직시켜 줬어요. 어머니가 절 보면서 ‘저놈 속만 차리면 소원이 없겠는데’ 하셨는데 속 차렸고, 밥 먹고 살고 아들도 둘이나 보여드렸죠. 누나 시집갈 때 용돈도 못 드렸는데 집까지 사 드렸으니 어머니는 볼 거 다 보고 편안하게 돌아가셨어요.”

좋은 일 하면서도 욕을 먹고 엉뚱한 오해를 받는 세상이다. 주위에서 ‘정치 하려고 하나’ ‘자기 사업 도움 받으려고 저러는 거지’ 하는 수군거림이 들리지 않았을까. 김 이사장의 말이다. “군산서 제 사업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여기 시장·국회의원 출마하면 내 이름이 항상 들어가 있었어요. 87년부터 지금까지 그런 얘기 늘 들어왔지만, 정치든 사업이든 뜻이 없어요. 여기서 사업도 하고 싶지만 나 때문에 피해자 생기잖아요. 내가 하면 어차피 일등 할 텐데 그럼 같은 업종에 투자한 사람들은 피해를 볼 테니까요.”

무한정 퍼 주는 아빠에 대해 가족은 어떻게 생각하던가요?

“큰애가 고등학교 때 아빠 돈 얼마나 있냐고 물어봐요. 먹고 살 만큼은 있는데 네가 그걸 물어보는 이유가 뭐냐고 했어요. 재산을 물려받고 싶냐, 그럼 다른 사람 안 돕고 모아 놓을 게. 내가 너한테 물려줄 건 장학재단뿐이야. 아빠처럼 너도 살기를 바란다. 이렇게 사니까 너무 행복하고 좋더라. 좋은 일 안 하고 너한테 물려줄까 하니 ‘아빠 좋은 일 하세요’ 하더라고요. 하하하.”

자식 농사도 잘 지었다고 소문이 났네요.

“작은놈은 야구를 시켰다가 골프로 전향해서 미국에서 프로골퍼가 됐어요. 큰애도 미국 조지워싱턴대 약대를 장학생으로 졸업하고 약사 자격증 따서 귀국했어요. 미국 있을 때 성공한 교포분이 특파원들 초청해서 만찬을 열었는데 거기 참석한 큰애가 자기소개를 하면서 ‘여기 계신 분들은 저를 기억해 주세요. 앞으로 한국 나가서 대통령 될 사람이니까요’ 했답니다. 31살 먹어서 한국 나왔는데 눈이 나빠서 군대에 안 가도 된다고 해요. ‘대통령 할 사람이 군대 안 가서 되겠냐’ 해서 3000만원 들여 눈 수술한 뒤에 육군에 입대했습니다. 다음 달에 전역하네요. 아이들이 잘 커 줘서 고마울 뿐이죠.”

거액을 기부하고도 정작 자신을 위해 돈을 쓰지 않는 분들도 계신데요.

“질문 잘하셨습니다. 제가 바보는 아니잖아요. 먹고 싶은 거 먹고 하고 싶은 거 다 먼저 합니다. 어려운 아이들을 도와주기 위해 저금하고 이런 건 아닌데 사업 하다 보니 돈이 생기더라고요. 그러다가 돈 떨어지면 빚 좀 내서 도와주고, 또 돈 벌고. 이렇게 낙천적이고 낭만적으로 삽니다. 골프도 언더파칠 정도로 잘했어요. 요즘은 요트 하나 사서 바다 낚시 다니고 있습니다.”

만추의 석양이 은파호수를 물들이고 있었다. “앞으로 어떤 일을 더 하고 싶으세요? 10년 뒤에는 어떤 모습이 돼 있을까요?” 물었다. 김 이사장이 허허 웃더니 대답했다.

“지금에 만족하고 이대로 가는 게 참 좋아요. 아들들에게 장학재단 물려주면 자기들 인생 살면서 좋은 일도 할 것 같아요. 행복이요? 먼 데서 찾을 거 없더라고요.”

※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 중앙SUNDAY에 ‘스포츠 오디세이’ ‘스포츠다큐-죽은 철인의 사회’를 연재하고 있다. 중앙일보 스포츠부장을 역임했고, 2013년 이길용체육기자상을 수상했다. 연세대 국문학과,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에서 공부했고 한국체대에서 스포츠산업경영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튜브 방송국인 중앙UCN의 부사장을 겸하고 있다.

202112호 (2021.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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