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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준봉 전문기자의 책과 사람(20)] 출가 11년 만에 '조용히 솔바람 소리를 듣는 것' 신작 낸 동명 스님 

성공과 행복은 뭘까 선시(禪詩)에서 길을 찾다 

“잘 쓰고 싶다는 욕망 괴롭다”며 시인·평론가로 활동하다 세속과 이별
“해설집 속 시엔 여유 가득, 가치관 바꿔야 평정심” 수행과정 녹아든 책


▎조계종 동명 스님은 세속의 마음공부에서 출세간의 마음공부로 떠나온 사람이다. 조계종 출가 전 그는 알려진 문인이었다. 시를 쓰고 문학평론을 했다. 문학이라는 업을 일종의 마음 공부, 세상과 인간 본성에 대해 탐문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공부 무대를 옮겨왔다고 할 수 있겠다는 뜻이다. / 사진:임안나
세상 바쁜 건 우리 마음이다. 잠시만 따져봐도 금세 알 수 있다. 심지어 그런 점을 따져보는 데도, 지금 기자가 쓰고 있는 이 문장을 제3자가 읽고 뜻을 파악하는 데도 결국 우리는 마음을 써야 한다. 불가에서는 마음의 그런 쉼 없는 작용을 시끄러운 원숭이에 빗댔다. 6근(根), 눈·귀·코·혀·몸, 이렇게 다섯 개의 감각기관에 우리의 지각능력을 더해 모두 6개의 창이 뚫린 방 안에 갇힌 원숭이처럼 우리 마음은 다만 잠시라도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쁜 마음을 좀 더 써보면, 우리 마음은 저절로 바쁜게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날뛰는 호기심의 바닥에는 욕망이라는 컴컴한 덩어리가 흉측하게 뭉쳐져 있는 건 아닐까.

이런 마음의 사정을 조선 명종 대의 선사(禪師) 허응 보우(虛應普雨·1515~1565)는 다음과 같은 선시로 표현한 적이 있다.

“마음이 고요하다면 어찌 수고로이 세상을 피하랴
형체와 소리가 모두 본래 참된 근원이어라
시끄러움 싫어하여 고요함을 구하여도 마음이 생멸에 머문다면
스님이시여 끝내 저 불이문을 알지 못하리라

(心靜何勞避世喧
色聲俱是本眞源
厭喧求靜心生滅
師必終迷不二門)”


[금강산으로 가려는 스님에게(有僧欲向金剛以詩示之)]라는 제목의 선시다. 진리는 먼 데 있지 않고 저잣거리에라도 있다, 결국 우리 마음먹기 달린 것이다. 이런 불가의 익숙한 가르침이 결국 이 선시의 핵심 메시지일텐데, 지금 우리에게 와 닿는 것은 ‘마음이 생멸에 머문다면’, 이 대목이다. 죽고 사는 일, 거기에서 비롯되는 온갖 번뇌와 욕망, 이런 것들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마음 바쁜 원숭이 신세를 우리는 영영 면치 못하리라는 것이다.

이 선시는 조계종 동명 스님이 최근 출간한 선시 해설집 [조용히 솔바람 소리를 듣는 것](조계종출판사)에 소개돼 있다. 그런데 스님에게 선시는 공염불이 아니다. 허응 보우의 선시는 바로 스님 자신에게 해당되는 얘기다.

알려진 대로 스님은 출가 전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였다. 기자는 2010년 출가 직전 시인 차창룡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세간에서의 마지막 인터뷰였다. 그 자리에서 차창룡은 “시 잘 써서 좋은 평가를 받고 싶다는 문학적 욕망에 사로잡혀 사는 게 괴로워 출가한다”고 말했다.

부처님 시대에 교리는 지금처럼 어렵지 않아


▎[조용히 솔바람 소리를 듣는 것](2021년)
11년 만에 새 책을 들고 나타난 동명 스님은 맑고 차분한 수행자의 모습이었다. 그의 선시 해설집에 기자는 ‘알기 쉽고 촉촉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싶다. 문학적 감성이 살아 있어 물기 있으면서도, 요령부득 불투명한 선시의 의미를 순하게 분해하는 부드러운 날카로움이 비친다. 뭔가 여백 많거나 그래서 공허하거나, 반대로 아둔한 소견으로는 범접 못할 아득한 경지의 말 놀음이라는, 선시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킨다. 그런 책 속의 사례를 하나하나 이 자리에서 끄집어내서는 우리는 영원히 불이문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대신 스님의 법음(法音)을 직접 들어보기로 했다. 지난달 5일 스님이 생활하는 광명시 금강정사를 찾았다. 스님의 은사 스님인 지홍 스님이 주석하고 계신 곳이다. 파란 건 하늘, 빨갛고 노란 건 단풍. 그런 색(色)의 세계가 마음까지 물들이는 전형적인 가을날이었다.

선시 해설집이 어렵지 않고 쉽게 읽힙니다. 너무 어려운 얘기만 하기보다 이렇게 해야 요즘 독자들에게 잘 먹힐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참신하게 느껴집니다.

“맞습니다. 누구나 다 공감할 수 있도록 쉬워져야 됩니다. 그런 점에도 불구하고 학문적으로 접근하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깊이를 확보해야 하는 면도 있으니까요. 불교 교리를 어려워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부처님 시대에 불교는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었습니다. 당시 인도는 어떤 사안에서든 논쟁이 심하게 붙었던 나라인데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어려운 말로 상대를 제압하려 하다 보니 불교 교리가 정치해지고 정교해졌다고 합니다.”

마음의 평정을 얻고자 하는 일반인이나 불자들을 위한 책이지만 결국 스님이 수행과정에서 느낀 바가 자연스럽게 녹아든 책이라고 느껴집니다.

“결국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게 가장 중요한 포인트더라고요. 마음을 고요히 해 여유를 갖지 못하면 불교 수행이 제대로 안 됩디다. 불자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출가자에게도 주어진 임무가 은근히 많습니다. 그것들을 잘해내야겠다고 생각하다 보면 마음이 바빠집니다. 그러면 고요한 상태, 정(靜)을 유지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다고 일을 안 하는 것도 아닌데 결국 문제가 있는 거죠. 그런데 선시 속에서 길이 보이더라고요. 선시는 전부 여유를 이야기하고 있어요. 책에 소개한 선시를 쓴 선승들은 일을 많이 했던 사람들입니다. 대부분 고승 반열에 올랐던 사람들이고 지도자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쁘지 않고 여유가 있었다는 게 선시에서 느껴집니다. 우리가 여유를 어떻게 찾을 것인지, 어떻게 바르게 살 것인지, 화두 참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가 모두 선시 안에 들어 있습니다. 이야기 소재도 다양해요. 출가 이야기도 있고 몸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치아에 대한 이야기, 혼자 달을 보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런 선시를 접해서 마음의 여유가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고 해서 바로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아는 것과 실천은 다른 문제인데요.

“쉽지는 않죠. 결국 가치관이 좀 달라져야 할 것 같습니다. 성공이란 무엇이냐. 행복이란 무엇이냐. 그에 대한 생각들 말입니다. 불자도 그렇지만 스님들도 마찬가지인데요. 스님들의 실력은 뭘까 생각해보면 스님이 되기 위해 승가대를 다닐 때 승가대도 대학이니까 성적을 매깁니다. 시험도 보고 결과물도 제출해 우등생이 나오고 열등생이 나옵니다. 그런데 거기서 점수를 잘 받았다고 해서 스님 공부를 잘하는 것이냐. 스님들의 진짜 실력은 늘 고요해질 수 있고, 뭔가 화나는 일이 있어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 게 진짜 실력입니다. 그런 식으로 가치관이 달라져야 된다는 겁니다.”

마음의 평정심 유지 위해선 수행 필요


▎[고시원은 괜찮아요](2008년)
무엇을 성공이라고 볼 것이냐, 성공의 내용이 달라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지금 성공하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이냐를 바로 보면 웬만한 일에 화를 내지 않고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럴 수 있다면 행복할 거고요.”

결국 질문이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성공이나 행복에 대한 가치관은 그럼 어떻게 바꿀 것이냐. 마음만 먹는다고 될 것 같지 않습니다. 비슷한 얘기지만 정말 어려운 건 마음 먹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인도에서 붓다를 만났다](2010년)
“그래서 수행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는 말이죠.”

화두 참선 같은 걸 말씀하시나요. 일반인은 아무래도 실천하기 어렵습니다.

“화두 참선 말고 다른 수행프로그램도 있습니다. 명상도 할 수 있고, 불자라면 늘 하는 염불도 그렇고요. 수행자라고 하더라도 출가하고 나서 제어하기 힘든 것 중 하나가 감각적 욕망이나 분노, 이런 것들인데 그래서 그런 것들을 제어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꼭 불자가 아니더라도 템플스테이 같은 게 효과가 있습니다. 절에서 스님들하고 비슷한 생활을 해보는 것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됩니다.”

호흡을 중시하는 남방불교는 상대적으로 마음 수련이 덜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그에 비해 한국의 화두 참선은 매우 어렵다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용맹정진, 백천간두 진일보, 이런 표현들이 수행의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구요.

“육조 혜능, 남악 회양, 마조 도일로 이어진 중국 선불교의 전통이 한국 불교로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마조 도일은 ‘평상심시도’를 말씀하신 분입니다. 쉽게 말해 평상심이 도라는 뜻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용맹정진파가 아닙니다. 한국 불교는 근대 선사들 가운데 용맹정진파가 많다 보니 선방에서 그런 전통을 선호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가령 성철 스님은 10년 동안 암자 둘레에 철조망을 친 채 스스로를 가두고 수행했다고 하지 않습니까(동구불출). 용맹정진이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사람마다 근기(根機·불법을 받을 수 있는 능력)가 다르니 필요에 따라 할 수도, 안 할 수도 있는 겁니다.”

출가해보니 여기도 똑같이 사람 사는 곳


▎2010년 출가 직전 인터뷰 당시의 모습. 동명 스님은 출가 전 시인 차창룡이었다.
불교의 선정(禪定) 수행은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지혜(智慧) 수행은 어떤 건가요.

“우리 선불교 쪽에서는 지혜 수행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지가 제대로 만들어져 있지 않습니다. 초기불교에는 단계가 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내 몸이라는 것은 영원하지 않고 내가 임시로 몸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깨닫기 위해 분석적으로 들어갑니다. 몸의 각 부분을 하나하나 관찰하면서 명상에 들어가는 거예요. 차가운 느낌, 기분 나쁜 소리, 이런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느낌이, 내 마음이 달라지는 모습을 관찰하는 거예요.”

화제를 좀 바꿔보겠습니다. 출가 전 밖에서 바라보시던 불교와 출가 이후 불교가 얼마나 다릅니까 아니면 비슷합니까.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출가 전 알던 게 진짜 피상적이었다는 생각이 들고 특히 승가(僧迦·수행자 단체)에 대해서는 완전히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들어와 보니 굉장히 위계적이더라는 말씀인가요.

“밖에서 볼 때는 완전히 이상적인 스님들의 공동체라고 생각했는데 와서 보니까 여기도 똑같이 사람 사는 곳이고 삶의 냄새가 나는 곳이죠.”

모순도 있구요.

“출가 이후 곧바로 환속하는 분들 가운데 승가가 이상 세계라고 생각해서 왔는데 세속하고 별 차이 없다는 점을 깨닫고 떠나는 분들이 꽤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종교나 마찬가지겠지만 불교에도 볼썽사나운 종단 정치가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 부분은 제가 정확하게 모릅니다. 어쨌든 승가는 그렇고요. 불교 같은 경우는 밖에서 제가 깊이 있게 공부를 못했더라고요. 밖에서는 주로 대승불교 서적만 읽었지 초기불교 경전은 소승불교라고 해서 별로 안 읽었는데 막상 출가해서 보니까 오히려 그쪽이 더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우리 삶에 더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게 많아 보입니다.”

출가 이후 지금까지 가장 어려운 점은 뭡니까.

“특별하게 어려운 건 잘 못 느끼겠어요. 여전히 마음 다스리기가 제일 어렵죠. 근근이 공부를 해나가다 보면 내가 진짜 이제는 항상 마음을 편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어느 순간 뭔가 못마땅한 소리를 듣거나 하면 약간 화가 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진짜 마음 다스리기가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가장 좋은 점은 뭡니까.

“확실히 자유로워요. 세속에 살다 보면 여기저기 인사도 해야 하고 예의도 차려야 하고 참 의무가 많았던 것 같아요. 출가한 다음에는 상대적으로 그런 것에서 훨씬 자유롭게 된 것 같습니다. 출가 자체가 수행 중인 거니까 ‘예의 안 차리겠습니다’ 이런 게 통합니다. 그런 게 제일 좋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출가 전 문인이셨는데 문학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나요.

“문학에 대해 좋아하는 부분이 좀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약간 비관적이었고, 사람들의 심리랄까, 약간 어둡다고 생각했던 세상의 본질, 이런 것들을 어떻게 천착해낼 거냐, 그런 것을 잘해내는 것이 깊이 있는 문학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쪽을 좋아하게 된 것 같습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 그러다 보면 깊이는 없을지라도. 그런 게 좋습니다. 물론 깊이가 없으면 오래 가지 못하겠지만 어떤 위안을 주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지 않으냐, 그런 쪽으로 선호가 바뀐 것 같아요.”

출가한 뒤에 문학에 대한 생각 바뀌어


▎동명 스님은 “출가 이후 문학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다. “반드시 좋은 작품을 써야겠다는 욕심을 내려놓았다’는 것이다. / 사진:임안나
시는 계속해서 쓰셨나요.

“선시든 보통 시든 가리지 않고 몇 편 쓰긴 했어요. 옛날처럼 열심히 쓰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청탁이 많지 않기도 하지만요. 도저히 시 원고를 펑크 낼 수 없어서 억지로 쓴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옛날처럼 쓸 생각은 없고요. 편하게 시가 되든 안 되든 현재의 내면을 있는 대로 드러내려고 생각하고 그렇게 몇 편 썼어요.”

대추차, 오미자차를 앞에 둔 동명 스님과의 차담은 한 시간을 훌쩍 넘겼다. 한 시간 반쯤 됐을까.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스님께 출가 이후 쓴 시를 보내달라고 청했다. 이날 저녁 늦게 스님은 모두 네 편의 시가 담긴 파일을 e메일로 보내왔다. 그 가운데 [평상심(平常心)이 도(道)다]라는 시는 소박하면서도 단단한 작품이다.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말자

평소에 비해 너무 잘하면
일종의 사기다

너무 착한 척하지 말자

평소에 비해 너무 착하면
그것은 분명한 사기다

이런 것도 시(詩)가 될까?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말자”


[꿩의 힘을 빌려서]는 좀 더 다이내믹한 것 같다. 여운이 느껴져서다. 시의 화자는 무언가가 몹시 그리운 상태다. 시름을 깊게 하는 뒷산은 가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럼에도 꿩 핑계를 대고 뒷산을 찾는다는 대목이 핵심 포인트인 것 같다. 감상해보시길. 읽기에 따라 상당히 슬픈 시다. 어떤 길은 이리 애달프고 목이 멘다.

“목련은 벌써 지고 없는데
꿩의 힘을 빌려서
뒷산에 간다

보리수도 열리면 무엇하리
소쩍새가 밤새 울어서
나는 휘파람새 부르며
뒷산에 간다

아무리 버려도
버려지지 않는
그리움이여

뒷산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저 강 너머를 바라보는
정자(亭子)가 있다”


※ 신준봉 문화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 1993년 중앙일보에 입사했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신문사에서 10년 가까이 문학담당 기자로 일하며 본격적으로 문학과 인연을 맺었다. 상식의 눈에는 괴짜인 문인들, 그들이 생산한 영롱한 것들을 초롱초롱한 독자들에게 중개하는 일, 제도로서 문학의 생로병사에 관심이 많다.

202112호 (2021.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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