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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수의 국가를 품격 있게 만든 지도자들(3)] 갈등에서 화합의 길 찾은 존 F. 케네디 

국민에게 용기와 자신감, 꿈과 미래 선사하고 떠나다 

척추병으로 군대 가지 않아도 됐지만 해군 자원입대 이어 2차 대전 참전
내각 구성 시 장관 선임에 신경… 정당 성향 관계없이 유능한 사람 발탁


▎존 F. 케네디는 갈등과 분열을 화합과 평화로 전환한 위대한 정치가로 평가된다. 암살 당일이던 1963년 11월 22일, 텍사스주 댈러스 시내에서 카퍼레이드를 하고 있는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
미국 근무 시절 보스턴 해변에 세워진 케네디 대통령 기념관을 찾곤 했다. 이 기념관은 재클린 여사가 이오 밍 페이(I. M. Pei)라는 저명한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에게 의뢰해 건립됐다. 건물 전체가 하얀색으로 단순하면서도 운치 있을 뿐만 아니라 바닷가 바로 옆에 위치해 파도와도 잘 어우러졌다. 기념관 한 벽면에는 ‘사람은 죽게 마련이며, 국가는 융성하다가 쇠퇴하곤 하지만 우리의 생각은 계속 살아남는다(A man may die, nations may rise and fall, but an idea lives on)라는 케네디의 명언이 크게 조각돼 있다. 실제로 케네디는 죽었지만, 그가 남긴 생각은 미국 사회 변화의 원동력이 됐다.

기념관 안에 들어서니 케네디가(家)의 존·로버트·에드워드 삼 형제가 함께 웃으며 포즈를 취한 대형 사진이 한눈에 들어왔고,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 연설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케네디는 준수하게 생겼을 뿐만 아니라 친근한 연설로 대중적인 호감을 얻었다. 그가 떠난 지 60여 년이 되는 지금도 케네디 영상을 보면 말이 주는 위력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는 연설뿐만 아니라 글도 잘 썼다. 퓰리처상을 받은 [용기 있는 사람들(Profiles in Courage)]이라는 저서에서 케네디는 여러 상원의원이 자신들의 경력이나 명성에 흠이 가는 것을 무릅쓰고 국가를 위해 과감한 행동을 취했던 용기가 오늘날 미국의 민주주의를 이뤘다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연설이나 발언에는 유독 ‘용기’라는 단어가 자주 거론되고 있다.

케네디의 연설 가운데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것은 1961년 취임사, 1962년 쿠바 위기에 대한 대국민연설, 1963년 민권법안 관련 연설, 1963년 베를린 시청에서 한 연설 등이다. 위기가 뛰어난 영웅을 낳는다고 하지만 1962~1963년 급박했던 미국의 상황을 생각하면 커다란 위기와 사건이 명연설을 낳았다고 할 수 있다.

케네디는 196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 미국이 당면한 도전에 대처해나가기 위해 ‘새로운 개척정신(the New Frontier)’이라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이러한 정신에 따라 그는 취임사에서 미국의 변화를 위해, 새로운 세대가 새로운 문제에 대응해 새로운 책임감으로 대처할 때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했다.

그의 연설은 사회 분열을 치유하기 위한 제퍼슨 대통령의 취임 연설, 남북전쟁 전사자를 추모하고 국가통합을 다짐하는 링컨 대통령의 게티즈버그 연설, 대공황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취임 연설과 함께 국민을 통합하는 뛰어난 연설로 평가된다.

케네디 취임 연설의 특징은 전체 길이뿐만 아니라 각 문장도 비교적 짧다. 또 그 자신의 전쟁 경험과 여러 국가를 방문하면서 느낀 내용, 그리고 당시 세대가 공동으로 인식하는 문제 등을 담았기에 크게 공감을 얻었다. ‘국가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지 말고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어보라’는 유명한 어구에는 국민도 국가에 의존하기보다 스스로 사회에 기여하면서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이 의무라는 케네디의 개인적 신조가 반영됐다. 이 문장은 학생 사이에서 ‘친구가 너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묻지 말고 네가 친구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스스로 물어보라’는 패러디로 널리 퍼졌다.

반복·대구 통해 기억하기 쉽고 호기심 유발하는 명연설


▎1963년 6월 26일 독일 서베를린 라트하우스 쇠네베르크 시청사 앞 루돌프 빌데 광장에서 케네디 미 대통령이 연설하고 있다.
케네디의 연설에서는 중요한 점이 반복되고 대구(對句) 형식을 취하고 있어 기억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호기심을 유발한다. 예를 들어 ‘상대를 두려워하는 가운데 협상해서는 안 되지만 협상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Let us never negotiate out of fear, but let us never fear to negotiate)’와 같은 문장이다. 소련과의 협상을 두려워할 필요 없다는 내용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케네디는 또한 ‘실패의 원인은 한 가지뿐인데 성공의 원인은 100가지나 나온다(Failure is an orphan, but success has a hundred fathers)’와 같이 재미있거나,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A journey of a thousand miles begins with a single step)’라는 동양의 경구도 즐겨 인용함으로써 많은 사람에게 다가갔다.

1963년 베를린 시청 연설도 널리 회자됐는데, 그 가운데 “2000년 전에는 ‘나는 로마 시민이다(civisRomanus sum!)’라는 것이 커다란 자랑이었지만 이제 ‘나는 베를린 시민이다(Ich bin ein Berliner!)’라는 것이 가장 자랑스럽다”는 문구는 분단과 장벽에 둘러싸인 서베를린 시민들에게 큰 용기를 줬다. 시민들의 반향은 예상을 뛰어넘게 컸으며 독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커다란 울림이 됐다.

케네디는 아무리 좋은 연설이라도 행동의 변화를 불러일으키지 못하면 의미가 없고, 연설 그 자체로만 그치게 된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대통령 후보로서 미시간대를 방문했을 때 젊은이들에게 가난한 나라를 위한 평화봉사를 강조했던 즉석연설은 큰 반향과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대통령 취임 이후 평화 봉사를 실현하기 위한 조치를 서둘러 추진했고, 수개월 뒤인 1961년 8월에 국제사회에 기여하고자 하는 평화봉사단원 1기 51명을 가나와 탄자니아에 파견했다. 이후 지금까지 140여 개국에 19만여 명이 참여했으며, 한국에도 1966~1981년 2000명이 넘는 미국 젊은이가 전국 곳곳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케네디는 취임 후 100일도 되지 않은 1961년 4월, 카스트로 정권 전복을 위해 쿠바 망명자들이 주도하는 피그스만 침공을 지원했지만 처절한 실패로 끝났다. 피그스만 침공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부터 진행돼오던 계획으로, 케네디가 집권 후 업무를 숙지하지 못한 시점에 CIA(미 중앙정보국)와 합동참모본부의 주장만 믿고 추진하다가 일어난 사건이다.

또 다른 실패는 1961년 6월 빈에서 열린 케네디의 첫 미·소 정상회담이었다. 그는 이 정상회담을 위해 루엘린 톰프슨 전 소련 주재 대사, 조지 캐넌 등 소련 전문가뿐만 아니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의 조언까지 받아 준비했다. 하지만 흐루쇼프는 쿠바 침공, 베를린 문제, 미국의 반소정책 등을 주제로 맹공을 퍼부어 케네디에게 참담한 좌절을 가져다줬다.

그는 미·소 정상회담이 동서진영 간 전쟁 위험을 감소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증가시키지는 않았나 하는 우려를 가졌을 정도로 낙담했다. 실제로 흐루쇼프는 정상회담 후 케네디를 경험 없는 연약한 지도자로 치부하면서 1962년에 쿠바 내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는 조처를 하게 되고 이로 인해 핵전쟁 직전까지 이르게 됐다.

이처럼 케네디는 취임 첫해인 1961년 두 차례 커다란 실패를 경험했으며 이것이 자신에게 족쇄가 됐다. 그러나 케네디는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1962년 발생한 미·소 간 핵전쟁 위기 상황에서 소련에 과단성 있게 대응하되 인내심을 가지고 협상함으로써 전 세계를 핵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도록 했다.

다양한 의견 개진·논의 거친 뒤 대통령이 책임 있게 결정


▎1961년 정상회담을 통해 대화의 테이블을 차린 존 F. 케네디(오른쪽) 미 대통령과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총리.
국가 지도자가 얼마나 커다란 짐을 짊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외로운 결정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쿠바 미사일 위기다. 통상 ‘13일’로 지칭되는 이 사건은 정찰 비행을 통해 소련이 쿠바 내 미사일 기지를 설치한 것을 확인한 1962년 10월 16일부터 미사일 기지 건설이 중지된 10월 28일까지 13일간 일어난 위기 상황을 말한다.

이 위기가 제3차 세계대전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았다고 보는 이유가 있다. 미사일 기지 건설을 확인한 시점에 소련군 4만3000여 명과 핵탄두 장착 미사일을 포함한 중거리 미사일 42기가 이미 쿠바에 배치돼 있었고, 소련군 사령관은 핵무기 사용 전권을 위임받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만약 미군이 쿠바를 공격했다면 소련군 피해가 다수 발생할 것이고, 그럴 경우 쿠바 주둔 소련군은 중거리 핵미사일로 대응해 미국 내 주요 도시에서 커다란 피해가 발생했을 것이다.

소련은 또한 미군이 주둔한 서베를린 또는 터키 등 유럽 국가도 공격해 미군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이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이 소련을 공격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는 단지 가상적인 상황이 아니라 제3차 세계 핵전쟁이 발생할 확률이 매우 높았던 사건이다.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1961년 피그스만 공격과 빈에서 열린 미·소 정상회담이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다. 두 차례 군사·외교적 실패 이후 케네디는 내부 협의 방식을 바꿨다. 피그스만 공격 당시에는 CIA 등 기관별 보고를 통하여 정보를 받고 의사결정을 했던 반면 미사일 위기 시에는 국가안전보장회의 집행위원회(excom)를 구성해 관계 부서의 장·차관급 인사, 소련에 근무했던 대사, 반대파인 공화당 인사 등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전문가들이 참여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고 여러 대응방안을 논의한 후 대통령이 결정하는 과정을 밟았다.

케네디는 피그스만 공격 때 실패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삼아 군부가 제안한 강경한 군사 조치 대신 해상 봉쇄 방안과 외교적 협상안을 병행하는 방안을 우선 채택하고 이 방안이 효과가 없을 경우 군사적 조치를 검토하는 수순을 택했다. 또 소련과의 협의를 위해 공식 외교 채널이 아니라 로버트 케네디 법무부 장관과 도브리닌 미국 주재 소련 대사 간의 막후 채널을 활용했는데, 이 채널이 긴박하게 작동하면서 효과를 발휘했다. 그 결과 핵전쟁 위험에까지 이르렀던 미사일 위기가 마지막 순간에 타결됐으며, 이후 미·소 간에 핫라인이 상설 구축돼 제한적 핵실험 금지 조약 체결에까지 이르게 됐다.

케네디는 소련과의 핵전쟁 위기를 해소했지만, 국내에서는 1950년대 이후 가열돼오던 흑백 갈등이 점차 표면화되면서 또 다른 위기를 맞게 됐다. 그는 1960년 대선에서 흑인들의 지원에 힘입어 불과 4만6000여 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됐으나 흑인들이 염원했던 인종차별 철폐를 백인 계층의 격렬한 반대로 추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내게 꿈이 있다(I have a dream)’는 연설로 유명한 마틴 루서 킹 목사를 위시한 흑인 그룹들이 케네디에 대한 지지 철회 움직임을 보이면서 재선 가도에 빨간불이 켜졌다.

국가 정책이 측근 중심으로 결정되면 곤란


▎어린 딸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존 F. 케네디, 재클린 케네디 부부.
케네디는 흑인 시위가 더욱 격화되고 흑백 분열이 가속화되자 인종차별 문제를 더는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 흑인에게 가해지는 차별을 폐지하고 모든 미국인에게 동등한 권리와 기회가 주어질 수 있는 민권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이 법안은 링컨의 노예해방 이후에도 지속해온 흑인에 대한 불평등과 차별을 해소하는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케네디는 백인 주도 세력의 반대 등 버거운 상황에 맞서 용기를 가지고 단안을 내려 민권법안을 제출했으며, 의회가 정파 및 피부 색깔과 관계없이 지지해달라고 강하게 요청했다. 이 법안은 케네디의 피살로 존슨 대통령 시절에 의회에서 통과됐지만, 케네디의 주요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케네디가 좋아했던 단어는 '용기'였다. 케네디의 용기는 국가에 대한 헌신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허리 척추병으로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됐지만, 해군에 자원 입대했으며, 2차 대전이 발발하자 또다시 자원해 참전했다. 솔로몬군도 해역에서 자신이 탄 소형함선이 일본 구축함 때문에 두 동강이 나 험한 바다에서 부상당한 동료를 등에 지고 4시간을 수영해 살아남았다. 또한 해군 장교로서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동료와 국가에 대한 책무를 다하였으며, 후에 대통령으로서 국가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희생한 군인을 세심하게 배려했다. 소련과의 미사일 위기가 종식된 마지막 날인 1962년 10월 28일 저녁, 모든 사람이 기쁨에 들떠 있을 때 케네디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쿠바 정찰 업무를 수행하다가 피격돼 사망한 U-2기 조종사 루돌프 앤더슨 소령의 미망인에게 자필로 감사의 편지를 썼다. 나라를 지키다가 순직한 천안함 용사들의 유족들이 정부에 섭섭해하는 우리의 현실과 너무나 차이가 있다.

케네디는 국가와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국민에게 책임감을 가지고 노력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국민은 이에 관해 부담을 느낀 것이 아니라 평화봉사단원의 예와 같이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는 데 자부심을 가졌다.

그는 내각을 구성하면서 국무·재무·국방 장관의 선임에 가장 많이 신경을 썼다. 선정 기준은 유능한 사람 여부 그리고 케네디 행정부의 추진 사업에 협력 여부였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 케네디는 자신이 속한 민주당 소속의 딘 러스크 국무장관과 함께 공화당원이었던 딜런 재무장관과 맥나마라 국방부 장관을 정당 성향과 관계없이 임명했다. 나아가 그는 중요 사안의 경우 한편의 의견에만 귀를 기울이기보다 실효적인 방안을 도출하기 위해 첨예한 논쟁을 거치도록 했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건의된 정책을 최종 판단해 채택했다.

지금 우리 정치인들은 국민을 위해 국가가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은 국가가 해야 할 당연한 책무이지만 국민 전체의 생활까지 책임지겠다는 것은 국민 개개인의 책임감이 희석될 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에게 꿈과 미래를 주기보다 빚과 암울함을 주지 않을까 우려된다.

또 어느 나라건 전문적 능력과 경험이 풍부한 사람을 기용하기보다 정치적 측근을 주로 기용해 성공한 대통령은 거의 없다. 그동안 우리의 국가 정책이 측근 중심으로, 획일적으로 결정되고 있는 경향을 유념해 차기 대통령은 내각을 어떻게 구성할지, 정책 결정을 어떻게 할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케네디는 대외 관계에서 상대국과 불편하더라도 솔직히 대화하기 위해 막후 채널을 가동했다. 흐루쇼프는 비선(秘線)을 통한 소통으로 케네디가 군사적 압력보다 외교적인 협상과 상호 타협으로서 쿠바 미사일 위기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으로 확신하게 됐고 이후 진지하게 협상에 임했다. 흐루쇼프는 초기에 케네디를 애송이 지도자로 취급했지만, 쿠바 미사일 협상을 마무리하는 단계에서는 그를 진정한 정치가로 평가하면서 피살된 것을 진심으로 애도했다. 이 사례는 민감한 사안의 경우 우리 입장을 미리 공표한 후 협의하기보다 막후 채널을 통해 관련국과 사전에 협의해 어느 정도 합의가 이뤄진 이후 추진해야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강대국의 정책, 자국 이해에 따라 변할 수 있어

미사일 위기의 성공적인 해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강대국의 행태에 대해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핵위기 협상이 긴박하게 진행되기는 했지만, 관련국인 쿠바와 터키는 소련과 미국으로부터 중간에 아무런 통보를 받지 못했다. 흐루쇼프는 쿠바에 먼저 미사일 기지 건설을 제의했으나 기지를 철수할 때는 모든 결정이 이뤄진 후 쿠바에 통보해 카스트로는 분통을 터트렸다.

케네디 역시 쿠바 내 미사일 기지 철수 조건으로 터키 내 배치된 미사일의 철수를 소련으로부터 요구받고 터키에 사전 통고 없이 수용했다. 2017년 트럼프 대통령이 시리아 내 쿠르드에 대한 지원을 전격적으로 철회했던 경우와 2021년 바이든 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을 일방적으로 철수했던 사례, 그리고 중국이 제기하는 주한미군 철수 주장 등을 볼 때 강대국의 정책은 자국의 이해 및 국제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변할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 안보를 철저하게 지켜야 하는 이유다.

케네디는 민권법안으로 흑인들의 불만을 수습했지만, 그럴수록 미국 남부 백인 보수층의 반감은 더욱 퍼져나갔다. 그는 백인들의 민심을 수습하고 재선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공화당 텃밭인 텍사스주를 방문했다. 1963년 케네디를 반대하는 분위기가 텍사스 전체적으로 감싸고 있었고 암살 위험 가능성도 있다는 정보 보고가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이러한 정보가 현실화됐다. 대통령 차량이 댈러스 시내의 건물을 돌아 서행하는 중에 쿠바·소련에 동조하던 인물인 리 하비 오스왈드가 쏜 탄환이 케네디의 머리와 목 부위를 관통해 저격당한 지 불과 30분 만에 운명했다.

당시 사진을 보면 재클린 여사가 차 뒤편 트렁크로 기어가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것은 총알이 케네디의 후두부를 가격해 두개골과 뇌수가 튀어나온 것을 수습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던 미국 국민은 케네디의 죽음으로 미래가 박탈당하던 기분이었다고 한다. 케네디는 뛰어난 리더십으로 쿠바 미사일 사태와 대규모 흑인 시위 등 갈등과 분열을 화합과 평화의 계기로 전환했을 뿐만 아니라 국민에게 용기와 자신감, 그리고 꿈과 나은 미래를 선사하고 떠났다.

케네디 기념관에서 들었던 그의 목소리는 아직도 필자의 마음에 잔잔한 울림으로 남아 있다. 국가의 운명이 지도자에 달려 있음을 새삼 느끼면서 2022년 우리의 대선을 생각해본다.

※ 조윤수 - 미국·러시아·독일·싱가포르·쿠웨이트·터키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했다. 2017년 주(駐)터키 대사를 마지막으로 37년간의 외교관 생활을 마치고, 현재는 한국유라시아문명연구회 이사장, 부산외국어대 초빙교수로 외교의 경험을 나누고 있다. [독일 통일 30년, 독일의 과거에서 한국의 미래를 본다] [대사와 함께 떠나는 소아시아 역사문화산책] 등 근무한 국가의 모습과 주요 국제 사안을 책으로 엮었다. 현재 [오스만 제국의 영광과 쇠락, 터키 공화국의 자화상] [중앙유라시아에서 본 새로운 역사흐름]이라는 책을 준비하고 있다.

202201호 (202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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