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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재 전문기자의 레전드를 찾아서(35)] 파란만장한 삶 겪은 ‘전설의 돌주먹’ 박종팔 

“인생에선 한 방은 없더라… 마지막 3라운드를 잘 살아야” 

정준희 기자
‘동양인은 어렵다’ 통설 뒤집고 중량급 슈퍼미들급서 두 차례 세계 챔프
돈·명예 얻었지만 사기 당해 신용불량자 나락, 현재 부인 만나 극적 재기


▎경기도 남양주시 불암산 자락에 있는 박종팔 관장의 전원주택. 볕이 화사하게 들어와 박 관장의 표정이 더욱 편안하게 보인다.
1980년대는 한국 복싱의 전성기였다. 그 80년대를 뚜벅뚜벅 걸어가며 선명한 족적을 남긴 중량급 스타가 있었으니 그가 ‘돌주먹’ 박종팔이다.

박종팔은 ‘동양 선수는 체격과 체력의 열세 때문에 중량급 세계 정상은 어렵다’는 통설을 뒤집으며 WBA(세계복싱협회)와 IBF(국제복싱연맹) 슈퍼미들급 세계챔피언을 지냈다. 뛰어난 테크닉과 강력한 펀치를 겸비한 박종팔은 52전 46승(39KO) 5패 1무의 전적을 남겼다. 그의 레프트 보디에 이은 라이트 훅을 맞고 고목처럼 쓰러진 선수가 한둘이 아니었다. 박종팔 본인도 다섯 번의 패배 중 네 번을 KO로 질 만큼 화끈한 복싱을 했다.

돈과 명예를 거머쥐고 인생 1라운드를 마친 박종팔은 나락의 2라운드를 경험한다. 믿었던 지인들로부터 숱하게 사기를 당하며 재산을 털어먹고 신용불량자로 전락한 것이다. 부인까지 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살 소망을 잃은 박종팔은 죽을 자리만 찾아다녔다. 그 와중에 천사 같은 현재 부인 이정희 씨를 만나 극적인 3라운드 반전을 이뤄냈다.

불암산이 병풍처럼 둘러선 경기도 남양주시 전원주택에서 챔피언은 부인과 함께 평안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각종 야채와 약초를 키우고 개도 몇 마리 데리고 산다. 미니 링과 샌드백을 설치해 권투를 배우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와서 ‘한 수 지도’를 받을 수 있다.

강펀치는 힘 아닌 타이밍에서 나와


▎1984년 7월 22일 미국의 머리 서덜랜드를 11회 KO로 누르고 IBF 슈퍼미들급 타이틀을 따내는 박종팔.
전원주택에 살고 계신 모습이 무척 편안해 보이네요.

“제가 반(半) 자연인입니다. 해 뜨면 일어나고 해 지면 잠자고요. 겨울에는 밤이 길고 여름에는 밤이 짧죠. 코로나19로 인해 다른 데 못 가는 권투 선후배, 지인들이 많이 찾아와서 늘 북적대죠. 제 아내가 참 고마운 게, 사람들 많이 오면 싫증이 날 만도 한데 늘 편안하게 대해 주니까 더 오는 것 같아요. 여기 땅이 넓어서 약재나 나물을 많이 심어요. 우리도 뜯어먹고 사람들도 와서 뜯어갈 수 있게 해 줍니다. 일종의 건강 힐링센터 같은 느낌이죠.”

‘이규원 관장의 감성복싱’이라는 유튜브 프로그램을 여기서 찍던데요.

“이규원 관장은 친구의 아들인데 예의가 바르고 권투를 널리 알리려는 열정이 참 보기 좋았어요. 제가 해본 건 다 잘 안됐고 권투 하나만 성공했잖아요. 권투를 사랑하고 기술을 배우려고 하는 후배가 찾아오면 저도 반갑고 옛날로 돌아가는 기분이 들어서 참 재밌어요. 내가 후배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있구나 싶고, 후배들도 좋아합니다.”

관장님의 돌주먹 강펀치는 어디서 나옵니까?

“사람들은 권투를 힘으로 때리는 것이고 강펀치도 힘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나도 신인 땐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권투를 했죠. 하다 보니 노하우랄까 기술이 늘고, 그걸 업그레이드하게 되더라고요. 힘으로 때리면 상대가 안 떨어지니까 어떻게 때리면 떨어질까를 연구했죠. 저는 일반 선수와 달리 좀 특이하게 운동을 했어요. 사범들이 미트를 대 주면서 하나를 가르쳐 주면 수십 가지로 변형을 해서 내 것으로 만들었지요. 상대를 눕히려면 들어오는 걸 받아쳐야 해요. 그래야 내가 힘도 안 들고. 그게 타이밍인데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과 권투인이 생각하는 게 다릅니다. 순간적으로 펀치를 내야 하는데 그게 반 박자 빨라야 한다는 거죠.”

관장님의 명품 레프트 보디는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권투는 간단해요. 펀치는 잽, 스트레이트, 어퍼, 훅 네 가지 뿐입니다. 그런데 상대가 10명이면 10명이 다 달라요. 열 가지 이상을 자기 걸로 만들어 놓고 변형을 해야 합니다. 나는 원래 레프트 보디보다는 라이트 훅이 특기였어요. 그런데 훅이 통하는 상대가 있고 아닌 선수가 있잖아요. 상대 폼만 딱 보면 턱이 약한지 복부가 약한지를 알 수 있어요. 한 가지를 오래 하다 보면 도가 튼다 하잖아요.”

그러면 상대에 따라 어떻게 공략을 하나요?

“턱이 약한 상대에게 안면 공격을 하려 하면 그쪽 방어를 철저히 하겠죠. 내가 상대의 약점을 알고 있다는 걸 들키면 안 돼요. 턱이 약하다면 복부를 좀 때려놔야 가드가 내려가서 안면에 틈이 생깁니다. 반면에 복부가 약한 상대라면 안면을 많이 공격하면 복부가 비게 되죠. 그 순간을 포착해 한 방을 노리는 겁니다.”

다섯 번 졌는데 네 번을 KO패 했어요. 맷집이 약하다는 평가가 있었는데요.

“가만 생각해 보니 진 게임은 다 중량 실패로 스스로 무너졌더라고요. 상대를 아래로 보고 ‘에이 어떻게 되겠지’ 하면서 시간을 허비했고 그로 인해 중량 조절에 실패하면서 무너졌던 거였습니다. 저는 기본으로 12kg 감량하고 경기에 나섰어요. 일반인은 상상도 못 할 일이죠. 한국 타이틀매치는 한 달 여유가 있고, 동양 타이틀은 두 달, 세계 타이틀은 3개월 준비할 수 있거든요. 젊었을 때 옆으로 좀 새다 보면 날짜가 빨리 와 버리고, 준비가 제대로 못 돼서 실패한 경우가 있었죠.”

KO로 이긴 경기에서도 다운 당한 적이 많았죠?

“운동을 열심히 했고 체중 감량을 잘했다면 맞고 떨어져도(다운이 돼도) 바로 회복이 됩니다. 그런데 무리하게 체중을 뺐다든가 하면 회복이 안 돼요. 그 차이지요. 매에 장사는 없어요. 맞으면 떨어지게 돼 있고, 반대로 상대를 잘 때리면 아무리 맷집이 좋아도 KO 시킬 수 있어요. 결국 문제는 체중 감량에 있는 거죠.”

헤글러와 맞대결 무산된 게 가장 아쉬워


▎박종팔과 나경민(오른쪽)은 중량급 라이벌로서 화끈한 승부를 펼쳤다. 1차전은 나경민이 7라운드 KO로, 2차전은 박종팔이 4라운드 KO로 이겼다.
그래서인지 다운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셨네요.

“큰 거 하나 맞은 것일 뿐이죠. 큰 거 하나 때리면 되는 겁니다. 한 라운드에 두 번 다운 당했다면 아무리 상대를 많이 때려도 그 라운드는 못 이깁니다. 그러면 그냥 넘겨요. 그다음 라운드 이기면 같아지는 겁니다. 다운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말라 이거지요. 하다 보면 여유라는 게 생깁니다. 휴식 시간에 세컨드(코치)가 막 얘기하고 선수는 고개는 끄덕끄덕 하지만 사실 하나도 안 들려요. 세컨드 말이 들리고 관중도 보이는 게 내 경우에는 동양 타이틀 7,8차 방어전 넘어갈 때쯤이었어요. 그 전에는 링에 오르면 ‘와, 와’ 소리는 들리는데 관중이 전혀 안 보이고 상대밖에는 안 보여요. 그 정도로 긴장한다는 얘기죠.”

라이벌 나경민과는 KO로 1승1패를 주고받았는데요. 첫 번째 맞대결에서 KO패 하고는 한 달을 밖에 나가지도 못했다면서요?

“자격지심이죠. 괜히 모르는 사람도 나한테 욕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이겼을 때는 떳떳한데 지면 고개를 못 들 정도가 되는데 이상하게 사람들이 더 잘 알아봐요. ‘종팔이 저 새끼 지랄하고 돌아다닐 때부터 알아봤어’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내가 운동을 좀 덜 하긴 했지만, 그날 운에 따라서 한 방 맞을 수도 있는데 자격지심 때문에 밖에 나갈 수도 없고, 운동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도 들더라고요.”

두 차례나 일방적으로 패한 상대가 오벨메히야스였죠.

“첫 대결은 베네수엘라 가서 했는데 정보가 부족해서 고지대가 뭔지도 몰랐어요. 촌놈이 비행기 타고 LA까지 가는 것도 힘든데 거기서 또 9~10시간 더 비행기를 타야 했지요. 이상하게 운동을 해도 운동한 것 같지가 않고 더위 먹은 것처럼 비리비리해지는 겁니다. 상대를 때리면 꽂히는 맛이 나야 하는데 주먹이 밀리는 느낌이 들었으니 그냥 헤매다가 내려온 거죠. 두 번째 대결에서는 6라운드에 버팅으로 앞니 5개가 나갔어요. 권투 하면서 그렇게 큰 부상은 처음이었는데 그냥 KO만 당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버텼지요.”

그런 오벨메히야스를 가볍게 KO로 누를 정도로 강했던 마빈 헤글러와 붙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내가 WBA 슈퍼미들급 랭킹 1위였을 때 헤글러의 다음 상대로 뉴욕까지 초청을 받아서 갔어요. 대전이 성사 안 됐던 이유가 내가 동양권이다 보니 우물 안 개구리다, 흥행이 안 된다고 본 거죠. 내가 유럽이나 남미 선수와 안 싸워봤으니까. 헤글러가 왼손잡이인데 내가 왼손잡이랑 하면 잘해요. 정말 한번 해볼 만한 게임이었을 텐데 그게 가장 아쉽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약한 선수는 우습게 보지만 센 상대한테는 죽기 살기로 붙는 근성이 있거든요. 박종팔-헤글러 전이 성사됐으면 정말 볼만 했을 겁니다.”

백인철과의 프로 마지막 경기는 지금 봐도 처절할 정도의 난타전 끝에 KO패 했는데요.

“결과적으로 그게 마지막 시합이 됐어요. 인철이가 잘 나갔던 선수지만 내가 보기엔 한 수 아래여서 소홀하게 생각했지요. 한번 맞고 떨어져 봐야 정신을 차리는 게 사람이죠(웃음). 다음에 붙으면 확실하게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인철이가 받아주지를 않았겠죠. 사실 제 나이가 매스컴에 나오는 것보다 좀 많아요. 권투선수로서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해서 미련 없이 글러브를 벗었죠.”

슈퍼미들급이라면 세계챔피언이었던 김기수·유제두 선수의 체급이었던 주니어미들급보다 두 체급이나 높은데요. 동양 선수는 미들급 이상은 어렵다는 통념이 있지 않았습니까?

“맞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저도 안 된다고 했어요. 동양권은 하체는 짧고 상체는 긴데 팔(리치)은 짧아요. 서양은 하체는 길고 상체는 짧은데 팔은 길어요. 서양 선수가 잽을 던지면 전라도 말로 짝대기가 쑤시는 것 같아요. 동양권보다 5~10㎝ 길다 보니 피했다 싶은데 맞는 겁니다. 슈퍼미들급은 서양인들 평균 체중이라서 그 체급 선수들은 몸놀림도 가벼워요. 우리는 그 정도면 거의 헤비급이죠. 그 모든 핸디캡을 극복하려니 더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지요.”

박종팔은 열에 아홉 번은 KO로 이기는 화끈한 복싱으로 인기가 높았다. 80년대 중반 세계 타이틀매치 한 경기에 5000만원이 넘는 파이트 머니를 받았다. 서울 변두리 땅값이 평당 1만원 하던 시절, 그는 돈을 받는 족족 땅을 샀다. 은퇴하고 계산해 보니 29군데 땅 시가만 90억원이 넘었다. 그 돈을 그는 친구·선후배들에게 떼이고 사기당하면서 몽땅 날려버렸다. 신용불량자가 됐고, 우울증이 왔고, 부인을 폐암으로 먼저 보냈다. 떨어져 죽을 바위를 찾아 수락산을 헤매던 그는 부인이 된 이정희 씨를 만나 극적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타이틀매치 잡히면 땅 계약부터 해


▎2003년 친구인 이효필과 격투기 이벤트 매치를 벌이기 위해 발차기 연습을 하고 있는 박종팔.
당시 엄청난 인기를 누렸고 돈도 많이 버셨죠?

“당시 우리나라 경기가 최고 좋은 시절이었죠. 파이트머니는 물론이고 생기는 것도 많았어요. 지인들께 인사드리러 가면 봉투에 기본 30~50만원씩 넣어서 주셨어요. 용돈 받으러 가는 것 같아서 미안해서 못 갈 정도였죠. 그러면 그분들이 ‘좀 크니까 인사하러 오지도 않는다’며 오해도 했어요.”

그렇게 번 돈으로 어떻게 재테크를 하셨나요?


▎전 재산을 사기로 날리고 죽을 자리만 찾다가 만난 지금의 부인 이정희씨를 박종팔 관장은 ‘천사’라고 부른다.
“나는 동양 타이틀매치 할 때부터 개런티가 다른 선수보다 높았어요. 거기다 회사에서 봉급 외에 훈련비를 별도로 주죠, 나가면 돈 생기죠. 동양 타이틀매치 10차 방어전 이후부터는 시합이 잡히면 땅 먼저 계약하고 올 정도였어요. 처음 산 부동산이 충남 당진의 땅 1만 평이었어요. 당시 3000만원인가 줬을 겁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다면 얼마일까요? 말하면 뭐해, 속 터져불지 하하. 당진서부터 올라와서 경기도 화성-수원-광명-안산을 거쳐 서울 미아리까지…. 그 땅들을 지켰으면 지금 종팔이는 없죠. 사람은 그릇이 있는데 너무 넘치게 가지면 흘러 도망가 버리는 것 같아요.”

어쩌다 그 많던 돈이 도망가 버렸을까요?

“한번 잘못되다 보니까 브레이크가 안 듣습디다. 어떤 선배한테 1억 투자해서 안 되면 그만둬야 하는데 ‘야, 3억만 더 투자해라. 6개월 안에 5억 만들어 줄게’ 그러면 그 말 홀라당 믿고 땅 팔아서 날려버리고 이런 식이었죠. 내가 사람 말을 워낙 잘 믿는 이유가 운동하면서 내 주위에는 나쁜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인식이 생겨버린 겁니다. 처음 본 사람도 하다못해 음료수라도 사 주지, 밥 사주고 봉투 주지. 사회가 나를 위해서 있는 거 같았어요. 아, 사람이 그렇게 된다니까요. 근데 내 돈 갖고 간 사람치고 잘 되는 놈 하나도 못 봤어요. 결론은 믿을 놈 하나 없다는 거지요. 진흙탕에 빠지면 건져주는 게 아니라 한 번 더 밟아불더만요.”

한때 극단적인 생각도 하셨다면서요?

“그런 상황에서 아내마저 폐암 선고를 받고, 애들은 아빠가 잘못해서 엄마 돌아가시게 만들었다는 말을 하니 살 이유가 없었지요. 친구 김득구가 가는 걸 보고 애들만큼은 고생시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땅을 살 때마다 마누라 명의로 했는데 그거 할 때마다 많이 싸웠거든요. 어떻게 하면 한 방에 깔끔하게 죽을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수락산을 뒤지고 다녔어요. 비나 눈이 오는 날 산에 올라가면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나’ 싶어서 기가 막혔어요. 다른 사람은 망해도 나는 안 망할 줄 알았는데, 박종팔이를 뒤통수를 치고 사기를 치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 했죠.”

그러다가 부인을 만나셨네요.

“인생 역전이죠. 저런 분은 없다고 보면 되죠. 지인이 선 보라 했을 때 ‘죽을 생각만 하고 있는데 선을 봐서 뭐해’ 싶다가 ‘그래 죽을 때 죽더라도 한번 만나나 보자’ 해서 만났죠. 근데 희한하게 엄마 같은 포근함이 들고 ‘저 사람이면 날 붙들어 줄 수 있겠다’ 싶었어요. 당시 3개 은행의 신용불량자였고, 눈꺼풀은 떨리고, 제대로 먹지도 못해 얼굴은 시커멨는데 ‘애들 먹을 건 다 해놨고 둘만 살면 된다’고 거짓말을 했죠. 저 사람이 내 모든 걸 다 받아줘서 제3의 인생을 살 수 있게 됐습니다.”

‘비운의 복서’ 고 김득구와 절친


▎레이 맨시니에게 KO패 한 뒤 숨진 김득구의 장례식 모습. 영정 옆에서 관을 든 사람이 박종팔이다.
박종팔 관장은 ‘비운의 복서’ 고(故) 김득구와 절친이었다. 둘 다 ‘권투로 인생 역전을 하겠다’는 꿈 하나만 갖고 시골서 올라왔다. 서울 동아체육관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펀치를 연마했다. 1982년 11월 13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WBA라이트급 타이틀매치가 열렸다. 챔피언 레이 맨시니(미국)와 맞선 한국의 무명 복서 김득구는 13회까지 처절한 사투를 벌였다. 그러나 14회 맨시니의 강력한 펀치를 맞고 KO당했고,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나흘 동안 뇌사 상태에 빠져 있던 김득구는 가족 동의로 장기를 기증하고 이국땅에서 숨을 거뒀다. 복싱계는 충격에 빠졌다. 세계 타이틀매치가 3분 15회전에서 12회전으로 줄었고, 스탠딩 다운 등 선수 보호장치가 강화됐다.

김득구 선수와는 공통점이 많아 친해졌다면서요.

“내가 58년 개띠인데 나보다 한 살 많다고 해서 친구처럼 지내자고 했지요. 나도 열다섯에 어머니 돌아가시고 새엄마 밑에 있기 싫어 전남 무안에서 무작정 상경했는데, 득구도 아버지 죽고 새아버지 밑에서 고생하다가 강원도 고성에서 올라왔잖아요. 잠은 체육관 마룻바닥에서 잤는데 빈대가 어찌나 많은지. 코피가 많이 나고 땀도 많이 흘려서 빈대 천국이었죠. 체육관 바닥에 구멍이 숭숭 나 있어 빈대가 그리로 들락날락했죠. 빈대란 놈이 얼마나 영리한지 천장에서 밑으로 떨어져 사람을 물기도 했어요.”

김득구는 어떤 선수였나요.

“당시 복싱이 한창 인기 있던 때라 세계 타이틀매치 하고 나면 하루 10~20명씩 복싱 배우겠다고 찾아왔어요. 체육관이 좁아서 잽 한번 뻗을 틈도 없을 정도였죠. 몸뚱아리 맨주먹 하나 믿고 올라온 친구들이니 정신력이 오죽했겠어요. 그중에서도 득구는 어떡하든지 권투로 일어서 보겠다는 집념이 대단했어요. 미쳤다고 해야 하나. 그러면서도 쇼맨십과 리더십이 강하고 노래도 잘 부르는 팔방미인이었죠. 나는 낯을 많이 가리고 남 앞에서 말도 제대로 못 했어요.”

김득구가 “벨트 못 따면 죽어서 돌아오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면서요.

“맨시니하고 자기하고 둘 중에 하나는 죽을 거라는 말을 했어요. 성냥갑으로 조그만 관 모양을 만들어서 갖고 다니고 미국 갈 때도 가방에 넣어서 갔어요. 지금 득구를 만나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어요. ‘득구야, 정말 잘 싸웠다. 네가 자랑스럽다. 그런데 벨트 못 따면 죽어서 돌아오겠다는 약속은 왜 지켰냐’라고요. 사람이 부정적인 말을 하면 꼭 그대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니 힘들어도 ‘힘들어 죽겠다’는 말보다는 ‘괜찮아. 할 수 있어’라는 긍정의 말을 많이 해야 해요.”

프로선수가 되려면 권투에만 미쳐야


▎박 관장은 뒷마당에 미니 링과 샌드백을 설치해 복싱을 배우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와서 한 수 익히고 갈 수 있게 했다.
요즘 복싱 인기가 예전 같지 않죠.

“복싱 중계를 안 해 주잖아요. 스타가 없으니 중계가 안 붙고, 그러니 스폰서도 줄고, 관중도 주는 악순환이 되는 거죠. 솔직히 후배들한테 미안하지만 요즘 복서들은 정신력에서 뒤지고 운동량도 적어요. 우리 세대처럼 운동시키면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해요. 다 도망가 버리지. 어쨌든 권투인이 하나로 뭉쳐야 하고 협회가 난립하면 안 됩니다. 지금은 권투 체육관이나 권투 배우시는 분은 더 많아졌어요. 스타가 나오면 다시 팬들이 모일 겁니다.”

복싱을 배우려는 젊은이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

“건강과 다이어트에 복싱만 한 게 없어요. 그렇게 즐기세요. 그게 아니라 프로선수가 되겠다면 복싱을 천직으로 알고 ‘이거 아니면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하고 권투에만 미쳐야 돼요. 나도 득구도 그렇게 했어요. 그게 진정한 헝그리 정신이죠. 나한테 기술을 배우러 온다면 얼마든지 도와줄 겁니다.”

박종팔 관장은 군부대나 학교 등에서 특강 초청을 받는다. 주제는 ‘인생에 한 방은 없다’. 그게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물었다.

“권투에는 역전 KO가 있어요. 한 방이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나한테는 권투같이 쉬운 게 없어요. 인생에는 한 방이 없어요. 요즘은 증권이나 코인 해서 한 방에 번 사람도 있긴 하지만 그로 인해 울고 있는 사람이 더 많죠. 인생은 3라운드라고 생각해요. 난 1라운드에서 부와 명예를 다 가졌고, 2라운드에서 탈탈 털렸어요. 그래도 3라운드가 있잖아요. 좋은 일은 항상 되돌아옵니다. 나쁜 생각 않고 남 등치지 않고 열심히 살다 보면 주위에 꼭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될 겁니다.”

인터뷰를 마칠 즈음에 한 청년이 찾아왔다. 경남 거제 출신이라는 그는 전날 주니어미들급 프로 데뷔전을 치러 판정승을 했다고 한다. “박종팔 챔프님 기를 받고 기술을 전수받으면 KO승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찾아왔습니다” 하는 그에게 박 관장은 뜨끈한 꼬리곰탕으로 점심 대접을 한 뒤에 원 포인트 레슨을 해 줬다.

박 관장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불암산 자락에 울려 퍼졌다. “인생은 3라운드를 잘 살아야 해요. 허허허.”

※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 중앙SUNDAY에 ‘스포츠 오디세이’ ‘스포츠다큐-죽은 철인의 사회’를 연재하고 있다. 중앙일보 스포츠부장을 역임했고, 2013년 이길용체육기자상을 수상했다. 연세대 국문학과,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에서 공부했고 한국체대에서 스포츠산업경영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튜브 방송국인 중앙UCN의 부사장을 겸하고 있다.

- 사진 정준희 기자 jeong.junhee@joongang.co.kr

202201호 (202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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