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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후보 인물탐구] 위기를 기회로 만든 이재명의 반전 인생 다섯 장면 

“지는 싸움은 안 한다”… 치밀한 현실주의자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가난 벗어나려고 시작한 중졸 검정고시, 무서운 집중력으로 8년 만에 사법고시 합격
‘매 맞지 않으려는’ 사적 욕망을 ‘누구도 매 맞지 않는 사회 건설’ 공적 욕망으로 승화


▎2016년 말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는 이재명이 전국구 정치인으로 발돋움한 계기가 됐다. 2017년 2월 11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15차 탄핵찬성 집회에 문재인 당시 민주당 전 대표와 이재명 성남시장이 나란히 참석했다.
선거철이 되면 너도나도 자신을 ‘서민’으로 한껏 낮춘다.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시장통 좌판에서 어묵을 덥석 무는 장면은 선거운동에 빠지지 않는 오브제다. 그런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이런 공식 루트를 따르지 않는다. 그의 인생 자체가 ‘서민’이고 ‘빈민’이었기 때문이다. 소년 노동자에서 인권변호사, 지방정치인, 대선후보에 이르기까지 누군가는 ‘억세게 운 좋은 사람’이라고 하겠지만, 위기를 반전의 동력으로 삼은 건 온전히 그의 능력과 의지의 결과였다. 이 후보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다섯 장면으로 그의 세계관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조명했다.

이재명은 한여름에도 반팔 옷을 입지 못했다. 사정이 있었다. 그의 왼팔은 곧게 펴지지 않는다. 쭉 뻗어보아도 안쪽으로 휘어 있어 어색하다. 열다섯 살 무렵 성남의 야구글로브 제조 공장에서 프레스에 왼팔 손목이 끼어 뼈가 부서졌다. 해고가 두려워 제때 치료받지 못하는 바람에 성장판이 손상됐다. 팔뚝에 있는 뼈 두 개 중 하나가 제대로 자라지 못하면서 팔이 뒤틀렸다. 이재명에게 왼팔은 오랫동안 남에게 감추고 싶은 상처였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는 팔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그의 군색한 과거를 상징하는 콤플렉스였지만, 지금은 굴곡을 딛고 성공신화를 써낸 희망의 상징이 됐다. 굴곡진 팔을 감추지 않듯 그는 가난했던 과거를 애써 미화하려 하지도 않는다. 온라인에 연재한 웹 자서전에서 그는 “내가 어디에 있든 내 뿌리는 그곳이고, 나는 거기서 출발한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여전히 견디기 힘든 고단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또 다른 이재명’들과 자신을 떨어뜨리지 않으려는 의도다.

이 후보가 정치인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건 2010년 성남시장에 당선했을 때부터다. 그 무렵부터 그의 이름 앞에는 ‘소년공 출신’, ‘꼬마 노동자’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그가 어린 시절 겪었던 고단했던 경험은 그의 정책을 이루는 밑바탕이 됐다. 그가 즐겨 말하는 ‘대동세상’, ‘억강부약’과 같은 구호가 그럴싸한 수사에 그치지 않는 이유다.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억눌리고 이를 극복해낸 경험 덕분에 정치인으로서 이재명의 세계관은 치밀하고 탄탄해졌다.

1. ‘홍 대리’가 부러워 시작한 검정고시

경북 안동에서 초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부모님을 따라 성남으로 올라온 ‘소년 이재명’은 중·고등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다. 만 열두 살에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공장에 취직했다. 땜질과 염산을 다루는 위험한 작업을 하고서 손에 쥔 한 달 월급은 쌀 한 가마 값도 안 되는 3000원이었다. 그나마도 떼이기 일쑤였다. 작업반장이 한참 어린 소년공들을 구타하고 가혹행위를 하는 것도 일상적이었다. 독한 화학물질에 오래 노출돼 후각세포가 망가졌다. 지금도 이 후보는 냄새를 잘 맡지 못한다. 열다섯 살 무렵에는 프레스에 팔이 끼는 사고를 당했다. 행여 공장에서 잘릴까봐 말도 못했다.

만약 이 후보가 어릴 적 공장에서 겪은 설움을 부를 축적하는 것으로 보상받으려 했다면, 지금쯤 그는 억척스러운 사업가가 돼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린 시절 주변 사람들의 평가는 총명하고 집요하며, 반항적이면서도 쾌활한 아이였다. 그는 가난을 벗어날 방법으로 돈을 버는 것이 아닌 공부를 택했다.

공부를 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어린 소년 이재명의 마음에 공부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킨 건 그가 다니던 공장의 관리자 ‘홍 대리’였다. 고졸 출신 홍 대리는 공장에서 맞지 않고, 돈도 뜯기지 않고, 점심시간에 자유롭게 공장 밖을 다닐 수 있는 사람이었다. ‘홍 대리처럼 되고 싶었던’ 소년은 석 달 남은 중졸 검정고시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퇴근하면 곧장 학원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소년 이재명은 공부 머리가 있었다. 검정고시 학원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공부 잘한다”는 칭찬을 들었다. 당시 함께 야간 학원에 다녔던 심정운씨는 “재명이는 암기력이 특출났다”고 떠올렸다. “공장이나 똑바로 다니라”는 무뚝뚝한 아버지를 막아 나선 건 어머니였다. 공부를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검정고시를 통과했다. 이 후보 인생의 첫 번째 반전이었다.

그에게 공부에 대한 열망을 일깨워준 ‘홍 대리’는 세상의 위선에 눈을 뜨게 한 계기이기도 했다. ‘높은 학력’ 덕분에 공장의 관리자 위치였던 홍 대리는 ‘줄빠따’와 갈취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약자에게 더 가혹하고 말과 행동이 다른 상급자의 위선을 본 소년공에게 공부해야 할 목적이 바뀌었다. 그의 말대로 ‘저 사람처럼’이 아니라 ‘저런 사람 없는 세상을 위해’ 더 집요하게 책을 파고들었다.

고졸 검정고시도 합격했지만, 그를 가로막는 벽은 높기만 했다. 그를 공장으로 이끈 아버지는 대입 시험을 치르려는 아들의 꿈을 완강히 반대했다. 키가 자랄수록 프레스에 눌린 왼팔은 점점 뒤틀려갔다. 아파오는 몸과 현실의 벽 앞에서 우울감이 깊어졌다. 광주에서 항쟁이 벌어졌던 1980년 5월에 쓴 일기의 한 대목은 당시 이재명의 감정을 보여준다. “아버지에게 학원 보내달라고 해도 직장 안 나간다고 안 보내주고 미칠 노릇이다. 괜히 주먹으로 벽도 쳐보고 머리로 막 받았다. 산다는 사실이 귀찮아진다.”(1980. 5. 16)

열일곱 살 무렵 두 번이나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했다.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없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삶이 무의미하다고 여겼다. 다행히 두 번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운명은 아직 그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공부를 포기한 채 시계공장에 돌아갔지만, 갈증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때마침 본고사가 폐지되고 사지선다형 학력고사가 도입됐다. 암기력이 특출났던 그에게 절호의 찬스였다. 전두환 신군부가 내린 과외금지령에 대한 불만이 커지자 1981년에 사립대학 특별장학금제도가 만들어졌다. 집안 형편이 가난한 우수 학생에게 학비를 면제해주고 장학금 명목으로 생활비까지 주는 제도였다. 실력만 받쳐준다면 돈 들이지 않고도 대학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이재명은 다시 의지를 불태웠다. 극구 반대하던 아버지도 공장을 계속 다니는 조건으로 입시 준비를 허락했다. 학력고사까지 남은 8개월간 이재명은 주경야독으로 고교 3년 교육과정을 섭렵했다. 그에게 남아 있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는 웹 자서전에서 ‘죽으려 했으나 죽지도 못하고 팔은 불구가 됐으니 해볼 수 있는 건 공부밖에 없었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다’고 떠올렸다.

2. 삶을 놓으려는 순간 찾아온 기회


▎1. 이재명 민주당 대선후보의 가족사진. 아랫줄 왼쪽이 이 후보다. 2. 18세 이재명의 대입 학력고사 수험표. / 사진:[나의 소년공 다이어리](이재명, 팬덤북스)
그해 11월 말 치러진 학력고사에서 전국 석차 2000등 안에 포함되는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특별장학생 제도가 있는 중앙대 법대로 진학했다. 매월 장학금 20만원이 나왔다. 공장에서 받았던 월급의 세 배에 달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공부에 대한 집요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장학금을 받는 동안 사법고시를 통과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다. 다만 신군부에 반대하는 민주화 시위에 친구들과 함께하지 못하는 미안함이 컸다. 성공과 사회 부조리에 대한 저항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는 친구에게 약속했다. “지금은 어려워. 하지만 사법고시 붙은 다음에 판검사 안 하고 변호사 돼서 그때 함께할게.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일할 거야.”(이재명 웹 자서전 중)

그는 사법고시 합격 후 판검사 임용 대신 변호사 개업을 선택함으로써 친구에게 한 약속을 지켰다. 그때 약속한 친구 이영진은 이 후보의 변호사 사무실에 합류해 평생의 동지가 됐다. 이씨는 [인간 이재명](김현정·김민정 지음, 아시아)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재명이를 믿었다. 약속 안 지키는 친구들을 무척 경멸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안 할 거면 난 못해, 난 안 해, 틀림없이 이렇게 말했을 친구다.”

당시 일화는 이 후보의 현실주의자적 풍모를 보여준 단면이다. 이 후보 자신도 자신을 “지극한 실용주의자이자 현실주의자”라고 규정한다. “멀리 보이는 대의보다 공장 다니는 여동생의 아픔이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에게 의협심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 후보의 정책은 늘 ‘현실은 정당한가?’에서 출발한다. 기본소득이 그렇고 무상 복지가 그렇다. 삶의 순간마다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사법고시 2차 시험에서 고배를 마신 뒤 고시원에서 각오를 다질 무렵, 창문 밖에서 공부를 방해하는 소음이 들렸다. 창문 밖으로 바로 옆 건축현장에서 부지런히 가설계단을 오르내리며 무거운 벽돌을 나르는 아주머니가 보였다. 자신의 어머니와 형, 동생들을 떠올렸다. ‘아주머니의 임금은 내 하숙비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었다. 12시간 일하는 여동생이 받은 월급도 그랬다. 이것은 정당한가.’

그는 현실의 부조리를 고민할 때는 의협심을 내세웠다. 다만 돌파구를 마련할 때는 지극히 현실적인 실용주의자가 됐다. 이 후보는 자서전에서 “혼자 잘 먹고 잘살자고 여기까지 오지 않았다”고 했다.

한 차례 낙방의 고배를 마신 뒤 1986년 사법고시 1, 2차를 통과했다. 처음 검정고시 자습서를 펼친 이래 꿈에 그리던 인생의 목표 하나가 성취된 순간이었다. 이듬해 사법연수원에 입소해 만난 연수생들은 그가 공장이나 대학에서 만난 이들과 많이 달랐다. 지연과 학연, 집안을 경쟁하듯 내세웠고, 연줄 없는 동료를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연수생 이재명은 일기장에 이렇게 다짐했다. “사회적 위치가 높은 사람보다는 인간적인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사람이 되어야지, 명사나 권력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3. “변호사는 안 굶는다”, 노무현의 한마디


▎1. 대학 시절의 이재명. 중·고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친 그는 교복에 대한 환상이 컸다. 대학 시절에도 교복을 입곤 했다. 2. 인권변호사 시절의 이재명. / 사진:[나의 소년공 다이어리](이재명, 팬덤북스)
1987년은 격랑의 파도가 덮친 해였다.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이어 연세대생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고 쓰러졌다. 대학생뿐만 아니라 회사원까지 거리로 나서 ‘독재타도’, ‘민주쟁취’를 외쳤다. 이재명도 틈틈이 가두시위에 끼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자신과의 약속이자 친구와의 약속, 약자를 위한 변호사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틈나는 대로 연수원 동료들에게 ‘노동자와 함께하는 인권변호사가 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만에 하나 생길지도 모를 변심을 막을 통제장치이자 자기암시였다.

자기 위치에서 현실에 맞는 사회 참여 방법을 고민한 끝에 뜻 맞는 연수생들과 ‘노동법학회’를 만들었다. 정성호 민주당 의원, 문무일 전 검찰총장, 문병호 전 의원이 함께했다. 1988년 7월 ‘2차 사법파동’이 터졌다. 전두환 정권이 임명한 대법원장을 노태우 정권이 유임하려 한 데 대해 사법연수원생들과 전국의 판사 430명이 반대 성명을 냈다. 사법연수원생 185명이 ‘사법부 독립에 관한 우리의 견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초안 작성자는 연수생 이재명이었다. 사법연수생들이 집단적으로 의견을 표명한 것은 사법 역사상 처음이었다. 그동안 가족을 위해 목소리를 아꼈던 청년 이재명이 세상을 향해 낸 첫 외침이기도 했다.

연수원 졸업이 다가오면서 다시 고민에 빠졌다. 그가 받아든 성적은 원한다면 판검사 임용도 가능한 수준이었다. 그의 일기장에 당시 고민의 흔적이 뚜렷하다. “나의 개인적 행복만을 위해 살 것인가, 아니면 세상의 탄압받고 억눌리는 사람들을 위해 내 행복을 조금 포기할 것인가. 돼지와 사람의 차이가 무엇인가.” 이런 고민을 시원하게 날려준 사람이 있었다. 연수원에 강사로 온 선배 변호사였다. 그가 힘줘 말한 한마디에 고민이 비에 씻기듯 사라졌다.

“변호사는 뭘 해도 밥은 안 굶는다!” 노무현 변호사였다. 이 후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자신의 운명을 바꾼 결정적 인물 중 한 명으로 꼽는다. 노무현을 만난 뒤 그의 일기장은 다시 새로운 각오로 채워졌다. “성남은 나의 두 번째 고향이자 다시 태어난 곳이다. 결코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 나는 성남을 새로이 일으킬 것이며 민주화의 기점으로 성장시킬 것이다.”(1988년 5월 12일)

사법연수원을 나와 사무실 개업 자금을 마련하려고 법률구조공단에 들어갔다. 이 모습을 지켜본 조영래 변호사가 개업 자금으로 보태라며 선뜻 500만원을 빌려줬다. 조 변호사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을 창립한 인권변호사의 대부다. 이재명은 조 변호사 사무실에서 변호사 시보로 실무 수습을 했던 인연이 있었다.

스물다섯 살에 성남에 연 변호사 사무실 책상에 ‘민생변론’이라고 쓴 액자를 놨다. 이내 성남공단 노동자들이 그를 찾아왔다.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무수히 많은 ‘어제의 이재명’들이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다. 심리학자 김태형씨는 [2021·2022 이재명론](간디서원, 2021)에서 이재명을 ‘사적욕망이 공적 욕망으로 승화된 정치인’이라고 진단했다. 이 후보는 이런 분석에 동감한다고 했다. “매 맞는 노동자로 살지 않겠다는 사적 욕망이, 그 누구도 매 맞지 않는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공적 욕망으로 발전했다”고 자신을 분석했다.

성남, 용인 지역 대학교에서 시국사건에 연루된 학생들도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한마디로 돈 안 되고 골치 아픈 사건들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내친김에 여주·이천 지역 노동상담소도 열어 노동자들과 어울렸다. 김재기 전 광주·여주·이천노동상담소 간사는 [인간 이재명] 저자들과 인터뷰에서 당시 이재명의 도움을 이렇게 떠올렸다. “사무실을 구할 돈이 부족해 난감할 때 이재명 변호사가 선뜻 보증금 2000만원을 대줬다. 내가 상담소를 떠날 때까지 3년 넘게 매달 월세를 내고도 상근자 세 명의 한 달 활동비에 맞먹는 돈을 줬다.”

1990년대 후반 지방자치가 시작되면서 시민의 요구가 다양해졌다. 시대적 요구에 맞춰 이재명 변호사는 노동운동에서 시민운동으로 활동 반경을 넓혔다. ‘성남시민모임’을 창립해 처음 파고든 백궁·정자지구 용도변경 의혹(일명 ‘분당 파크뷰 특혜사건’)은 기득권 세력을 상대로 한 첫 싸움이었다. 고위공무원과 국정원 간부, 판검사 등 130여 명이 특혜 분양을 받은 대형 비리사건이었다. 의혹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검사 사칭 공동정범으로 몰렸다. 첫 범죄전과였다.

4. 지역 정치에 눈뜬 ‘변방 장수’의 탄생


▎2015년 10월 당시 이재명 성남시장이 청년배당 정책 추진 관련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사회 기득권과의 싸움은 법정에서 법리를 두고 벌이는 싸움과 달랐다. 목적이 정당해도 기득권을 쥔 세력에게서 양보를 얻어내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당연히 정의를 실현할 수단도 달라야 했다. 사회 기득권과의 싸움은 법이 아닌 정치의 영역이었다.

2004년 초 성남시립병원 설립 운동이 시의회의 비협조로 실패한 뒤 그는 시민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보다 현실적인 길을 모색했다. 성남시 인구 4분의 1에 달하는 20여만 명의 서명을 받아 주민발의로 내놓은 성남의료원 설립 조례안이 새누리당이 장악한 시의회에서 단 47초 만에 휴짓조각이 되는 걸 지켜본 뒤였다. 시의원을 향한 거센 항의로 돌아온 건 특수공무집행방해죄와 벌금 500만원이었다.

2006년 처음으로 열린우리당 간판을 달고 성남시장 선거에 도전했다. 전국적으로 열린우리당이 참패한 선거였다. 경기도 시장·군수 당선자 중 열린우리당 소속은 한 명뿐이었다. 변호사 이재명은 2010년 두 번째 도전에 나섰다. ‘시민이 주인인 성남시’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시민들은 그에게 일할 기회를 줬다. 그는 ‘시장 이재명’이 아닌 ‘1호 머슴 이재명’으로 자칭했다.

당장 무너진 재정을 회복하고 복지 예산을 확대했다. 35년간 성남에 살아오면서 만들고 싶었던 성남으로 바꾸기 위한 계획을 차근차근 진행했다. 무상교복, 공공산후조리원 등 시민의 삶의 질과 직결되는 정책은 어떻게든 관철해나갔다. 공장 일과 공부를 병행하던 시절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 사용하던 습관대로 무서운 속도로 정책을 밀어붙였다. 4년의 첫 임기에 공약이행률 96%, 시민 만족도 79.9%로 역대 최고 성적을 달성했다. 이 후보가 [인간 이재명]에서 밝힌 비결은 간단하고 명쾌했다. “실현할 수 있는 공약만 내걸면 됩니다. 한 번 한 약속은 목숨을 걸고 지키면 됩니다.”

2014년 지방선거에서 시민들은 머슴 이재명에게 4년 더 일할 기회를 줬다. 하지만 3대 무상복지정책인 청년배당·무상산후조리원·무상교복에 대해 시의회 다수당인 새누리당은 시 재정을 파탄 낼 포퓰리즘 정책이라고 비난했다. 박근혜 정부도 교부금 삭감과 지자체 권한 축소로 대응했다.

2016년 6월 7일 변방에 머물러 있던 이재명은 청와대 코앞인 광화문 광장에 천막을 치고 단식을 시작했다. 그는 박근혜 정권의 조치가 지방자치를 말살하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단식농성 11일째 민주당 지도부가 책임지고 해결하겠다며 중단을 청했다. 변방 장수가 중앙정치 무대를 움직인 첫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이 터졌다. 광화문은 다시 시민의 광장이 됐다. 이재명도 광화문으로 돌아왔다. 광장을 채운 시민 앞에서 이재명이 마이크를 잡았다. “언제나 역사는 시민의 것이었고, 변방에서 시작되었고, 피 흘리며 싸운 시민의 것이었습니다. (중략) 대한민국헌법을 짓밟은 대통령은 탄핵해야 합니다!” 민주당 안에서도 ‘질서 있는 퇴진’을 논의할 때 그는 탄핵을 외쳤다.

5. 가장 먼저 “박근혜 탄핵”을 외치다


▎이재명 민주당 후보는 “좁아진 둥지에서 살아남기 위해 경쟁하기보다 둥지 자체를 키우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생’이 곧 ‘나’를 위한 것이란 게 이 후보의 지론이다. / 사진:국회 사진기자단
이어진 2017년 대선에서 그는 출마를 선언했다. 비록 당내 경선에서 21.2% 득표에 그쳤지만, 중앙정치 데뷔 무대로는 성공적이었다. 변방 장수가 아닌 ‘다크호스’로 이목의 집중을 받으면서 이듬해 치러진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16년 만에 민주당에 승리를 안겼다.

이 후보의 최대 강점은 ‘유능함’이다. 노동자 변론을 주로 했던 변호사 시절에도 그는 의외로 승률 높은 변호사로 지역 법조계에서 이름을 알렸다. 노동상담소장으로 이 후보와 함께 일했던 대학 동기 이영진씨는 “질 게 분명한 걸 가지고 오는 의뢰인에게 ‘하지 마라, 해도 진다. 시간과 돈만 날린다’고 얘기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기분 나빠 하며 다른 변호사를 찾아가 소송을 한 사람들은 결국 소송비용만 날리고서 후회했다고 한다.

되지 않을 일은 약속하지 않는 이재명 변호사의 성품은 그가 행정가로 변신한 뒤에도 그대로다. 반드시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에 전력투구하는 이 후보의 업무 스타일은 분초를 아껴서 목표를 이뤄야 했던 절박한 경험의 산물이다.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를 하면서 90%가 넘는 공약 이행률을 달성한 비결이기도 하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번 대선에서 그는 ‘이재명은 합니다’라는 슬로건을 들고 나왔다. 경험으로 얻은 노하우와 성과를 바탕으로 한 자신감이 녹아 있다. 그는 ‘대한민국 1호 머슴’으로 일할 5년의 기회를 얻을 수 있을까.

-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202202호 (2022.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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