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북한.국제

Home>월간중앙>정치.사회.북한.국제

[대선후보 인물탐구] 특수부 검사에서 대선후보까지, 윤석열을 만든 시간 

단련된 ‘강골’… 어려운 사람 품는 인정도 깊어 

조규희 월간중앙 기자
스포츠 좋아하고 팝송·춤도 일가견, 세심한 배려로 주변 챙겨
“소신·결단력은 강점이지만 정치는 ‘끝장’ 보면 안 돼” 조언도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지난해 서울 서초구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서 대선 출마 선언을 마친 뒤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사진:국회사진기자단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정계에 입문한 윤석열(62) 국민의힘 대선후보(이하 윤석열). 대선 승리를 향해 전력 질주하는 윤석열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인간적인 면모도 많다. 지금은 환갑 아저씨지만, 소싯적 윤석열은 건강미 넘치는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속정이 깊어 어려운 이들에게 눈길이 자주 가는 통에 ‘오지랖 넓다’는 말도 듣는 데다 춤과 노래 등에도 일가견이 있다. 언뜻언뜻 보이는 윤석열의 성격과 행동에서는 그의 가족인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외할머니의 모습도 엿볼 수 있다. 월간중앙이 윤석열의 주변 인물 등 다각적인 취재를 토대로 그의 발자취를 되돌아봤다.

윤석열은 1960년 12월 18일생이며 1남 1녀 중 장남이다.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대광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어려서부터 유달리 키가 컸다. 덩치가 큰 윤석열은 왜소한 체구로 놀림받던 친구가 있으면 조용히 나서서 말리던 아이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연을 이어온 한 지인은 어린 시절 윤석열을 말수가 적고 남 앞에 나서지 않는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다.

윤석열은 어린 시절 형편 어려운 친구들을 돕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고 한다. 중학교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윤석열은 학교를 마치면 친구들과 함께 운동장에 모여 자주 축구를 했다. 그런데 축구를 마친 뒤 운동장에서 수돗물로 배를 채우는 친구들을 보면 그냥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윤석열은 종종 그런 친구들을 중국집에 데려가 짜장면을 사주곤 했다.

키 크고 말수 적지만 친구 도울 줄 아는 아이


▎윤석열(왼쪽 둘째) 국민의힘 대선후보의 초등학교 졸업식. 친구들에 따르면 윤석열은 키가 크고 말수가 적었지만, 친구들을 배려할 줄 아는 아이로 기억된다. / 사진:윤석열 캠프
배 나오고 퉁퉁한 지금의 모습만 보면 윤석열은 운동에는 젬병일 것 같지만, 여러 지인의 말을 빌려보면 윤석열은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초등학교 1~2학년 시절에는 동대문운동장에서 스케이트를 배웠으며 축구·농구·야구도 잘했다. 전통적 야구 명문인 충암중학교로 전학을 갔을 때, 선수 제의도 받은 바 있다.

윤석열이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던 1979년 한국은 정치·사회적으로 대격변의 시기였다. 서슬 퍼런 시기에 서울대 법대 동아리 ‘형사법학회’ 회원이었던 윤석열은 신군부의 수장인 전두환에게 사형을 구형한다. 구체적 내용은 이렇다. 교내 축제 기간에 형사법학회는 모의형사재판을 기획했다. 재판에서 다룬 사건은 ‘5·18 민주화운동 유혈진압’이다. 모의재판에서 검사를 맡았던 윤석열은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그때는 사복경찰이 대학교 교정을 돌아다니며 불시 검문하던 시절이었다.

‘전두환 사형 구형’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가고 결국 윤석열은 경찰의 수배를 피해 외할머니가 계신 강릉으로 도피한다. 그렇다고 윤석열이 운동권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것은 아니다. 대학 입학 후 ‘국제경제학회’라는 동아리에 가입했는데, 이념서클로 의식화 교육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윤석열은 활발하게 활동하지 않았고 어느 순간부터 나가지 않았다.


▎1. 대학 동기들은 윤석열이 팝송을 부르고 춤도 잘 춰 놀란 기억이 있다고 한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의 대학 시절 사진. 2. 아버지 윤기중 연세대 명예교수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 오른쪽이 소년 윤석열. / 사진:윤석열 캠프
윤석열은 대학시절 지인들에게 ‘잘 놀 줄 아는 친구’로 기억된다. 개강파티에서 당시 유행했던 팝송의 가사와 춤까지 완벽하게 소화했다. ‘덩치 큰’ 윤석열의 또 다른 모습에 동기들이 놀랐다고 한다. 특히 2012년 늦장가를 가던 날 친구들의 축가 요청에 윤석열은 자청해서 축가를 불렀다. 아내 김건희씨를 위해 부른 노래였다고 한다.

당시 젊은이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던 ‘고고장’에서의 일화도 유명하다. 윤석열이 나서서 고고장 미팅을 주선했는데 미팅에 참석한 동기와 상대방이 결혼에 골인했다. 윤석열은 지금도 고고장 미팅 날짜에 당시 참석했던 동기들과 매년 모임을 갖는다.

지인들은 윤석열을 ‘잘 노는 것’에 더해 세심한 배려까지 잊지 않는 캐릭터로 기억한다. 고고장 미팅에서 결혼에 성공한 부부에게 매년 꽃바구니를 선물했다고 한다.

지방 출신의 한 대학 동기는 1990년 1차 사법고시 시험날을 잊지 못한다. “시험장에 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누가 문을 두드리는 거예요.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이상했죠. 문을 열어보니까 석열이가 있더군요. 시험 잘 보려면 속이 든든해야 한다면서 도시락을 주더라고요. 저도 시험 준비하느라 바쁠 텐데, 순간 눈물이 핑 돌았어요. 그날 석열이의 마음 씀씀이는 평생 잊지 못하죠.”[구수한 윤석열]

‘사시 9수’는 윤석열의 트레이드마크다. 그는 대학 4학년 때 사법고시 1차 시험에 합격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2차 시험만 8전 9기인 셈이다. 한 해 한 해 시간이 지날수록 조바심이 났을 법도 한데 대학 지인이 기억하는 윤석열의 오지랖은 상상을 초월한다. 윤석열이 8번째 2차 시험을 앞두고 있던 때로 기억하는 지인은 “한 친구가 맞벌이 부부였는데 아내가 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했다. 아이를 집에 두고 직장에 가야 하는 사정을 알았던 윤석열이 그 집에 찾아가 이틀 동안 아이들의 밥을 챙겨줬다”고 전했다.

윤석열의 인정 많은 모습은 외할머니와 모친 최성자씨의 영향으로 보인다. 윤석열의 외할머니는 18세에 강릉으로 시집와 19세에 남편을 잃었다. 홀로 최성자씨를 키우기 위해 포목장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나중에 관동지방에서 알아주는 포목상으로 성장하고 부를 축적했으나 아낌없이 나눴다. 윤석열의 외할머니는 강릉지역 가난한 영재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고 반세기 이상 관동지방에 선한 영향력을 끼쳤다고 한다. 이런 외할머니 밑에서 자란 최성자씨와 손자 윤석열이 타인에게 베푸는 인정은 뿌리가 깊다고 할 수 있다.

1991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윤석열은 사법연수원 23기인데, 동기로는 박범계 법무부 장관,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강용석 변호사 등이 있다. 1994년 초임 검사 윤석열의 첫 발령지는 대구지방검찰청이었다. 당시 대구지검에는 정상명 전 검찰총장(2005년 11월~2007년 11월)이 부장검사로 있었다. 정 전 총장은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법시험 동기 모임인 ‘8인회’의 한 명이다. 정 전 총장은 윤석열의 늦장가 때 주례를 설 정도로 각별한 사이로, 두 사람의 관계는 이때 시작됐다.

지방 출신 동기 사법시험 날 도시락 챙겨줘


▎대학 동기 중 한 명은 1990년 사법시험 당일 아침에 지방 출신인 자신을 위해 도시락을 준비해 가져온 친구 윤석열을 또렷이 기억한다. 서울대 법대 1학년 시절 MT 단체 사진에서 뒷줄 왼쪽 첫째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다. / 사진:윤석열 캠프
윤석열의 ‘검객’ 기질은 정 전 총장의 영향이 컸다. “진실의 칼 하나로 승부를 걸라”는 정 전 총장의 한마디는 지금도 회자되는 역대 검찰총장 명 퇴임사 중 하나다. 정 전 총장 밑에서 검사가 지녀야 할 기본자세와 수사 실무를 배운 윤석열은 1999년 박희원 경찰정보국장을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했다. 박 국장은 김대중 정부의 실세로서 모든 경찰 정보를 주무르는 핵심인사였다. 당시 경찰청장은 후임 정보국장을 임명하지 않겠다는 등 강공 모드였고, 여권의 외압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럼에도 ‘6년 차’ 검사 윤석열은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박 국장의 자백을 받아냈다.

2001년 부산지방검찰청으로 발령 난 윤석열은 돌연 사표를 던지고 2002년 법무법인 태평양의 변호사가 된다. 10년 차를 향해가던 평검사 윤석열은 조직생활의 외로움과, 이제는 부장검사가 된 대학 동기들을 보며 현실적 어려움을 겪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2003년 광주지방검찰청 검사로 다시 돌아온 윤석열은 잘 벼려진 칼날처럼 사회의 환부를 도려냈다.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한 첫해인 2003년 윤석열은 안대희 당시 대검 중앙수사부장이 지휘하는 수사팀에 합류한다. 노 대통령의 불법 대선자금 수사를 맡아 측근인 안희정 전 충남지사(사건 당시 노무현 후보 선대위 정무팀장)와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을 구속기소했다. 또 대통령의 딸 노정연씨를 외국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기소했다.

2006년에는 사직을 각오하고 1000억원대 비자금 조성과 계열사 공금횡령 등의 혐의로 정몽구 현대차 그룹 회장을 구속했다. 2011년에는 부산저축은행 사건을 맡았고, 이명박 대통령의 형 이상득 전 의원을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구속기소했다.

윤석열은 박근혜 정부 출범 8개월 차인 2013년 10월, 정권을 향해 포문을 연다.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 사건 국정감사에서 윤석열은 당시 조영곤 서울중앙지검장을 겨냥해 “영장 청구와 공소장 변경을 말씀드렸더니 ‘야당 도와줄 일 있냐. 야당이 이것을 가지고 얼마나 정치적으로 이용하겠냐’ 등의 말씀을 하시기에 저는 더는 지검장님 모시고 이 사건을 계속 끌고 나가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고 폭로했다.

국감장에서 벌어진 사상 초유의 ‘항명’ 사태로, 수사 외압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행동이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라는 말로 국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당시 조국 서울대 교수는 자신의 트위터에 “윤석열 검사의 오늘 발언이 두고두고 내 마음에 남을 것 같다”고 썼다.

검사 복귀 후 살아 있는 권력 수사 선봉에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과 박근혜 대통령 비위 의혹 사건을 수사하는 박영수 특검팀이 2016년 12월 21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특검사무실 앞에서 현판식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윤석열 수사팀장, 양재식 특검보, 박충근 특검보, 박영수 특검, 이용복 특검보, 이규철 특검보.
이 일로 정직 징계를 받은 윤석열은 다음 해인 2014년 1월 수원지검 여주지청장에서 대구고검 평검사로 좌천된다. 대구는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이다. 정권과 검찰 수뇌부에 찍힌 윤석열의 유배생활이 시작되었다. 당시에도 윤석열의 곁을 지킨 지인들에 따르면 평소 그와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조차 모른 체하기 일쑤였고 심지어 전화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검사 시절 윤석열의 트레이드마크는 ‘강골’이었다.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법과 원칙에 따라 수사에 임했기 때문이다. 원리·원칙주의자인 윤석열의 모습은 아버지의 영향이 큰 듯하다. 부친인 윤기중 연세대 응용통계학과 명예교수는 제자와 선후배 사이에서 알아주는 원칙주의자다. 윤 교수의 제자 김인규 한림대 경제학과 교수는 언론 인터뷰에서 “윤기중 교수는 박사학위가 없다”며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윤기중 교수가 교수에 임용될 때는 석사 학위만 갖고도 대학교수를 할 수 있던 시절입니다. 그 당시 ‘구제(舊制) 박사’라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는 박사 학위 없는 사람들에게 학위를 주는 제도였습니다. 간단한 논문을 작성해 다른 대학 소속 교수들에게 심사받아 통과하면 (박사) 학위를 주는 일종의 ‘품앗이’였죠. 너나 할 것 없이 이 제도를 이용해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윤 교수는 그걸 거부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학위를 받는 게 무슨 소용이냐’는 게 윤 교수의 논리였죠. 윤기중 교수의 그러한 원칙주의를 아들(윤석열)이 물려받지 않았나 싶어요.”

윤 교수의 자식 교육은 엄하기로 정평이 났다. 그는 대학생이 된 아들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어느 날 윤 교수는 ‘콩서리’를 하고 집에 돌아온 아들을 종아리가 터지도록 때렸다. ‘농부가 얼마나 힘들게 지은 농사인데 재미로 서리하면 되느냐’는 이유에서였다. 윤석열의 강점으로 일컬어지는 ‘원칙·소신·공정’은 아버지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벼랑 끝 검사’… 정권 겨누다 유배, 그리고 복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1월 16일 서울 영등포구 대하빌딩에서 열린 국민의힘 여성지방의원 임명장 수여식에 참석해 발언 뒤 인사를 하고 있다. / 사진:국회사진기자단
2016년 12월 ‘박근혜-최순실 특별검사팀’의 박영수 특별검사가 영입 1호 대상자로 윤석열을 지목하며 그의 유배도 끝난다. 특검에 합류한 윤석열은 “녹슨 칼 다시 벼려 환부 과감히 도려내기를”(이재명 성남시장), “윤석열 특검 수사팀장! 그가 돌아온다. 복수가 아닌 정의의 칼을 들고”(박범계 민주당 의원) 등 더불어민주당 유력 인사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돌아온 윤석열은 삼성 수사를 지휘했다. ‘박근혜-최순실-삼성’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 파악이 특검 수사의 핵심이었다. 윤석열은 국민연금에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 찬성 압력을 넣은 혐의로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을 구속했으며,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일가에 430억원 상당의 뇌물을 공여한 혐의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구속기소했다. 조국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삼성 창업 후 최초의 총수 구속, 특검 수고 많았다. 고질적 정경유착의 뿌리를 끊는 계기가 되길”이라며 윤석열을 칭찬했다.

공정과 적폐청산을 내건 문재인 정부는 2017년 윤석열을 서울중앙지검장에 임명한다. 그는 자신을 좌천시켰던 ‘국정원 댓글 사건’을 파헤쳤다. 여파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거쳐 이명박 전 대통령으로 향했다. 원 전 원장은 이 전 대통령에게 뇌물을 건넨 혐의로 1심과 2심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이 전 대통령도 결국 구속기소됐으며 횡령·뇌물수수 등 혐의로 징역 17년형을 받고 수감 중이다.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 수감시켜 보수 붕괴의 주역이 된 윤석열은 2019년 7월 차기 검찰총장에 내정된다. 전례 없는 파격 대우로, 적폐청산에 이어 검찰개혁의 선봉에 서달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의중이었다. 하지만 한 달 후 조국 법무부장관 임명으로 윤석열은 또다시 살아 있는 권력을 향해 날을 세운다. 윤석열이 총장 취임 뒤 휴가를 간 동안, 조국 법무부 장관 내정자 딸의 입시비리 의혹, 아내 정경심 교수의 사모펀드 의혹, 웅동학원 비리 의혹 등이 터진다.

윤석열은 전격 수사를 결정하며 법무부 장관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동시다발적 압수수색을 벌였다. 아울러 유재수 전 부산경제부시장 감찰 무마 의혹, 송철호 울산시장 관련 선거 개입 의혹, 월성 원전 경제성 조작 의혹 등 정권 핵심 인사에 대한 수사를 단행한다. 평소의 ‘검사 윤석열’의 모습으로 비칠 수 있었지만, 그가 오른 자리와 상징성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청와대가 임명한 검찰총장을 여당이 비난하고 야당이 옹호하는 기묘한 장면이 연출된다.

조국 법무부 장관이 물러나고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임명되면서 윤석열은 문재인 정권과 ‘끝장’을 보게 된다. 추 장관은 임명 직후 검찰 인사를 단행하며 윤석열 사단을 대거 교체했고 검찰총장의 직속 수사를 막으면서 윤석열을 ‘식물총장’으로 만들었다. 사상 초유의 검찰총장 직무정지 명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의 압도적 신임을 받고 검찰총장직에 오른 윤석열이 2년도 지나지 않아 정권 최대의 정적이 된 셈이다.

‘끝장’ 보기보다 양보·포용 필요하다는 지적도

하지만 공정·원칙 등을 훼손하는 듯한 문재인 정부에 실망한 국민은 윤석열을 공정과 소신의 아이콘으로 간주했다. 윤석열은 검찰총장직을 내려놓은 지 석 달 뒤인 2021년 6월 정계 입문을 선언하더니 그로부터 다섯 달 뒤인 11월 제1야당의 대선후보로 선출됐다.

제20대 대통령선거는 3월 9일에 치러진다. 윤석열이 외길검사 인생을 마무리한 지 딱 1년여 만이다. 정치인으로 변신한 지 1년밖에 안 된 윤석열이 자신만의 철학·비전·정책으로 국민의 마음을 흔들 수 있을까.

이 대목에서 윤석열이 삶아온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언제나 묵묵하게 소신대로 행동하는 공직자였다. 하지만 때로는 그 과정에서 벼랑 끝에 몰리는 모습도 자주 목격됐다. 익명을 원한 한 정치 전문가는 “나라를 이끌어갈 대권 후보로서 소신·결단력·추진력 등 윤석열만의 분명한 강점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라며 “다만 정치는 ‘끝장’을 보려 하기보다는 때로는 양보하고 포용하고 이끌어나가야 하는 과정이다. 윤석열이 투표일 전까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는 오롯이 본인의 몫”이라고 말했다.

- 조규희 월간중앙 기자 cho.kyuhee@joongang.co.kr

202202호 (2022.01.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